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밤 애기무덤을 밝히던 도깨비불

 

 

장마전선이 좀처럼 북상하지 않더니 밤부터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 남부지방엔 폭우라던데.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도깨비불 생각이 났다. 직접 체험했던 도깨비불 얘기를 좀 해보고픈 마음이 든다.

 

첫 번째 도깨비불은 군 복무 시절이었다. 장마철의 어느 날 밤,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는데 부대 막사 아래 연병장과 헬리콥터 착륙장을 지나 멀리 철책이 있었는데 그 너머 나지막한 산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마치 파도치는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빗속에 온 산이 타오를 것처럼 환했다. 저녁 자유시간이라 온 부대원들이 바깥에 나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겁을 먹는 부대원들도 꽤 많았다. 왜냐면 그 나지막한 산은 온통 애기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 쪽 초소에 나가 야간 경계를 서는 사병들은 꽤나 긴장하곤 했고 또 이런저런 괴소문도 많았는데, 바로 그 애기무덤 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타오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렇지만 나 호호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그러다가 저런 거 그냥 화학현상일 거란 말을 꺼낸 것이 계기가 되어 내기를 걸게 되었다. 가서 도깨비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무서워서 가다가 포기하면 내가 지는 게임이었다. 조건은 내무반 전원이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맥주 4박스와 과자였다. 흥미를 느낀 야간 당직 하사도 어서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날더러 짓궂게 재촉을 했다.

 

 

혼자서 비오는 밤에 애기무덤으로 올라 도깨비불을 채취해보니 

 

 

나 역시 몹시 궁금했던 터라 판초우의를 입고 철모를 쓰고 랜턴을 들고 혹시나 모르니까 대검까지 허리에 차고 비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와 동료사병, 이렇게 두 명이 가기로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겁나기 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던 나는 개의치 않고 혼자 막사를 나섰다.

 

그쪽 철책엔 초소만 하나 있을 뿐 출입문이 없었지만 이른바 ‘개구멍’이 하나 있어서 바깥으로 쉽게 나갈 수 있었다. 일단 초소에 갔더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료가 너무나도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두 시간 동안 지키고 있으려니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내가 찾아가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내기를 하는 바람에 왔다고 이유를 밝히니 너 간도 크다 하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개구멍으로 나가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오를 작정인데 그 친구더러 우리 잠깐 같이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더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휙-하고 젓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서 비 퍼붓는 언덕, 도깨비불 천지인 언덕 위로 끙끙 대며 올라갔다. 워낙 밝아서 랜턴도 사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막사에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까진 대략 800 미터 거리였고 그 거리에서 도깨비불 하나가 거의 농가 한 채 크기였는데 정작 다가갈수록 불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깨비불 앞에 가자 불의 크기는 손바닥 정도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작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형광빛의 조각이었다. 몇 개 집어서 연병장을 가로질러 막사로 돌아오는 도중에 랜턴으로 살펴보니 그건 뼛조각이었다.

 

매장된 아기들의 뼈? 아니면 야생 짐승의 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백 기의 애기무덤이 있는 곳이니 아마도 아기들의 뼈가 유력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그곳에 묻힌 아기들, 태어나서 얼마 살아보지 그 아기들을 생각하니 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환한 내무반 안으로 들어오자 초록으로 빛나던 그 뼛조각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방 사라졌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나는 부대 내에서 간이 큰 사병으로 소문이 났다. 나로선 전혀 무서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훗날에도 나는 귀신 나온다는 흉가가 있으면 혼자 찾아가 밤을 보낸 적도 두어 번 있다. 귀신을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시 만나게 된 비오는 밤의 도깨비불

 

 

이제 두 번째 도깨비불 얘기를 해본다.

 

군 제대 후 동원훈련 때였다. 독수리훈련인가 뭔가 잘 모르겠지만 서울 병력이 졸지에 강원도 인제의 예비사단에 편성되어 훈련을 했다. 야산에 올라 텐트도 치고 낮엔 꽤나 먼 거리의 행군도 했다. 군 복무 중에도 그렇게 심한 훈련은 받아보지 않았는데 이게 웬 고생이냐 했다.

 

그 때는 1984년의 여름철이었다. 장마철은 지났지만 1주일의 훈련 중에 사흘이나 비가 내려서 애를 좀 먹었다. 비가 오면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산길을 걸어가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비닐로 된 우의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철모 쓰고 장비를 차린 상태에서 산길을 걷다 보면 엄청나게 땀을 쏟아야 한다.

 

저녁이 되어 야산 사면에 쳐놓은 군용 A텐트로 돌아오니 마치 집에 돌아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저녁 급식을 마친 직후에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텐트 안은 미리 건초를 잘 깔아놓았고 위치도 좋아서 물이 스며들지 않아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뭐야? 싶어 바깥으로 나가보니 건너편 산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미 군 복무 시절에 도깨비불로 인해 명성을 떨친 바 있었기에 저거 별 거 아니야, 燐光(인광)이야 하면서 잘 알고 있다는 투의 말을 했더니 동료 예비군들의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가서 가져오지요, 그냥 가긴 심심하니 뭘 좀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졸지에 30만원 빵의 게임이 되었다. 아군 30명, 적군 3명, 1인당 만원씩 걸었다. 내가 다녀올 것이니 도깨비불을 가져오면 30만 원 중에서 15만원은 내가 먹는다는 조건이었다. 저편 언덕까지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왕복하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랜턴을 들고 언덕을 올라 도깨비불을 금방 채취해서 돌아왔다. 으레 짐승의 뼈일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 불빛은 초록의 형광 혹은 인관이었지만 가져와서 다 함께 살펴보니 오래된 나무껍질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 조각을 간직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물을 뿌려도 더 이상 그 신비한 초록의 빛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파트 정원에 던져버렸다. 그저 15만원을 벌었을 뿐이다.

