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노답일 때 

 

 

아버지가 고교 3학년생을 데리고 찾아왔다. 학생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아버지더러 밑에 내려 가셔서 커피 한 잔 하시고 오라고 했다. 사주를 뽑아서 쓱 한 번 살펴보니 학생의 운세는 60년 순환 상에서 바닥을 지난 지 8년, 바로 春分(춘분)이었다. 이 아이는 현재 답이 없겠구나 싶었다.

 

이에 물었다. 자네 얘기 좀 해봐, 무슨 얘기든 좋아,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어떤 것 같아? 학생 대답하길 현재로선 ‘노답’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었다. 띵동! 그래 알고 있구먼, 하고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에 이룬 것도 없고 앞길도 막막하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룬 것도 없다는 말을 할까 싶어서.

 

이에 학생 얘기하길 공부도 밑바닥이고 예체능 쪽으로도 전혀 아니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내 눈엔 그간 살아온 세월이 세월이라 하기도 그럴 것 같은데 그건 내 착각, 학생 입장에서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넌 현재로선 답이 없을 거야, 그래 노답이 맞아. 그런데 말이지, 그 노답이란 게 지금 그렇다는 것이지 평생 그런 것은 아니란 얘기야, 지금 그럴 뿐. 이렇게 해서 상담을 시작했다.

 

 

운은 60년 순환의 춘분에 이르러 노답이니 

 

 

운세 상으로 春分(춘분)은 絶望(절망)이 깊고 깊어서 어떤 몸부림도 해볼 생각이 없을 때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니 그렇다. 내려놓고 나면 오히려 편한 생각도 든다, 작은 희망의 실마리라도 있어야 몸부림이라도 치지 그 어떤 것도 모두 절망으로 여겨질 때 결국 자신을 내려놓게 된다.

 

훌륭하신 스님들이 길고 긴 수행 끝에 홀연히 깨달았다고 하는 시기, 이른바 득도했다고 때를 볼 것 같으면 그 스님의 운세 흐름에 있어 춘분이라 보면 된다. 득도한 스님들의 경지를 나 호호당이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으나 득도란 것이 결국 ‘나로부터 벗어남’ 또는 ‘나로부터의 해방’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번뇌 망상과 욕심과 집착의 제1차적 원인은 바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확고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인 ‘나’를 내려놓고 나면 그 즉시 解脫(해탈), 즉 풀려나고 벗어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로부터의 해방은 사람이 죽어야만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늘 한다.)

 

그 어린 학생의 생각은 당연히 得道(득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학생 역시 “이제 그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학생 역시 뭔가 잘 모르긴 하지만 춘분의 운에 이르고 나니 이제 그만 나를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득도한 스님과 통하는 점이 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여전히 응석을 부리고 있다. 당연하다.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은 들어도 엄마 아빠 당신들이 나를 좀 어떻게 해봐! 하는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득도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삶의 경륜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춘분의 모습

 

 

재미난 점은 어떤 사람이 나이 몇 살 무렵에 60년 순환에 있어 춘분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이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란 점이다. 앞의 저 어린 학생처럼 한창 응석을 부릴 나이에는 저런 모습이고 20대 후반이면 또 다르다. 30대, 40대, 50대, 60대, 인생의 살아온 경륜에 따라 달라도 많이 다르다.

 

가령 70대에 춘분의 때가 되면 그냥 병으로 죽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죽게 되면 그로서 나로부터 벗어난다. 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50대에 춘분의 때를 맞이하면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때론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뜨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내려놓는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나 호호당은 50세에 춘분을 지나왔는데 그땐 정말이지 마음이 정갈하고 겸손했다. 그만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아, 어렵다! 지금 나 호호당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니 이게 과연 가능한 얘기인가? 스스로 물어가면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주제를 너무 ‘하드’하게 잡은 게 아닌가? 그저 독자 백 명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지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하는 마음으로 글을 이어가본다.)

 

해마다 3월 20일경에 춘분을 맞이한다. 그로서 해가 밤보다 길어진다. 하루로 치면 이제 동녘에서 해가 뜨는 시각이다. 늘 얘기하지만 빛은 희망의 빛이고 비전(vision)이니 춘분은 새로운 희망이 비전과 시작하는 때이다.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사람을 포함해서 만물은 춘분에 이르러 가장 고단해하고 힘겨워한다는 점이다. 겨우내 추웠고 여전히 먹을 것이 없고 그간에 누적된 삶의 피로가 최고조에 달할 때가 바로 춘분이다.

