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곡성 여행에서 처음 가본 천태암이다. 산신각에 올라 찍은 사진으로 그렸다. 이런저런 디테일을 날리고 심플하게 그렸다. 앞에 보이는 산이 남쪽 송광사 쪽이다. 오른 쪽으로 주암호가 보이지만 이 그림에서 구도상 빠졌다. 체력을 꽤나 회복한 모양이다, 그리면서 지치지 않았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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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 애기무덤을 밝히던 도깨비불

 

 

장마전선이 좀처럼 북상하지 않더니 밤부터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 남부지방엔 폭우라던데.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도깨비불 생각이 났다. 직접 체험했던 도깨비불 얘기를 좀 해보고픈 마음이 든다.

 

첫 번째 도깨비불은 군 복무 시절이었다. 장마철의 어느 날 밤,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는데 부대 막사 아래 연병장과 헬리콥터 착륙장을 지나 멀리 철책이 있었는데 그 너머 나지막한 산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마치 파도치는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빗속에 온 산이 타오를 것처럼 환했다. 저녁 자유시간이라 온 부대원들이 바깥에 나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겁을 먹는 부대원들도 꽤 많았다. 왜냐면 그 나지막한 산은 온통 애기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 쪽 초소에 나가 야간 경계를 서는 사병들은 꽤나 긴장하곤 했고 또 이런저런 괴소문도 많았는데, 바로 그 애기무덤 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타오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렇지만 나 호호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그러다가 저런 거 그냥 화학현상일 거란 말을 꺼낸 것이 계기가 되어 내기를 걸게 되었다. 가서 도깨비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무서워서 가다가 포기하면 내가 지는 게임이었다. 조건은 내무반 전원이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맥주 4박스와 과자였다. 흥미를 느낀 야간 당직 하사도 어서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날더러 짓궂게 재촉을 했다.

 

 

혼자서 비오는 밤에 애기무덤으로 올라 도깨비불을 채취해보니 

 

 

나 역시 몹시 궁금했던 터라 판초우의를 입고 철모를 쓰고 랜턴을 들고 혹시나 모르니까 대검까지 허리에 차고 비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와 동료사병, 이렇게 두 명이 가기로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겁나기 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던 나는 개의치 않고 혼자 막사를 나섰다.

 

그쪽 철책엔 초소만 하나 있을 뿐 출입문이 없었지만 이른바 ‘개구멍’이 하나 있어서 바깥으로 쉽게 나갈 수 있었다. 일단 초소에 갔더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료가 너무나도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두 시간 동안 지키고 있으려니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내가 찾아가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내기를 하는 바람에 왔다고 이유를 밝히니 너 간도 크다 하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개구멍으로 나가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오를 작정인데 그 친구더러 우리 잠깐 같이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더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휙-하고 젓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서 비 퍼붓는 언덕, 도깨비불 천지인 언덕 위로 끙끙 대며 올라갔다. 워낙 밝아서 랜턴도 사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막사에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까진 대략 800 미터 거리였고 그 거리에서 도깨비불 하나가 거의 농가 한 채 크기였는데 정작 다가갈수록 불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깨비불 앞에 가자 불의 크기는 손바닥 정도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작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형광빛의 조각이었다. 몇 개 집어서 연병장을 가로질러 막사로 돌아오는 도중에 랜턴으로 살펴보니 그건 뼛조각이었다.

 

매장된 아기들의 뼈? 아니면 야생 짐승의 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백 기의 애기무덤이 있는 곳이니 아마도 아기들의 뼈가 유력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그곳에 묻힌 아기들, 태어나서 얼마 살아보지 그 아기들을 생각하니 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환한 내무반 안으로 들어오자 초록으로 빛나던 그 뼛조각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방 사라졌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나는 부대 내에서 간이 큰 사병으로 소문이 났다. 나로선 전혀 무서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훗날에도 나는 귀신 나온다는 흉가가 있으면 혼자 찾아가 밤을 보낸 적도 두어 번 있다. 귀신을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시 만나게 된 비오는 밤의 도깨비불

 

 

이제 두 번째 도깨비불 얘기를 해본다.

 

군 제대 후 동원훈련 때였다. 독수리훈련인가 뭔가 잘 모르겠지만 서울 병력이 졸지에 강원도 인제의 예비사단에 편성되어 훈련을 했다. 야산에 올라 텐트도 치고 낮엔 꽤나 먼 거리의 행군도 했다. 군 복무 중에도 그렇게 심한 훈련은 받아보지 않았는데 이게 웬 고생이냐 했다.