 

 

집단이 야지에서 이동하면 사고가 난다.

 

 

여담이지만 연대 규모의 예비군 병력이 야지에서 이동하다 보니 안전사고로 인해 무려 3명의 예비군이 사망했다는 점이다. 당시엔 그 정도 뉴스는 보도되지도 않았다.

 

사망 경위를 보면 허무하다. 훈련을 마치고 땀에 절어서 텐트로 돌아온 예비군이 시원한 개울이 있는 걸 보고 야호-하면서 풍덩 뛰어 들었다가 바로 심장마비로 죽었다. 강원도 인제 계곡의 물은 여름에도 엄청나게 차갑다. 무릎가지 들어가도 견디지 못한다.

 

또 한 명은 행군 중에 지쳐서 지프차에 실려 갔는데 그 지프차가 어쩌다가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그 결과 그 예비군만 튕겨나가서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에 전 예비군이 귀가 교통비로 받은 돈 천원을 박스로 만든 부조함에 넣어 주었다. 예비군이 대략 2천명 정도였으니 2백만 원 정도였을 것인데 당시 1984년으로선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때 배웠다. 장병들이 일정 장소에 머물지 않고 장비와 함께 움직이다 보면 안전사고가 난다는 사실을. 이동 자체가 안전사고를 초래한다는 사실.

 

 

나라에 대한 배신감

 

 

나 호호당은 현역 복무를 했고 동원예비군, 지역예비군, 나중에 민방위까지 착실하게 다 했건만 나중에 그 모든 의무로부터 해제되는 날 국가로부터 감사하다는 쪽지는 물론이고 영화표 한 장도 우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금도 불쾌해하고 괘씸하게 여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가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국가에 그 정도까지 충성을 다했으면 고맙다는 인사치레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요즘엔 도깨비불이 보이질 않으니 

 

 

그런데 요즘엔 비가 내려도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전국 도깨비들이 전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나?

며칠 전 올린 사진, 태안사 입구의 능파각을 수채화로 그린 것이다. 몸이 회복되면서 바로 그렸다. 며칠 전 끙끙 앓을 때  그릴 힘은 없고 그리고는 싶고 해서 힘들어했던 그림이다. 여름의 느낌, 바위를 덮은 이끼를 더 그려넣었다. 기둥의 붉은 색이 다소 선명한 느낌이다. 한 톤 더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즐겨주시길...

곡성, 구례와는 또 다른 아기자기함

 

 

사흘에 걸쳐 전남의 곡성군을 다녀왔다. 다녀온 후 심한 몸살과 영문 모르는 설사로 해서 사흘 동안 ‘오지게’ 아팠다. 이렇게 아팠던 것은 군 복무 중에 크게 앓았던 이후 처음이다.

 

곡성은 처음이다. 그간에 쌍계사 벚꽃 구경 등등을 이유로 구례는 열 차례 이상 지나다녔고 또 머물기도 했지만 바로 인근의 곡성은 처음이다. 그곳으로 안내해 준 고마운 사람의 덕분이다.

 

전부터 짐작하기로 곡성은 섬진강이 굽어 흐르는 마을이니 으레 그 명칭이 曲城(곡성)일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골짜기 谷(곡)의 谷城(곡성)이었다. 조금 아쉽다. 이에 좀 더 알아보니 옛날 통일신라 시절 曲城(곡성)이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성 두보의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그 운치를 그냥 살리지 그랬어! 하는 아쉬움.

 

놀랍게도 곡성은 구례와 경관이 전혀 달랐다. 구례는 지리산 아래 마을이라 스케일이 크다. 남원 고개를 올라 터널을 나와 구례로 내려가는 19번 국도를 달려본 이는 알 것이다. 왼쪽은 구름 두른 노고단이요 오른 쪽은 구례와 곡성을 나누는 산인데 그 가운데 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 정중앙을 약 20킬로미터에 걸쳐 달려 내려가는 드라이빙은 실로 호쾌하다.

 

그런데 곡성은 웅장하지 않다. 드라이빙도 그렇다. 곡성의 두물머리인 압록에서부터 곡성 읍내에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국도를 가다 보면 왼쪽은 산이고 오른 쪽은 섬진강이다. 길이 강을 따라 꺾어지기에 툭 트인 시야를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정취가 있다.

 

땅이 저처럼 다르니 사람들의 성품도 많이 다르리라. 산도 많고 谷(곡)도 많아서 도처에 奇人(기인)들과 異士(이사)들이 터를 잡고 있을 것 같은 느낌. 휙-하고 지나쳐 가면 몰라도 조금 속살을 들여다보고자 할 것 같으면 우선 다소곳하게 처신해야 할 것 같다.

 

 

여행 내내 고생을 했지만

 

 

안내한 양반이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얼마나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돌아다니는지 힘들었다. (2박3일 소주 항주 패키지 여행 같았다.) 그러니 몸살에 설사까지. 그런데 한 가지 수상쩍은 생각은 든다, 최근에 아스트라제네카 맞은 나이든 세대들의 상당수가 몸살과 설사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동리산의 태안사

 

 

아무튼 각설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泰安寺(태안사)였다. 신라 말 불교의 禪宗(선종)이 들어오던 시절 九山禪門(구산선문), 즉 전국 명산에 아홉 군데 선종 사찰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 하나인 桐裡山派(동리산파)가 시작된 절이라 한다. (동리산, 오동나무 울창한 산이라! 이름부터 아취가 있다.)

