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한 해의 성과를 확인해보는 시점

 

 

어제는 추분이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 옛 책에 이르길 모든 것은 춘분에서 생겨나고 추분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봄에 생겨나서 여름내 자라온 그 무엇이 이제 추분으로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아직 생산이 끝난 것은 아니다. 벼를 보면 알곡이 좀 더 들어차고 익어서 여물어야 할 것이니 최종적인 완성은 다시 한 달 뒤인 10월 20일 경의 霜降(상강)이 된다. 하지만 이제 추분으로서 전체 윤곽은 확연해지고 있음이다.

 

 

증시 이야기 

 

 

먼저 전 국민의 관심사인 증시 얘기부터 좀 한다.

 

증시는 추분이 되자 제법 강한 하락조정을 보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7월 24일자로 “이제 증시의 반등은 사실상 끝이 났지만”이란 글을 올린 것이 생각난다.

 

그 글을 찾아서 보니 “모른 척하고 따라는 가지만 여차하면 튀어야지, 그 시점이 8월 처서가 될 지 9월 추분이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적고 있다.

 

물론 아직은 이번 하락조정이 대세가 꺾이는 출발인지 아니면 조정을 끝내고 다시 상승세로 복귀할 것인지 여부를 단정하긴 다소 빠른 느낌이다. 하지만 그간에 2차 전지라든가 바이오와 같이 테마들과 관련된 종목들의 주가가 단기간에 너무 올랐다는 점만은 명확하다.

 

추분에 하락 조정의 낌새가 나왔으니 아마도 10월 20일 경의 상강이면 전체 흐름이 확연해질 것이라 본다. 그때가면 답이 확실하게 나온다는 얘기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 호호당의 경우 며칠 전부터 가지고 있던 주식들을 정리해왔다. 그렇게 보는 이유에 대해 말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거시 변수들이 새로운 흐름으로 들어서고 있기에. 

 

 

먼저 연일 치솟던 금값이 고점을 치고 하락세로 돌아서고 있다는 점, 약세이던 달러가 이제 강세 기미를 보인다는 점, 이에 따라 원/달러의 하락이 멈출 것 같다는 점, 엔화가 조만간 강세로 갈 것 같다는 점, 유로화 역시 약세로 돌아설 것 같다는 점 등등 모든 거시변수들이 일제히 어떤 변곡점에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현 시점에서 환율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각국 중앙은행들이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금리 정책이 작동될 수 없는 환경이기에 저마다 환율 조작을 통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흐름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이번 추분으로써 3월의 패닉이 몰고 올 흐름이 이제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따라서 이제 그간 줄곧 상승을 이어온 증시 흐름 역시 변곡점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까닭에 이번 하락 조정이 끝나면 다시 오를 수도 있겠지만 큰 테두리에서 올 해 증시 반등은 마무리되었다 본다. 기존의 모멘텀은 사라졌다는 말이다.

 

물론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다음 달 10월 상강 무렵이면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이에 추석 연휴도 있고 해서 당분간은 마음 편히 추석을 보낼 생각이다. (이번 증시에서 내 경우 지난 6개월을 되돌아보니 씨젠, 유니슨, 씨에스베어링 등의 종목들로 재미를 봤다.)

 

증시 얘긴 이 정도로 그치고 눈을 크게 돌려보자.

 

 

우리 국운의 추분은 2002년이었으니 

 

 

우리 대한민국은 60년 순환에 있어 2002년이 추분이었다. 그 30년 전인 1972년은 국운의 춘분이었던 바 그 무렵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력신장과 경제발전에 모든 것을 걸었고 그 결과는 2002년이 되어 나타났다. 바로 그 무렵부터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도박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춘분은 사실 가장 힘든 때이다. 때론 비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굳은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이기도 하다. 우리가 1972년 국운의 춘분 당시에 몹시도 초라하고 힘들어 했지만 결의를 가지고 미래를 향해 전진해온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의 모습 또한 그렇다. 운의 흐름이 춘분에 처한 사람을 보면 겉보기에도 처량하고 스스로도 한심하다. 마치 비루먹은 강아지 꼴이다. (그와 반대로 추분을 맞이한 사람을 보면 겉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이고 스스로도 어떤 성취감을 느낀다.)

 

 

미국은 올 해로서 추분이 아니라 춘분의 운이어서 

 

 

그런데 미국의 경우 올 해가 새로운 60년 순환에 있어 추분이 아니라 춘분의 해가 되고 있다.

 

그렇기에 현재 미국은 부상해오는 중국을 견제하고 주도적 위치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가 풍비박산이 났고 이에 달러를 마구 풀어대고 있다.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가장 피해가 큰 나라는 미국이라 하겠는데 그 역시 국운이 춘분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해마다 추분이면 으레 성과가 나오고 윤기가 도는 법인데

 

 

오늘의 주제는 추분이기에 돌아가서 얘기하면 어떤 이의 운세 흐름에 있어 추분이 되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일종의 아우라가 비치기 시작한다. 미스터 트롯을 통해 대중 인지도를 얻은 장민호와 이찬원과 같은 가수들 역시 그렇다. 장민호는 작년이 추분이었고 이찬원은 올 해가 추분이다. 앞으로 10년간은 무난하게 호시절을 구가할 것이다.

 

(엄마들에게 인기가 많은 정동원은 이제 운세가 대서인터라 추분이 되려면 10년이나 남았으니 앞날이 더욱 창창하다. 반면 영탁이나 김호중과 같은 이들은 생일의 양력 음력 구분이 애매해서 뭐라 하기가 그렇다.)

 

추분이 되자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은 이는 방탄소년단의 RM, 즉 김남준이다. 그에겐 2019년이 추분이었는데 그 해 미국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공식 초청돼는 바람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사실상 전 세계 청소년들의 敎主(교주)가 되었다.

