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그러나 마이 웨이!

 

 

환갑을 2년 넘긴 초로의 중소기업 사업가가 있었다. 거의 30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그 사이에 돈도 꽤나 벌었다. 하지만 그는 그간에 번 돈을 오로지 한 구멍에 다 쑤셔 박고 있었다.

 

전문가들이나 주변 사업가들 모두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있었기에 저 양반 미쳤네! 하고 조롱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가 그 한 구멍에 헛되이 박은 돈만 해도 무려 2억 5천만 달러에 달했고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해온 세월이 17년을 넘기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고 있었던 셈이다.

 

그 한 구멍이란 문자 그대로 미국 텍사스 넓은 광야의 허허로운 벌판에 있는 천연가스정(gas well)이었다. 그 구멍 밑 땅속 깊은 곳엔 단단한 퇴적암층이 있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연가스를 끄집어내려는 시도였다. 지질학자들이라든가 시추 전문가들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작업을 다시 한 번 얘기지만 무려 17년간 반복해오고 있었다.

 

그가 시도한 방법은 전혀 새로운 기술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고난이도의 방법인 ‘수압파쇄법’이란 것이었다.

 

 

셰일가스 혁명의 출발

 

 

1981년에 시작해서 수 천 번을 실패한 결과 마침내 1998년에 이르러 경제성이 충분한 천연가스를 지상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게 바로 셰일가스 혁명의 출발점이다.

 

셰일 구멍을 파기 시작한 1981년 이미 62세였던 사업가는 1998년이 되자 79세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간에 숱한 조롱과 비난을 견뎌온 이 할아버지는 큰 에너지 회사에게 자신의 특허와 사업체를 35억 달러에 팔아넘긴 뒤 은퇴했다. 당연히 지칠 대로 지쳐있었을 것이다. 이제 살아있을 세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은 물론이다.

 

이 대단한 고집쟁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그 뒤로도 무려 15년을 더 살아서 2013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94년의 一期(일기)였다. 그의 이름은 조지 미첼.

 

조지 미첼 옹은 아내와 함께 그간에 번 돈의 대부분을 환경과 에너지 관련 재단과 모교, 그리고 워렌 버핏이 만든 자선재단에 기부했다. 물론 자녀들에게도 어느 정도 남겨주었다.

 

 

고집쟁이 영감의 명과 운

 

 

그럼 이쯤에서 그의 명과 운을 정리해보자.

 

1919년 5월 21일 새벽 3시에 출생했다고 되어 있다. 새벽 3시 경이니 정확한 것은 아닐 것이고 일단 丑時(축시)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사주는 己未(기미)년 己巳(기사)월 癸酉(계유)일 癸丑(계축)시가 된다.

 

사주를 간단히 살펴보면 무진장 인내할 수 있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가난한 그리스 출신의 이민자였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근면 성실했고, 이거다 싶으면 절대 후퇴하지 않는 소신파 내지는 고집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운세 흐름을 살펴본다.

 

생시까지 알려져 있으니 심플하다. 1923년과 1983년 癸亥(계해)년이 氣(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이고 1953년과 2013년 癸巳(계사)년이 운의 바닥인 立春(입춘)이다.

 

그가 에너지 일에 뛰어든 것은 사업을 시작한 것은 셰일 가스 추출을 시작한 것은 1981년, 한 해로 치면 가장 뜨거운 大暑(대서)의 운이었다. 1983년이 입추였기에 그렇다. 열정이 가장 뜨거울 때 시작한 셰일 가스 시도였다.

 

그리고 1998년은 그에게 있어 立冬(입동)의 운이니 물질 면에서 가장 화려한 때에 이르러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셰일 가스를 지하 깊숙한 퇴적암, 즉 셰일 층에서 돈 되는 천연가스를 뽑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또 다시 입춘 바닥인 2013년 癸巳(계사)년에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여한 없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뽑아 쓰고 숨을 거둔 것이다. 에너지 사업가답게 완전 연소한 삶이라고나 할까!

 

 

전문가란 사람들 너무 믿진 말아야! 

 

 

재미난 점은 1998년부터 지하의 셰일 층에서 천연가스를 뽑아내기 시작해서 이제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도 미국의 에너지 최고 전문가들과 교수들이란 사람들이 모여 숙고를 거듭한 결과 장차 미국은 만성적으로 석유와 천연가스 부족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최대의 에너지 수입국이 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셰일 가스가 얼마 있지도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셰일 가스는 2008년부터 급격하게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최고 전문가들과 최고 석학들의 결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완전 뒤엎어버리고 말았다. 뽑아낼 수 있는 셰일 가스가 미국 영토 내에 거의 무한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천연가스는 거의 무한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오늘에 이르러 당시 그 보고서에 서명을 했던 전문가들과 교수들은 모두 퇴진했고 잘려 나갔다.)

