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이다. 얘기하려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는 점이다.

 

조용필 가수의 노래에도 바람의 노래란 것이 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하는 가사가 그것이다. 가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는 노래도 있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는 제목의 시집 제목이자 영화도 있고 ”바람 부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 이렇게 시작하는 옛 노래도 있다.

 

예로부터 시나 노래, 또 오늘날의 가요 속엔 바람을 언급하는 내용들이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관해 말하는 내용들이 들어가고 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시작을 하거나 소설을 쓸 때 제목에 붙여도 좋고 내용 속에 바람에 관한 얘기를 넣을 것 같으면 인기를 얻을 확률이 아주 높다. 예로서 이제는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폭풍의 언덕”이란 소설 역시 제목에서부터 바람을 언급하고 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벌판과 바람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그런가 하면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란 노래를 부른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문학이나 노래 속에서 “사랑”이란 단어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람이란 단어라 하겠다.

 

왜 그럴까? 하는 것이 오늘 글의 주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바람’이란 단어는 누군가 말하고 또 그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속을 흔들어 놓거나 또 설레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 에둘러 가보자.

 

성인이라 단어 앞에 들어간 聖(성)이란 한자는 원래 儒敎(유교)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훗날에 와서 聖人(성인)이란 하면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 서양의 ‘saint’란 단어에 대해 대응하는 번역어로서 ‘거룩한 순교자’의 의미로 사용되고도 있다.

 

그런데 聖(성)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주 재미가 있다. 알고 보면 공자가 언급하기 이전부터 聖(성)이란 단어는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형 문자에서 발전해온 한자이기에 聖(성)이란 글자를 분해해보면 귀 耳(이)와 입 口(구), 천간 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壬(임)자는 나중에 추가된 것이고 원래는 耳(이)와 口(구)로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듣고 말하는 것에 사람의 총명함이 다 들어 있기에 총명한 사람이 聖(성)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풀이는 기억하기엔 좋아도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귀 耳(이) 곁에 붙은 입 口(구)는 초기 갑골문 속의 상형문자로 보면 한글의 자모인 ‘ㅂ’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ㅂ’의 뜻은 무엇일까? 하면 그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祭器(제기)였다.

 

이에 聖(성)이란 한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신의 소리 즉 메시지를 귀로 들을 수 있는 신령한 무당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 점에 대해 나 호호당은 일본의 뛰어난 한자 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책을 통해 알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따라서 성인이란 일반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신의 메시지 또는 계시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 또는 무당을 뜻했다.

 

그러다가 훗날에 이르러 사회가 보다 조직적으로 변하면서 정치적 권력자인 王(왕)이 등장했고 중국에선 유교가 생겨나면서 뜻이 새롭게 해석되었다.

 

먼 옛날엔 동서양 모두 신령과 통하는 靈媒(영매)는 巫(무) 즉 무당이었고 무당이 씨족이나 부족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인간 간의 투쟁이 격렬해지면서 힘이 뛰어나고 통솔력이 뛰어난 자가 사회적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런 자가 추장 또는 족장이 되고 또 나중엔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통한 무당의 권위는 예전에 비해선 줄어들었으나 그럼에도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神政一致(신정일치) 사회에서 신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 분화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왕이 최고 권력자가 되자 신의 소리를 듣고 통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왕권에 종사하는 새로운 직종으로서 神官(신관)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聖(성)의 의미 역시 변화하게 되었다. 유교의 鼻祖(비조)인 공자 시대에 이르러선 세속적 권력은 왕의 영역이지만 정신적 영역은 여전히 聖人(성인)이라 부르며 나름의 권위를 유지해갔던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무당이나 신관이 신에게 제를 올리면서 신의 계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聖(성)이란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당은 어떤 식으로 신의 계시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이다.

 

그 답은 이미 글 앞부분에서 얘기했다. 바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그 속에 실려 있는 신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거기에 담긴 계시를 신관들이나 무당들은 들었던 것이다.

 

우리 아들의 어린 시절 밤이 되었는데 좀처럼 잠들지 않고 놀아달라고 칭얼대면 돌아가신 선친께선 “어서 자야지, 창밖에 바람 도깨비가 울고 있잖아,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야만 괜찮거든” 하는 얘기를 하시곤 했다.

 

겨울밤 바람소리는 대단히 두려운 바가 있다. 갑자기 세게 불기도 하고 휘몰아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으레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지만 어린 시절 겨울밤 바람소리에 무서워했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국 고대 기록에 보면 바람마다의 이름이 있었으니 그건 사실 바람신 즉 風神(풍신)의 이름이었다. 네 방위의 風神(풍신)에 대해 가령 동쪽의 바람신을 劦(협)이라 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선 겨울에 부는 북쪽 바람신의 이름을 보레아스(Boreas)라고 했다.