 

 

이번 추분을 보니 올 한 해는 그야말로 망친 셈

 

 

하지만 금년 추분은 좋은 일보다는 걱정이 더 앞선다.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코로나19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세가 이어지고 있으며 유럽 나라들의 경우 재확산의 모습이 현저하다. 우리 역시 이번 추석연휴를 기점으로 또 다시 크게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자영업자들과 중소기업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고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든 판국에 코로나가 재확산될 경우 어떤 임계치를 넘길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가 된다. 지금까진 어떻게 잘 버텨왔지만 이번 가을과 겨울에 가서 코로나 재확산도 문제이지만 경제 상황이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올 한 해 우리는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 전체가 망쳤다. 그저 주식만 기업의 실적과 상관없이 엄청나게 올랐고 유동성에 힘입어 부동산 가격만 무지막지하게 오르는 바람에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하고 있다.

 

해마다 추분이 되면 글을 써왔다. 그런데 이번 추분은 과거와 비교해서 참으로 초라하고 성과가 없다. 추분이면 한 해의 성과가 확연히 드러나는 때이건만 實(실)이 없고 얻은 게 없다는 얘기이다.

 

올 해 추분이 이처럼 초라하고 추레한 것은 무엇보다 해의 흐름, 즉 庚子(경자)년이 글로벌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바람직한 氣數(기수)가 아닌 까닭이다.

 

무엇보다 글로벌을 리드하던 미국이 60년 순환에 있어 국운의 춘분을 맞이하여 힘들어하고 있고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한 때를 맞이하고 있으며 유럽 역시 전체적으로 활력이 없다. 이에 우리와 또 우리와 흐름이 유사한 중국은 당장은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실은 속으로 심하게 무너져가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올 한 해의 흐름이 순조롭지 않게 된 까닭이고 여기에 코로나19가 결정타를 날린 셈이다.

 

 

글로벌 불황에 치명타를 날린 코로나19

 

 

뉴스에 보니 은행 ATM에서 5만 원 짜리 지폐를 인출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 위기가 오래 이어지자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가계와 기업들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 탓이라는 게 한국은행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초저금리 상황이니 차라리 금고에 보관해 두고 증여 용도나 거래 시 세금 회피를 위한 의도라 하겠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 추분으로서 현저해진 올 한 해의 흐름을 볼 때 이번 겨울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또 다른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은 두려운 생각도 든다.

 

글을 마치고 나니 추분은 어제가 아니라 그제가 되었다.

낙동강의 상류 지역, 하회마을에서 밑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가다 보면 흰 모래톱이 많다. 일부러 집을 그려넣지 않았다. 청정한 자연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절은 늦여름이다. 바로 직전에 지나쳐간 때, 여름이야말로 한 해의 영화로움이다. 풍성한 가을이라 하지만 벌써 모든 것이 물러가고 있어 쓸쓸함을 안겨주니 역시 계절은 여름이다. 그리면서 즐거웠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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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이다. 산 그늘 속 하얀 탑의 모습이 그런대로 멀쩡하다. 그렇지만 어떤 이가 이 사찰과 탑을 찾아올까? 싶다. 저곳에도 신이 머물고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물론 머물고 있다고 답하겠다. 장소는 티벳 혹은 타지키스탄, 뭐 그런 곳이 아닐는지 싶다. 죽음의 땅이고 신은 그런 세계에 머문다는 생각을 한다. 신이란 완벽한 nothing 이라 말했던 고대 이집트의 신학자가 생각난다. 나이가 드니 죽음과 점점 가까워져간다는 느낌 혹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 느낌으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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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곡성 쪽에서 흘러와서 구례를 거치고 하동을 지나서 남해로 흘러드는 하지만 그림 속의 강은 가을 속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늘이 흐리다. 멀리 산과 산을 잇는 고가도로가 보인다. 문척면 쪽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섬진강은 흰 모래톱이 매력이다. 오랫만에 그렸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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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살람살이는 과연 좋아진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옛날에 비해 먹고 쓰는 것이 분명 좋아지긴 했다, 하지만 살아가기가 어쩌면 예전보다 훨씬 팍팍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고.

 

칼로리 섭취량은 엄청나게 좋아졌다. 단적으로 육류 소비만 해도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게다가 예전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해외여행도 이젠 보통 사람들도 다 다녀오고 있다. 핸드폰과 자동차 등등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좋아지고 나아진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말 또한 결코 엄살이 아니란 생각도 든다. 양극화가 극심해졌고 게다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앞날이 어두워졌다.

 

그러니 우리가 과연 예전에 비해 잘 살고 있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이 충분히 들 법도 하다고 본다.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살림살이는 쫄아들었으니 

 

 

이 문제에 대한 나 호호당은 좋아진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본질에 있어선 2020년의 우리 대한민국은 예전보다 훨씬 어렵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고 본다.

 

 

첫째는 절대적인 면이다.

 

 

얼마 전 “금값의 비밀”이란 글을 올렸다. 옛날 그러니까 1944년 당시 미국 달러는 그 자체로서 金(금)이나 같았다. 금 1 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즉 1 달러는 금 1/35 온스의 값어치를 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게 엄청 불편했던 미국은 금과의 연결을 폐기해버렸고 그 이후론 그냥 미국 연준(Fed)이 재량껏 달러를 무제한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달러 가치는 끊임없이 하락해왔다.

 

달러가 과연 얼마나 하락했는가를 알려면 그냥 금값을 보면 된다. 오늘 현재 금 시세는 1 온스에 1965 달러 정도가 된다. (이 시각에도 변동하고 있지만)

 

1944년 당시 1 온스에 35 달러였으니 그것과 비교하면 달러 가치는 1/56로 폭락했다. 금값이 오른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오늘날 각국의 통화가치는 마구 변동하고 있어 가치의 가장 정확한 기준은 금이라 봐도 절대 무방하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거의 해마다 빠짐없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늘어나는 만큼 ‘진짜’ 소득도 늘어나는 걸까? 하고 묻는다면 천만의 말씀이라 답하겠다.

 

진짜 소득을 알아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1인당 GDP를 가지고 금을 얼마나 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이에 나 호호당은 달러가 더 이상 금에 연동되지 않게 된 1971년부터 작년 2019년까지 48년 동안 우리나라의 연도별 1인당 GDP를 가지고 금을 얼마나 살 수 있었는지를 계산해서 표를 만들어보았다.

