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화가 무섭지만

 

 

올 여름 너무 덥다, 기억하기로 가장 더운 여름인 것 같다. 밤 12시에도 29도, 정말이지 식을 줄 모른다. 그런 판국에 거 봐라, 더 더워질 거다! 하면서 아주 신이 난 기상전문가들도 많다. 정말 짜증난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저 사람들 나라에서 돈 좀 주세요, 그러면 날씨가 조금 식어들지 않을까요?

 

온난화가 되어가는 거, 또 설령 백두산이 2025년에 터진다 해도 그건 우리가 뭐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돈이다. 돈이야말로 畏敬(외경)의 대상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떠받드는 존재가 바로 돈인 것이다.

 

 

돈이야말로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란 사실

 

 

돈, 뭐 특별히 큰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대로 기본을 유지해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닌 까닭이다. (물론 어느 수준과 정도가 “기본”이 되는지 이게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자연순환운명학에 기초해서 상담도 하고 또 강좌를 하다 보니 실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런 가운데 각자의 살아가는 얘기도 무수히 접하게 된다.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하던 이가 서울 외곽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며 지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최저임금 200만원을 받으면서 그게 진정한 자신의 몸값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또 어떤 50대 가장은 권고사직을 받고 퇴직금을 받아 치킨집을 열었는데 한 달에 무려 400만원이나 벌고 있으니 성공한 셈인데 문제는 아침 8시에 나가서 밤 10시까지 14시간을 가게에서 보낸다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 둬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친구도 있다.

 

미술 전공 후 지방대학 미대 시간 강사를 뛰다가 도저히 돈이 어려워서 라이더로 전향했는데 한동안 벌이가 괜찮았다, 그런데 사고가 나서 꽤 장시간 치료와 재활을 받고 지금은 절뚝이는 다리로 모텔에서 밤 시간 일을 봐주고 있는 60대 초반의 인생후배,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냐고 얼마 전 내게 전화로 투정을 부렸다. 살아야지, 이 사람아!

 

 

압력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50대 가장들

 

 

가만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압력을 받고 또 견뎌야 하는 중심 세대는 50대가 아닌가 싶다.

 

상당수가 권고사직 아니면 정리해고로 밀려나오고 있고 여전히 자녀 학비 등등 부양책임도 크다. 대출 끼고 산 아파트 한 채가 있긴 하지만 그걸 건들 순 없고 퇴직금 얼마 가지고 편의점이나 치킨집 같은 사업을 해보자니 자신이 없고 다른 데 찾아본 들 써주는 곳도 없다. 보험 영업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6개월 안에 그만 둔다.

 

약간 여유가 있다 보면 일단 도서관 같은 데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상황을 살피기도 하지만 그래본들 결국 별 대책이 없다. 알바로 시작해서 서서히 경험의 폭을 넓히는 사람들도 있고 중소기업 들어가서 생전 해보지 않은 영업이란 걸 좀 하다가 충격을 받고 그만 두는 이도 많이 본다.

 

또 어떤 이는 가정에서 아내나 자녀들에게 무시당하는 바람에 멘붕이 된 이도 있다. 당신이 그렇게 무능한 줄 몰랐어! 하는 아내의 매정한 말에 순간 殺氣(살기)까지 느꼈지만 그래도 참고 그날 밤으로 간단히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는 이가 있다. 정말 잘 참았다고 격려를 해주었지만 그 가정은 결국 해체되었을 것이다.

 

그 아내가 했다는 그 말, 무능하다는 말 정말 심했다. 이전에 그 친구가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에 있을 때 받던 급여는 사실상 그 직장이 더 얹어준 보너스 같은 것이고 그런 보호막이나 가림막 없이 그냥 날 몸뚱이, 그나마 건강해야만 받을 수 있는 능력급이 바로 최저임금이다.

 

 

노동의 가격

 

 

최저시급, 내년이면 시간당 9,860원이 되는데 이게 그냥 보통 사람의 몸값이다. 월급여로 환산하면 206만원,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특별한 연고나 능력이 없이 그냥 열심히 일해서 받을 수 있는 돈이다. 현재 집을 나온 그 친구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데 오히려 금전적으론 여유가 있다고 한다, 가정을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자녀들은 어떤지 아내와는 이혼을 했는지 등등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골치 아픈 얘기들, 나 호호당 또한 전혀 알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간다.

 

이처럼 우리 사회 50 대 가장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그들, 해마다 100 만명씩이나 태어나서 가장 숫자가 많은 그들인데 남녀 성별을 떠나서 그들이 받고 있는 압력, 금전적 압력은 실로 엄청 나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세대들은 어떨까? 살펴보면 간단하다. 빈곤층이 되었거나 때론 부양책임을 벗어나서 그런대로 편안하다.

 

 

아직은 낙관적인 40대 세대

 

 

그런가 하면 우리 사회의 40대를 보면 굉장히 소비성향이 높고 럭셔리한 경향이 보인다. 물론 잘 풀린 케이스일 경우 그렇다. 급여도 세게 받고 있고 이직도 흔하며 차도 외제차, 해외여행도 많이 다닌다.

 

그런데 저축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저축을 하느니 주식투자를 한다, 공격적인 성향이 강해 보인다. 이른바 “경제적 자유”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용감하고 과감한 이 세대들이 아마도 최근 2차 전지 주식들의 열풍을 이끌어낸 주도세력들일 것이다.

 

 

재테크, 공부만으론 어렵다는 얘기

 

 

주식 또는 증시 얘기가 나왔으니 조금 해본다.

 

노후가 불투명한 세상이 되다 보니 사람들이 중시나 재테크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에는 증시를 좀 더 거시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해보려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

 

공부 좀 해가면서 유튜브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의 해설이라든가 미국 경제와 연준의 움직임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미 국채 10년물 가격의 동향이라든가 장단기 금리 갭, 소비자 물가지수(CPI) 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이 대목에서 나 호호당이 해주려는 말이 하나 있다. 그런 방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가는 것은 물론 좋다. 그 결과 유튜브에 나와서 이런저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말뜻이나 미국 쪽에서 흘러나오는 보고서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지식 또는 상식을 가지고 증시의 향배를 예측하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드린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증시의 폭락이나 폭등을 사전에 제대로 예측한 이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의 우려나 기대가 나중에 뛰어난 예측을 했다는 식으로 포장될 뿐이다.

 

 

미국 경제가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하긴 하네

 

 

최근 흥미로운 논쟁이 하나 있다. 누구는 결국 미국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고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거란 주장을 하고 있고 또 누구는 금리 긴축으로 인해 연말이면 침체가 올 것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으며 또 어떤 이는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살벌하게 오를 것이란 주장도 내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장기채 국채금리가 오랫동안 높게 유지되긴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살 때란 주장도 있다.

 

모두 흥미로운 얘기들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나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지 그를 넘어서 어느 쪽을 택할 것 같으면 이미 그 순간 리스크를 안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학과 글로벌 정치 경제에 관한 상식은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그게 주식투자와 직접적인 관련은 크지 않다는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얘기이다.

 

 

오랜만에 글을 올리면서 

 

 

7월 14일에 글을 올리고 나서 거의 3주 만에 글을 올린다. 기간이 너무 길었다. 글을 올리지 못한 데에는 여러 변명이 있겠으나 역시 날이 너무 더워서 그렇다고 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다.

 

날이 선선해지면 글도 자주 올릴 것을 약속하면서 이만 마친다. 오늘 글은 다소 무겁지만 그래도 그간의 안부 인사로 받아주셨으면 한다.

멋진 글을 썼던 "밀란 쿤데라"가 죽었다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죽었다. 젊은 날 그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실로 대단했다. 우와!-어쩌면 글을 이렇게 멋지고 ‘뽀대’나게 쓸 수가 있지? 했다.

 

먼저 생년월일을 살펴본다. 1929년 4월 1일, 생시는 미상. 己巳(기사)년 丁卯(정묘)월 丙子(병자)일이다. 생시를 모르니 그간의 프로필을 감안하여 입추를 추정해보면 1926년과 1986년의 丙寅(병인)년이 된다. 왜냐면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앞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1984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란 게 과연

 

 

소설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거 가볍게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무겁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동시에 가볍든 무겁든 다 중요하지가 않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삶이란 한 번에 그치는 것이고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가볍게 살다보면 추를 내리지 못 하고 깃털처럼 공중으로 날아갈 정도로 의미가 없기도 할 것이고 무겁게 사는 것 또한 너무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고 묻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볍게 살고 싶어도 삶은 절로 무거워지고 무겁게 살고 싶어도 삶은 절로 가벼워진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소설은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니체는 삶이 순환의 연속이란 사상을 갖고 있으니 이를 니체는 “영겁회귀”라고 불렀다. 동일한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얘기인데 사실 이는 불교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미래라든가 과거는 개념일 뿐 그저 주어진 것은 바로 “이 순간이 전부”라는 생각과 통하다.

 

우리 앞에 주어진 매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 삶의 전부라는 주장이다. 그렇기에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 가볍게 살든 무겁게 살든 두 가지 태도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얘기한다. 매 순간 가볍다 싶으면 좀 무겁게 하고 무겁다 싶으면 좀 가볍게 살아라, 하면서 삶의 기교를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

 

쿤데라는 소설 속의 또 다른 여주인공을 통해 어떤 주의(-ism)에 대한 집착은 ‘키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삶의 태도를 이상적이고 절대적이라 간주하려는 의지야말로 엉터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니체 철학이나 쿤데라의 소설 속 내용 그리고 불교철학을 잘못 이해하면 허무주의가 된다. 하지만 쿤데라는 어떤 주의(-ism)란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집요한 갈망

 

 

이 대목에서 나 호호당이 받아들이고 있는 般若心經(반야심경)의 내용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고자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 내가 있다, 이런 생각이 바로 고통의 원천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통일체인데 사실 그건 어떤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일시적인 결합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조건이 변경되거나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생로병사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나라고 하는 존재는 결국 없어지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런 일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어떤 힘든 苦厄(고액)도 잠시의 것이고 항구불변의 것이 아니다.

