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빨로 미소짓던 옛 사랑

 

 

주 2회 필라테스를 한다. 8층 스튜디오에서 운동을 하던 중 잠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연립 주택 옥상의 빨랫줄에 널린 하얀 이불 홑청들이 바람을 안고 깃발처럼 펄럭 일렁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서 다시 운동 자세를 잡는데 눈앞에 그림 하나가 스쳤다, 하얀 치아로 미소 짓던 옛 사랑.

 

갑자기 왜 생각이 나지, 무슨 영문으로? 하다가 금방 까닭을 알아차렸다. 시월이기 때문이었다. 시월은 돌이켜보는 계절이다.

 

그 사람 지금도 이빨이 희고 건강할까? 생각해보니 그냥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임플란트 많이 심었겠지. 지금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아볼 순 있을까? 아마도 갸우뚱하지 않을까.

 

월요일 8일 새벽에 寒露(한로), 찬 이슬의 때였고 그로서 戌(술)월이 시작되었다. 한 해를 통해 가장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한 달이다. 여름의 무더운 대기를 가득 메웠던 수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무 잎사귀들은 말라서 떨어진다. 빨래도 잘 마른다, 앞서의 하얀 이불 홑청처럼.

 

살갗 또한 끈끈하지 않아서 만지기 좋은 계절이다. 아침녘 잠에서 깰 때 손으로 배와 가슴 그리고 아랫배를 쓸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어서 몸을 돌려 등과 허리 엉덩이 쪽도 만져주게 된다. 그리곤 기지개를 한 번 시원하게 켜준다. 시월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에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계절 또한 시월이다. 그런데 그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거나 지금 곁에 없다면 얼마나 생각이 나겠는가? 어딜 가도 외롭고 쓸쓸하지 않겠는가.

 

 

시월은 되돌아보는 계절

 

 

그러니 지나간 사랑을 되돌아보는 계절 또한 시월인 것이다. 그래서 맑은 하늘 아래 일렁대는 이불 홑청이 옛 사람의 하얀 치아로 되돌아와서 잠시나마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이다.

 

나 호호당의 삶은 아직 날들이 많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앞날을 바라보기보다는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일이 더 많으니 그렇다.

 

엊저녁 어쩌다가 “존 르 카레”, 스파이 소설의 대가였던 그 양반이 생각이 났다. 아직 살아있을까? 싶어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2020년에 사망했다. 역시!

 

약간 뜻밖인 것은 “자칼의 날”을 쓴 “프레더릭 포사이스”가 비록 86세의 나이이긴 하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점이다. 속으로 이 양반도 가셨겠지 하면서 검색했는데 말이다. 하기야 워런 버핏도 아직 정정하다.

 

문학계의 경우 재작년 88세로 돌아가신 이어령 작가의 부인이자 문학평론가이신 강인숙 여사님이 아직 살아계시다. 곧 91세가 되신다.

 

하지만 나 호호당이 젊은 날 존경했거나 추앙했던 여러 분야의 대가들과 마스터들이 최근 검색해보면 대다수가 故人(고인)이다.

 

조금 살펴보니 30년대 생은 이제 거의 떠났고 존경하는 정현종 시인을 필두로 황동규 황석영 이문열 김훈과 같은 40년대 생들이 아직은 그런대로 건재하다. 10년 뒤가 되면 그들 또한 거의 떠날 것이고 다시 그 10년 뒤엔 50년대 생인 나 호호당의 세대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소프트랜딩? 

 

 

따라서 나 호호당의 삶도 마무리 국면이다. 건강하게 내 몸을 가눌 수 있는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았길 기대하고 있지만 확률로 치면 최대 20년 짧게는 10년, 평균 15년의 여생이다.

 

아침에 양재천 길을 따라 산책하면서 하늘을 올려본다. 푸른 하늘 저 편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멀리 화살을 쏘아 올리듯이 던져본다. 내가 없다는 거, 죽었다는 것이 뭐니? 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큰 소리로 물어보기도 한다.

 

죽음,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 태어나서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생경하다.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긴 하다, 바로 잠들었을 때이다. 그 시간 동안 꿈을 꿀 때도 있지만 의식이 없는 시간들도 많다. 죽음도 아마 그런 거겠지 하고 유추해본다.

 

갑자기 일이 닥치면 너무 놀라서 허둥지둥할 것 같아서 미리 연습을 해놓으려는 생각이다. 올 해 들어서 그러니까 세는 나이로 70이 된 연초부터 계속해서 이 생각에 매달려왔다, 죽음에 대해 소프트랜딩을 위해.

 

 

아직도 열렬한 그 무엇이 가슴 속에 가득해서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나 호호당의 가슴 속엔 여전히 뜨겁고 열렬한 그 무엇이 가득하기에 죽음맞이를 시작했구나 하고.

 

“죽음맞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다. 다만 “-맞이”는 명사 뒤에 붙어 사용하는 접미사이니 만들면 되는 어휘이긴 하다.

 

시월의 하늘은 명랑한 생각을 하면 명랑해지고 우울한 사념을 가지면 하늘도 음울해진다. 빛의 강도와 구름을 가리는 해에 따라 무시로 수시로 변하는 시월의 하늘이다. 하늘이 그러하니 사람의 생각도 따라서 그렇게 된다.

 

올 해 양재천 물가엔 억새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날씨가 이상해서 강아지풀만 잔뜩 있고 갈대와 억새가 적어서 볼 때마다 아쉽다.

 

 

단조로운 일상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는 거 

 

 

멀리서 젊은 남녀, 근육질의 남녀 다섯 명이 조를 짜서 힘차게 달려온다. 리더 격의 사내가 구령을 붙이고 있다. 구리 빛 살갗 위로 땀이 번지르 반지르. 남녀 모두 엉덩이와 허벅지가 탱탱하다. 와 부럽다!, 그리고 축원한다, 부디 오래 건강하시길.

 

나이가 들어서 새삼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은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 아니라 일상 속의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이란 점이다. 그냥 반복되는 일상, 약간은 지루하고 단조로워서 가끔 벗어났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런 삶, 그런 게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시월이다, 좋은 계절이다. 단조롭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즐겁게 이어가보자. 독자님들도 멋진 일상의 날들을 보내시길.

 

 

엔화 급등이 촉발한 대폭락

 

 

지난 주 8월 5일의 증시 대폭락에 대해 이런저런 ‘썰’이 무성하다. 하지만 그 시작, 즉 폭락장을 촉발시킨 것은 일본 엔화 가치의 급등이었음이 명확하다.

 

일본은행(BOJ)은 지난 달 31일 기준금리를 연 0~0.1%에서 0.25%로 인상하면서 했던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의 발언이 엔화의 급등세를 촉발했고 이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의 엔 캐리 청산이 8월 1일부터 쏟아져나왔다.

