언젠가 여름 영월 주천강의 지류가 흐르는 무릉도원면의 강가에 차를 세웠던 적이 있다. 물이 참 맑은 곳이다. 오죽하면 무릉도원이라 했을까나. 나무젖가락에 먹을 찍어 그리고 마구 칠을 해서 그렸다. 가끔은 이런 풍의 그림도 그리고 싶어진다. 즐겨주시길...

제자가 남해에 놀러갔는데 보리암에 올라 찍은 사진이다. 예전에 비슷한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다만 계절이 추울 때였는데 이 사진은 여름이다. 감회가 새롭고 여름 바다 풍경이 시원해서 같이 즐기자고 올린다. 

 

한 때 초인이자 신과도 같아보였던 나폴레옹

 

 

“이 시절 나폴레옹은 초인처럼 보였으며 거의 신과도 같았다.”

 

최근에 읽은 책, 영국의 D. H. 로렌스가 쓴 “유럽사 이야기” 중에서 만난 구절이다.

 

잠깐 작가의 말을 통해 그 맥락을 알아보면 이렇다. “1807년 6월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은 프리틀란트에서 나폴레옹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두 나라는 틸지트 강화조약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업적에서 정점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초인처럼 보이고 거의 신과도 같다는 저 표현, 전 유럽의 강대국들을 무려 10년 이상에 걸쳐 연전연승, 붙는 족족 판판이 모조리 부수어놓은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에 대한 당대 유럽인들의 인상일 것이다. 나폴레옹은 무조건 이기고 늘 이기며 어쨌거나 이겨! 하는 생각.

 

 

해는 저물기 전에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법

 

 

하지만 운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 호호당이 그 시절에 만일 살고 있었다면 “아, 이제 나폴레옹의 시대가 저물 때가 가까웠구나!” 하는 혼잣말을 읊조렸을 것이다.

 

사물이 極(극)에 달하면 돌아온다, 사람이 초인처럼 보이고 신처럼 느껴지면 그건 극점을 지나쳤다는 얘기가 된다.

1769년 8월 15일 오전 11시에 태어난 나폴레옹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사주와 운세 

 

 

己丑(기축)년 壬申(임신)월 甲午(갑오)일 己巳(기사) 또는 庚午(경오)시가 된다. 태어난 해의 地支(지지)에 丑土(축토)가 있어 한 점 맑은 기운이 서렸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열해서 甲木(갑목) 일주가 虛(허)하니 60년 순환에 있어 입추는 甲寅(갑인)년이 되고 입춘 바닥은 甲申(갑신)년이 된다.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나폴레옹은 입춘 바닥(1764년)으로부터 5년 뒤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재운의 바닥에 태어났으니 타고 나길 거의 餓鬼(아귀), 즉 엄청난 욕망을 가진 자임을 말해준다.

 

 

욕망이 커야 성취도 크지만 그게 참... 

 

 

욕망이 커야 성취도 크다, 하지만 반대로 볼 것 같으면 채워도 끝내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남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본인은 사는 게 그저 고달프다, 늘 허기가 지니.

 

1794년은 甲寅(갑인)년, 입추의 운, 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 무렵 그는 장군으로 승진했다.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의 ‘듣보잡’ 사내가 프랑스 혁명이란 풍운을 타고 급기야 별을 단 것이다.

 

그리고 1796년 丙辰(병진)년, 한 해로 치면 8월 20일 경 벼가 꽃을 피운 다음 즉시 쌀알을 만들어 매다는 시점인 處暑(처서)의 때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모험가이자 야심가였고 사병들은 허기가 져 있었다. 이에 그들은 배고픈 야수가 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예부대를 사정없이 쳐부수고 무찔렀다. 나폴레옹 신화의 시작이다.

 

1796년 4월에 이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으니 그로부터 15년이 한 철이 될 것이다. 60년 순환을 한 해로 볼 것 같으면 15년은 그것의 1/4, 즉 한 계절이 되니 그렇다. (누구나 60년 순환에 있어 15년, 한 계절 동안 빛난다. 다만 그릇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구나 15년의 세월은 있나니

 

 

1796년 4월부터 1811년 3월까지의 15년이 나폴레옹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811년 3월경에 어떤 일이 있었고 당시 상황은 어떠했을까?

