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여자골프가 무너졌다. 

 

 

기사 하나가 눈에 밟혔다.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2010년 이후 11년 만에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아! 세계 최강 여자 골프도 그런가? 하는 생각이 일순 지나쳐갔다.

 

메이저로 꼽히는 대회는 5개, 작년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4개만 열렸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무려 3개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올 해는 제로,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 1위는 한 명밖에 없으니 간발의 차이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우연이라 치부하기가 어렵다. 우승은 고사하고 우리 선수들이 5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10위 안에 든 선수마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2003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 (18년이면 15년 더하기 3년이기에 변화가 구체화된다.)

 

얼마 전 도쿄올림픽에서의 ‘노메달’과 함께 우연이라 하기 그렇다.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으니 최선을 다했을 터인데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계 최강 한국 여자골프가 올 해로서 무너졌다.

 

골프는 돈도 있어야 하고 좋은 코치들이 있어야 하며 인프라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수 스스로의 엄청난 열정과 집념이 있어야 하는데 무언가 어디선가 허물어졌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대로 그냥 끝나진 않겠지만 이제 우리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인 시절은 지나갔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얼마 전 도쿄 올림픽에서의 부진과 함께 이제 우리 국운이 쇠약해졌음을 알리고 있다.

 

 

6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가니 

 

 

지난 세월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1955년에 태어난 나 호호당이 가진 최초의 기억이 다섯 살 무렵이었고 지금 예순 일곱까지의 세월은 62년, 그 긴 세월이 눈앞을 스르륵 스쳐간다.

 

일곱 살 유치원 다니던 무렵,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가 있었던 시절도 기억한다. 온 동네와 거리마다 웅장한 군가가 울리고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벽보가 온 동네 벽에 붙여졌다. 미처 글을 몰라서 그랬지만 군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멋진 표정을 짓던 그림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영문을 몰랐지만 어른들이 긴장하던 표정으로 보아 뭔가 큰 일이 생겼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시엔 5.16 군사혁명이라 불렀다.)

 

그땐 1961년이었고 지금은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2021년이다. 그 사이의 많은 일들을 내 눈으로 보았고 들었고 느꼈으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듣고 알았다. 그 세월 동안 문자 그대로 만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러니 나 호호당은 하나의 박물관이고 라이브러리(library)인 셈이다.

 

물론 머릿속엔 수많은 편견이 있을 것이고 착각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어쨌거나 60년의 세월을 보고 듣고 얘기하고 느껴왔다.

 

 

군사독재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나 호호당은 1974년 고려대학교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본들 유신독재 군사정권 밑에서 심부름이나 해야 할 것이란 생각에 그랬다.

 

그런데 약간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었다.

 

1974년 8.15 광복절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총성과 함께 옆으로 픽- 쓰러지는 모습, 총성과 함께 연단 뒤로 몸을 사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즉각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모습도 실황 중계로 보았다. 싫고 좋고를 떠나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저 박정희 대통령이란 양반, 나름 대담하고 骨氣(골기)가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의 손에 죽었을 당시 군 복무 중이던 나 호호당은 내무반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이가 없었다. 현기증이 났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사정권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그렇다면 난 이제 무얼 해야 하지? 하면서 당혹해 했다. 인생관을 바꿔야 하나? 싶었다.

 

 

감회도 새로운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 선언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6.29 선언, 즉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했을 당시 은행 전산부에서 근무 중이던 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서류가 든 결재 판대기를 공중에 던지고 소리를 크게 지르는 바람에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은행 본점 건물 11층 사무실에서 북쪽인 종각역 쪽으로 광교 사거리를 내려다보니 무수한 시민들의 환호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했고 온 거리가 인파로 가득 메웠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땐 청계천은 시멘트로 뒤덮인 상태였고 그 위로 고가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고가도로 밑엔 버스와 승용차 배기가스로 인해 온통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지지리 궁상을 떨던 우리나라였는데 

 

 