 

묘한 것은 바로 그 해 미국은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에너지 소비가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자 2011년에 이르러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의 혁신을 발판으로 우리는 아마 한 세기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천연자원을 확보한 것 같다, 바로 우리의 발밑에서” 라고 선언했다.

 

이제 문제는 에너지 부족이 아니라 에너지 가격의 폭락이었다. 이젠 넘쳐나는 천연가스를 팔아넘길 새로운 시장을 다른 나라에서 찾아야 할 판국으로 변한 미국이 된 것이다. 그러자 2000년대 초반 에너지 생산이 한계라고 진단했던 전문가들은 싹 사라지고 이젠 에너지 소비 정점을 얘기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에너지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최고치에 달하는 날이 곧 닥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넘긴 지도 모른다는 논문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 호호당은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때그때 달라요, 작년과 올 해가 달라요!)

 

가난한 그리스 출신 이민자 2세 출신인 조지 미첼의 고집은 미국 역사를 바꿔 놓았다. 미국 역사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와 정치 지형을 근본에서부터 다 바꿔놓았다.

 

 

에너지 수출국이 된 미국 그리고 글로벌 

 

 

2006년 당시 에너지 수입이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이 2019년이 되자 수출국으로 돌변했다. 그러자 미국 입장에서 이제 산유의 본 고장인 중동 지역은 더 이상 핵심 이해가 걸린 지역이 아니라 성가신 곳으로 변했다. 로스 컷, 즉 손절 처리의 대상으로서 중동이 된 것이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은 2001년부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년 만에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엄청난 돈과 희생을 치른 그 아프가니스탄에서 말이다.

 

게다가 이제 더 이상 중동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해상 항로(sea lane), 즉 석유 수송로 역시 지켜내야 필요성이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자 돈 먹는 하마였던 핵 항공모함 전단 역시 이제 줄이면 줄였지 더 이상 건조할 필요가 사라지고 있다. 장거리 초음속 대함 미사일이라든가 고성능 순항 미사일의 실전 배치로 인해 항공모함은 해상의 커다란 목표물이 되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이제 미국의 외교와 군사력의 초점은 오로지 패권에 도전해오고 있는 중국, 특히 남지나해에서 중국의 팽창을 봉쇄하는데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최근 미국이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풀어준 것 역시 북한도 북한이지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그렇다, 에너지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해버린 미국이니 해외 지역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으니 반도체와 배터리, 코로나19로 인한 백신과 기타 의료용품의 공급이다.

 

이에 미국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제를 바로 우리 대한민국에게서 해결하고자 한다. 대량 생산과 제조에 능한 우리를 미국 내수에 필요한 거대한 공장으로 활용해보자는 바이든의 정책이다. 백신의 경우 기술은 라이센스 방식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대만의 TSMC 역시 대상이기에 미국은 대만문제를 이제 호락호락 중국에게 넘겨주지 않을 생각임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달러 패권의 유지인데 이는 일본이 거대한 물주 노릇을 하고 있다. 일본은 내수경기 부진으로 인해 미국 국채를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미국 국채 매입이 없다면 달러의 가치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막대한 재정적자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풀어야 하고 그 돈의 상당액은 미국 국채 매입에 들어간다.

 

여기에 서태평양과 인도양, 남지나해의 방위 문제는 미국과 일본, 인도와 호주로 이루어진 쿼드를 통해 중국을 봉쇄하고자 한다. 유럽엔 영국이란 확고한 우방 동맹이 있고 여차하면 폴란드를 통해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보는 미국이다.

 

 

성공하려면 그 대가를 응당 치러야만 하기에

 

 

돌아와서 얘기이다. 조지 미첼은 미국의 진로를 보다 긍정적으로 바꿔 놓았고 그로서 글로벌 정치 경제 지형이 바뀌고 있다. 역사는 이처럼 한 명의 천재나 고집통이 발전을 촉발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있다면 조지 미첼처럼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자연순환의 이치에서 보면 18년은 어떤 흐름에 있어 변화가 생겨나는 기간이다. 조지 미첼은 구멍을 판 지 18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변화를 만들었고 그로서 성공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말이다.

 

조지 미첼은 학부에서 지질학과 에너지 공학을 전공한 뒤 직장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71년이었으니 52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셰일가스 추출에 도전한 것은 1981년이었으니 62세였다. 그런 그가 끝내 18년 만에 성공했으니 79세의 나이였다. 그 이후 15년간 부와 명예를 누리다가 입춘 바닥에 세상을 등졌다. 마스터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세상은 치열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도 덩달아 기개를 가져본다. 1983년 초 밝혀지지 않은 운명의 이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고 이에 무작정 연구를 시작했다. 30년이 흘러 2013년에 이론을 정리했고 2014년에 이르러 자연순환운명학이란 것을 생겨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2014년에서 18년이 흐른 2032년이 되면 자연순환운명학을 어느 정도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것이다.