 

조건을 떠나 진짜의 모습, 반야심경의 표현으로 諸法(제법)의 空相(공상)은 태어나서 늙어죽는 것도 아니고 늙어죽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원천적으로 그런 것은 없다, 바로 이게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라고 것이 있다는 왜곡된 생각, 반야심경의 말로는 顚倒(전도)된 夢想(몽상)을 버리게 되면 그로서 마침내 涅槃(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이거 허무주의 아닌가? 싶겠지만 그 허무를 감지하는 ‘나’ 자체가 일시적인 설정이란 얘기인 것이다. 自我(자아)란 것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자아가 느끼는 허무와 슬픔, 고통, 행복도 모두 잠시의 일, 꿈속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싯다르타의 가르침이었다.

 

그렇다고 自我(자아)를 원천 부정하지도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니 그렇다. 하지만 그 자아라는 게 어디까지나 조건이 지워진 限時(한시)적인 것이니 그것 또한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게 싯다르타의 가르침이다. 줄여 말하면 存在(존재)에 구애받지 말라는 얘기이다.

 

존재하고픈 욕망, 이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이를 싯다르타는 無名(무명), 즉 밝게 살피지 못함에서 생겨나는 집착과 갈애라고 말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또한 결국은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는 심술궂은 쿤데라 

 

 

쿤데라는 묻고 있다. 어차피 한 번의 삶인데 의미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냐고.

 

다만 재미난 점은 사람을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어떤 영고성쇠를 거치는 週期(주기) 즉 사이클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나 호호당이 말하는 자연순환이고 운세의 변화이다.

 

 

우리 모두 번창하고 싶고 존재하고 싶다

 

 

이와 관련해서 얘기할 것이 있으니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영화롭고 번창하길 갈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역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픈 욕망의 확장 버전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운세에 대해 궁금해 한다. 지금 힘들다 싶으면 앞으론 번창하기를 기대하고 지금 그런대로 좋다면 앞으로도 쭉 이 상태로 이어지거나 또는 더 크게 번창할 수 있기를 갈구한다. 이 역시 너무나도 자연스런 갈망이다. 이 모든 게 존재에 대한 욕구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바로 이 자연스런 욕망이야말로 無明(무명)에서 오는 집착과 갈애라고 지적하면서 존재에 대한 욕망에 구애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 호호당은 자연스런 욕망,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었고 만들어져 있기에 그를 틀렸다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존재하면서 번창하길 바라는 욕구는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싯다르타야말로 헛된 가르침을 남겼던 것일까? 하고 곰곰이 따져 묻는다면 그 또한 절대 틀리지 않다.

 

너 존재해본들 그거 얼마 되지도 않는 거야, 사실 우리가 겪는 것은 눈앞의 찰나 찰나에 불과한 것인데 긴 스토리룰 구상하거나 멋진 플랜을 세워본 들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거든, 그러니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할 거야, 하고 엄청 쿨(cool)하게 지적해오고 있는 싯다르타이다. 결국 涅槃(열반)이란 것은 존재 그리고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집착으로부터의 탈피라 하겠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존재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다. 집착과 갈애를 많이 가지다보면 삶이 무거울 것이고 그로부터 벗어나자니 그 또한 너무 허무해지고 맥이 빠져서 참을 수 없는 우리의 삶이라 얘기한다. 대략난감한 우리의 삶이다.

 

 

세속의 삶 그리고 본질의 삶

 

 

세속의 삶, 존재하고 싶고 존재를 확장하고 싶은 삶을 나 호호당은 世俗(세속)의 삶이라 부른다. 세속의 삶에선 운세가 중요하다, 저는 언제쯤이면 꽃을 피울까요? 저는 언제쯤이면 이 곤궁에서 벗어날까요? 모두 사뭇 중차대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살다보면 알게 된다, 삶이 그다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건강한 몸도 한 때의 일이고 부귀영화도 잠시 지나쳐가는 것임을 우리는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그저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 눈앞을 스쳐가는 찰나의 시간들이 전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기에는 순서가 없다, 당연히 이것의 逆(역)도 가능하다. 삶과 세상을 다 버렸다가도 또 다시 맹렬하게 세상 속으로 들어와 욕심을 부려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삶이기에 그 무엇을 하든 욕구하든 다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 호호당은 이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하찮은 삶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축제처럼 즐겨야 한다는 말 같기도 하고 삶이란 축제를 즐겨보고자 하지만 결국 무의미하다는 말 같기도 하구나.’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뒤 자연스럽게 정현종 시인의 詩(시)가 떠올랐다. “고통의 축제”란 시집 안에 실린 “기억제”란 시의 마지막 구절들이 떠올랐다.

 

쓰레기는 가장 낮은 데서 취해 있고/ 별들은 천공에서 취해 있으며/ 그대는 중간의 다리 위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음을.

 

 

비밀이란 것은 알고나면 시시해지는 법

 

 

나 호호당은 오랜 연구 끝에 運(운)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나 호호당에겐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비밀인 때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비밀만큼 섹시한 것이 다시 있으랴!

 

장마야 이제 고마해라, 마이 뿌렸다 아이가!

금의환향의 이중근 회장

 

 

얼마 전 부영그룹의 이중근 회장이 고향 순천 사람들에게 무려 1400억이란 거액을 나누어주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켜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좋은 일이다.

 

이 회장을 2016년 무렵에 만나서 운세 상담을 해준 적이 있다. 을지로 롯데호텔 안의 일식집에서였다. 만나서 생년월일시를 듣고 운세를 판단해보니 2009 己丑(기축)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그러니 향후 몇 년간 고생 좀 하겠구나 싶었다.

 

앞으로 좀 어떻겠오, 내 운세가? 하고 물어보시는데 약간 난처해진 나는 그간 일도 많이 하셨는데 이젠 좀 쉬시지요, 하고 애매하게 답을 했다.

 

나 호호당이 성공한 기업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운세 상담보다도 그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낀다.

 

자신의 성공 스토리에 대해 흥미를 갖고 들어주고 또 질문도 해가다 보면 당사자 역시 신이 나는 법, 이 회장님은 내 질문에 잠시 과거로 되돌아가서 자랑스러웠던 과거 일들과 성공 사례들을 들려주었다. 부영 아파트가 촌스럽다고 악평이 많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대목, 스스로를 난 촌놈이야 그러면 뭐 어때서? 하는 대목에선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분의 무공담을 들으면서 속으로 이 분은 나름 剛斷(강단)도 있고 俠氣(협기)도 있는 분이네 싶었다. 그랬으니 집을 짓는 건설업, 나름 험한 데가 있는 업종에서 무너지지 않고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싶었다.

 

자리를 마치고 일어나면서 나는 이미 큰 功(공)을 이루었으니 앞으론 부디 조심하시고 조금 쉬어간다는 마음으로 일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건강도 신경 쓰시고요, 하는 당부의 말을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 얼마 안 가서 구속되는 일이 생겼고 2021년이 되어서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나름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 기업가로서의 이 회장님

 

 

만나본 이후 나 호호당은 이중근 회장은 사업적으로 비판도 많이 받았고 그 바람에 獄苦(옥고)도 치르긴 했으나 훌륭한 대목이 있는 기업인으로 평가해왔다. 무엇보다도 학자들을 동원해서 일제36년의 역사, 그리고 해방 이후의 역사 또 6.25 전쟁에 대한 소중한 1차 사료들을 수집 정리토록 해서 방대한 책으로 엮어냈다는 점이다.

 

사실 그 분을 만나게 된 동기도 그 책들을 한 질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식사 자리에서 좋은 책을 엮으셨으니 얻었으면 한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하니 그 자리에서 즉각 비서를 통해 책 한 질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고향 사람들에게 거액을 나누어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역시 이 분은 멋이 있는 분이네 하고 찬탄을 했다. 아울러 이제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계신다는 판단도 들었다. 올해 나이가 82세이니 이제 首丘初心(수구초심), 여우가 죽을 때가 되면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니 그런 심정이 아닐까 싶다.

 

그간 상담일을 해오면서 적지 않은 기업가와 부자들을 만나 보았다. 그 중에는 이른바 재벌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고 또 상당한 규모의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어받은 부자들도 많다.

 

 

창업주와 그 2-3세의 차이점 

 

 

그들을 만나보면서 느낀 대표적인 인상은 바닥에서 일어나서 기업을 키워낸 창업주와 이어받은 사람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창업주들은 대부분 돈에 대해 어떤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겸손한 면모와 내적 자신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을 치다보니 운 좋게 성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 오는 겸손함, 그러면서도 장차 힘든 상황이 닥칠 경우 어떻게든 잘 대응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반면 이어받은 이들, 흔히 2세 그리고 특히 3세의 경우 그저 운이 좋기를 바랄 뿐 겸손이나 자신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불안감도 엿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으레 이슬람의 역사가인 “이븐 할둔”이 쓴 “역사서설”, 아랍어로 “무깟디마” 속의 글들이 상기되곤 했다.

 

 

田野(전야) 문명과 都會(도회) 문명의 차이

 

 

이븐 할둔은 문명을 田野(전야)의 문명과 都會(도회)의 문명으로 구분하면서 그것이 되풀이된다고 말하고 있다. 전야 문명이란 간단히 말해서 척박한 들판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문명이고 도회문명이란 문자 그대로 오늘날 대도시의 그것이다.