 

여기에 다 소개하긴 그렇고 5년 단위로 예시해본다.

 

1971년 7.34 온스

1976년 6.65 온스

1981년 4.07 온스

1986년 7.61 온스

1991년 20.78 온스

1996년 33.86 온스

2001년 41.53 온스

2006년 34.58 온스

2011년 15.30 온스

2016년 21.63 온스

2019년 23.00 온스

 

1970년대 우리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 1인당 GDP를 가지고 금 7 온스 정도를 구매하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6년을 기점으로 ‘진짜’소득이 급속도로 늘어나서 2001년엔 무려 41.53 온스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1970년대에 비해 5배 정도로 ‘진짜’소득이 늘어났으니 그야말로 삶의 질이 윤택해졌음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그 무렵부터 우리 사회엔 럭셔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웰빙이란 단어도 유행했다.

 

하지만 좋던 세월은 2006년부터 급격히 꺾어졌다. 2006년에는 그 이전의 40 온스 이상에 비해 대폭 줄어들어서 34.58 온스가 되었다. 하지만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고 2011년에 와선 15.30 온스로 쫄아들었다. 반토막 미만이 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 후반부터 꺾어져서 이명박 정부 시절엔 진짜소득이 폭락하고 말았으며 그 이후 박근혜 정부 들어 조금 반등해서 지금까지 평균 23 온스 정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생망’이란 말이 나온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였다는 것은 따라서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1971년 7.34 온스에서 2000년대 초반 평균 40 온스를 넘어섰으니 그간에 대략 6배의 진짜 소득 증가가 있었던 것이고 그 이후 2006년부터 하락해서 그 절반 수준, 즉 반토막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가장 윤택했던 때는 2000년대 초반의 5년간이었고 그 이후 줄곧 나빠져서 지금은 당시의 60 % 수준에 머물고 있다. 어려워진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양극화이다.

 

 

앞에서 말한 금 구매력은 1인당 평균 GDP를 가지고 산출한 것이고 소득 격차, 많이 벌고 가진 자와 적게 벌고 가진 게 없는 자 사이의 격차는 2000년대 초반에 비해 훨씬 더 악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언젠가 글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진짜 이유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꽤나 차이가 있어 솔직히 말해서 밝히기가 좀 그렇다.)

 

그런 까닭에 진짜 소득의 평균치도 줄어들었지만 그간의 양극화로 인해 사회적 약자의 경우엔 그야말로 삶의 질이 급전직하했다고 말해도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니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현재 우리 대다수는 2000년대 초반에 비해 훨씬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진짜 소득도 줄었고 양극화로 인해 그 줄어든 파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었으니 그야말로 二重苦(이중고)를 겪고 있는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영끌, 빚투는 사실 나라 또는 정부와 한은이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

 

 

최근 주택 가격이 치솟고 증시가 오르면서 이번엔 영끌, 빚투, 이런 말이 대유행이다. 30대는 영끌로 집을 사고 20대는 빚을 내어 주식을 하고 있다.

 

그래 어차피 망한 거 마지막 영혼의 한 방울까지 다 끌어내고 짜서 어디 한 번 승부해보자는 심정인 것이고 그런대로 대출은 쉬우니 레버리지를 최대한 늘려서 되면 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증권투자인 셈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푸념하던 젊은이들이었지만 현실이야 어디 그런가! 그냥 얌전히 망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시중엔 엄청난 액수의 유동성이 굴러다니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국은행이지만 그렇다고 금리를 올렸다가는 그거야말로 다 죽자는 소리이니 그냥 외면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 모두가 저금리 판이니 ‘면피’는 충분히 된다.

 

정부 역시 유동성이 넘치는 현 국면에서 치솟는 집값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법은 금리 인상인데 그럴 순 없으니 그저 미시적인 대책에만 몰두하면서 ‘땜방’해가고 있다.

 

 

빚을 늘려서 유지되고 있는 글로벌 경제 그리고 우리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미국 연준이 2023년 말까진 금리 인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향후로도 3년은 제로금리를 유지할 수도 있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에 대한 나 호호당의 답은 ‘모르겠다’이다.

 

미국의 자료를 살펴보면 나름 현재의 상황을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다.

 

2007년 금융위기 직전 미국의 총 GDP는 14.452 조 달러였는데 작년 2019년엔 20.529 달러가 되어 그 사이에 42%가 증가했다. 하지만 2007년 미국의 시중 유동성인 M2는 7조 달러였고 올 해 들어 코로나19로 인해 마구 달러를 남발하는 바람에 18조 달러가 넘어서고 있으니 그 사이에 2.5배로 늘어났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엄청난 불균형이고 무리인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다는 사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실은 미국보다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2007년부터 작년 2019년까지 GDP 증가는 37%였지만 그 사이에 시중 유동성(M2)은 2007년 1,197조원에서 올 해 9월 현재 3093조원을 기록하고 있으니 2.58배로 늘어났다. (올 해 총생산은 전년보다 액수 면에서 마이너스 1% 라고 한다.)

 

이렇게 수치를 놓고 보면 우리 역시 미국처럼 양적완화다 뭐다 하고 요란을 떨지 않았을 뿐 엄청난 통화남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억지이고 무리이다.

 

결국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 압력을 시중 유동성의 급속한 확대를 통해 억지로 경제를 유지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얘기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즉 대출을 쉽게 해줌으로써 집을 사게 하고 주식을 사게 하며 또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구매하도록 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2007년 이후 글로벌 경제 특히 선진국 경제는 빚 늘리기를 통한 소비이고 경제 운영, 스테로이드 투입을 통한 경제운영이라 하겠는데 올 해 코로나19로 인해 그 흐름이 더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철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빚투’를 하고 ‘영끌’을 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한은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빚투’를 하도록 부추기고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일단 그럭저럭 경기가 유지될 것이니 말이다. (미국이 저처럼 돈을 찍어내고 있으니 우리 또한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결국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인데 말이다. 