 

태안사로 들어서는 길은 오른 쪽에 개울을 낀 숲길이었다. 2 킬로미터 정도. 게다가 주지 스님이 비포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정취도 그만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만일 콘크리트 포장을 깔았으면 그저 쩝-했을 것인데. 최근 그나마 빛바랜 古刹(고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호남의 사찰들도 돈을 바르기 시작하면서 그 맛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절 산문 직전에 멋진 절경을 만났다. 개울 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내려가 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누각이 하나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묘하다. 凌波閣(능파각)!

 

 

절 앞에서 절세 미인을 만나게 되니

 

 

저 단어는 삼국지 연의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식, 칠보시를 지었다는 그 이가 아름다운 물의 여신에 빗대어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洛神賦(낙신부)에 나온다는 사실.

 

원문은 陵波微步(능파미보), 羅韈生塵(라선생진), 여신이 파도를 사뿐히 밟으며 걸으니 비단 버선에 살짝 먼지가 일고, 이런 뜻이다. 정말이지 저 洛神賦(낙신부)란 시야말로 중국 문학의 한 절정인데 지면관계상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누각 아래 커다란 바위로 물이 떨어져서 잠시 고였다가 다시 흘러가는 모습, 그 위론 푸른 나무들이 드리우고 있었다. 가히 절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시절의 화가 顧愷之(고개지)는 ‘여사잠도’란 명화를 남겼지만 실은 낙신부의 여신을 그린 洛神賦圖(낙신부도)가 더 유명하다. 조식의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그린 것이고 그 이후 수많은 유명 화가들이 낙신부도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수묵화의 대가인 傅抱石(부포석)이 그린 여인의 그림은 그야말로 고개지로부터 이어지는 중국 여인 인물화의 맥을 잇는 최고봉이라 하겠다. 기가 막힌 솜씨이다.

 

(구글에 가서 “傅抱石, 山鬼”라고 입력해보라, 바로 이미지를 만나실 수 있을 것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아쉽게도 부포석은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수묵화의 대가이지만 지레 겁 먹은 우리 미술계에선 일종의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탓이라 본다.)

 

 

경관 빼어난 천태암

 

 

이어서 곡성군 남단 높은 아미산이란 곳, 알아보니 587 미터라 하는데 정상 바로 밑에 지어놓은 천태암이란 곳을 찾아갔다. 스님 혼자서 그 암자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담력이 여간 두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법명이 큰 大(대)에 두루 周(주), 대주스님이었는데 날카로운 눈매를 감춘 채 연신 싱글벙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훌륭하셨다. 인물이 워낙 좋아서 잠시 생년월일시를 물어보았더니 2020년이 立秋(입추)의 운이었다. 스님에게 장차 크게 활동하시겠네요, 하고 얘기해주었는데 아마도 스님은 입에 발린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겠다.

 

천태암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운해가 피어나고 옅어지고 또 스쳐가고 그 사이로 멀리 보성강과 주암호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보성강은 보성에서 북으로 흘러 내려와 곡성의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도림사, 묘한 얼굴의 부처님과 보살님들

 

 

다음 날 아침 道林寺(도림사)란 고찰을 찾아갔는데 역시 계곡의 개울을 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절은 역시 개울을 끼고 있어야 정취가 있는 법이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협시보살의 얼굴이 일반 사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봐서 연대가 꽤 된 게 아닌가 싶다.

 

 

구례 천은사

 

 

그리고 나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구례의 천은사를 찾아갔다. 泉隱寺(천은사), 숨은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니 얼마나 멋진가!

 

무성한 숲이 개울을 가렸지만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 건너편에 문득 절을 만나게 되니 그곳이야말로 극락정토 아니면 무엇이랴! 苦海(고해)에 지쳐 헤매다 우연히 기대치 않은 곳에서 만나는 극락이란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구례군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저수지를 조성했으니 개울은 절반 이상 사라졌고 게다가 절 입구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깔고 그 앞엔 커다란 주차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泉隱寺(천은사)가 아니라 泉露寺(천로사)가 된 셈이다.

 

돈이 山門(산문)을 넘어서는 것이 대세인 세상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식당도 주차장이 없으면 손님이 찾지 않듯이 절 역시 사정이 그럴 것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어쩔 수 없이 최면을 건다. 저수지와 포장도로, 너른 주차장 모두를 눈앞에서 삭- 제거하고 상상을 한다. 물소리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문득 일주문을 만난다는 식의 상상력. 옛 시절 가수 김태곤의 노랫말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하는 그런 절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생각해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모든 고행의 순례길을 손님 많이 오라고 죄다 아스팔트 포장을 해놓고 세단을 타고 쌩-하고 달려오시지요, 하는 격이니 괴롭다.

 

기독교든 힌두교든 불교든 여타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성지순례란 것은 순례자 스스로 몸으로 지불하는 고생의 크기만큼 무언가 얻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절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최소한 一柱門(일주문) 앞에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당 복전함에 아무리 큰돈을 투하해도 별 소용이 없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해도 부처님은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을 것이란 게 평소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저렴해 보이니? 하면서 말이다.

 

시주하는 돈은 절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정작 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소중한 몸과 간절한 마음인 까닭이다. 다른 종교도 물론이다.

 

이제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 부처님 찾아가느라 기진맥진해서 몸살과 설사를 지불했으니 나름 한껏 바치고 온 셈이다. 필경 이번 곡성 여행은 남아도 많이 남는 장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고, 저 늙은 호호당 놈, 그래도 고생 뭐 빠지게 했으니 내 치부해둘 심산이야! 이렇게 여길 것도 같으니 말이다.

 

오늘 화요일, 이제 몸이 거의 회복되는 것 같다.

