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향한 연어들의 질주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해 씨를 뿌리기 위해 물을 거슬러 오른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곰에게 잡혀 먹히기도 한다. 마침내 산란 장소에 도달한 놈들도 온 몸이 성하지가 않다. 산란을 마친 연어 역시 곧 죽는다. 목적장소에 도달하지 못하는 놈이나 도달한 놈이나 죽는 시점은 크게 차이가 없다.

 

다만 알을 낳고 씨를 뿌린 놈은 성공이고 그렇지 못한 놈은 실패가 된다. 그런데 궁금하다, 산란에 성공한 놈들은 스스로 성공했다 여길까? 아니면 그냥 본능일까? 더불어서 동물의 행위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고 해서 그냥 본능이라 치부해도 되는 걸까? 연어는 저능 동물이니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건 너무 무례한 게 아닐까?

 

텔레비전에서 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볼 때마다 상당한 전율을 느낀다. 상류에서 부화한 연어는 먼 바다로 내려가 일생을 누리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면 자신이 부화한 강으로 되돌아온다. 물을 거슬러 올라 고향에 도달하면 알을 낳고 산란을 마친다. 그리곤 죽는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려면 엄청난 힘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필사적일 것이다. 그 몸짓은 산란을 위해서이지만 동시에 죽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생식과 죽음이 같은 장소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다.

 

번식과 죽음이 거의 동시적인 일이라는 사실, 그를 위해 필사적으로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행동은 나 호호당을 전율케 한다.

 

 

인간의 관점

 

 

아들 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잘 살아라! 이 말은 결혼식장의 폐백실에서 예전 시부모들이 신부에게 해주는 덕담이었다.

 

그런데 연어는 알을 낳으면 바로 죽는다. 이 차이가 나를 전율케 한다. 산란과 수정이 삶의 최종적 행위가 되는 연어.

 

어쩌면 연어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인식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금방 ‘아니’ 하는 답이 나왔다. 바다에서 포식자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을 보면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고 죽음을 회피하려는 생각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알을 낳고 수정을 하고 나면 곧 죽을 거란 생각도 연어들은 하고 있을 것이다. 산란을 마치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몸을 아끼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서 저처럼 치열하게 물을 거슬러 오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죽음을 경험한 이는 없기에 

 

 

죽음이란 것, 참으로 생경한 그 무엇이다. 살아있는 자 중에 죽음을 체험해본 자는 없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지만 되살아났다는 점에서 죽음을 경험했다고 말하긴 좀 그렇다. 거의 죽음 문턱에서 되돌아온 사람의 경험을 임사체험이란 한다. 영어로 near-death experience, 줄여서 NDE라고 한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을 했다는 것이지 죽음의 모든 과정을 체험한 자는 되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죽음을 알지 못한다.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필사적으로 죽을 장소, 산란의 장소로 헤엄쳐가는 연어들의 저 몸짓 또한 우리로선 이해할 수가 없다.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대단히 힘들고 고되지만 그 순간 몸에서 그런 것을 잊게 해주는 비장의 물질이 분비되는 것은 아닐까? 또 알을 낳고 수정을 마친 연어에겐 보상으로서 죽음 직전에 대단히 편안하고 안락한 호르몬이 분비되는 바람에 사실상 안락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난 성공했어, 이젠 너무나도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닐까? 연어들은.

 

 

운명에 대해선 알게 되었으나 

 

 

