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2월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과연 어떻게 될까?

 

해답부터 제시하면 얼마 가지 않아서 엎어질 것이라 본다.

 

쿠데타의 주역인 “민아웅라잉”은 중국이 받아주지 않으면 자결하거나 아니면 감옥에 가서 종신형을 받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지금부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가에 대해 얘기하겠다.

 

 

운세 최바닥에 쿠데타를 일으킨 민아웅라잉

 

 

먼저 “민아웅라잉”의 운세 흐름을 보면 올 해 辛丑(신축)년이 입춘 바닥이란 점이다. 1956년 7월 3일생이고 생시는 알려져 있지 않다. 丙申(병신)년 甲午(갑오)월 辛未(신미)일이니 그간의 프로필을 볼 때 바닥임을 확신한다. 바닥에 거사를 했으니 궁지에 몰려 어쩌면 등 떠밀려서 나선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죽을 짓을 했다. 그러니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얀마 민주주의는 이미 대세로 굳어졌기에 

 

 

다음으로 큰 그림을 살펴보자.

 

미얀마는 1962년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시작되었다. 60년 순환에 있어 48년이 지나면 어쨌거나 시들해지는 법,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하던 군사정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보고 민선정부로의 길을 터주었다. 따라서 2010년부터 미얀마는 민주주의로 들어선 셈이다.

 

이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점차적으로 민주주의 정권으로의 이양이 이루어졌다. 특히 2015년 총선거에서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정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군부는 여전히 의석의 1/4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면에서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총선에선 의석수가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자 군부는 권력 상실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군부는 작년 총선이 부정투표로 진행되었다고 것을 명분으로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일종의 마지막 발악이고 발작이라 하겠다.

 

내년이면 1962년으로부터 60년이다. 이미 미얀마의 대세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다. 너무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미얀마가 아무리 대외교역이 적다 해도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고 군부는 엎어질 것이다. 이로서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공고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오늘 글은 짧다, 길게 얘기할 거리가 못 되기 때문이다.

무릉도원, 동아시아 세계의 이상향

 

 

武陵桃源(무릉도원)이란 말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별천지 이상향을 상징한다. 저 유명한 歸去來辭(귀거래사)를 남긴 중국 도연명의 글 “도화원기”속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대략 이런 내용이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느 한 어부가 어쩌다보니 물길을 잘못 들어 계곡의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더니 아름다운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만났다. 참 신기한 곳이 다 있구나 싶어 계속 더 올라갔더니 계곡이 거의 맞닿는 곳에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희미하게 빛이 비쳐오는 터라 어부는 배를 두고 뭍으로 올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지더니 나중엔 몸 하나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다. 이러다가 돌아 나올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어 겁도 났지만 어부는 용기를 내어 더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툭 트이더니 뜻밖에도 그 안에 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곳엔 잘 정돈된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고 뽕밭과 대밭도 있었다. 길도 잘 닦여 있었고 커다란 집들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뜰 안에선 개나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마을 사람을 만났다.

 

어부를 만난 마을 사람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과 닭 요리를 대접해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그 곳 마을 사람들은 몇 백년 전에 난리를 피해 동굴 안의 별천지로 피난을 왔다는 것이었다.

 

며칠 극진한 대접을 받은 어부는 계속 머물 수도 없고 해서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 하나가 말하길 “이 마을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다.

 

어부는 되돌아 나오면서 그 동굴이 있던 장소를 잘 기억한 다음 나중에 다시 가보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다시는 찾아갈 수 없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하면서 어부는 그곳이야말로 근심 걱정 없는 별천지가 아니었나 여겼다.

 

이처럼 도화원기 속의 이야기인 武陵桃源(무릉도원)은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일종의 理想鄕(이상향)을 상징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대목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계곡 사이의 두려운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는 점. 둘째, 그 안에는 별천지가 있었다는 점, 셋째, 다시는 그곳을 찾아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도연명이 남긴 글은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각색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다. 무릉도원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 궁극적인 奧秘(오비), 심오한 비밀을 담고 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왜 그런 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여수 향일암의 비밀

 

 

한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유명한 절이 있으니 여수 돌산의 向日庵(향일암)이다. 동해 낙산사의 홍련암과 서해 강화도의 보문사, 그리고 남쪽 바다의 금산 보리암과 함께 바닷가에 위치한 우리 불교의 4대 관음기도처 중 하나이다.

 

向日庵(향일암)은 그 뜻이 ‘해를 향해 있는 암자’이다. 그냥 평범한 이름 같지만 실은 거기에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향일암 입구에서 산 위쪽에 위치한 법당에 들려면 먼저 바위 틈새로 난 길 또는 동굴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 石門(석문)의 이름은 “해탈문”이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解脫(해탈)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이 대목에서부터 향일암의 비밀이 시작된다.