 

 

그야말로 우리를 포함해서 전 글로벌의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엄청난 버블을 만들어내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버블은 버블인 것이고 그렇기에 그 버블은 결국 터지고 소멸할 것인데 과연 언제까지 이 광란의 춤판이 이어질 것인지. 또 그로 인해 치르게 될 비용과 대가는 얼마나 엄청날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다. 우울한 9월의 새벽 시간이다.

 

최근 잠드는 시각을 정상화시켜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피로하다, 그 바람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조만간 궤도를 찾아가겠지 싶다.

한 때 수출대국이었던 중국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 전 쯤에 중국은 그야말로 수출대국이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은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이웃의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지, 나아가서 유럽 나라들에겐 너무나도 갖고 싶은 ‘꿈의 물건’들이었던 까닭이다.

 

얼마 전만 해도 ‘메이드 인 차이나’라 하면 조잡한 저가 물건의 대명사로서 쓰고 버리는 물건이었으나 당시의 중국산 물건은 품질을 넘어 희소성까지 갖춘 귀한 물건들이었다.

 

서양인들이 좋아했던 물건을 잠깐 제시해본다.

 

生絲(생사)꾸러미, 두 올로 꼰 명주실, 흰색 비단실, 색색의 비단실, 금실로 수가 놓인 비단, 다양한 색상과 문양의 직물, 두꺼운 비단, 아마와 면포, 사향, 안식향, 각종 장식천, 침대 장식품, 침대보와 수가 놓인 벽걸이용 태피스트리, 방석, 융단, 진주, 루비, 사파이어, 수정, 금속 그릇, 놋쇠 주전자, 도자기 등등이다.

 

여기에 더하여 서책이라든가 문방사우인 종이와 붓, 먹, 벼루, 사향이나 침향과 같은 향료 등은 당시 조선과 일본 등에서 널리 선호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먼 유럽에서 배를 타고 온 서양의 무역상, 처음엔 포르투갈 이어서 스페인, 그 다음에 네델란드와 영국 등등의 무역상들이 중국을 상대로 팔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은으로 받고 물건을 팔았던 중국

 

 

사고는 싶어도 팔 게 없으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인데 단 한 가지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銀(은), 즉 실버였다.

 

사실 서양인들도 처음부터 은이 남아돌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뒤 대량의 은이 매장된 광산을 발견하고 채굴하면서 급기야 무역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엔 대량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1570년대의 포토시 광산(지금의 볼리비아)이 그것이다.

 

일본 역시 은 광산(1530년의 이와미 은광산)이 개발되면서 필요한 중국산 물건들을 다량으로 사갈 수 있었고 우리의 경우 은 대신에 저 유명한 고려인삼을 통해 중국과 무역할 수 있었다. 조공무역.

 

그런데 당시 명나라 시절의 중국에선 왜 그다지도 은을 좋아했던 것일까? 가령 중국에서도 은이 많이 생산되었다면 서양인들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은을 받는 거래를 별로 반기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 조정이 세제를 개혁해서 모든 세수를 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초기에 세금은 곡식과 같은 현물 납부가 원칙이었고 경우에 따라 비단이나 화폐 등으로 내는 것도 허용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운반이 편리한 동전으로 내게 되었고 나중엔 무게에 비해 가격이 높은 은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이를 一條鞭法(일조편법)이라 한다.

 

 

은을 통해 화폐시장경제로 넘어간 중국

 

 

그렇게 되자 중국은 사실상 은에 바탕을 둔 화폐경제로 전환했고 이에 다량의 은이 필요해진 마당에 때마침 남미의 포토시 광산과 일본의 이와미 은광으로부터 은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이 대단히 많이 필요해진 중국이었기에 은의 시세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높아졌는데 이것이 바로 무역이 가능해진 바탕이 되었다. 서양 무역상들은 본국에서 저렴하게 사들인 은을 중국에 가선 비싸게 넘겨주었고 대가로 받은 중국산 물건들 역시 유럽에 가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최근 국제금융에서 흔히 하는 엔 캐리나 달러 캐리와 원리가 같다.)

 

당초 중국 명나라를 일으킨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모든 백성이 관리들의 계도 아래 태어난 동네에서 살면서 자급자족하는 경제를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실천하려고 했다. 일종의 ‘유교식 공산주의’라 하겠다. (원래 유교의 이념은 공산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시장 화폐 경제

 

 

그렇기에 명나라는 해외와의 교역을 싫어했고 또 금지했으니 이를 해금정책이라 한다. 海禁(해금), 즉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 즉 해외무역을 엄히 금했던 것이다. 우리 식 표현으론 조선 말 대원군이 실시했던 쇄국정책이다.

 

해외와의 교역이 발전하고 늘어나면 자연히 상인들이 부자가 되고 그러면 주자학을 익혀 관리가 된 사대부들과 맞먹으려 들고 아울러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농촌경제가 시장경제로 넘어가면서 인구의 이동이 늘어나고 빈부의 차이가 커지는 것을 우려했던 중국 명나라였다. 경제가 정체된 상태에서 가난해도 좋으니 사농공상의 신분제 아래 얌전히 살다가라는 것이 중국 유교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게 되면서 경제는 급속히 시장경제로 바뀌어갔고 이에 조정에선 아무리 해외와의 교역을 막아도 바다로 나가서 한탕 해보려는 바닷가 사람들의 욕구를 막을 순 없었다. 간단히 말해 돈 되는 일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결국 중국 조정은 1567년에 가서 해금정책을 폐지했고 그 이후 경제는 급속도로 시장경제, 상품경제로 이행했으며 그로 인해 중국 경제의 생산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은이란 돈이 경제 내의 윤활유가 되어 경제를 원활하게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의 유통이 늘어나자 자본이 형성되었고 그러면 투자가 일어난다. 이에 대단위 비단공장이 생겨나고 벼농사 짓던 농민들은 자체적으로 소비하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뽕나무를 심어 原絲(원사)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식량은 사서 먹으면 되는 식으로 바뀌었다.