 

소만, 알고 보면 생사가 나뉘는 때

 

 

21일은 小滿(소만)이었다. 따뜻한 봄 같기도 하고 초여름 같기도 한 때, 하지만 놀랍게도 소만은 모든 생명들의 생사가 가름되는 때이다.

 

소만에 이르러 어떤 나뭇가지에 잎이 피어나지 않았다면 그 가지는 죽은 가지이고 나무에 잎사귀가 매달리지 않았다면 그건 죽은 나무이다. 지난 해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 날려 온 풀씨 역시 땅위로 힘차게 줄기를 뻗고 있지 않다면 그건 죽은 풀씨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새 풀이 땅위로 올라오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생명의 몸부림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풀이나 나무만이 그런 게 아니다. 세상 모든 생명이 그렇다. 물론 우리들도 그렇다. 소만으로서 모든 생명들의 죽고 살고가 가름된다. 소만으로서 죽은 놈은 보이지가 않아서 무시되고 산 놈만 힘차게 자라고 뻗어간다. 작은 것들이 벌판에 가득 찬다고 해서 小滿(소만)이다. 그 작은 것들을 이름 하여 싹수라고 부르고 있으니 온 세상이 싹수로 가득하다. 그 작은 것들은 여름에 힘하고 무성하게 자랄 것이고 가을이 되면 결실을 맺을 것이다.

 

 

싸가지가 나오는계절

 

 

싹수가 있다는 말은 장차 발전할 낌새나 징조가 보인다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싹수의 방언으로서 싸가지란 말이 있는데 이를 사전에선 지방 방언이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되었다. 실은 싸가지가 표준말이자 순수 우리말이 되어야 하겠고, 거꾸로 싹수가 실은 애매한 말이다.

 

어린 소를 송아지라 하고, 어린 개를 강아지라 하는데 이게 방언인가? 우리말은 어린 생명에 대해 “-아지”란 말을 붙이고 있으니 어떤 풀이나 나무의 어린 싹을 싸가지라 한다. 이게 무슨 사투리이고 방언인가 말이다. 반면 “싹수”란 말은 싹이라 우리말에 한자의 數(수)를 결합한 말이니 애매한 합성어이다. 참고로 싸가지의 정식 한자어는 萌芽(맹아)가 된다.

 

돌아와서 얘기한다. 소만으로서 온 산과 들, 그리고 논과 밭에 이런저런 싸가지로 가득 차게 되니 그 놈들이 노랗고 비실대지만 않는다면 그 모두 가을에 가서 결실을 볼 생명들이다. 파랗고 싱싱하게 올라오니 그를 보고 싸가지가 있다고 한다.

 

 

사람 역시 소만으로서 결정이 난다. 

 

 

수 십 년을 살아가는 우리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만 전까지 봄을 타거나 입맛이 없다가도 소만이 지나면 식욕이 되살아나고 체력도 강해진다. 물론 의욕도 강해진다. 그게 정상인 징조이고 그로서 한 해를 건강하게 살아간다. 따라서 소만이 지나 6월이 되어도 여전히 입맛이 없고 체력이 부실하다면 그건 최소한 올 한 해를 건강하게 보내긴 어렵다는 징조라 봐도 무리가 없다.

 

나이 들어 세상을 뜨는 것도 마찬가지, 죽는 때는 8월일 수도 있고 11월일 수도 있지만 실은 소만으로서 숨을 거둘 모든 징조가 다 나타난다. 다만 사람들이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강조하지만 소만은 이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는 때이고 거침없이 욕망을 뿜어내면서 세상을 자신의 품으로 빨아들이고 흡수해가는 때이다. 잡아먹고 잡아먹히고의 투쟁과 전쟁, 그리고 사랑, 얼핏 모순되는 두 가지 활동이 본격화되는 것이니 줄이면 생명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순환, 생명의 순환, 그게 바로 운이란 것이니 

 

 

생명과 성장의 계절은 석 달간 이어진다. 그 이후 석 달은 결실의 마무리 계절이고 이에 11월 20일 경의 소설이 되면 죽음이 3개월간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다가 다시 새 해가 와서 2월 20일의 雨水(우수)가 되면 생명의 씨앗들이 땅 밑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서 꿈틀대면서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간다. 바로 이게 순환이자 생명의 순환이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다년생, 아니 수 십 년을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들과 산의 초목이나 동물에 비해 우월한 존재란 관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 또한 세포 차원에서 보면 한해살이나 별 다름이 없다.