 

발언 내용인 즉, 연내 추가 금리 인상을 배제하지 않고 있으며 0.5%를 금리 인상의 벽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올 3월 오랜 기간 이어져온 제로금리를 끝낸 일본은행이 다시 금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올릴 수 있다는 발언이었다. 그러자 그간 엔 약세에 대해 베팅해온 엔 캐리 트레이드 펀드들이 이젠 끝나는구나, 이쯤에서 차익을 챙기고 빠져나가자 하면서 대거 청산에 나선 것이라 하겠다.

 

최근 몇 년 사이 엔화의 급격한 하락은 그 이유가 미국 연준이 2022년 3월부터 이른바 빅 스텝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기준금리를 0.25%에서 5.25%까지 거의 1년 조금 더 되는 기간 동안 무려 11차례에 걸쳐 단행한 금리 인상 때문이었다.

 

그러자 엔화가 무너져 내렸고 이에 이를 기회로 포착한 투기세력들이 대거 엔 캐리 트레이드에 나섰다.

 

독자님들은 엔 약세에 베팅한다는 것에 대해 별로 느낌이 없으시겠으나 사실 그간의 엔 캐리 트레이드, 즉 엔 약세 베팅은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어 왔다.

 

엔화를 저렴한 금리로 차입한 후 다시 달러로 환전한 자금들, 이른바 엔 캐리 트레이드를 통해 엄청난 자금이 미국 금융시장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갔다.

 

이에 재선을 노리던 바이든 대통령은 재닛 옐런 재무장관을 통해 무지막지한 양의 국채를 연신 찍어낼 수 있었고 거기서 조달된 돈으로 미국 경기를 대거 부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돈은 다시 증시로 유입되면서 지속적인 상승장이 펼쳐졌다.

 

이처럼 끊임없이 자금이 유입되는 가운데 2022년 11월 말 챗GPT라고 하는 신통방통한 AI 물건이 나왔다. 즉각적으로 AI 붐이 일기 시작했고 이에 나스닥과 S&P500 지수가 급상승을 시작했다. 그러자 기존의 빅 화이브(Big 5)에서 테슬라와 엔비디아가 가세한 새로운 조어인 매그니피션트 세븐, M7이 만들어졌다.

 

 

미 증시 상승의 두 가지 축

 

 

미 증시의 놀라운 상승은 결국 두 가지 요인, 즉 엔 자금의 유입이 하나의 축이고 또 하나는 엔의 유입과 유사한 시기에 생겨난 AI 붐에 힘입은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먼저 코로나 팬데믹 당시의 무제한 양적완화는 연이은 금리인상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엔 캐리 자금의 지속적인 유입, 즉 외부 요인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잘 진정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연준의 파월은 인플레가 끈적대면서 잘 죽지 않는다, sticky 하다고 표현했다.

 

추가상승, 지속적인 상승을 원하는 시장 쪽에선 언제 연준이 금리를 내릴 것인가를 고대하고 또 연준을 압박했다. 하지만 금리를 섣불리 내렸다간 그 즉시 인플레이션이 거세게 되살아날 것을 알고 또 우려하고 있는 연준의 파월은 연신 미적거리고 있다.

 

시장참가자들, 특히 시장의 큰손들 또한 현재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정서가 파져갔고 이에 나온 것이 “AI 회의론”이다. AI가 돈만 잔뜩 끌어다 쓸 뿐 벌어들이는 수익모델이 확실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물이 아니라 돈 먹는 하마 신세가 된 AI.

 

그리고 이런 회의론과 관련해서 가장 크게 영향력을 미친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워런 버핏이었다. 그가 8월 2일 금요일 시장에서 가지고 있던 애플 주식의 절반을 매도했다는 소식이 주말에 퍼져나갔다.

 

그러자 그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은 바로 아시아 증시였다. 날자가 빠르기 때문이다. 8월 5일 월요일 아침부터 거센 매도세가 연출되었다.

 

 

폭락의 크기가 역대 기록

 

 

나 호호당의 기억에 그리고 이어서 확인도 해보았지만 하루만의 낙폭으로만 치면 역대 최고의 폭락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기록.

 

그런데 정작 미 증시는 8월 5일(우리 시간으론 6일) 아침에 폭락장으로 시작하긴 했으나 장 마감 무렵엔 이미 상당 부분 낙폭을 만회하면서 끝을 냈다. 시장 참가자들은 낙폭이 너무 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 당시 급락과 그 이후 급등을 경험한 우리 신세대 투자꾼들 또한 8월 5일 당일의 폭락을 바겐세일로 판단하고 대거 매수에 나섰다. 기관들은 겁이 나서 매도했지만 신세대 개미들은 그 물량을 받았고 오늘까지 수익을 올리고 있으니 일단은 신세대 개미들의 승리라 하겠다.

 

 

7월 31일에 감을 잡았는데 

 

 

나 호호당의 경우 7월 31일 엔화의 폭등을 확인한 뒤 이거 어쩌면 문제가 생기겠는데? 하는 감을 잡았다. 그런데 뜻밖으로 8월 1일 시장에 별 문제가 없었다. 이에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역시’였다.

 

다만 나 호호당의 판단이 시장보다 하루 빨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주말 일요일 8월 4일에 미 증시에 큰돈을 넣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워런 버핏이 애플을 왕창 팔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월요일은 거친 모습을 보겠구나 싶었다.

 

이에 8월 5일의 거친 하락장에서 선물 매도로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생각보다 하락폭이 너무 커서 도중에 정리하고 나왔다는 점이다. 종가까지 뒀으면 엄청 수익을 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엔 캐리와 AI 붐, 그리고 인플레이션

 

 

개인의 얘기는 접고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이처럼 미 증시의 상승과 이번 폭락의 배경에는 엔 캐리 트레이드를 통한 자금유입과 AI 붐이라고 하는 재료가 맞물려서 만들어낸 결과이며 또 그 배경에는 죽지 않는 인플레이션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제 좀 더 나 호호당의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아직은 하락이나 조정이 아니다. 

 

 

이번 폭락으로서 본격 조정 또는 하락장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

 

아직은 ‘아니란 생각’을 한다. 불안심리가 증폭되어 오다가 터지긴 했지만 미국의 M7 주가를 보면 기본 흐름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워런 버핏 할아버지를 포함한 신중한 세력들이 이제 시장에서 이탈한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이번 상황은 일단 일본은행에서 급격한 금리인상을 자제하겠다고 밝히면서 마무리되고 있다.

 

따라서 열쇠 즉 키는 여전히 연준의 파월이 쥐고 있다. 금리 인하를 할 것인가 언제 할 것인가 얼마나 할 것인가에 달렸다.

 

미 증시의 일부 세력들은 파월더러 즉각적으로 ‘세게’ 인하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흉악한 놈들이다. 거기에 낚이면 큰 일 날 것이다. 가령 50bp 정도의 급격한 인하를 단행할 경우 시장 참가자들은 오히려 경기침체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면 정말 증시에 큰 패닉이 닥쳐올 수도 있을 것이다.