 

먼저 얘기할 것은 앞서의 무릉도원으로 들어서기 위해선 좁은 동굴을 지나야 했다는 말을 했는데 그 좁은 동굴과 향일암의 해탈문은 구조가 같다는 점이다.

 

무릉도원의 동굴이나 향일암의 해탈문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죽음 또는 죽음에 가까운 그 무엇이고 거기를 통과해야만 별천지로 들어가거나 향일암에선 법당으로 올라설 수 있다. 해탈이란 죽거나 죽을 고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그 무엇인 까닭이기에 그건 결국 통과의례를 뜻한다.

 

이에 석문을 지나 향일암의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그곳에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정성스레 三拜(삼배)를 올리고 돌아 나온다, 그 순간 당신의 눈앞에는 가없이 너른 바다가 펼쳐져있고 그 수면 위로 반사되는 눈부신 햇빛이 당신의 눈 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그 눈부신 빛은 해탈을 얻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무한 悅樂(열락) 즉 해탈의 기쁨이다. 그러니 향일암은 그냥 일반의 해를 향해 앉아있는 암자가 아니라 해탈의 빛을 향해 앉아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재미난 점은 여수 향일암의 돌로 된 해탈문을 무심코 지나친 사람은 법당 안에 들어가 아무리 절을 하고 소원을 빌어도 그냥 그런 것이고, 해탈문을 지나갈 때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는 법당 앞마당에서 해탈과 열락의 눈부신 빛을 누릴 것이란 점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구례 사성암 역시 마애약사여래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곳 역시 옛날에 도선 대선사께서 수도하신 곳이라 해서 이름이 붙여진 ‘도선굴’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에 사성암을 나름 특별한 성지로 만들어주고 있다.)

 

 

성과 속은 달리 존재하는 게 아니어서

 

바로 이런 점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비밀이다. 진정한 신비와 비밀은 멀리 특별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고 가깝게 존재한다. 같은 공간일지라도 누군가에겐 聖(성)의 영역이 되고 누군가에겐 세속의 관광지가 된다.

 

聖(성)과 俗(속)은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이게 바로 세상과 삶의 숨겨진 비밀이다.

 

유럽의 연금술에서 유래된 ‘현자의 돌’이란 게 있다. Philosopher's stone. 달리 ‘엘릭시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돌과 관련해서 유명한 말이 있으니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향일암의 석문인 해탈문을 제대로 느끼면서 통과한 이는 해탈의 法悅(법열)을 얻을 것이고 그냥 유명 관광지로 알고 지나치면 그냥 관광으로 끝난다. 같은 말이다.

 

神秘(신비)는 奧秘(오비)는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어디에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면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더욱 신비하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입춘은 운명적 삶의 죽음이자 새로운 갱신이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얘기와 연관을 지어 나 호호당이 세운 자연순환운명학에 대해 얘기해보자. 실은 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먼저 한 해의 순환에 대해 알아보자.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한다. 여름이 되면 만물이 활개를 치고 서로 싸우고 또 짝을 지어 번식한다. 가을이 되면 결실을 얻게 되고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시들어 사라진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의 어김없는 순환이다.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은 저 자연의 순환을 사람의 삶에 고스란히 옮겨와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60년을 주기로 하는 순환이 사람의 삶과 운명에 있어 가장 중요하기에 그를 중점으로 해석하고 해설한다. 변화해가기에 그를 運(운)이라 할 뿐이다. (그 사이에 작은 순환 주기도 존재하고 또 개개인의 삶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360년의 순환, 그 위에 더 큰 2,160년의 순환도 작용한다.)

 

헌 해의 종말점이자 한 해의 새로운 시작점은 立春(입춘), 양력 2월 4일 경이다. 그 순간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바의 동굴이나 석문처럼 당신의 삶, 정확히 말하면 운명의 삶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때이자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에 동굴이나 석문이 끝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니 이는 양력 4월 5일경의 淸明(청명), 맑고 환한 때, 한 해가 비로소 밝아지는 때와 같다. 이로서 새로운 별천지, 새로운 삶이 본격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6월 22일 경의 夏至(하지), 해가 가장 긴 때가 되면 바로 그 순간이 향일암 법당 앞의 뜨락에 서서 눈부신 햇빛으로 가득한 망망대해를 보는 때라고 이해하셔도 되겠다.

 

돌아가서 얘기하면 입춘은 죽음의 순간이고 또 다른 삶, 즉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릉도원의 동굴에서 가장 좁고 험난한 곳이자 해탈문의 가장 비좁은 장소이기도 하다.