 

희망의 빛 즉 새로운 희망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든다는 이 대단한 逆說(역설)! 차라리 이 대목은 운명의 神秘(신비)라고까지 말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앞서의 그 어린 학생은 ‘노답’이라 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답이 없으니 이제부터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억지로 애쓰고 몸부림치다보면 답을 찾게끔 되어 있다는 ‘절대의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풀이 죽어 있는 것이다.

 

 

답이 없다면 답을 찾아 나서야지  

 

 

그래, 학생, 자넨 답이 없어, 노답이야. 그런데 답이 없으니 이제부터 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 학생은 그저 단순한 위로의 말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굳이 답을 찾게 되리란 점을 이해시킬 수 없기에 나 호호당 역시 힘주어 여러 번 얘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해하지도 믿을 수도 없는 그 학생이기에.

 

이제부터 답을 찾아서 천지사방 동서남북, 삼만리 아니 십만리라도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할 거야. 답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야, 답을 찾게 되면 그 다음에 그냥 열심히 찾은 답을 지침 삼아서 또 다시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 거야. (학생은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고 나 호호당은 그 학생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내 말을 듣고 있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답을 찾아가는 건 역시 DIY, Do It Yourself! 이다. 그러니 고단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방황 속에서 서서히 힘이 붙고 눈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이윽고 때가 되면 저기 저쯤에 삶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그간에 힘도 생겨있을 것이다.

 

노답이라 말하면서도 학생은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냥 웃으면서 얘기했다. 어린 학생답게 그래도 어쨌거나 조금은 더 편한 길, 조금치라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얘기했다. 자네가 대학을 가든 안 가든 그건 현 시점에서 자네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다만 자네 부모님들만 학자금 대느라 골수가 빠질 뿐이야, 부모님에게 미안하지 않을까? 잘 생각해봐.

 

(그 부모님들은 현재 어려운 처지에서 열심히 밥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식 위하는 마음에서 아들이 대학에 간다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댈 것이다. 비극이다, 하지만 산다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이후로도 제법 많은 얘기를 해주고 나서 상담을 마쳤다. 그리고 학생더러 지금 밑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잠깐 왔다 가시라고 얘기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올라왔다, 얘기했다, 저 아이, 아무 문제 없어요, 그저 시일이 좀 걸릴 뿐입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해주었다. 아버지 또한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됐지요 뭐.

 

 

바보짓을 되풀이하는 게 우리의 삶이어서 

 

 

부자가 떠나간 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면서 생각했다.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군대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당분간 이런저런 알바 좀 하면서 갑질 좀 당해보다가 도저히 이렇게 살아선 아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바로 그 때 대학에 진학하면 본전 이상의 값어치를 할 터인데 하는 생각, 하지만 부모들은 상관없이 대학, 그래본들 어줍지 않은 대학이겠지만 보낼 것이고 그로서 빚을 지고 또 갚느라 삶을 소모해가겠지 싶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집안의 내 화실이자 서재이다. 고개를 들어 오른 쪽 벽을 올려다본다. 그곳엔 호호당의 부모님 영정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엄마 그리고 아버지, 고생 많이 하셨네요, 그래도 이젠 철이 들어서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산다는 게 다 그렇잖아요, 바보짓만 하다가 철이 들면 다 살았잖아요. 며칠 뒤 백신 맞을 참인데 몸 고생 하지 않게 좀 돌봐주세요.

 

절망이 가장 깊을 때 희망이 다가온다는 얘기, 참 대단한 역설이다.

시간,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

 

 

지구는 북극에서 남극으로 이어진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 빙그르 돌아간다. 스스로 돈다 해서 自轉(자전)이라 한다. 지구가 돌아가면서 햇빛을 만날 때 우리들은 그를 日出(일출)이라 하고 빛이 서산 너머로 사라지면 日沒(일몰)이 된다. 이게 근대 이전의 시간이었다.

 

현대의 시간은 다르다. 같은 것 같지만 그 본질적인 생각에 있어선 전혀 다르다.

 

 

현대적 시간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시작된다. 