 

四方(사방)에는 저마다 신이 있어 소식을 보내오고 손길을 뻗쳐오는데 그 방법이 바람이거나 또는 새, 즉 神鳥(신조)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철새는 옛 사람들에게 신의 전령이자 使者(사자)였던 것이다. 우리 민속의 솟대가 그것이다.

 

風土(풍토)라는 단어가 있다. 바람과 땅이란 말인데 흔히 특정 지방의 기후와 토질을 뜻하기도 하며 풍토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도 달라진다는 생각, 지금도 우리들은 하고 있다. 바람은 변화의 상징이고 땅은 고정된 것이니 이 둘이 만나서 특유의 기질과 성향을 형성한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바람이란 변화를 의미했고 따라서 그건 특별한 신의 손길로서 여겨졌다.

 

살랑대는 봄바람이 불면 꽃이 피고 새싹이 움텄다. 봄바람은 생명을 일으키는 신의 손길이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면 초목이 시들게 되니 엄숙 살벌한 기운 즉 肅殺(숙살)의 손길이었다. 겨울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재로 돌아가고 대지 위엔 앙상한 것들만 남게 되니 그건 죽음의 손길이었다. 이처럼 바람은 변화를 불러온다.

 

오늘날엔 보기 드물지만 예전 항구에 가면 어선들이 출항하기 전 무당인 만신이 굿마당을 펼친 다음 이번에 나가면 滿船(만선)이 될 것이란 말을 한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배들이 일제히 出漁(출어)에 나선다. 그 바람은 이번에 나가면 좋을 것이란 신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고 만신은 그 바람의 소리 또는 노래를 듣고 감을 잡는 것이다.

 

신이 난다는 말을 달리 신바람이 난다고도 한다. 神(신)의 바람이 불어 흥이 나서 즐겁고 또 그럴 때 일을 하면 잘 된다는 뜻이다. 바람이 났다는 말, 바람을 피운다는 말, 이 모든 말들은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새로운 변화가 생겼음을 뜻한다.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는 말은 바람 속에 실려 오는 신의 메시지를 들어보라는 얘기인 것을 이제 알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 바람은 공기의 기압 차이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유일신 사상이 종교적 권력을 독차지하게 되면서 만물에 깃들어 있던 모든 신들과 정령들은 자취를 감췄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엄연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과학의 功績(공적)이다. 더불어 유일신의 종교는 우리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때론 성을 내기도 하고 때론 우리들을 달래주기도 하던 자연 속의 신들과 정령을 모두 걷어가 버렸다. 그런 생각은 迷信(미신)이라 폄하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그 무엇을 잃어버렸음을 인지하고 있다. (물론 사회의 한 구석에선 무당들이 겨우겨우 신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와 노래,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과학이나 절대자의 종교가 앗아가 버린 그 무엇, 우리가 상실해버린 그 무엇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일러주고 있다.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상실한 종교적인 감성을 채워준다. 그들이야말로 먼 옛날 바람의 소리 속에서 어떤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무당 또는 靈媒(영매)들과 같기 때문이다.

 

예술로 돈 되기란 실로 어렵지만 그럼에도 예술이란 것이 존재하는 까닭은 모든 것을 과학적 설명으로 채우려는 현대 사회, 자연 속의 무수한 신들과 정령들을 몰아낸 현대 종교의 세상에서 여전히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적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장마는 유난히 바람이 세차다. 어젯밤 자정 넘은 늦은 시각 아파트 근처 길가에 서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 앞에 몸을 맡긴 채 이번 바람은 또 어떤 노래를 전해주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1달 급락했다가 4개월만에 원상 회복이 된 우리 증시 

 

국내에서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된 것은 30번 확진자부터였는데 마침 그 날은 2월 18일, 절기상으로 雨水(우수)였다. 그 날을 시작으로 해서 증시는 3월 20일 춘분 전날까지 한 달 동안 엄청난 폭락을 보였다. 그 이후 반등해서 어제 7월 22일 小暑(소서)로서 2월 18일의 주가로 원상 복귀했다. 그간의 장세를 정리해보면 1달간의 가파른 하락 이후 4개월간 반등해서 원점으로 온 셈이다.

 

이를 두고 증시에선 V자 반등이라 하지만 1달 하락 후 4개월에 걸쳐 반등했으니 엄밀한 의미에선 그렇지 않다. V자의 오른 쪽 꼭짓점이 높이는 같아도 각도는 아주 완만하다는 얘기이다.

 

 

이제 정리해볼 시점이 되었으니 

 

 

지금쯤에서 이제 최근의 증시상황을 한 번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글을 올린다.