사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의 우리나라는 지지리도 궁상을 떨던 나라였고 사회였다. 1960년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반의 학생 수는 무려 89명이었다, 너무 많아서 “콩나물시루”라고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해 학교에서 케이크 모양의 옥수수떡과 분유 수프를 급식했는데 그 숫자가 우리 반에서만 무려 42명이었다. 당시 나는 반장이었기에 그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 옥수수떡, 지금도 먹고 싶다. 그 향기가 아주 죽여줬던 것이다. 그 바람에 계란 반찬 도시락을 가진 나는 옥수수떡을 받는 아이들에게 통사정을 해서 간신히 바꿔 먹곤 했다. 그 놈들은 특별히 봐준다 하는 표정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 호호당은 동네 친구들과 자주 부산항으로 구경을 나갔다. 별로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미국에서 들어온 벌크 수송선에서 옥수수 가루와 분유 여타 물자들을 하역하고 있었고 깡마른 아저씨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등짐을 지고 배위로 오르고 또 내리고 있는 광경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밥 반 공기를 물에 불려서 먹던 시절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동아대학교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서 중퇴를 하신 아저씨가 있었다. 사실 그래봐야 스무 살 중반이었겠지만 어린 내 눈엔 키 크고 나이 많은 아저씨로 보였고 특히 대학을 잠시라도 다녔다 하니 엄청난 지성인으로 보였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 아저씨 집에 간 적이 있다. 저녁이었는데 방안엔 등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등불이란 백열등이었는데 왜 켜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전기료를 아끼기 위함이라 했다. 약간 서늘해졌다, 아, 이 아저씨는 등불도 밝히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그러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었으니 너는 이제 집으로 가렴, 하시기에 그냥 여기에서 먹으면 안 되나요? 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아저씨는 식은 밥 반 공기를 대접에 넣고 물을 부어서 약 10분 정도 두더니 이제 같이 먹자, 밥을 불렸으니 같이 먹어도 되겠네 하시는 것이었다. 앗, 이 아저씨는 보리쌀이 절반 정도나 되는 밥, 그것도 겨우 반 공기를 물에 불려서 나눠 먹자고 하네! 하고 깜짝 놀랐다.

 

아니오, 저는 집에 갈래요, 하면서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부랴부랴 그 집을 나왔다. 우리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돌아오는 사이에 등골이 시려왔다. 저렇게 대단한 지성인 아저씨도 먹고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구나 하면서 공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유난히 얼굴이 희고 핏기가 없었다. 엄마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이고, 못 먹어서 그렇지, 하시는 것이었다. 빈혈이었던 것이다.

 

 

기적의 영약이 있었으니 그게 겨우 

 

 

못 먹던 시절 곧 죽을 사람도 살린다는 기사회생의 영양제가 있었다. 부산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약이었다. 약의 이름은 “게브랄 티”. 빨간 초콜릿 색깔의 당의정이었는데 그 약 몇 알만 먹으면 원기가 확- 솟구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물론 끔찍하게 비쌌다. 뒷구멍으로 나오는 이른바 ‘야매’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밤에 아들하고 대화를 하는 중에 그 얘기를 했다. 아들은 구글을 통해 검색해보더니 “아빠, 그 약 종합비타민이야, 지금의 센트룸이 그 약 대신에 팔리고 있고 그래”, 하는 것이었다.

 

그 또한 어이가 없었다, 그 대단한 기사회생의 명약, 무협소설 속의 소림사 대환단과 같은 영약이 겨우 종합비타민이란 사실이. 드신 날과 안 드신 날의 차이를 느껴보라는 말에 낚여서 한동안 먹다가 결국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만 둔 아로나민 골드, 겨우 그 정도 약이었단 말인가! 흔해빠진 비타민. 어린 시절 게브랄 티 몇 알 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겨우 종합비타민?

 

당시엔 하도 먹질 못해서 빈혈환자가 허다했고 야맹증 환자가 즐비했던 시절, 게브랄 티는 분명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동네에만 해도 피를 팔아서 밥을 사먹고 소주를 사먹는 사람들이 여럿 되던 시절의 얘기이다. (당시엔 보건소에 가서 피를 팔고 돈을 받았다. 헌혈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2002년 이전까지 우리는 한국이었지 대한민국이 아니었는데 

 

 

그러던 우리나라였다. 가난하고 힘겨운 나라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 스스로를 한국이라 불렀지 대한민국이란 표현을 들어보지 못 했다.

 

대한민국이 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 당시 붉은 악마들이 외치던 엇박자의 “대-한민국, 자작 짝 짜!” 하던 구호에서 시작되었다. (그게 벌써 19년 전의 일이기도 하고 또 그 무렵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이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들렸으니 참 묘하다. 그 이전엔 한국이었다.)

