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이 조금은 엉뚱하게도 길동 4거리 근처 주택가 지하 1층이다. 약간 마음에 걸렸는데 정작 가서 보니 넓고 조명이 좋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갤러리 운영 역시 사업, 비싼 임대료 내다가 결국 문을 닫느니 오히려 이런 곳이 더 나은 게 아닌가 싶다. 22 점의 그림을 걸고 나서 기념 사진을 한 컷 찍었다. 동영상을 올리느라 얼굴을 내보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올리긴 처음이다. 죽을 때까지 그려야지 하고 스스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배경의 그림들은 핀이 나가있다, 내 얼굴에 초점이 맞춰진 탓이다. 그게 조금은 거슬린다, 얼굴이야 어떻게 나오든 뭔 상관, 그림들이 더 잘 나왔어야 하는데 싶다.

 

전시기간은 11월 3일부터 28일까지이지만 나 호호당이 매일 나가있진 않는다. 혹시 오실 분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6일과 13일 토요일은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있을 것이고 일요일은 21일과 28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갤러리에 있을 계획이다. (주차는 5대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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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하늘을 보며 아, 시월이구나! 했는데 현재 시각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고 밤 10시 14분이다. 늘 시월은 빨리도 잘도 지나간다. 이번 시월은 23일 상강부터 하늘에 구름이 보이지 않았는데 마지막 날은 종일 흐렸다.

 

늦가을 정취는 맑은 날도 좋고 흐린 날도 좋으며 비가 내려도 좋다. 시월은 어쨌거나 모두 정취가 있다. 그러니 빨리 가나 보다.

 

한 해를 하루로 치면 시월은 戌時(술시),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 사이, 이미 해는 졌고 누군가에겐 나이트 가든 파티의 시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가로등 등불을 어깨에 받으며 쓸쓸히 걸어가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절정의 시간이고 누군가에겐 悲感(비감)의 시간이다.

 

비감, 슬픈 감정이란 말이다. 이런 말을 자판으로 쳐놓고 보니 문득 “백년의 고독”이란 문구가 떠오른다. 그런데 두 개의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소설 제목이고 또 하나는 같은 이름의 일본 소주가 그것이다.

 

어느 날 중국 출장을 다녀온 친구가 술 한 병을 주었다. 술 이름이 百年孤獨(백년고독)이었다. 바이니엔꾸두? 그냥 중국 백주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일본 술이었다. 허 참! 중국 사람들이 일본 술을 마시다니 거 신기하네! 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아직도 그게 일본 술이란 것을 모르고 지낼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거 소설 제목 “백년의 고독”을 따서 지은 거 아닌가? 싶었다.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랬다. 이름 잘 지었네, 고달프고 외로울 때 한 잔 하란 얘기겠지, 좋은 이름이야.

 

이미 전에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은 바가 있었는데 혼란스럽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서 엄청 헷갈렸다. 그런데 문장 속에 마구 던져지는 대사와 묘사들은 엄청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가볍게 그냥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읽다가 말았다. 이거 잘 못 낚이면 한참 가겠구나 싶어서 그만 두었다. 정확한 표현으론 빠져나와야 했다.

 

왜? 내가 머나 먼 남미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까지 느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다 읽지도 않았지만 소감을 말하면 삶이란 표현할 길 없는 고독이구나 했다. 그 이후로도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게 술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또 다시 ‘백년의 고독’과 만났으니.

 

그러다가 몇 달인지 아니 한 두 해 지나선지 잘 모르겠지만 술을 개봉해서 한 잔 마셨다. 작업실이었다. 이런 술은 혼자서 마셔야지, 당연히 獨酌(독작)을 해야지만 그래도 술 이름에 걸맞는 예우가 아니겠어! 하면서 두어 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테이블 맞은 편 서가에 소설 “백년의 고독”이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서 책을 가져왔다 들쳐보았다. 역시 매혹적이고 혼란스러웠다. 이건 아니야, 그만 두자 하면서 다시 다른 책들 사이에 끼워놓았다. (나중에 그 책을 폐기했다, 다시 읽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그리곤 창밖을 내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름이었는데 갑자기 바깥 하늘이 겨울처럼 느껴졌다. 술기운이 돌자 이름답게 외로워졌던 모양인데 그게 寒氣(한기)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춥고 외로워’가 함께 다니는 말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당시의 풍경과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수도 있으리라. 언젠가 얘기했지만 나 호호당은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을 믿지 않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獨白(독백)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얼마 전 어떤 여자가 술을 한 병 줬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하는 영화 대사였다. 홍콩의 왕가위 감독이 만든 “동사서독”이란 영화가 그것이다. 왜 이 대사가 떠오르지? 하고 생각해보니 백년고독과 醉生夢死(취생몽사), 나름 맥이 연결되는 탓에 그랬던 모양이다.