오래 전부터 운명을 연구해왔고 그 비밀을 알아낸 결과 이젠 어떤 면에서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는 탓에 크게 궁금한 것도 없다. 하지만 죽음만큼은 여전히 궁금하고 모르는 점이 많다.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통해 운명을 연구하다 보니 죽는 날자와 시점에 대해서도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 호호당이다. 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해선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다. 내 몸으로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곁에서 죽음을 지켜본 일은 몇 번 있다. 선친의 임종을 지켰기에 손을 잡은 채로 마지막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지켜보았을 뿐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늦여름 저녁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숲속을 거닐면서 너희들은 이제 곧 죽는다면서? 짝을 짓지 못하면 미션을 완수하지 못할 터, 맘껏 울어라, 이해한다. 다만 곧 생명을 마칠 너희들이 딱하고 가엽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의 생각일 뿐 정작 매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늘 강아지들과 함께 살아오고 10년 이상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다 보니 포유류의 경우 사고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사고능력만이 아니라 그들 또한 희로애락과 함께 나름의 윤리적 감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미안한 감정도 있고 욕심 부렸을 땐 뉘우치고 또 반성할 줄도 안다. 이처럼 포유류는 인간과 비교할 때 정도와 수준의 차이일 뿐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연어의 생각이나 매미의 사고 수준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산란장소를 향해 동시에 죽음의 장소를 향해 맹렬히 물을 거슬러 오르는 그들의 의식에 대해선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평범한 2030 세대, 희망을 가질 수 없으니  

 

 

생각을 돌려본다.

 

얼마 전부터 빚투란 단어, 영끌이란 말이 대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금리가 저렴하니 빚을 내어 마련한 자금으로 주식 초단타 매매를 통해 현재의 처지에서 탈출해보자는 것이고, 이제라도 앞선 세대가 잔뜩 올려놓은 고가의 부동산을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라도 사들인 뒤 기득권 대열의 끝자락 말석이라도 좋으니 합류해보자는 노력이다.

 

하지만 빚투하는 청년들과 영끌하는 청년들 간에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2030 세대를 보면 그래도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청년들이 영끌로 최대한 빚을 내어 무리하게라도 집을 장만하고 있고, 그게 안 되는 청년들이 빚투를 통해 주식을 하고 있기에 꽤나 차이가 난다. 어쩌면 현격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중위값 2030 세대를 생각해보라. 평범하게 초중고를 마치고 수도권의 그저 그런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다. 취업조차 못 하고 있는 청년들이 허다하고, 직장에 다닌다 해도 대다수가 200만 원대의 급여를 받고 있다. 거기에 학자금 대출 또한 가득 안고 있는 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부동산이란 보증금 1000에 월세 40-50 내는 것이 고작인 현실이다.

 

그런 평범한 2030 세대는 사실 영끌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그저 빚투 정도나 하면 할까.

 

 

연어의 삶, 인간의 삶

 

 

연어 얘길 하다가 갑자기 2030 세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 까닭은 나 호호당의 눈에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필사적인 몸짓과 최근 우리 사회의 2030 세대들의 몸짓이 자꾸 겹쳐지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어져버린 명절

 

 

추석 명절인데 이런 글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글을 올리지 않을 이유도 없다. 왜냐면 오늘에 이르러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고향에 내려가도 잠깐 얼굴만 비추고 처가댁 들러 인사한 다음 고속도로 상황 확인하면서 전투적으로 서울로 돌아와서 휴식을 갖거나 또는 다른 데로 놀러가는 연휴로서의 추석 명절일 뿐이다.

 

오히려 추석인 탓에 간만에 얼굴을 대하게 되고 그 바람에 끔찍한 사고가 생기고 있다. 추석 전날 누나 부부를 찾았다가 흉기로 매형을 죽인 사건, 추석을 맞아 혼자 살던 어머니를 찾은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 등이 그것이다.

 

뉴스엔 “추석 명절인데... 가족 간 참극 잇따라”, 이런 식으로 제목이 붙었지만 그건 상투적인 문구, 내 기억엔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이면 으레 이런 사고가 발생해왔다. 안 보는 게 더 나은 사람들이 모처럼 얼굴을 대하다 보니 묵은 감정이 되살아나서 큰 일이 벌어지는 게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악몽은 언제까지? 

 

 

트럼프가 코로나19에 걸렸다고 한다. 최근 들어 코로나19로 인한 악영향이 이제 만성이 된 탓에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또 다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지시켜주고 있다. 그저 이번 추석 명절이 코로나19가 또 다시 확대되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 뿐이다.

 

최근 글을 올리는 빈도가 떨어졌다. 생각이 많은 탓이다. 이를 나는 인풋 기간이라 부른다. 때가 되면 아웃풋을 하게 되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