 

 

삶의 순환은 호리병과도 같아서 

 

 

삶의 순환은 마치 호리병과도 같다. 넓어졌다가 좁아지고 그러다가 다시 넓어지는 병 말이다. 호리병의 허리가 바로 입춘의 때이자 해탈의 장소이며 동시에 죽음의 장소인 셈이다.

 

가령 어떤 이가 태어나길 운명 순환에 있어 여름 무렵에 태어났다면 아직 60년 순환에 있어 존재하는 입춘, 즉 죽음을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서른 살 즈음에 그곳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각성한 자로서 입춘을 겪어본 자만이 또 다시 너른 별천지를 볼 것이요 열락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입춘 이전에 겪었던 빛과 전혀 물리적으로 다를 바가 없겠지만 그 빛은 다른 빛이란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1955년생이고 1997년에 입춘 즉 죽음의 문을 통과했다. 42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2007년이 되자 강렬한 빛을 느겼고 이에 2014년 그간에 연구해온 운명 순환에 관해 정립한 자연순환운명학이란 것이 세상에 등장했다고 글에 썼다.

 

 

영원한 비밀일 수도 있기에 

 

 

나날의 일상은 그냥 나날의 일상이다. 하지만 저마다 그 일상은 전혀 다른 형태와 느낌으로 존재한다. 삶과 운명의 지극한 奧秘(오비)이다. 우리 모두 태어난 이상 죽는다, 나 호호당은 이를 細胞(세포)적 삶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삶이 끝나는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무릉도원 안의 별천지처럼 전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이 궁금증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벚꽃은 거의 다 졌는데 아파트 놀이터 그늘에 핀 이 놈은 뭘까? 분명 벚꽃은 아니고 혹시 복숭아 꽃인 걸까? 이 종류들이 워낙 많아서 잘 모르겠다. 분홍빛이 잘도 고와서 한 장 찰칵! 꽃은 무더기 흐드러지게 피는 맛도 좋지만 이렇게 좀 짜게 뽐을 내면서 피는 게 더 제 맛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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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은 산중에만 있지가 않아서 

 

 

道人(도인) 또는 道士(도사)라 할 것 같으면 깊고 높은 산이나 계곡에서 명상에 몰두하면서 心身(심신)을 수련함으로써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를 말한다. 일반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진짜 도인은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俗世(속세) 또는 市中(시중)에 있다.

 

오랜 연구 끝에 運命(운명)이란 것이 실은 自然(자연) 그 자체란 사실을 알게 된 나 호호당은 운명의 법칙을 꿰뚫어 알고 있다. 자연의 순환, 사계절의 순환, 24절기의 순환이 바로 운명 순환의 법칙인 까닭이다.

 

 

자연의 길을 따라서 걷는 이가 실은 도인이기에 

 

 

자연의 순환을 자연이 걸어가는 길 즉 道(도)라 하고 운명이 걸어가는 길 또한 삶의 道(도)라 하겠으니 그런 면에서 나 호호당이 발견한 가장 진정한 도사 또는 도인은 세계적인 부호인 빌 게이츠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꾸준히 지켜봐 오면서 어쩜 저럴 수가? 하면서 진심으로 탄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야말로 운명의 법칙, 즉 자연의 道(도)를 어김없이 따라서 삶을 걸어가고 있다.

 

전에도 소개한 적 있지만 워낙 龜鑑(귀감)이 되기에 다시 한 번 소개해본다.

 

빌 게이츠는 1955년 10월 28일 밤 10시에 태어났다. 따라서 乙未(을미)년 丙戌(병술)월 壬戌(임술)일 辛亥(신해)시이다. 척 보기에도 부자가 될 팔자임을 알 수 있다.

 

운세를 보면 입춘 바닥은 태어나기 3년 전인 1952년과 다시 60년이 흐른 2012년 壬辰(임진)이 된다. 반대로 입추는 1982 壬戌(임술)년이었다.

 

 

나설 때 나서고 빠질 때 빠지니 

 

 

삶에 있어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아감과 물러섬, 즉 進退(진퇴)라 하겠다.

 

빌 게이츠에게 있어 나아감의 시기는 60년 순환에 있어 夏至(하지)의 때인 1975 乙卯(을묘)년이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바로 그 197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다. 나아감의 때가 정확했으니 성공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물러섬의 시기는 冬至(동지)의 때인데 2005 乙酉(을유)년이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바로 그 해 은퇴를 했다. 때가 맞았으니 편안하게 그 이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저토록 진퇴가 정확할까 싶어서 오래 전부터 탄복해왔다. 이 세상에 수많은 거물들과 유명 인사들,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크게 성공을 한 뒤 물러설 때를 놓치고 미련을 갖다가 처참하게 몰락한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자료를 살펴볼 것도 없이 그냥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사례만도 무려 幾百(기백)이다.