 

황제 나폴레옹은 그 한 해전에 본처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녀와 결혼했다. 이제 완벽한 신분상승을 한 셈이니 1811년 3월 20일에 아들 즉 나폴레옹 2세를 얻었다. 제국의 황위를 이를 황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 무렵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을 유폐해버리고 교황령을 프랑스에 병합시켰으며, 네덜란드와 독일의 함부르크, 이탈리아의 로마 등을 프랑스 제국의 지배하에 두었다. 친형은 스페인의 왕, 동생은 베스트팔렌의 왕을 시켰으니 온 집안이 왕후장상이 되었다. 부하 장수인 뮈라는 나폴리의 왕, 여기에 스위스와 독일의 상당 부분을 라인동맹으로 묶어 프랑스를 지키는 버퍼 존으로 만들었으며 폴란드와 덴마크 등을 사실상 위성국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니 앞서 D. H. 로렌스의 표현처럼 당시 나폴레옹은 초인이나 신과도 같아보였을 것이 당연하다.

 

1811년이 외견상 절정이었으니 바로 한 해로 치면 11월 20일경에 맞이하는 小雪(소설)의 시기였다. 物極必反(물극필반), 이제 반대의 흐름이 시작되는 때가 온 것이다.

 

 

어리석은 가정법

 

 

이럴 땐 만일 나폴레옹이 그 무렵쯤에서 자신의 욕심과 타협을 했었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사실 가장 부질없고 어리석은 질문인 것을 나 호호당은 잘 알고 있다.

 

그쯤에서 멈출 수 있었다면 그건 이미 욕망의 화신 나폴레옹이 아니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른 사람이 될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가 중도 혹은 중용을 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란 게 해답이다. 욕망의 화신은 그 멈출 수 없는 욕망이 좌절되어야만 끝을 본다.

 

1812년 이제 더 이상 눈에 뵈는 것 없이 자만의 극치에 달한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60만 대군을 휘몰아 대거 출병을 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까지 점령하긴 했으나 결국 기아와 추위에 떨다가 대부분의 병력을 다 잃고 비참하게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 나왔다. 그 이후론 급거 내리막길이었다.

 

그러고 나서 9년 뒤인 1821년에 대서양의 절해고도에서 세상을 등졌다. 절정기에 얻었던 아들, 장차 프랑스 제국의 황위를 넘겨주기 위해 어렵게 얻었던 아들 역시 고생 고생하다가 11년 뒤인 1832년, 겨우 21세의 나이로 만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불가능이란 오로지 바보들의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단어이다.”라고 했던 나폴레옹이다. 그런 생각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 이쯤에서 적당하다 싶은 시점에서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고 끝내 좌절로서 삶을 마무리했으니 적절한 결말이라 하겠다.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장자 소요유 편에 나오는 글귀, 이야기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여치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朝菌不知晦朔(조균부지회삭) 蟪蛄不知春秋(혜고부지춘추).

 

세상일이란 세를 타면 이루어지는 것이고 세가 꺾이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인데, 15년간 오로지 상승세를 탔던 나폴레옹은 그 뒤의 세월을 알지 못했기에 “불가능이란 바보들의 사전에서나” 운운했던 것이니 그 역시 큰 눈에서 보면 아침버섯이나 풀숲의 여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겠다.

 

사람들은 묻고자 찾아온다. 저는 언제쯤이면 풀릴 까요, 필까요? 하고.

 

그러면 답해준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당신의 세월이라고, 그러면 반색을 한다. 하지만 토를 달아준다. 그 때가 지나면 그저 잘 마무리하고 몸을 아끼며 살라고. 또는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당신의 세월이었으니 이젠 지나갔다고. 그러면 싫은 기색을 보인다. 그러면 웃으며 얘기해준다. 삶은 언제나 고생이고 고통이라고. 그러니 몸과 마음을 아끼면서 살다가라고.

 

그저 한 때의 호시절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나 호호당이 마음 속으로 간직한 절이 몇 군데 있는데 낙산 홍련암, 여수 향일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지리산의 천은사이다. 최근엔 고찰의 느낌이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극락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나니 계단의 수평이 조금 맞지 않는다. 수정하면 되겠지만 그냥 둔다. 저 계단 올라서 사천왕문을 지나 극락보전이 있고 그 안에 아미타불과 협시보살님들이 계신다. 그리고 왼쪽으로 가면 지리산 신령님이 계신다. 천은사 역시 호남 지방의 절답게 개천을 지나는 다리가 누각으로 되어 있다. 수홍루, 무지개가 드리우는 다리란 뜻이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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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성 여행에서 처음 가본 천태암이다. 산신각에 올라 찍은 사진으로 그렸다. 이런저런 디테일을 날리고 심플하게 그렸다. 앞에 보이는 산이 남쪽 송광사 쪽이다. 오른 쪽으로 주암호가 보이지만 이 그림에서 구도상 빠졌다. 체력을 꽤나 회복한 모양이다, 그리면서 지치지 않았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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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 애기무덤을 밝히던 도깨비불

 

 

장마전선이 좀처럼 북상하지 않더니 밤부터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 남부지방엔 폭우라던데.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도깨비불 생각이 났다. 직접 체험했던 도깨비불 얘기를 좀 해보고픈 마음이 든다.

