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노답일 때 

 

 

아버지가 고교 3학년생을 데리고 찾아왔다. 학생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아버지더러 밑에 내려 가셔서 커피 한 잔 하시고 오라고 했다. 사주를 뽑아서 쓱 한 번 살펴보니 학생의 운세는 60년 순환 상에서 바닥을 지난 지 8년, 바로 春分(춘분)이었다. 이 아이는 현재 답이 없겠구나 싶었다.

 

이에 물었다. 자네 얘기 좀 해봐, 무슨 얘기든 좋아,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어떤 것 같아? 학생 대답하길 현재로선 ‘노답’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었다. 띵동! 그래 알고 있구먼, 하고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에 이룬 것도 없고 앞길도 막막하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룬 것도 없다는 말을 할까 싶어서.

 

이에 학생 얘기하길 공부도 밑바닥이고 예체능 쪽으로도 전혀 아니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내 눈엔 그간 살아온 세월이 세월이라 하기도 그럴 것 같은데 그건 내 착각, 학생 입장에서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넌 현재로선 답이 없을 거야, 그래 노답이 맞아. 그런데 말이지, 그 노답이란 게 지금 그렇다는 것이지 평생 그런 것은 아니란 얘기야, 지금 그럴 뿐. 이렇게 해서 상담을 시작했다.

 

 

운은 60년 순환의 춘분에 이르러 노답이니 

 

 

운세 상으로 春分(춘분)은 絶望(절망)이 깊고 깊어서 어떤 몸부림도 해볼 생각이 없을 때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니 그렇다. 내려놓고 나면 오히려 편한 생각도 든다, 작은 희망의 실마리라도 있어야 몸부림이라도 치지 그 어떤 것도 모두 절망으로 여겨질 때 결국 자신을 내려놓게 된다.

 

훌륭하신 스님들이 길고 긴 수행 끝에 홀연히 깨달았다고 하는 시기, 이른바 득도했다고 때를 볼 것 같으면 그 스님의 운세 흐름에 있어 춘분이라 보면 된다. 득도한 스님들의 경지를 나 호호당이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으나 득도란 것이 결국 ‘나로부터 벗어남’ 또는 ‘나로부터의 해방’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번뇌 망상과 욕심과 집착의 제1차적 원인은 바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확고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인 ‘나’를 내려놓고 나면 그 즉시 解脫(해탈), 즉 풀려나고 벗어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로부터의 해방은 사람이 죽어야만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늘 한다.)

 

그 어린 학생의 생각은 당연히 得道(득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학생 역시 “이제 그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학생 역시 뭔가 잘 모르긴 하지만 춘분의 운에 이르고 나니 이제 그만 나를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득도한 스님과 통하는 점이 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여전히 응석을 부리고 있다. 당연하다.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은 들어도 엄마 아빠 당신들이 나를 좀 어떻게 해봐! 하는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득도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삶의 경륜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춘분의 모습

 

 

재미난 점은 어떤 사람이 나이 몇 살 무렵에 60년 순환에 있어 춘분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이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란 점이다. 앞의 저 어린 학생처럼 한창 응석을 부릴 나이에는 저런 모습이고 20대 후반이면 또 다르다. 30대, 40대, 50대, 60대, 인생의 살아온 경륜에 따라 달라도 많이 다르다.

 

가령 70대에 춘분의 때가 되면 그냥 병으로 죽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죽게 되면 그로서 나로부터 벗어난다. 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50대에 춘분의 때를 맞이하면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때론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뜨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내려놓는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나 호호당은 50세에 춘분을 지나왔는데 그땐 정말이지 마음이 정갈하고 겸손했다. 그만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아, 어렵다! 지금 나 호호당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니 이게 과연 가능한 얘기인가? 스스로 물어가면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주제를 너무 ‘하드’하게 잡은 게 아닌가? 그저 독자 백 명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지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하는 마음으로 글을 이어가본다.)

