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여자골프가 무너졌다. 

 

 

기사 하나가 눈에 밟혔다.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2010년 이후 11년 만에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아! 세계 최강 여자 골프도 그런가? 하는 생각이 일순 지나쳐갔다.

 

메이저로 꼽히는 대회는 5개, 작년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4개만 열렸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무려 3개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올 해는 제로,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 1위는 한 명밖에 없으니 간발의 차이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우연이라 치부하기가 어렵다. 우승은 고사하고 우리 선수들이 5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10위 안에 든 선수마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2003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 (18년이면 15년 더하기 3년이기에 변화가 구체화된다.)

 

얼마 전 도쿄올림픽에서의 ‘노메달’과 함께 우연이라 하기 그렇다.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으니 최선을 다했을 터인데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계 최강 한국 여자골프가 올 해로서 무너졌다.

 

골프는 돈도 있어야 하고 좋은 코치들이 있어야 하며 인프라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수 스스로의 엄청난 열정과 집념이 있어야 하는데 무언가 어디선가 허물어졌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대로 그냥 끝나진 않겠지만 이제 우리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인 시절은 지나갔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얼마 전 도쿄 올림픽에서의 부진과 함께 이제 우리 국운이 쇠약해졌음을 알리고 있다.

 

 

6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가니 

 

 

지난 세월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1955년에 태어난 나 호호당이 가진 최초의 기억이 다섯 살 무렵이었고 지금 예순 일곱까지의 세월은 62년, 그 긴 세월이 눈앞을 스르륵 스쳐간다.

 

일곱 살 유치원 다니던 무렵,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가 있었던 시절도 기억한다. 온 동네와 거리마다 웅장한 군가가 울리고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벽보가 온 동네 벽에 붙여졌다. 미처 글을 몰라서 그랬지만 군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멋진 표정을 짓던 그림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영문을 몰랐지만 어른들이 긴장하던 표정으로 보아 뭔가 큰 일이 생겼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시엔 5.16 군사혁명이라 불렀다.)

 

그땐 1961년이었고 지금은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2021년이다. 그 사이의 많은 일들을 내 눈으로 보았고 들었고 느꼈으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듣고 알았다. 그 세월 동안 문자 그대로 만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러니 나 호호당은 하나의 박물관이고 라이브러리(library)인 셈이다.

 

물론 머릿속엔 수많은 편견이 있을 것이고 착각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어쨌거나 60년의 세월을 보고 듣고 얘기하고 느껴왔다.

 

 

군사독재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나 호호당은 1974년 고려대학교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본들 유신독재 군사정권 밑에서 심부름이나 해야 할 것이란 생각에 그랬다.

 

그런데 약간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었다.

 

1974년 8.15 광복절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총성과 함께 옆으로 픽- 쓰러지는 모습, 총성과 함께 연단 뒤로 몸을 사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즉각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모습도 실황 중계로 보았다. 싫고 좋고를 떠나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저 박정희 대통령이란 양반, 나름 대담하고 骨氣(골기)가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의 손에 죽었을 당시 군 복무 중이던 나 호호당은 내무반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이가 없었다. 현기증이 났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사정권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그렇다면 난 이제 무얼 해야 하지? 하면서 당혹해 했다. 인생관을 바꿔야 하나? 싶었다.

 

 

감회도 새로운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 선언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6.29 선언, 즉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했을 당시 은행 전산부에서 근무 중이던 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서류가 든 결재 판대기를 공중에 던지고 소리를 크게 지르는 바람에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은행 본점 건물 11층 사무실에서 북쪽인 종각역 쪽으로 광교 사거리를 내려다보니 무수한 시민들의 환호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했고 온 거리가 인파로 가득 메웠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땐 청계천은 시멘트로 뒤덮인 상태였고 그 위로 고가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고가도로 밑엔 버스와 승용차 배기가스로 인해 온통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지지리 궁상을 떨던 우리나라였는데 

 

 