 

 

향후 전망

 

 

따라서 시장은 이제 조만간 안정세를 보일 것으로 판단이 된다. 우리 증시도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 틀림없다. 코스피로 2700 선까진 반등할 것 같다. 다만 문제는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열쇠는 파월이 아니라 미국 대선에 달렸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트럼프냐 해리스냐의 문제, 누가 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반드시 대선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증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도 알아두어야 한다.

 

경우의 수, 즉 Number of Cases는 참으로 다양해서 그 모두를 이 자리에서 설명하긴 너무 복잡 번잡하다.

 

이에 여타 문제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금줄인 일본의 태도와 협력 여부에 따라 많이 다를 것이란 점이다. 일은이 금리를 언제 다시 인상하느냐 아니면 이 선에서 포기하느냐에 따라 엔화의 가치가 크게 변동할 것이고 그에 따라 엔 캐리 청산이 정해질 것이다.

 

다음으로 M7의 경영자들에게 있어 AI가 이젠 물러설 수 없는 치킨 게임이 되었기에 투자를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정말 니 죽고 나 살자 게임이 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를 통해 돈을 풀어왔고 코로나 팬데믹을 핑계로 무제한 풀었으며 거기에 엔 캐리 자금까지 그야말로 경제 규모 대비 시중 통화량(M2)이 이젠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통화량 폭주는 경제의 양극화를 만들어내었고 이에 중산층 이하 백인들의 불만을 통해 생겨난 괴물이 바로 트럼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트럼프가 되면 갈 데까지 가보자면서 연이어 통화량을 폭주시킬 수도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리스가 확실히 좋다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당선이 되고 나서 가령 이젠 우리 좀 자제합시다 하면서 재정과 금융 쪽에서 보수적으로 나올 경우 그건 경기침체를 촉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문제라 본다. 당장 미 증시를 위시해서 폭락한다는 건 절대 아니고 이런 문제들이 결국 작용할 것이라는 점, 아울러 그에 대한 당국자들의 창의적인 대응 또한 만만치 않기에 지켜볼 일이라 하겠다.

 

 

이 글을 쓰느라 힘들었다는 얘기 드린다. 

 

 

상황이 많이 복잡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여러 번 고쳐 썼다. 좀 더 자세한 사정과 실정은 일요일 증시 동향 강좌에서 말씀드릴 생각이다.

 

모처럼 긴 글이었다. 하지만 나름 많이 줄이고 잘라낸 글이란 점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며칠 걸려서 썼다. 성원해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저 미친 놈의 더위, 언제 누가 데려가실 거나, 정말 힘들다. 

'호호당의 雜學잡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월의 생각  (0) 2024.10.12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6(종결)  (0) 2024.07.16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5  (0) 2024.07.12
니나 내나 사회  (0) 2024.07.09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4  (0) 2024.07.08

 

(소제목: 잘 준비해야 잘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프다 보니 얻게 된 하나의 覺醒(각성)

 

 

올 해 초 발바닥 앞쪽에 심한 통증이 왔다. 두 발 다 그랬는데 정형외과에 가서 주사 맞기도 하고 여기저기 치료를 다녔으나 신통치 않았다. (발이 이처럼 아프게 된 근본원인은 오래된 내성발톱 때문인데 예전에 치료가 상당히 어려웠다. 다행히도 늦었지만 이번에 제대로 잘 치료하고 있다.)

 

제대로 걷지를 못 하니 심한 우울증이 왔다. 창밖 멀리 활달하게 걷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아리랑 노랫말이 있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68년간 걸어 다녔으니 고맙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 호호당도 이제 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미쳤다.

 

나 호호당이 아픈 건 비단 발병만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 불편해져왔고 마침내 발병까지 나서 내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코로나, 정확히 말하면 코로나 백신 이후에 怪疾(괴질)이 생겨서 지금껏 고생하고 있으니 정말 백신 탓인지도 모르겠다.

 

 

남의 일이던 죽음이 이제 내 코 앞의 일이 되고 있으니  

 

 

3월 중순부터 간신히 걷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부터 나 호호당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까진 죽음은 남의 일이었는데 이젠 내 앞의 일이 되었다.

 

그러자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최근에 와서야 대충 정리가 되고 있다. 이에 쓰기 시작한 글이 바로 이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 시리즈이다.

 

우리가 제법 장거리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상당 기간 헷갈리기도 한다. 여행하면서 있었던 많은 일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현실의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때론 어느 게 더 현실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기도 한다.

 

그러다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역시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속 일처럼 특별하고 이례적이었음을 받아들이면서 日常(일상) 생활로 완전히 되돌아온다.

 

현재 나 호호당의 심정이 아제 막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는 도중의 그것과도 같다. 여행은 마쳤지만 며칠 있어야 일상으로 정상 복귀하게 되는 그 중간 과도기.

 

이 대목에서 일상은 죽음, 존재의 없음, 그리고 無(무)이다.

 

그래서 나 호호당은 이제 그간 즐거웠던 여행의 일들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 즉 죽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삶을 마무리하고 ‘존재의 없음’으로 돌아갈 준비.

 

이번 연재는 오늘 글이 마지막이다. 글을 써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이에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도 대충 마무리가 되고 있다. (발도 많이 좋아졌고 다른 증세들도 호전되고 있다.)

 

 

어느새 게임은 막바지

 

 

현재 이번 7월 25일이면 만 69세가 된다. 목표로 잡은 90까지 산다 해도 이미 75%를 넘어섰다. (69 나누기 90 하면 0.766이 나온다.)

 

그러니 나 호호당이 지금 사실상 다 살았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90분 경기인 축구로 치면 후반전 24분이 경과하고 있으니 이제 경기는 막바지인 셈이다.

 

이기고 있을 경우 수비를 강화하면서 순간순간 역습을 노려야 할 것이고 지고 있다면 그야말로 교체 카드를 아낌없이 투입해야 하는 긴박한 시간이다.

 

하지만 인생은 축구와는 달리 여러 측면이 있기에 나 호호당의 경우 이기고 있는 것들도 있고 더 점수를 따야 할 것도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호호당 인생의 마무리 플랜

 

 

첫째, 최대한 건강을 회복해서 남은 시간 동안 이른바 餘生(여생)을 알뜰하고 절실하게 사용한다. 여전히 목표는 90까지이다.

 

둘째, 나 호호당이 알아내고 이론적으로 정리한 운명과 자연의 심오한 원리인 “자연순환운명학”이 遺失(유실)되지 않도록 동영상과 자료를 만들고 또 AI를 통해 영어와 일어 중국어 등으로 옮겨놓을 것. (실로 대단한 원리이기에 호호당 사후 30년이면 전 세계가 경이롭게 받아들일 것으로 확신한다. 남겨만 놓으면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보일 것이다.)

