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내리는 비에 상담도 뜬한 터라 집안 화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다. 늦여름을 그렸지만 마음엔 가을을 기다리고 있나 보다. 약간은 초가을 풍경의 느낌이 난다. 갈색을 많이 쓴 탓이다. 아무튼 나쁘지 않다. 예전에 강원도로 놀러 다닐 때 사먹었던 맛있는 찰옥수수와 감자전이 생각난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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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장마라 해도 그냥 비가 오다 마는 마른 장마였는데 이번엔 한꺼번에 갚아줄 참인가 보다. 남부 지방에 물을 쏟아붓더니 이젠 중부지방이다. 비오는 날을 엄청 좋아하는 나 호호당도 이젠 질린다. 그만 좀 내렸으면 한다. 비오는 풍경을 한 장 올림으로써 비야, 너도 이젠 물러가시게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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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가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기에 

 

“붉은 여왕 가설(The Red Queen hypothesis)”이란 것이 있다, 생물의 진화 이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알고 계신 분도 많겠지만 간단히 소개해본다.

 

영국 소설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에서 붉은 여왕이 주인공인 앨리스에게 “넌 최대한 힘껏 달려야만 이곳에 간신히 머무를 수 있어, 네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따온 개념이다.

 

이 가설은 자연 속에서 어떤 생물이 계속 진화를 하더라도 다른 생명이 더 빨리 진화해가면 상대적으로 뒤처질 것이기에 모든 경쟁 생명체들이 끊임없는 경쟁 환경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아울러 자연계의 진화경쟁에선 어느 한쪽이 지속적으로 승리를 거두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  

 

 

최근 코로나19의 공격에 우리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 바이러스는 툭 하면 변종이 일어난다고 하니 백신이 만들어져도 지속적인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크기가 80-100 나노미터에 불과한 놈이 인간의 몸속에 침투해서 사람을 죽이고 있다. 무게가 아니라 길이로 볼 때 자신보다 무려 2천만 배나 거대한 인간을 파괴하고 있으니 실로 어이가 없다.

 

인간이 과학과 기술이란 무기를 앞세워 진화해가고 있지만 저 미세한 바이러스의 변이(진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바이러스란 놈은 유전정보를 감싸고 있을 뿐 세포 조직도 아닌 따라서 생명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놈이어서 현재로선 특별한 공격 포인트를 인간이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을 괴롭히는 바이러스 중에는 독감도 있고 간염 바이러스도 있지만 가장 악랄했던 놈은 역시 천연두 바이러스였다. 기원전 10,000년경부터 인간을 괴롭혀 왔으며 20세기에만도 3-5억 정도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1798년에 우두법을 개발하고 그 이후 백신이 널리 보급되면서 1979년에 이르러 WHO가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했다.

 

 

어쩌면 이번 일이 전환점이 될 수도 

 

 

재미난 점은 우두법의 개발에서 천연두 바이러스의 박멸까지 18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이고 이는 자연순환 주기 중의 하나인 360년의 절반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현재 온 인류가 총력을 기울여서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쩌면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향후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천연두 이후 그저 견딜 수 있는 정도란 생각에 그냥 지내왔지만 이번엔 바이러스의 공격이 워낙 무서우니 인간도 최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 본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백신 개발은 시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바람에 개발 리스크가 워낙 컸고 그로 인해 백신 연구가 도중에 중단되는 일이 잦았지만 이번에 경우가 다르다. 특히 최강국 미국이 저처럼 피를 보고 있으니 더욱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최선을 다해야 중간을 유지하는 현실의 세상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인터넷에서 보니 붉은 여왕의 가설에 대해 ‘나무위키’에 소개한 내용을 보니 흥미롭다. 어떤 3컷짜리 만화에서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인간 : "저는 그저 적당히 살고 싶습니다."

신 : "적당히 살고 싶다고?"

"그럼 미친 듯이 노력해라."