 

첫 번째 도깨비불은 군 복무 시절이었다. 장마철의 어느 날 밤,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는데 부대 막사 아래 연병장과 헬리콥터 착륙장을 지나 멀리 철책이 있었는데 그 너머 나지막한 산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마치 파도치는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빗속에 온 산이 타오를 것처럼 환했다. 저녁 자유시간이라 온 부대원들이 바깥에 나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겁을 먹는 부대원들도 꽤 많았다. 왜냐면 그 나지막한 산은 온통 애기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 쪽 초소에 나가 야간 경계를 서는 사병들은 꽤나 긴장하곤 했고 또 이런저런 괴소문도 많았는데, 바로 그 애기무덤 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타오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렇지만 나 호호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그러다가 저런 거 그냥 화학현상일 거란 말을 꺼낸 것이 계기가 되어 내기를 걸게 되었다. 가서 도깨비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무서워서 가다가 포기하면 내가 지는 게임이었다. 조건은 내무반 전원이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맥주 4박스와 과자였다. 흥미를 느낀 야간 당직 하사도 어서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날더러 짓궂게 재촉을 했다.

 

 

혼자서 비오는 밤에 애기무덤으로 올라 도깨비불을 채취해보니 

 

 

나 역시 몹시 궁금했던 터라 판초우의를 입고 철모를 쓰고 랜턴을 들고 혹시나 모르니까 대검까지 허리에 차고 비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와 동료사병, 이렇게 두 명이 가기로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겁나기 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던 나는 개의치 않고 혼자 막사를 나섰다.

 

그쪽 철책엔 초소만 하나 있을 뿐 출입문이 없었지만 이른바 ‘개구멍’이 하나 있어서 바깥으로 쉽게 나갈 수 있었다. 일단 초소에 갔더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료가 너무나도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두 시간 동안 지키고 있으려니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내가 찾아가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내기를 하는 바람에 왔다고 이유를 밝히니 너 간도 크다 하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개구멍으로 나가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오를 작정인데 그 친구더러 우리 잠깐 같이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더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휙-하고 젓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서 비 퍼붓는 언덕, 도깨비불 천지인 언덕 위로 끙끙 대며 올라갔다. 워낙 밝아서 랜턴도 사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막사에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까진 대략 800 미터 거리였고 그 거리에서 도깨비불 하나가 거의 농가 한 채 크기였는데 정작 다가갈수록 불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깨비불 앞에 가자 불의 크기는 손바닥 정도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작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형광빛의 조각이었다. 몇 개 집어서 연병장을 가로질러 막사로 돌아오는 도중에 랜턴으로 살펴보니 그건 뼛조각이었다.

 

매장된 아기들의 뼈? 아니면 야생 짐승의 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백 기의 애기무덤이 있는 곳이니 아마도 아기들의 뼈가 유력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그곳에 묻힌 아기들, 태어나서 얼마 살아보지 그 아기들을 생각하니 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환한 내무반 안으로 들어오자 초록으로 빛나던 그 뼛조각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방 사라졌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나는 부대 내에서 간이 큰 사병으로 소문이 났다. 나로선 전혀 무서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훗날에도 나는 귀신 나온다는 흉가가 있으면 혼자 찾아가 밤을 보낸 적도 두어 번 있다. 귀신을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시 만나게 된 비오는 밤의 도깨비불

 

 

이제 두 번째 도깨비불 얘기를 해본다.

 

군 제대 후 동원훈련 때였다. 독수리훈련인가 뭔가 잘 모르겠지만 서울 병력이 졸지에 강원도 인제의 예비사단에 편성되어 훈련을 했다. 야산에 올라 텐트도 치고 낮엔 꽤나 먼 거리의 행군도 했다. 군 복무 중에도 그렇게 심한 훈련은 받아보지 않았는데 이게 웬 고생이냐 했다.