 

해마다 3월 20일경에 춘분을 맞이한다. 그로서 해가 밤보다 길어진다. 하루로 치면 이제 동녘에서 해가 뜨는 시각이다. 늘 얘기하지만 빛은 희망의 빛이고 비전(vision)이니 춘분은 새로운 희망이 비전과 시작하는 때이다.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사람을 포함해서 만물은 춘분에 이르러 가장 고단해하고 힘겨워한다는 점이다. 겨우내 추웠고 여전히 먹을 것이 없고 그간에 누적된 삶의 피로가 최고조에 달할 때가 바로 춘분이다.

 

희망의 빛 즉 새로운 희망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든다는 이 대단한 逆說(역설)! 차라리 이 대목은 운명의 神秘(신비)라고까지 말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앞서의 그 어린 학생은 ‘노답’이라 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답이 없으니 이제부터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억지로 애쓰고 몸부림치다보면 답을 찾게끔 되어 있다는 ‘절대의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풀이 죽어 있는 것이다.

 

 

답이 없다면 답을 찾아 나서야지  

 

 

그래, 학생, 자넨 답이 없어, 노답이야. 그런데 답이 없으니 이제부터 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 학생은 그저 단순한 위로의 말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굳이 답을 찾게 되리란 점을 이해시킬 수 없기에 나 호호당 역시 힘주어 여러 번 얘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해하지도 믿을 수도 없는 그 학생이기에.

 

이제부터 답을 찾아서 천지사방 동서남북, 삼만리 아니 십만리라도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할 거야. 답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야, 답을 찾게 되면 그 다음에 그냥 열심히 찾은 답을 지침 삼아서 또 다시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 거야. (학생은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고 나 호호당은 그 학생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내 말을 듣고 있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답을 찾아가는 건 역시 DIY, Do It Yourself! 이다. 그러니 고단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방황 속에서 서서히 힘이 붙고 눈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이윽고 때가 되면 저기 저쯤에 삶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그간에 힘도 생겨있을 것이다.

 

노답이라 말하면서도 학생은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냥 웃으면서 얘기했다. 어린 학생답게 그래도 어쨌거나 조금은 더 편한 길, 조금치라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얘기했다. 자네가 대학을 가든 안 가든 그건 현 시점에서 자네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다만 자네 부모님들만 학자금 대느라 골수가 빠질 뿐이야, 부모님에게 미안하지 않을까? 잘 생각해봐.

 

(그 부모님들은 현재 어려운 처지에서 열심히 밥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식 위하는 마음에서 아들이 대학에 간다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댈 것이다. 비극이다, 하지만 산다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이후로도 제법 많은 얘기를 해주고 나서 상담을 마쳤다. 그리고 학생더러 지금 밑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잠깐 왔다 가시라고 얘기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올라왔다, 얘기했다, 저 아이, 아무 문제 없어요, 그저 시일이 좀 걸릴 뿐입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해주었다. 아버지 또한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됐지요 뭐.

 

 

바보짓을 되풀이하는 게 우리의 삶이어서 

 

 

부자가 떠나간 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면서 생각했다.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군대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당분간 이런저런 알바 좀 하면서 갑질 좀 당해보다가 도저히 이렇게 살아선 아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바로 그 때 대학에 진학하면 본전 이상의 값어치를 할 터인데 하는 생각, 하지만 부모들은 상관없이 대학, 그래본들 어줍지 않은 대학이겠지만 보낼 것이고 그로서 빚을 지고 또 갚느라 삶을 소모해가겠지 싶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집안의 내 화실이자 서재이다. 고개를 들어 오른 쪽 벽을 올려다본다. 그곳엔 호호당의 부모님 영정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엄마 그리고 아버지, 고생 많이 하셨네요, 그래도 이젠 철이 들어서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산다는 게 다 그렇잖아요, 바보짓만 하다가 철이 들면 다 살았잖아요. 며칠 뒤 백신 맞을 참인데 몸 고생 하지 않게 좀 돌봐주세요.

 

절망이 가장 깊을 때 희망이 다가온다는 얘기, 참 대단한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