 

백 년 동안 외롭게 지낼래 아니면 취해 살다가 꿈꾸듯이 죽을래? 뭘 택할 거니? 누군가 내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답했다. 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백년고독으로 가야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는 자문자답이었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날이 겨울처럼 추워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三伏(삼복)에 生寒(생한)이라, 복더위에 추위를 느끼면 그건 참 그런데 싶다.

 

이제 11월 1일이 되었다. 시월은 갔다. 2021년의 시월은 영원히 저편으로...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신기해한다.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이건만 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되나? 사라진 과거이고 아직 오지도 않았고 아예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닌가. 미래가 온다면 그건 이미 현재일 터인데.

 

아무튼 아쉽다, 시월이 갔다는 것이. 그래서 위안해본다, 11월의 날들도 시월처럼 좋을 것이라고, 최소한 11월 7일의 입동 전까진 戌月(술월)이니 사실상 시월과 같을 것이라고. 아직 일주일씩이나 남았지 않은가.

 

저녁 무렵에 본 단풍이 생각난다.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그리고 싶어진다. 사실 늘 그림을 그리거나 그릴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여름에 겨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겨울에 여름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공연한 말이 아니다. 가을에 봄의 벚꽃 피는 정경을 그릴 것 같으면 분홍꽃이 차갑고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러면 묻곤 한다. 제대로 벚꽃을 그렸지만 가을이라서 보는 내 눈이 쓸쓸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그려지는 건지 그걸 모르겠다.

 

겨울 말미가 되면 계절에 지친 나머지 화창한 봄날을 그려보곤 한다. 그런데 그 그림을 나중에 늦봄이 되어 다시 펼쳐보면 ‘지나치게’ 봄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 봄은 분홍의 벚꽃만 피는 것도 아니요, 마냥 화창하고 화사한 것만은 아닌데 겨울에 그린 봄 그림은 늘 ‘오버’를 한다.

 

앞에서 술 얘기를 꺼내다 보니 술이 한 잔 마시고 싶어졌고 이에 냉장고에 가서 뒤져보니 백세주가 조금 남아있다. 가져와서 한 잔 마신 뒤 다시 한 잔을 잔에 채워놓았다. 엷게 썰어놓은 단무지 한 점을 씹으면서 보니 접시 위의 노란 단무지가 은행잎처럼 보인다. 역시 가을이구나, 단무지가 은행잎으로 보인 적은 난생 처음이다.

 

노란 물을 들인 달고 짭짤하며 물기 빠진 무 슬라이싱, 꽤나 일본적이다. 술 안주거리로도 충분히 걸작이다.

 

겨울 말미가 겨울이 지루하고 여름 말미면 여름아, 어서 가라 하는데 왜 가을은 가는 게 아쉬울까? 그러니 가을은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다. 봄은 생기발랄한 맛도 있지만 窮氣(궁기)도 보인다. 하지만 가을은 그저 풍요롭고 화려하다. (그런데 약간은 의심스럽다, 이런 생각은 아직 내가 가을 안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시월이 갔다, 그러니 이제 슬슬 한 살 더 먹을 준비를 해야 하겠다. 시월은 참 빨리 지나간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수채화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작가 3인의 공동전시입니다. 기간 중에 한 번 들러서 감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보시다가 마음에 들어서 사신다면 그야 저로선 영광이고 더욱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될 것이니 지극히 고마운 마음일 것입니다. (참고로 알려드리면 저 호호당의 그림은 그다지 비싸지 않습니다. 가격은 150만원에서 230만원 사이입니다.) 덧붙여서 알려드리면 정직성 작가는 국내 화단의 중진작가로서 한창 성가를 올리고 있으며 사마손 작가는 결혼과 육아로 인해 공백기를 거친 후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작가란 점 알려드립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자연과 우주는 가장 경제적으로 움직인다. 