 

1970년대 중반 통일벼가 나오기 전까진 그저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던 한국이었다. (그런데 북한의 김일성은 1994년 인민들에게 이팝과 고깃국을 먹이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배불린 먹을 순 있어도 비싼 것을 먹느냐 싼 것을 먹느냐로 갈린 나라, 경차를 타고 사느냐 중고차를 타더라도 소나타를 사느냐 아니면 제네시스나 벤츠를 타느냐에 따라 계급이 나뉜 사회, 집을 팔고 나서 벼락거지가 되어 속앓이를 하거나 영혼을 담보로 아파트를 사는 사회가 되었다.

 

 

탄식을 금할 수가 없구나! 

 

 

여자 골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회가 인다. 앞으로의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그래도 또 다시 힘차게 일어서는 때가 오겠지? 하는 기대, 또 그러기 위해선 참으로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을 거쳐야 하겠지? 하는 생각이 함께 든다.

 

60년이면 하나의 순환주기이다. 그 긴 세월 속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앞으로 그리고 뒤로 끊이지 않고 오간다. 어허- 참! 절로 탄식이 나온다.

일요일 오후 연남동의 중국 만두 집에 들렀다가 일산 방향으로 잠시 갔다. 다시 되돌아오는 길에 백미러에 비친 놀이  일순 눈에 들었다. 잠시 차를 세우게 하고 갓길에서 찍었다. 가로등이 정중앙에 잡혀서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지만 어쨌거나 모처럼 아름다운 놀을 만났다. 즐겨주시길...

 

가을장마라 한다, 태풍도 한 분 방문하신다 한다. 반가운 비는 '비님'이지만 많이 오면 '비놈'이 되는데. 10년도 더 전에 찍었던 사진인데 제자가 화일을 보내왔다. 반가웠다, 아, 그래 이런 컷을 찍었었지! 한다. 제자의 스마트폰 속에 그간 잘도 있었군 했다. 2009년 10월이었으리라, 당시 제자들과 인제 내린천이 흘러내리는 미산계곡으로 놀러갔을 때의 사진이다. 솔잎에 맺힌 빗방울이 아웃포커싱된 배경의 단풍 색과 어울려 계절의 정취를 잘 담아내고 있다.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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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가로로 긴 그림에 재미가 들었다. 가로로 50 센티 세로로 30 센티 그림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먼 북쪽 몽골의 황량한 산록 위를 날고 있는 콘돌, 하늘에서 빙빙 돌면서 먹잇감을 찾는 콘돌을 보았다.  주어진 시간 내에 먹을 것을 찾아 잡아먹지 않으면 저 독수리는 살 수가 없으리라, 나 호호당은 위장이 약해서 늘 소화제를 달고 산다. 저 콘돌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몽골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체하는 일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먹지 못해서 일이지 먹은 걸 소화시키지 못해서 힘든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안하고 죄송하다,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생명들에게. 먹잇감이 되어야 하는 놈, 먹어야 하는 놈, 자연은 그야말로 에누리가 없는데 나는 입맛이 없다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황량한 경치를 좋아한다. 젊은 시절부터 늘 동경해왔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견디기 어려워서 돌아왔다. 그래도 동경한다, 그래서 이렇게 그린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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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증시는 변동성 장일 뿐 아직 하락장을 바라보기엔 너무 빠른 시점입니다. 그냥 조정이 이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변동에서 많은 개미들이 갈아타기를 반복하다가 또는 마냥 삼성전자를 사놓고 기다리가다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삼성전자는 손대지 말거나 아니면 매수 후 쳐다보지 말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간 세 차례 걸쳐 주식 강좌를 했던 바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간 제가 연구해온 최고의 노하우이지만 의외로 제대로 활용하시는 분이 적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건 상당 기간의 연습을 통해 체득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강좌는 증시 서바이벌 키트란 제목으로 증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핵심 생존 기술들을 알려드렸습니다. 당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6개 가지였습니다.

 

 

1. 박스권 장세에 대처하는 방법

2. 매수 후 ‘물렸을 때’ 빠져나오거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

3. 60일 이동평균선을 활용하여 중기 혹은 장기투자하는 방법

4. 주식와 증시의 꼭지점을 가장 빨리 확인하고 빠져나오는 방법.

5. 주식과 증시의 바닥점을 가장 빨리 확인하고 매수하는 방법.

6. 눌림목 매수와 추격 매수의 핵심 요령.

7.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만들어가는 방법.

 

 

그런데 그날 강의는 시간 관계상 1번과 2번을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나머지 4개는 심도 있게 다루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증시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금년 장에선 수익률이 겨우 20%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보니 일반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대부분 마이너스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 물렸다는 얘기가 많이 들려옵니다.