2박 3일 일정으로 전남 곡성과 구례를 다녀왔다. 좋은 인연을 만나 덕분에 참으로 좋은 경관들을 볼 수 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커다란 바위 위의 누각은 능파각이라 하니 멋지기도 하고 한편 절의 누각 이름으로는 다소 얄궃은 느낌도 있다. 능파미보라 하면 절세미인의 대명사이니 그렇다. 스님들은 물론 좋은 경치를 두고 미인에 비유했겠지만 色(색)과 空(공)의 항등식이 깨지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깨달은 스님들이야 그 경계를 이미 넘어섰기에 그랬으리라 보지만 말이다. 일정이 다소 무리했는지 다녀온 뒤 일요일까지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설사까지 겹쳐서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그럭저럭 정신이 들고 체력이 회복되고 있다. 이럴 때면 나이를 느낀다. 사실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은 생각 굴뚝 같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기력이 되질 않아 그저 머리 속으로 여러 번 그려봐야 했다. 그림 시뮬레이션! 살살 쓰다 가야할 몸이다. 독자들도 아니 이 양반 왜 글을 올리지 않지? 할 것 같아 이 사진으로 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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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또 책을 만나게 되니

 

 

한 권의 소설은 한 권의 소설로 완결이지만 지식을 다루는 책을 읽다 보면 책 안에서 또 다른 책을 만나게 된다. 아니, 소개받게 된다. 가령 최근 다시 펼쳐보고 있는 “영국 해군지배력의 역사”란 책, 영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참조하거나 인용한 책들을 널리 소개하고 있다. 으레 학자들의 책이란 게 다 그렇지만 그러다 보면 만나보고 픈 책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또 다시 그 책을 찾아 나서게 되기도 한다. 폴 케네디란 사람이 중개인이 되어 또 다른 책과 조우하게 된다. 최근엔 세상이 좋아져서 저자와 제목만 구글 검색하면 아마존에서 팔고 있거나 더러 운이 좋으면 책의 pdf 파일을 만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아마존 책 소개란을 통해 관련된 다른 책들도 소개받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의 교제와도 같다. 친한 이가 사람을 데려와 함께 자리를 했는데 나중에 그 소개 받은 사람과 친해지기도 하고 또 그 바람에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과도 알고 지내는 것과 같다.

 

 

무얼 해도 重重(중중)하고 無盡(무진)하니 

 

 

인간의 만남과 교제가 重重(중중)하고 無盡(무진)하듯 책의 세계도 그렇다.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도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끄집어내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선 조금 기다려주시기 바란다. (원래 글을 이렇게 쓰면 읽는 이의 흥미가 떨어져서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한 때 삶을 적극적으로 낭비해보려는 의지를 가진 적도 있었으니 

 

 

예전에, 상당히 오래 전에, 정확하게 얘기하면 2002년 무렵의 한 때, 나 호호당은 道敎(도교)의 팔만대장경에 해당되는 道藏(도장)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죽는 날까지 세월을 보내볼 까 하는 구상을 꽤나 진지하게 했다.

 

사주 가게를 하고 있으니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에 틈이 날 때마다 저 방대한 도장을 번역한다. 뭐 이런 아이디어였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나가서 사진을 찍거나 드로잉과 수채 스케치를 하면서 살아볼까 했다.

 

텍스트는 중국어 위키에 들어가면 전부 다 올라와 있으니 별도로 구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도교의 경전을 집대성한 道藏(도장) 역시 너무나도 엄청난 분량이라 계산해보니 살아생전에 나 혼자 다 하긴 어렵겠다 싶었다. 물론 꼭 다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울러 다 한다고 한들 그걸 책으로 출간해 줄 사람이나 출판사가 있을 턱도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해보고 싶었으니 그 이유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웃긴다. 그런 일이 삶을 낭비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예 작정하고 낭비해보는 것 또한 내 개인의 철저한 자유라는 사실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까불다가 왕창 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멋지게 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60년에 걸친 순환이론, 나중에 자연순환운명학이라 이름 붙인 이론체계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 여부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기에 당시 내게 있어 미래란 그저 無望(무망), 그 자체였다.

 

희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암울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편한 점도 적지 않다.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자는 强者(강자)라 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老莊(노장)사상을 새롭게 해석한 淮南子(회남자)란 책을 열심히 읽던 시절이라 더더욱 그런 마음이었다.

 

 

포기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자유의 한 양식인 것이니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면 家長(가장)으로서 절대 모자람이 없다. 그럴진대 장차 남은 삶을 무엇으로 놀아볼 것이냐 하는 것이 큰 과제였는데, 이왕 그럴 것 같으면 철저하게 마음 끌리는 대로 해보고 싶었다. 이 또한 自由(자유)의 한 스타일이란 생각. 그 바람에 道藏(도장)을 번역하면서 보낼까 하는 생각이 진지해졌다.

 

누군가 그런 거 왜 하시오? 하고 물을 것 같으면 그냥 합니다, 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소! 하고 대답할 요량도 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의무라든가 미션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살 뿐이오, 하는 심정.

 

2005년 무렵, 그러니까 나 호호당의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春分(춘분)의 때에 정말이지 사는 게 싫었다. 시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책을 30분만 읽어도 눈이 시리고 눈물이 나서 읽을 수 없었고 천식이 심해서 편히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누굴 탓할 수도 없고 그저 내 탓임을 알고 나니 그냥 입 꽉 다물고 세월을 보내고자 했다.

 

 

시간의 누적은 무엇이든 바꾸어놓는다. 