 

그 때는 1984년의 여름철이었다. 장마철은 지났지만 1주일의 훈련 중에 사흘이나 비가 내려서 애를 좀 먹었다. 비가 오면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산길을 걸어가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비닐로 된 우의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철모 쓰고 장비를 차린 상태에서 산길을 걷다 보면 엄청나게 땀을 쏟아야 한다.

 

저녁이 되어 야산 사면에 쳐놓은 군용 A텐트로 돌아오니 마치 집에 돌아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저녁 급식을 마친 직후에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텐트 안은 미리 건초를 잘 깔아놓았고 위치도 좋아서 물이 스며들지 않아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뭐야? 싶어 바깥으로 나가보니 건너편 산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미 군 복무 시절에 도깨비불로 인해 명성을 떨친 바 있었기에 저거 별 거 아니야, 燐光(인광)이야 하면서 잘 알고 있다는 투의 말을 했더니 동료 예비군들의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가서 가져오지요, 그냥 가긴 심심하니 뭘 좀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졸지에 30만원 빵의 게임이 되었다. 아군 30명, 적군 3명, 1인당 만원씩 걸었다. 내가 다녀올 것이니 도깨비불을 가져오면 30만 원 중에서 15만원은 내가 먹는다는 조건이었다. 저편 언덕까지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왕복하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랜턴을 들고 언덕을 올라 도깨비불을 금방 채취해서 돌아왔다. 으레 짐승의 뼈일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 불빛은 초록의 형광 혹은 인관이었지만 가져와서 다 함께 살펴보니 오래된 나무껍질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 조각을 간직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물을 뿌려도 더 이상 그 신비한 초록의 빛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파트 정원에 던져버렸다. 그저 15만원을 벌었을 뿐이다.

 

 

집단이 야지에서 이동하면 사고가 난다.

 

 

여담이지만 연대 규모의 예비군 병력이 야지에서 이동하다 보니 안전사고로 인해 무려 3명의 예비군이 사망했다는 점이다. 당시엔 그 정도 뉴스는 보도되지도 않았다.

 

사망 경위를 보면 허무하다. 훈련을 마치고 땀에 절어서 텐트로 돌아온 예비군이 시원한 개울이 있는 걸 보고 야호-하면서 풍덩 뛰어 들었다가 바로 심장마비로 죽었다. 강원도 인제 계곡의 물은 여름에도 엄청나게 차갑다. 무릎가지 들어가도 견디지 못한다.

 

또 한 명은 행군 중에 지쳐서 지프차에 실려 갔는데 그 지프차가 어쩌다가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그 결과 그 예비군만 튕겨나가서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에 전 예비군이 귀가 교통비로 받은 돈 천원을 박스로 만든 부조함에 넣어 주었다. 예비군이 대략 2천명 정도였으니 2백만 원 정도였을 것인데 당시 1984년으로선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때 배웠다. 장병들이 일정 장소에 머물지 않고 장비와 함께 움직이다 보면 안전사고가 난다는 사실을. 이동 자체가 안전사고를 초래한다는 사실.

 

 

나라에 대한 배신감

 

 

나 호호당은 현역 복무를 했고 동원예비군, 지역예비군, 나중에 민방위까지 착실하게 다 했건만 나중에 그 모든 의무로부터 해제되는 날 국가로부터 감사하다는 쪽지는 물론이고 영화표 한 장도 우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금도 불쾌해하고 괘씸하게 여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가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국가에 그 정도까지 충성을 다했으면 고맙다는 인사치레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요즘엔 도깨비불이 보이질 않으니 

 

 

그런데 요즘엔 비가 내려도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전국 도깨비들이 전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나?

며칠 전 올린 사진, 태안사 입구의 능파각을 수채화로 그린 것이다. 몸이 회복되면서 바로 그렸다. 며칠 전 끙끙 앓을 때  그릴 힘은 없고 그리고는 싶고 해서 힘들어했던 그림이다. 여름의 느낌, 바위를 덮은 이끼를 더 그려넣었다. 기둥의 붉은 색이 다소 선명한 느낌이다. 한 톤 더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즐겨주시길...

곡성, 구례와는 또 다른 아기자기함

 

 

사흘에 걸쳐 전남의 곡성군을 다녀왔다. 다녀온 후 심한 몸살과 영문 모르는 설사로 해서 사흘 동안 ‘오지게’ 아팠다. 이렇게 아팠던 것은 군 복무 중에 크게 앓았던 이후 처음이다.

 

곡성은 처음이다. 그간에 쌍계사 벚꽃 구경 등등을 이유로 구례는 열 차례 이상 지나다녔고 또 머물기도 했지만 바로 인근의 곡성은 처음이다. 그곳으로 안내해 준 고마운 사람의 덕분이다.