 

글로벌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역시 유례가 없는 글로벌 유동성 공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증시는 원상회복되었으나 실물 경제는 여전히 부진하다는 점에서 괴리가 발생한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증시 상황은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일종의 단기 버블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최근의 부동산 역시 유동성 공급의 급격한 증가 때문이고 증시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한 뉴스 하나

 

 

증시로 원점으로 복귀된 그제 7월 22일 小暑(소서)가 되자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 즉 증권사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한도가 소진된 바람에 당분간 대출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뉴스였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대출 중단이 증시가 원상회복된 것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다.

 

대출 한도가 소진된 것 자체가 참으로 오랜 만, 거의 수십 년만의 일이다. 1980년대 자금경색이 심하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 지금 유동성이 끓어오르는 현 시점에서 한도가 소진되었다는 것은 한도가 적어서가 아니라 개인투자자들 이른바 동학개미들이 주식 매수를 위해 신용을 지나치리만큼 끌어당겨서 썼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한도가 소진된 것은 정부의 은밀한 지시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금융사들에 대한 위험관리 차원에서 증권사들은 투자자들에 대한 대출 한도를 자기자본의 60-70%까지로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도가 소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증권사들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증시가 원상으로 돌아온 날과 증권사의 대출 한도가 소진된 날이 겹치고 있다는 사실. 그 뉴스는 이제 증시의 반등은 여기까지! 이런 소리로 들려왔다.

 

 

신용 레버리지로 주식을 사들인 동학 개미들

 

 

증시가 하락을 시작한 2월 18일부터 그제 소서인 7월 22일까지 4개월간 외국인들은 국내 증시,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 시장 합쳐서 27조 4,364억 원 어치의 주식을 매도했고 여기에 기관투자자들까지 합쳐서 38조 가량을 매도했다. 반대로 이 기간 동안 연기금 매수가 근 4조 가량이고 나머지는 죄다 개인 투자자들이 매수해서 34조 8,800억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의 대출이나 신용 액수가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통계를 보면 주식담보대출이 현재 17조이고 신용대출이 13조 6천억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 액수는 앞서의 기간 동안 즉 2월 18일부터 7월 22일 사이에 전적으로 생겨난 대출이나 신용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액수이다. 하지만 최근 5개월 사이에 신용과 대출이 엄청난 급증세를 보이면서 급기야 증권사의 한도가 소진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2월 18일부터 7월 22일까지 개인들이 34조 이상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40% 정도는 신용을 통한 매수 즉 레버리지 매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또 여기에 포함되진 않지만 작전 세력들이 사채 시장을 통해 조달한 금액도 상당할 것이다.

 

따라서 동학개미들이 레버리지를 통해 그간 외국인과 기관들이 매도한 주식을 다 받아준 셈이다.

 

그러자 며칠 전인 7월 17일엔 대통령까지 나서서 개인투자자들을 부추기는 일도 있었다. 세법개정안 발표와 관련해서 개인투자자들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이 ‘동학개미운동’으로 증명되었다면서 금융세제 개편이 개미들의 의욕을 위축시켜선 아니 된다는 발언이었다. (대통령 역시 정치인인지라 지지율 관리를 위한 발언으로 이해할 순 있겠으나 그게 참 그렇다.)

 

 

실탄이 떨어졌으니 

 

 

이제 개인들이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는 증권사들의 한도가 소진되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더 이상 증시에 돈을 부어넣을 힘은 사실상 사라졌다는 말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소식이 있으니 그간 코로나19로 인한 하락 장세에서 적극적으로 주식매수에 나섰던 국민연금 또한 이미 금년도 매수한도가 꽉 들어찼다는 점이다. 운용기금 중에서 국내 주식에 할당된 액수를 이제 최대한으로 채웠다는 얘기이다. 하반기엔 더 이상 매수 못 한다는 말씀.

 

따라서 그간 매도로 일관했던 외국인 투자자들과 기관투자자들이 이제부터 본격 매수에 나서지 않는 이상 국내 증시의 상승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 호호당은 저번 7월 6일자 글 “고민 중인 동학 개미들에 대한 하나의 힌트 또는 조언”이란 글을 올린 바 있다. 글 내용에 외국인들이 그간 싸게 판 주식을 이제 와서 비싸게 사주진 않을 것이란 얘기가 들어있다.

 

개미 투자자들의 매수 여력은 소진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하락 장세로 반전되면 그간에 누적된 신용매수와 신용대출로 해서 매도물량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질 가능성이 극도로 커진 상태이다.