 

경쟁에서 중간 정도 유지하려면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통의 삶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어려워서 

 

 

이런 생각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볼 것이기에 쉽게 공감이 간다. 그런가 하면 가끔 상담하다 보면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저는 큰 욕심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삶을 원합니다.”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평범하려면 비범해야 하는 데요? 하고 반문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평범하려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비범한 구석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렇기에 흔히 중간 정도면 만족이다 말들을 하지만 그 중간이 결코 쉽지 않다. 주특기 또는 필살기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중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나아가서 긴 인생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을 줄곧 유지해가기란 그야말로 어렵다. 내가 발견한 자연순환의 원리에서 보면 불가능하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이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실로 어렵다. 평균 수명은 살아야 할 것이고 보통의 수입과 직장, 그 결과 보통의 재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보통의 체격과 용모도 갖추어야 할 것이며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자 또한 보통의 체격과 용모, 건강 등을 갖추어야 할 것이며 자식을 낳게 되면 그들 또한 보통 정도는 따라가 주어야 자식으로 인한 마음고생을 면할 것이다.

 

 

보통의 삶은 없다.

 

 

그렇기에 보통의 삶,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수준을 한 개인이 다 누리고 가진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 주변에 보통이다 싶은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개개인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어떤 이는 건강하지만 돈이 없고 어떤 이는 재산은 제법이지만 단명하거나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뜨기도 한다.

 

가령 건강과 수명, 용모, 재산, 학력, 직장, 배우자의 조건 등등 보통의 요건이 여섯 가지라 한다면 그걸 다 가질 확률은 대단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삶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보통의 삶’이란 어딘가 한 가지 또는 한 구석 이상은 결핍된 삶을 말한다. 그게 보통의 삶이다.

 

수명만 봐도 그렇다. 흔히 요즘 세상에는 85세 정도까진 무난히 살 것으로 여기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82.7년이라 한다. 하지만 그건 평균 수치이고 정확히 얘기하면 여성은 85.7년이고 남성은 79.7년이다. 그렇기에 남성의 경우 85세까지 살 것 같으면 보통의 삶이 아니라 장수에 해당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남녀의 성비에 있어 출생 시엔 남아의 여아에 대한 비율이 1.07이다. 남아 107명에 여아 100명이 태어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55세에서 64세까지의 성비는 0.98로 역전이 되고 65세 이상이 되면 0.71로 급격히 줄어든다. 55세를 넘기면서 남성의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얘기이다.

 

이 정도면 보통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는 그 보통이 실은 보통이 아니라 나름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얘기이다.

 

 

앞서가고 뒤처지는 것이지 그 자리에 머물 순 없기에 

 

 

자연순환의 원리에 따라 그 누구에게도 60년의 순환이 존재한다. 사계절이 있다는 얘기이다. 그 중에서 입춘을 전후한 15년은 어쩔 수 없이 힘든 시기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 역시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의 차이야 있겠으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전혀 차이가 없다. 누구에게나 한 때 ‘흑역사’는 있기 마련이란 얘기이다.

 

사람의 일생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나라 또한 당연히 그렇다.

 

사람처럼 기업이나 나라 역시 탄력을 잃어버릴 때가 있기 마련이라 하겠다. 앞에서 소개한 “붉은 여왕의 가설”이 암시하고 있듯이 자연계의 진화경쟁에선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긴 어렵다는 것, 때론 앞서가고 때론 뒤처지기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나 나라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

 

최근 10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역량이 많이 발전하고 반대로 일본의 경우 전혀 발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우리가 왜 이러지? 왜 이처럼 탄력이 없지? 하고 많이 고민도 하고 성찰도 하는 것 같고 반면에 우리 사람들은 일본을 다소 만만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일본을 지켜보면서 우리 역시 멀지 않아 저런 때가 올 터인데, 곧 우리 차례가 될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붉은 여왕의 말처럼 힘껏 달려야만 제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을 어느 순간 대충 달려도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뒤처지기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보통의 삶이라 어려운 것이다. 나아가서 일생을 두고 보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기대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게 밀어주고 끌어가는 힘이니 그렇다. 하지만 한 편으론 현재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역시 우리로 하여금 무리하지 않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어느 선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걸까? 그게 참 어렵다.