 

척박한 들판에서 일어나고 강해져서 세력을 이룬 사람들은 오늘날의 경우 창업주와 비슷한 데가 있고 상속을 받은 2세나 3세는 도회문명의 그것과 유사하다.

 

창업주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와 기반을 이어갈 2세나 자녀들의 태도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한마디로 돈 귀한 줄 모르고 열심히 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3세의 경우엔 대단히 귀여워하고 사랑하면서도 그들의 장래에 대해선 우려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고생을 안 해봤잖아요, 부모 잘 만났으니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때가 많다.

 

최근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대하노라면 우리나라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 호호당이나 그 이전 세대들은 들판의 감각이 있었다면 최근 젊은이들은 그런 감각이 없다. 사치하게 살 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 더 크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을 비판하고픈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소비와 사치가 기본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니 그렇다.

 

앞에서 소개한 이중근 회장도 자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사업이 얼마나 어렵고 때론 돈 한 푼이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해 모른다면서 내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에 나는 그냥 웃었다. ‘그거야 다 그런 거죠 뭘!’ 하고 속으로 답했다.

 

缺乏(결핍)이 常數(상수)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과 나름 풍요가 상수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 대한민국은 그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기에 더 이상 田野(전야)적 감각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그 속의 젊은 세대에게 들판의 감각을 요구하거나 주입시키긴 실로 어렵다.

 

이븐 할둔 말하길 도회문명은 때가 되면 어차피 기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결속감도 약하고 시련을 통해 단련되지 않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나 호호당이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근거 있는 노파심

 

 

현재 우리 경제의 기반은 척박한 환경 즉 田野(전야) 속의 사람들이 일구었는데 지금의 도회적 환경 속의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이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다.

 

물론 아직은 1세의 태도를 어느 정도 흡수한 2세들이 경영하고 있기에 여전히 탄력이 살아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주역이 될 때가 되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의구심이다. 이런 생각은 나이가 든 나 호호당의 老婆心(노파심)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우려만도 아닐 것이다.

 

우리 경제는 여전히 수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체 내부의 시장만으론 결코 현 수준의 경제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 근원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일본이 약해졌네, 도무지 희망이 없네, 등등 말이 많지만 일본의 현 기술력을 감안할 때 자체 내수 시장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분히 유지가 가능하다. 수출입 비중이 우리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조금 더 가난해진다고 해서 그런대로 굴러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어렵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1세대들은 산업을 일구었고 2세대들은 신기술의 습득과 발전 게다가 특히 문화 산업 방면, 영화라든가 공연 예술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한류 붐”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3세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 지금 한창 주역으로 발돋움해가고 있는 그들이 또 다른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분명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있다

 

 

내년 2024년이 우리 국운의 새로운 立春(입춘) 바닥이자 시작이다. 그러니 전해 생각하지 못했던 도전과 과제들이 우리 앞길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과연 그게 어떤 문제일까? 를 놓고 무수히 생각해보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60년 국운을 맞이하여 金蟬脫殼(금선탈각) 즉 금빛 매미가 허물을 벗고 새롭게 등장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서초 동굴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교보타워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나오기로 했다. 코로나 이후 많은 것이 변하더니 마침내 작업실을 그만 두는 일로 이어졌다.

 

오스피텔은 일렬로 방이 두 개 있는데 현관쪽의 방과 창이 있는 방 사이에 주방 세트와 화장실이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어 마치 가운데가 오목한 호리병처럼 생겼다. 그간 나는 이곳을 “서초 동굴”이라 불러왔다.

 

왜 동굴이라 했는가? 하면 어느 날 작업실이야말로 내게 있어 도교에서 神仙(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洞天福地(동천복지)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설의 무릉도원 이야기를 읽어보면 계곡 사이로 길이 나 있어 무심결에 들어갔는데 점점 좁아져서 두려웠지만 인내하고 끝까지 들어갔더니 갑자기 앞이 툭-하고 트이면서 별천지의 낙원이 있더라는 얘기에서 유래한 것이 洞天(동천)이다.

 

2005년 지금의 서초 동굴로 들어갔다. 나 호호당은 1997년이 立春(입춘) 바닥이라 당시 운 흐름은 60년 순환에 있어 많은 것들이 참담하고 초라한 春分(춘분)의 때였다. 건강을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힘들던 시절이었다.

 

운명상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연구였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전래의 중국 명리학은 많은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있고 운세 예측도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서초 동굴에서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운명학을 원점에서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미리 말하면 바로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이 지금 나 호호당이 강의하고 실제 적용하고 있는 60년 순환을 기초로 하는 자연순환운명학이다.)

 

2000년 초부터 구글이나 위키피디어가 보급되었기에 연구해볼 데이터는 무궁무진했다. 또 그를 바탕으로 상담객의 사연을 들어가면서 추리를 했고 검증을 했다.

 

2007년 초 급기야 60년 순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2012년경에는 그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에 조금 더 검증을 거듭하면서 이론체계를 세웠다. 그리하여 2014년 봄 “자연순환운명학”이란 새로운 운명의 과학이 탄생했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은 바로 서초 동굴 안에서 창안되었다.

 

 

서초 동굴 안에서 상처를 씻어내고 또 많은 것을 얻었으니 

 

 

2005년 서초 동굴 안으로 기어들 갈 적에는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참으로 그 속은 별천지였다. 내실의 창밖 밑에 목련이 몇 그루 있는데 봄이면 그야말로 그 優美(우미)하고 밝은 상아빛의 꽃망울을 해마다 어김없이 터뜨려주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보내면서 목련은 진정한 내 친구가 되어 주었다.

 

겨울이 되어 목련 잎사귀가 다 시들어 떨어지고 일부는 가지에서 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면서 말을 건네곤 했다. 자네 모습이 마치 나 호호당과 같구나, 오피스텔 건물이 오래 되었기에 혹시라도 재건축을 하는 날엔 자네, 목련도 싹둑하고 베어지겠지, 자네들을 남겨 놓을 사람들이 아니잖아, 그러니 부디 그날이 늦게 오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잖아, 그래 내가 기도할께! 우린 친구잖아.

 

예전에 반포 주공 3단지는 봄이면 벚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최신의 타워형 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그 무수히 많은 묵은 벚나무들이 몰살당했다. 항거할 힘이 없었기에 그 살육의 현장에서 나는 조용히 나무들의 怨靈(원령)을 달래고 좋은 데 가서 다시 태어나라고 빌어준 기억이 난다.

 

서초 동굴은 참으로 내게 있어 세파의 고달픔으로부터 나 호호당을 지켜준 동천복지의 別(별)세상이었다.

 

그 안에서 수묵화에 빠져 지냈고 또 수채화를 그렸다. 밥벌이도 했지만 찾아오는 사람 중에 인연이 닿아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 안에서 자연순환운명학을 창안했고 언어학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근처에 강남교보문고가 있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책을 보기도 하고 사서 읽기도 했다. 강남교보문고는 사실상 나 호호당의 서재였다. 작업실은 이미 천 권 넘는 책으로 들어차 있었기에 해마다 백여 권의 책을 샀고 늘 그 정도의 책을 해마다 폐기했다.

 

 

때가 되니 절로 계기가 생겨나고 

 

 

2005년 8월 12일에 들어갔으니 이제 18년이 되어 떠난다. 이 세상은 알게 모르게 15년, 즉 60년 사계절의 한 계절이 지나면 변화의 계기가 생겨나서 다시 2.5년, 즉 시작으로부터 17.5년이 흐르면 변화가 뚜렷해진다.

 

변화의 계기는 두 가지였다. 돌이켜보면 그렇다. 하나는 2020년 초 코로나19의 대유행이었다. 그 바람에 상담 일이 대폭 줄었다. 또 하나는 2020년 5월 동작동에서 지금 살고 있는 우면동으로 이사를 한 일이 그것이다. 상담이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작업실에 나가는 일이 적어졌고 백신을 맞은 이후 이석증이 생겨서 택시를 타야 했는데 한동안 택시 대란으로 작업실 나가는 일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사로 인해 공간적 여유가 생기자 집안에 畵室(화실)을 마련하고 컴퓨터를 놓고 또 서가를 놓고 책도 많이 가져오다 보니 더더욱 작업실 나갈 일이 없어졌다. 몸이 아니라 영혼의 거주지가 우면동 집안으로 들어왔음을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작업실에 그림 도구가 있고 책이 있었으니 내 영혼의 거주지는 서초 동굴이었는데 그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근슬쩍 영혼의 이사를 한 셈이었다.

 

올 초부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작업실을 뺄까 말까. 작업실이 있어야 될 이유는 상담 일 그리고 작업실에 천여 권의 책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책들을 집으로 들여놓을 공간은 절대부족하다.

 

그런데 상담은 웹켐으로 해도 되고 영상통화로 해도 가능하다. 굳이 작업실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 책이었다. 몇 달을 두고 숙고를 거듭했다.

 

 

책을 버리겠다는 결심이 가장 어려웠지만 

 

 

작업실에 있는 천여 권의 책 중에 절반 이상은 절판되었거나 또는 예전에 중국이나 타이완을 드나들 때 입수한 책이다. 영문 원서도 많다. 하지만 사실상 책 보관용 공간으로 한 달에 임대료 관리비 등등 포함해서 백만 원 이상을 쓴다는 게 아무래도 이치에 맞질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전 결단을 내렸다. 귀한 책이고 다시 구하기도 어렵지만 대거 폐기하자는 생각. 어차피 언젠가는 저 책들과 이별해야 하지 않는가!