 

셋째, 운명상담을 해가면서 자연순환운명학과 주식기법 강의를 계속해서 이어가되 강의 빈도는 조금 줄인다. (주식기법의 경우 일반에 공개하기에는 너무 결정적인 것들이 많아서 인터넷이나 공개강연은 하지 않을 생각이고 오로지 오프라인 강좌를 통해서만 가르쳐줄 생각이다.)

 

넷째, 죽기 전까지 해야 하고 해보고픈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그 사이에 정했는데 이제 건강을 회복하면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마지막으로 이건 문자 그대로 요망 사항인데 죽기 석 달 전까진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었으면 한다. 제발 그렇게 되길 빌고 또 빌어본다.

 

 

지금부터가 진짜 절정의 시간들일 수 있겠기에 

 

 

다시 축구 얘기를 하면 국가대항전일 경우 후반전 24분을 경과할 무렵이야말로 가장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있다. 리드하는 상황이면 굳히기에 들어가야 하고 리드 당하는 상황이면 그야말로 이판사판 나서야 한다. 그 어느 쪽이든 재미 만점이다. (생각해보라, 22년 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에게 지고 있다가 대역전을 한 추억, 얼마나 재미있었는가 말이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 비록 몇 년 사이 몸이 아프고 최근에 발병까지 나서 우울증도 왔지만 이번 일만 잘 넘기면 그야말로 지금부터야말로 절정의 세월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후반전 24분이 절정의 시간이듯이.

 

기행문의 형식으로 글을 진행해왔다. 그간 다녀본 장소들에 대한 추억들, 물론 너무 많아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그리고 나 호호당 개인의 내밀한 얘기들은 물론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진짜 는 그 속에 다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그간의 여행, 삶의 여행은 참으로 즐거웠고 힘들었고 다채로웠으며 예기치 않은 일들로 가득 메워졌다.

 

단지 하나 아쉬운 것은 한창 시절은 그 한창 시절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나 호호당의 그 한창 시절에 누군가 내게 “야, 호호당, 지금 너 한창이다, 똑바로 인지하면서 세월 보내길...” 하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해줬는데 내가 못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마무리를 준비할 여유가 주어졌으니 고마울 따름

 

 

그저 다행스럽다. 몇 년 사이 몸이 아프면서 최근 들어 얼추 다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각성으로 인해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해서 편히 “없음의 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혹시라도 해서 하는 얘기인데 오늘 이 글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고 해서 무겁질 않기를.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보다 조금 더 살아온 호호당의 이 글이 독자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삶, 더 알찬 삶을 살기 위한 좋은 어드바이스가 될 수 있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지나가고 끝난 뒤에야 아, 그건 사랑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

'호호당의 雜學잡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월의 생각  (0) 2024.10.12
이번 증시 폭락과 향후 전망  (0) 2024.08.14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5  (0) 2024.07.12
니나 내나 사회  (0) 2024.07.09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4  (0) 2024.07.08

 

(소제목: 서산과 태안 그리고 안면도)

 

저번에 동해 바다를 갔으니 이번엔 서해바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안면도 방면이다. 안면도를 포함하여 태안군과 서산시, 이 일대의 땅은 나름 확연하게 다른 정취를 갖고 있다.

 

동쪽의 높은 태백과 소백에서 갈라져 나온 산들이 바다로 들어가는 지형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산이 있지만 높지가 않고 언덕이 있지만 가파르지 않다. 여기저기에 적당히 숲이 있고 나무가 있어 가릴 것은 가리고 보일 것은 보여준다. 거칠고 험한 느낌이 없으니 점잖고 고상한 면모가 느껴진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산IC로 빠져서 마애삼존불과 보원사 절터가 있는 618번 지방도로나 開心寺(개심사)로 가는 647번 도로를 가보시길 권한다. 길 양쪽의 완만한 언덕 위로 서산 한우목장을 비롯해서 여타 목장들이 이어지는데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여느 산과 들과는 달라도 많이 달라서 異國(이국)의 정취를 안겨준다. 우와, 이런 데가 다 있네, 하고 탄성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홍성IC로 나가서 간월암 가는 길, 나지막한 산 속으로 뚫린 갈산터널을 나서면 갑자기 툭-하고 시야가 터진다. 오른 쪽으로 끝없이 너른 벌판이 펼쳐진다. 1980년대 시절 간척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농경지, 폭이 6킬로미터에 깊이가 무려 15 킬로미터의 광대한 평지를 오른 쪽에 끼고 달리게 된다. 눈이 절로 시원해진다.

 

조금 더 가면 바다를 가로막은 긴 방조제가 나오고 看月庵(간월암)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달을 바라보는 암자, 간월암, 이름 자체만으로도 낭만적이다.

 

간월암은 물이 들면 섬이고 물이 빠지면 육지와 연결된다, 예전엔 물이 들면 줄배를 타고 건너곤 했다. 사실 이게 이 절의 매력이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이던 무학대사가 이 섬에 들어와 움막을 짓고 수도를 하던 중에 어느 날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 간월암의 시작이란 설이 있지만 분명하진 않다. 분명한 것은 무학대사가 이 근처에서 출생했다는 점과 현대 선불교의 큰 스승인 만공선사가 낡은 암자를 중창했다는 점이다.

 

2003년 여름 자연순환운명학 강좌를 시작하면서 수강생들과 처음 이곳에 들렀고 그 이후 안면도를 오가면서 으레 찾곤 했다. 재미난 점은 이 절엔 법당 관음전의 맞은 편 바다 쪽에 용신을 모신 해신각이 있고 오른 쪽으론 산신각이 있다는 점이다. 산과 바다의 신이 모두 있다.

 

간월암을 보았다면 이젠 안면도로 가야 한다. 길을 나서면 부석면 남쪽의 또 하나의 광활한 간척지 논을 만난다. 다시 B 방조제를 지나면 태안이다.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안면도 쪽이다. 금방 다리가 나오고 거기를 통과하면 안면도로 들어선다.

 

일단은 안면도로 가고 있지만 그 반대쪽 부석면 중앙의 낮은 산 위에 있는 부석사 또한 기가 막힌 서해바다 절경을 선사해준다. 절로 올라가는 길도 정겹고 절도 예쁘다. 눈을 부릅뜬 금강역사 또한 유머가 있다. 게다가 절에서 낙조를 만나면 그야말로 황홀하다. (참고로 부석사 근처에 가면 서산 생강 유과를 파는 집이 많은데 정말 맛이 있다.)

 

안면도로 들어서서 그냥 직진하면 좋은 경치 다 놓친다. 오른쪽 해안관광도로로 들어가야 한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사실 그곳이 안면도 松林(송림) 길이다. 해수욕장이 연이어 나오는데 나 호호당이 가장 애호하는 곳은 안면해수욕장이다.