 

이에 일종의 보충 강의와 함께 이동평균선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터득한 기법들과 함께 앞에서 미처 깊이 다루지 못했던 내용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주식에 손실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주식 트레이딩과 투자에 취약한 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흔히들 지난 뒤에 그게 눌림목 매수시점이었다, 한 번 정리할 시점이었는데 등등 말을 하지만 문제는 그걸 사전에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에 강좌를 실시합니다.

 

 

사실 이번 강좌는 기존에 교육을 받았던 분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번 내용이 별개의 것인만큼 새롭게 신청하셔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코로나 시국인 터라 환기가 잘 되는 큰 강의실에서 인원은 한정된 상태에서 강좌를 하고자 합니다. 마스크 착용은 물론 필수입니다.

 

 

강좌 개요

 

 

강의 개최 일시: 2021년 8월 29 (일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강의 장소: CNN the Biz 강남교육연수센터 강의실 (Tel. 02-564-4172)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400 미터.)

 

강좌 내용:

 

 

1. 5일 이평선과 21일 이평선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트레이딩하는 기술

(일반 주식 책이나 유튜브에서 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2. 21일 이평선과 62일 이평선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증시 전체와 종목의 대세를 파악하는 방법.

(이 역시 일반 주식 책이나 유튜브에서 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3. 진짜 콜든 크로스와 가짜 골든 크로스를 구분함으로써 매도 매수 타이밍을 정하는 방법.

(책이나 증권방송에서 얘기하는 내용은 사후적으로 그랬었다는 식이어서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4. 주식과 증시의 고점과 바닥을 가장 빨리 확인하는 방법에 대한 보충 강의.

 

수강료: 60만원

 

강좌신청방법: 제 메일(1tgkim@hanmail.net)로 신청을 하시면 참강 확인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 또는 오후 3시 이후에 제 작업실 전화로 신청하셔도 되지만 최근 코로나로 인해 상담이 없으면 작업실에 나가지 않는 날도 많아서 가급적 메일 신청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02-534-7250)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것은 넓은 강의장이긴 하지만 인원을 가급적 적게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청이 많은 경우 8월 29일 일요일에 이어 9월 5일에 한 번 더 하고자 합니다.

색칠 놀이가 재미가 나서 잘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그냥 블루를 칠하는데 아들님께서 보더니 뭐 같은데, 약간 밤 도시 풍경 같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좋아, 추상화가 아니라 구상화로 만들어보지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 혹은 추억이 있었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여름에 친구들과 해운대 가서 놀았던 기억이다. 서울의 멋진 언니들이 내려오는 해운대였기에 혹시나 했던 마음도 있었다. 숫컷의 발정이었다. 밤하늘의 붉은 색이 바로 그 기분이다. 이젠 아련하고 희미하다. 당시 해운대의 밤은 불빛이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그림의 기법은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라울 뒤피 풍이다. 엉터리 그림이지만 느낌은 당시의 감성이 충분히 살아있다. 만족한다. 독자님들도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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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물화란 것을 그렸더니 재미가 났다. 그래서 토요일 강의를 마치고 와서 그냥 칠하기 시작했다. 일단 일을 벌리는 것이다. 노랑과 빨강을 칠하다 보니 꽃모양이 나왔다. 그래서 당연히 잎사귀도 좀 넣어야 해서 옆에 곁들였다. 그러자 제법 그림 같아졌다. 그래서 밑에 화분을 깔았다. 으레하는 상투 수법이다. 그리다 보니 칠하기 시작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차갑고 약간의 녹색 톤을 가진 셀루리언 블루가 오늘 저녁 칠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른 쪽과 잎사귀에 실컷 칠하고 바르고 나니 갈증이 좀 가셨다. 기왕 그린 거 완성했다. 전체 그리는 시간은 20분, 이런 즉흥적인 스케치 풍의 색칠하기를 즐긴다. 일종의 연습이기도 하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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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만난 사진을 보고 그렸다. 창밖의 잎사귀에 가을 느낌을 넣었다. 오렌지 색과 커튼의 차가운 푸른 색이 인상적이었다. 커는 옆의 자기 티포트 무늬가 예쁘다. 이런 그림은 사실 아주 쉽다, 드로잉 5분, 칠하는 데 5분, 하지만 싱그럽다. 가성비가 좋은 그림이다 싶다. 앞서의 그림이 약간 감상적이라면 이 그림은 싱그럽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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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 방안으로 가을 바람이 잘도 불어댄다, 새벽녘엔 무척 서늘하다, 그러니 감각은 계절을 앞선다. 억새풀 있는 가을 강변을 그렸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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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면접 시의 질문 내용을 보니 격세지감이 드네! 