 

 

그런데 세월, 그러니까 시간의 누적은 무엇이든 바꾸어놓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신논현역 근처 오피스텔을 작업실로 해서 지내고 있다, 올 해 10월이면 만 20년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교의 경전을 몽땅 송두리째 번역하겠다는 생각은 가신 지 오래이다.

 

이제 글머리에서 책을 통해 책을 만난다는 얘기, 그건 마치 사람의 교제와도 같다는 얘기를 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자연순환운명학을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이 방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게 도장 번역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두게 했다.

 

형식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가르치다 보니 실로 다양한 사람과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사연과 역사, 희망과 고민에 대해 말하고 되고 듣게 되다 보니 情(정)도 생긴다.

 

그게 더 시간이 지나자 이젠 혼자서 작업실에 틀어박혀 번역만 하고 있을 순 없게 된 것이다. 그것보다는 역시 사람은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흥미롭고 재미가 있으며 때론 유익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에 어느 날 그간의 번역 파일들을 간단하게 DELETE 키로 날려버렸다. 수년간의 노고가 사라지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굿 바이!

 

 

포기하려 했더니 얻게 되는 이 묘한 세상

 

 

게다가 2007년의 어느 날 아!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운명의 법칙은 그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이제 내려놓자! 하고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답을 얻었다. 포기하려는 순간 답을 찾았다.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사는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즐거워졌다. 사람과의 교제만이 아니라 숨 쉬고 하늘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2007년은 60년 순환에 있어 청명, 즉 한 해로 치면 4월 5일경의 때와 같았던 것이고 그로서 回春(회춘)이란 게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했다.

 

 

下山(하산)의 때

 

 

내 스스로 2007년 무렵을 下山(하산)의 때로 받아들이고 있다. 높고 깊은 산중 궁벽하고 후미진 동굴 속에서 벽을 마주한 채 보내던 세월을 그만 하고 산 밑으로 내려온 셈이었다.

 

사실 후미진 동굴 속에서 내가 대하고 있던 벽 앞엔 모니터가 한 대 있고 그 모니터 속엔 ‘구글’이란 신기한 놈과 ‘위키피디아’란 놈이 살고 있었다. 그를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일생에 걸친 스토리들을 검색하면서 參究(참구)할 수 있었다. (자연순환운명학이 탄생함에 있어 절대적인 기여를 구글과 위키피디아가 한 셈이다.)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사람을 만나듯이 구글과 위키피디아 속에 들어가면 또 다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스토리, 사연들을 접할 수 있었고 나중엔 너무 확장이 되는 바람에 멈추어야 할 때도 있었다. 책 역시 그렇다. 평생 책 속에서 책을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가 유튜브를 통해 수채화 고수들의 시범을 통해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재미난 건 유튜브 속의 고수들이 보여주는 시범은 일종의 쇼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치 쉽고 자연스러운 것인 양 보여주지만 그 속엔 그들의 평생에 걸친 학습과 연마가 숨어있다. 그러니 기술은 결국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란 사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지해서 존재하는 이 신묘한 세상

 

 

겨울 동안 수채화 종이 문제로 근 6개월 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이를 구해서 간만에 그렸더니 그간 습득한 것들이 전혀 되질 않았다. 너무나도 어색했다.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그간에 터득한 것들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싶었다.

 

이에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보름 정도 열심히 그려보니 다시 내 손 끝에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문득 알게 되었다. 그림의 기술이나 기법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그건 내 머리 안에 머무는 것도 아니요, 손끝에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종이와 물감, 붓, 그림을 그리려는 흥미와 의지, 아이디어, 그리고 손과 눈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림, 그 모든 것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지해서 존재하고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는 생각.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또 사랑하고 아끼면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듯이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마무리하려는 이 글 역시 독자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나 호호당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오늘 다소 두서가 없는 글을 쓰고는 있지만 과연 독자들이 읽고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인지 그 또한 전혀 알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은 어떤 일과 것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시공간, 그러니 세상은 그저 重重(중중)하고 無盡(무진)하다는 생각이다.

 

내일 아침 나 호호당은 고마운 분과의 인연으로 해서 전라남도 곡성의 천태암과 구례군의 천은사를 찾아간다. 2박3일의 일정이다. 벌써 즐겁다.

세월이 잘도 가는 까닭은 

 

 

시간이 잘도 가고 세월도 잘 간다. 하루란 시간 간격이 정말이지 국수 삼키듯 후루룩 지나간다. 이는 생활이 나름 편하다는 얘기이고 큰 걱정이 없어서 그렇다. 하루하루가 전투의 날이고 결전의 순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런 날들을 보내봤기에. 그런 까닭으로 이렇게 살 수 있으니 그저 하루하루 고마울 따름이다.

 

간밤에 생각했다. 왜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가는 걸까? 창밖에 달이 둥그렇게 떠 있어서 화실의 등을 끄고 앉았노라니 달빛이 방안에도 찾아들었다. 아, 나는 ‘루틴’이 많구나, 그래서 하루가 금방 가는구나 싶었다.

 

 

데일리 루틴 

 

 

아침 8시 반 기상, 세라젬으로 척추를 펴고 단백질 분말 반 컵에 칼슘 한 알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9시, 증시가 개장하면 잠시 본다. 그런 후에 강아지들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갔다 오면 10시, 온 집안에 흰 강아지 털이 날리니 정전기 청소포로 거실과 안방을 쓸고 물걸레 자루를 가져와 닦는다. 그러면 땀이 나고 열이 오른다, 시원한 보이차 물 한 잔 마시고 나서 다시 증시를 잠깐 보면서 거래 여부를 판단해본다. 11시 정도가 되면 수채화 종이를 화판에 테이핑해서 스트레칭을 한다. (가급적 밤까지 기다려서 완전히 말려야 한다.)