 

 

지구를 하나의 커다란 수박이라 해보자. 그러면 위 꼭지가 북극이 되고 아래는 남극이 된다. 수박을 보면 위에서 아래로 진초록의 줄무늬가 있는데 지구에선 이것을 經線(경선)이라한다. 경선이 정해지면서 현대적 시간이 탄생했다. 북극에서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 남극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도 0도로 정했기에 본초자오선(Prime Meridian)이라 부른다. 이를 기준으로 지구 주위를 360도로 나눈 뒤 그리니치 서쪽을 西經(서경)이라 하고 동쪽을 東經(동경)이라 한다. 현대의 시간은 바로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시작된다.

 

현재 토요일 우리나라 시각은 오전 11시 43분인데 영국 그리니치 시간을 컴퓨터에 물어보니 새벽 03시 44분이다. (컴퓨터에서 찾는데 1분이 걸렸다.) 아직 영국은 해뜨기 전 즉 밤이다. 9시간 차이인데 이는 영국 그리니치의 경도가 0도이고 우리는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시각을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으니 시간이 좀 흘렀다.)

 

그런데 사주를 뽑을 때의 출생 시는 글로벌 표준시가 아니라 진짜 태양시, 줄여서 진태양시로 한다. 서울의 경우 경도가 동경 126도 58' 39"이기에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시각보다 대략 32분 조금 더 되는 오차가 있다. (정밀한 계산법은 생략한다.)

 

서울의 진태양시는 현재 표준시가 12시 25분이니 32분 정도를 빼야 하고 따라서 11시 53분 정도, 아직 오전인 셈이다.

 

(냉장고를 열어 보리음료인 맥콜을 따라 마시고 뒹굴다가 오니 어느새 오후 1시 40분, 시간 참 잘도 간다. 내 수명이 그 사이에 벌써 1시간 15분 줄었다. 모래시계, 그 물건은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되지만 삶의 시간은 뒤집어놓을 수가 없다, 또 뒤집어놓기도 싫다. 한 번 사는 게 딱 좋다.)

 

저번 글에 이어 이번에 시간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나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널섬(Null Island)

 

 

며칠 전 시간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리니치 천문대가 경도 0도란 것을 떠올렸고 그러다보니 위도 0도는 적도란 사실도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문득 경도 0도, 위도 0도인 지점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났다.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평생 한 번도 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나로선 꽤나 신기했다. 시간에 대해선 좀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이걸 생각하지 못했다니 하며 약간 자책을 했고 동시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난 천재야 천재! 하고 자뻑도 했다.

 

구글지도와 위키로 검색했더니 과연!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미 인간들이 그 지점, 바다 한 가운데에 浮漂(부표), 물에 둥둥 떠 있으면서 제 위치를 지키는 물건을 띄워 놓고선 명칭도 붙여 놓았다는 점이었다.

 

그 명칭은 Null Island. 옮기면 널섬이 된다. 널값(null value)이란 수학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서 아무 것도 없다는 뜻, 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에 널섬은 따라서 경도 위도 제로의 인공 섬이다.

 

널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아프리카 대륙 서남쪽으로 크게 움푹 들어간 바다가 있는데 명칭은 기니만, Gulf of Guinea이다, 널섬은 바로 그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다.

 

어떤 작자들이 이미 벌서 이런 신박한 짓을 했지 싶어 알아보니 미국과 프랑스, 브라질의 공동작업이었다. 미국이야 당연한 것이고 브라질로선 건너편 바다, 프랑스 쟤네들은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합작투자를 했을 것으다. 더 검색해보니 널섬은 그 이전에 환타지 소설의 제목이었음도 확인했다.

 

여기에 재미난 것이 하나 있다.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들은 늘 자신의 좌표를 위성 GPS를 통해 확인하고 있는데 널섬, 즉 위도 0도 경도 0도인 지점에 다다르면 컴퓨터의 좌표값이 널값(null value)으로 변해서 에러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그냥 지구상의 아무 이상할 것 없는 바다 위 한 점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널섬은 비행사들이 피해 다니는 구역이 되었다.

 

 

현대적 시간의 모순이 충돌하는 곳, 날자 변경선 

 

 

돌아가서 얘기하면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선을 0도로 해서 서쪽으로 180도, 동쪽으로 180도를 가면 두 선은 일치하게 된다. 이 선을 날자 변경선 또는 국제 날짜 변경선이라 한다. International Date Line.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미국 쪽에서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비행기는 태평양 상에 위치한 이 선을 넘는 순간 하루가 더해진다. 그 반대론 하루가 빠진다. 태평양을 건너다니는 모든 여객기들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한다.