 

 

자연의 현상, 예로서 기상의 변화는 워낙 복잡다단해서 일기예보는 툭 하면 틀린다.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변화 또한 실로 복잡해서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다. 더해서 우리가 속해있는 거대한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 현상의 바탕에 놓인 다양한 변수들과 그 변수들의 관계를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언젠가 그것들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또는 신념을 가지고 연구해가고 있다.

 

그런 과학자들에게 있어 커다란 의지처 또는 낙관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이 하나 있다. 최소작용의 원리란 것이 그것이다.

 

 

최소작용의 원리 

 

 

영어로는 Principle of least action.

 

자연계는 물론이고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의 모든 것은 가장 경제적으로 움직인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만큼 어쩌면 하나의 믿음이자 信念(신념)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이 원칙이 확립되기까지 거의 여러 천년에 걸친 많은 연구와 가설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져왔다. 그걸 이 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기엔 분량도 그렇고 아울러 수학의 이론들을 동원해야 하기에 설명을 생략한다.

 

그저 최소작용의 원리를 알아낸 이는 19세기의 윌리엄 해밀턴이란 천재 수학자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바탕에 데카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페르마도 있고 또 다른 천재수학자들인 오일러와 라그랑주가 다듬어놓은 방정식이 있다. (이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들이 간혹 나오기 마련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빛은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날아갈 때 직선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서 보면 빛이 휘어져가기도 한다. 왜 빛이 휘는 거지? 하겠지만 휘어지고 굽어져가는 것이 알고 보면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쉬운 예로 빛이 물속에서 공기 중으로 나올 때 역시 굴절을 일으키는데 그 역시 가장 빨리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를 최소시간의 원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더 발전해서 최소작용의 원리로 정립되었다.

 

재미난 점은 이 원리의 오랜 버전은 AD 1세기 그리스의 공학자였던 헤론이란 사람이 빛은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날아갈 때 최단거리로 움직인다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최단거리가 최소시간일 것이니 자명해 보이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빛이 공기 중에서 물속으로 들어가거나 나올 때 휘어진다. 그렇기에 최단거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휘어지는 것이 최소시간이 소용되기 때문인 것을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천재 수학자 페르마가 알아내었다는 사실이다.

 

굽어지고 돌아올지언정 그게 더 빠르다. 신기하지 않은가!

 

더 신기한 것은 자연이 가장 합리적인 경로를 택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이 어떤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많은 경로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경로를 연산해낸다는 말이 되니 더더욱 신기해진다.

 

 

최소작용의 원리와 현대우주물리학

 

 

이처럼 얼핏 이상하고 신기하게 들릴 수도 있는 최소작용의 원리는 전자기학이라든가 일반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에 적용되었고 그를 통해 근현대 과학의 성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하나 들겠다. 현대 우주물리학은 빅뱅으로 해서 생겨난 우주가 현재 138억 년이 되었다고 계산하고 있다. 현대 우주물리학자들은 빅뱅, 즉 우주가 처음 시작된 직후의 첫 1조분의 1조분의 1조분의 1조분의 1초까지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지극히 짧은 시간이 흐른 뒤의 3분 동안에 생겨난 일은 대단히 정확하게 알고 있다.

 

1조분의 1조분의 1조분의 1조분의 1초를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하면 10의 32승 분의 1초를 말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극도의 미세한 시간이다.

 

이런 말을 하니 불교 용어인 刹那(찰나)가 떠오른다. 찰나란 시간의 길이는 대략 0.013초를 뜻하는데 이게 고대인들에겐 너무나도 짧은 시간의 길이였다. 물론 지금도 극히 짧은 시간이다. 아마도 찰나란 시간의 길이는 우리 인간이 그 시간 동안에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이 아닐까 싶다. 일종의 반응속도라 할까.