 

 

기득권을 누리던 사대부 계층에게 말세나 온 것과 다름 없었으니 

 

 

이런 식의 변화는 유교 지식인들에게 그야말로 말세가 온 셈이었다. 농부가 식량을 자체 생산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의 원재료인 원사를 생산해서 돈을 벌고 쌀은 사다먹게 되었으니 이건 정상이 아니란 생각을 했고 또 그냥 농부가 아니라 자본력을 갖춘 부자 농부가 사업가로 변신해가는 것이 그야말로 못마땅했던 것이다.

 

경제가 시장경제, 화폐경제로 변해가자 사농공상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商人(상인)들이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유교 지식인 또는 사대부들 사이에선 널리 퍼져갔다. 자칫 상인이 저들보다 위에 올라설 수도 있는 위험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유교 지식인들과 관리들이 막을 순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부가 늘어나면서 백성들의 삶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부의 편중에 따라 양극화가 진행되는 폐단 또한 당연히 생겨났다.

 

 

결국 나름의 절묘한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으니 

 

 

그런 뒤 명나라는 만주족에게 정복을 당했고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이 무렵이 되자 새로운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관리들에게 후원을 하거나 뇌물을 주었고 관리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선 상인들 특히 巨商(거상)들의 협조 또는 기부가 필수적이었다. 가령 홍수가 나서 다리가 무너지면 으레 지역의 거상들이 기부를 해서 다리를 복구하는 식이었다. 정부엔 그런 예산이 없었다.

 

청나라 시절의 중국 사대부 계층을 紳士(신사)라고 한다. (지금도 우리가 쓰는 표현, 신사 양반이란 말이 그것이다.)

 

신사 계층의 기반은 농촌의 토지였다. 즉 지주계급이었으며 소작인들로부터 받는 식량을 돈으로 바꿔서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곤 자녀를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갔다. 하지만 나중엔 신사층도 자녀의 일부는 공부를 시키지 않고 장사를 배우게 했다.

 

반면 상인들은 토지에 집착하지 않았고 뭐든 돈이 되는 것이면 사들이고 또 내다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상인들 역시 돈이 생기자 자녀의 일부를 장사만 시키는 게 아니라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해서 관리로도 진출해갔다.

 

그러자 신사층과 상인층의 구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져갔고 섞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절 관리의 급여는 너무나도 적어서 금전적인 유혹에 약하기 마련이었는데 지역 상인들의 후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상인들은 돈으로 사업상의 利權(이권)을 얻었고 관리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致富(치부)를 했다. 돈과 권력의 딜, 또는 거래였다.

 

청나라 시절의 이런 타협과 결합은 당시 조선으로도 유입되었고 그 바람에 흔히 얘기되는 영조와 정조 이후로 들어오면서 일반화되었으며 특히 세도정치를 통해 극심해져서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한 중국식 부패의 원형

 

 

지금 말하는 이 타협과 절충이야말로 중국식 부패의 원형이라 하겠다. 우리의 경우 1980년대 이후 공무원의 처우가 극적으로 개선이 되면서 대폭 줄어들었지만 중국은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하다.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이 방식으로 통치를 해가고 있으며 권력을 잡고 있다는 말이다. 청나라 시절의 중국과 현재 중국 공산당 통치의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중국 공산당은 국가 전체적으로 근간이 되는 사업의 경우 철저하게 국영기업을 통하고 있기에 공산당의 중소상인에 대한 통제력은 막강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산당 간부라든가 관리가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권사업에 상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치부하는 것은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다.

 

 

중국식 부패가 이어지는 한 중국은 어렵다. 

 

나 호호당은 중국식 부패에 대해 현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서 나름 납득을 하고 있다. 내가 만나본 중국인들 역시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탓에 중국이 향후 글로벌 세계를 이끌만한 자격을 갖추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알림:

 

당초 13일로 예정되었던 주식투자기법 강좌는 코로나2.5 단계 연장으로 인해 20일로 일주일 순연되었음을 알립니다. 장소는 강남역 근처의 강의장인 CNN the Biz(Tel:02-564-4172)이고 시각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402호나 502호 중에 한 강의실이 될 것입니다.

 

적은 인원으로 제한하는 바람에 정원 초과가 되었고 이에 2차 강좌도 하게 되었는바, 같은 장소와 시각이며 날짜만 일주일 뒤인 9월 27일 일요일이란 점 알려드립니다. 물론 개개인에게 별도의 메일 통지도 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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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엔 책이 많다, 집에도 많다. 세어보지 않아서 몇 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 한 번 세어보다가 지쳐서 그만두었다. 장마가 가셨지만 여전히 비가 내린다, 태풍 ‘마이삭’이 몰고 오는 비. 울적한 기분이 들어 작업실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全眞七子 全書(전진칠자 전서)”란 제목의 중국책이다. 오래 전 상하이의 신화서국에서 샀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책을 산 뒤 부산한 거리를 조금 걸어서 난징동루의 동쪽 끝, 와이탄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고급호텔 화평반점에 가서 필레미뇽 스테이크를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스테이크 향이 코끝에서 살아난다. 이젠 먼 옛 일, 그 때가 1996년이었으니 아련하다.

 

책은 전진칠자와 그 스승인 왕중양의 얘기들을 담고 있다. 왕중양은 중국 고대 新(신)도교의 개창자로서 전진파를 열었는데 그에겐 일곱 명의 뛰어난 제자 道士(도사)들이 있었으니 전진칠자라 한다. 그 중 한 명인 장춘진인 구처기는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에도 등장해서 현대에 와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長春眞人(장춘진인)은 물론 실존 인물이다. 당시 중국 북방을 정벌하던 몽골의 대 영웅 칭기즈 칸을 만나서 不死(불사)는 불가능하고 그저 살생을 금하고 덕을 베풀면 편히 오래 살 수 있다는 솔직한 말로 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던 사람이다. 영원한 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니 그 호가 참으로 멋지다.