 

최근 들어 나이가 들고 건강에도 이상이 좀 생기다 보니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곧 68세가 되니 장차 길어야 20년을 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나 호호당은 생각이 많다.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 호호당의 경우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링거로 영양분을 공급받다가 마감하는 죽음을 단연코 거부한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穀氣(곡기)를 끊어서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작정이다. (그럴 경우 행정처리가 좀 불편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어차피 책들과도 이별을 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전혀 생각이 없었으나 이젠 삶을 마감할 준비도 해놓아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구하기 힘든 책이지만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즐겨볼 책들도 아니다. 그러니 폐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넓은 세상과 시간에 관한 지식의 세계를 탐닉할 이유도 그다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정리를 하자 더 이상 작업실을 유지할 이유도 사실상 없다.

 

 

道士下山(도사하산)

 

 

작업실에서 나오게 되면 그 전날 나름의 祭(제)를 올려야지 싶다. 무려 18년, 인생의 거의 1/4 이상의 기간 동안 내 영혼은 서초 동굴에 머물렀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건물과 작업실의 터주 어르신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작별을 고할 생각이다. 그간 고마웠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인사를 드릴 생각이다.

 

60년 순환에 있어 춘분의 때에 들어가 18년, 내년이면 나 호호당의 운세는 한창 뜨거운 大暑(대서)의 운이 된다. 지치고 약해져서 찾아들어간 동굴이었는데 그 동굴은 그간 나를 참으로 알뜰하게 돌봐주었으니 그야말로 기대 밖이었다. 잘난 맛에 엄벙덤벙 대충 살다가 다친 상처들, 內傷(내상)도 말끔히 가셨다. 그간에 몸은 조금 늙었으나 정신은 더 없이 건강해졌다.

이제 동굴을 나와 진정으로 下山(하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道士下山(도사하산)이란 제목의 중국 영화가 생각난다. 성장 스토리인데 코믹과 액션을 버무린 철학 영화였다. 이제 洞天(동천)을 나와 산을 내려가야지 싶다. 나이 50에 들어가서 68세가 되어 산을 내려가니 너무 늦은 감도 있지만 아무튼.

 

 

이제 練丹(연단)이 끝났으니 

 

 

이 세상 속에서의 삶, 불교 용어로 器世間(기세간)의 삶은 참으로 경이롭다. 다만 그것들이 너무나도 교묘하게 얽히고설켜 있어서 좀처럼 그 경이로움을 감지하기 어려울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 호호당의 앞날이 가장 어둡다 느꼈을 때 서초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지만 실은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또 훗날 이 때를 되돌아보면 서초 동굴 안에서의 세월이야말로 물질적으로야 힘든 고비가 많았으나 그럼에도 나 호호당의 정신이 가장 광휘를 발하던 시절로 다시 한 번 기억될 것 같다. 그때야말로 전성기였다고 말이다. 나 호호당은 서초 동굴에서 마법의 돌 또는 현자의 돌, 엘릭서(Elixer), 도가의 仙藥(선약)인 丹(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나간다, 그리고 나가자.

 

(알림: 작업실을 나오는 때는 빠르면 7월 중순, 늦어도 8월 중순이 될 것이니 그 전에 상담 약속을 잡으신 분은 그냥 작업실로 오시면 되겠다.)

 

 

하청국가로서의 우리 대한민국

 

 

앞의 글에서 얘기했지만 우리를 포함한 일본 중국 타이완은 제조업 비중이 평균 36.48%로서 EU(유럽연합)의 평균 25.1%보다 훨씬 높다. 게다가 수출입 비중은 우리와 타이완이 극단적으로 높다.

 

이런 수치로 볼 때 우리를 포함한 아시아 4개국은 다소 심하게 얘기하면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 필요한 공산품을 생산해서 먹고 사는 하청국가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례적인 나라는 미국과 독일이다. 미국의 경우 제조업 비중이 낮다 해도 IT 초강국이고 달러를 발행하는 나라란 점, 독일은 IT를 제외한 여타 분야에서 탁월한 기술력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니 미국과 독일은 아예 비교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열심히 공산품을 만들어서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고 그를 통해 벌어들인 외화 또는 달러를 가지고 필요한 물자를 수입해 와서 유지해가고 있는 셈이다.

 

 

현 수준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오히려 무리란 사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하나는 대외의존도가 높아서 외부 동향에 지극히 민감 또는 취약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가성비 경쟁을 해가면서 죽자고 달려온 바람에 우리는 어느덧 過勞(과로) 사회 또는 疲勞(피로)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의 경제 수준을 유지해가는 것 자체가 실은 무리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여기에 더불어 계층 간의 갈등이라든가 저성장 기조의 정착, 미래 노동인구의 감소가 현실이란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수출 대기업들 중에 일부라도 휘청댈 경우 우리 경제 규모는 급격한 감퇴가 불가피할 것이다.

 

 

미중 패권 다툼이란 복병을 만났으니 

 

 

거기에 최근 등장한 이슈가 또 하나 우리에게 큰 짐을 지우고 있다.

 

그간 국력을 키운 중국이 이젠 미국을 상대로 패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당면 목표는 물론 하나의 중국을 이루기 위해 타이완을 품에 넣는 것이지만 그를 넘어 중국이 아시아에서 제대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선 우리 대한민국을 저들의 영향권 안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미중 패권 다툼에 있어 놓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니 그로 인해 우리가 미국과 중국 양측으로부터 받고 있는 압력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중국과 중국 시장은 우리 경제의 성장에 있어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얼마 전부터 오히려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 현지에서 가동 중인 반도체 공장들을 버리고 나와야 할 가능성이 그것이다.

 

 

성장이 멈추자 더욱 치열해진 내부 이익 다툼 

 

 

우리 내부를 보면 저성장이 고착화된 결과 여기저기에서 기존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익단체들과 세력들, 이른바 “분배 동맹”이 활개를 치고 있다. 집단을 형성한 뒤 내부이탈을 막고 결속력을 다지면서 권력을 만들고 다양한 압력 수단과 세(勢) 과시 등을 통해 기득권을 관철하는 세력들이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이다. 대외의존도가 큰 가운데 저성장 인구감소가 기조적으로 굳어졌다는 점. 미중 간의 패권 다툼은 우리에게 커다란 악재가 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내부는 이익을 지키려는 세력들이 정치 사회의 판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경우 경제를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이제 조정기에 접어들었다.

 

 

가까운 미래 그리고 좀 더 먼 미래

 

 

이에 우리의 미래에 대해 가까운 미래와 좀 더 중장기적인 미래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내년 2024년부터 우리는 2084년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60년 순환을 시작한다. 이는 1904년부터 시작되어 2264년까지 360년에 걸쳐 이어지는 대순환의 세 번째 소순환에 해당된다. 국운 제3기가 시작된다는 얘기이다.

 

큰 눈에서 보면 국운 제3기는 비약적인 상승과 전진의 시기가 된다.

 

이 기간 중에 우리는 남북통일을 이룩할 것이며 그를 바탕으로 북만주와 몽골, 러시아 연해주로까지 거침없이 뻗어갈 것이라 본다. 지금과 같이 휴전선 아래의 영역 안에선 더 이상 경제 규모를 확장할 방도가 전혀 없기에 이 흐름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만 얘기한다면 장차 2042년까지 우리는 수많은 난관과 내부 모순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개혁이란 것

 

 

개혁이란 사실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정치인들이 툭 하면 개혁을 외치지만 그건 그냥 말일 뿐이고 진정한 개혁은 하고자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린 결과 강제 당하는 것이다.

 

개혁을 하기 위해선 물론 리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전체의 60% 이상이 동참해야만 하고 나머지 40%의 강력한 저항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해가는 과정이 바로 개혁인 까닭이다. 좀 더 본질을 말하면 기득권의 권력을 어느 선까지는 후퇴시키고 내려놓게 만드는 것이 개혁이다.

 

 

중국 문제

 

 

또 하나 중요한 대목은 잠시 앞에서 얘기했지만 우리가 통일을 이룩하고 그로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으려면 커다란 장벽이 하나 있으니 바로 중국이다.

 

중국이야말로 통일한국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느 시점에 가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란 점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나게 심각한 말이다. 그간 우리는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이룩하고 그로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가동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역시 중국이 남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공동번영 나아가서 통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패권 다툼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우리까지 저들의 영향권 안으로 넣겠다는 것이 오늘의 중국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우리는 2042년까지 내부의 개혁과 더불어 해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 해가 2023년이니 19년, 간단히 말하면 향후 20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엄청난 시련의 기간이 될 것이고 또 그를 통해 더욱 강하게 鍛鍊(단련)이 된 뒤 새로운 통일한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우리는 거치게 될 것이다.

 

 

중국은 그러나 패권국이 될 수 없기에 

 

이 대목에서 우리의 앞길에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본다.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니 너무 이른 시기에 미국을 상대로 패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점이다.

 

공산당 1당 독재만이 아니라 1인 체제로 되돌아간 중국이다. 중국에서 성공하는 길은 결국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느냐이다. 공산당에 가입해야만 그들 말로 權貴(권귀), 권력을 지닌 특별 신분으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내의 모든 기업은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면 결국 공산당의 비호 없이는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과학 기술 문화 예술 등등 모든 면에서 결국은 공산당원이 되고 당내에서 어느 선까지 올라설 수 있느냐에 따라 귀결이 난다.