 

불교에선 刹那三世(찰나삼세)란 개념도 사용한다. 현재의 찰나를 현세(現世)로 하고 그 앞뒤의 찰나를 각각 과거세(過去世)와 미래세(未來世)로 하는 삼세의 개념이다. 모든 것이 1찰나 전에 생겨나서 지금 찰나에 사라지고 다시 1찰나 뒤엔 다른 무엇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에선 1 찰나 정도의 시간을 마치 대단히 긴 시간인양 다루고 있다. 찰나란 시간의 길이는 우주물리학자들이 다루는 빅뱅 이후 10의 32승 분의 1초란 시간의 길이에 비하면 너무나도 장구한 세월이니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우주물리학자들은 빅뱅 이후 10의 32승 분의 1초 이후 3분까지 벌어진 현상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빅뱅 이후 10의 32승 분의 1초 사이에 벌어진 일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에 어쩌면 그 지극히 짧은 시간의 영역이야말로 수학에서 말하는 정해진 값(또는 절대값)과 극한 또는 극한값을 나누는 경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사실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목표를 수행하고자 할 때 흔히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할 수 있지? 우리 역시 자연처럼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존재인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빠른 코스에 대해 앞서와 같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는 직선 코스를 찾는다. 보통의 우리들은 최소거리와 최소시간을 사실상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보통의 인간에게 있어 거리와 시간은 구분이 되질 않는다고 얘기해야 맞을 것이다. 그게 그거지 뭐!

 

흔히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표현을 쓴다. 삶의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길로 느끼는 까닭이다. 시간과 거리가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과제를 수행할 때 우리들은 거기까지의 직선 코스, 또는 질러가는 길이 무엇이냐 묻곤 한다. 영어론 shortcut!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성미가 급하고 질러가길 좋아하는 빛이란 놈도 때론 가장 빨리 가기 위해 휘어져간다는 사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기도 하겠지만 그게 그렇다. 이 대목에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서인 孫子兵法(손자병법)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先知迂直之計者勝(선지우직지계자승), 此軍爭之法也(차군쟁지법야).

 

“우선은 돌아가는 계책을 알아야만 승리할 수 있으니 이는 전투의 방법이다.”

 

물론 돌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냐를 놓고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선결요건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돌아가는 길일 수 있을 것이고 때론 목표지점을 점령하기 위해 저항이 적은 지점을 돌아서 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경우마다 최적 경로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이 역시 최소시간의 원리이자 결국 최소작용의 원리를 설파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자병법은 역시 대단한 책임을 확인한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자연마저도 최적경로를 찾아내건만 우리 대부분은 최단거리와 최소시간마저 구분하지 못한다. 때론 돌아갈 줄 알아야 빨리 간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보만이 욕망에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욕망 때문에 눈이 어둡다. 순순하게 받아들이자!

 

 

絶對(절대)라고 하는 것

 

 

지금까지의 얘기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絶對(절대)란 것에 대해 얘기해본다. 흔히 神(신)을 絶對者(절대자)라고 부른다. 절대의 존재란 뜻이다. 그렇다면 절대란 무엇일까?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견주거나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 수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또 다시 극한(limit)이 연상된다.

 

극한(limit)이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해진 값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의 값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絶對(절대)란 것 역시 우리가 무한히 근접해갈 순 있어도 끝내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거리와 시간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절대의 또 다른 이름인 神(신)에 대해 그 존재가 무엇이고 어떻다는 둥 감히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얘기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우리 인간처럼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등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참고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1927년에 낸 “존재와 시간”이란 책을 통해 “존재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점에 대해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캐묻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神(신) 또는 절대자에 대해 어떤 무엇으로든 판별하려 들거나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절대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敬畏(경외)의 마음이라 본다.

 

절대의 영역을 우리가 상정해볼 순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영역은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최대치는 그 값에 무한히 근접해가는 값 즉 극한값(limit) 비슷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다.