 

텔레비전에서 요르단의 붉은 사막인 와디 럼이 나왔다. 고대 사막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던 페트라의 남쪽에 있는 사막이다. 산화철이 많아서 붉은 색이리라.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오프닝 신으로 나온 이래 나 호호당의 머릿속에 평생 각인된 곳이다. 가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늘 동경한다. 붉은 색을 잔뜩 써서 그렸다. 비가 워낙 내리니 지겹고 그래서 물이 없는 경치를 그렸나 보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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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만난 이미지를 수채화로 그렸다. 물가와 물풀들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즐겁게 그렸다. 저녁 빛이 보라빛 구름 사이로 뻗어오고 있고 그 빛은 물에도 어리고 또 번져가고 있다.  청동오리도 그려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어서 장마가 끝났으면 싶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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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길다. 여기저기 폭우가 쏟아졌다. 어릴 적 생각에 바다엔 아무리 비가 와도 홍수가 날 턱이 없잖은가? 하면서 비오는 바닷가를 마냥 바라본 적이 있다. 해수욕장에서 비가 오는데 사람들이 그만 놀고 물속에서 돌아나오는 것을 보면서 참 의아해하기도 했다. 왜 저러지? 물에서 놀다가 비가 온다고 나오나?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 이런 그림을 그렸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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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문에 실린 거문도 풍경이다. 정말 멋진 사진이었다. 찢어 오려서 주머니에 담아 왔다. 며칠 동안 저걸 그려볼 까 말까 망설였다. 사진보다 더 멋있게 그릴 수 있으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괜한 짓인데 하다가 결국 그리게 되었다. 펜으로 그린 것에 색을 올릴 적엔 선과 색의 균형이 미묘하고 어렵다. 색이 강하면 선이 죽고 선이 강하면 그냥 흑백 스케치가 나을 것이니. 잘 표현된 것 같아서 만족이다. 독자들도 즐겨주시길.  장마가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늦더위가 한 번은 있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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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이다. 얘기하려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는 점이다.

 

조용필 가수의 노래에도 바람의 노래란 것이 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하는 가사가 그것이다. 가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는 노래도 있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는 제목의 시집 제목이자 영화도 있고 ”바람 부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 이렇게 시작하는 옛 노래도 있다.

 

예로부터 시나 노래, 또 오늘날의 가요 속엔 바람을 언급하는 내용들이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관해 말하는 내용들이 들어가고 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시작을 하거나 소설을 쓸 때 제목에 붙여도 좋고 내용 속에 바람에 관한 얘기를 넣을 것 같으면 인기를 얻을 확률이 아주 높다. 예로서 이제는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폭풍의 언덕”이란 소설 역시 제목에서부터 바람을 언급하고 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벌판과 바람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그런가 하면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란 노래를 부른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문학이나 노래 속에서 “사랑”이란 단어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람이란 단어라 하겠다.

 

왜 그럴까? 하는 것이 오늘 글의 주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바람’이란 단어는 누군가 말하고 또 그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속을 흔들어 놓거나 또 설레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 에둘러 가보자.

 

성인이라 단어 앞에 들어간 聖(성)이란 한자는 원래 儒敎(유교)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훗날에 와서 聖人(성인)이란 하면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 서양의 ‘saint’란 단어에 대해 대응하는 번역어로서 ‘거룩한 순교자’의 의미로 사용되고도 있다.

 

그런데 聖(성)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주 재미가 있다. 알고 보면 공자가 언급하기 이전부터 聖(성)이란 단어는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형 문자에서 발전해온 한자이기에 聖(성)이란 글자를 분해해보면 귀 耳(이)와 입 口(구), 천간 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壬(임)자는 나중에 추가된 것이고 원래는 耳(이)와 口(구)로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듣고 말하는 것에 사람의 총명함이 다 들어 있기에 총명한 사람이 聖(성)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풀이는 기억하기엔 좋아도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귀 耳(이) 곁에 붙은 입 口(구)는 초기 갑골문 속의 상형문자로 보면 한글의 자모인 ‘ㅂ’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ㅂ’의 뜻은 무엇일까? 하면 그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祭器(제기)였다.