 

최근 홍콩 출신의 무술액션 배우 견자단도 공산당에 가입한 뒤 중국전국 정협위원 명단 112명의 문화예술계 위원 중 한 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영화배우 장즈이도 그렇고 한 때 중국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던 첸 카이거라든가 장예모 등의 감독들도 결국 공산당원이 되면서 부귀를 누리며 살고 있다. 바둑 천재 커제도 결국 공산당 가입이 확실시되고 있다.

 

중국 내 모든 인재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재능이나 가치관을 당의 방침에 맞게 타협하거나 조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중국은 소프트 파워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중국은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지 않기에 과학 기술의 발전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

덩치가 커서 대국인 중국이지만 결국 후진성을 면할 수 없는 중국인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은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향후 수 년 내로 중국은 그간에 켜켜이 쌓인 내부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거야말로 장차 우리가 겪을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보게 될 한 가닥 밝은 빛줄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앞길은 험난하겠으나 끝내 돌파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균형잡기가 참으로 어려운 현 시점

 

 

현 정권 들어 한일 관계가 다시 복원되고 그로서 한미일 삼각체제 또한 정상화되고 있다. 당연히 중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 구도 속에서 균형을 잡기란 참으로 어렵다.

 

미국은 문재인 정권 당시 주한 미국 대사를 16개월간이나 공석으로 둠으로써 불만을 표시했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에야 현 골드버그 대사가 취임했다. 반대로 주한 중국 대사인 싱하밍 씨는 힘들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초반 싱하밍 씨와 몇 번 식사를 함께 한 적도 있는데 북한과 우리나라를 오가면서 경력을 쌓은 싱하밍 씨는 전문 외교관이자 품위도 갖춘 양반이란 느낌을 받았다. 당시 나는 북한의 친인척과 브로커를 통해 연락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기에 싱하밍 씨에게 그게 어떨지 지 물어보았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절대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그럴 경우 북한에 있는 친인척이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한일 관계에 대해 전망해보면 

 

 

이 대목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전망을 얘기해본다.

 

먼저 乙巳(을사)년이 분기점이라 보면 되겠다.

 

1905년 을사년에 조선왕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그 이후 합병의 비운을 겪었으니 을사보호조약이 그것이다. 우리가 약하다 보니 맺게 된 불평등한 관계였다.

 

1965년 을사년에 당시 소련과 진영싸움을 펼치던 미국의 강력한 주선으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달러가 한 푼이라도 아쉬운 시점이었기에 관계 정상화를 통해 받은 배상금으로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았고 그로부터 우리 경제는 날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후년이 乙巳(을사)년인데 그때로서 한일관계가 완전 정상화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을 해본다. 이제야말로 대등하고 공평한 좋은 관계로 발전해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본다.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乙巳(을사)년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하고 30년이 흘러 乙亥(을해)년이 되면 다시 좀 시들해지는 순환 주기를 갖고 있다.

 

 

일본 경제를 살피는 일은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니

 

 

일본 경제를 지켜보노라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우리와 일본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서구권 사람들이나 제3자의 눈에는 차이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을 것이라 여기기에 그렇다.

 

최근 우리 경제가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는 흑자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 인구감소가 진행 중이란 점, 잠재성장률이 극도로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이 1990년 거품 붕괴 이후 대응해간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힌트를 주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일반인들은 일본 경제가 그저 “잃어버린 30년”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은 이제 아무런 탄력도 대응 능력도 없이 그저 답보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단적인 예로 한 때 존립이 의문시되던 ‘소니’가 다시 살아났으며 관광 수입도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사실 글로벌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본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다. 몇 년 사이 미국이 돈을 엄청 찍어내었다가 인플레이션을 잡느라 허둥대고 있지만 기본에 있어 저성장 추세가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뉴 노멀”이란 표현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 하겠다.

 

이에 일본 역시 1980년대의 황금기를 재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당시가 비정상적이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히 지금이 인구 감소의 시대란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

 

그렇기에 과거 30년간 일본이 겪은 상황들과 대응과정들을 살펴보는 것은 장차 우리의 경제 운영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여긴다.

 

부디 우리와 일본 두 나라가 과거의 감정을 풀고 상호 협조해가면서 발전해가는 세월이 어서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교토 여행

 

 

5월 15일부터 4박5일의 여정으로 일본 교토를 다녀왔다.

 

교토, 한자로는 京都(경도)이니 서울, 즉 수도란 뜻이다. 일본의 역사를 통해 교토야말로 794년부터 1868년까지 무려 1,074년씩이나 수도였던 古都(고도)이다. 그렇기에 교토는 문화 유적이 엄청나게 많고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당초 가게 된 것이 관광이 아니라 어떤 인연으로 해서 세 장소에 참배하고자 갔다. 허리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곳을 찾았겠으나 말이다.

 

최우선 목적지는 산주산겐도, 한자로 三十三間堂(삼십산간당)이었다. 가운데의 커다란 관세음보살을 本尊(본존)으로 해서 그 좌우에 1000 분의 날씬한 관세음보살 立像(입상)이 모셔져있고 더해서 바람신과 번개신, 28部衆(부중)의 입상들, 그야말로 엄청난 판테온이자 萬神展(만신전)이었다. 일본 불교 예술의 최고봉이라 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다음으로 백제 성왕을 主神(주신)으로 모신 히라노 신사, 즉 平野神社(평야신사)였다. 벚꽃 피는 철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초여름의 경내는 그저 한적하고 조용했다.

 

마지막 행선지는 이끼와 잔디로 꾸며진 정교한 정원에 시원한 대나무 숲을 두른 정갈하고 아담한 사찰 기오지, 祇王寺(기왕사)였다.

 

호텔은 교토역에서 불과 300 미터, 아주 가까운 곳에 잡았기에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하루에 한 곳을 다녔으니 시간이 넉넉했다. 하루에 서너 차례 온천을 했다. 그리곤 교토 역내의 상가들과 백화점, 호텔 근처의 가게와 사람들을 구경했다. 참으로 한가롭고 편안한 여행이었다.

 

교토, 역사의 古都(고도)인 까닭에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곳이지만 몸이 성하지 않아서 장차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찾아가볼 생각이다.

 

일본, 여행하기에 참으로 매력이 많은 나라이다. 친절한 응대와 좋은 온천,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경관, 오래된 건축물들과 멋진 정원의 나라 일본이다.

 

 

단비 넉넉히 내렸으니 좋은데 

 

 

돌아오는 날 교토는 비가 내렸는데 최근 며칠 사이 우리에게도 넉넉한 비가 내렸다. 참으로 단비였다. 4월 하순에 비가 내리긴 했으나 남쪽 지방은 해갈이 되지 않았는데 이번 비야말로 適時(적시)의 단비였다.

 

“자연순환운명학”을 개괄하는 책을 쓰고 있는데 때론 이 일이 따분하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체력 부족이 아닌가 싶다. 이석증으로 인해 어질어질하고 허리 문제로 해서 운동량이 떨어지다 보니 기초 체력이 많이 약해진 것이다.

 

예전엔 돈은 없어도 몸뚱이만큼은 온전한 내 것이란 여겼는데 이젠 이마저도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 무엇이 내 것일 수 있으랴! 하는 생각도 든다. 五蘊(오온)이 모두 緣起(연기)에 의해 생겼다가 없어질 뿐이니 헛된 마음 내려놓으라고 하는 반야심경의 구절들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절대포기를 통해 절대자유를 얻겠다는 반야심경의 구절구절들은 참으로 이성적이면서도 전혀 즐겁지가 않다. 깡그리 비워, 그러면 무서울 게 없어, 하지만 욕망이야말로 삶의 힘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욕망을 다 비우라고 하니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싶다.

 

오고 가는 거래에서 조금치라도 남는 맛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에 절로 나오는 푸념인 즉 에라, 모를세라 그저 주어지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마음 편히 살다가야지 싶다.

 

 

분주했던 나 호호당의 삶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에 칼럼을 쓰면서 시작된 글쓰기였다. 2001년 10월의 일이니 근 22년이 흘렀다. 운명학에 관한 글을 위주로 역사 문화 국제정세 등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글을 써왔다.

 

2009년 4월부터 독립 블로그를 시작했고 2018년 3월말부터는 티스토리에 별도의 코너를 시작했다. (그 이전 프레시안에 올린 365편의 글은 독립 블로그의 “김태규 명리학”이란 코너에 올려져있다.)

 

프레시안에 올린 글과 독립 블로그와 티스토리에 올린 글을 합치면 대략 3000 편에 달한다.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면 대략 75,000 매 분량이고 이를 책으로 엮을 경우 45권은 족히 될 것이다. 스스로도 놀랍다.

 

참 잘도 오랫동안 많이도 썼다. 하지만 여전히 쓰고픈 내용이 많다. 다만 나이가 들어 기력이 달리는 것도 있고 일반 독자를 상대로 하기에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기가 어려워서 늘 아쉽다.

 

그래서 동영상을 만들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는데 그 역시 그렇다. 당초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할 작정이었는데 주변의 조언에 따라 15분짜리 영상을 만들다 보니 그 역시 깊이가 부족하다. 마치 홍보 동영상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 제작을 멈추고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그래서 우선 “자연순환운명학”의 이론에 관한 총괄적인 책을 하나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에 원고를 쓰고 있다.

 

책을 쓰다 보니 최근엔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한다. 드로잉과 수채화야말로 큰 즐거움인데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다 그렇다, 이걸 좀 하려면 저게 걸리고 저것에 신경을 쓰면 이게 부족해진다. 특히 최근 2년간 불교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또 주식투자기법을 연구하는 데에도 엄청난 집중과 시간을 쏟았다.

 

그러고 보니 참 분주한 나 호호당의 삶이다.