 

본초 자오선이나 일자 변경선이나 모두 인간이 그어놓은 작위적인 선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에 따라 하루가 더해지기도 하고 감해지기도 하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적 시간이 만들어낸 모순이다.

 

지금은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전날의 섬”이 떠오른다. 17세기 배경으로 태평양에서 배가 난파를 당했다. 바로 눈앞에 날자 변경선이 있어 그 너머로 가면 배가 난파를 당하기 전에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가기 위해 애쓰는 선원의 얘기, 물론 에코의 소설은 복잡다단하고 중중무진의 구조라서 결코 쉽지가 않지만 어쨌거나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제 토요일이었고 지금은 일요일 낮이다. 날자 변경선을 넘어간다면 어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 호호당 생각에 에코는 꽤나 외로웠던 것 같다, 소설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했지만 독자들은 에코의 얘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 외로웠을 것이다. 모든 소설에서 에코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장미의 이름”의 엔딩 부분에 묘사된 대목은 평생 기억에 남아있다. 견습 수도사인 주인공 아드소가 훗날 늙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혼자 내뱉는 독백은 바로 에코 자신의 얘기가 아닌가 싶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독백.

 

 

진짜 시간은 늘 갱신되고 되풀이하고 있어서 

 

 

이제 정리해보자. 현대적 시간, 우리 모두를 초치기로 만들어놓은 시간은 사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란 점이다.

그런 면에서 진짜 시간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 지구의 자전에 불과하다. 해는 매일 뜨고 매일 진다. 매일 시간이 갱신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과거로부터 날아와 눈앞을 지나 미래로 흘러가버리는 화살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늘 되풀이되고 갱신되는 시간이 진짜 시간이 아닌가 한다.

 

해가 지면 시간이 없어지고 어두운 밤에 리셋(reset)되며 해가 뜰 때 또 다시 시작되는 시간이 진짜가 아닐까 싶다. 세월이 흘러서 우리가 노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건은 그냥 두면 절로 노화될 뿐 그게 시간이 흘러서 삭아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나 호호당은 운명의 순환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다. 순환이란 되풀이되는 것을 말한다. 되풀이된다는 것은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이란 것을 전제로 한다.

 

나 호호당은 매주 토요일이면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근처의 강의장을 찾아간다. 걷다 보면 늘 20대 젊은이들 사이로 지나가게 된다. 10여 년 전에도 20대 젊은이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곳엔 늘 20대 젊은이들로 붐빈다.

 

무엇이 변했을까? 늘 같은 젊은이들이 늘 그곳에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상점 유리창 위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쟤들은 그대로인데 나만 잘도 삭아가네! 하고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 유리창을 쳐다보던 늙은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강남역엔 20대 젊은이들로 붐빌 것이다. 크게 변할 것은 없을 것이다.

 

어제는 芒種(망종)이었고 오늘은 현충일이다. 그리고 현충일도 불과 3분 뒤엔 어제가 된다. 현대적 시간에서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망종이나 현충일 모두 다시 돌아온다.

 

 

망종의 개망초

 

 

망종이다. 산책로 주변의 풀들이 사정없이 맹렬히 자라고 있다. 잡초 중에 으뜸이자 미니 국화라 할 수 있는 ‘개망초’들이 일제히 뻗어가면서 초여름 풀밭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가히 여름 풀밭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이제 한 해를 통해 해가 가장 긴 한 달이 시작되었다.

 

산다는 것은 황홀한 고통의 연속이란 생각이 든다. 그 끝엔 영원한 安息(안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할 것 전혀 없다. 어쩐지 나 호호당도 늙은 아드소 수도사의 심정을 닮아가는 것 같다.

 

마을마다 달랐던 시간

 

 

옛날엔 장소마다 시간대가 달랐다. 여기에서 옛날이란 전 지구촌이 사용하는 표준시가 생겨나기 전의 시절을 말한다. 장소에 따라 지구상의 經度(경도)가 다른 탓에 도시나 지자체마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시계를 조정해서 사용했다. 휴대용 시계가 나온 뒤에도 거리가 좀 되는 이 도시에서 저 마을로 이동할 경우 가는 곳에 따라 시계를 그 지역 시각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가령 영국 런던에서 북서쪽의 맨체스터로 이동할 경우 경도가 2도 정도 차이가 난다. 경도 15도에 한 시간 차이, 따라서 8분의 시간 오차가 발생한다.