 

왕중양도 그렇고 구처기를 포함한 전진칠자들 모두 도를 닦는 道士(도사)였을 뿐인데 훗날 무협작가들에 의해 엄청난 무공의 고수로 재탄생된 셈이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책을 진지하게 접할 날이 있을까? 생각하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내 서가엔 중국에서 나온 책들, 영문판 책들 번역판이지만 큰 도서관이 아니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책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젠 좀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언젠가 아들 녀석에게 야, 이담에 내가 가고 나면 이 책들 보관 아니 보존해 줄 거니? 하고 물었더니 아뇨! 하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여전히 많이 사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지런히 폐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냥 넋 놓고 살 때가 아니라 언제든 가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서가로 다시 눈을 돌리니 ‘헬레니즘 철학’이란 놈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의 앤소니 롱이란 학자가 쓴 책이다. 그래 좋다, 헬레니즘 그리고 철학, 그런데 어쩌라고, 이제 인생 다 살았다 해도 되는 내가 오래 전 철학자란 사람들이 생각하고 다듬어낸 생각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그 책 역시 이젠 이별해도 될 것 같았다. 창밖에선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다.

 

철학, 젊은 날엔 꽤나 진지하게 접했던 대상이다. 하지만 오래 살아보니 저런 것들, 저런 사람들의 생각을 몰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철학이란 그저 옛날 명석했던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런 것의 群集(군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대략 20년 전부터 들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들과 접하게 된 뒤론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애당초 철학이란 것은 그 자체로서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의 말은 나름 충분히 옳다. 철학자는 자신이 쓰는 용어부터 그 의미가 규정되어 있지 않기에 심하게 얘기하면 헛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

 

가령 자유에 대해 논한다고 해보자. 철학자들 저마다 생각하는 자유란 말이 의미하는 바가 같을 순 없다. 그러니 자유에 대해 논의하려면 먼저 자유의 개념에 대해 합의를 보아야 할 것이고 또 그러다 보면 자유를 규정하는 단어들 역시 또 다시 합의를 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그 어떤 것도 규정할 수 없고 따라서 논의할 수가 없게 되니 철학은 애당초 성립 불가능이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저 말은 고대 힌두철학의 한 갈래인 니야-야(Nyāya) 학파의 因明(인명)철학과 유사한 맥락이 있다. 불교철학과도 연관이 깊은데 소개하자니 독자들 머리만 아플 것이고 해서 예를 하나 들겠다. 여기에 소가 있다고 하자, cow 말이다. 니야-야 학파에선 소는 소가 아닌 것을 배제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소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자세히 따지고 들면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소는 토끼라든가 양, 염소 등등의 것들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아가서 가령 진리라든가 실체 그리고 보편자 등과 같이 서양 철학에서 중요시여기는 개념들은 그저 인간의 환상이고 착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어진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얘긴 죄다 헛소리란 것이다.

 

대충 동의한다,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러니 내게 있어 인류 역사에 있어 존재했던 수많은 현자들과 철학자들의 말들은 그저 그들이 남긴 좋은 수필, 즉 에세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아끼던 책들을 이젠 좀 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좀 더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구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것들을 내가 지니고 끝까지 보관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생각이 이런 식으로 미치자 서가에서 책들을 대략 수 십 여권 뽑아내었다. 잘 하면 책꽂이 하나 정도는 여유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해마다 2월 하순의 우수가 되면 책을 버린다. 벌써 몇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아낀다고 여기던 책들은 절대 폐기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런 생각들이 일종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끼던 책들마저 이젠 필요 없게 여겨진다.

 

지금 저 책들과 이별을 하면 나중에 또 찾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은근히 생긴다. 뭐 또 다시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구해도 더 이상 입수할 수 없는 책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후회하지 뭐.

 

창가에 다가가 비 내리는 거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모든 생각은 장마가 길고 비가 많아서 생긴 울적함 때문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다. 멜랑꼴리라고 하는 놈 말이다. 가끔 살다보면 이 한 몸뚱이가 그저 구차하게 여겨질 때도 있는 법이니 책 정도야 능히 그럴 법도 하다 싶다. 하지만 이까짓 몸뚱이 하다가도 코로나19에 걸릴 까봐 조심하게 되는 우리 아니겠는가.

 

사실 난 이제 수시로 바뀌는 내 기분이나 정서 같은 것은 스스로도 신뢰하기가 그렇다. 오늘 기분이 나쁘다, 또는 더럽다 해도 내일이면 또 바뀔 수 있는 것,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실이 또 그렇다.

 

처음에 책들을 확 버릴 생각으로 마구 뽑아내었지만 이윽고 생각을 돌려서 며칠 더 두기로 했다. 바닥에 어지럽게 벌려 놓을 순 없어서 구석으로 밀었다. 그간 아끼던 것들이니 내일 기분이 바뀌면 또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운명의 입춘 바닥을 지내오면서 한 가지 나아진 점도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각을 많이 한 뒤에 결정을 하고 또 결정을 내렸으면 결과가 나올 때까진 계속 해간다는 식이다. 그때그때의 분위기나 정서에 휘둘리지 않는다. 의지가 강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워낙 내 스스로 나에게 속아봤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를 믿지 않는다.

 

밤이 되니 비는 더 내린다.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줄기차게 내린다. 기온도 많이 내리고 있다. 오늘밤 그러니까 태풍 지나가는 아침엔 기온이 21도까지 내리고 이후로도 줄곧 내려서 이제 열대야는 끝이 났다.

 

이제 열흘 정도만 지나면 여름 내 무성하던 연밭도 시들 참이다. 넓적한 잎사귀 간 곳 없고 앙상한 가지만 수면 위에 그림자 비치는 처량한 연밭에 내리는 가을비도 계절의 한 정취인데 말이다.

 

윈디(windy)에 들어가 보면 태풍 마이삭이 지난 뒤에도 하나가 더 온다고 나와 있다. 태풍 3연타인 셈이다. 그러니 맑은 날씨는 다음 주 월요일 이후에나 볼 수 있겠다.

오늘 글은 문자 그대로 雜文(잡문)이었다.

사진을 바탕으로 시각은 저녁 해질 녘으로 해서 그렸다. 물바진 개펄에 고깃배가 기울어져 있고 바다는 역광으로 빛나고 있다. 높은 하늘엔 푸르름이 보이지만 서쪽으론 낙조가 짙게 서리고 있다. 이런 그림은 정취가 있어서 간단하지만 즐겁다. 독자들도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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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달러 가치가 내리고 있다.