사진을 바탕으로 기분 가는 대로 밝게 칠해본 그림이다. 늘 뭘 그릴까 생각한다. 그러다가 오늘은 이 이미지가 마음을 끌었다. 밝은 남프랑스의 햇빛, 한 때 아비뇽의 幽囚(유수)라고 조롱을 받던 사건이 옛날에 있었다고 하는 바로 그 아비뇽의 성당이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이 프랑스 국왕의 위세에 눌려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가서 지냈던 일이다.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똘마니 역할을 했던 모양인데, 그럼에도 아비뇽에서 교황청 사람들은 잘 먹고 잘 놀았다고 하니 그렇게 나쁜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이 그림의 포인트를 말하면 강물 위의 밝고 견고하며 심플한 건물의 모습과 물에 비쳐서 잘게 부숴지면서 복잡한 형태를 보이는 건물 그림자의 대비이다. 하늘은 그냥 연하고 부드러운데 빛은 강물 위에서 옆으로 엷게 슬라이싱되고 있다. 아비뇽, 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갈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세상 안에서 살다 가는 게 그저 좋을 뿐이다. 내게 있어 빛은 마스터이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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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체력이 달려서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보고 좀 더 깉은 가을 분위기로 그렸다. 동강 물은 지금도 그대로 흐르고 있으려니 사람은 한 해  한 해 쇠해가는구나. 즐겨주시길... 아, 그러고 보니 무서리 내린다는 상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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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

 

 

井底之蛙(정저지와),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이 있다. 통찰과 역설로 가득한 莊子(장자)의 외편 秋水(추수)에 나오는 얘기이다.

 

가을비가 많이 내려 黃河(황하)의 물이 마구 불어나자 황하의 신인 河伯(하백)은 야, 내가 정말 대단하구나, 내 물이 빵빵해서 물가가 저 멀리 아득한 것이 그야말로 내가 최고가 아니겠어! 하고 득의양양했다.

 

이에 황하는 호호탕탕하게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바다에 이르러보니 물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야말로 끝이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하백은 깜짝 놀랐다. 온 천지에 물밖에 없다니 이건 또 뭐냐? 나보다 훨씬 크네, 어쩜 이럴 수가! 하고 감탄했다.

 

이에 하백은 흠모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바다의 신 若(약)이 나타나서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겐 말이지 바다가 크다는 것을 설명해줄 수가 없다네, 자기 주변의 좁은 공간이 세상 전부인 줄 알잖아, 그런 놈에게 바다의 크기를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겠어! 허 참!”

 

그러면서 우물 안 개구리 얘기가 나온다. 개구리가 바다거북을 만나게 되자 우쭐대며 자랑질을 늘어놓는다.

 

내 사는 게 즐거워, 우물가 위로 뛰어올라 놀기도 하고, 피곤하면 깨어진 벽 틈으로 들어가 쉬기도 해, 물에 뛰어들면 양편 겨드랑이를 수면에 대고 턱을 물 위에 받치기도 해, 우물 바닥의 진흙을 발로 차보면 발등까지만 빠질 뿐 위험한 일도 없어.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 이런 놈들을 보면 나보다 못해, 그냥 우물 하나를 오롯이 차지하고 지배하는 이 즐거움이야말로 최고야, 야, 거북아 너도 한 번 들어와 보지 않을래?

 

이에 바다거북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헐! 한다.

 

 

세상 좀 알고 보니 오히려 우물 안 개구리가 부럽구나!

 

 

세상 넓은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寓話(우화)이다. 나 호호당은 고등학교 시절 장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래, 모름지기 넓고 큰 세상을 눈으로 보고 느껴봐야지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다. 세상을 다 보진 않았으나 그게 넓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 세상을 좀 돌아다니다보니 이젠 굳이 가보지 않아도 세상천지가 넓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저 좁은 식견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어리석음만 경계하면 사실 우물 안 개구리도 괜찮겠다 싶다.

 

물론 그게 어렵다, 보지 않고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깨달은 자일 것이니 말이다. 멀리 나가지 않고 집안 뜨락의 나무에서 이파리 하나 떨어지는 걸 보고 천지에 가을이 온 것을 아는 경지이니 그게 쉽겠는가!