 

예전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시절, 또 휴대용 시계가 없던 시절엔 그런 게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이동하는데 빨라야 열흘은 걸렸기에 몇 분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속 운송 수단, 즉 철도운송이 보급되면서 사정이 변했다. 아시다시피 영국은 전 세계에서 철도가 가장 빨리 보급된 나라이다. 그런데 철도는 철로 위에 기차와 객차 꾸러미 하나만 통과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지나간다. 대도시일 경우 역마다 무수히 많은 기차가 들어오고 나간다.

 

기차 운행이 늘어나자 급기야 몇 분의 시간 오차가 중요해졌다. 자칫 역 플랫폼에 정차해있는 기차를 새롭게 진입하는 후행 기차가 들이받는 대형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맨체스터와 런던의 시간이 다르다면, 이 경우 8분이지만, 큰 일이 날 수도 있었다. 철도 보급에 따라 정밀한 시간 확인이 필요해진 것이다.

 

 

표준시(Standard Time)의 등장 

 

 

철도 운행을 관리하는 쪽에선 정말이지 이게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영국 전체를 하나의 시간으로 통일해서 쓰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에 학자들은 궁리 끝에 런던 동남쪽 템스강 건너편에 있는 영국 왕실 천문대를 기점으로 전국의 시간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오래 전부터 천체를 관측하는 학자들이 이곳을 기점으로 별의 운행과 천구의 좌표를 표시해왔기에 자연스럽게 영국 통일시간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게 바로 표준시(Standard time)의 등장이다. 1847년의 일이다.

 

 

글로벌 표준시의 등장 

 

 

그런데 아시다시피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 전 세계에 식민지를 보유한 글로벌 제국이었기에 나머지 지구 전체의 시간도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다른 열강들도 그럴 필요성에 동의를 하고 1884년 미국 워싱톤 D.C.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International Meridian Conference, 우리말로 “국제자오선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발언권이 강한 핵심 열강들만 아니라 곁다리로 일부 나라들도 끼워 주었기에 41개국의 대표가 소집되었다. 사실 이 회의를 주도한 나라는 영국이었지만 일부러 짐짓 미국을 회의주최국으로 삼았다. (이런 방식은 강대국의 상투 수법으로서 오늘날 대다수 국제기구 본부들이 미국에 모여 있지 않고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회의 결과 세계 표준시의 기점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로 정해졌다. 영국을 싫어하는 프랑스만 반대하고 나섰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약간 버티다가 순순하게 그리니치 천문대를 인정했다. 그 결과 지구상의 經線(경선) 중에서 경도 0도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지구상의 모든 시간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글로벌 표준시의 등장이다. 오늘날엔 글로벌 표준시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협정 세계시(Coordinated Universal Time, 줄여서 UTC)란 말을 사용한다. (영국의 국력이 약해지고 미국이 올라서면서 그리니치 천문대 시간이란 말을 없앴지만 내용을 보면 여전히 그리니치 시간이다.)

 

 

시간의 기점이 된 대영제국

 

 

영국에서 표준시가 등장한 것은 1847년이었으니 丁未(정미)년이었고 글로벌 표준시 즉 협정 세계시가 등장한 것은 1884 甲寅(갑인)년이었다.

 

이는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의 360년 국운 흐름에 있어 출발점인 1582년으로부터 다섯 번째 60년 즉 국운 제5기의 정점 근처, 그리고 국운 제6기의 출발점인 점인 1882년으로부터 2년 뒤의 일이었다. 아직 글로벌 리더로서의 ‘아우라’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해서 경도 0도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선이 되었고, 그를 기점으로 세계 표준시, 협정 세계시(UTC)가 정해졌다.

 

 

산업혁명, 현대적 시간을 탄생시키다.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시간은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생각해보라, 오늘날 우리들이 시간과 장소 약속을 하면 무슨 요일 저녁 7시 반에 어떤 장소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대기업체의 고위 간부들이나 사장의 경우 10분 단위로 미팅 약속을 잡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출발해서 서울의 모 장소에서 7시 반에 보자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서울 부산만 해도 이른바 천리길, 예전엔 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보름 이상을 걸려 수도 한양에 도착하던 거리였다. 저녁 7시 반 약속, 이런 따윈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예전엔 시간이란 것이 엄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저 소수의 엘리트 천문학자들이나 시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 일반 사람들은 기껏해야 몇 월 며칠 정도가 고작이었다.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중천에 있으면 한낮이고 해가 서산에 걸리면 저녁이며 해 지고 나면 밤이었다.

