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란 결국 스킬이다. 

 

 

앞글에서 먼저 사진에 대해 말했는데 그건 이미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 그림이나 사진이나 내겐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그림의 소재를 담기 위해 사진을 사용한다는 말도 했다.

 

이제 그림에 대해 얘기한다.

 

예술 또는 아트(art)란 원래 스킬을 뜻하던 말이다. 어원을 찾아보면 “학습이나 연습의 결과 얻어진 스킬” (skill as a result of learning or practice.)이라고 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아트란 일종의 技倆(기량)이고 기술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많이 다르다. 기술이나 기량보다는 이념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기에 그렇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언젠가 별도의 글을 통해 얘기해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 호호당은 현대미술이 정치와 권력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는 점에서 거부한다. 원래의 의미 즉 스킬 즉 기술과 기량으로서의 그림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호호당 당신의 미술 그리고 그림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가? 하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그림이 스킬이고 기량인 점은 인정하지만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은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호호당의 아트는 즐거움에 대한 추구이다.  

 

 

아트 또는 그림에 대한 나 호호당의 생각은 이렇다. 아트란 그 본질에 있어 하나의 놀이이자 遊戱(유희)이며 놀이에 빠져서 반복하다 보면 스킬이 된다고. 줄이면 “놀이의 스킬”이라고 여긴다.

 

그림에 대해 내가 지향하는 바는 “즐거움”이다. 그릴 때의 즐거움, 그리고 남들이 봤을 때의 즐거움이다. 누군가 내 그림을 보면서 “히야, 이거 예술이네!” 하는 감탄사를 터뜨려 주는 것이 내 목표이다.

 

(물론 내 그림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기엔 멀고 또 멀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릴 때까지의 연습이고 숙련이다. 동시에 놀이이다. 높은 경지엔 아마도 죽는 날까지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말이다.)

 

 

그림이 사진과 다른 점

 

 

그림은 사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진은 어쨌거나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 대상의 빛이 포착되고 고정된다. (물론 최근엔 포토삽 놀이를 통해 사진작가의 감성을 개입시킬 수 있지만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자.

 

풍경을 그린다고 하자. 먼저 풍경이 있고 그를 보는 화가의 눈이 있다. 하지만 눈만이 아니라 풍경 앞에서 화가는 공기의 흐름과 냄새, 소리 등등 오관을 총동원해서 풍경을 느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풍경을 그리는 사이에 머릿속에선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생각들이 떠오르고 지워지고를 반복한다.

 

 

그림은 화가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화가가 풍경을 그리는 것은 ‘객체’로서의 풍경을 포착해서 표현하고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화가의 감수성 그리고 화가의 心象(심상)을 그리는 것이다. 화가라는 주체와 풍경이라는 객체의 구분이 아예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 호호당은 이제 사진을 떠나 그림으로 옮겨왔다.)l

 

미안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철학적인 얘기로 설명해본다.

 

먼저 불교 철학의 핵심인 5온(五蘊)으로 말할 것 같으면 풍경이라는 대상 즉 色(색) 앞에서 화가의 반응 즉 수(受)와 상(想), 행(行)과 식(識)이 곁들여지면서 그림이 그려진다.

 

이를 서양 철학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主著(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 화가는 풍경의 現像(현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화가의 마음속에서 재생산된 表象(표상)을 그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폴 세잔이 “생트 빅트와르의 산”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린 이유도 연습이나 숙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볼 때마다의 느낌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화가는 풍경 자체에서만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는 매 순간 의식 속에서 다른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그린다. 대상이 때론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희열의 감정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이 때론 슬프기도 하고 비참한 것이 때론 웃음을 자아낸다.)

 

 

잘 표현하려는 노력은 결국 즐거움에 대한 추구이다. 

 

 

하지만 그림은 궁극적으로 스킬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놀이라 여긴다. 풍경에서 얻은 것을 내 속에서 재생산한 그 무엇-표상이라 해도 되고 불교적 수상행식이라 해도 되는-을 그림으로 펼치는 일은 어렵다, 애를 써야 한다. 잘 해보려면 말이다. 그런데 잘 해보려는 그 노력과 수고는 결국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애를 쓴다, 그렇기에 즐겁다.

 

물론 그릴 당시 나 호호당의 감정이 슬펐다 해도 보는 이가 다르게, 가령 즐거운 그 무엇을 느낀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뭔가를 진지하게 느낀다면 그게 바로 나 호호당의 성공이다.

 

이게 바로 나 호호당의 아트 또는 그림에 대한 생각이다.

 

 

힘들기에 즐겁다. 

 

 

매일 매일 풍경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또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같은 풍경이라 해도 볼 때마다 달라지고,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작 그려보고자 덤벼들면 쉬운 게 없다, 모두 힘들다. 힘들기에 즐겁다.

 

성공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한 번 물어보시라, 언제가 가장 즐거웠냐고. 그러면 예전에 잘 해보려고 죽을둥살둥 눈을 부릅뜨고 애를 쓰고 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 때가 내 삶의 전성기였다고 답할 것이다.

 

 

그림, 無常(무상)함의 놀이 또는 유희

 

 

풍경을 그리든 다른 무엇을 그리든 그 모두 無常(무상)한 것들을 감수하고 내 속에서 재생산해서 그림으로 표현한다. 늘 변하는 것들을 즐기는 방법이다. 호호당의 삶도 역시 그렇다.

 

삶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것이라 여기기에 나 호호당의 아트 혹은 예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11월에 두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기에 호호당의 그림이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아주 진지하게” 노는 것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해서 이런 글을 써서 올린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조만간 미술의 역사, 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나 호호당의 쉽고 간략한 생각을 글로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