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대단히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치과의사인 후배와 저녁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다. 저녁 여섯 시에 만나서 어딜 가서 먹지? 하다가 사무실 맞은 편 골목에 있는 수제 햄버거 집을 갔다. 테이블이 네 개 되는 아주 작은 가게이지만 내 생각에 국내에서 가장 맛있는 수제 햄버거 집이다. (내 사무실은 강남 교보타워 빌딩이 있는 신논현역에서 5백 미터 거리에 있다.)

 

거리가 조금 되는 터라 가끔 찾아간다. 식사를 하는 데 창밖으로 눈발이 비쳤다. 일기 예보에 퇴근 시간 눈발이 비친다더니 정말 그러네! 하면서 내리는 눈을 지긋한 눈으로 감상했다. 가게 안의 불빛과 어울려 마치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았다.

 

맛있게 먹은 후 가게를 나서니 눈발이 아니라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카페엔 가지 못하기에 커피를 사서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대화를 마친 뒤 밖으로 나서니 저녁 8시였다. 서울시는 제설을 잘 하니까 간선 버스들은 잘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진 낭만적 분위기.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

 

 

하지만 교보 타워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재난 영화가 시작되었다. 차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얘기하면 귀가하는 코스는 사무실에서 강남역 버스 정루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탄 뒤 양재역으로 가서 서초 18번 마을버스로 환승한 뒤 우면동 아파트로 간다. 평소라면 사무실에서 집까지 40분 정도 소요된다.

 

인도 측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보니 늘 타던 버스는 63분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이거 비상 상황이구나. 그래서 다시 강남대로 중앙에 있는 버스 정류소로 갔다. 강남역에서 양재역까지 가는 버스가 거긴 많으니 금방 타겠지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버스를 타긴 했다. 그런데 30분이 지났어도 버스는 정류장에서 100 미터 거리에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내 옆에 섰던 승객들은 일행이 셋이었는데 한 사람이 약간 술에 취했는지 부아를 부리기 시작했다. 왜 차가 안 가냐고? 그러자 덜 취한 옆의 사람이 앞 차가 안 가니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저 앞 차는 왜 안 가냐고요, 왜? 하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속으로 웃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도 덩달아 부아가 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지나자 승객들이 일제히 차 좀 세워주세요, 기사 아저씨! 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결국 기사 양반은 차로 복판에서 문을 열었고 승객의 2/3 정도가 내렸다. 나도 내렸다. 사람이 밀집된 공간에서 코로나도 무섭고 거기에 장시간 동안 서서 버틸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강남역 지하철역에 가서 신분당선을 타면 양재역으로 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기에 내렸다.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구두 밑창에 눈이 박혀서 노면 접지력이 전혀 없어졌다. 강남역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데 겁이 벌컥 났다. 그곳의 계단은 모서리가 금속으로 되어 있어 엎어지면 무릎을 크게 다칠 수 있다.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얼마 후 허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 전날 와이드 스쿼트와 런지라고 하는 아주 괴로운 운동을 바야흐로 시작한 터라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다 뭉쳐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작년 좌골신경통을 앓으면서 허리 단련을 위해 스쿼트와 런지를 시작한 것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 된 셈이었다.

 

 

어려웠던 판단의 갈림길

 

 

아무튼 분당선을 탄 것은 좋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양재역에서 내리느냐 아니면 한 정거장 더 가서 AT 센터에서 내리느냐였다. 나름 열심히 판단을 했다.

 

양재역에 내릴 경우 마을버스마저 제대로 오지 않으면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거리는 대략 3.5 킬로미터. 하지만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좋다. AT 센터에서 내리면 그냥 걷는 수밖에 없지만 거리는 1.5 킬로미터 정도, 하지만 통행이 드문 길을 가야 하기에 수북하게 눈 쌓인 길을 걸어야 할 것이고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기에 도중에 일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내 나이 이제 예순 일곱, 체력이 예전만 못한 처지라 자신이 서질 않았다.