 

期約(기약)이란 말이 있다. 그냥 약속이 아니라 때를 정해서 약속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期(기)란 한자를 보면 ‘그것’을 뜻하는 其(기)와 달 月(월)의 합성자임을 알 수 있다. 번역하면 ‘그 달’이 된다. 우리 언제 볼까요? 하고 상대가 물어보면 석 달 뒤에 보지요, 하고 답하던 것이 보통이었다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만날 장소가 멀리 있으면 날이 아니라 달로 기약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쓰는 시간은 몇 시 몇 분은 물론이고 때론 초 단위에까지 이른다. 최근엔 모르겠지만 나 호호당이 직장 다니던 시절엔 출근 시간에 5분만 늦어도 지각이란 낙인이 찍히고 야단을 맞기도 했다. 현대인들은 지극히 조밀한 시간 단위를 사용하며 살고 있음이다.

 

 

초치기로 살아가는 우리들

 

 

시간의 흐름에 극도로 민감해진 우리들이다. 나 호호당의 경우 자기 전 넷플릭스 영화를 본다. 무얼 볼까 고르는 시간 20분이고 정작 들어가서 보기 시작하면 도입부가 지루해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러면 빠져 나오기를 누른다. 대중가요 역시 처음 5초 안에 재미가 없으면 끝이다. 그래서 오로지 ‘후킹’이다.

 

독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재미없거나 흥미가 일지 않으면 정말이지 3초도 기다려주지 않게 된 우리들이니, 그야말로 우리 모두 초 단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러서 “초치기”.

 

그런데 묘한 것은 나 호호당은 아시다시피 운명이란 물건을 다루는 자란 사실이다.

 

 

30년과 3초

 

 

글을 통해 여러 차례 얘기했듯이, 사람이 성공하려면 어떤 분야나 방면, 또는 업에서 30년은 해야 마스터가 된다는 얘기, 30년은 해야 성공한다는 얘기를 수시로 해왔다. 당연히 무수히 많은 사례를 알고 있고 검증해왔기에 절대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니 내 스스로 때론 의아할 때가 많다. 나 역시 초치기로 살고 있으면서 30년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남녀간의 뜨거운 열정이나 사랑, 욕정도 몇 년 지나면 시들해진다. 당연하다고 여긴다. 초치기들간의 사랑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생겨난다. 초치기로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어떻게 30년씩이나 버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해서 30년을 버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이 질문에 대해 먼저 답을 하자면 인생 한 번 살다가는 게 장난이 아니란 얘기이다. 30년을 버텨서 이른바 성공했다는 말을 듣게 되려면 그 사이에 그만 두고픈 고비를 도대체 몇 번이나 만나게 될까?

 

창조적인 마인드? 절대 아니올시다. 긍정적인 마인드, 땡, 틀렸습니다. 적성과 소질? 웃기고 있네. 그럴듯한 말 따윈 다 필요 없고 오로지 하나가 있다. 30년씩이나 버티게 만드는 힘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가장 위대한 힘은 먹고 살려는 의지

 

 

정답은 ‘먹고 살기 위함’이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게 되면, 간단히 말해서 애 낳고 키우면서 먹고 살다보면 싫다고 해서 그만 둘 수 없고 더럽고 치사해도 참아야 한다. 분노가 치밀어도 먹고 사는 일 앞에선 조절이 된다. 그게 일상이고 우리의 삶이다. 먹고 사는데 필요하면 적성도 만들어지고 소질도 발굴하게 된다. 수 백 번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 억눌러가면서 하다보면 30년이 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성공하고 마스터가 된다.

 

나 호호당은 운명을 연구하는 사람인 바, 운명학에 있어서 시간이란 요소는 절대적이다. 그런 까닭에 시간이란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물건으로서 존재하진 않지만 시간이란 놈은 현대 물리학에서 하나의 물리량으로 인정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은 시간에 대해 얘기를 해보게 되었다.

 

사실 이번 글은 아직 머릿속의 주제를 꺼내지도 못했다. 얘기가 약간 옆으로 흘렀다. 이에 다음 글에서 제목을 바꿔서 진짜 생각하던 주제에 대해 얘기해볼 생각이다.