 

하지만 그를 떠나서 우물 안 개구리가 망망대해를 돌아다니는 바다거북보다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라, 바다거북이가 산란을 위해 먼 바다에서 해안까지 와서 모래펄을 기어서 알을 낳고 다시 돌아가는 영상, 분명히 보셨을 것이다. 새들이 알들을 다 쪼아서 먹어치우고 그럼에도 부화에 성공한 새끼거북들이 엉금엄금 기어서 파도치는 바다로 들어간다. 동물의 세계, 개고생이다.

 

개구리는 훨씬 편하다. 우물 안에서 짝만 찾을 수 있으면 번식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나머진 어려울 게 없다. 바다거북에 비하면 말이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좋지 않은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만 해도 너무 고맙지만 그게 또 그렇네! 

 

 

이제 우리들의 얘기로 와 보자.

 

우리 인간이란 존재, 이른바 human being 이란 동물의 신세는 분명 자연 속의 동물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삶을 누린다. 나 호호당은 정말이지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태어난 것만 해도 엄청나게 고맙다. 가령 방글라데시라든가 파키스탄, 더 멀리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무진장 고맙다.

 

몇 년 전 이게 나라냐? 하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원한다고 사람들이 투덜댄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어떤 나라, 혹시 미국?, 그건 아니지, 이 정도면 感泣(감읍)할 따름인데 했다. 미국도 미국 나름이지, 경찰들에게 툭 하면 구타당하는 ‘블랙 피플’로 태어났다면 어쩔 뻔 했어!

 

그런데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으로서 충분하고도 남는 장사인가? 하고 만족하자니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이게 문제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먹고 사는 게 얼마나 빡빡한가 말이다.

 

우리나라 자영업 비중은 2019년 24.6%로서 OECD 국가 중에서 6위로 높다. 우리보다 더 높은 나라를 보면 더 한심해진다. 1위는 콜롬비아(51.3%), 2위는 멕시코(31.9%), 3위 그리스(31.9%), 4위 터키(30.2%), 5위 코스타리카(26.6%)인데 그 다음이 우리다. OECD 국가에 속하긴 해도 저 나라들 전부 못 사는 나라들인데 그 다음이 우리란 사실이다. 대학 나와서 직장 구하지 못하면 벤처인지 스타트업인지 하다가 40대 되면 치킨집하고 그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우리 사회 아닌가.

 

학력과 스펙이 좀 된다 싶은 청년들은 애오라지 서울과 수도권으로 몰려든다. 그러니 수도권에 아파트만 지으면 대박이 난다. 천화동인이고 화천대유가 그래서 가능하다. 몰라서 그렇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과 그 언저리 사람들이 해먹었겠는가! 이에 10년 만 지나면 지방은 통으로 자연 친화적인 국립공원이 될 판이다. 지방대학 건물은 세월이 흘러 고고학 발굴의 대상이 될 터이고 말이다.

 

 

정보통신의 발달과 피라미드 구조

 

 

다시 돌아가서 얘기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사회적 동물이기에 어울려서 살아간다. 어울려 살다보니 도저히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수가 없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주변의 정보가 순식간에 퍼진다. 누가 잘 살고 누가 잘 해먹고 있으며 누가 어떤 짓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우리 정치판의 경우 프레임이란 것을 짜서 서로 비방하면서 해먹는 곳이다. 그러니 더더욱 우울 안 개구리로 남아서 살기가 정말 어렵다.

 

모두들 사회란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란 사실을 알고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계층 구조이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어도 도저히 될 수가 없다. 앞의 개구리 말처럼 “내 사는 게 즐거워, 우물가 위로 뛰어올라 놀기도 하고, 피곤하면 깨어진 벽 틈으로 들어가 쉬기도 해.” 하고 만족할 수가 없다. 우물 안 개구리야말로 세상 뭘 모르는 덕분에 安分(안분)하고 自足(자족)하면서 편히 살 수 있건만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 특히 우리 사회는 저마다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分數(분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分數(분수), 자기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즉 주어진 몫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고 여긴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대통령 스스로가 말할 정도이니 가히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時代精神(시대정신)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요한 헤르더가 언명한 바 Zeitgeist, 차이트가이스트이다.

