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이다. 얘기하려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는 점이다.

 

조용필 가수의 노래에도 바람의 노래란 것이 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하는 가사가 그것이다. 가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는 노래도 있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는 제목의 시집 제목이자 영화도 있고 ”바람 부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 이렇게 시작하는 옛 노래도 있다.

 

예로부터 시나 노래, 또 오늘날의 가요 속엔 바람을 언급하는 내용들이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관해 말하는 내용들이 들어가고 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시작을 하거나 소설을 쓸 때 제목에 붙여도 좋고 내용 속에 바람에 관한 얘기를 넣을 것 같으면 인기를 얻을 확률이 아주 높다. 예로서 이제는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폭풍의 언덕”이란 소설 역시 제목에서부터 바람을 언급하고 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벌판과 바람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그런가 하면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란 노래를 부른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문학이나 노래 속에서 “사랑”이란 단어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람이란 단어라 하겠다.

 

왜 그럴까? 하는 것이 오늘 글의 주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바람’이란 단어는 누군가 말하고 또 그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속을 흔들어 놓거나 또 설레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 에둘러 가보자.

 

성인이라 단어 앞에 들어간 聖(성)이란 한자는 원래 儒敎(유교)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훗날에 와서 聖人(성인)이란 하면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 서양의 ‘saint’란 단어에 대해 대응하는 번역어로서 ‘거룩한 순교자’의 의미로 사용되고도 있다.

 

그런데 聖(성)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주 재미가 있다. 알고 보면 공자가 언급하기 이전부터 聖(성)이란 단어는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형 문자에서 발전해온 한자이기에 聖(성)이란 글자를 분해해보면 귀 耳(이)와 입 口(구), 천간 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壬(임)자는 나중에 추가된 것이고 원래는 耳(이)와 口(구)로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듣고 말하는 것에 사람의 총명함이 다 들어 있기에 총명한 사람이 聖(성)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풀이는 기억하기엔 좋아도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귀 耳(이) 곁에 붙은 입 口(구)는 초기 갑골문 속의 상형문자로 보면 한글의 자모인 ‘ㅂ’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ㅂ’의 뜻은 무엇일까? 하면 그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祭器(제기)였다.

 

이에 聖(성)이란 한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신의 소리 즉 메시지를 귀로 들을 수 있는 신령한 무당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 점에 대해 나 호호당은 일본의 뛰어난 한자 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책을 통해 알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따라서 성인이란 일반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신의 메시지 또는 계시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 또는 무당을 뜻했다.

 

그러다가 훗날에 이르러 사회가 보다 조직적으로 변하면서 정치적 권력자인 王(왕)이 등장했고 중국에선 유교가 생겨나면서 뜻이 새롭게 해석되었다.

 

먼 옛날엔 동서양 모두 신령과 통하는 靈媒(영매)는 巫(무) 즉 무당이었고 무당이 씨족이나 부족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인간 간의 투쟁이 격렬해지면서 힘이 뛰어나고 통솔력이 뛰어난 자가 사회적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런 자가 추장 또는 족장이 되고 또 나중엔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통한 무당의 권위는 예전에 비해선 줄어들었으나 그럼에도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神政一致(신정일치) 사회에서 신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 분화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왕이 최고 권력자가 되자 신의 소리를 듣고 통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왕권에 종사하는 새로운 직종으로서 神官(신관)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聖(성)의 의미 역시 변화하게 되었다. 유교의 鼻祖(비조)인 공자 시대에 이르러선 세속적 권력은 왕의 영역이지만 정신적 영역은 여전히 聖人(성인)이라 부르며 나름의 권위를 유지해갔던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무당이나 신관이 신에게 제를 올리면서 신의 계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聖(성)이란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당은 어떤 식으로 신의 계시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이다.

 

그 답은 이미 글 앞부분에서 얘기했다. 바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그 속에 실려 있는 신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거기에 담긴 계시를 신관들이나 무당들은 들었던 것이다.

 

우리 아들의 어린 시절 밤이 되었는데 좀처럼 잠들지 않고 놀아달라고 칭얼대면 돌아가신 선친께선 “어서 자야지, 창밖에 바람 도깨비가 울고 있잖아,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야만 괜찮거든” 하는 얘기를 하시곤 했다.

