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子(장자)와의 추억

 

 

비 내리고 번쩍 버번쩍 번개치면 잠시 뒤 천둥소리 들려오는 일요일 밤, 아니 월요일 자정 넘은 시각, 창가 작은 탁자 위에 莊子(장자)를 펼쳐놓고 앉았다. 두 시간 정도 읽고 음미하다가 감흥이 일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재에 꽂혀 있던 책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살펴보니 ‘현암사’ 출판사에서 나왔고 인쇄는 1980년 2월 29일에 5쇄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책 역시 첫 번째 책은 아니다.

 

분명한 기억이 있다. 장자를 처음 산 것은 1973년 가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잠깐 일탈하는 기분으로 책을 샀었다. 책방에서 책을 사서 들고 나오면서 입시를 앞둔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게 초판본이었고 나중에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책이 어디론가 가서 보이지 않아서 다시 샀는데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책이다.

 

 

古文(고문)의 힘

 

 

한문 중에서도 연대가 오랜 古文(고문)은 읽는 맛이 사뭇 다르다. 형용사나 수식어가 적어서 마치 直球(직구)를 던지듯이 말하고 있다. 글쓴이는 자신의 생각을 어떤 방어논리도 없이 그냥 툭-하고 내뱉고 있다. 읽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고려도 없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식이다.

 

기원 전 200-300년 경, 장자가 생각을 글로 옮길 적만 해도 종이에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竹簡(죽간)이라 하는 대나무 조각에 칼로 글을 새겨야 했기에 대단히 수고로웠으리라. 이에 당시의 모든 문장은 최대한 압축적이다.

 

나 호호당은 이처럼 압축적인 古文(고문)에 매료된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 말이고 글인데, 심지어는 뉘앙스가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분쟁도 생기고 권력자 앞에선 때론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 옛 한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냥 스트레이트로 생각을 밖으로 던진다.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향해 던진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현대문에서 이런 直心(직심)의 문장은 소설가 김훈 선생의 글에서나 느껴볼 수 있다. 김훈 선생은 말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타락해있다고. 김훈 선생은 또 말하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들을 신뢰한다고. 그 분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세속에선 위험한 말들

 

 

나 호호당은 고려대학을 나왔다, 고려대의 敎示(교시)는 자유, 정의, 진리이다. 먼 옛날 입학 당시 참으로 멋진 교시라고 여겼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선 그것들이 참으로 위험한 말들이라 여긴다.

 

자유, 정의, 진리,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자’의 영역이라 여긴다. 저 말들이 인간 사회로 들어오면 위험해진다. 인간 세상에선 너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다르고 너의 진리가 나의 진리가 다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인 까닭이다. 정의라든가 진리와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끝도 없이 싸우게 만든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면서 상대를 제거한다.

 

 

버려야만 편할 것 같은데...

 

 

이에 장자는 말하고 있다, 아니 말했다 무려 2천년하고도 3백년 전에. 세상의 모든 가치, 소중한 것은 큰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권력과 명예 따윈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니라고. 진리와 정의란 것 역시 차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이니 세속의 모든 것들은 눈을 크게 뜨고 보면 터럭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투쟁과 게임을 비웃고 있다. 그 까이 꺼 별 거 없어! 하면서 코웃음 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앞둔 그 가을에 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 머리가 띵-했다. 이게 뭔 소리야? 했다. 하지만 당장 대학엔 가고 볼 일 같았고 긴 인생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니 일단 不問(불문)에 붙였던 莊子(장자).

 

그 이후 긴 세월 사이에 간간히 다시 접해왔고 그럴 때마다 받는 느낌은 달랐다. 하지만 밤늦은 이 시각 다시 읽어도 여전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그저 별 게 아닐 뿐더러 모든 것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길 때만이 대자연과 더불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마구마구 직구를 날려 오고 있는 莊子(장자)이다.

 

장자의 저 말들은 따르기가 절대 쉽지 않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그 무엇을 버리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omething, 그런 면이 있다. 물론 우리 모두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먹고 산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젖히고 올라서야 하는 일이며 때론 누군가를 제거해야 하는 끔찍한 일도 견뎌야 한다. 먹고 살려면 독해야 하고 독해져야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란 말씀 또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길 때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말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넌 그냥 가난하게 살다가 가라 해도 군말 없이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절대 쉬운 얘기가 아니다.

 

 

이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릴 때도 있으니 내가 돌았나? 