 

전부터 짐작하기로 곡성은 섬진강이 굽어 흐르는 마을이니 으레 그 명칭이 曲城(곡성)일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골짜기 谷(곡)의 谷城(곡성)이었다. 조금 아쉽다. 이에 좀 더 알아보니 옛날 통일신라 시절 曲城(곡성)이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성 두보의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그 운치를 그냥 살리지 그랬어! 하는 아쉬움.

 

놀랍게도 곡성은 구례와 경관이 전혀 달랐다. 구례는 지리산 아래 마을이라 스케일이 크다. 남원 고개를 올라 터널을 나와 구례로 내려가는 19번 국도를 달려본 이는 알 것이다. 왼쪽은 구름 두른 노고단이요 오른 쪽은 구례와 곡성을 나누는 산인데 그 가운데 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 정중앙을 약 20킬로미터에 걸쳐 달려 내려가는 드라이빙은 실로 호쾌하다.

 

그런데 곡성은 웅장하지 않다. 드라이빙도 그렇다. 곡성의 두물머리인 압록에서부터 곡성 읍내에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국도를 가다 보면 왼쪽은 산이고 오른 쪽은 섬진강이다. 길이 강을 따라 꺾어지기에 툭 트인 시야를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정취가 있다.

 

땅이 저처럼 다르니 사람들의 성품도 많이 다르리라. 산도 많고 谷(곡)도 많아서 도처에 奇人(기인)들과 異士(이사)들이 터를 잡고 있을 것 같은 느낌. 휙-하고 지나쳐 가면 몰라도 조금 속살을 들여다보고자 할 것 같으면 우선 다소곳하게 처신해야 할 것 같다.

 

 

여행 내내 고생을 했지만

 

 

안내한 양반이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얼마나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돌아다니는지 힘들었다. (2박3일 소주 항주 패키지 여행 같았다.) 그러니 몸살에 설사까지. 그런데 한 가지 수상쩍은 생각은 든다, 최근에 아스트라제네카 맞은 나이든 세대들의 상당수가 몸살과 설사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동리산의 태안사

 

 

아무튼 각설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泰安寺(태안사)였다. 신라 말 불교의 禪宗(선종)이 들어오던 시절 九山禪門(구산선문), 즉 전국 명산에 아홉 군데 선종 사찰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 하나인 桐裡山派(동리산파)가 시작된 절이라 한다. (동리산, 오동나무 울창한 산이라! 이름부터 아취가 있다.)

 

태안사로 들어서는 길은 오른 쪽에 개울을 낀 숲길이었다. 2 킬로미터 정도. 게다가 주지 스님이 비포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정취도 그만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만일 콘크리트 포장을 깔았으면 그저 쩝-했을 것인데. 최근 그나마 빛바랜 古刹(고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호남의 사찰들도 돈을 바르기 시작하면서 그 맛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절 산문 직전에 멋진 절경을 만났다. 개울 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내려가 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누각이 하나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묘하다. 凌波閣(능파각)!

 

 

절 앞에서 절세 미인을 만나게 되니

 

 

저 단어는 삼국지 연의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식, 칠보시를 지었다는 그 이가 아름다운 물의 여신에 빗대어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洛神賦(낙신부)에 나온다는 사실.

 

원문은 陵波微步(능파미보), 羅韈生塵(라선생진), 여신이 파도를 사뿐히 밟으며 걸으니 비단 버선에 살짝 먼지가 일고, 이런 뜻이다. 정말이지 저 洛神賦(낙신부)란 시야말로 중국 문학의 한 절정인데 지면관계상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누각 아래 커다란 바위로 물이 떨어져서 잠시 고였다가 다시 흘러가는 모습, 그 위론 푸른 나무들이 드리우고 있었다. 가히 절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시절의 화가 顧愷之(고개지)는 ‘여사잠도’란 명화를 남겼지만 실은 낙신부의 여신을 그린 洛神賦圖(낙신부도)가 더 유명하다. 조식의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그린 것이고 그 이후 수많은 유명 화가들이 낙신부도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수묵화의 대가인 傅抱石(부포석)이 그린 여인의 그림은 그야말로 고개지로부터 이어지는 중국 여인 인물화의 맥을 잇는 최고봉이라 하겠다. 기가 막힌 솜씨이다.

 

(구글에 가서 “傅抱石, 山鬼”라고 입력해보라, 바로 이미지를 만나실 수 있을 것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아쉽게도 부포석은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수묵화의 대가이지만 지레 겁 먹은 우리 미술계에선 일종의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탓이라 본다.)