 

 

이제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갈 참이니 

 

 

따라서 이제 국내 증시의 반등 또는 상승은 이것으로서 마무리가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증시는 실로 무서운 곳이다. 바로 하락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증시는 참으로 영악하고 교활한 구석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간 개미들의 매수에 힘입어 주식 작전을 펼친 세력들 그리고 수퍼 개미들로선 이제 슬슬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즉각 하락으로 변할 가능성보다는 이제 한 달 또는 두 달 정도에 걸쳐 증시를 떠받치면서 어쩌면 조금 더 상승하도록 장을 조성하면서 마지막 출구전략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이제 당분간, 아마도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에 증시는 횡보 국면 또는 조금 더 오르는 국면이 연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래야만 그간 망설이면서 지켜만 보던 개인들까지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니.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야, 당신 말이야,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증시에 뛰어들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게 될 지도 몰라!” 하고 강박적인 메시지를 던져올 것이라 본다. 그건 욕심의 충동이기도 하고 공포의 감정이기도 하다.

 

 

증시는 사람을 홀리는 무서운 곳이라서  

 

 

제 발로 자신의 페이스로 걸어가는 사람을 달려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慾望(욕망)이고 또 하나는 恐怖(공포)이다. 욕망에 들뜬 자 이익이 있다 싶은 쪽으로 내달릴 것이고 공포에 질린 자 역시 냅다 달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천천히 걸어간다.

 

그런데 증시야말로 이 두 가지를 기가 막히게 믹스해서 부릴 줄 안다. 나 호호당이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아온 증시는 늘 마지막 상투 국면에서 또는 마지막 하락 국면에서 엄청난 마법 또는 최면의 힘을 발휘해서 사람의 얼과 넋을 쏙 빼어 놓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증시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이제 설거지 장세가 시작될 참.

 

 

이제 글을 정리할 시간이다.

 

증시는 이번 小暑(소서)로서 오를 만큼 다 올랐다. 하지만 바로 하락으로 가기 보다는 늘 그러하듯 이른바 “설거지 장세”가 시작될 것이라 본다.

 

그간에 잔뜩 재미를 봤다 하더라도 아직 그게 주식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니 조심해서 가급적 좋은 가격에 처분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일단 팔았다가 다시 조금 더 사들이고 이런 식의 작업을 펼치면서 일정 가격대에서 개미들로 하여금 안달이 나게 만들어 물량을 떠넘기는 과정이 펼쳐질 것이란 얘기이다.

 

최근 며칠 사이 특히 제약 바이오 주식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마지막 상투장의 모습이 연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제약 바이오 기업들 중에 코로나 백신이나 치료제를 진짜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과 행운을 가진 기업이 몇이나 될까? 하나 정도는 될까?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유수의 제약사들과 바이오 기업들이 일제히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은 글로벌 전체적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서 끊임없이 변종을 일으키는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런 마당에 국내의 모든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죄다 들썩이고 급등하고 있으니 냉정히 보면 이건 알고도 속아주는 코미디나 다름이 없다.

 

임상2상이 내년 2월경에 완료된다는 소식 하나로 주가가 불과 얼마 전에 6천원 하던 것이 20배나 급등하고 있다. 그러니 최근의 제약 바이오 급등 현상은 그야말로 돈 내고 돈 먹기 양상이고, 나아가서 마지막 상투 장세의 모습이다.

 

 

모른 척 하고 따라는 가지만 여차하면 튀어야지.

 

 

나 호호당도 주식을 하고 있다. 그러니 재미도 약간 보았다. 증시 반등이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당분간은 모른 척 태연하게 따라가 줄 생각이다. 영화처럼 증시도 라스트 씬이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법이니 그렇다. 엑기스는 보고 나와야 하는 법, 하지만 아이쿠! 싶은 순간이 오면 즉각 꼬리는 떼어주고 도망 나올 준비를 해야 하겠다.

 

그 시점이 8월 처서가 될 지 9월 추분이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동학 개미님들의 안녕을 빌면서 글을 마친다.

중국드라마 "구주표묘록"을 재밌게 보았다. 결말이 조금 싱거웠지만 나름 재미가 있었다. 멋진 풍경들이 많이 나와서 더욱 좋았다. 결국 중국적 세계관이란 게 중국을 중심으로 북방의 유목민과 기타 산해경에 나오는 여러 것들을 혼합해서 나름 만든 모양이다. 주인공 아소륵의 고향 풍경을 생각하면서 그렸다. 나 호호당은 젊은 날 꽤나 초원의 삶에 매료된 바 있다. 지금도 그렇냐고? 묻는다면 어림도 없다고 답하겠다. 그런데 가서 살면 금방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늙으면 적응력이 떨어지니 그렇다. 그림 전체에 습기가 어린 느낌을 주었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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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인근 장도의 청해진 유적이다. 먼 옛날 해상왕으로 중국과 일본, 신라를 아울렀던 해상 무역 기지였던 곳이다. 동영상으로 보다가 문득 흥취가 가서 그려보았다. 하늘을 영상과는 달리 해서 흰 띠 구름을 넣었다. 가을 느낌이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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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의 걱정이란 크게 세 가지 

 

 

자식 낳고 사는 보통 사람의 걱정이란 게 알고 보면 크게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먹고 사는 걱정, 건강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식 걱정이다.