 

최근 국제 금 선물 시세가 엄청나게 올랐다. 2015년 말 1,045.40 달러에서 이번 8월 6일의 장중 최고치 2,063 달러까지 비교하면 4년 반 사이에 97%나 올랐다. 특히 금년 들어 상승세가 엄청나다. 작년 말 종가 1,519.50 달러에서 최근의 고점까지를 비교하면 올 해에만도 근 36%나 상승했다.

 

왜 이처럼 금값이 겁나게 오르는 것일까?

 

조금 상식이 있는 분이라면 미국이 달러를 엄청나게 찍어서 풀었기 때문에 시중 유동성이 많아져서 올랐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약간 다르다. 달러를 남발했으니 달러 가치가 하락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금값은 수동적으로 올랐다고 보는 게 맞다. 금 투기꾼들이 달러를 올린 게 아니란 얘기.

 

금값은 달러 가치의 逆數(역수)라 보면 된다. 이는 마치 시소 놀이와 같아서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금값이 올라가고 달러 가치가 올라가면 금값이 내린다고 보면 된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금값이 오른다는 것은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도량형을 가지고 장난치는 놈은 역적이라 했는데

 

도량형이란 단어를 아실 것이다.

 

예로부터 도량형을 조작하거나 장난치는 자는 나라의 가장 악질 죄인으로 처리했다. 당연한 것이 쌀 한 가마에 기준이 80 킬로그램인데 어떤 중간 도매상이 75 킬로로 빼먹거나 또는 다른 곡물을 섞는 방식으로 팔고 있다면 거의 사형감이었다.

 

도량형이란 결국 가치의 절대 기준이기 때문이고 이를 가지고 장난치면 그야말로 나쁜 놈이라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선 미국 연준이 앞장서서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를 제멋대로 분탕질치고 있다. 그런데 국법으로 처단하긴 고사하고 증시에선 주가가 오른다고 박수를 보낸다. 더 찍어서 풀어야지! 하고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사실 어이가 없는 짓이다.

 

며칠 전 미국 연준의 의장이 잭슨 홀 미팅에서 어쩌구 저쩌구 했는데 전 세계 금융당국자들과 투기꾼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내용인 즉 간단히 말하면 앞으로도 계속 달러란 도량형을 가지고 열심히 분탕질을 치겠다는 내용이다.

 

도량형이란 결국 가치의 기준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은 참으로 희안해서 그걸 국가나 정부가 앞장서서 장난을 친다.

경제학 원론을 배운 이라면 “악화는 양화를 驅逐(구축)한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구축한다는 말은 어려운 단어이고 몰아서 쫓아버린다는 뜻이다. 나쁜 놈이 좋은 사람을 밀쳐낸다는 말과도 같다.

 

처음엔 순금으로 양을 엄격하게 제대로 써서 코인 즉 주화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금의 양을 줄이거나 24K에서 14K로 딴 이물질을 섞어서 만들었던 일을 말한다. 그러면 금화를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나쁜 짓을 한 놈들이 누구냐 하면 주로 ‘왕’이나 ‘황제’란 타이틀을 가진 작자들이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그랬었는데 오늘날엔 연준 의장이 그 짓을 하고 있다. 돈에 관해선 미국 연준 의장이 글로벌 경제의 황제란 얘기이다. 물론 연준 의장을 임명하는 놈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고.

 

 

금본위제가 무너지자 기준점이 사라졌으니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달러는 그야말로 가치의 절대 기준이었으니 그 까닭은 달러를 금으로 보증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금본위제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 역시 월남전으로 진을 빼게 되면서 난 더 이상 못해! 하고 손을 들고 말았으니 1971년의 일이다.

 

그러자 가치의 기준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각 나라마다 자국 돈의 가치를 무역이나 기타 분야에서 이득을 볼 수 있도록 조작하기 시작했으니 이를 변동환율제라 한다.

 

이제 기준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기준이 없다 보니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게 과연 있는지 또는 실질적으론 잃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게 되었다. 도량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치의 기준은 여전히 금이다. 

 

 

하지만 그나마 여전히 가치의 기준 역할을 해주고 있는 놈이 있으니 그건 역시 금이고 금값이다.

 

금이란 놈은 광물질로서 가만히 놓아두면 이자가 전혀 붙지 않는다. 돈은 그래도 은행에 넣어두면 미미하나마 이자란 것이 붙는데 말이다.

 

그처럼 이자도 붙지 않는 금이 왜 이처럼 겁나게 오르고 또 때론 내리기도 하는 것일까?

 

實相(실상)을 말하면 금은 그냥 가만히 있다. 다만 달러를 많이 찍어내면 절로 금값이 오를 뿐이지 금 자체는 오르는 법이 없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달러를 많이 발행해왔기에 금은 일시적으론 내릴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꾸준히 오르고 있다. 달러 가치가 꾸준히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금이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상품이기에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시세가 변동한다. 하지만 금에 대한 수요는 장기적으로 크게 변화가 없다, 워낙 비싼 귀금속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금 시세 변동은 수요와 공급에 따르기보다는 글로벌 기축 통화인 달러 가치의 변동을 반영하는 측면이 더 크다고 보면 된다. 기준이 없어진 시대에 그나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가치의 기준이 금이란 얘기이다.

 

이 점을 다시 생각해보면 가령 당신이 금을 사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달러를 내다 판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금 선물 시장에서 금을 사면 그건 달러를 ‘공매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렇다. 다시 말하면 가진 돈으로 금을 산다는 얘기는 달러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서 그를 방어하는 수단이란 얘기가 된다.

 

 

지금 우리는 1996년에 비해 훨씬 못 살고 있다는 사실. 

 

 

그럼 이제 흥미로운 얘기 하나 들려드리겠다. 현재 우리나라가 과거에 비해 숫자상으론 분명 소득이 늘어났는데 과연 그런 걸까? 하는 얘기이다.