 

이에 聖(성)이란 한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신의 소리 즉 메시지를 귀로 들을 수 있는 신령한 무당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 점에 대해 나 호호당은 일본의 뛰어난 한자 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책을 통해 알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따라서 성인이란 일반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신의 메시지 또는 계시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 또는 무당을 뜻했다.

 

그러다가 훗날에 이르러 사회가 보다 조직적으로 변하면서 정치적 권력자인 王(왕)이 등장했고 중국에선 유교가 생겨나면서 뜻이 새롭게 해석되었다.

 

먼 옛날엔 동서양 모두 신령과 통하는 靈媒(영매)는 巫(무) 즉 무당이었고 무당이 씨족이나 부족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인간 간의 투쟁이 격렬해지면서 힘이 뛰어나고 통솔력이 뛰어난 자가 사회적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런 자가 추장 또는 족장이 되고 또 나중엔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통한 무당의 권위는 예전에 비해선 줄어들었으나 그럼에도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神政一致(신정일치) 사회에서 신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 분화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왕이 최고 권력자가 되자 신의 소리를 듣고 통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왕권에 종사하는 새로운 직종으로서 神官(신관)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聖(성)의 의미 역시 변화하게 되었다. 유교의 鼻祖(비조)인 공자 시대에 이르러선 세속적 권력은 왕의 영역이지만 정신적 영역은 여전히 聖人(성인)이라 부르며 나름의 권위를 유지해갔던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무당이나 신관이 신에게 제를 올리면서 신의 계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聖(성)이란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당은 어떤 식으로 신의 계시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이다.

 

그 답은 이미 글 앞부분에서 얘기했다. 바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그 속에 실려 있는 신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거기에 담긴 계시를 신관들이나 무당들은 들었던 것이다.

 

우리 아들의 어린 시절 밤이 되었는데 좀처럼 잠들지 않고 놀아달라고 칭얼대면 돌아가신 선친께선 “어서 자야지, 창밖에 바람 도깨비가 울고 있잖아,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야만 괜찮거든” 하는 얘기를 하시곤 했다.

 

겨울밤 바람소리는 대단히 두려운 바가 있다. 갑자기 세게 불기도 하고 휘몰아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으레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지만 어린 시절 겨울밤 바람소리에 무서워했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국 고대 기록에 보면 바람마다의 이름이 있었으니 그건 사실 바람신 즉 風神(풍신)의 이름이었다. 네 방위의 風神(풍신)에 대해 가령 동쪽의 바람신을 劦(협)이라 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선 겨울에 부는 북쪽 바람신의 이름을 보레아스(Boreas)라고 했다.

 

四方(사방)에는 저마다 신이 있어 소식을 보내오고 손길을 뻗쳐오는데 그 방법이 바람이거나 또는 새, 즉 神鳥(신조)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철새는 옛 사람들에게 신의 전령이자 使者(사자)였던 것이다. 우리 민속의 솟대가 그것이다.

 

風土(풍토)라는 단어가 있다. 바람과 땅이란 말인데 흔히 특정 지방의 기후와 토질을 뜻하기도 하며 풍토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도 달라진다는 생각, 지금도 우리들은 하고 있다. 바람은 변화의 상징이고 땅은 고정된 것이니 이 둘이 만나서 특유의 기질과 성향을 형성한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바람이란 변화를 의미했고 따라서 그건 특별한 신의 손길로서 여겨졌다.

 

살랑대는 봄바람이 불면 꽃이 피고 새싹이 움텄다. 봄바람은 생명을 일으키는 신의 손길이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면 초목이 시들게 되니 엄숙 살벌한 기운 즉 肅殺(숙살)의 손길이었다. 겨울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재로 돌아가고 대지 위엔 앙상한 것들만 남게 되니 그건 죽음의 손길이었다. 이처럼 바람은 변화를 불러온다.

 

오늘날엔 보기 드물지만 예전 항구에 가면 어선들이 출항하기 전 무당인 만신이 굿마당을 펼친 다음 이번에 나가면 滿船(만선)이 될 것이란 말을 한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배들이 일제히 出漁(출어)에 나선다. 그 바람은 이번에 나가면 좋을 것이란 신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고 만신은 그 바람의 소리 또는 노래를 듣고 감을 잡는 것이다.