 

인간보다 더 오래 사는 나무들도 알고 보면 한해살이 생명이다. 작년의 나무는 새 해가 되면 죽어서 시체가 되니 그것이 바로 해마다 한 겹씩 쌓여가는 木質(목질)이다. 생명으로서의 나무는 바깥의 껍질과 목질 사이에 존재하는 엷은 층이란 사실.

 

다만 우리 인간이란 동물은 뇌의 활동을 통해 해마다 살고 죽는 세포들을 통합해서 전체로서 연속적인 ‘하나’라는 총체적 인식을 발전시켜왔으니 이를 흔히 自我(자아) 의식이라 부른다. 자아 또는 자아의 정체성이란 것은 결국 뇌에서 만들어진 의식작용에 불과하다.

 

동물이나 풀이나 우리 인간이나 그리고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가는 것 같은 나무들, 그 모두가 한해살이 생명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 역시 해마다 살고 죽고를 거듭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이 오래 산다는 것은 결국 세포의 자기복제기능 또는 재생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는 말이나 같다. 예컨대 우리 피부의 세포들은 부단히 재생과 복제를 거듭해가고 있으며 이때 죽은 세포는 각질이 되거나 아니면 피부에서 때가 되어 떨어져나간다. 물론 피부세포를 비롯해서 모든 장기의 세포들이 영원무궁토록 복제하고 재생해낼 수가 없기에 결국엔 총체적인 기능 부전에 도달하게 되니 그를 우리는 죽음이라 부른다.

 

생명이란 것,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떻게 이런 멋진 유기체가 지구상에 생겨났을까나!

 

(이처럼 한 해를 순서대로 채워가는 24절기 중에서 소만이란 놈 하나만으로도 200자 원고지 1천장 정도는 너끈히 메울 수 있을 것 같으니 언제나처럼 나 호호당의 모든 글은 축약일 수밖에 없다.)

 

 

운이란 게 사실 순환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기에 

 

 

60년 순환에 있어서도 논리는 정확하게 동일하다. 참고로 순환의 다른 말은 運(운)이다. 운의 변화란 결국 60년 순환에 있어 절기의 변화이고 계절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운세 변화를 볼 것 같으면 입춘 바닥으로부터 17.5년이 흐른 소만의 때에 향후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눈에 들어온다. 小滿(소만), 작지만 이제 구체화되고 시작된 것이니 다음은 그것의 성장이고 결실이고 죽음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에 소만으로서 모든 것이 결정이 난다. 다시 말하면 소만으로서 그 사람의 싸가지를 보면 30년 뒤의 小雪(소설)에 구현될 모습을 대강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소만에 나온 한미정상회담의 내용

 

 

그렇다, 마침 소만으로서 한미 정상회담의 전문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이 꽤나 대단하다. 지금까지 이토록 긴 장문의 정상회담 결과를 대한 적이 없다. 게다가 영문 전문에 비해 한글 전문의 내용은 약간 축약한 감이 있다.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영문을 읽을 수 있다면 한 번 살펴보시길.)

 

간단히 내용을 얘기하면 이제 우리나라는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전속 에이전트, 달리 표현하면 여느 하청국가가 아니라 전속하청국가로 격상되었다고 하겠다. 반도체와 배터리, 그리고 백신을 미국 스스로 자국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유지하자니 계산이 서질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전략물자라 하겠기에 코리아, 너희들이 생산을 전담해라, 물론 어느 정도까지 물량 개런티를 해주겠다, 이런 정도이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선 당장 확약할 순 없지만 아무튼 최우선적으로 공급해주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다만 미군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한국군 전 병력에 대해선 백신을 준다고 하니 이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염두에 둔 생각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는 비핵화가 확실해지지 않은 한 어림도 없지만 인도적 지원, 다시 말해서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숨통은 열어주겠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남지나해와 인도양-서태평양에서의 중국을 견제한다는 언급과 함께 대만 문제에 대해 우리가 미국과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언급을 ‘대만해협’이란 말로서 우회하고 있으니 이는 중국 외교의 慘敗(참패)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시진핑 방한의 가능성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얘기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그간 국내정치에서 사실상 중도 좌파 노선을 표방해왔는데 이번에 보면 결국 권력을 잡기 위한 시늉에 불과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번 내용은 과거 한미 FTA 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미국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 그렇다. 민주당이란 게 포퓰리즘을 위한 좌파 지향이었을 뿐, 우리 정치에 있어 사실 보수도 진보도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증시, 이제 상승 모멘텀을 되찾게 생겼으니 

 

 

정치야 그렇다 치고 달리 중요한 점은 이제 증시가 오르게 생겼다는 얘기이다. 1월 초부터 지금까지 조정 양상을 계속해오던 증시였는데 배터리와 반도체, 백신, 자동차 등의 종목들은 나름 미래의 시장이 확보되었다는 차원에서 주가 상승이 시작될 것 같고 반면 그간 주도주 역할을 해오던 화학이나 조선, 철강 등은 이제 상승에 제약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시장이 중요한 화장품 종목은 부정적일 것이고.