 

예전에야 워낙 자녀를 많이 둔 까닭에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걱정도 많았겠지만 한편으론 그 걱정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보니 오히려 속 편하게 체념할 줄도 알았던 것 같다. “저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 하는 속담이 그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다”고 하듯이 크든 적든 먹고는 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녀를 둔 부모로서 평생 염두에서 떠나는 법이 없는 것이 바로 자녀 걱정이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더 잘 되었으면 하는 걱정이고 잘 되지 않으면 당연히 걱정이다. 그건 생명의 논리이고 生殖(생식) 즉 세대를 이어감에 있어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까닭에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마에 걱정을 매달고 산다.

 

 

자녀 문제 상담에 잘 응하지 않는 이유 

 

 

그런 관계로 자녀 걱정을 하는 부모가 내게 상담을 신청해올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대개는 세월이 약이니 나중에 좋아질 거라는 정도로 달래주는 정도로 그치고 어지간해선 상담에 응하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아니라 질병이라든가 장애와 같은 심각한 사정이 있을 경우 상담에 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부모의 답답한 속을 조금치나마 풀어주는 것이 고작일 뿐, 결국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상담을 해도 본인과 직접 얘기를 주고받아야 한 마디라도 나름 의미 있는 얘기를 해줄 수 있는 것이지 부모를 통해 전해 듣는 것은 사실 별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

 

 

의욕을 잃은 젊은이와의 상담

 

 

얼마 전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상담을 했다. 미국 유학생이었는데 근 10년 사이에 전공을 여러 차례 변경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일러 갈 之(지)자 행보 또는 지그재그 스텝이라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으론 먹고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면서 이과를 택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리저리 전공을 변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의 경우 10년씩이나 미국에서 전공을 바꿔가면서 유학을 하고 있다면 가정의 경제적 사정은 당연히 좋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공부만 하고 있을 뿐 사회진출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이 일단은 문제였다.

 

생년월일시를 통해 사주를 펼쳐보니 그 젊은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대번에 이해가 갔고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젊은이는 운세가 줄곧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올 해로서 동지의 운을 맞이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싯다르타

 

 

유복한 가정환경이고 나이 이제 서른 무렵에 이런 운을 맞이하고 있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면 나는 그를 싯다르타라고 호칭한다. 나중에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 우리들이 흔히 석가모니라 부르는 분 말이다.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운이 오른다는 것과 내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나 호호당은 잘 알고 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어보고 싶은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가진 자라면 그는 운이 상승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원하고는 있지만 그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나 수고가 감당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는 운이 하락하는 사람이다.

 

 

굳이 사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운의 상승과 하강

 

 

어떤 곳에 가고는 싶은데 그곳으로 가려면 첩첩한 산을 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첩첩한 산을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수고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또 현재 넘고 있는 중이라면 운이 상승하는 사람이고 첩첩한 산이 너무나도 버거워서 다른 생각 또는 타협을 원하고 있다면 그는 운이 하락하는 사람이다.

 

懇切(간절)한 가 아닌가, 이거야말로 굳이 사주를 보거나 운을 파악하지 않아도 운의 상승과 하락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이다.

 

그 젊은이는 간절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이 부유하다고 해서 유학 중에 한껏 즐긴 것도 아니요, 부모님들이 최선을 다해 학비를 조달해 주고 있다는 사실,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아울러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 등등 많은 것들을 나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건실한 청년이었지만 하던 공부를 그 사이에 벌써 여러 차례 변경해오고 있었으니 그건 간단히 말해서 彷徨(방황)이었다.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란 다름이 아니라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얻기 위해선 결국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경쟁자들과 싸워야 하고 나아가서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싸우고 싶은 생각을 별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그 젊은이가 선천적으로 평화적인 성향을 가져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간절한 욕망 또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찾아온 젊은이는 이번에 택한 전공만큼은 꼭 마치겠다는 책임감 또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심리는 간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더 이상 방황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인 것이지 본인의 간절한 목표는 아니란 얘기이다.

 

 

싯다르타가 방황하는 이유

 

 

그 젊은이가 방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간절한 그 무엇을 염원할 만큼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라고 하는 것이다.

