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미스터리를 사주분석을 통해 규명해본다
사도세자,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그 사건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대표적인 수수께끼이자 悲劇(비극)이라 하겠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이야 결코 알 수 없다 하겠으나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주를 분석해보면 대충의 정황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영조는 1694년 10월 31일생이니 甲戌(갑술)년 甲戌(갑술)월 戊寅(무인)일 생이다.
생시를 모르지만 서른이 되던 1724 甲辰(갑진)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봐서 1718년 戊戌(무술)년, 24세 때가 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임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어머니가 비천한 출신이라 평생 그 열등감을 안고 살았다. 그리고 딸은 여럿 보았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고생했다.
1719년, 25세에 얻은 첫 아들이 1728년, 열 살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 이후로도 무려 6년간 아들을 얻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런 영조가 마침내 왕위를 이을 아들을 다시 얻은 것은 그의 나이 39세였다. 당시 오래 살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노년에 들어가기 직전에 간신히 얻은 귀하고 귀한 아들이 바로 훗날 사도세자였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리고 사도세자의 생년월일을 보면 1735년 3월 7일 생이다. 乙卯(을묘)년 己卯(기묘)월 甲寅(갑인)일이고 태어나기 직전인 1734 甲寅(갑인)의 해가 입추였다.
태어날 적에 운기가 좋았으니 어려서부터 분명 총명했을 것이다.
참으로 묘한 사도세자의 탄생 시점
영조는 크게 한시름 놓았을 것인데 묘한 것은 바로 사도세자가 태어난 1735 乙卯(을묘)년은 영조에게 있어 小雪(소설)의 운세였다는 점이다.
사실 60년 순환에 있어 운세가 미묘하게 기울기 시작하는 첫 출발점이 바로 小雪(소설)인데 바로 이런 대목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훗날 비극을 슬쩍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영조의 운세가 기울어 가면서 나타난 대표적인 상황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세자를 심하게 박대한 일이다.
물론 명분은 엄하게 가르쳐서 훗날 좋은 통치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얼마나 엄하게 다그쳤는지 사도세자는 부친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스트레스와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부친은 운이 바닥이고 아들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으니
1748 戊辰(무진)년이 영조의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인데 그 다음 해인 1749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다음 연신 엄하게 문책하기만 했다. 어쩌면 영조 자신의 스트레스를 사도세자를 통해 해소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도세자 또한 이 무렵부터 운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기에 부친 영조로부터의 엄한 문책을 받아줄 멘탈이 무너져가기 시작했다고 본다.
간단히 줄이면 영조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1694년생인 영조였기에 사실 이 무렵 나이도 근 오십이고 운세 또한 입춘 다음 해였기에 당시로선 으레 죽어도 되는 나이였다.
영조의 경우 건강이 좋지 않긴 했으나 죽지 않고 끝내 건강을 회복하면서 장수한 것이 사도세자의 명을 단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본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기득권 세력인 노론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영조는 아들의 이런 나약한 태도가 못마땅했을 것이고 사도세자로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1752년 훗날 정조가 되는 영조의 손자가 출생했다는 사실이다.
1752년은 1748년이 입춘 바닥인 영조에게 있어 그야말로 어려운 재바닥 무렵의 일이었기에 병석에 누워 지냈고 1735년이 입추였던 사도세자에겐 小雪(소설)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정조 이산의 출생은 양쪽 모두로부터 공식적으로야 기쁜 일이었으나 내막으로 보면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 또한 아들의 미래에 대해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1760 庚辰(경진)년, 1764년이 입춘 바닥인 사도세자에게 있어 그야말로 殺運(살운)이었는데 이 무렵부터 사도세자는 거의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내관과 나인 백여 명을 별 이유도 없이 죽였고 불에 달궈 지지는 악형을 가했다고 하니 완전히 싸이코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소식이 2년 뒤인 1762년에 이르러 뒤주에 갇혀 삶을 마치게 되는 비극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영조 또한 1748년이 입춘 바닥이었기에 그로부터 14년, 즉 입하 무렵의 일이라 대단히 괴로웠던 때가 되고 말았다.
영조와 사도세자간의 거래
영조는 68세의 나이에 유일한 아들이자 왕세자인 사도세자를 저 세상으로 보낸 후 또 다시 원기를 회복해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82세까지 장수했다.
이에 영조의 長壽(장수)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서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