 

 

채운 잔을 비울 줄도 아는 빌 게이츠

 

 

그런데 그는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운세 순환이 한 해로 치면 10월 하순에 해당되는 霜降(상강)의 운, 수확의 시기에 “윈도우95”를 통해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던 무렵 그는 1900년대 초반의 재벌인 록펠러와 카네기의 과거 행적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엄청난 재부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워렌 버핏의 영향력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2007년으로서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는 그간에 280억 달러 이상을 이미 기부한 상태였으며 이로서 미국 역사상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의 순위로는 2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부는 그들 재산의 95%를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했는데 이 또한 기가 막힐 정도로 운의 흐름과 부합된다.

 

왜냐면 2007년은 빌 게이츠의 운세 흐름에 있어 양력 1월 초의 小寒(소한)과도 같았다. 이를 나 호호당은 財富(재부)가 없어지기 시작한다고 해서 ‘消滅(소멸)의 財運’(재운)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이런 운에 사업에 실패하면서 돈이 없어지지만 빌 게이츠의 경우 더 이상 돈이 필요 없기에 자선사업에 쓰겠다고 것이었다. (돈을 날리거나 돈을 희사하거나 어쨌든 가진 돈과 재부를 없앤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아시다시피 작년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을 때 빌 게이츠가 갑자기 주목을 받았던 것은 그가 기부한 돈으로 운영되는 여러 재단 중에 하나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사망하면 세 명의 자녀들에게 1인당 1천만 달러씩만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이는 자신이 가진 재산의 0.018%에 불과하다고 한다. 자녀들이 돈의 무게에 눌려 삶을 망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와야 할 때 돌아오겠다고 하니 거 참! 

 

 

그런 그가 내년 2022년 壬寅(임인)년 운세 순환에 있어 淸明(청명)에 다시 사회로 복귀해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그 또한 너무나도 정확하다. 청명이면 새롭게 태어나는 때이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의 지금까지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자연의 순환, 계절의 순환, 24절기의 순환에 거의 정확하게 맞추어 살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순환은 자연의 길, 즉 자연의 道(도)이다.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고 축적된 재부 또한 털어버릴 때 털어내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오야 할 때 돌아오겠다고 하니 行動擧止(행동거지)가 자연의 흐름과 전혀 어긋남이 없는 빌 게이츠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나 호호당이 발견한 진정한 道人(도인)이라 여긴다. 그래서 탄복한다.

 

빌 게이츠는 미국 상류층 출신이다. 하지만 운세는 어김이 없어서 태어나기 3년 전인 1952년이 입춘 바닥이었고 그 바람에 어려선 몸집이 작아서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싹이 틀 때 싹이 텄기에 

 

 

이에 내성적인 성향으로 성장하던 그는 13세, 1968년에 최초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7년 뒤인 夏至(하지)의 운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고 그로서 IT 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1967년이 立夏(입하)의 운이었는데 그 직후 이미 자신의 길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누구든 60년 순환에 있어 夏至(하지)의 운에 그 무엇이든 시작하면 그 길에서 성공한다. 이는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렇게 말하면 가령 누군가 그렇다면 나 역시 하지의 운에 재벌이 되겠다고 장사를 시작하면 재벌이 됩니까? 하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한 나 호호당의 대답은 “물론이지요” 이다. (그런데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런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될 법한 것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법이니 말이다.)

 

사람의 그릇은 타고난 命(명) 즉 유전적인 소양에 의해 결정이 된다. 하지만 運(운)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공정하다.

 

 

부럽기만 한 미국 자본주의의 전통 

 

 

다만 빌 게이츠의 경우 타고난 명도 좋을 뿐 아니라 돈을 많이 번 뒤에 더더욱 훌륭하다. 빌 게이츠는 앞선 거물들의 좋은 사례를 따라서 모범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치열하고 각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록펠러나 카네기와 같이 좋은 귀감 또는 모델들이 있다는 점 역시 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거액의 재산을 모아서 그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돈을 다시 더욱 값지게 세상 속으로 돌려주는 아량을 가진 거물들이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부럽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귀족은 존재한다. 크게 성공하고 성취한 다음 그 부를 다시 돌려주면 사회는 그를 귀족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 자본주의는 너무나도 초라하다. 부자는 있어도 아직 제대로 된 귀족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하지만 우리 역시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청명절이라 청명하니 

 

 

오늘은 상담이 없고 특별한 약속도 없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실에 누워 창밖을 보니 양재천변에 내린 벚꽃 이파리들이 14층 아파트 높이까지 날아올라 반짝이고 있다. 처음엔 민들레 홀씨인 줄 알았더니 가볍고 작은 꽃잎들이 상승기류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다. 어제는 흐리더니 오늘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맑고 밝다, 淸明(청명)하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바로 청명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