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태어났다.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에 온 이래 지금껏 살고 있다. 계산해보면 생후 18년 7개월을 부산, 그 이후 47년 8개월을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선친은 북한의 평양이니 나 호호당의 고향은 평양이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평양과 부산의 기질을 가진 서울 사람이다.

 

말투 역시 평양 방언과 부산 방언이 섞인 서울말이다. 여기에 처가가 제주도인 까닭에 약간의 제주 말이 섞여있고 전라남도 바닷가 쪽 친구들이 많다 보니 그 역시 어색하게 섞여있다. 남도 말은 특유의 맛깔과 발음의 편의성이 있어 자주 쓰게 된다. 나름 공식석상에선 서울말을, 편한 자리에선 부산 말과 전라도 말을 편하게 섞어 쓰고 때론 제주 말도 들어가며 부산 친구를 만나면 그 즉시 부산말로 둔갑한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당신의 정체성이 무엇이오? 하고 물어볼 것 같으면 아, 저는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아이입니다 하고 답할 수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아이, 이게 나 호호당의 정체성이다.

 

내 영혼이 다듬어지고 벼려진 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도로 가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거리를 재어보니 겨우 100 미터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엔 그 거리가 제법 길고 컸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3 겨울 대학 입시 직전까지 근 10년 동안 그곳을 일주일 중에 6일 정도를 오고 갔다. 거의 3천 번을 왕복했으니 그곳이 바로 ‘나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부산 부평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수동으로 이사를 간 뒤부터 그곳은 매일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고 좋아서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쉬는 날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난 으레 책방골목의 어느 서점에 있었다. 늘 책을 구경하거나 만지고 있었고 때론 책을 샀다. 책방골목의 모든 사장님들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오는 아이를, 나중엔 학생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진 매일 동네 만화방이었고 4학년 때부터는 늘 책방골목에 있거나 지나다녔다. 당시엔 헌책방 골목이라 불렀다. 물론 중고서적만 있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매일 지나다녀야 했던 이유도 있다. 그곳을 지나는 길이 집에서 용두산 공원 아래에 있는 중국무술 도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3 여름방학까지 일요일이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도장에 나가야 했다. 사부님은 중국 화교분이셨는데 무술 수련이 끝나고 수련생들이 돌아가고 나면 나는 혼자서 사부님 앞에 앉아서 한문을 배웠다.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시간이 없으면 책방 골목을 바람처럼 스쳐갔고 시간이 나면 어슬렁거리며 책 구경을 했고 여유가 있으면 책을 만지작거렸다. 뛰어갈 땐 책방 아저씨들이 야, 이놈아, 조심해랏! 하고 외마디를 던지셨고 어슬렁거릴 때면 익숙한 무관심으로 대하셨다. 책을 만지고 있으면 그거 괜찮아, 사서 읽지 그래 하고 꼬드기곤 했다.

 

친구들 또한 내가 집에 없으면 책방 골목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친구를 데리고 길 건너 편 부평동 시장 쪽의 중국집 ‘옥생관’이란 곳에 가서 짜장 곱빼기를 휘말아 먹곤 했다. 집안 경제사정이 넉넉했던 탓에 짜장면이나 우동, 짬뽕, 때론 탕수육까지 으레 내가 샀다.

 

당시로선 비싼 청요리였기에 친구들은 얻어먹는 재미 탓에 무시로 책방골목에 와서 나를 찾았다. (대만 화교인 옥생관 사장님은 넌 그게 그렇게 맛있냐? 하며 신기해하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엄지척을 날리곤 했다.)

 

책방골목에서 정말이지 무던히도 책을 많이 샀고 또 읽었다. 내가 莊子(장자)를 처음 만난 곳도 그곳이었고 삼국지연의 역시 그랬다. 일본 요시카와 에이지와 박종화 두 분의 삼국지가 그것이다. 당시 샀던 책 중에 지금도 열 몇 권 정도는 내 책꽂이에서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평생 읽고 또 읽은 책들이고 내 보물이기도 하다. 그 책들은 컴퓨터 인쇄가 아니라 삐뚤빼뚤한 활자 인쇄의 책들이다.

 

물론 헌 책방에서만 책을 산 것은 아니다. 그곳에선 주로 내 용돈으로 샀고 고가의 책이나 양장본은 엄마를 졸라서 용두산 공원 근처의 대형 서점에서 사곤 했다.