 

 

그러니 문득문득 죽음이야말로 安息(안식)처럼 다가올 때도 많다. 죽으면 자유고 나발이고 진리고 정의고 그런 따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오래 살아서 본전은 다 챙겼고 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사는 건 개고생인 것이 확실해!

 

 

새벽 2시, 이제야 서재 건너편 LG 전자 연구소 빌딩의 불들이 절반 정도 꺼지고 있다. 월요일 새벽 시간이다. 토요일 저녁 9시 경 연구소의 불이 70% 정도 꺼져 있었다, 웬일이니? 했다. 그래도 토요일이라서? 그랬는데 일요일 저녁이 되자 거의 모든 층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일요일 저녁이건만 죄다 야근이구나! 했고 월요일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불이 절반 정도 소등이 되고 있다.

 

저 정도의 대기업 연구소에 들어가서 일을 하려면 고등학교 시절 전국 수험생의 상위 5%에는 들었을 것인데 그 상위권 학생들은 오늘에 와서 늘 야근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엄마들은 “우리 아들, LG전자 들어갔어” 하면서 자랑스러워했을 거 아닌가.

 

물론 돈은 중소기업보다 더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내 보기엔 일주일에 적어도 3-4일 이상은 야근하며 살고 있는 대기업 연구소 직원들이다. 워라벨? 허구이고 허상일 수밖에 없는 우리 대한민국, 수출 즉 하청으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이다. 부엌 쪽 창 건너편의 삼성전자 연구소도 별반 차이가 없다.

 

저 친구들 당연히 이공계 출신일 것이니 고등학교 시절 삼각함수 공식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세게 외웠을 것이다. 그거 못 외우면 이른바 “수포자”가 되고 그러면 이공계 진학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 호호당은 선생님에게 삼각함수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가 불려 나가서 뺨따귀 얼얼, 귓구멍 멍멍하게 한 대 맞은 기억이 난다.)

 

 

차라리 2류 인생이 더 행복할 것도 같아서

 

 

일요일 자정이 가까울 무렵 책 읽기 직전에 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아들의 얘기인 즉 이렇다. 아빠는 쟤네들이 불쌍한 가봐, 늘 저거 볼 때마다 얘기하잖아. 그런데 지금 야근하는 저 친구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과연 불만 따위를 갖고는 있을까 싶기도 해. 주변 동료들이 다 하니까 할 거야. 그런데 사실 어쩌면 중소기업 다니는 2류가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른바 2류 인생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 아예 바라보지 않으면 그렇게 한 평생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니. 아파트 포기하고 빌라 살고 돈 올려달라고 하면 고민도 해가면서 그럭저럭 살다 가면 되는 일 아닌가. 도중에 주식 좀 했다가 홀딱 날린 뒤 반성도 좀 해가면서 말이다.

 

공기업 사원 또는 공무원, 우리 사회에서 極上(극상)의 좋은 일자리이다. 게다가 이번 LH 사건처럼 몰래몰래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그런 직장에 다니는 사람 만나서 얘기해보면 그 또한 고초와 불만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거야 이 세상 어딜 가나 그럴 것이니 따지고 싶지 않다.

 

LH, 지주회사 형태를 검토하고 있다는데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간에 생겨난 엄청난 부채를 회사를 쪼갤 때 누가 덮어쓰느냐 하는 것인데 내년 대선이 달린 현 정권이 쉽게 편하게 풀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우리나라만의 장점(단점이기도 하지만)이 달리 무엇이랴, 아니다 싶으면 사정없이 갈아 치우고 엎어버리는 무서운 추진력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LH여, 안녕!

 

 

헛소리의 莊子(장자)

 

월요일 새벽 2시 40분, 맞은 편 LG 연구소의 등불이 1/4만 정도만 남고 거의 꺼졌다. 쉬러 가거나 잠시 집에 간 것 같다. 나도 잘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부터 읽고 있던 莊子(장자)를 다시 서가에 갖다 놓았다. 莊子(장자)의 얘긴 아무래도 헛소리야!

 

 

미안한 마음이다, 젊은 연구소 직원들은 저처럼 피 튀기면서 과업을 해가고 있는데 호호당은 늙었다는 것을 핑계로 빗소리 들으며 莊子(장자) 따위나 읽고 있으니 말이다.

 

비가 부슬부슬해졌다. 글도 마무리한다. 발밑에서 졸고 있던 강아지가 이제 가서 자자고 보채는 눈빛이다.

 

(이 글은 간밤에 썼다.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니 꿈속에서의 일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