 

 

莊子(장자)와의 추억

 

 

비 내리고 번쩍 버번쩍 번개치면 잠시 뒤 천둥소리 들려오는 일요일 밤, 아니 월요일 자정 넘은 시각, 창가 작은 탁자 위에 莊子(장자)를 펼쳐놓고 앉았다. 두 시간 정도 읽고 음미하다가 감흥이 일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재에 꽂혀 있던 책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살펴보니 ‘현암사’ 출판사에서 나왔고 인쇄는 1980년 2월 29일에 5쇄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책 역시 첫 번째 책은 아니다.

 

분명한 기억이 있다. 장자를 처음 산 것은 1973년 가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잠깐 일탈하는 기분으로 책을 샀었다. 책방에서 책을 사서 들고 나오면서 입시를 앞둔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게 초판본이었고 나중에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책이 어디론가 가서 보이지 않아서 다시 샀는데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책이다.

 

 

古文(고문)의 힘

 

 

한문 중에서도 연대가 오랜 古文(고문)은 읽는 맛이 사뭇 다르다. 형용사나 수식어가 적어서 마치 直球(직구)를 던지듯이 말하고 있다. 글쓴이는 자신의 생각을 어떤 방어논리도 없이 그냥 툭-하고 내뱉고 있다. 읽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고려도 없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식이다.

 

기원 전 200-300년 경, 장자가 생각을 글로 옮길 적만 해도 종이에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竹簡(죽간)이라 하는 대나무 조각에 칼로 글을 새겨야 했기에 대단히 수고로웠으리라. 이에 당시의 모든 문장은 최대한 압축적이다.

 

나 호호당은 이처럼 압축적인 古文(고문)에 매료된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 말이고 글인데, 심지어는 뉘앙스가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분쟁도 생기고 권력자 앞에선 때론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 옛 한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냥 스트레이트로 생각을 밖으로 던진다.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향해 던진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현대문에서 이런 直心(직심)의 문장은 소설가 김훈 선생의 글에서나 느껴볼 수 있다. 김훈 선생은 말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타락해있다고. 김훈 선생은 또 말하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들을 신뢰한다고. 그 분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세속에선 위험한 말들

 

 

나 호호당은 고려대학을 나왔다, 고려대의 敎示(교시)는 자유, 정의, 진리이다. 먼 옛날 입학 당시 참으로 멋진 교시라고 여겼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선 그것들이 참으로 위험한 말들이라 여긴다.

 

자유, 정의, 진리,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자’의 영역이라 여긴다. 저 말들이 인간 사회로 들어오면 위험해진다. 인간 세상에선 너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다르고 너의 진리가 나의 진리가 다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인 까닭이다. 정의라든가 진리와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끝도 없이 싸우게 만든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면서 상대를 제거한다.

 

 

버려야만 편할 것 같은데...

 

 

이에 장자는 말하고 있다, 아니 말했다 무려 2천년하고도 3백년 전에. 세상의 모든 가치, 소중한 것은 큰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권력과 명예 따윈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니라고. 진리와 정의란 것 역시 차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이니 세속의 모든 것들은 눈을 크게 뜨고 보면 터럭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투쟁과 게임을 비웃고 있다. 그 까이 꺼 별 거 없어! 하면서 코웃음 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앞둔 그 가을에 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 머리가 띵-했다. 이게 뭔 소리야? 했다. 하지만 당장 대학엔 가고 볼 일 같았고 긴 인생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니 일단 不問(불문)에 붙였던 莊子(장자).

 

그 이후 긴 세월 사이에 간간히 다시 접해왔고 그럴 때마다 받는 느낌은 달랐다. 하지만 밤늦은 이 시각 다시 읽어도 여전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그저 별 게 아닐 뿐더러 모든 것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길 때만이 대자연과 더불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마구마구 직구를 날려 오고 있는 莊子(장자)이다.

 

장자의 저 말들은 따르기가 절대 쉽지 않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그 무엇을 버리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omething, 그런 면이 있다. 물론 우리 모두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먹고 산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젖히고 올라서야 하는 일이며 때론 누군가를 제거해야 하는 끔찍한 일도 견뎌야 한다. 먹고 살려면 독해야 하고 독해져야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란 말씀 또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길 때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말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넌 그냥 가난하게 살다가 가라 해도 군말 없이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절대 쉬운 얘기가 아니다.

 

 

이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릴 때도 있으니 내가 돌았나? 

