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구례와는 또 다른 아기자기함

 

 

사흘에 걸쳐 전남의 곡성군을 다녀왔다. 다녀온 후 심한 몸살과 영문 모르는 설사로 해서 사흘 동안 ‘오지게’ 아팠다. 이렇게 아팠던 것은 군 복무 중에 크게 앓았던 이후 처음이다.

 

곡성은 처음이다. 그간에 쌍계사 벚꽃 구경 등등을 이유로 구례는 열 차례 이상 지나다녔고 또 머물기도 했지만 바로 인근의 곡성은 처음이다. 그곳으로 안내해 준 고마운 사람의 덕분이다.

 

전부터 짐작하기로 곡성은 섬진강이 굽어 흐르는 마을이니 으레 그 명칭이 曲城(곡성)일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골짜기 谷(곡)의 谷城(곡성)이었다. 조금 아쉽다. 이에 좀 더 알아보니 옛날 통일신라 시절 曲城(곡성)이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성 두보의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그 운치를 그냥 살리지 그랬어! 하는 아쉬움.

 

놀랍게도 곡성은 구례와 경관이 전혀 달랐다. 구례는 지리산 아래 마을이라 스케일이 크다. 남원 고개를 올라 터널을 나와 구례로 내려가는 19번 국도를 달려본 이는 알 것이다. 왼쪽은 구름 두른 노고단이요 오른 쪽은 구례와 곡성을 나누는 산인데 그 가운데 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 정중앙을 약 20킬로미터에 걸쳐 달려 내려가는 드라이빙은 실로 호쾌하다.

 

그런데 곡성은 웅장하지 않다. 드라이빙도 그렇다. 곡성의 두물머리인 압록에서부터 곡성 읍내에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국도를 가다 보면 왼쪽은 산이고 오른 쪽은 섬진강이다. 길이 강을 따라 꺾어지기에 툭 트인 시야를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정취가 있다.

 

땅이 저처럼 다르니 사람들의 성품도 많이 다르리라. 산도 많고 谷(곡)도 많아서 도처에 奇人(기인)들과 異士(이사)들이 터를 잡고 있을 것 같은 느낌. 휙-하고 지나쳐 가면 몰라도 조금 속살을 들여다보고자 할 것 같으면 우선 다소곳하게 처신해야 할 것 같다.

 

 

여행 내내 고생을 했지만

 

 

안내한 양반이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얼마나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돌아다니는지 힘들었다. (2박3일 소주 항주 패키지 여행 같았다.) 그러니 몸살에 설사까지. 그런데 한 가지 수상쩍은 생각은 든다, 최근에 아스트라제네카 맞은 나이든 세대들의 상당수가 몸살과 설사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동리산의 태안사

 

 

아무튼 각설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泰安寺(태안사)였다. 신라 말 불교의 禪宗(선종)이 들어오던 시절 九山禪門(구산선문), 즉 전국 명산에 아홉 군데 선종 사찰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 하나인 桐裡山派(동리산파)가 시작된 절이라 한다. (동리산, 오동나무 울창한 산이라! 이름부터 아취가 있다.)

 

태안사로 들어서는 길은 오른 쪽에 개울을 낀 숲길이었다. 2 킬로미터 정도. 게다가 주지 스님이 비포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정취도 그만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만일 콘크리트 포장을 깔았으면 그저 쩝-했을 것인데. 최근 그나마 빛바랜 古刹(고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호남의 사찰들도 돈을 바르기 시작하면서 그 맛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절 산문 직전에 멋진 절경을 만났다. 개울 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내려가 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누각이 하나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묘하다. 凌波閣(능파각)!

 

 

절 앞에서 절세 미인을 만나게 되니

 

 

저 단어는 삼국지 연의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식, 칠보시를 지었다는 그 이가 아름다운 물의 여신에 빗대어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洛神賦(낙신부)에 나온다는 사실.