 

요즘 우리 기업들은 젊은이들에 대해 너무 어려워하고 심지어는 무서워하는 것도 같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우연히 기업들이 면접할 때 물어보는 질문 내용을 보았는데 그게 참 예전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기업들의 걱정이 속내까지 훤히 보였다고 할까.

 

질문 내용 중에 이런 게 있다. 능력과 책임감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정확하게 풀이하면 입사를 지원하는 젊은 너희들이 무슨 능력이 있겠니?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야 우리가 미국에서 최고의 경력을 밟은 귀하신 분을 모셔오면 되는 일이니 그런 거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슴다, 하는 자세를 가졌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질문 아예 없었다.

 

또 이런 질문도 있다. 가령 당신이 우리 회사의 사장이라면 어떻게 경영을 하겠는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원자가 다소나마 좀 튀는 구석이 있는지 한 번 테스트해보는 질문이다. 100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생각하지 못한 특이한 비전을 제시하는 지원자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다 거기에서 거기다. 그저 ‘구라’ 좀 치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영업 쪽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 또한 예전엔 없던 질문이다.

 

아주 웃기는 질문도 있다. 나이가 많은 선배나 상사들과 어떻게 지낼 수 있는지? 하는 질문이다. 이걸 보면서 나 호호당은 그야말로 빵- 터졌다. 젊은 친구들을 어지간히 무서워하는구나!

 

정답은 무조건 존경하고 어지간하면 지시나 충고를 따를 것이며 그간의 경력만큼 실력을 인정하고 열심히 배울 것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요즘 기업들이 젊은이들을 얼마나 다루기 힘들어하는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가령 나 호호당이 입사할 당시엔 저런 질문 자체가 없었다. 만일 질문을 받았다면 무슨 그런 惶感(황감)한 질문을 하십니까? 오로지 충성, 멸사봉공! 하겠슴다! 했을 터인데 최근엔 저런 따위를 면접 시에 물어보고 있다.

 

 

꼰대란 말을 들으면 힘들어하는 기성세대

 

 

요즘 나이든 세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꼰대 같다’는 말이 된 것 같다.

 

물론 꼰대 기질이란 게 있긴 하다. 시도 때도 없이 참견하고 가르치려드는 사람, 뻑 하면 우리 시절엔 말이야! 하면서 상대방 눈치도 보지 않고 길게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 원하지도 않는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충고나 자문을 해주겠다는 사람, 그런 게 꼰대라고 할 수 있겠다.

 

대충 586 세대까지가 꼰대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왜냐면 선배라 하면 무조건 충성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고 군대에서 복무했고 또 직장을 다녔기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세대 즉 이른바 X 세대들이다. 1970년대 중반에 출생한 이 세대는 개인주의와 선배와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들이 젊은이들을 무서워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대는 현재 기업의 간부나 이사들이다, 이들은 신입 시절을 속으로야 싫어도 겉으론 이유 따윈 묻지 않았고 물을 수도 없었던 환경에서 일했다. 그런데 이제 간부의 입장에서 지시를 내려야 한다. 그런데 이젠 합리적인 이유 또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야만 젊은 신입들이 따라준다, 그러니 어렵다.

 

 

까라면 까던 시절도 있었는데

 

 

예전엔 막말로 “까려면 까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충성을 강요하자니 반발이 두렵고 그렇다고 마구 풀어주자니 성과를 내기 어려워서 고민이 많다. 이들은 직장 선배나 상사 앞에서 함부로 숨도 쉬지 못했는데 오늘에 이르러 직장에서도 맘 편히 숨을 쉬면서 일하겠다는 부하 젊은이들을 만나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이직이 심한 탓에 조금 가르쳐서 약간 쓸 만하면 딴 데로 옮겨가버린다, 그러면 또 다시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속성으로 키우려면 ‘푸시’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회사를 그만 둘 것 같아서 그 또한 어렵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의 압력도 심하다, 괜찮은 직원이 그만 두거나 이직을 하면 기업의 오너라든가 윗선에서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지적을 받기 일쑤이다.

 

그러니 이래저래 요즘 기업들, 정확히 말하면 기업의 간부들이 젊은이들을 속으로 엄청 힘들어하고 심지어는 무서워하고 있다.