 

줄여 말하면 증시도 이제 싸가지가 보인다는 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각은 5월 24일 월요일 새벽 1시, 이제 자고 나서 내일 아침 장을 보면서 서서히 매수를 늘려가야 할 것 같다.

왔다리 갔다리 하며 거슬러 오르는 발걸음

 

 

어제에 이어 비가 내린다. 내일까지 이어진다는 소식도 들었다.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새 생각은 앞서의 일들로 되밟아간다. 앞서의 일을 헤아리다 보니 다시 그 이전의 일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계속 되밟아가게 된다. 생각이 걸음을 천천히 옮겨간다. 걸음은 때때로 되돌아 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꾸만 더 과거의 일, 더 먼 시간 속으로 밟아간다. 그래, 이 역시 길이지, 길의 일종이야 하면서.

 

길을 되밟아가다 보니 문득 잊혔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하고 툭-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아, 그렇구나! 그때 그 사람과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선명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한편으로 지금 내 눈앞을 흐르는 강줄기의 위를 향해 머나먼 河源(하원)으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도 같다.

 

물론 강의 웃 줄기는 줄곧 하나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갈래가 나타나서 이 갈래를 따라 거슬러 오르다가 그만 두고 다른 갈래를 따라 오르기도 한다. 위로 오를수록 생각의 걸음은 갈팡질팡이다. 이에 먼 과거에서 가까운 과거로 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다른 줄기를 따라 오르기도 하며 다시 돌아와 또 다른 줄기를 따르기도 한다.

 

 

생각이 멈추면 빗소리가 들려오고 어느새 다시 생각은 걸음을 떼고

 

 

그러다가 생각의 걸음을 멈추면 갑자기 귓전에 빗소리가 들린다. 눈길을 돌려 창밖 먼 곳을 보노라니 빗소리가 더욱 커진다. 이건 눈이 귀를 따르는 건지 아니면 귀가 눈을 따르는 건지 헷갈린다. 그러다가 어느새 다시 빗소리 멀어지고 생각이 걸음을 옮긴다.

 

과거로 거슬러 가다보니 즐거운 일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즐거운 일은 잠시 또는 순간이었던 것 같고 힘들었던 일은 더욱 선명하고 또렷하게 되새겨진다는 점이다. 아픈 일, 시간이 흐르면 잊힌다는 말도 그저 허튼 소리같기도 하다. 아니면 아픈 일이 있었던 시간 속으로 우리 스스로 가기 싫어하는 것일까? 팔목이나 신체 어딘가에 난 소소한 생채기들은 지워지지만 워잊힐 만도 하지만 큰 상흔은 죽는 날까지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다시 귀가 열려서 빗소리 들려오고 그러다가 어느덧 멍해지고 고요해지면서 생각이 걸음을 떼어놓는다. 아 그렇구나, 생각이 걸음을 재촉하면 눈과 귀가 머는구나! 귀가 빗소리를 들어서 생각을 일깨웠건만 생각은 그 은혜를 모르고 자꾸만 감각을 멀리 하니 이놈은 잘도 이기적이다. 하지만 생각은 시간 속 먼 과거의 감각을 일깨워서 냄새도 떠올리게 하고 모습도 되살려내니 아주 몹쓸 놈은 아니다.

 

 

영웅 조조의 강개한 시가 떠올라서 

 

 

갑자기 지친다. 어깨가 처지고 군데군데 통증이 되살아난다. 여보시오, 나도 좀 살펴주시오 한다. 잠시 어깨를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하다가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곳으로 가본다. 이번에 시간 여행이 아니라 머릿속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물건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曹操(조조)가 남기고 간 시 한 편이다.

 

번역이 아니라 조조의 생각과 마음을 내 식으로 임의대로 풀어보고자 한다.

 

(풀이 시작)

 

두어 잔 술을 마시다 보니 속에 차오르는 것이 있어 그를 노래로 뽑아봐야 하겠네, 산다는 게 길어야 또 얼마나 된다고 속에 담아 두고만 있겠는가. 해가 뜨면 말라 버리는 아침 이슬과도 같은 짧은 삶일진대 그 또한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니 고생 투성이, 그러니 그 소회를 엮어 길게 한 가락 노래로 뽑아봄직도 하지 않겠는가.