 

그 때는 1984년의 여름철이었다. 장마철은 지났지만 1주일의 훈련 중에 사흘이나 비가 내려서 애를 좀 먹었다. 비가 오면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산길을 걸어가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비닐로 된 우의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철모 쓰고 장비를 차린 상태에서 산길을 걷다 보면 엄청나게 땀을 쏟아야 한다.

 

저녁이 되어 야산 사면에 쳐놓은 군용 A텐트로 돌아오니 마치 집에 돌아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저녁 급식을 마친 직후에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텐트 안은 미리 건초를 잘 깔아놓았고 위치도 좋아서 물이 스며들지 않아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뭐야? 싶어 바깥으로 나가보니 건너편 산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미 군 복무 시절에 도깨비불로 인해 명성을 떨친 바 있었기에 저거 별 거 아니야, 燐光(인광)이야 하면서 잘 알고 있다는 투의 말을 했더니 동료 예비군들의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가서 가져오지요, 그냥 가긴 심심하니 뭘 좀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졸지에 30만원 빵의 게임이 되었다. 아군 30명, 적군 3명, 1인당 만원씩 걸었다. 내가 다녀올 것이니 도깨비불을 가져오면 30만 원 중에서 15만원은 내가 먹는다는 조건이었다. 저편 언덕까지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왕복하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랜턴을 들고 언덕을 올라 도깨비불을 금방 채취해서 돌아왔다. 으레 짐승의 뼈일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 불빛은 초록의 형광 혹은 인관이었지만 가져와서 다 함께 살펴보니 오래된 나무껍질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 조각을 간직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물을 뿌려도 더 이상 그 신비한 초록의 빛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파트 정원에 던져버렸다. 그저 15만원을 벌었을 뿐이다.

 

 

집단이 야지에서 이동하면 사고가 난다.

 

 

여담이지만 연대 규모의 예비군 병력이 야지에서 이동하다 보니 안전사고로 인해 무려 3명의 예비군이 사망했다는 점이다. 당시엔 그 정도 뉴스는 보도되지도 않았다.

 

사망 경위를 보면 허무하다. 훈련을 마치고 땀에 절어서 텐트로 돌아온 예비군이 시원한 개울이 있는 걸 보고 야호-하면서 풍덩 뛰어 들었다가 바로 심장마비로 죽었다. 강원도 인제 계곡의 물은 여름에도 엄청나게 차갑다. 무릎가지 들어가도 견디지 못한다.

 

또 한 명은 행군 중에 지쳐서 지프차에 실려 갔는데 그 지프차가 어쩌다가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그 결과 그 예비군만 튕겨나가서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에 전 예비군이 귀가 교통비로 받은 돈 천원을 박스로 만든 부조함에 넣어 주었다. 예비군이 대략 2천명 정도였으니 2백만 원 정도였을 것인데 당시 1984년으로선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때 배웠다. 장병들이 일정 장소에 머물지 않고 장비와 함께 움직이다 보면 안전사고가 난다는 사실을. 이동 자체가 안전사고를 초래한다는 사실.

 

 

나라에 대한 배신감

 

 

나 호호당은 현역 복무를 했고 동원예비군, 지역예비군, 나중에 민방위까지 착실하게 다 했건만 나중에 그 모든 의무로부터 해제되는 날 국가로부터 감사하다는 쪽지는 물론이고 영화표 한 장도 우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금도 불쾌해하고 괘씸하게 여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가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국가에 그 정도까지 충성을 다했으면 고맙다는 인사치레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요즘엔 도깨비불이 보이질 않으니 

 

 

그런데 요즘엔 비가 내려도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전국 도깨비들이 전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나?

며칠 전 올린 사진, 태안사 입구의 능파각을 수채화로 그린 것이다. 몸이 회복되면서 바로 그렸다. 며칠 전 끙끙 앓을 때  그릴 힘은 없고 그리고는 싶고 해서 힘들어했던 그림이다. 여름의 느낌, 바위를 덮은 이끼를 더 그려넣었다. 기둥의 붉은 색이 다소 선명한 느낌이다. 한 톤 더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즐겨주시길...