 

 

길을 가면서 노래하네

 

 

좋아하는 중국 노래 중에 邊走邊唱(변주변창)이란 영화의 주제곡이 있다. 그 노랫말 중에 “愛情邊走邊唱(애정변주변창), 唱不完一段地久天長(창불완일단지구천장)”이란 대목이 있다.

 

길을 가면서 노래하길 좋아하네, 크고 오래된 세상이라 내 노래 또한 끝나질 않네, 이런 뜻이다.

 

길을 간다는 것은 유람 다니는 게 아니라 밥벌이를 하면서 간다는 뜻이고 밥만 벌어먹을 순 없으니 스스로의 감흥을 노래로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 또한 내 속에 묵은 사연과 새로운 인연이 많아서 끝날 날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22년간 글을 써오면서 가지게 된 나 호호당의 생각 또는 所懷(소회)와 닮은 듯도 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호호당의 삶 또한 고단했고 분주했고 힘들었고 또 즐거웠다. 30대 후반 안정된 직장을 떠나 野人(야인)의 삶을 시작한 까닭은 분명했고 지금도 분명하다.

 

혹시나 훗날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내 맘껏 살아보지 않은 게 후회될 것 같아서, 그게 이유였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내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후회가 없는 삶을 살다 가는 게 내 목표였고 지금도 그렇다.

 

곧 만 68세가 된다. 내년이면 세는 나이로 70이다. 그러니 내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수명 자체에 대해선 하등의 미련이 없다, 하지만 의욕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힘이 닿는 한 내 마음 가고픈 데까지 가볼 작정이다. 언제 쉬냐고 묻는다면 죽은 다음에 쉴 것이라 답하겠다.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일 것이니.

 

생명이란 세포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기체인데 이 조직이란 게 많이 쓰다 보면 망가지고 결국 사멸한다는 것을 최근 들어 새삼 몸서리치게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매 10년 단위로 노화가 와서 체력이 떨어지고 특히 60대 중반이 되니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모는 차가 아반테인데 10년 정도 되니 달리는 도중에 엔진이 힘겨워한다, 여기저기 스프링도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것이 꼭 나 호호당의 몸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나 호호당은 노후화된 이 몸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이보그 시대가 내 살아생전에 올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존존하는 모든 것은 운의 리듬을 탄다는 것 

 

 

이쯤에서 운명의 대해 약간 얘기해본다.

 

한 순환 주기인 60년은 5년씩 12개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예를 들어본다.

 

 

크레디드 스위스의 파산과 창립자 에셔의 운세

 

 

얼마 전 전통의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이 파산해서 스위스의 UBS에게 흡수되었다.

 

먼저 얘기할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은 그 만든 이의 운세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1856년에 설립된 크레디트 스위스를 만든 이는 알프레드 에셔란 훌륭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운세는 1859년이 입추였다. 따라서 1856년이든 1859년이든 어느 쪽으로 봐도 흐름을 짐작하기에 별 무리가 없다.

 

이에 1859년 입추였던 알프레드 에셔의 운세로 보면 120년이 흘러 1979년이 최성기였고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미국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에 이르러 크레디트 스위스의 운세는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올 해 2023년에 문패를 내렸지만 사실상 2009년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크레디트 스위스의 경우 액면 그대로 계산하면 1856년부터 2023년까지 167년간 존속했지만 실은 120년 더하기 30년 해서 150년간 존재했던 은행이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창설자인 알프레드 에셔는 1882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운세는 사후에도 이어져왔다는 점이다.

 

좀 더 내막을 살펴보면 크레디트 스위스가 망하게 된 근본 배경은 창립자 에셔의 운세가 입추였던 1859년으로부터 120년이 지나간 1979년에 크레디트 스위스가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퍼스트 보스턴”을 인수했다는 점이다.

 

“퍼스트 보스턴”을 인수한 것이 당초 기대에 미치진 못했으나 본사인 크레디트 스위스는 여전히 높은 수익을 보였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게 문제가 되었으니 패망에 이르는 첫 걸음이었다.

 

1979년 인수로부터 30년이 흘러 패착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2008년의 미국 금융위기로 인해 모든 것이 흔들렸고 끝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패망의 단초는 1979년 당시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눈에서 보면 또 다른 내막이 있으니 유태계 금융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시장으로 진출한 것 자체가 패착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가도 운세는 이어진다

 

 

다시 돌아와서 얘기한다.

 

태어난 시점에 정해진 어떤 이의 운세는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운의 박자와 리듬을 그대로 타고 간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더 묘한 것이 있으니 어떤 집안의 운세 흐름이다. 남녀가 만나 자녀를 낳고 또 그 자녀가 배우자를 만나 또 자녀를 낳는다. 그랬을 경우 당연히 주된 맥 主脈(주맥)의 흐름이 이어져간다. 물론 그 사이에 만난 배우자들의 흐름도 여기에 영향을 미친다.

 

쉽게 설명하자면 삼성 그룹을 세운 이는 이병철 회장이다. 따라서 그 양반의 운세 흐름이 삼성가의 主脈(주맥)이다. 마치 風水(풍수)와도 같다. 그런데 살펴보면 그 배우자와 자녀, 손주들의 흐름 또한 이병철 회장의 운세 흐름과 밀접한 연관 때론 정반대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 호호당은 이 신기롭고 흥미로운 운세의 흐름, 집안의 흐름을 예전에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 무려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의 운세를 검토하고 연구해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흐름으로부터 수대에 걸쳐 연구하기도 하고 미국 부호인 록펠러 가문의 흐름을 연구해보면서 하나의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현대 사회는 자기 자신 즉 個我(개아)가 전부란 생각이 일반적이지만 나 호호당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비유하자면 그저 한강의 앞 물결과 뒷 물결이어서 실은 단락을 짓기가 어렵고 그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든 균형만 맞추면 다 좋아서

 

 

우리 모두 길을 가면서 즉 경제활동을 해가면서 여흥도 살려야 하니 노래를 부른다. 한 순환 주기인 60년 속에 담긴 12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감흥이 생긴다, 그러면 노래한다.

 

어떤 삶을 살든 길 가는 것과 노래하는 것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삶은 그야말로 邊走邊唱(변주변창)이 아닐까 싶다. 위대한 삶이냐 거창한 삶이냐 그런 스케일의 문제는 나이 마흔이 되면 구애받지 않는 게 마음 편하다.

 

나 호호당은 다음 주 일본 교토에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 일이기도 하고 여흥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邊走邊唱(변주변창), 길을 가면서 노래한다.

 

자연순환운명학은 IT 덕분에 생겨났으니

 

세상에 태어나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 태어나고 만들어진 이상 죽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은 일정한 규율에 의해 興亡(흥망)과 盛衰(성쇠)를 거듭하는데 그걸 運(운)이라 한다.

 

나 호호당은 운에 따른 흥망성쇠의 이치와 규율의 큰 줄기 즉 大綱(대강)을 명백하게 알아내었으니 有史(유사) 이래 처음이지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한 신통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오늘날과 같은 웹(web)이 없던 과거엔 데이터의 충분한 標本(표본)이나 母集團(모집단)를 입수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순환의 규율을 검증해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 호호당이 밝혀내고 창시한 “자연순환운명학”은 인류의 거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는 정보의 그물망 즉 웹이 만들어졌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결국 정보기술(IT)의 덕분인 셈이다.

 

 

이제 머뭇거릴 때가 아니기에 

 

 

며칠 전 블로그에 상담을 쉰다는 공고를 올렸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를 연구하느라 즐기는 성격인 나 호호당은 그간 연구 과정에서의 재미를 충분히 맛보고 즐겼긴 하지만 최근 2년 사이 여기저기 몸이 불편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이거 아차-하면 그간 말로만 떠들었고 블로그에 짧은 글만 썼을 뿐 전체의 원리와 이론을 모두 엮은 책을 아직 미처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3-4년 전만 해도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터라 천천히 쓰면 되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야, 자슥아, 너도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고 보니 태어난 지 어언 68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앗, 사실 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불현 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구나 싶었고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 사람이 가기 전에 壽衣(수의)를 마련해놓듯이 나 호호당도 책을 하나 남겨놓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물론 아직 특별한 병에 걸린 것은 전혀 아니고 그런대로 건강하다. 나 호호당의 경우 이른바 성인병 증세가 없다. 혈압 당뇨 심혈관 증세 등등 내과의사들이 밥벌이로 삼고 있는 그런 증세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이석증이 가시질 않아서 걸을 때 중심을 잡기 어렵고 좌골신경통의 후유증으로 보행이 불편하며 신체형 자율신경장애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증세로 피부에 이상한 통각을 느낀다. 이 모두 결국 老衰(노쇠)해진 탓이라 하겠다.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 시대가 오긴 오겠지만

 

 

얼마 전부터 일본의 에니 “공각기동대”를 넷플릭스로 즐겁게 보고 있다. 거기에 사람의 두뇌 속에 칩을 집어넣어 두뇌 능력을 강화한 電腦(전뇌)라든가 신체기능을 기계적으로 강화시킨 사이보그가 등장한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창시한 사이버펑크의 미국식 변형 중에 하나가 영화 ‘매트릭스’라면 일본식 파생 중에 하나가 ‘공각기동대’인데 아무튼 그런 것은 아직 요원한 얘기이고 나 호호당의 경우 몸이 불편해지자 벌써 이 구차해진 내 몸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이 자주 든다.

 

 

몸이 구차해지니 슬슬 준비를 해야겠네

 

 

이상한 피부 통각 때문에 정신신경과를 처음 갔을 때 수 백 개 문항의 설문지를 주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문항에 다 마킹을 한 후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정신분석이었다.