 

지나간 슬픔 힘차게 소리 내어 내질러본들 금방 또 다른 근심으로 이어져가니 떨쳐낼 수 없구나, 그저 눈앞에 놓인 술에 의탁할 수밖에.

 

지나간 날 그처럼 창창했던 그대의 어엿한 모습 긴 세월 지나온 지금까지도 내 속에 머물고 있으니 바로 그런 까닭으로 그대는 지금도 내게 깊은 시름만 한 아름 안겨주고 있다네, 봄날 사슴들이 햇쑥을 뜯으며 기분 좋은 울음을 울고 있던 먼 옛날 그대는 내게 귀한 손님으로 찾아왔으니 그때 우리는 금을 뜯고 피리를 불면서 시간을 보냈었지. 밝고 또 밝은 달은 바로 발치 위에 있어서 한 번 따서 내릴 것도 같지만 소용 없듯이 떠나간 그대 생각하는 이 마음 지워버릴 수 없으니 그저 논둑과 밭둑을 서성대면서 그리운 마음만 달래고 있으니 참 헛된 일이지.

 

그래도 우리 서로 정답게 나누었던 말들을 되새기면 새삼 그 은혜 고맙기만 하다네, 이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예전의 그날 밤처럼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날아오더니 의탁할 나뭇가지를 찾는지 나무 주변을 세 번이나 맴돌고 있을 뿐이라. 어허! 저를 어쩐다. 그냥 내 심정과 같구나.

 

그래 좋다, 산은 높다고 해서 꺼리는 법 없고 바다는 깊어진다 해도 저어하는 일 없지 않느냐? 먼 옛날 주나라를 반석에 앉혔던 周公(주공)을 생각해 보렴, 천하의 민심을 얻고자 애쓰던 시절, 식사 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고나서 입안에 씹던 고기도 내뱉고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하지 않았던가! 내 사사로운 근심 그리고 걱정 따윈 오늘 이 술로 달래면 되는 일, 뜻을 품고 나선 거 어디 끝까지 가보자꾸나.

 

(풀이 끝)

 

시는 처음에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과 悔恨(회한)으로 시작해서 끝부분에는 그래도 처음 품었던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각오로 맺고 있다. 장부의 기개이다. 

 

 

조조, 문무쌍전의 영웅 

 

 

말을 타고 전장을 내달리던 영웅이자 감성으로 충만했던 시인 조조의 모습이 눈앞에 역력하지 않은가. 삼국지연의에선 악당으로 등장하는 조조이지만 실은 당시의 시류를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민심을 얻고 말을 달려 覇者(패자)로 군림했던 조조였다.

 

게다가 문예를 부흥시킨 才士(재사)이자 최고의 詩人(시인)이었다. 훗날 중국 漢詩(한시)라 하면 唐詩(당시)라 하겠는데 그 詩風(시풍)은 조조와 그 아들 조비와 조식의 세 부자와 당시 '건안칠자'라 불렸던 시인들이 다져놓은 바탕 위에 만들어졌으니 사뭇 의의가 깊다 하리라. 

 

훗날 최고의 시인 李白(이백)은 당시의 문학과 시를 일러 建安骨(건안골), 즉 건안 시대의 굵직한 骨氣(골기)라고 찬양했을 정도였다. 조조는 그야말로 文武(문무) 雙全(쌍전)의 기재였던 것이다.

 

다시 아침이다. 맞은 편 산이 구름을 둘렀고 비는 사흘 째.

 

 

상담을 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타고난 命(명)은 달라도 運(운)은 일정한 흐름이 있다. 60년에 걸쳐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보낸다. 다만 그 계절의 시작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이것으로 각자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선 참으로 드라이하다 말할 수 있다.

 

그 계절을 지내면서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曲折(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굽이굽이, 언덕과 산을 오르내리고 개천과 강을 건넌다. 그럼에도 나 호호당은 애써 그 곡절을 모른 체 하려 한다. 찾아온 상대의 감성에 함께 빠져서 젖어들다 보면 필요한 어드바이스를 제대로 해줄 수 없기 때문이고 아울러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다. 감상에 빠졌다가도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앞의 저 조조의 시처럼 말이다.