 

여름 시즌을 지나면 늘 텅 비어 있는 백사장, 갈 때마다 헤아려보지만 그 넓은 백사장에 많아야 스물, 심지어 아예 사람이 없을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한적하다, 자동차 도로와 송림, 그리고 백사장, 안면도 왼쪽 해안도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꽃지 해수욕장에 가면 사람도 많고 숙박과 횟집도 많다.

 

이처럼 서산과 태안을 나 호호당이 애호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나 관광지 때문이 아니다. 땅 자체가 매력적이다. 신두리의 모래언덕, 청포대 일대의 길고 긴 백사장, 더불어서 천수만과 간척을 통해 생겨난 부남호와 간월호 일대의 경치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천수만에 날아드는 철새들도 장관이고 겨울이 지날 무렵 철새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리를 지어 비행훈련을 하는 모습과  이윽고 떠나는 모습 또한 장관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간다.

 

언젠가의 겨울이 기억난다, 안면도의 펜션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오는데 아침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눈부신 천수만 위로 무수히 많은 철새들이 빼곡하게 떠있던 광경.

 

안면도 해안도로의 끝없이 이어지는 松林(송림)도 장관이고 광활하고 정갈한 백사장도 볼거리이다. 이번 연재 글을 쓰면서 돌이켜보니 나 호호당은 우리나라의 군데군데 참 잘도 많이 돌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여전히 많고 가볼 곳도 많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갔다, 시간만 흐르는 줄 알았더니 삶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어허, 어쩔거나!

 

여전히 90까지는 살아볼 생각인데 최근엔 죽기 석 달 전까지 내 발로 걸어 다녀야지 하는 새로운 의욕이 추가되었다. 최대한 애를 써봐야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

 

나 호호당은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특성을 “니나 내나 사회”라고 정의한다.

 

구한말, 즉 1900년 초 대한제국 시기까지 그런대로 이어오던 모든 전통적 가치와 신분질서는 일제치하 특히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깡그리 파괴되거나 사라졌고 그 이후 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켜오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지극히 평등하고 균질적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돈이 많으면 부자일 순 있어도 신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특권 계급이나 신분이 없으며 우리 모두가 암암리에 인정하는 어떤 계급적 관념도 사실 희박하다. 니나 내나 차이가 없고 또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인 것이다.

 

차이나 차별을 용인할 것 같으면 그 즉시 사회적 공분을 사게 된다. 차이나 차별을 용인하지 않기에 ‘갑질’이란 말이 성립하고 또 존재한다. 돈이나 뭔가 나름 권력이 있다고 오만하게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굴면 비난을 받는다.

 

신분이나 계급이 은연중에라도 존재하는 사회라면 갑질이란 말 자체가 없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차이가 없으면 만들어야 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 여기에 우리 사회의 평등성과 균질성은 피차간에 엄청난 경쟁을 유발한다. 쟤가 한다고? 그럼 나도 하지 뭐, 하지 말라는 법 있어? 이렇게 해서 경쟁이 시작된다. 이에 다시 주변의 누군가 따라 나서면 그게 무한경쟁, 무한모방이 된다.

 

유재석의 “무한도전”이 그렇게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것 역시 어쩌면 우리 사회의 무한도전과 무한경쟁 의식을 잘 반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외국에서 우리의 ‘개근거지’란 개념을 호기심 있게 바라본다는 뉴스가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게다가 꾸밈이 없어서 어떤 면에서 비정한 면도 있다, 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쟤 개근거지야, 하면서 놀려대고 재미있어 한다.

 

이 정도 되면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해외 체험학습 3-4회 정도 다녀오지 않으면 그 아이는 개근거지가 되고 그 부모는 무능력하고 경쟁력 없는 존재가 된다.

 

앞에서 우리 사회는 평등하고 균질적이라 말했는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해서 스스로를 높이고자 애를 쓴다. 그 방법은 결국 차이를 조성하고 차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인정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차이와 차별의 사회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모든 방면에서 암암리에 엄청난 차별과 차이가 존재한다. 없어지면 판을 바꾸어서 즉각적으로 다시 만들어낸다. 다만 아이들은 그런 부모들의 심리와 행동을 철이 없는 탓에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낼 뿐이다.

 

이에 임대주택이나 LH아파트에 거주할 경우 아이들은 차별을 당하게 되고 그 부모는 실패한 인생이 된다. 그를 피하려면 어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몇 년 전 빌거(빌라사는 거지)라든가 엘사(엘에이치 아파트 사는 사람)란 말을 들었을 때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 하지만 문화적으론 절대 평등하지 않은 우리 사회를 나 호호당은 니나 내나 사회라 부른다.

 

우리 모두 각자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하다. 그런데 그건 각자의 주관적 생각이고 사회적으론 평등이란 딱지가 붙어 있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차이를 만들고 차별을 만들어내어야 하고 그 게임에서 내가 우위에 서야 만족할 수 있다.

 

그러니 무한 경쟁이고 무한 도전이다. 양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 황새, 뱁새 없다

 

 

어려서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숏다리 뱁새가 롱다리 황새를 흉내내지 말라는 말이고 어떤 차이와 차별을 받아들이며 살라는 격언 또는 지혜였는데 오늘날엔 뱁새가 없다, 설령 뱁새일지언정 황새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니나 내나.

 

나 호호당은 우리 사회의 이런 의식 형태를 반드시 否定的(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가 가진 엄청난 힘이자 추동력이기도 한 까닭이다. 다만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좀 고달프고 힘들다는 게 문제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좀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웃의 일본은 니나 내나가 아니라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의식이 더 강한 것 같다. 중국? 공산당원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차별사회이고 계급사회가 중국이다.

 

(소제목: 태백을 넘어 동해 바다 7번국도)

 

동해 바다 7번 국도

 

명승과 고적들로 가득한 소백과 태백의 사이, 즉 양백지간에서 노니는 것도 좋지만 다시 동쪽으로 넘으면 그야말로 멋진 동해 바다가 나온다.

 

동해라 하면 좀 그렇고 동해 바다라고 해야 역시 입에 붙는다.

 

동해 바다를 둘러볼 것 같으면 먼저 고성에서 부산까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7번 국도, 정식명칭 국도 제7호선을 자동차나 시외버스로 한 번 달려보는 것이 좋다. 사이사이로 멋진 바다 뷰(view)들을 조망할 수 있어 동해 바다가 어떻구나 하는 것을 느껴볼 수 있다.

 

풀 코스로 가지 않더라도 특히 삼척과 울진 사이의 고갯길을 가보면 그 맛을 알 수 있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기도 하고 굽은 해안선과 백사장, 그리고 가파른 단애들로 해서 그야말로 절경을 즐길 수 있다.