곡성, 구례와는 또 다른 아기자기함

 

 

사흘에 걸쳐 전남의 곡성군을 다녀왔다. 다녀온 후 심한 몸살과 영문 모르는 설사로 해서 사흘 동안 ‘오지게’ 아팠다. 이렇게 아팠던 것은 군 복무 중에 크게 앓았던 이후 처음이다.

 

곡성은 처음이다. 그간에 쌍계사 벚꽃 구경 등등을 이유로 구례는 열 차례 이상 지나다녔고 또 머물기도 했지만 바로 인근의 곡성은 처음이다. 그곳으로 안내해 준 고마운 사람의 덕분이다.

 

전부터 짐작하기로 곡성은 섬진강이 굽어 흐르는 마을이니 으레 그 명칭이 曲城(곡성)일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골짜기 谷(곡)의 谷城(곡성)이었다. 조금 아쉽다. 이에 좀 더 알아보니 옛날 통일신라 시절 曲城(곡성)이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성 두보의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그 운치를 그냥 살리지 그랬어! 하는 아쉬움.

 

놀랍게도 곡성은 구례와 경관이 전혀 달랐다. 구례는 지리산 아래 마을이라 스케일이 크다. 남원 고개를 올라 터널을 나와 구례로 내려가는 19번 국도를 달려본 이는 알 것이다. 왼쪽은 구름 두른 노고단이요 오른 쪽은 구례와 곡성을 나누는 산인데 그 가운데 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 정중앙을 약 20킬로미터에 걸쳐 달려 내려가는 드라이빙은 실로 호쾌하다.

 

그런데 곡성은 웅장하지 않다. 드라이빙도 그렇다. 곡성의 두물머리인 압록에서부터 곡성 읍내에 이르는 10여 킬로미터의 국도를 가다 보면 왼쪽은 산이고 오른 쪽은 섬진강이다. 길이 강을 따라 꺾어지기에 툭 트인 시야를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정취가 있다.

 

땅이 저처럼 다르니 사람들의 성품도 많이 다르리라. 산도 많고 谷(곡)도 많아서 도처에 奇人(기인)들과 異士(이사)들이 터를 잡고 있을 것 같은 느낌. 휙-하고 지나쳐 가면 몰라도 조금 속살을 들여다보고자 할 것 같으면 우선 다소곳하게 처신해야 할 것 같다.

 

 

여행 내내 고생을 했지만

 

 

안내한 양반이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얼마나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돌아다니는지 힘들었다. (2박3일 소주 항주 패키지 여행 같았다.) 그러니 몸살에 설사까지. 그런데 한 가지 수상쩍은 생각은 든다, 최근에 아스트라제네카 맞은 나이든 세대들의 상당수가 몸살과 설사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동리산의 태안사

 

 

아무튼 각설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泰安寺(태안사)였다. 신라 말 불교의 禪宗(선종)이 들어오던 시절 九山禪門(구산선문), 즉 전국 명산에 아홉 군데 선종 사찰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 하나인 桐裡山派(동리산파)가 시작된 절이라 한다. (동리산, 오동나무 울창한 산이라! 이름부터 아취가 있다.)

 

태안사로 들어서는 길은 오른 쪽에 개울을 낀 숲길이었다. 2 킬로미터 정도. 게다가 주지 스님이 비포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정취도 그만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만일 콘크리트 포장을 깔았으면 그저 쩝-했을 것인데. 최근 그나마 빛바랜 古刹(고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호남의 사찰들도 돈을 바르기 시작하면서 그 맛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절 산문 직전에 멋진 절경을 만났다. 개울 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내려가 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누각이 하나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묘하다. 凌波閣(능파각)!

 

 

절 앞에서 절세 미인을 만나게 되니

 

 

저 단어는 삼국지 연의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식, 칠보시를 지었다는 그 이가 아름다운 물의 여신에 빗대어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洛神賦(낙신부)에 나온다는 사실.

 

원문은 陵波微步(능파미보), 羅韈生塵(라선생진), 여신이 파도를 사뿐히 밟으며 걸으니 비단 버선에 살짝 먼지가 일고, 이런 뜻이다. 정말이지 저 洛神賦(낙신부)란 시야말로 중국 문학의 한 절정인데 지면관계상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누각 아래 커다란 바위로 물이 떨어져서 잠시 고였다가 다시 흘러가는 모습, 그 위론 푸른 나무들이 드리우고 있었다. 가히 절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시절의 화가 顧愷之(고개지)는 ‘여사잠도’란 명화를 남겼지만 실은 낙신부의 여신을 그린 洛神賦圖(낙신부도)가 더 유명하다. 조식의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그린 것이고 그 이후 수많은 유명 화가들이 낙신부도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수묵화의 대가인 傅抱石(부포석)이 그린 여인의 그림은 그야말로 고개지로부터 이어지는 중국 여인 인물화의 맥을 잇는 최고봉이라 하겠다. 기가 막힌 솜씨이다.