 

 

노래의 원문 

 

 

短歌行(단가행)이라 하고 흔히 對酒當歌(대주당가)라고 칭하는 조조의 시를 원문을 올리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對酒當歌(대주당가) 人生幾何(인생기하)

譬如朝露(비여조로) 去日苦多(거일고다)

慨當以慷(개당이강) 憂思難忘(우사난망)

何以解憂(하이해우) 唯有杜康(유유두강)

青青子衿(청청자금) 悠悠我心(유유아심)

但為君故(단위군고) 沈吟至今(침음지금)

呦呦鹿鳴(유유녹명) 食野之苹(식야지평)

我有嘉賓(아유가빈) 鼓瑟吹笙(고슬취생)

明明如月(명명여월) 何時可掇(하시가철)

憂從中來(우종중래) 不可斷絕(불가단절)

越陌度阡(월맥도천) 枉用相存(왕용상존)

契闊談讌(계활담연) 心念舊恩(심년구은)

月明星稀(월명성희) 烏鵲南飛(오작남비)

繞樹三匝(요수삼잡) 何枝可依(하지가의)

山不厭高(산불염고) 水不厭深(수불염심)

周公吐哺(주공토포) 天下歸心(천하귀심)

치과 가기 싫은 진짜 이유  

 

 

월요일 오후 1시, 비가 조금 내리는 날 수원 행 시외버스를 탔다. 제자가 수원 영통에서 치과를 하는데 참으로 꼼꼼하게 치료를 해주기에 이미 몇 년째 다니고 있다. 주로 임플란트 이식이다. 올 해 6개 정도 하고 내년에 두어 개 하면 더 이상 할 이빨도 없다. 그러면 죽는 날까지 이빨은 정비가 거의 끝날 것으로 기대한다.

 

수술 자체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 내 스스로 내 몸에 침을 놓고 하는 나이기에 마취 주사도 그렇고 드르륵 뼈에 구멍 내는 것도 전혀 부담이 없다. 하지만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말 역시 그렇지도 않다. 치과 바로 인근에 영통사란 절이 있는데 임플란트 하는 날이면 으레 절을 찾는다. 특히 약사여래 앞에 다가가 복전함에 만원 짜리 두어 장 넣고 삼배를 올린다. “약사여래님, 무사히 수술 잘 끝나도록 해주십시오, 비나이다.”

 

진짜 문제는 수술 후 거즈를 꽉 물고 세 시간 정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괜찮다. 정확한 이유는 출혈이 멈출 때까지 담배를 참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경질이 난다.

 

담배는 왜 배워서 평생 수시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독이라 금연이 되질 않는다. 그 바람에 장거리 여행도 가지 않는다. 해마다 치과 선생의 고향이 여수라서 해마다 다녀오지만 KTX가 아니었다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여수까지의 소요 시간이 정확하게 3시간인데 앞뒤 합치면 3시간 30분, 나로선 신경질 내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최대한이다.

 

버스 안에서 그리고 수술대 위에 누워 아침에 본 기사 하나를 놓고 이모저모 생각해본다. 드르륵- 하든 말든. 마취 상태인데 뭐, 그러라지.

 

 

참 난처한 사회적 문제

 

 

50대 배달원이 배달 도중 불법 차선변경을 하다가 차량에 부딪쳐 사망했다. 도로교통법 위반이라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 모 인터넷 신문의 기자는 현재의 법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사망한 배달원은 주말도 없이 매일 오전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 50~60건 정도의 배달을 소화해야만 한 달에 230만원의 수입을 올렸고 그 돈으로 세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배달원이 지내던 곳은 지하 월세 방은 패널로 세워진 가건물로서 곰팡이가 잔뜩 퍼져 있는 공용 화장실이었고 한 겨울에는 전기난로 하나로 버텼다 한다.

 

사정이 참으로 딱하다.

 

그런데 기사 아래의 댓글을 보니 동정하는 마음보다 배달원들의 마구잡이 난폭 운전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이 더 많다.

어떤 글은 배달원을 사망에 이르게 한 자동차 주인의 정신적 부담은 그 또한 얼마나 크겠냐고 얘기하고 있다. 또 어떤 글은 하루 50-60건 배달이면 일당이 20만원은 될 거라고 하면서 기자의 글이 과장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배달 시켜놓고 늦게 온다고 닦달 하는 사람들이 배달원을 죽게 만들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댓글을 보니 그 또한 모두 일리가 있으니 

 

 

기사를 포함해서 댓글까지 모두 나름의 충분한 일리가 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총체적인 모습이라 여긴다. 배달원의 운전, 나 호호당 역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순간순간 아찔한 것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어린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노란 승합차, 그야말로 난폭하다. 어린이 안전을 위해 특별법을 만들어 놓았더니 ‘난폭허용운전법’이 되고 말았다. 툭-하면 차선을 째고 들어오면서 다른 차들이 놀라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자. 저렇게 난폭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면 그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은 크게 다칠 것이 아닌가.

 

앞서의 기사는 배달원의 사망이 산재 대상이 아니어서 유가족들이 안타깝게 되었으니 법률을 수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하지만 과연 법을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이 될까? 물론 개선 효과가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마저도 쉽진 않을 것 같아서 얘기이다.