 

 

동해 바다의 정취

 

 

그러나 동해안의 멋진 풍경과 독특한 정취를 제대로 느껴보고자 한다면 7번 국도로 빠르게 달려가는데 있지 않다. 7번 국도를 가다가 중간에 빠져서 지방도로로 들어가서 해안 도로를 달리기도 하고 작은 어항과 해수욕장을 둘러보았다가 다시 7번 국도로 되돌아오는 방법이다.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소나무 숲 너머로 하얀 백사장이 비치고 좀 더 다가가면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그 사이로 갈매기 울음소리가 파고든다. 숲을 지나 백사장으로 들어서면 눈부신 모래 위에 조개껍데기들과 해초들이 널브러져있다, 물가로 다가서면 제법 높은 파도가 밀려오고 또 나간다, 신발을 벗어들고 방금 파도가 곱게 쓸고 나간 젖은 모래 위를 걸어본다, 발자국이 패고 조금 있으면 다시 파도가 지운다, 다시 파도소리 감매기 울음 소리 들려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고요해진다. 걸으면서 상념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동해바다는 파도소리로 늘 시끄럽지만 동시에 대단히 고요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시원한 또는 차갑고 시린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난다.

 

해수욕장 이름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그저 가장 위쪽 고성의 화진포로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해수욕장의 이름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작은 어항과 그곳의 등대들, 밤이면 멀리 등불을 밝힌 어선들의 기억, 아침이면 절로 눈을 뜨게 만드는 강렬한 햇살, 그러곤 바닷가 누각과 정자들의 이름과 광경이 떠오른다. 누각이나 정자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낙산사 홍련암 입구에 있는 義湘臺(의상대)이고 다음으론 울진의 望洋亭(망양정), 너른 대양을 바라보는 정자이다.

 

 

낙산사와 홍련암, 세상 끝에 있던 곳이었는데

 

 

낙산사와 홍련암,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해마다 석탄일이 지나면 스님 한 분이 방문하셔서 하룻밤을 묵고 가시곤 했다. 바로 낙산사에 계시는 스님이었는데 내게 저 멀고 먼 강원도 끄트머리 바닷가에 있는 절이라고 얘기해주셨다. 그저 막연히 아스라이 먼 곳에 있는 절이구나 하고 여겼다. 1960년대 시절 강원도는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그게 인연이었는지 몰라도 나이 40 넘을 무렵, 나 호호당의 운세가 입춘 바닥을 기고 있을 무렵 우연히 동지 때 홍련암을 찾아갔고 그게 시작이 되어 해마다 그곳에서 동지 아침을 맞이했다, 그러길 무려 열 네 차례나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부터인가 동지기도란 것이 유행하면서 보살님들이 대거 밀려들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동지의 홍련암 행을 멈추게 되었다.

 

 

대관령, 웅장한 이름

 

 

그리고 대관령, 이름부터가 벌써 웅장하지 않은가! 그런 대관령을 나 호호당은 먼 옛날 연인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넘어갔다.

 

당시 영동고속도로는 지금처럼 직선으로 뻗은 정비된 길이 아니었고 그야말로 굽이굽이 九折羊腸(구절양장)의 꼬부랑길이었다. 마침 그 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고속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천 길의 낭떠러지가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제 그 길은 지방도로가 되었거나 그 또한 정비가 많이 되었을 것이다.)

 

나 호호당은 1955년생인데 1997 丁丑(정축)년에 입춘 바닥을 맞이했다. 42세, 세는 나이로 마흔 넷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나 호호당은 소백과 태백사이는 물론이고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서 여기저기 참으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지난 여행의 기억과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좀 놀다보니 어느새 70이네, 허 참!

 

 

세월은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길을 오가는 사이 어느새 세월이 가서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세는 나이 일흔, 70이다.

 

저번 글에서 얘기했다, 여정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면 더 애틋해진다는 말.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더 미련이 없다, 훌훌 털고 가야겠다, 전혀 이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번에 건강을 잘 회복해서 남은 세월 더더욱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나 호호당에게 이 세상은 여전히 매력덩어리인 까닭이다.

 

(소제목: 가송리, 이퇴계가 거닐던 그림 속 경치)

 

옛사람의 길을 따라서 거닐어 보았으니 

 

 

안동에 가면 가송리라고 하는 동네가 있다. 그야말로 名勝(명승),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다. 청량산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가송리에 이르러 굽이굽이 돌아가고 양쪽의 우뚝한 산은 군데군데 암벽으로 된 斷崖(단애)가 내려다보고 있어 그야말로 絶景(절경)이다.

 

청량산과 가송리를 지나온 물길은 마침내 안동호에 모여들고 그로서 비로소 강다운 강, 즉 낙동강이 본격화된다.

 

(궁금하면 유튜브에 가서 ‘미스터션샤인 안동 고산정’이라 쳐보면 경치 일부가 나온다.)

 

나 호호당을 가송리를 소개한 이는 안동 사람인 안상학이란 시인이다. 오래 전 일이다, 아마도 15년 전 정도. 안상학 시인이 내게 자연순환운명학을 배우러 왔고 그 바람에 친해져서 제자들과 함께 어느 가을날 가송리를 찾아갔다.

 

“미스터션샤인” 드라마에 보면 강 건너편에 작은 정자 하나가 나온다. 고산정이란 정자이다. 외로운 산, 孤山(고산)이란 이름을 붙인 정자. 산이 외로웠을까 아니면 정자를 지은 주인이 외로웠을까? 처음 찾았을 때 어느 쪽일까? 하고 궁리했던 기억이 난다.

 

가송리 일대는 고산정만 멋진 곳이 아니다. 농암종택 건너 편의 수직 단애는 이름이 霹靂巖(벽력암)인데 예전 시절 태백에서 떠내려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농압종택 쪽에서 물이 한 번 더 굽어 왼쪽으로 나가는 곳엔 하얀 모래톱이 있고 그 뒤편에 맹개마을이라는 멋진 곳이 또 있다.

 

 

퇴계 이황의 길

 

 

가송리 강변을 끼고 걷는 길은 안동호 쪽의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사람들은 퇴계오솔길이라 부른다. 퇴계 이황은 예순이 가까워지자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양성했는데 이 무렵 퇴계는 북쪽의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에 도산서당에서 청량산을 오갈 때의 길을 “녀던길”이라 부르는데 ‘다니던 길’이란 뜻이다. 그 녀던길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 바로 가송리 일대이며 이를 두고 퇴계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을 남겼다.

 

참고로 퇴계가 지은 것은 조촐한 도산서당이었다. 그 모습이 궁금하다면 천 원 권 지폐의 뒷면 그림에 나온다. 정선이 그린 ‘溪上靜居圖(계상정거도)’가 그것인데 이는 이황의 호 退溪(퇴계)와 직접 관련이 있다. 퇴계는 退居溪上(퇴거계상)의 줄임말인 바 이를 다시 조금 변용한 畵題(화제)인 까닭이다.