 

냉철히 따져보면 기회가 평등하면 과정이 공정치 않거나 결과가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평등, 공정, 정의 등의 단어들은 모두 추상적인 말들이라서 그것 자체의 뜻도 대단히 복잡하다. 그러니 앞서의 시대정신은 그냥 이 시대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안분자족할 수 없는 시대, 스스로의 분수와 그릇을 인정하지 못 하는 시대, 피라미드의 정점은 더 높아가고 중간 허리는 더욱 슬림해지는 시대, 밑은 더욱 커져가는 시대, 극단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린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순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얘기를 해본다.

 

 

저마다의 分數(분수)가 있건만 

 

 

오랜 상담을 통해 사람들 각각의 분수와 그릇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사주를 봐도 그렇고 상담객의 몇 마디 말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지했다 해도 찾아온 이에게 내 속내를 얘기해주는 일은 거의 없다. 어디까지나 感(감)인 탓에 그렇기도 하지만 그걸 말해주어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運(운)에 대해서만 주로 말을 해준다. 命(명)이라 하는 것, 즉 타고난 분수와 그릇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얼마 전 밤에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생애를 사주와 관련해서 좀 더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실로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미적분과 만유인력에 대해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그의 운세 흐름에 있어 거의 바닥 무렵이었다는 사실, 1660년이 입춘 바닥이었는데 그가 그 주제들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면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1665년 경이란 사실.

 

조심성이 많았던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란 책을 통해 만유인력과 뉴턴의 3가지 운동법칙을 밝힌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운세가 입추(1690년) 직전인 1687년이었다.

 

천재의 命(명)은 이렇다. 물론 뉴턴 역시 어린 시절 적지 않은 辛苦(신고)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운이 그랬기 때문일 뿐 위대한 발상들은 바로 그 무렵에 이미 다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냥 우물 안에서 편히 살고 싶은데...

 

 

이런 경우들을 보면서 늘 생각하게 된다. 세상과 역사는 특별한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보통의 우리들은 그냥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수만 있다면 최고로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우물 안에서 조금은 우쭐하고 自慢(자만)하면서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시대는 그런 것을 용납하질 않는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그만이고 젊어선 짝을 만나서 연애도 하고 운이 좋으면 자식까지 낳고 살 수만 있다면 최고인 삶인데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그냥 온 세상이 “오징어게임”이다.

포털에서 본 이미지를 만났다. 순간 확 당겼다. 팔레트를 열어젖히고 이런저런 노랑을 풀어서 종이 위에 거칠게 칠하고 약간 톤을 정리하고 음영을 조금 넣고 원근감을 위해 멀리 사람을 표시한 뒤 앞의 두 사람을 그렸다. 급하게 칠하느라 조금 번진 곳도 있지만 뭐 좋다. 스케치란 이런 것이니. 계절을 즐겨야지. 독자들도 즐겨주시길... (어깨가 아파서 키보드를 조금만 치면 통증이 온다. 그 바람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곧 좋아지겠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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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출품을 위해 안국동 액자가게에 들렀다. 22개의 그림이다. 맡기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길을 건너 덕성여고 골목길로 해서 정독도서관 근처를 걸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북촌 한옥마을이 나온다. 언덕길에서 보니 카페가 멋있어 보였다. 흐린 가을하늘 아래 카페 불빛이 스며나오고 남녀 커플이 마스크를 하고 커피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림 구도로도 좋겠다 싶어서 사진을 찍은 후 그렸다. 아래는 원 사진이다. 비교해보면서 봐도 재미가 있겠다 싶어 올린다. 그림이 사진보다 좀 더 그레이하고 블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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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장인이 잠들어계시는 천왕사 명부전을 찾아갔다. 어승생악으로 오르는 길이다. 지도를 찾아보니 1100로라고 되어 있다. 멀리 제주바다가 보이고 제주시도 희게 빛나고 있다. 차 안에서 본 인상으로 그려본 그림이다. 가볍게 스케치하듯 그려보았다. 나는 1박2일로 돌아왔다. 사실상 아내를 이송하고 돌아온 셈이다. 사진 핀트가 좀 부족해서 그림이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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