 

원문은 陵波微步(능파미보), 羅韈生塵(라선생진), 여신이 파도를 사뿐히 밟으며 걸으니 비단 버선에 살짝 먼지가 일고, 이런 뜻이다. 정말이지 저 洛神賦(낙신부)란 시야말로 중국 문학의 한 절정인데 지면관계상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누각 아래 커다란 바위로 물이 떨어져서 잠시 고였다가 다시 흘러가는 모습, 그 위론 푸른 나무들이 드리우고 있었다. 가히 절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시절의 화가 顧愷之(고개지)는 ‘여사잠도’란 명화를 남겼지만 실은 낙신부의 여신을 그린 洛神賦圖(낙신부도)가 더 유명하다. 조식의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그린 것이고 그 이후 수많은 유명 화가들이 낙신부도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수묵화의 대가인 傅抱石(부포석)이 그린 여인의 그림은 그야말로 고개지로부터 이어지는 중국 여인 인물화의 맥을 잇는 최고봉이라 하겠다. 기가 막힌 솜씨이다.

 

(구글에 가서 “傅抱石, 山鬼”라고 입력해보라, 바로 이미지를 만나실 수 있을 것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아쉽게도 부포석은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수묵화의 대가이지만 지레 겁 먹은 우리 미술계에선 일종의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탓이라 본다.)

 

 

경관 빼어난 천태암

 

 

이어서 곡성군 남단 높은 아미산이란 곳, 알아보니 587 미터라 하는데 정상 바로 밑에 지어놓은 천태암이란 곳을 찾아갔다. 스님 혼자서 그 암자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담력이 여간 두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법명이 큰 大(대)에 두루 周(주), 대주스님이었는데 날카로운 눈매를 감춘 채 연신 싱글벙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훌륭하셨다. 인물이 워낙 좋아서 잠시 생년월일시를 물어보았더니 2020년이 立秋(입추)의 운이었다. 스님에게 장차 크게 활동하시겠네요, 하고 얘기해주었는데 아마도 스님은 입에 발린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겠다.

 

천태암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운해가 피어나고 옅어지고 또 스쳐가고 그 사이로 멀리 보성강과 주암호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보성강은 보성에서 북으로 흘러 내려와 곡성의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도림사, 묘한 얼굴의 부처님과 보살님들

 

 

다음 날 아침 道林寺(도림사)란 고찰을 찾아갔는데 역시 계곡의 개울을 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절은 역시 개울을 끼고 있어야 정취가 있는 법이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협시보살의 얼굴이 일반 사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봐서 연대가 꽤 된 게 아닌가 싶다.

 

 

구례 천은사

 

 

그리고 나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구례의 천은사를 찾아갔다. 泉隱寺(천은사), 숨은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니 얼마나 멋진가!

 

무성한 숲이 개울을 가렸지만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 건너편에 문득 절을 만나게 되니 그곳이야말로 극락정토 아니면 무엇이랴! 苦海(고해)에 지쳐 헤매다 우연히 기대치 않은 곳에서 만나는 극락이란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구례군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저수지를 조성했으니 개울은 절반 이상 사라졌고 게다가 절 입구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깔고 그 앞엔 커다란 주차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泉隱寺(천은사)가 아니라 泉露寺(천로사)가 된 셈이다.

 

돈이 山門(산문)을 넘어서는 것이 대세인 세상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식당도 주차장이 없으면 손님이 찾지 않듯이 절 역시 사정이 그럴 것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어쩔 수 없이 최면을 건다. 저수지와 포장도로, 너른 주차장 모두를 눈앞에서 삭- 제거하고 상상을 한다. 물소리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문득 일주문을 만난다는 식의 상상력. 옛 시절 가수 김태곤의 노랫말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하는 그런 절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생각해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모든 고행의 순례길을 손님 많이 오라고 죄다 아스팔트 포장을 해놓고 세단을 타고 쌩-하고 달려오시지요, 하는 격이니 괴롭다.

 

기독교든 힌두교든 불교든 여타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성지순례란 것은 순례자 스스로 몸으로 지불하는 고생의 크기만큼 무언가 얻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절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최소한 一柱門(일주문) 앞에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당 복전함에 아무리 큰돈을 투하해도 별 소용이 없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해도 부처님은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을 것이란 게 평소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저렴해 보이니? 하면서 말이다.

 

시주하는 돈은 절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정작 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소중한 몸과 간절한 마음인 까닭이다. 다른 종교도 물론이다.

 

이제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 부처님 찾아가느라 기진맥진해서 몸살과 설사를 지불했으니 나름 한껏 바치고 온 셈이다. 필경 이번 곡성 여행은 남아도 많이 남는 장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고, 저 늙은 호호당 놈, 그래도 고생 뭐 빠지게 했으니 내 치부해둘 심산이야! 이렇게 여길 것도 같으니 말이다.

 

오늘 화요일, 이제 몸이 거의 회복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