 

나 호호당 생각에 왕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풍요로움 속에서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생각이 많은 지적인 청년이었기에 삶의 본질적인 괴로움에 대해 날카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재능도 뛰어나고 가진 것도 많은 여유로운 입장이었기에 일반인들이 주목하지 않는,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 삶의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느꼈다는 것이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환경은 나쁘지 않은데 간절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달리 말하면 운세가 하락하고 있는 젊은이를 나 호호당은 싯다르타라고 부른다. 역사상의 싯다르타와 나를 찾아왔던 그 젊은이, 내 눈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우리 주변엔 그렇기에 적지 않은 젊은 싯다르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이기에 그 젊은이의 앞날 또한 싯다르타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출가한 뒤 싯다르타는 여러 스승님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수행을 했으나 나중에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였음을 깨닫고 中道(중도)의 길을 스스로 체득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통해 생사번뇌를 떠나 열반에 들 수 있었다.

 

 

입춘 전의 방황과 입춘 이후의 방황은 다른 것이다. 

 

 

싯다르타에게 있어 출가하기 전의 세월들은 방황이었지만 출가한 후의 수행 역시도 방황이었다. 출가한 뒤 열심히 깨달음을 찾아다녔지만 보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명칭은 같은 방황이지만 앞의 것과 뒤의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방황은 60년에 걸친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이전의 것이라 하겠고 뒤의 것은 입춘 이후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앞의 방황은 간절한 그 무엇이 속에 담겨져 있지 않아서 하게 되는 허무함에서 오는 방황이고 뒤의 방황은 이제야말로 간절한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한 방황이라 말할 수 있다.

 

찾아온 젊은이에게 얘기해주었다.

 

자네는 현재 운세가 내리막이기에 방황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가 몇 년 뒤 입춘을 지나고 나면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또 한 번의 힘든 시간들을 가지게 될 것이란 점, 그런 과정을 거쳐 중년 이후엔 제대로 사는 맛을 느끼면서 즐겁고 힘차게 살아가게 될 것이란 점을 얘기해주었다.

 

 

사는 맛을 느끼면서 산다는 것

 

 

이 대목에서 중요한 얘기는 사는 맛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는 맛을 느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간단하다.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목표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삶을 뜻한다. 우리들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긴 인생살이는 이런 시간들로만 채워지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시간들이야말로 소중하다.

 

물려받았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성취했든 상관없이 가진 것이 많은 자는 더 의욕을 내기 어렵다. 그보다는 포만과 권태에 빠져들기가 더 쉽다. 아니면 무모한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잘 생각해볼 때 나름 달성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또 그를 위해 노력을 아끼고 있지 않으며 때론 뒷걸음질 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그 쪽으로 향해서 꾸준히 접근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최고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60년에 걸친 순환의 시간에 있어 그런 때, 즉 의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년이고 좀 더 엄격히 말하면 15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한 번 살다가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에 잠겨 글을 쓰다 보니 밤이 깊었다. 자칫 아침 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서둘러 자야 하겠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았던 강변의 경치이다. 늦여름 무렵이었는데 희게 빛나는 모래사장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한적하기도 해서 동네에 머물러 며칠을 보냈을면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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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시중 유동성

 

 

이번 코로나19 쇼크로 인해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경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증시는 불과 석 달 만에 코로나19 직전 상황까지 회복되었다. 실물 경제는 무척 어려운 상황인데 증시가 원상회복을 했다는 것은 현재의 증시가 실물 경제와는 꽤나 큰 괴리가 발생했음을 뜻한다. 외국인투자자들이 그렇게 팔았어도 국내 자금의 힘만으로도 너끈히 반등에 성공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부동산 시장 또한 여기저기에서 부풀어 오르면서 정부가 이를 막느라 애를 먹고 있다.

 

이 모두 시중에 유동성이 넘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와 한은이 돈을 엄청나게 풀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퇴물이 되어버린 전통적인 금융정책 수단

 

 

예전 같으면 시중에 돈이 넘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할 것이기에 한은은 당연히 금리를 올려서 그 유동성을 흡수해버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금융정책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본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시중에 돈이 넘치니 그 돈을 흡수한다거나 줄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경제상황인 까닭이다. 우리는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 전체가 그렇다.

 

1980년대 이후 글로벌 경제는 사실상 부채 증가 즉 통화량 증발을 통해 번영을 누려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미국 연준을 비롯해서 각국 중앙은행들은 사이사이 금리인상을 통해 경제의 거품을 꺼지게 하거나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그렇기에 금융당국자들은 경제 거품이 심해질 경우 금리인상을 통해 어느 정도 불경기를 조성함으로써 경제의 정상화가 가능하리란 생각을 가져오고 있었는데 이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종전의 전통적인 금융정책은 퇴물이 되고 말았으니 그 계기는 바로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는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섰다. 