 

退居溪上(퇴거계상)은 물러나서 물가에 머문다는 말인데, 여기서 물가란 바로 도산서당이 있던 자리, 즉 가송리 일대를 포함하는 안동호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다가 퇴계가 죽고 4년 뒤, 도산서당은 임금이 편액을 내리면서 규모가 큰 서원이 되었다.

 

안상학 시인과의 인연으로 알게 되고 찾아갔던 가송리를 그 이후 한 번 더 가서 농암종택에서 하룻밤 민박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엔 그곳이 어디든 특히 국내의 장소일 경우 마음 내키면 언제든 또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일흔이 되니 생각이 바뀌고 있다.

 

 

미리미리 작별인사를 하면서 다니네

 

 

올 가을 날 선선해지면 가송리를 한 번 더 찾을 생각이고 안상학 시인에게도 전화로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 찾아가서 퇴계의 녀던길을 밟게 되면 그냥 즐기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거니 하고 작별인사도 해둘 생각이다.

 

찾아가서 작별인사를 해둔다, 이런 생각?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하지 않았다. 이젠 나 호호당의 남은 세월, 즉 餘生(여생)이 얼마나 될 지, 언제 그칠 지 모르는 까닭에 원해서 어떤 곳을 찾을 때면 작별인사를 해둔다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나중에 또 가게 되면 물론 좋은 일이고 말이다.

 

안상학 시인은 시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슬픔의 원인은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 가사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나 호호당은 주어진 삶을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늘 즐겁고 편안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렇다. 그런 까닭에 언젠가 이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때론 슬픈 마음이 든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지만 않다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혼자서 해본다.

 

 

여정이 끝날 무렵이면 애틋해지는 것이니

 

 

이 연재 글은 어떤 장소를 돌아다닌 기행문이 아니라 나 호호당이 살아온 삶 전체에 대한 기행문이다. 삶이란 이 멋진 곳에 놀러왔다가 남기게 되는 기행문, 언젠가 원래의 자리, 無(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상황을 이제 뚜렷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나 호호당의 소감을 담은 기행문인 것이다.

 

길을 가노라면 시간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삶도 함께 흘러간다는 것을 예전에 전혀 몰랐었다, 삶이 무한정 이어진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이제 마무리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니 삶을 사랑하게 된다, 애틋해진다. 사랑하는 이에게 쓴 글을 우리는 戀書(연서)라 부른다, 따라서 이 글은 기행문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한 연서라 하겠다.

'호호당의 雜學잡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나 내나 사회  (0) 2024.07.09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4  (0) 2024.07.08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2.  (0) 2024.06.28
길을 따라 삶도 흘러갔으니 #1.  (0) 2024.06.25
봄날의 비바람  (0) 2024.03.25

 

(소제목: 양백 사이로 가는 길)

 

兩白(양백)이란 太白(태백)산과 小白(소백)산을 아우르는 말이다. 예전에 산을 좀 타는 사람에게 이 말을 배웠는데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의 秘境(비경)은 80%가 태백과 소백 사이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이 지역은 북한강과 남한강, 낙동강의 상류 물줄기를 이루는 곳들이기도 하다.

 

방태산에서 시작된 내린천은 소양강을 만들고 이윽고 북한강을 만든다. 오대산에서 시작된 물은 남한강 수계로 흘러가는데 밑으로 정선 아우라지와 소금강, 동강의 가수리와 어라연 계곡, 영월의 법흥사 계곡과 맑디맑은 주천강을 지나고 단양을 지나서 충주호에 이르러 남한강이 된다.

 

그리고 영주의 부석사, 단풍 화려한 청량산, 안동 도산서원 상류의 가송리 계곡, 또 그 왼쪽의 하회마을과 회룡포, 그 아래의 주왕산 국립공원에 이르는 물줄기는 낙동강을 만들어간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니 그야말로 혼자 보기 아까운 절경들이 이어진다.

 

이를 압축해서 표현이 바로 兩白之間(양백지간), 즉 태백과 소백의 사이에 있는 비경들이다.

 

나 호호당은 50 이전에 해외여행을 좋아했지만 그 이후론 어느덧 우리나라 여행을 더 애호하게 되었다. 금전적 부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금연을 해야 하는 비행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담배를 끊었기에 해외여행이 더 좋으냐 묻는다면 여전히 아니오, 이다. 이젠 해외여행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양백지간의 장소들 하나하나마다 예외 없이 추억이 서려있고 그 추억 속에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어려 있다. 옛 사랑, 옛 사람, 한때 인연이 되었던 그리운 얼굴들이 한 장소를 떠올리면 절로 눈앞을 스쳐간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이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락이 끊어진 이도 있고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며 여전히 자주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생각할 때마다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돌이켜보니 양백지간의 여기저기를 가서 노닐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간단히 말해서 시간 많은 野人(야인)이 된 뒤부터였다. 대략 지금까지 25년간의 일이고 나 호호당의 나이 마흔 중반부터의 일이었다.

 

중년의 호호당이 좀 노닐다 보니 어느덧 노년의 호호당이 되었고 그 사이에 도끼자루는 썩었다.

 

양백지간으로 나가려면 거의 통과하게 되는 지점이 하나 있으니 만종 분기점이다. 영동고속을 타고 달리다가 문막 휴게소에서 유부우동을 한 그릇 먹은 뒤 출발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곳, 그냥 직진하면 강릉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진부IC로 나가서 정선 쪽이나 오대산 쪽으로 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오른 쪽으로 꺾어서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선다.

 

만종분기점을 지날 때면 으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프랑스 화가 밀레의 유명한 작품 제목인 ‘만종’이 그것이다. 밀레 작품의 만종은 晩鐘, 즉 교회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이고 만종분기점의 만종은 萬鍾, 즉 만개의 종이니 뜻이 다르다.

 

그런데 언젠가 영월 법흥사를 갔다가 돌아오면서 만종분기점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저녁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차창 밖의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으니 늦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내 귀에 멀리서 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상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만종분기점을 지날 때면 늘 밀레의 그림이 연상되고 교회의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뒤로도 양백지간으로 나가느라 만종분기점을 무수히 지나다녔다. 직진하기도 하고 오른 쪽으로 꺾기도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한 15년 전 쯤이었을까? 만종분기점을 지나면서 내겐 아직도 길고 긴 삶의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만종분기점의 그 저녁 종소리는 그냥 여느 하루의 저녁이 아니라 내 삶의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어갔다. 호호당의 삶도 저물고 있는 것이다.

 

(소제목: 설악과 동해 가는 길)

 

서울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양평과 홍천을 지나고 인제 합강정 공원의 고갯길에서 잠시 휴식한 다음 오른쪽으로 인북천을 끼고 내려가노라면 멀리 앞에 삼각형 모양의 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가 개천을 통과하는 다리, 한계교를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길은 동해의 고성과 미시령으로 가는 46번 도로이고 오른 쪽은 한계령을 넘는 44번 도로이다.