 

양재역에서 내렸다. 지하에서 무거운 걸음으로 올라가 마을버스 정류장에 가 보니 역시 차가 쉽게 오지 않았다. 양재역 사거리 저 편에 도곡동 방면에서 오는 언덕길이 문제였다. 멀리서 보니 후륜구동의 외제차들이 빌빌거리고 앞길을 막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시다시피 벤츠와 같은 독일차들은 후륜구동이 많다. 눈길 언덕을 만나면 거의 기동불능이다.)

 

 

본격적인 공포 스릴러의 시작

 

 

20분이 걸려 마을버스가 왔는데 그 안에 빼꼭히 들어찬 승객들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저걸 타고 한 시간 이상은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안에 혹시라도 무증상 감염의 젊은이와 코를 맞대고 인연을 맺었다간 난 간다, 담배 피는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그야말로 저승행 아닌가!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양재역에서 교육개발원 입구-흔히 일동제약 4거리라고 부른다-까지 걷는데 도중에 나지막한 언덕길이 있다. 그곳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신발 밑창에 박힌 눈이 얼어서 신발 바닥의 요철이 사라진 터라 그냥 빙판길과 같았다.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넘어지면 그냥 넘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름의 落法(낙법)이었다. 버티다가 넘어지면 다친다.

 

교육개발원 입구 정류장까지 걸어서 도착했다. 버스타길 포기했지만 그나마 좋은 것은 정류장의 벤치에 열선이 있어서 따듯하다는 점이었다. 벤치에 앉아 허리도 좀 펴고 다리도 떨어보고 하면서 몸을 풀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점검도 했다. 괜찮은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사무실에서 출발한 지 1시간 40분이 흘러 9시 40분이었다. 다시 걸으면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생각을 했다. 어느 코스를 택하지?

 

버스길을 따라 걸어가면 도중에 언덕을 또 넘어야 한다. 그래서 큰 길에서 벗어나 양재천 변에 산책로가 있는 작은 길을 택했다. 가면서 보니 양재천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또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눈이 10 센티미터 이상 쌓인 길을 걷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구두 속으로 녹은 눈이 스며들어 양말이 온통 젖은 상태였기에 더욱 난감했다.

 

 

어려울 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생각을 바꿔서 동네 골목길로 들어갔다. 편의점 불빛이 보였던 것이다. 들어가서 따뜻한 홍삼 음료수를 하나 마시고 나니 몸이 다시 좀 풀렸다. 다시 양재천로로 나와서 걸었다. 도중에 차로가 경부고속도로 교량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길이 있었는데 승용차 4대가 제멋대로 뒹굴고 서 있었다. 접촉 사고였다. 그런데 차 주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차를 굴릴 수 없게 되자 버려두고 걸어간 모양이었다.

 

도중에 지나가는 차를 향해 태워달라고 여러 번 손을 흔들었지만 허사였고 그냥 천천히 걸었다. 다시 두 번 더 미끄러졌지만 落傷(낙상)은 없었다. 멀리 아파트의 불빛이 보였다. 체력도 완전 떨어진 터라 아주 천천히 뒤뚱거리면서 걸었다.

 

 

무사귀환,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에필로그 

 

 

집에 도착하니 11시 15분, 출발이 8시였으니 3시간 15분의 어드벤처였다. 재난영화 한 편 찍은 건지 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사귀환, 천만다행, 개고생.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셨다. 발목도 불편하고 등판이 좀 이상하다. 회복 훈련을 위해 천천히 스쿼트를 다시 했더니 허벅지에서 불이 났다. 아서라, 그냥 쉬자.

 

 

편하게 되자 너그러워지는 이해심과 아량

 

 

오후 들어 뉴스를 보니 버스타고 집에 가는데 12시간 걸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경우를 알게 되니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난 그래도 괜찮았네 하면서 싱글거리게 된다.

 

기온이 너무 차가워서 염화칼슘 약발이 듣지 않았다는 서울시의 해명인지 변명인지도 들었다. 이해한다, 차가 움직일 질 못하니 제설이 아예 어려웠을 거란 점도 납득한다. 어제 폭설은 일종의 자연재해로 치부한다. 기상청의 예보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늘 그랬던 것이니 이해하기로 한다. 몸이 편하니 마구 너그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