 

11시 반, 아점을 먹은 다음 설거지를 마친다. 사실 물 적시는 것을 좋아하기에 설거지를 즐긴다. 어머니가 계실 땐 눈치가 보여서 참았지만 지금은 마음 편히 한다. 그리고선 커피 한 잔을 타서 다시 화실 모니터 앞에 앉는다. 증시를 1-2분간 살펴보고 하루 일정도 확인해보고 잠시 글을 쓰거나 아니면 그림에 손을 댄다. 그러다가 화장실 가서 일을 보고 샤워를 하고 오후 1시 반 정도에 집을 나선다. 고맙게도 아내가 차로 작업실까지 태워다 준다.

 

작업실 나가서 상담이 있는 날엔 상담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책을 읽는다. 물론 그 사이에 간단히 뉴스도 확인하고 구글에 들어가 해외소식도 좀 더 밀도 있게 들여다본다.

 

미국 의회조사국의 보고서를 읽기도 하고 최근엔 미국 상원이 통과시킨 소위 “중국 견제법” 전문을 모두 읽어보았다. 무려 281쪽에 달하는 내용이라 중국에 대해 미국 지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많은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혹시 관심 있다면 구글에 가서 “Strategic Competition Act of 2021 | SLC | download”, 이렇게 치면 전문이 나온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약속이 있는 날은 사람을 만나고, 아니면 근처 식당에 들러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소화시킬 겸 교보문고에 들러 책 구경을 하고 귀가한다. 8시 반이 되기 전에 버스를 타야 한다.

 

집에 가면 강아지들의 강렬한 환대-주로 뽀뽀와 배 만져주기-를 받은 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그러다가 밤 10시가 되면 아내와 아들, 강아지들과 함께 전 가족 산책을 나간다. 11시 경엔 아들과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음료수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고 아들이 야식거리를 만들면 조금 먹기도 한다.

 

12시가 되면 슬슬 하루를 마무리한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하루의 증시 내용을 살펴보고 글을 쓰기도 하며 그림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아니면 책을 좀 더 본다. 1시 반이 되면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 잠깐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최근엔 이 구역의 미친 X가 재미가 있었고 일본 애니 “오늘부터 신령님”이란 시리즈를 하루 한 편씩 보고 있다.

 

나 호호당은 일본 妖怪(요괴)물을 엄청 좋아한다. 요괴 이야기는 공포스럽지가않다. 오히려 요괴나 정령들은 귀엽고 애교가 있다. 요괴에 대해 일본사람들이 가진 관념이랄까 아니면 문화를 애호한다. 중국의 “수신기”라든가 “당송전기” 그리고 “요재지이”는 아무래도 옛날 것이라 일본 요괴물보다는 덜 흥미롭다.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책 읽고 상담하고 때론 사색하고 간간히 사람 만나고, 이게 전부이다. (그러니 텔레비전은 야구 중계를 잠깐 보는 것을 빼면 거의 보지 못 한다.) 거의 매일 이 루틴들의 반복이다. 그러니 시간이 잘도 가고 하루가 금방 가며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거의 없다.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걱정도 해가면서 살아야지

 

 

물론 걱정거리가 없진 않다. 살다 보면 많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견디고 기다리고 참다 보면 해결이 된다.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이 된다.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게 문제일 수 없다, 어떻게 애를 쓰고 노력하면서 길을 찾다보면 이윽고 길을 만나게 되니 그건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적극적인 해결책, 또는 솔루션이란 것을 좋아하는 미국적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가 지났으니 만물이 활개를 치는구나

 

 

계절은 夏至(하지)를 지났으니 바야흐로 무더운 여름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열이 오르고 수분이 땅속에서 공기 속으로 맹렬히 증발하고 있다. 벼는 물론이고 갖은 풀들이 서슴없이 자랄 것이고 벌레들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가 지나면 만물이 모두 부지런만 떨면 먹고 사는데 별 문제가 없어진다. 예전 농민들은 하지감자를 삶아서 배불리 먹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지로서 모든 생명들이 활개를 친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말이다. 일제 약진의 때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운 상으로 1987년이 하지였다. 우리가 먹고 살만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자 마침 아파트 붐이 일었다. 이젠 나이가 든 가수 윤수일 씨가 “아파트”란 노래를 부른 것은 1982년이었는데 이미 5년 전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시대를 미리 알리는 대중가요 

 

 

대중적으로 빅 히트를 치는 노래는 새로운 시대를 미리 알리는 일종의 嚆矢(효시), 즉 전투를 시작할 때 쏘던 화살, 살촉에 속이 빈 깍지를 달아 붙였기에 날아가면서 강렬한 파공음을 내는 화살과도 같은 것이다.

 

방탄소년단, 나로선 전혀 관심이 없지만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워낙 열광을 해대니 노랫말을 가끔 음미해 보기도 한다. 2013년에 나온 첫 앨범의 타이틀 곡이 No More Dream.

 

시시한 꿈이나 강요된 희망을 억지로 가질려 하지 말고 그냥 너답게 삶을 살아보라고! 하는 얘기이다. 이젠 더 이상 꿈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거, 즉 “이생망” 세대들을 위한 노래, ‘희망이 없지만 혹시 모르잖아, 네 식대로 하다 보면 뭔가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니? 하는 얘기이다.

 

2013년의 노래 역시 2018년을 미리 노래했다고 볼 것 같으면 우리 국운의 小寒(소한), 겨울 추위가 본격화되는 때이니 실로 시국과 잘 맞는다. 오늘에 이르러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누구인들 꿈이 있겠는가 말이다.