 

신이 난다는 말을 달리 신바람이 난다고도 한다. 神(신)의 바람이 불어 흥이 나서 즐겁고 또 그럴 때 일을 하면 잘 된다는 뜻이다. 바람이 났다는 말, 바람을 피운다는 말, 이 모든 말들은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새로운 변화가 생겼음을 뜻한다.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는 말은 바람 속에 실려 오는 신의 메시지를 들어보라는 얘기인 것을 이제 알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 바람은 공기의 기압 차이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유일신 사상이 종교적 권력을 독차지하게 되면서 만물에 깃들어 있던 모든 신들과 정령들은 자취를 감췄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엄연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과학의 功績(공적)이다. 더불어 유일신의 종교는 우리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때론 성을 내기도 하고 때론 우리들을 달래주기도 하던 자연 속의 신들과 정령을 모두 걷어가 버렸다. 그런 생각은 迷信(미신)이라 폄하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그 무엇을 잃어버렸음을 인지하고 있다. (물론 사회의 한 구석에선 무당들이 겨우겨우 신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와 노래,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과학이나 절대자의 종교가 앗아가 버린 그 무엇, 우리가 상실해버린 그 무엇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일러주고 있다.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상실한 종교적인 감성을 채워준다. 그들이야말로 먼 옛날 바람의 소리 속에서 어떤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무당 또는 靈媒(영매)들과 같기 때문이다.

 

예술로 돈 되기란 실로 어렵지만 그럼에도 예술이란 것이 존재하는 까닭은 모든 것을 과학적 설명으로 채우려는 현대 사회, 자연 속의 무수한 신들과 정령들을 몰아낸 현대 종교의 세상에서 여전히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적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장마는 유난히 바람이 세차다. 어젯밤 자정 넘은 늦은 시각 아파트 근처 길가에 서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 앞에 몸을 맡긴 채 이번 바람은 또 어떤 노래를 전해주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1달 급락했다가 4개월만에 원상 회복이 된 우리 증시 

 

국내에서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된 것은 30번 확진자부터였는데 마침 그 날은 2월 18일, 절기상으로 雨水(우수)였다. 그 날을 시작으로 해서 증시는 3월 20일 춘분 전날까지 한 달 동안 엄청난 폭락을 보였다. 그 이후 반등해서 어제 7월 22일 小暑(소서)로서 2월 18일의 주가로 원상 복귀했다. 그간의 장세를 정리해보면 1달간의 가파른 하락 이후 4개월간 반등해서 원점으로 온 셈이다.

 

이를 두고 증시에선 V자 반등이라 하지만 1달 하락 후 4개월에 걸쳐 반등했으니 엄밀한 의미에선 그렇지 않다. V자의 오른 쪽 꼭짓점이 높이는 같아도 각도는 아주 완만하다는 얘기이다.

 

 

이제 정리해볼 시점이 되었으니 

 

 

지금쯤에서 이제 최근의 증시상황을 한 번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글을 올린다.

 

글로벌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역시 유례가 없는 글로벌 유동성 공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증시는 원상회복되었으나 실물 경제는 여전히 부진하다는 점에서 괴리가 발생한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증시 상황은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일종의 단기 버블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최근의 부동산 역시 유동성 공급의 급격한 증가 때문이고 증시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한 뉴스 하나

 

 

증시로 원점으로 복귀된 그제 7월 22일 小暑(소서)가 되자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 즉 증권사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한도가 소진된 바람에 당분간 대출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뉴스였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대출 중단이 증시가 원상회복된 것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다.

 

대출 한도가 소진된 것 자체가 참으로 오랜 만, 거의 수십 년만의 일이다. 1980년대 자금경색이 심하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 지금 유동성이 끓어오르는 현 시점에서 한도가 소진되었다는 것은 한도가 적어서가 아니라 개인투자자들 이른바 동학개미들이 주식 매수를 위해 신용을 지나치리만큼 끌어당겨서 썼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한도가 소진된 것은 정부의 은밀한 지시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금융사들에 대한 위험관리 차원에서 증권사들은 투자자들에 대한 대출 한도를 자기자본의 60-70%까지로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도가 소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증권사들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증시가 원상으로 돌아온 날과 증권사의 대출 한도가 소진된 날이 겹치고 있다는 사실. 그 뉴스는 이제 증시의 반등은 여기까지! 이런 소리로 들려왔다.