 

 

경관 빼어난 천태암

 

 

이어서 곡성군 남단 높은 아미산이란 곳, 알아보니 587 미터라 하는데 정상 바로 밑에 지어놓은 천태암이란 곳을 찾아갔다. 스님 혼자서 그 암자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담력이 여간 두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법명이 큰 大(대)에 두루 周(주), 대주스님이었는데 날카로운 눈매를 감춘 채 연신 싱글벙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훌륭하셨다. 인물이 워낙 좋아서 잠시 생년월일시를 물어보았더니 2020년이 立秋(입추)의 운이었다. 스님에게 장차 크게 활동하시겠네요, 하고 얘기해주었는데 아마도 스님은 입에 발린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겠다.

 

천태암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운해가 피어나고 옅어지고 또 스쳐가고 그 사이로 멀리 보성강과 주암호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보성강은 보성에서 북으로 흘러 내려와 곡성의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도림사, 묘한 얼굴의 부처님과 보살님들

 

 

다음 날 아침 道林寺(도림사)란 고찰을 찾아갔는데 역시 계곡의 개울을 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절은 역시 개울을 끼고 있어야 정취가 있는 법이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협시보살의 얼굴이 일반 사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봐서 연대가 꽤 된 게 아닌가 싶다.

 

 

구례 천은사

 

 

그리고 나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구례의 천은사를 찾아갔다. 泉隱寺(천은사), 숨은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니 얼마나 멋진가!

 

무성한 숲이 개울을 가렸지만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 건너편에 문득 절을 만나게 되니 그곳이야말로 극락정토 아니면 무엇이랴! 苦海(고해)에 지쳐 헤매다 우연히 기대치 않은 곳에서 만나는 극락이란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구례군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저수지를 조성했으니 개울은 절반 이상 사라졌고 게다가 절 입구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깔고 그 앞엔 커다란 주차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泉隱寺(천은사)가 아니라 泉露寺(천로사)가 된 셈이다.

 

돈이 山門(산문)을 넘어서는 것이 대세인 세상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식당도 주차장이 없으면 손님이 찾지 않듯이 절 역시 사정이 그럴 것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어쩔 수 없이 최면을 건다. 저수지와 포장도로, 너른 주차장 모두를 눈앞에서 삭- 제거하고 상상을 한다. 물소리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문득 일주문을 만난다는 식의 상상력. 옛 시절 가수 김태곤의 노랫말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하는 그런 절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생각해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모든 고행의 순례길을 손님 많이 오라고 죄다 아스팔트 포장을 해놓고 세단을 타고 쌩-하고 달려오시지요, 하는 격이니 괴롭다.

 

기독교든 힌두교든 불교든 여타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성지순례란 것은 순례자 스스로 몸으로 지불하는 고생의 크기만큼 무언가 얻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절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최소한 一柱門(일주문) 앞에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당 복전함에 아무리 큰돈을 투하해도 별 소용이 없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해도 부처님은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을 것이란 게 평소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저렴해 보이니? 하면서 말이다.

 

시주하는 돈은 절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정작 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소중한 몸과 간절한 마음인 까닭이다. 다른 종교도 물론이다.

 

이제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 부처님 찾아가느라 기진맥진해서 몸살과 설사를 지불했으니 나름 한껏 바치고 온 셈이다. 필경 이번 곡성 여행은 남아도 많이 남는 장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고, 저 늙은 호호당 놈, 그래도 고생 뭐 빠지게 했으니 내 치부해둘 심산이야! 이렇게 여길 것도 같으니 말이다.

 

오늘 화요일, 이제 몸이 거의 회복되는 것 같다.

2박 3일 일정으로 전남 곡성과 구례를 다녀왔다. 좋은 인연을 만나 덕분에 참으로 좋은 경관들을 볼 수 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커다란 바위 위의 누각은 능파각이라 하니 멋지기도 하고 한편 절의 누각 이름으로는 다소 얄궃은 느낌도 있다. 능파미보라 하면 절세미인의 대명사이니 그렇다. 스님들은 물론 좋은 경치를 두고 미인에 비유했겠지만 色(색)과 空(공)의 항등식이 깨지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깨달은 스님들이야 그 경계를 이미 넘어섰기에 그랬으리라 보지만 말이다. 일정이 다소 무리했는지 다녀온 뒤 일요일까지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설사까지 겹쳐서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그럭저럭 정신이 들고 체력이 회복되고 있다. 이럴 때면 나이를 느낀다. 사실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은 생각 굴뚝 같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기력이 되질 않아 그저 머리 속으로 여러 번 그려봐야 했다. 그림 시뮬레이션! 살살 쓰다 가야할 몸이다. 독자들도 아니 이 양반 왜 글을 올리지 않지? 할 것 같아 이 사진으로 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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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또 책을 만나게 되니

