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액 주사를 맞으며 

 

심한 설사를 했다, 임플란트 이식한 뒤 먹은 항생제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틀 동안 죽만 먹었더니 기력이 떨어져서 동네 의원에 가서 영양제 수액주사를 맞았다. 작년에 처음 맞아보았는데 1시간이 꽤나 무료했었다. 그래서 이번엔 작은 책을 한 권 들고 나섰다. 마침 봄비도 내리니 우산도 쓰고 말이다.

 

책 제목은 徒然草(도연초). ‘내키는 대로 대충 써 내려간 허튼 글’이란 뜻인데 이를 오늘날의 문학 장르로 치자면 바로 隨筆(수필)이 된다. 700 년 전 일본 중세의 글인데 여태 다 읽어보진 않았고 읽다 말다를 반복했을 뿐이다. 워낙 심심하다고나 할까, 간도 약하고 향도 연한 국물 맛.

 

누운 채 수액을 맞으면서 한 손으로 치켜들고 읽다보니 팔이 저리고 졸음이 왔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밝아져서 눈을 떠보니 간호사가 등을 켜고 바늘을 빼는 것이었다. 어느새 1시간이 지났으니 역시 들고 간 책 덕분인 셈이다.

 

 

봄비 내리니 좋아서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비가 오고 있었지! 의원으로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들고 나섰다. 길가 쪽의 소리가 요란했다. 빗물을 치고 나가는 자동차 바퀴 소리, 물이 튀어 오르면서 만들어지는 희부연 물안개, 저런 소리와 풍경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비를 좋아하는 것이다.

 

 

수필이란 단어

 

 

앞의 얘기인 바, 隨筆(수필)이란 말은 일본에서 도연초가 만들어진 것과 거의 같은 때, 중국 南宋(남송) 시절에 지어진 容齋隨筆(용재수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容齋(용재)라는 수식어이다.

 

그 뜻하는 바는 室僅容膝書齋(실근용슬서재), 풀이하면 겨우 무릎이 들어갈 정도의 아주 작은 서재가 된다. 가난한 文人(문인)이 옹색하게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가 앉을 정도의 아주 작은 서재에서 글을 썼다는 것이니 글쓴이의 모습과 상황이 마치 눈앞에 환하게 보이는 듯도 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간간이 우산을 내려서 일부러 찬 이슬비가 얼굴을 적시도록 했다. 이슬비 올 때 특히나 이런 짓을 좋아한다. 이는 마치 미용실에서 커트할 때 머리를 축이기 위해 뿌리는 스프레이와도 같다.

 

 

비에 젖어 함초롬한 철쭉

 

 

오면서 보니 철쭉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분홍과 하양, 그리고 영산홍이라 부르는 주황의 철쭉들이 새로 돋은 잎사귀들과 함께 촉촉이 젖고 있었다. 영산홍,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는 뜻의 이름인 映山紅(영산홍)이다. 철쭉은 원래 중국에서 躑躅(척촉)이라 하는데 이게 변해서 철쭉이 되었다.

 

척촉? 왜 이렇게 어려운 漢字(한자)를 썼을까? 하면 그 뜻이 산에 꽃이 하도 아름답게 피어나니 길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기에 머뭇거리고 저기에서 또 머뭇거리게 만든다는 뜻이다. 머뭇거릴 躑(척), 머뭇거릴 躅(촉)이다. 봄날 산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어려운 한자를 쓰긴 했으나 나름 용납이 된다.

 

철쭉은 이름도 다양하다. 앞의 영산홍을 비롯하여 杜鹃花(두견화)라 하기도 하고 온산이 가득 붉다 해서 满山红(만산홍), 山石榴(산석류)라 부르기도 한다. 몇 년 사이 지어진 아파트 단지는 그야말로 온통 철쭉으로 가득하다. 보기 좋고 잘 자라고 비용도 적게 들어서 조경의 ‘가성비’가 꽤나 좋아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오늘 글은 마침 도연초 즉 ‘내키는 대로 대충 써 내려간 허튼 글’이란 제목의 책을 두 어 페이지 읽고 온 터라 액면 그대로 徒然(도연)하게 써 보고픈 마음에서 쓰고 있다. 그러니 좀 더 생각을 따라가 본다.

 

 

실은 진달래를 더욱 좋아하기에

 

 

사실 난 철쭉보다는 그와 친척 관계인 진달래를 훨씬 더 좋아한다. 철쭉은 꽃에 독성이 있지만 진달래는 순해서 그 꽃을 부침개로 해서 먹기도 한다. 花煎(화전)이 바로 그것이니 우리 풍속에 화전놀이란 것이 있었다는 사실.

 

음력 3월 경, 정확히 말하면 음력 삼월삼짇날, 대충 바로 이맘때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서 전병에 올려 먹던 봄놀이 풍속이 그것이다. 당연히 막걸리도 한 잔 함께 마시면서 노래하고 춤도 추고 놀았을 것이다. 경기민요 중에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를 가잔다.”, 이런 가사를 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진달래를 더 좋아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 아니다. 진달래는 환한 양지에서 피어나기 보다는 소나무 그늘 밑에 피어나는 꽃, 哀調(애조) 어린 꽃이라서 더 좋아한다. 철쭉이야 아파트 단지, 가까운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진달래는 바깥으로 나가야 볼 수 있다.

 

좀 더 얘기하면 진달래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기 보다는 멀리 산그늘 속에 서린 분홍빛 안개와도 같은 모습이 훨씬 정취가 있다. 봄날 먼 산 아지랑이도 그렇지만 연분홍의 안개와도 같은 진달래,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기 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그냥 얌전하게 피어있는 꽃이 진달래라 하겠다. 국도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고 또 지나쳐 가게 되는 꽃으로서의 진달래를 더욱 사랑한다.

 

꽃잎도 철쭉처럼 억세지 않고 하늘하늘 거린다. 빛깔도 연하고 성질도 순하고 여리다. 그렇기에 김소월의 시는 참으로 대단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님이여, 굳이 나를 버리고 떠나간다면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으나 여리고 순한 저 진달래꽃을 마구 짓밟고 가셔야 할 것이오, 하는 절규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니 세월 참 많이도 흘렀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볼 것 같으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참으로 가볍고 또 가볍다. 세월이 변한 탓이란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비 그치고 글도 끝나고 

 

 

글을 쓰다 보니 비가 그쳤다. 아니, 해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늘 이상하다, 자영업자라고 할 수 있는 나 호호당이다. 그런데도 토요일이 되면 마음이 가벼워지니 말이다. 나로선 토요일에 강좌를 하기에 가장 바쁜 날인데 홀가분해지니 이게 무슨 조화 속인가! 사람의 행동거지에 습관이 있듯 마음이나 생각에도 습관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 이런 생각 하지 말아야겠다. 4월부터는 곰곰이 헤아려보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느낌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생각보다는 행동적으로 지내다가 10월 하순이 되면 다시 생각 속으로 침잠하기로 올 봄에 마음을 먹었으니 말이다. 환한 계절이 왔으니 내 속을 들여다보느니 바깥으로 눈을 돌려 차라리 하늘에 떠가는 무심한 흰 구름을 보는 게 백배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니 마침 흰 구름이 피어오른다. 뭉게구름 같기도 한데 몽글몽글한 맛은 나지 않는다. 아직은 여름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시인이 얘기해주었다. 몽골에 가서 한 철을 보냈는데 망망한 초원이라 그저 떠다니는 구름만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 좀 무심하게 지내보자 그리고 살아보자 무심하게.

 

(이 글은 어제 토요일 점심 무렵에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