 

겨울밤 바람소리는 대단히 두려운 바가 있다. 갑자기 세게 불기도 하고 휘몰아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으레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지만 어린 시절 겨울밤 바람소리에 무서워했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국 고대 기록에 보면 바람마다의 이름이 있었으니 그건 사실 바람신 즉 風神(풍신)의 이름이었다. 네 방위의 風神(풍신)에 대해 가령 동쪽의 바람신을 劦(협)이라 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선 겨울에 부는 북쪽 바람신의 이름을 보레아스(Boreas)라고 했다.

 

四方(사방)에는 저마다 신이 있어 소식을 보내오고 손길을 뻗쳐오는데 그 방법이 바람이거나 또는 새, 즉 神鳥(신조)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철새는 옛 사람들에게 신의 전령이자 使者(사자)였던 것이다. 우리 민속의 솟대가 그것이다.

 

風土(풍토)라는 단어가 있다. 바람과 땅이란 말인데 흔히 특정 지방의 기후와 토질을 뜻하기도 하며 풍토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도 달라진다는 생각, 지금도 우리들은 하고 있다. 바람은 변화의 상징이고 땅은 고정된 것이니 이 둘이 만나서 특유의 기질과 성향을 형성한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바람이란 변화를 의미했고 따라서 그건 특별한 신의 손길로서 여겨졌다.

 

살랑대는 봄바람이 불면 꽃이 피고 새싹이 움텄다. 봄바람은 생명을 일으키는 신의 손길이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면 초목이 시들게 되니 엄숙 살벌한 기운 즉 肅殺(숙살)의 손길이었다. 겨울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재로 돌아가고 대지 위엔 앙상한 것들만 남게 되니 그건 죽음의 손길이었다. 이처럼 바람은 변화를 불러온다.

 

오늘날엔 보기 드물지만 예전 항구에 가면 어선들이 출항하기 전 무당인 만신이 굿마당을 펼친 다음 이번에 나가면 滿船(만선)이 될 것이란 말을 한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배들이 일제히 出漁(출어)에 나선다. 그 바람은 이번에 나가면 좋을 것이란 신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고 만신은 그 바람의 소리 또는 노래를 듣고 감을 잡는 것이다.

 

신이 난다는 말을 달리 신바람이 난다고도 한다. 神(신)의 바람이 불어 흥이 나서 즐겁고 또 그럴 때 일을 하면 잘 된다는 뜻이다. 바람이 났다는 말, 바람을 피운다는 말, 이 모든 말들은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새로운 변화가 생겼음을 뜻한다.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는 말은 바람 속에 실려 오는 신의 메시지를 들어보라는 얘기인 것을 이제 알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 바람은 공기의 기압 차이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유일신 사상이 종교적 권력을 독차지하게 되면서 만물에 깃들어 있던 모든 신들과 정령들은 자취를 감췄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엄연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과학의 功績(공적)이다. 더불어 유일신의 종교는 우리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때론 성을 내기도 하고 때론 우리들을 달래주기도 하던 자연 속의 신들과 정령을 모두 걷어가 버렸다. 그런 생각은 迷信(미신)이라 폄하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그 무엇을 잃어버렸음을 인지하고 있다. (물론 사회의 한 구석에선 무당들이 겨우겨우 신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와 노래,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과학이나 절대자의 종교가 앗아가 버린 그 무엇, 우리가 상실해버린 그 무엇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일러주고 있다.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상실한 종교적인 감성을 채워준다. 그들이야말로 먼 옛날 바람의 소리 속에서 어떤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무당 또는 靈媒(영매)들과 같기 때문이다.

 

예술로 돈 되기란 실로 어렵지만 그럼에도 예술이란 것이 존재하는 까닭은 모든 것을 과학적 설명으로 채우려는 현대 사회, 자연 속의 무수한 신들과 정령들을 몰아낸 현대 종교의 세상에서 여전히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적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장마는 유난히 바람이 세차다. 어젯밤 자정 넘은 늦은 시각 아파트 근처 길가에 서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 앞에 몸을 맡긴 채 이번 바람은 또 어떤 노래를 전해주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