 

 

한 권의 소설은 한 권의 소설로 완결이지만 지식을 다루는 책을 읽다 보면 책 안에서 또 다른 책을 만나게 된다. 아니, 소개받게 된다. 가령 최근 다시 펼쳐보고 있는 “영국 해군지배력의 역사”란 책, 영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참조하거나 인용한 책들을 널리 소개하고 있다. 으레 학자들의 책이란 게 다 그렇지만 그러다 보면 만나보고 픈 책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또 다시 그 책을 찾아 나서게 되기도 한다. 폴 케네디란 사람이 중개인이 되어 또 다른 책과 조우하게 된다. 최근엔 세상이 좋아져서 저자와 제목만 구글 검색하면 아마존에서 팔고 있거나 더러 운이 좋으면 책의 pdf 파일을 만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아마존 책 소개란을 통해 관련된 다른 책들도 소개받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의 교제와도 같다. 친한 이가 사람을 데려와 함께 자리를 했는데 나중에 그 소개 받은 사람과 친해지기도 하고 또 그 바람에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과도 알고 지내는 것과 같다.

 

 

무얼 해도 重重(중중)하고 無盡(무진)하니 

 

 

인간의 만남과 교제가 重重(중중)하고 無盡(무진)하듯 책의 세계도 그렇다.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도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끄집어내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선 조금 기다려주시기 바란다. (원래 글을 이렇게 쓰면 읽는 이의 흥미가 떨어져서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한 때 삶을 적극적으로 낭비해보려는 의지를 가진 적도 있었으니 

 

 

예전에, 상당히 오래 전에, 정확하게 얘기하면 2002년 무렵의 한 때, 나 호호당은 道敎(도교)의 팔만대장경에 해당되는 道藏(도장)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죽는 날까지 세월을 보내볼 까 하는 구상을 꽤나 진지하게 했다.

 

사주 가게를 하고 있으니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에 틈이 날 때마다 저 방대한 도장을 번역한다. 뭐 이런 아이디어였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나가서 사진을 찍거나 드로잉과 수채 스케치를 하면서 살아볼까 했다.

 

텍스트는 중국어 위키에 들어가면 전부 다 올라와 있으니 별도로 구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도교의 경전을 집대성한 道藏(도장) 역시 너무나도 엄청난 분량이라 계산해보니 살아생전에 나 혼자 다 하긴 어렵겠다 싶었다. 물론 꼭 다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울러 다 한다고 한들 그걸 책으로 출간해 줄 사람이나 출판사가 있을 턱도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해보고 싶었으니 그 이유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웃긴다. 그런 일이 삶을 낭비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예 작정하고 낭비해보는 것 또한 내 개인의 철저한 자유라는 사실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까불다가 왕창 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멋지게 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60년에 걸친 순환이론, 나중에 자연순환운명학이라 이름 붙인 이론체계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 여부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기에 당시 내게 있어 미래란 그저 無望(무망), 그 자체였다.

 

희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암울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편한 점도 적지 않다.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자는 强者(강자)라 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老莊(노장)사상을 새롭게 해석한 淮南子(회남자)란 책을 열심히 읽던 시절이라 더더욱 그런 마음이었다.

 

 

포기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자유의 한 양식인 것이니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면 家長(가장)으로서 절대 모자람이 없다. 그럴진대 장차 남은 삶을 무엇으로 놀아볼 것이냐 하는 것이 큰 과제였는데, 이왕 그럴 것 같으면 철저하게 마음 끌리는 대로 해보고 싶었다. 이 또한 自由(자유)의 한 스타일이란 생각. 그 바람에 道藏(도장)을 번역하면서 보낼까 하는 생각이 진지해졌다.

 

누군가 그런 거 왜 하시오? 하고 물을 것 같으면 그냥 합니다, 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소! 하고 대답할 요량도 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의무라든가 미션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살 뿐이오, 하는 심정.

 

2005년 무렵, 그러니까 나 호호당의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春分(춘분)의 때에 정말이지 사는 게 싫었다. 시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책을 30분만 읽어도 눈이 시리고 눈물이 나서 읽을 수 없었고 천식이 심해서 편히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누굴 탓할 수도 없고 그저 내 탓임을 알고 나니 그냥 입 꽉 다물고 세월을 보내고자 했다.