 

통밥을 굴려보니 두 가지였다. 일단 비용이 십 몇 만원 하는 걸로 봐서 그게 바로 정신과에서 처음 방문한 환자에 대한 일종의 입회비였고, 물론 그 용도는 제대로 된 치료와 상담을 위한 기초 자료였다.

 

그래서 성실히 문항에 마킹을 해서 보낸 뒤 찾아갔더니 의사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다 좋으신데 이상하게도 자살충동이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시죠?” 하는 것이었다.

 

“아니요, 그런 마음 전혀 없는데요” 하고 답했지만 속으론 ‘이 양반아, 이 불편한 몸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있어서 그런 거야’, 하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사이보그나 컴퓨터 칩을 박는 것이 아직은 오지 않은 이상 이 불편한 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는 것밖에 더 있겠냐고, 이 답답한 양반아.

 

의사란 사람들, 내가 보기엔 환자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약간 터무니없는 도그마를 가진 집단들이다. 소생 가능하지 않고 곧 죽을 사람일지언정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당사자가 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그건 강력한 진통제로 땜빵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중에 “환자가 요청하더라도 극약을 주지 않겠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의사들이 진심으로 그게 옳다고 여기고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는 人權(인권) 조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렴치한 범죄 또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후 법정에서 내가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난 이제 그만 살겠오, 하면 그건 인정해줘야 할 게 아닌가.

 

우리의 영혼이 육체라는 결함 있는 하드웨어 즉 육체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Gnosticism)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법적으로 행위능력이 있는 성인이고 심신미약도 아닌데 왜 안락사를 막는가 말이다.

 

물론 현실에선 그게 일반화되긴 역시 쉬지 않을 것이다. 자살을 금하는 종교라든가 중환자실의 환자로부터 뽕을 뽑는 대형병원들이 있으며 또 대중에 영합해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정치인들이 있는 세상이란 점 잘 알고 있다.

 

합법적인 루트(route)가 없다는 생각에서 친하게 지내는 후배이자 의사에게 야, 언젠가 나중에 필요할 것 같은데 펜타닐 같은 약 좀 구해줄 수 없겠니? 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싫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야, 이 친구도 결국 의사라는 틀에 갇혀 있구나 싶었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에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요원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척추 교체 3백만원, 눈알 교체 2백만원하면서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사이보그 시대가 오긴 오겠으나 그게 내 살아생전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열심히 살다가 때가 되어 이젠 아니다 싶으면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소위 穀氣(곡기)를 끊고 가야지 하는 마음을 굳혔다. 몸의 기능이 다했으면 몸을 버려야지 하는 마음일 뿐이고,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은 非(비)가역적이란 단순한 사실만 염두에 두면 된다.

 

수행을 많이 한 스님들이 어느 날 앉은 채로 열반한다고 하는 것이 달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때가 되었다 싶어서 먹지 않고 가는 것이라 여긴다. 다만 앉은 채로 가는 게 뽀대나 가오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나 호호당이야 禪僧(선승)도 아닌 이상 굳이 그럴 것 까진 없다고 본다.

 

 

"자연순환운명학" 책은 호호당의 저승수의 

 

 

다시 돌아가서 얘기이다. 그래서 상담을 잠정 기간 쉬면서 책을 쓰기로 했다. 책이 완성되면 좋은 번역가를 통해 영역본을 만들어서 전 세계 유명대학 도서관에 수 천 부 정도 보낼 생각도 한다. 늦어도 수십 년 뒤가 되면 전 세계가 깜짝 놀라서 야, 호호당이 누구지? 한국 같은 후진국(?)에서 어떻게 이런 과학을? 하면서 찾게 되리라 생각하면 즐겁다. 저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 낄낄 거릴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일단 남겨놓아야 할 게 아닌가. 호호당의 저승 수의.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죽음은 관념이었을 뿐 구체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未久(미구)에 다가올 현실이다. 건강할 때 건강만 챙길 일이 아니라 좋은 죽음도 준비해둘 일이다.

 

 

高僧(고승)들 역시 운에 따라 부침할 뿐

 

 

그러다 보니 최근엔 종교 계통의 알려진 인물들의 사주도 많이 점검해본다. 예로서 나옹화상 즉 혜근스님을 들어보자.

 

고려시대의 명승이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하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이 분의 생년월일은 양력으로 1330년 3월 3일이다. 庚申(경신)년 戊寅(무인)월 乙未(을미)일이 된다. 입적하신 것은 1376년 6월 10일, 즉 丙辰(병진)년 甲午(갑오)월 戊辰(무진)일이다.

 

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는 1345 乙酉(을유)년이고 입춘 바닥은 1375 乙卯(을묘)이다. 입적하신 것이 그 다음 해 1376년이니 입춘 다음 해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경기도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적혀있는데 그 다음 해인 1345년이 을묘, 즉 입추였다.

 

당시 중국의 몽골제국인 元(원)나라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한 뒤 1358 戊戌(무술)년에 고려로 돌아왔으니 이때는 60년 순환에서 霜降(상강)의 운이었다. 10월 상강은 추수가 시작되는 때이니 다 성취한 것이다.

 

1371년 辛亥(신해)년 운세가 한창 기울 무렵 공민왕으로부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등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 결국 사회적으로 모욕을 받는 법이다. 시기질투의 인간 세상 아닌가! 이에 입춘 다음 해인 1376년 탄핵을 받아 멀리 귀양을 가던 도중 병이 나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오늘날 우리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성철 스님 또한 운세 그대로 살다 갔다. 1912년 4월 6일에 태어나 1993년 11월 4일에 입적하셨는데 보면 壬子(임자)년 甲辰(갑진)월 壬子(임자)일이다. 따라서 1952 壬辰(임진)년이 입추였고 1982 壬戌(임술)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이 분이 우리 불교에 크게 기여한 시기는 입추 얼마 후 즉 處暑(처서)운인 1954년 帶妻(대처)불교를 지양하는 불교정화운동이었다. 그리고 8년에서 10년간 長座不臥(장좌불와), 즉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했기에 크게 禪風(선풍)을 떨쳤다, 물론 골병도 들었겠지만.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와서 面壁九年(면벽구년)한 것과 같은 일이니 이 정도면 가오가 요즘 말로 ‘개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1982년 입춘으로부터 11년 뒤 몸 고생 많이 하시다 입적하셨다.

 

깨쳤다고 해서 운세를 벗어나진 않는다. 다만 마음의 경지가 일반과는 다를 뿐이다.

 

 

깨우침이란 게 뭔지 알지만 

 

 

깨우침이란 뭘까? 하면 답을 드리겠다. 絶對抛棄(절대포기)를 통해 絶對自由(절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싹 다 버리고 나면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진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心無罣礙(심무가애)가 그것이다.

 

당초 생각하기로 젊은 제자가 한 명 있어 상담안내란을 통해 그 친구에게 상담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권유할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그 친구 역시 최근 몸이 좋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그냥 쉬기로 했다.

 

 

블로그는 이어질 것이니 

 

 

상담은 하지 않지만 글은 여전히 올릴 생각이다. 당초 2039년까지 쓰기로 마음을 정했으니 그렇다. 그리고 또 책을 마치고 나면 다시 상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잊힐 뻔 했던 애국지사

 

 

사람은 죽어도 그 운세는 그대로 이어진다. 참으로 미스터리한 일이다.

 

1923년의 어느 날 異國萬里(이국만리)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젊은 志士(지사)가 불과 39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 유해는 뉴욕의 어느 공원묘지에 묻혔다. 심장마비가 사인이었다.

 

1886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04년 18세의 나이로 어떤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도 모르지만 아무튼 1917년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으로 참전해 유럽 전선에서 중상자 구호 활동을 했고 종전 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임시정부의 프랑스 파리 위원부 서기장으로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대한 임시정부와 유럽 간의 외교 업무를 수행하던 중 돌연히 殉國(순국)했다.

 

오랜 동안 잊혔던 사람이었는데 다행히도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사망한 지 72년만의 일이다. (72년은 60년 한 순환 이후 12년이니 잊힌 자가 다시 기억되기 시작한다는 의미라 보면 된다.)

 

이름은 황기환.

 

 

사람은 죽어도 운세는 이어지는 법이라서

 

 

그러다가 2008년의 어느 날 뉴욕의 한인교회 목사에 의해 그의 묘소가 황기환 지사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 이후 우리 정부는 그의 유해를 다시 고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고 이에 정부 또한 다시 한 번 노력을 통해 마침내 황 지사의 유해는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안장되었다. 며칠 전인 4월 10일의 일이다. 사후 100년만의 일이고 미국으로 건너간 지 119년, 거의 120년 만에 죽어서라도 고국의 땅에 돌아왔다. (60년 순환이 두 바퀴 돌았다.) 그러니 壯(장)하다!

 

새 묘소는 대전 국립 현충원.

 

생년월일을 검색해보니 1886년 4월 4일생인데 필시 음력일 것이고 양력으로 바꾸면 1986년 5월 7일이 된다. 丙戌(병술)년 癸巳(계사)월 丁卯(정묘)일이다. 생시를 몰라도 이 정도 구성이면 1917년 丁巳(정사)년이 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라 본다.

 

그런데 2023년 운세가 한창일 때 갑자기 심장마비로 순국했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고 뉴욕의 공원묘지에 묻혀 그의 애국 헌신과 공로가 함께 파묻히게 되었으니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恨(한)스러웠으랴!