 

 

사실 당시의 금융대공황 역시 처음엔 연준의 금리인상이 시발점이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부동산 거품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2004년 연준은 금리인상을 단행했는데 바로 이게 도화선이 되어 결국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발발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물론이고 글로벌 전체적으로 부채가 이미 너무나도 많아서 금리인상을 통해 버블을 종식시켰다가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가 풍비박산날 수 있는 상황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미 경제의 체질이 너무나도 나빠져 있었기에 금리인상은 시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돈을 더 풀어내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만 속속 등장하고 있으니 

 

 

이에 새 연준위원장이 된 버냉키는 새로운 수법을 들고 나왔으니 바로 양적완화였다. 부채가 너무 많아서 위기에 처한 경제를 돈을 더 찍어서 막아버린 것이 양적완화였다. 양적완화는 그야말로 극약처방이었다. 그로 인해 일단 글로벌 경제는 그럭저럭 되살아났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도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다. (어쩌면 훗날 버냉키야말로 세계 경제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최악의 인물로 기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부작용이란 다름 아니라 전 세계 경제가 돈의 홍수에 빠졌다는 점이다. 부채가 더 많아졌고 반면 생산성은 떨어지면서 글로벌 경제는 예전의 활력을 더 이상 회복할 수가 업었다. 오히려 디플레이션 위험이 감지될 정도였다.

 

물론 그 부작용을 잘 알고 있던 연준은 2015년부터 몇 년에 걸쳐 그간에 지나치게 많이 찍어낸 돈을 점차적으로 회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부진하던 글로벌 경제에 또 하나의 직격탄이 된 코로나19

 

 

그런데 금년 들어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경제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연준은 찍어낸 돈의 회수는 고사하고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앞서 근 6년에 걸쳐 찍어낸 양적완화와 동일한 액수를 시중에 추가로 공급한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준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돈을 살포한 액수는 2014년까지 6년에 걸쳐 3조 6천억 달러였는데 이번 코로나 19에 대해선 불과 6개월 만에 3조3천억 달러를 찍어내어 시중에 살포했으니 그 속도에 있어 실로 유례가 없다. 그러자 미국 금융시장은 연준의 조치에 환호작약했다. 시중에 다시 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증시가 또 다시 반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간 영국의 탈퇴 등으로 존립기반이 끊임없이 흔들려오던 EU 역시 중앙은행인 ECB를 통해 그간에 풀어낸 양적완화를 또 다른 명목을 붙여 더 확대실시하고 나섰다. “팬데믹긴급매입프로그램”, 이니셜로 PEPP이 그것이다.

 

안 그래도 부채로 돌아가는 경제란 지적을 받아오던 글로벌 경제였는데 이제 어쩌면 더 이상 과거처럼 상황에 따라 금리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 경제를 조절하는 종전의 상태론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한계선을 넘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금리인상이란 것은 전 세계 경제가 일제히 동반자살하자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셈이다. 금리인상? 큰일 날 소리가 된 것이다.

 

 

돈을 찍어내는 구체적인 방식 세 가지 

 

 

말이 나온 김에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실시하고 있는 돈 찍어풀기 정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간단히 알아보자.

 

크게 세 가지 방식이다. 첫째는 금리인하인데 이제 더 이상 내릴 금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두 가지 새로운 초식이 등장했으니 하나는 양적완화가 그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해서 “부채의 화폐화”라고 하는 어려운 용어를 쓰기도 한다. 다음으론 정부가 마치 헬리콥터에서 공중에 돈을 살포하는 방식과 같다고 해서 “헬리콥터 머니”라 부른다.

 

최근 우리 한은 역시 금리를 인하해서 사실상 제로금리가 되었지만 그마저 불충분하다 싶어 이번엔 국고채를 세 차례에 걸쳐 4조5천억을 매입했다. 이 역시 양적완화이자 소위 “부채의 화폐화”에 해당이 된다. 셋째 정부가 재난지원금이란 명목으로 광범위하게 돈을 살포했으니 이는 바로 “헬리콥터 머니”에 해당이 된다. 우리 역시 미국이나 EU, 일본이 해오던 방식을 조금씩이나마 다 손을 댄 셈이다.

 

부채의 화폐화, 실로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정부 부채가 많아져서 문제가 되니 중앙은행이 정부의 빚을 탕감해주는 방식이다. 그럴 경우 GDP 대비 정부 부채의 수준이 줄어든다. 일종의 사기라고 하겠지만 엄연히 시행되고 있다. 결과적으론 중앙은행이 그 액수만큼 돈을 더 찍어내는 것이기에 양적완화와 같다.