 

 

곱게 자란 우리 젊은이들

 

 

어린 시절부터 각종 권리를 인정받으면서 곱게 성장한 우리 젊은이들이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생각에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거나 다소 억울한 상황에 처하면 너무나 힘들어한다.

 

예컨대 어떤 젊은이의 경우 공무원이 길게 보면 제일 좋다, 무난하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아 도저히 못하겠다고 사표를 낸다. 그간의 노력이 아깝지도 않은가 싶다.

공무원 정도면 우리 사회에서 나름 상층에 속하고 근무환경도 나름 합리적이고 타당하건만 그 정도의 근무환경도 견뎌내지 못할 정도면 어디에 가서 일할 수 있으랴!

 

 

먹고 사는 현장은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아서 

 

 

어딜 가나 먹고 사는 현장은 그다지 합리적이거나 온당하지 않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 역시 정의롭지 않은 곳이 먹고 사는 현장이다.

 

먹고 사는 현장은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불평등하고 더욱 불공정하며 결코 정의롭지 않다. 이는 미국도 그렇고 유럽이나 일본도 크게 차이가 없다. 현실의 세상은 평등하지 않기에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을 취업에 성공했어도 바로 실망한다. 취업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있고. 기업들은 젊은이들을 어려워하고 젊은이들은 직장의 현실에 적응하질 못한다. 신입 사원이 우아한 생활, 인간답게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극히 드물다. 무지막지한 ‘아빠 찬스’를 살릴 수 있는 직장이 아니면 어렵다.

 

그러니 총체적 난국이다. 취업을 아예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정작 괜찮은 일자리를 구했다 해도 견디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의외로 많다. 기업도 고생이고 젊은이들도 고생이다.

 

 

이래저래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거나 하지 못 하는 현실

 

 

일자리만 그런 게 아니라 결혼과 출산 역시 그렇다.

 

급여가 좋은 직장에 다니는 미혼 남녀들은 인생을 언제 즐기랴, 구속받기 싫다는 심정에서 연애나 좀 할 뿐이다. 괜찮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미혼 남녀들은 수입이 적어서 결혼에 대해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래저래 못 한다.

 

게다가 현 정부 들어 저금리의 막대한 돈 풀기로 인해 부동산 특히 수도권의 경우 둥지를 틀 수 없어서 더욱 그렇다. 저출산이 문제라 하니 정부의 막대한 지출에 힘입어 “저출산 산업”만 커질 뿐 출산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기성세대 대다수는 자녀교육에 막대한 비용을 쓰다 보니 老後(노후)가 어렵고 대다수 젊은 세대들은 곱게 크긴 했지만 이래저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박하다.

 

최근의 세태를 보면서 답답해서 한 번 속내를 털어보았다. 오늘의 얘기를 두고 독자들이 호호당 역시 꼰대라 한다면 변명하지 않겠다. 요즘엔 5060 꼰대보다 3040의 젊은 꼰대들이 더 싫다는 말도 들려오는 시국이니 꼰대란 말이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다.

 

 

개망신을 당하고 있는 미국

 

 

마지막으로 미국 얘기 좀 하겠다.

 

아프간에 20년을 투자한 글로벌 강국 미국이 줄행랑을 쳤다. 이런저런 변명도 많이 한다, 아프간의 대통령부터 수준이 저질이니 우리로서도 별 수가 없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그런 줄 모르고 들어간 미국 스스로의 무지몽매함과 오만은 뭐라고 해야 할까 싶다.

 

미국에겐 베트남 전쟁에 이어 또 하나의 흑역사일 뿐이다. 미국이 저토록 개망신을 당하고 있는 건 올 해 2021년이 미국의 60년 순환에서 가장 굴욕적인 때 즉 春分(춘분)의 때라서 그렇다. (2013년이 입춘 바닥인 미국이다.)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전쟁은 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변명인데 그렇다면 그간에 미국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도 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얘기 아닌가!

 

바이든이 “국익이 도움이 안 되면” 이란 단서를 달자 당장 난리도 아니다. 그러자 바이든은 방송사와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 대만이나 한국, 나토 국가들, 일본 등은 아프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방위공약에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참 다행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니. 반도체 때문에 그런가?

 

사실 꽤나 전부터 올 해 미국이 망신수인데 과연 어떤 일이 있을까? 하고 궁금히 여겼는데 아프간에서의 야반도주 줄행랑으로 귀결이 났다.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상징권력인 종교가 미국의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어떤 면에선 더 강하다는 점이다. 이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