 

멀리 삼각형의 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 곧 동해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가 부풀기 시작하고 급기야 산 바로 앞 개천의 다리를 건너 왼쪽 길 미시령 길로 꺾든 오른쪽의 한계령 길로 꺾든 상관없이 이제 드디어 설악을 넘어 동해로 간다는 느낌이 절정에 달한다.

 

예전에는 한계령 길을 많이 갔었다. 그런데 고개의 휴게소가 문을 닫은 뒤에는 일부러 한 번 지나간 적이 있다. 그냥 46번 미시령 길을 간다. 미시령 옛길을 넘는 게 아니라 미시령 터널을 통과한다.

 

지금껏 나 호호당은 이 길을 마흔 번 이상 갔다. 예전엔 겨울 동지에 낙산사 홍련암의 일출을 보기 위해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갔었고 자연순환학 강의를 가면서 제자들과도 여러 차례 갔다. 물론 개인적인 여행으로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릴 것 없이 잘도 많이 다녀왔다.

 

홍천까지는 늘 지루하다. 그러다가 철정리, 먼 옛날 인제 원통에서 근무했던 사병들에겐 한이 서린 철정리 검문소가 있는 그곳을 지날 때면 이제 많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서히 머리가 맑아진다. 그러다가 인제 합강정 공원 고갯길을 넘으면서 급기야 각성 상태로 들어간다. 이제 곧 눈앞에 멀리 삼각형 산이 보일 것이란 생각과 함께.

 

서울에서 한계령을 넘어갈 땐 늘 기대에 부풀었다. 반대로 한계령을 넘어 돌아올 땐 고개 위에서 눈으로 멀리 동해 바다와 작별인사를 나누곤 했다. 한계령, 차가운 개울물이 내려오는 고개란 뜻이다. 그런 뜻을 알면서도 나는 늘 다르게 받아들였다. 어떤 한계를 넘어가는 고갯길이란 의미로 가슴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한계령을 넘을 때면 이제 속세 밖으로 나가서 노닌다는 느낌이었고 되돌아올 적엔 또 다시 투쟁과 노고가 있는 서울이 시작된다는 느낌에서의 어떤 限界(한계)였다. 아무튼 그렇게 받아들여졌던 한계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대로 미시령을 꽤나 싫어했다. 한자로는 彌矢嶺, 원 우리말에 한자소리를 가져다 붙인 애매한 뜻이지만 내겐 그저 마이크로, 즉 조그맣게 들여다본다는 뜻의 微視(미시)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악을 넘으면 광활한 동해 바다가 나오건만 쪼잔하게 본다니, 이게 뭔 말인가 싶어서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휴게소가 사라진 한계령을 지나지 않고 미시령 터널을 지난다, 물론 미시령 길을 지나다 보면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늘 한계초등학교 앞에서 나뉘는 길을 가다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한계초등학교가 있는 동네를 한 번 찾아가서 거닐어보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찾아보니 근처에 좋은 펜션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언제 한 번 갈 수 있을까나.

 

초여름 이맘때가 되면 늘 44번과 46번 국도가 나뉘는 그 곳, 예쁜 삼각형 산이 있는 그 장소가 떠오른다. 나이 마흔, 한창 체력 왕성할 때부터 다니던 곳이라서 묘한 추억과 정서가 그 길에 깃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최근 그 길은 더욱 한산해졌다. 속초양양 고속도로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한다. 나 역시 두세 번 지나가 보니 도저히 갈 길이 아니었다. 그냥 터널 속을 간다, 졸음방지를 위한 소리만 시끄럽다. 급한 일이 아니면 이용하기 싫은 길, 멋없는 길이다. 앞으로도 갈 생각이 없다.

 

그리고 46번 국도를 그냥 따라가면 고성 화진포에 이르게 되는데 그 사이에 있는 고개가 진부령이다. 한자로 陳富嶺, 그런데 진부형 휴게소 쪽은 전망도 없고 휴게소도 그냥 너저분하다. 문자 그대로 ‘진부’하고 흥취가 없다.

 

여름이 되자 문득 기행문을 쓰고 싶어진 걸까 싶어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길과 함께 흘러가고 있는 또 흘러가버린 내 삶의 자취에 관한 아련한 추억들과 형언할 수 없는 여러 실마리들이 자꾸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이에 이런 글을 쓴다. 다른 글 사이에 몇 번 쓰게 될 것 같다.

 

아파트 정원에 수유 만발하고 곳곳에 매화도 피어나는데 오늘은 비바람이 제법 거세다. 흥취가 일어서 잠시 산책을 나갔더니 갈피 없는 바람에 우산을 가누지 못한다.

 

겨울 지나가고 봄이 와서 저처럼 宛然(완연)하고 또 蔓延(만연)하다. 해마다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겨울은 죽어가거나 죽음의 때이고 봄은 다시 蘇生(소생)과 復活(부활)의 때이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일, 즉 非可逆(비가역)적이건만 자연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만들어놓는다.

 

며칠 전 “사람도 꽃처럼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2019년에 개봉된 ‘찬실이는 복도 많지’란 영화 속 대사라고 한다.

 

구례 화엄사에 홍매가 피었다는 소식, 수백 년 세월 동안 봄이면 회춘(回春)해 싱싱한 꽃으로 다시 돌아오는 매화의 얘기를 하면서 앞의 말과 대조시키고 있었다.

 

그게 그렇다. 사람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꽃은 되돌아온다. 그래서 슬프다.

 

하지만 이건 우리들의 착각이다. 꽃 또한 작년에 피었던 꽃은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 올 해 피어난 꽃은 또 다른 꽃일 뿐이다. 꽃 또한 한 번 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호호당 김태규”란 자는 한 번 가면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하지만 호호당과 비슷한 자는 인류가 이어지는 한 다시 태어날 것이고 또 죽어갈 것이다.

 

삶의 모든 기쁨과 슬픔은 결국 우리가 자기 자신, 즉 自我(자아)를 강하게 인지하고 인식하기에 가능하다.

 

개체로서의 자각, 즉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도 꽃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 무엇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이 얘기는 멀리 갈 것 없이 불교에서 말하는 諸法(제법)이 無我(무아)하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래서 나 호호당은 이 가르침이 싫다. 삶은 단 1회의 기회이자 공간이고 시간이기에 애틋하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흘러갈 뿐이라면 그게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대목에서 나 호호당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떠올린다. 길이 든 서로에게 있어 어린왕자와 장미는 세상에 둘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삶에 대한 집착이 어리석은 迷妄(미망)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 호호당은 하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도 하나뿐이고 당신도 하나뿐이다. 물론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아름답고 슬프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風雨(풍우)가 휘젓고 다닌다. 2024년 봄의 정취이다.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