 

“헬리콥터 머니” 또한 논란이 많다. 재난지원금은 1회성이었으나 최근 미래통합당의 김종인 대표가 먼저 주장하고 나서면서 이슈가 된 기본소득 제도가 만일 도입될 것 같으면 헬리콥터 머니가 항구화되고 제도화된다는 얘기가 된다.

 

“부채의 화폐화”라든가 “헬리콥터 머니” 방식은 과거에 전혀 사례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제2차 대전 이후론 자취를 감췄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로금리만으론 불충분하게 되자 또 다시 등장했다.

 

 

돈을 엄청나게 찍어내었어도 발생하지 않은 인플레이션 

 

 

부채의 화폐화라든가 헬리콥터 머니 등의 방식은 결국 시중에 돈을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다. 그런데 돈을 마구 찍어내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그동안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8년 이후 양적완화를 했음에도 전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이후 6년에 걸친 연준의 돈 찍어내기, 양적완화만 해도 종전대로라면 무려 500%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메가톤급 조치였는데 사실상 인플레이션은 없었다.

 

이에 대해 여러 설명이 제시되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왜 인플레이션이 없었는지 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정상일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역시 마찬가지이고 일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부의 부채를 인수해서 탕감해주고 있기에 동일하다.

 

돈을 마구 풀었음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자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연준은 자신감을 얻은 모양인지 불과 몇 달 만에 과거 6년간 찍었던 돈만큼을 신속하게 공급했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작전이었다. 이에 그간 상황을 지켜보던 한은 역시 돈을 찍어도 큰 문제가 없겠구나 싶었는지 소규모나마 ‘연준 따라하기’에 나섰으니 최근의 조치들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우리의 경우 풍부한 시중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이 들썩이고 있다. 이에 정부는 며칠 전 실로 과감한 세금정책을 통해 부동산을 억제하겠다고 나섰다. 정부로선 세수도 늘리고 부동산 잡는다는 명분도 있고 하니 대단히 즐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증시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실물경제와 유리된 상태에 급반등한 증시는 현 상태만으로도 이미 거품이라 하겠지만 이게 장차 하락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힘을 받아서 거품을 더 키우면서 상승해 갈 것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다. (거품이란 말은 언젠가 소멸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란 점 알려드린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세상

 

 

아무튼 현실은 금융위기에 따른 돈 찍어 풀기에 이어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초단기간의 돈 찍어내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게 장차 어떤 작용을 하게 될 진 사실 아무도 모른다. 글로벌 경제를 어디로 몰고 갈 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장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시도해보는 행위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아마도 그런 행위를 두고 도박이라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따라서 지금 전 세계 중앙은행들과 정부들은 일제히 도박에 나선 셈이다.

 

도박의 결과? 현 시점에서 나 호호당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에 해박한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 장담한다. 이런저런 수치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경제학자나 전문가들 그리고 정책 당국자들 역시 모를 것이라는데 베팅한다. (전문가라고 하는 입장에서 질문을 받으면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수밖에 더 있으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글로벌 경제가 미증유의 불확실한 환경으로 크게 한 걸음 들어섰다는 점이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 독을 독으로 막는다는 말처럼 부채가 많아서 생긴 문제를 더 많은 부채로 막더니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또 다시 더 많은 부채로 막고 있으니 이를 항간에선 돌려막기라고 하던데 목하 글로벌 경제는 글로벌 스케일의 돌려막기에 나서고 있다.

 

이 글은 결과적으로 장차 초래될 상황이나 결과에 대해 답은커녕 힌트도 드리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말았으니 그저 미안한 일이고 재미없는 일이다. 현금의 글로벌 경제는 예전에 없던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는 말만 드리면서 글을 맺는다.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나 호호당이 여러 날에 걸쳐 글을 몇 번이고 고쳐 쓰다 보니 당초 지난 일요일에 올리려던 글이 늦어졌다. 그만큼 고생했다는 점 독자들께서 알아주셨으면 참으로 고맙겠다.

무성한 여름이다. 올 해는 초장의 더위에 비하면 오히려 덥지 않다. 아직 열대야가 오지 않으니 밤으론 충분히 쉴 수가 있어서 좋다. 대기 속의 가득한 습기를 표현했다. 왼쪽에서 개울이 앞쪽으로 돌아서 나오고 있다. 물살이 빨라 보인다. 비가 내린 후 하늘이 다시 개고 있는 모양이다. 개울에 가서 물놀이하면 참으로 시원하리라. 늘 얘기하지만 그림은 환타지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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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만난 독일의 검은 숲, Schwarzwald의 풍경이다. 짙은 녹색의 숲과 그 사이로 풀밭 지대. 인상적으로 그려보고 싶어서 시도해본 그림이다. 오후 무렵인 것 같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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