 

 

그러니 문득문득 죽음이야말로 安息(안식)처럼 다가올 때도 많다. 죽으면 자유고 나발이고 진리고 정의고 그런 따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오래 살아서 본전은 다 챙겼고 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사는 건 개고생인 것이 확실해!

 

 

새벽 2시, 이제야 서재 건너편 LG 전자 연구소 빌딩의 불들이 절반 정도 꺼지고 있다. 월요일 새벽 시간이다. 토요일 저녁 9시 경 연구소의 불이 70% 정도 꺼져 있었다, 웬일이니? 했다. 그래도 토요일이라서? 그랬는데 일요일 저녁이 되자 거의 모든 층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일요일 저녁이건만 죄다 야근이구나! 했고 월요일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불이 절반 정도 소등이 되고 있다.

 

저 정도의 대기업 연구소에 들어가서 일을 하려면 고등학교 시절 전국 수험생의 상위 5%에는 들었을 것인데 그 상위권 학생들은 오늘에 와서 늘 야근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엄마들은 “우리 아들, LG전자 들어갔어” 하면서 자랑스러워했을 거 아닌가.

 

물론 돈은 중소기업보다 더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내 보기엔 일주일에 적어도 3-4일 이상은 야근하며 살고 있는 대기업 연구소 직원들이다. 워라벨? 허구이고 허상일 수밖에 없는 우리 대한민국, 수출 즉 하청으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이다. 부엌 쪽 창 건너편의 삼성전자 연구소도 별반 차이가 없다.

 

저 친구들 당연히 이공계 출신일 것이니 고등학교 시절 삼각함수 공식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세게 외웠을 것이다. 그거 못 외우면 이른바 “수포자”가 되고 그러면 이공계 진학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 호호당은 선생님에게 삼각함수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가 불려 나가서 뺨따귀 얼얼, 귓구멍 멍멍하게 한 대 맞은 기억이 난다.)

 

 

차라리 2류 인생이 더 행복할 것도 같아서

 

 

일요일 자정이 가까울 무렵 책 읽기 직전에 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아들의 얘기인 즉 이렇다. 아빠는 쟤네들이 불쌍한 가봐, 늘 저거 볼 때마다 얘기하잖아. 그런데 지금 야근하는 저 친구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과연 불만 따위를 갖고는 있을까 싶기도 해. 주변 동료들이 다 하니까 할 거야. 그런데 사실 어쩌면 중소기업 다니는 2류가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른바 2류 인생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 아예 바라보지 않으면 그렇게 한 평생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니. 아파트 포기하고 빌라 살고 돈 올려달라고 하면 고민도 해가면서 그럭저럭 살다 가면 되는 일 아닌가. 도중에 주식 좀 했다가 홀딱 날린 뒤 반성도 좀 해가면서 말이다.

 

공기업 사원 또는 공무원, 우리 사회에서 極上(극상)의 좋은 일자리이다. 게다가 이번 LH 사건처럼 몰래몰래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그런 직장에 다니는 사람 만나서 얘기해보면 그 또한 고초와 불만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거야 이 세상 어딜 가나 그럴 것이니 따지고 싶지 않다.

 

LH, 지주회사 형태를 검토하고 있다는데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간에 생겨난 엄청난 부채를 회사를 쪼갤 때 누가 덮어쓰느냐 하는 것인데 내년 대선이 달린 현 정권이 쉽게 편하게 풀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우리나라만의 장점(단점이기도 하지만)이 달리 무엇이랴, 아니다 싶으면 사정없이 갈아 치우고 엎어버리는 무서운 추진력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LH여, 안녕!

 

 

헛소리의 莊子(장자)

 

월요일 새벽 2시 40분, 맞은 편 LG 연구소의 등불이 1/4만 정도만 남고 거의 꺼졌다. 쉬러 가거나 잠시 집에 간 것 같다. 나도 잘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부터 읽고 있던 莊子(장자)를 다시 서가에 갖다 놓았다. 莊子(장자)의 얘긴 아무래도 헛소리야!

 

 

미안한 마음이다, 젊은 연구소 직원들은 저처럼 피 튀기면서 과업을 해가고 있는데 호호당은 늙었다는 것을 핑계로 빗소리 들으며 莊子(장자) 따위나 읽고 있으니 말이다.

 

비가 부슬부슬해졌다. 글도 마무리한다. 발밑에서 졸고 있던 강아지가 이제 가서 자자고 보채는 눈빛이다.

 

(이 글은 간밤에 썼다.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니 꿈속에서의 일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