 

고2 때 대양서적(?)에서 나온 “세계사상대전집 50권”을 전질로 산 적이 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폼을 잡을 땐 정말 아우라가 있었다. 든 것 없는 너희들이 무얼 알겠니, 이런 정도는 읽어주셔야 철학과 사상을 논해도 논하지! 하면서.

 

그리고 정말이지 끔찍이도 비쌌던 세계문화사란 책, 하드카버에 책 두께도 권당 6센티미터는 되고 크기도 A4 사이즈의 5권짜리 전집을 샀다. 너무나도 비싸서 그 책만큼은 엄마와 타협을 본 끝에 책방골목에서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아마도 지금 물가로 치면 5권짜리가 대략 7백만원, 중고서적 또한 5백만원은 충분히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1960년대 당시 국내에서 나온 책 중에선 가장 최고가의 한정판 책이었다. 학원사 출간.

 

그 책을 열 번 이상 읽었다. 지금도 세계 역사에 대해선 당시의 熱讀(열독)을 기초로 그 이후 읽은 천 권 이상의 책을 합쳐서 내 머리 속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인생은 참 그렇다. 대학 진학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고 그 바람에 대학 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부잣집 도련님께서 학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苦學(고학)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 바람에 학비 마련을 위해 그 아끼던 내 영혼과도 같은 세계문화사 전집을 청계천 헌책방에 나가서 팔아야만 했다. 중고 가격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학비 마련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긴 했다.

 

나 호호당은 1974년도 학번이다. 당시 고려대 최고 커트라인의 법대 행정학과에 진학했지만 사실 나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없다. 학비 마련을 위해 그 책을 팔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 책을 넘기고 돈을 손에 쥐었을 때의 내 심정은 참으로 처참했고 무참했다.

 

지금도 가끔 고려대 동창회 사무실인가 그 비슷한 곳에서 연락처를 갱신하시고 동창회비를 좀 내시라고 하는 지로 통지문을 받곤 한다. 돈을 내지 않는다, 나름의 원한에 대한 소심한 복수심 때문이다.

 

사회생활하면서 고려대 동문이시군요! 하고 반가워하는 동문들을 자주 만났다. 물론 친해보자고 하는 행동이지만 그건 또 다시 치유되지 않은 내 깊은 상처를 자극하는 꼴, 나는 냉담한 미소로 응대하곤 했다. 세계문화사를 내게서 앗아간 고려대학교, 지금도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 졸업한 이후 취업 탓에 성적증명서를 발급받느라 고려대학교를 한 번 찾아갔을 뿐 그 이후론 그 쪽으로 지나간 적도 거의 없다.

 

사실 고려대학이 무슨 잘못이랴! 그건 내 사정이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이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고려대학교를 용서해줄 마음이 약간 생겨난다. 다시 놀란다, 졸업한 지 40년이 되었건만 지금까지도 응어리가 있다는 사실이.

 

그 책을 팔아야 했던 일은 보수동 책방골목의 아이였던 내게 너무나도 엄청난 참사였고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하고 은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여전히 아프다.

 

직장을 다니게 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내 영혼은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 머물렀고 다시 교보문고로 옮겨갔다. 그 또한 종로 교보문고에서 지금은 강남 교보문고로. 내 작업실에서 3분 거리에 있는 강남 교보문고는 사실 나 호호당 개인의 서재이다. 내가 현 작업실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고백하건대 1974년 부산을 떠난 이후 여태껏 부산을 겨우 네 번 들렀다. 그곳은 내게 喪失(상실)의 장소인 까닭이다. 그 사이에 딱 한 번 책방골목을 찾아갔었는데 너무 변해있었다. 내가 알던 아저씨들은 한 분도 거기에 없었다.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 이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전히 그곳에 보수동 책방골목이 있지만 ‘나의 책방골목’은 거기에 없었다.

 

늙은 나 호호당은 서울에 잘 살고 있지만 책방골목의 아이는 그 거리 어딘가에서 지금도 울먹이면서 서성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아이가 그곳을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언젠가 解寃(해원)의 굿마당을 차려주어야 하겠다.

 

글을 마치려 하니 문득 “양들의 침묵”이란 소설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