 

 

문제가 존치되는 것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는 사실

 

 

다른 이야기 하나 또 들려드린다. 동원 예비군 훈련 기간 중 부대에서 제공하는 식사의 맛과 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군에선 개선한답시고 부대 인근의 사설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도록 조치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맛과 질이 떨어졌다. 왜 그런지 사회생활 특히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외부 업체에게 위탁하고 비리가 발생하면 그럴 때마다 해당 업체는 물론이고 관련된 장교 몇 명만 어김없이 옷을 벗기면 깨끗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은 군의 개선의지가 별로 크지 않다고 본다. (군이 식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오랜 역사가 있다. 명나라, 청나라, 조선왕조, 아니 나 호호당이 군대 복무 시절만 해도 심하다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앞서의 배달원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개선이 절대 쉽지 않다.

 

 

문제의 현장에 가보면 나름 합리적이라서 

 

 

우선 배달 플랫폼 업체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배달 단가의 문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배달 시간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존재한다. 단가를 맞추고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배달원들은 죽어라 달려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건당 수익이 크지도 않으니 어서 후딱 배달해야만 그나마 잠깐 쉴 수라도 있다.

 

플랫폼 업체들은 사고에 따른 부담을 피하기 위해 배달원을 고용하지 않는다. 배달원들은 대부분 자영업자 또는 프리랜서들이다. 교통법규 위반은 배달원의 책임이란 얘기이다.

 

플랫폼 업체들은 수익을 올려야 하고 배달원들 역시 각자 나름의 원하는 수입을 올려야만 한다. 매장을 방문하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배달을 시켜 먹는 소비자들은 신속한 배달과 저렴한 배달비를 요구한다. 거기에 플랫폼 업체들 간의 엄청난 경쟁이 존재하니 이 모순은 도저히 해결될 수가 없다. “신속한 난폭운전”이 현실일 수밖에 없다. 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이다.

 

간단해 보이는 어떤 사회 문제나 비리, 악폐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나름 모든 이가 합리적 주장과 요구를 하고 수용하고 있다. 배달 플랫폼 업체의 입장 충분히 이해가 가고 배달원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소비자들의 요구도 당연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전체를 놓고 보면 문제가 크고 또 많다. 이에 그로 인한 해악은 우리 사회 전체가 골고루 나누어서 부담하거나 감내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도 비용은 발생하고 결국 약자에게 전가된다. 

 

 

모든 일은 뭘 어떻게 바꾸어도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한다. 동시에 그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느냐 하는 점도 달라진다. (심적 스트레스는 따지지 않아도 그렇다.) 사회 비리나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야기하는 비용과 문제점도 크겠지만 비리나 문제를 그냥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발생하는 편리성과 이익도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리나 문제가 그냥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이 공공의 이익과 선에 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리나 문제점이 바뀌지 않고 존치되는 것은 그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비리나 문제를 발생시키는 주변의 압력 즉 환경적 압력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런데 말이다. 비리와 문제점이 그대로 유지되든 바뀌든 개선이 이루어지든 관계없이 그에 따른 비용 발생은 현실에서 대부분 弱者(약자)에게 더 전가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강자가 더 부담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현대 사회의 경우 약자에게 전가되는 비용의 일부를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서 일부를 대신 지불해주기도 한다. (기억하기로 2000년대의 버스 준공영제라든가 대중교통 환승시스템, 버스 전용차선과 같은 제도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럴 경우 정부나 지자체는 물론 그 비용을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사회 전체에게 전가한다. 때론 특정계층에게 부담시키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기업들이 내는 사실상의 세금인 ‘부담금’이 바로 그렇다.

 

 

정치야말로 종교와도 같아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후보들은 목청을 높여 떠들어대고 다닌다. 이번 정부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으니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저건 과거 중국 전설의 堯舜(요순)시대에나 가능한 얘기가 아닌가! 시진핑의 중국몽이나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公約(공약)이 아닌 空約(공약)의 극한치였다.

 

이는 비난의 소리가 아니다. 정치야말로 종교란 사실, 나 호호당 역시 임플란트 수술 전에는 절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초파일이 가깝다. 연등 하나 비싸게 올려볼까?

 

 

여름 선생, 좀 천천히 오시지... 

 

 

갑자기 여름이 시작되었다. 긴 팔 셔츠에 자켓을 걸쳤더니 겨드랑이에 땀이 흘렀다. 그리고 보니 벌레들이 많아졌다. 새들이 이제 굶주리지 않겠구나 싶다. 모두가 먹고 살고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여름이 왔다. 그리고 동남풍이 연일 불어대면서 중국 발 먼지를 중국 안으로 다시 말아 넣고 있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 모양인지 수술 후 사흘이 지나서야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