 

하지만 이 세상은 功(공)이 있으면 상을 받는 법이고 過(과)가 있으면 벌을 받는 법이다. 세상은 지극히 公正(공정)하다.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고 독립을 하고 어지러운 경과를 거쳐 나라가 점점 제대로 모습과 내용을 갖추다보니 때늦은 감이 있지만 1995년에는 포상이 追敍(추서)되었고 2008년 묘소 확인 이후 15년만인 이번에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간에 뉴욕의 공원 묘소 속에 있던 황 지사의 유해는 곱게 삭지 않았을 것 같다, 억울한 한이 맺혀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중국 唐(당)나라 시절의 시인 李賀(이하)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恨血千年土中碧(한혈토중천년벽)이 그것이다. 한 맺힌 피는 땅속에서 삭지도 않고 천년 동안 푸른빛을 낸다는 말인데 황 지사야말로 그랬을 것 같다.

 

 

되살아나고 있는 志士(지사)의 운세

 

 

1917년과 1977년이 丁巳(정사)로서 입추이고 1947년과 2007년이 丁亥(정해)로서 입춘 바닥인 황 지사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2007 丁亥(정해)년 입춘 바닥에서부터 황 지사는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다음 해인 2008년 묘소가 확인되었으며 2017년에는 드라마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고 2007년 입춘 바닥으로부터 15년이 흐른 2022년은 立夏(입하)가 되는데 마침내 지하에서 바깥세상으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입하는 사물이 바깥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때이다.)

 

이제 황 지사는 밤마다 묘소를 떠돌며 한숨짓는 孤魂(고혼)이 아니라 진정으로 편안하고 깊게 잠들 것 같다. 그리고 영원히 잊히지 않고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영웅의 전설이 될 것이라 본다.

 

이처럼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죽어도 그의 운세는 사후에도 이어진다.

 

나 호호당은 이런 경우를 그간의 연구를 통해 무수히 접하고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전혀 놀라지 않았지만 이번 황 지사의 케이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독립운동”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수많은 인물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좌진, 윤치호, 안중근, 안창호, 주시경, 조만식, 조봉암, 이시영, 윤봉길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떠오른다. 모두 애국애족의 지사들이고 열사들이다.

이제 그 이름들 속에 황기환이란 이름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경제 얘기 한 토막

 

 

다른 얘기 한 토막, 최근 환율은 달러가 강세여서가 아니라 우리 원화가 약세라고 봐야 한다. 미국과의 기준금리 차이가 적지 않고 무역수지 등이 적자를 이어가는 까닭이라 본다.

 

그렇다고 한은 입장에서 금리인상을 하자니 경기가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기에 당분간 그리고 어쩌면 기조적으로 원화약세가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모든 원자재를 수입해와서 써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원화가 약세란 말은 우리 대한민국이 가난해진다는 말과 같다.

 

달러 당 1,327.94원은 대단히 중요한 기로이다. 이 수치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1년 이동평균선이 급등하다가 꺾어진 자리, 즉 최고점인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 환율이 그 수치를 살짝 넘어서고 있다. 물론 당장 큰 일 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 더 살펴야 할 것은 오늘의 경우 1년 이동 평균선이 2월 초부터 계속 상승 중이란 점이다. 오늘의 경우 1,314.35원인데 1년 이동 평균선이 만일 2008년의 수치를 넘어서면 그건 우리 경제가 고장 난 신호라고 봐도 무방하겠기 때문이다.

 

(알릴 말씀이 있다. 당분간 상담을 쉬기로 했다. 이미 예약된 일정은 그대로 진행할 것이다.)

 

 

평생 내 마음 속에 있는 거대한 물고기

 

 

북쪽 깊고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이름을 鯤(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 무지막지하게 커서 몇 천리나 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鵬(붕)이라 하고 그 등판의 넓이 또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냥 무진장 크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마치 온 하늘을 다 덮는 구름처럼 넓고 크다. 날개 그림자에 가려서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

 

이 새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그냥 뜰 수는 없고 바다 위에 태풍이 불어야만 그 세찬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는데 어쨌거나 한 번 날아오르면 멀고 먼 저 남쪽 바다로 간다. 남쪽 바다란 天池(천지), 즉 하늘 아래 가장 큰 연못이다.

 

신기한 일들을 모아서 엮은 어떤 기록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겨가기 위해 날아오를 적에는 날개로 물을 치는데 그 물이 무려 삼천리 바깥까지 튄다, 또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면 구만 리 상공으로 올라가서 무려 6개월을 날아가고서야 내려와 쉰다.”

 

莊子(장자)에 나오는 가장 앞의 글 “北冥有魚(북명유어), 其名爲鯤(기명위곤)”으로 시작되는 단락을 풀어서 옮겼다.

 

나 호호당의 마음속에는 저 물고기, 변해서 커다란 鵬(붕)새가 되는 저 물고기가 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무술도장을 하시는 華僑(화교) 사부님으로부터 배운 뒤 평생을 가슴에 담고 있다.

 

상상은 자유롭고 제약이 없다. 동짓날 동해 홍련암, 돌난간에 기대어 거세게 일렁이며 흰 포말을 연신 날리는 바다 앞에 서면 그 물고기가 내 눈에 보였다. 이름을 鯤(곤)이라 했고 새가 되어 날아오르면 鵬(붕)이라고 하는 놈. 거친 바다 위로 끼룩끼룩대며 저공 비행을 하는 갈매기를 붕새로 둔갑시켜놓곤 했다, 내 상상의 눈으로.

 

 

선불교, 莊子(장자)와 불교의 결합

 

 

莊子(장자)는 삶이란 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胡蝶夢(호접몽)의 우화처럼 꿈속의 일인지도 모르니 작은 일에 구애받거나 연연하지 말고 대범하고 통 크게 그리고 삶 전체를 하나의 놀이마당으로 즐기다 가면 어떻겠느냐, 하고 권하고 있다.

 

이런 장자의 생각은 훗날 중국에 들어온 佛敎(불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니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중국의 禪宗(선종)이다.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해서 육조혜능에 와서 본격화된 선불교는 호방하고 기지에 넘치는 마조도일에 의해 祖師禪(조사선)으로 확립되었고 그 이후 임제선사의 과격하리만큼 호쾌한 가르침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도 죽여라, 하면서 기존의 모든 가르침을 다 없는 것으로 돌려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殺佛殺祖 (살불살조)가 그것이다. 나아가서 깨달음이란 다른 곳에서 찾을 게 아니라 隨處作主(수처작주) 立處皆眞(입처개진), 즉 네가 처한 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될 것이고 네가 선 곳이 모두 참되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마조도일과 임제 선사를 통해 전해진 임제종은 통일신라 말에 禪宗九山(선종구산), 즉 구산선문으로 이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 번 더 정리하면 이렇다.

 

영원한 삶은 없고 삶 자체가 꿈같기도 하며 또 사느라 고생도 많다, 그러니 차라리 호방하고 대범하게 살다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니? 하는 莊子(장자)의 생각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 가르침,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수히 많은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임시 가설의 존재 즉 假名(가명)이란 생각과 연결되는 바가 있기에 禪(선)의 철학이 만들어졌다.

 

 

살아보니 한바탕 꿈속의 일만 같아서

 

 

나 호호당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산다는 게 꿈속의 일과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前生(전생)이 있었는지 後生(후생)이 있을 것인지, 영계의 세상이 있는지, 하느님 나라가 있는지 그건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풀섶에 내려앉았다가 그대로 고꾸라져서 삶을 마치는 늦가을 나비의 삶이나 몇 십 년을 사는 사람의 삶이나 거대한 시간의 스케일에서 보면 그 또한 그다지 차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그저 마음 편히 살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이야 끊임없이 생기고 성가시게 하겠으나 그건 그것대로 처리해가면서 최대한 마음 편히 먹고 살아갈 생각이다. 죽을 때가 가깝다 싶으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 그러면 편히 삶을 마칠 수 있으리란 기대도 한다.

 

살았던 흔적이나 자취야 얼마 동안 남아있겠으나 그 또한 긴 시간 속에서 磨滅(마멸)될 것이니 그 역시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태어나서 살아본 게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괴로움도 많았으나 즐거운 일 또한 많았다. 뭘 좀 잘 해보려고 애쓴 시간들 그러다가 맛본 좌절들 역시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세월이 새록새록 그리울 때도 많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으니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존재는 예외 없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타고 浮沈(부침)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 호호당 스스로 수 십 년의 연구를 통해 철저하게, 조금의 의문도 없이 깨달았고 입증했다.

 

나 호호당은 一生(일생)을 72년으로 계산한다, 그 이후의 삶은 문자 그대로 餘生(여생)이라 본다. 이에 곧 68세가 되는 나 호호당이기에 얼마 전 글에도 썼지만 큰 국면에서 서서히 마무리해가고 있다.

 

 

해는 이미 서산을 넘었으니 

 

 

나이가 드니 나름 좋은 것도 있다. 젊은 날엔 禪師(선사)의 가르침이나 동서양 철학자와 현자들의 글과 말에 눈을 부릅뜨거나 귀를 쫑긋했는데 이젠 더 이상 깨달음 등등을 얻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다 잘 살아보자고 공부도 하고 수련도 하고 사업도 차리는 법인데 이젠 그럴 이유가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해는 이미 西山(서산)을 넘었고 놀빛만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하지만 북쪽 바다 깊은 물속의 거대한 물고기는 여전히 내 속에 있다. 저 놈의 물고기는 늙지도 않는 것 같다, 원체 수명이 길어서 그런가 보다.

 

얼마 전 어떤 드라마에서 고래가 주인공 앞으로 둥실-하고 허공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보면서 웃었다, 고래가 아니라 꼭 그 물고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죽는 날까지 저 물고기와 놀면서 지낼 생각이다. 이름을 鯤(곤)이라 한다는데, 그 놈이 내 속에서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