 

 

시간의 누적은 무엇이든 바꾸어놓는다. 

 

 

그런데 세월, 그러니까 시간의 누적은 무엇이든 바꾸어놓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신논현역 근처 오피스텔을 작업실로 해서 지내고 있다, 올 해 10월이면 만 20년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교의 경전을 몽땅 송두리째 번역하겠다는 생각은 가신 지 오래이다.

 

이제 글머리에서 책을 통해 책을 만난다는 얘기, 그건 마치 사람의 교제와도 같다는 얘기를 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자연순환운명학을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이 방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게 도장 번역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두게 했다.

 

형식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가르치다 보니 실로 다양한 사람과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사연과 역사, 희망과 고민에 대해 말하고 되고 듣게 되다 보니 情(정)도 생긴다.

 

그게 더 시간이 지나자 이젠 혼자서 작업실에 틀어박혀 번역만 하고 있을 순 없게 된 것이다. 그것보다는 역시 사람은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흥미롭고 재미가 있으며 때론 유익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에 어느 날 그간의 번역 파일들을 간단하게 DELETE 키로 날려버렸다. 수년간의 노고가 사라지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굿 바이!

 

 

포기하려 했더니 얻게 되는 이 묘한 세상

 

 

게다가 2007년의 어느 날 아!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운명의 법칙은 그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이제 내려놓자! 하고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답을 얻었다. 포기하려는 순간 답을 찾았다.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사는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즐거워졌다. 사람과의 교제만이 아니라 숨 쉬고 하늘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2007년은 60년 순환에 있어 청명, 즉 한 해로 치면 4월 5일경의 때와 같았던 것이고 그로서 回春(회춘)이란 게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했다.

 

 

下山(하산)의 때

 

 

내 스스로 2007년 무렵을 下山(하산)의 때로 받아들이고 있다. 높고 깊은 산중 궁벽하고 후미진 동굴 속에서 벽을 마주한 채 보내던 세월을 그만 하고 산 밑으로 내려온 셈이었다.

 

사실 후미진 동굴 속에서 내가 대하고 있던 벽 앞엔 모니터가 한 대 있고 그 모니터 속엔 ‘구글’이란 신기한 놈과 ‘위키피디아’란 놈이 살고 있었다. 그를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일생에 걸친 스토리들을 검색하면서 參究(참구)할 수 있었다. (자연순환운명학이 탄생함에 있어 절대적인 기여를 구글과 위키피디아가 한 셈이다.)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사람을 만나듯이 구글과 위키피디아 속에 들어가면 또 다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스토리, 사연들을 접할 수 있었고 나중엔 너무 확장이 되는 바람에 멈추어야 할 때도 있었다. 책 역시 그렇다. 평생 책 속에서 책을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가 유튜브를 통해 수채화 고수들의 시범을 통해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재미난 건 유튜브 속의 고수들이 보여주는 시범은 일종의 쇼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치 쉽고 자연스러운 것인 양 보여주지만 그 속엔 그들의 평생에 걸친 학습과 연마가 숨어있다. 그러니 기술은 결국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란 사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지해서 존재하는 이 신묘한 세상

 

 

겨울 동안 수채화 종이 문제로 근 6개월 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이를 구해서 간만에 그렸더니 그간 습득한 것들이 전혀 되질 않았다. 너무나도 어색했다.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그간에 터득한 것들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싶었다.

 

이에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보름 정도 열심히 그려보니 다시 내 손 끝에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문득 알게 되었다. 그림의 기술이나 기법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그건 내 머리 안에 머무는 것도 아니요, 손끝에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종이와 물감, 붓, 그림을 그리려는 흥미와 의지, 아이디어, 그리고 손과 눈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림, 그 모든 것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지해서 존재하고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는 생각.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또 사랑하고 아끼면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듯이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마무리하려는 이 글 역시 독자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나 호호당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오늘 다소 두서가 없는 글을 쓰고는 있지만 과연 독자들이 읽고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인지 그 또한 전혀 알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은 어떤 일과 것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시공간, 그러니 세상은 그저 重重(중중)하고 無盡(무진)하다는 생각이다.

 

내일 아침 나 호호당은 고마운 분과의 인연으로 해서 전라남도 곡성의 천태암과 구례군의 천은사를 찾아간다. 2박3일의 일정이다. 벌써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