 

 

2007년으로서 글로벌 경제는 '아작'이 났으니 

 

 

사실 글로벌 경제는 2007년 미국 금융위기로 해서 ‘아작’이 났다. 디플레이션을 감추기 위해 돈을 남발하고 있는 오늘이다.

 

이 대목에서 약간 심각한 얘길 좀 하면 이렇다. 미국이 달러가 곧 금이던 시절을 정식으로 포기한 것은 1971년이었다. 辛亥(신해)년, 그리고 36년이 흘러 2007년 丁亥(정해)년이 되자 금이 아닌 종이돈 달러가 과잉으로 넘쳐나면서 금융위기가 닥쳤다. 모든 사물은 36년이 경과하면 어떤 결정적인 브레이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바로 종이 달러가 사실상 절대적인 가치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챈 결과로서 일종의 부산물이다.)

 

미국 연준은 더 많은 달러를 찍어냄으로써 위기를 일단은 해결했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지연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의 후속 대책이 없다.

 

 

총결산의 날이 올 것이니

 

 

그러니 총결산의 날이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어떤 수를 써도 문제를 지연시킬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란 얘기이다. 그 결산은 아마도 2025년부터 시작되고 2031년경이면 마무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보고 있다. 미국으로선 그 이전에 어떻게 해서든 중국을 ‘자빠뜨려야만’ 한다고 단단히 作心(작심)을 한 것 같다.

 

세계제패의 꿈을 꾸던 중국 또한 자빠져서 코가 깨질 준비를 다 마쳤다. 난데 아닌 황제 체제가 되면서 모든 언로를 다 막아 놓았으니 그야말로 “도둑이 들려면 개도 짖지 않는다”는 격이다. 며칠 전 초강경 논조의 중국 관영 영자신문인 “글로벌 타임즈”의 책임자가 너무 약한 소리를 해대고 있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다고 한다.

 

새롭게 자리에 앉은 사람은 보나마나 “이 구역의 미친 X”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잘 하는 짓이다.

 

나 호호당 개인의 삶은 루틴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느낌만 든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으면 첫 부분에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의 언덕과 숲 사이로 가다 보면 드라큘라 백작의 성이 나온다는 소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트란실바니아, 뭔가 울림이 있는 이름 아닌가!  뜻을 찾아보니 '숲 너머 저쪽'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구글 어스에서 찾았고 정취가 있어서 그렸다. 올 가을 전시회를 준비해서 맹렬 정진이다. 하루에 두 장씩 그린다. 8월부터는 작품을 준비해야 하니까. 다 올리진 못 한다, 독자들이 질려할 것 같아.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일도 없을 것이다. 담배를 참을 수 없는 터라 그냥 저런 곳이 있구나 한다. 그리면서 즐거웠다. 독자들도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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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여름, 수시로 천둥번개에 소나기가 지나간다. 물 나간 바닷가, 사람들이 물가에서 놀고 있다. 날은 저물고 있다. 아침 시각 집안 청소를 마치고 그냥 무심하게 종이에 칠을 하다가 이걸로 뭘 그리지? 하다가 전에 본 사진이 기억나서 그렸다. 서해안 어디일 것이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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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가장 지극한 곳에 이르렀으니 

 

 

오늘은 夏至(하지), 여름이 가장 至極(지극)한 곳에 이르렀다. 해가 가장 긴 날이다.

 

오늘 서울에서 해는 05시 11분에 떴고 저녁 7시 54분에 진다. 하루 길이가 1440분인데 해가 떠있는 시간이 무려 1003분이니 일조시간이 하루의 70%나 된다. 밤은 겨우 30%. 오늘 점심 무렵 해가 남쪽 하늘 중앙에 가장 높이 떴을 때의 고도는 무려 근 76도, 해를 보려면 목을 완전히 꺾어서 하늘을 올려다봐야 한다. 볼 것 같으면 아마도 현기증이 날 것이다.

 

至極(지극)하다는 것은 어떤 무엇이 그것의 최고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지극한 곳에 닿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와 반대되는 움직임이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 때마다 그리고 동지 때마다 아! 하고 감탄하고 또 感動(감동)한다. 極限(극한)이란 것만으로도 그렇다.

 

 

극한이란 것

 

 

수학을 잘 알진 못해도 그것이 극한의 값을 상정해내고 또 그 극한의 값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수학에 대해 畏敬(외경)의 마음을 갖는다. 수학은 감히 쉽게 넘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숫자인 0과 1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아찔해진다. 1이란 숫자,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비범하다.

 

가령 1.001이란 숫자를 무한히 제곱하면 무한대로 커진다. 하지만 1이란 놈은 제 아무리 제곱해고 또 제곱해도 그 값은 1로 남는다. 1보다 조금만 크면 무한히 커질 수가 있고 1보다 조금만 적어도 무한히 0에 수렴하지만 1은 절대 불변이다. 어떤 이유에서 1은 무한히 제곱해도 1로 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 0 이란 숫자는 아시다시피 툭 하면 不定(부정)이라 하고 또는 不能(불능)이라 하면서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神聖(신성) 혹은 禁斷(금단)의 영역이다.

 

이처럼 가장 쉬운 숫자인 0과 1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수학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나 호호당은 수학자들이 꽤나 시건방을 떨어도 그냥 외면하거나 못 본 척 한다. 그들 역시 성직자들인 까닭이다.

 

 

夏至祭(하지제)를 올리나니 

 

 

잠시 전 낮 12시 30분을 조금 넘길 무렵, 해가 남쪽 하늘 가장 높이 떴을 무렵에 방충망을 열고 해를 치켜다 보았다. 목을 완전히 꺾어서 올려보니 해는 天頂(천정) 가장 높은 곳에서 강렬한 빛으로 자신의 둥근 몸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내 몸을 제대로 볼 것 같으면 진한 색안경을 쓰시든지.