 

예컨대 1996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대략 13,000 달러였고 작년 2019년엔 31,681 달러였다. 23년 사이에 국민소득이 244%나 늘어났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시 말해서 우리 국민들이 1996년에 비해 2.44배나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이에 ‘아마 그럴 껄’ 하고 답한다면 ‘땡! 틀렸다’ 이다.

 

답을 알기 위해선 당시의 금값과 작년의 평균 금값을 비교해보면 나온다.

 

1996년 당시 평균 금값은 온스 당 387.33달러였고 2019년 평균값은 1,393.34 달러였다. 이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1996년엔 13,000 달러의 돈으로 금을 33.52 온스를 살 수 있었고 작년 말엔 31,681 달러를 가지고 22.73 온스를 살 수 있었다.

1996년엔 33.52 온스, 작년엔 22.73 온스, 따라서 작년 소득은 1996년에 비해 66.8 퍼센트에 불과하다. 22.73 나누기 32.52, 즉 2/3 수준이다.

 

그렇다면 작년 말 우리 국민들의 평균 소득은 1996년에 비해 소득이 무려 33.2% 씩이나 쪼그라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 우리는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1996년에 비해 평균소득이 2/3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하게 살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양극화까지 심해졌으니 젊은이들에겐 '이생망'의 현실

 

 

그런데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나쁘다. 1인당 GDP란 것이 국민 전체 소득을 머릿수로 나눈 평균값인데 2000년 무렵부터 소위 양극화가 시작되면서 우리 국민들의 소득 편차는 엄청나게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1996년 무렵엔 비정규직이란 말 자체가 드물었다. 직장에 들어가면 그냥 다 같은 직장인었다. 그런데 2000년부터 비정규직이란 것이 대거 등장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 격차는 엄청나게 확대되어왔다.

 

우리나라 기간제 근로자 중에서 계약직 사원은 급여가 정직원에 비해 60-70%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다. 대기업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세분하면 더욱 사정은 나빠지고 거기에 알바나 기타 등등까지 고려하면 정말로 심하다.

 

그런 까닭에 최근 20-30대 젊은 층의 기대소득은 실로 형편이 없다. 그러니 ‘이생망’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전체적으로도 우리는 1996년보다 못 살고 있고 양극화와 차별로 인해 그야말로 더 못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숫자장난 

 

 

한국은행이 최근 금년도 우리 경제가 코로나19로 인해 - 1.3% 성장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는데 사실 이 또한 알고 보면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올 해 소득 감소는 실로 엄청나고도 크다.

 

작년의 경우 금 온스 당 평균값이 1,414.03 달러였는데 최근 8월 현재 금의 1년 이동평균값은 1,677.50달러이다. 금 시세가 평균값으로 18.63%가 올랐다. 그러니 우리 경제나 국민들의 소득 역시 그와 반비례해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금 시세는 이처럼 실상에 가장 근접한 얘기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올 해엔 코로나19로 인해 망했다는 말을 해주고 있다. 그저 미국이 더 망하고 있다는 소식 정도로 위안을 삼으면 모를까.

 

살림살이를 비교해볼 때 가장 믿을 만한 방법은 올 해 소득으로 금을 몇 돈 아니 몇 양이나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작년에는 얼마치나 살 수 있었는지 그걸 비교하면 가장 정확하다는 얘기였다. 이게 금값이 말해주는 비밀이다.

 

 

2008년 금융위기로 좋았던 시절은 지나갔다는 얘기.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경제는 여전히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걸 수치로 알려주는 것이 바로 금값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2008년의 금값은 온스 당 872.37 달러였고 올 해 현재 1년 이동평균값은 1,677.50 달러이다. 계산해보면 92%가 올랐고 그와 반비례해서 달러 가치는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이는 결국 글로벌 전체가 훨씬 가난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GDP 몇 퍼센트 늘어나고 말고는 솔직히 그저 숫자장난이다.

나 호호당은 1998년 무렵 주식투자 당시 운 좋게 성공한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크게 좌절한 바 있습니다. 그 이후 20년 간 연구한 결과 마침내 알아낸 필승불패의 투자기법에 대한 강좌를 개최합니다. 강조라기보다는 기술 전수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참가 대상은 그간 저로부터 자연순환운명학을 배운 제자들에 한정됩니다.

 

꽤나 많은 생각을 한 결과 인연이 되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이 기법을 알려드리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에 강좌를 개최합니다. 그간 연구해낸 전부를 공개할 생각은 아니고 성공을 담보하기에 충분한 2 가지 기술에 대해서만 공개할 생각입니다.

 

참가대상: 10명 미만.

 

참강 조건: 자연순환운명학 이수자로서 봉 차트와 이동평균선에 대해 기초지식을 가진 자, 아울러 나름 주식투자 경력이 좀 있는 자.

 

참강료: 1인당 150만원.

 

신청 방법: 배우고자 하는 동기와 필요성에 대해 제 메일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밝혀주시면 살펴본 후 통지해드립니다.

 

강의일시: 9월 13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

 

강의 장소: 코로나 관계로 아직 미정이고 사람 간의 간격을 충분히 둘 수 있는 큰 강의장을 선정해서 추후 메일로 통보할 예정입니다.

 

주의사항: 녹음이나 녹화가 허용되지 않으며 배운 뒤 저의 사전 양해나 허락 없이는 제3자에게 유출하지 않겠다는 것, 그로 인해 있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선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를 강의장 현장에서 받는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기법을 알고 숙지하고 나면 이른바 데이트레이딩을 하거나 또 단타를 치거나 혹은 중기 거래이든 스윙거래이든 또는 면 장기 투자이든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주식필승기법을 연구하게 된 것 역시 증시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운명학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필승불패의 투자 기법을 알아낸 저로선 전혀 급한 생각도 없습니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채웠기에 이미 본전은 뽑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큰돈을 벌고픈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저로선 그냥 천천히 해가면서 즐길 일이라 봅니다. 그렇기에 이번에 기법을 공개하는 까닭은 혹시나 실전 혹은 死藏(사장)될 수도 있는 기술을 인연되는 제자들에게 전수해주자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