 

(구글에 가서 “傅抱石, 山鬼”라고 입력해보라, 바로 이미지를 만나실 수 있을 것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아쉽게도 부포석은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수묵화의 대가이지만 지레 겁 먹은 우리 미술계에선 일종의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탓이라 본다.)

 

 

경관 빼어난 천태암

 

 

이어서 곡성군 남단 높은 아미산이란 곳, 알아보니 587 미터라 하는데 정상 바로 밑에 지어놓은 천태암이란 곳을 찾아갔다. 스님 혼자서 그 암자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담력이 여간 두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법명이 큰 大(대)에 두루 周(주), 대주스님이었는데 날카로운 눈매를 감춘 채 연신 싱글벙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훌륭하셨다. 인물이 워낙 좋아서 잠시 생년월일시를 물어보았더니 2020년이 立秋(입추)의 운이었다. 스님에게 장차 크게 활동하시겠네요, 하고 얘기해주었는데 아마도 스님은 입에 발린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겠다.

 

천태암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운해가 피어나고 옅어지고 또 스쳐가고 그 사이로 멀리 보성강과 주암호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보성강은 보성에서 북으로 흘러 내려와 곡성의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도림사, 묘한 얼굴의 부처님과 보살님들

 

 

다음 날 아침 道林寺(도림사)란 고찰을 찾아갔는데 역시 계곡의 개울을 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절은 역시 개울을 끼고 있어야 정취가 있는 법이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협시보살의 얼굴이 일반 사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봐서 연대가 꽤 된 게 아닌가 싶다.

 

 

구례 천은사

 

 

그리고 나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구례의 천은사를 찾아갔다. 泉隱寺(천은사), 숨은 개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니 얼마나 멋진가!

 

무성한 숲이 개울을 가렸지만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 건너편에 문득 절을 만나게 되니 그곳이야말로 극락정토 아니면 무엇이랴! 苦海(고해)에 지쳐 헤매다 우연히 기대치 않은 곳에서 만나는 극락이란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구례군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저수지를 조성했으니 개울은 절반 이상 사라졌고 게다가 절 입구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깔고 그 앞엔 커다란 주차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泉隱寺(천은사)가 아니라 泉露寺(천로사)가 된 셈이다.

 

돈이 山門(산문)을 넘어서는 것이 대세인 세상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식당도 주차장이 없으면 손님이 찾지 않듯이 절 역시 사정이 그럴 것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어쩔 수 없이 최면을 건다. 저수지와 포장도로, 너른 주차장 모두를 눈앞에서 삭- 제거하고 상상을 한다. 물소리 따라 걷다 보면 개울을 만나고 그 개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문득 일주문을 만난다는 식의 상상력. 옛 시절 가수 김태곤의 노랫말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하는 그런 절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생각해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모든 고행의 순례길을 손님 많이 오라고 죄다 아스팔트 포장을 해놓고 세단을 타고 쌩-하고 달려오시지요, 하는 격이니 괴롭다.

 

기독교든 힌두교든 불교든 여타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성지순례란 것은 순례자 스스로 몸으로 지불하는 고생의 크기만큼 무언가 얻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절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최소한 一柱門(일주문) 앞에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당 복전함에 아무리 큰돈을 투하해도 별 소용이 없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해도 부처님은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을 것이란 게 평소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저렴해 보이니? 하면서 말이다.

 

시주하는 돈은 절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정작 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소중한 몸과 간절한 마음인 까닭이다. 다른 종교도 물론이다.

 

이제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 부처님 찾아가느라 기진맥진해서 몸살과 설사를 지불했으니 나름 한껏 바치고 온 셈이다. 필경 이번 곡성 여행은 남아도 많이 남는 장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고, 저 늙은 호호당 놈, 그래도 고생 뭐 빠지게 했으니 내 치부해둘 심산이야! 이렇게 여길 것도 같으니 말이다.

 

오늘 화요일, 이제 몸이 거의 회복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