사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의 우리나라는 지지리도 궁상을 떨던 나라였고 사회였다. 1960년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반의 학생 수는 무려 89명이었다, 너무 많아서 “콩나물시루”라고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해 학교에서 케이크 모양의 옥수수떡과 분유 수프를 급식했는데 그 숫자가 우리 반에서만 무려 42명이었다. 당시 나는 반장이었기에 그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 옥수수떡, 지금도 먹고 싶다. 그 향기가 아주 죽여줬던 것이다. 그 바람에 계란 반찬 도시락을 가진 나는 옥수수떡을 받는 아이들에게 통사정을 해서 간신히 바꿔 먹곤 했다. 그 놈들은 특별히 봐준다 하는 표정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 호호당은 동네 친구들과 자주 부산항으로 구경을 나갔다. 별로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미국에서 들어온 벌크 수송선에서 옥수수 가루와 분유 여타 물자들을 하역하고 있었고 깡마른 아저씨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등짐을 지고 배위로 오르고 또 내리고 있는 광경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밥 반 공기를 물에 불려서 먹던 시절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동아대학교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서 중퇴를 하신 아저씨가 있었다. 사실 그래봐야 스무 살 중반이었겠지만 어린 내 눈엔 키 크고 나이 많은 아저씨로 보였고 특히 대학을 잠시라도 다녔다 하니 엄청난 지성인으로 보였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 아저씨 집에 간 적이 있다. 저녁이었는데 방안엔 등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등불이란 백열등이었는데 왜 켜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전기료를 아끼기 위함이라 했다. 약간 서늘해졌다, 아, 이 아저씨는 등불도 밝히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그러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었으니 너는 이제 집으로 가렴, 하시기에 그냥 여기에서 먹으면 안 되나요? 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아저씨는 식은 밥 반 공기를 대접에 넣고 물을 부어서 약 10분 정도 두더니 이제 같이 먹자, 밥을 불렸으니 같이 먹어도 되겠네 하시는 것이었다. 앗, 이 아저씨는 보리쌀이 절반 정도나 되는 밥, 그것도 겨우 반 공기를 물에 불려서 나눠 먹자고 하네! 하고 깜짝 놀랐다.

 

아니오, 저는 집에 갈래요, 하면서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부랴부랴 그 집을 나왔다. 우리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돌아오는 사이에 등골이 시려왔다. 저렇게 대단한 지성인 아저씨도 먹고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구나 하면서 공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유난히 얼굴이 희고 핏기가 없었다. 엄마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이고, 못 먹어서 그렇지, 하시는 것이었다. 빈혈이었던 것이다.

 

 

기적의 영약이 있었으니 그게 겨우 

 

 

못 먹던 시절 곧 죽을 사람도 살린다는 기사회생의 영양제가 있었다. 부산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약이었다. 약의 이름은 “게브랄 티”. 빨간 초콜릿 색깔의 당의정이었는데 그 약 몇 알만 먹으면 원기가 확- 솟구친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물론 끔찍하게 비쌌다. 뒷구멍으로 나오는 이른바 ‘야매’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밤에 아들하고 대화를 하는 중에 그 얘기를 했다. 아들은 구글을 통해 검색해보더니 “아빠, 그 약 종합비타민이야, 지금의 센트룸이 그 약 대신에 팔리고 있고 그래”, 하는 것이었다.

 

그 또한 어이가 없었다, 그 대단한 기사회생의 명약, 무협소설 속의 소림사 대환단과 같은 영약이 겨우 종합비타민이란 사실이. 드신 날과 안 드신 날의 차이를 느껴보라는 말에 낚여서 한동안 먹다가 결국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만 둔 아로나민 골드, 겨우 그 정도 약이었단 말인가! 흔해빠진 비타민. 어린 시절 게브랄 티 몇 알 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겨우 종합비타민?

 

당시엔 하도 먹질 못해서 빈혈환자가 허다했고 야맹증 환자가 즐비했던 시절, 게브랄 티는 분명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동네에만 해도 피를 팔아서 밥을 사먹고 소주를 사먹는 사람들이 여럿 되던 시절의 얘기이다. (당시엔 보건소에 가서 피를 팔고 돈을 받았다. 헌혈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2002년 이전까지 우리는 한국이었지 대한민국이 아니었는데 

 

 

그러던 우리나라였다. 가난하고 힘겨운 나라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 스스로를 한국이라 불렀지 대한민국이란 표현을 들어보지 못 했다.

 

대한민국이 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 당시 붉은 악마들이 외치던 엇박자의 “대-한민국, 자작 짝 짜!” 하던 구호에서 시작되었다. (그게 벌써 19년 전의 일이기도 하고 또 그 무렵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이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들렸으니 참 묘하다. 그 이전엔 한국이었다.)

 

1970년대 중반 통일벼가 나오기 전까진 그저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던 한국이었다. (그런데 북한의 김일성은 1994년 인민들에게 이팝과 고깃국을 먹이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배불린 먹을 순 있어도 비싼 것을 먹느냐 싼 것을 먹느냐로 갈린 나라, 경차를 타고 사느냐 중고차를 타더라도 소나타를 사느냐 아니면 제네시스나 벤츠를 타느냐에 따라 계급이 나뉜 사회, 집을 팔고 나서 벼락거지가 되어 속앓이를 하거나 영혼을 담보로 아파트를 사는 사회가 되었다.

 

 

탄식을 금할 수가 없구나! 

 

 

여자 골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회가 인다. 앞으로의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그래도 또 다시 힘차게 일어서는 때가 오겠지? 하는 기대, 또 그러기 위해선 참으로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을 거쳐야 하겠지? 하는 생각이 함께 든다.

 

60년이면 하나의 순환주기이다. 그 긴 세월 속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앞으로 그리고 뒤로 끊이지 않고 오간다. 어허- 참! 절로 탄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