 

잠시 남쪽 창가에 시원하고 차가운 물을 한 잔 놓고 두 손을 모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해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지의 祭(제)를 올렸다. 나 호호당은 세상 만물 모든 것에 神性(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 사람이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하지제 즉 미드섬머, Midsummer를 지낸다는 사실.)

 

저녁 9시 30분, 밤 시간이다. 아까 보니 해가 진 뒤 30분이 지나서야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음을 확인했다. 긴 해가 저물었고, 오늘 떴던 저 해를 다시 보기까진 또 다시 1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로서 한 해의 전망과 미래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기에 

 

 

이제 그러면 자연순환과 운명의 관점에서 하지에 대해 약간 얘기해본다.

 

해마다 하지가 되면 한 해의 전망, 달리 말하면 견적서가 명확하게 나오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하지에 생기는 일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글로벌 전체적으로도 향후의 흐름을 전망할 수 있게 한다.

 

가령 예컨대 영국이 EU 탈퇴를 놓고 찬반투표를 했던 것은 2016년 6월 23일, 거의 하지였는데 그 투표에서 탈퇴 쪽으로 결론이 났고 이에 마침내 2020년 1월 정식 탈퇴했다. 브렉시트는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향후 글로벌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올 하지의 변화와 조짐들

 

 

올 해의 경우 G 7 정상회담이 영국의 콘월 바닷가에서 개최되었던 바, 이번 회담의 핵심 이슈는 反(반)중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6월 초 중국 충칭에서 열린 중국과 아세안간의 협력 회담 역시 중국의 의도가 불발되고 말았으며 미국은 이른바 쿼드를 결성해 인도-태평양에서의 중국 견제를 노골화하고 있다.

 

우리 정부 역시 최근 외교부 발표를 보면 그렇다.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의 조화로운 발전 입장 아래 중국과의 소통을 지속하겠다”고 한다. 미국의 액션 없이는 당신들과 뭔가 해볼 여지가 없으니 양해바람이란 뜻이다.

 

이처럼 사실상 글로벌 전체가 사실상 反(반)중국으로 돌아서고 말았기에 향후 3-4년이 지나면 중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중국의 패권도전은 확연하게 제동이 걸렸으며 심지어는 상당 기간 동안 쓰라린 맛을 보게 될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중국을 꺾어놓으려는 미국 입장에서 “차이나 바이러스”란 문구는 전 세계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 결정적인 好材(호재)가 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슈는 G 7 정상회담 자리를 통해 보여준 바와 같이 한일 관계는 이제 위험한 단계는 지났어도 여전히 냉각기가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바이든이 너희들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마! 하고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내년 새 정부가 들어서야 진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문제 또한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대북제재 행정명령을 연장했다. 사실상 올 해로선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경제면에서 올 해 하지에 생겨난 변화 중에 하나가 미국의 금리 논쟁이다. 하지만 이른바 FOMC, 즉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부의장을 맡고 있는 존 윌리엄스 미국 뉴욕연방은행 총재가 21일자로 통화정책의 긴축 전환은 여전히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봐서 금리 인상은 아직 아니라고 봐야 하겠다.

 

하지만 내년 하지 무렵이 되면 금리인상 문제에 대한 답이 확연해질 것이라 본다.

 

다만 우려되는 것 한 가지는 인도발 변이 바이러스가 하지 무렵에 와서 이슈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코비드 19와의 전쟁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판단이 든다. 신약 노바백스가 어느 정도 해주느냐에 달려 있지 않은가 싶다.

 

 

사람 역시 하지의 운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이처럼 하지 무렵에 생겨나는 변화는 시간을 두고 좀 더 구체화되면서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60년 운세 흐름에 있어서도 입춘으로부터 22.5년이 경과한 하지의 상황을 보면 향후의 흐름을 이미 그 속에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얼마 전 유튜브에 보니 조던 피터슨이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탁월한 생각이라 본다. 특히 사람의 운명에 있어 60년 순환의 하지 운에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점, 바로 그게 그 사람의 미래 비전(vidion)이기에 그 사람은 그를 향해 움직일 것이니 그로서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 난다고 나 호호당도 생각하기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하지에 보이는 것, 실은 그게 전부이다. 남은 것은 그 본 것을 향한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여가려면 힘이 들고 노력이 필요하며 도중에 무수한 장애물과 만난다. 그래서 삶은 苦生(고생)이다.

 

지금 이 시각은 어제 하지로부터 근 24시간이 지난 22일 점심 시간이다. 여전히 해가 길고 또 길다. 지금이라도 고개를 들어 중천의 해를 한 번 바라보면서 올 한 해 나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시길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작업실 건너편 먹자 골목의 풍경, 카페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찍은 사진으로 그렸다. 이 일대는 분위기가 묘한 동네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동네이다. 그림 속의 오른 쪽 담배 피우는 남자가 왼쪽 남자에게 살짝 다리를 꼬으면서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나 호호당은 이 길거리에 있는 수제 버거집을 자주 찾아간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커피 전문점이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흥미롭다. 커피 종류가 워낙 많아서 어떤 걸 마시는 게 좋겠냐고 물었더니 살짝 썩소를 짓는 것이었다. 뭐 이런 커피라곤 전혀 모르는 무식한 작자가 왜 내 가게에 찾아와서 그러는 거지? 하는 표정. 커피의  신성한 전당에 무례하게 찾아들어간 느낌이 들어 그 다음부턴 절대 가지 않는다. 재미난 동네이다. 요즘 선으로 그리고 담채하는 재미가 나서 연일 그리고 있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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