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하늘을 보며 아, 시월이구나! 했는데 현재 시각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고 밤 10시 14분이다. 늘 시월은 빨리도 잘도 지나간다. 이번 시월은 23일 상강부터 하늘에 구름이 보이지 않았는데 마지막 날은 종일 흐렸다.

 

늦가을 정취는 맑은 날도 좋고 흐린 날도 좋으며 비가 내려도 좋다. 시월은 어쨌거나 모두 정취가 있다. 그러니 빨리 가나 보다.

 

한 해를 하루로 치면 시월은 戌時(술시),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 사이, 이미 해는 졌고 누군가에겐 나이트 가든 파티의 시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가로등 등불을 어깨에 받으며 쓸쓸히 걸어가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절정의 시간이고 누군가에겐 悲感(비감)의 시간이다.

 

비감, 슬픈 감정이란 말이다. 이런 말을 자판으로 쳐놓고 보니 문득 “백년의 고독”이란 문구가 떠오른다. 그런데 두 개의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소설 제목이고 또 하나는 같은 이름의 일본 소주가 그것이다.

 

어느 날 중국 출장을 다녀온 친구가 술 한 병을 주었다. 술 이름이 百年孤獨(백년고독)이었다. 바이니엔꾸두? 그냥 중국 백주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일본 술이었다. 허 참! 중국 사람들이 일본 술을 마시다니 거 신기하네! 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아직도 그게 일본 술이란 것을 모르고 지낼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거 소설 제목 “백년의 고독”을 따서 지은 거 아닌가? 싶었다.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랬다. 이름 잘 지었네, 고달프고 외로울 때 한 잔 하란 얘기겠지, 좋은 이름이야.

 

이미 전에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은 바가 있었는데 혼란스럽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서 엄청 헷갈렸다. 그런데 문장 속에 마구 던져지는 대사와 묘사들은 엄청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가볍게 그냥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읽다가 말았다. 이거 잘 못 낚이면 한참 가겠구나 싶어서 그만 두었다. 정확한 표현으론 빠져나와야 했다.

 

왜? 내가 머나 먼 남미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까지 느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다 읽지도 않았지만 소감을 말하면 삶이란 표현할 길 없는 고독이구나 했다. 그 이후로도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게 술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또 다시 ‘백년의 고독’과 만났으니.

 

그러다가 몇 달인지 아니 한 두 해 지나선지 잘 모르겠지만 술을 개봉해서 한 잔 마셨다. 작업실이었다. 이런 술은 혼자서 마셔야지, 당연히 獨酌(독작)을 해야지만 그래도 술 이름에 걸맞는 예우가 아니겠어! 하면서 두어 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테이블 맞은 편 서가에 소설 “백년의 고독”이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서 책을 가져왔다 들쳐보았다. 역시 매혹적이고 혼란스러웠다. 이건 아니야, 그만 두자 하면서 다시 다른 책들 사이에 끼워놓았다. (나중에 그 책을 폐기했다, 다시 읽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그리곤 창밖을 내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름이었는데 갑자기 바깥 하늘이 겨울처럼 느껴졌다. 술기운이 돌자 이름답게 외로워졌던 모양인데 그게 寒氣(한기)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춥고 외로워’가 함께 다니는 말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당시의 풍경과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수도 있으리라. 언젠가 얘기했지만 나 호호당은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을 믿지 않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獨白(독백)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얼마 전 어떤 여자가 술을 한 병 줬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하는 영화 대사였다. 홍콩의 왕가위 감독이 만든 “동사서독”이란 영화가 그것이다. 왜 이 대사가 떠오르지? 하고 생각해보니 백년고독과 醉生夢死(취생몽사), 나름 맥이 연결되는 탓에 그랬던 모양이다.

 

백 년 동안 외롭게 지낼래 아니면 취해 살다가 꿈꾸듯이 죽을래? 뭘 택할 거니? 누군가 내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답했다. 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백년고독으로 가야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는 자문자답이었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날이 겨울처럼 추워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三伏(삼복)에 生寒(생한)이라, 복더위에 추위를 느끼면 그건 참 그런데 싶다.

 

이제 11월 1일이 되었다. 시월은 갔다. 2021년의 시월은 영원히 저편으로...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신기해한다.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이건만 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되나? 사라진 과거이고 아직 오지도 않았고 아예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닌가. 미래가 온다면 그건 이미 현재일 터인데.

 

아무튼 아쉽다, 시월이 갔다는 것이. 그래서 위안해본다, 11월의 날들도 시월처럼 좋을 것이라고, 최소한 11월 7일의 입동 전까진 戌月(술월)이니 사실상 시월과 같을 것이라고. 아직 일주일씩이나 남았지 않은가.

 

저녁 무렵에 본 단풍이 생각난다.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그리고 싶어진다. 사실 늘 그림을 그리거나 그릴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여름에 겨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겨울에 여름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공연한 말이 아니다. 가을에 봄의 벚꽃 피는 정경을 그릴 것 같으면 분홍꽃이 차갑고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러면 묻곤 한다. 제대로 벚꽃을 그렸지만 가을이라서 보는 내 눈이 쓸쓸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그려지는 건지 그걸 모르겠다.

 

겨울 말미가 되면 계절에 지친 나머지 화창한 봄날을 그려보곤 한다. 그런데 그 그림을 나중에 늦봄이 되어 다시 펼쳐보면 ‘지나치게’ 봄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 봄은 분홍의 벚꽃만 피는 것도 아니요, 마냥 화창하고 화사한 것만은 아닌데 겨울에 그린 봄 그림은 늘 ‘오버’를 한다.

 

앞에서 술 얘기를 꺼내다 보니 술이 한 잔 마시고 싶어졌고 이에 냉장고에 가서 뒤져보니 백세주가 조금 남아있다. 가져와서 한 잔 마신 뒤 다시 한 잔을 잔에 채워놓았다. 엷게 썰어놓은 단무지 한 점을 씹으면서 보니 접시 위의 노란 단무지가 은행잎처럼 보인다. 역시 가을이구나, 단무지가 은행잎으로 보인 적은 난생 처음이다.

 

노란 물을 들인 달고 짭짤하며 물기 빠진 무 슬라이싱, 꽤나 일본적이다. 술 안주거리로도 충분히 걸작이다.

 

겨울 말미가 겨울이 지루하고 여름 말미면 여름아, 어서 가라 하는데 왜 가을은 가는 게 아쉬울까? 그러니 가을은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다. 봄은 생기발랄한 맛도 있지만 窮氣(궁기)도 보인다. 하지만 가을은 그저 풍요롭고 화려하다. (그런데 약간은 의심스럽다, 이런 생각은 아직 내가 가을 안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시월이 갔다, 그러니 이제 슬슬 한 살 더 먹을 준비를 해야 하겠다. 시월은 참 빨리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