 

 

신용 레버리지로 주식을 사들인 동학 개미들

 

 

증시가 하락을 시작한 2월 18일부터 그제 소서인 7월 22일까지 4개월간 외국인들은 국내 증시,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 시장 합쳐서 27조 4,364억 원 어치의 주식을 매도했고 여기에 기관투자자들까지 합쳐서 38조 가량을 매도했다. 반대로 이 기간 동안 연기금 매수가 근 4조 가량이고 나머지는 죄다 개인 투자자들이 매수해서 34조 8,800억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의 대출이나 신용 액수가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통계를 보면 주식담보대출이 현재 17조이고 신용대출이 13조 6천억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 액수는 앞서의 기간 동안 즉 2월 18일부터 7월 22일 사이에 전적으로 생겨난 대출이나 신용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액수이다. 하지만 최근 5개월 사이에 신용과 대출이 엄청난 급증세를 보이면서 급기야 증권사의 한도가 소진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2월 18일부터 7월 22일까지 개인들이 34조 이상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40% 정도는 신용을 통한 매수 즉 레버리지 매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또 여기에 포함되진 않지만 작전 세력들이 사채 시장을 통해 조달한 금액도 상당할 것이다.

 

따라서 동학개미들이 레버리지를 통해 그간 외국인과 기관들이 매도한 주식을 다 받아준 셈이다.

 

그러자 며칠 전인 7월 17일엔 대통령까지 나서서 개인투자자들을 부추기는 일도 있었다. 세법개정안 발표와 관련해서 개인투자자들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이 ‘동학개미운동’으로 증명되었다면서 금융세제 개편이 개미들의 의욕을 위축시켜선 아니 된다는 발언이었다. (대통령 역시 정치인인지라 지지율 관리를 위한 발언으로 이해할 순 있겠으나 그게 참 그렇다.)

 

 

실탄이 떨어졌으니 

 

 

이제 개인들이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는 증권사들의 한도가 소진되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더 이상 증시에 돈을 부어넣을 힘은 사실상 사라졌다는 말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소식이 있으니 그간 코로나19로 인한 하락 장세에서 적극적으로 주식매수에 나섰던 국민연금 또한 이미 금년도 매수한도가 꽉 들어찼다는 점이다. 운용기금 중에서 국내 주식에 할당된 액수를 이제 최대한으로 채웠다는 얘기이다. 하반기엔 더 이상 매수 못 한다는 말씀.

 

따라서 그간 매도로 일관했던 외국인 투자자들과 기관투자자들이 이제부터 본격 매수에 나서지 않는 이상 국내 증시의 상승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 호호당은 저번 7월 6일자 글 “고민 중인 동학 개미들에 대한 하나의 힌트 또는 조언”이란 글을 올린 바 있다. 글 내용에 외국인들이 그간 싸게 판 주식을 이제 와서 비싸게 사주진 않을 것이란 얘기가 들어있다.

 

개미 투자자들의 매수 여력은 소진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하락 장세로 반전되면 그간에 누적된 신용매수와 신용대출로 해서 매도물량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질 가능성이 극도로 커진 상태이다.

 

 

이제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갈 참이니 

 

 

따라서 이제 국내 증시의 반등 또는 상승은 이것으로서 마무리가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증시는 실로 무서운 곳이다. 바로 하락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증시는 참으로 영악하고 교활한 구석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간 개미들의 매수에 힘입어 주식 작전을 펼친 세력들 그리고 수퍼 개미들로선 이제 슬슬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즉각 하락으로 변할 가능성보다는 이제 한 달 또는 두 달 정도에 걸쳐 증시를 떠받치면서 어쩌면 조금 더 상승하도록 장을 조성하면서 마지막 출구전략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이제 당분간, 아마도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에 증시는 횡보 국면 또는 조금 더 오르는 국면이 연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래야만 그간 망설이면서 지켜만 보던 개인들까지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니.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야, 당신 말이야,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증시에 뛰어들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게 될 지도 몰라!” 하고 강박적인 메시지를 던져올 것이라 본다. 그건 욕심의 충동이기도 하고 공포의 감정이기도 하다.

 

 

증시는 사람을 홀리는 무서운 곳이라서  

 

 

제 발로 자신의 페이스로 걸어가는 사람을 달려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慾望(욕망)이고 또 하나는 恐怖(공포)이다. 욕망에 들뜬 자 이익이 있다 싶은 쪽으로 내달릴 것이고 공포에 질린 자 역시 냅다 달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천천히 걸어간다.

 

그런데 증시야말로 이 두 가지를 기가 막히게 믹스해서 부릴 줄 안다. 나 호호당이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아온 증시는 늘 마지막 상투 국면에서 또는 마지막 하락 국면에서 엄청난 마법 또는 최면의 힘을 발휘해서 사람의 얼과 넋을 쏙 빼어 놓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증시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이제 설거지 장세가 시작될 참.

 

 

이제 글을 정리할 시간이다.

 

증시는 이번 小暑(소서)로서 오를 만큼 다 올랐다. 하지만 바로 하락으로 가기 보다는 늘 그러하듯 이른바 “설거지 장세”가 시작될 것이라 본다.

 

그간에 잔뜩 재미를 봤다 하더라도 아직 그게 주식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니 조심해서 가급적 좋은 가격에 처분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일단 팔았다가 다시 조금 더 사들이고 이런 식의 작업을 펼치면서 일정 가격대에서 개미들로 하여금 안달이 나게 만들어 물량을 떠넘기는 과정이 펼쳐질 것이란 얘기이다.

 

최근 며칠 사이 특히 제약 바이오 주식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마지막 상투장의 모습이 연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제약 바이오 기업들 중에 코로나 백신이나 치료제를 진짜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과 행운을 가진 기업이 몇이나 될까? 하나 정도는 될까?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유수의 제약사들과 바이오 기업들이 일제히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은 글로벌 전체적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서 끊임없이 변종을 일으키는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런 마당에 국내의 모든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죄다 들썩이고 급등하고 있으니 냉정히 보면 이건 알고도 속아주는 코미디나 다름이 없다.

 

임상2상이 내년 2월경에 완료된다는 소식 하나로 주가가 불과 얼마 전에 6천원 하던 것이 20배나 급등하고 있다. 그러니 최근의 제약 바이오 급등 현상은 그야말로 돈 내고 돈 먹기 양상이고, 나아가서 마지막 상투 장세의 모습이다.

 

 

모른 척 하고 따라는 가지만 여차하면 튀어야지.

 

 

나 호호당도 주식을 하고 있다. 그러니 재미도 약간 보았다. 증시 반등이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당분간은 모른 척 태연하게 따라가 줄 생각이다. 영화처럼 증시도 라스트 씬이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법이니 그렇다. 엑기스는 보고 나와야 하는 법, 하지만 아이쿠! 싶은 순간이 오면 즉각 꼬리는 떼어주고 도망 나올 준비를 해야 하겠다.

 

그 시점이 8월 처서가 될 지 9월 추분이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동학 개미님들의 안녕을 빌면서 글을 마친다.

중국드라마 "구주표묘록"을 재밌게 보았다. 결말이 조금 싱거웠지만 나름 재미가 있었다. 멋진 풍경들이 많이 나와서 더욱 좋았다. 결국 중국적 세계관이란 게 중국을 중심으로 북방의 유목민과 기타 산해경에 나오는 여러 것들을 혼합해서 나름 만든 모양이다. 주인공 아소륵의 고향 풍경을 생각하면서 그렸다. 나 호호당은 젊은 날 꽤나 초원의 삶에 매료된 바 있다. 지금도 그렇냐고? 묻는다면 어림도 없다고 답하겠다. 그런데 가서 살면 금방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늙으면 적응력이 떨어지니 그렇다. 그림 전체에 습기가 어린 느낌을 주었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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