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오심에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달디 단 봄비가 내린다. 간밤에 보니 비 내리고 꽃잎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젖은 보도블록 위로 작은 물줄기가 이어지고 그 위로 무리지은 분홍의 꽃잎들이 천천히 둥둥 떠가고 있었다.

 

이번 비는 호남 지방의 해갈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전국적인 산불도 이제 멎었을 것이니 참으로 고맙다. 그야말로 甘露水(감로수).

 

걱정을 했다, 일기예보에서 지난 주부터 비소식을 알렸는데 혹시나 빗나갈 것 같아서 속을 졸였다. 나 호호당은 늘 강수량에 관심이 많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엄청난 자원이니. 우리나라, 산이나 많지 자원도 없는데 비라도 오지 않으면 푸른 산도 없을 것이다. 이에 이번 비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한다.

 

 

우리 경제에도 단비가 좀 내렸으면

 

 

걱정되던 증시도 일단은 상승세로 돌아섰다. 제법 오를 것으로 본다. 미국에서 발생한 은행 사태, 호들갑이었는데 이젠 진정이 되었고 그 바람에 미국 증시가 돌아서면서 글로벌 경제도 일단 안정되었다. 우려되던 환율도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다. 환율은 달러 당 1323.83원만 넘어가지 않으면 괜찮다는 말씀 드린다. (메모해놓으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큰 국면에서 미 연준의 금리상승도 마무리 단계이니 특별히 탈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우리 경제 자체에 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당시 덕을 본 중국경제 역시 시름시름 앓고 있으니 좋은 소식 듣기 어렵다. 외부변수가 아니라 내생변수가 걱정될 뿐이다. 우리 자체의 탄력은 떨어졌는데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로 인해 우리 기업들을 압박해오고 있다. 게다가 취업은 그야말로 엄동설한이다.

 

 

좋을 땐 친구가 많지만 어려워지면 모두 사라지는 '당연한 이치'에 대하여 

 

 

시중에선 부동산 PF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 많다. 하지만 이는 당초부터 예정된 일이다.

 

원래 부동산 공급은 부동산 가격이 조금은 침체기에 있을 때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게 될 일이 아니다. 그럴 땐 민자기업들이 아파트 재건축을 시행하려면 대출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부동산 PF는 언제나 호황국면에서나 대출이 잘 되는 법이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 조금만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어도 즉각 대출 상환이나 프로젝트 마무리에 문제가 생긴다.

 

은행이나 금융권 역시 시중에 돈이 남아돌 때 대출을 잘 해주는 법이고, 자금 경색이 생기면 즉각 돈줄을 조인다.

 

늘 그렇지만 금융이란 비올 땐 우산을 걷어가고 맑은 날엔 우산을 제공한다, 금융의 생리이자 숙명이다. 따라서 시행에 몇 년의 시일이 소요되는 부동산 재건축이나 공급은 사실 민간기업보다는 정부가 하는 게 정답이라 하겠다. 그래서 주택공사 같은 곳이 있지만 아시다시피 그게 또 비리나 부실의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모든 문제에 정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선 거꾸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익과 私慾(사욕)이 얽히고설켜서 그렇다. 그러니 시장에 맡기면 문란하거나 변동성이 커지고 정부에 맡기면 그 역시 非理(비리)가 생기고 또 고착화된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정체되어 있진 않다. 2보 전진 1보 후퇴하면서 꾸준히 시간을 두고 개선 발전해가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특히 우리의 경우 5년마다 대선, 4년마다 총선을 하는 까닭에 끊임없이 이익을 챙기고 해먹는 한편으로 또 부단히 정화하고 청소해가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거의 “혁명” 수준이다.

 

 

분당 정자교와 자연순환

 

 

오늘 뉴스 꽤나 흥미롭다. 분당의 정자교란 다리의 교각이 무너진 사건이다. 인명 피해까지 났으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연순환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다리가 만들어진 것이 1993년이었는데 올 해 무너졌으니 30년 만의 일이란 점이다.

 

30년은 60년 사이클의 반환점이고 변환점인데 이때에 와서 이런 일이 생겼다. 분명히 다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문 엔지니어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라 본다. 24년이면 답이 나오기 때문이니 2017년 무렵엔 나름 기술자들 사이에선 말이 있었을 것이란 얘기이다.

 

그렇다고 人災(인재)니 뭐니 말하긴 싫다. 사람이 해놓은 일에 사고가 나면 그건 당연히 인재이니 그렇다. 그저 남는 것은 책임 추궁, 책임질 ‘놈’을 찾는 일이 전부인데 그게 또한 쉽지가 않다.

 

어느 곳을 가든 혼자 죽기 싫은 탓에 문제가 있을 수 있거나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총대를 매기 보다는 단체로 보험을 든다. 책임질 대상자를 넓혀서 소위 “독박 쓸” 위험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사고를 책임질 “몸통”은 언제나 특정하기 어렵다. 이 또한 “인간의 지혜”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카지노, 즐거웠는데

 

 

드라마 “카지노”의 결말이 많이 아쉽다. 매주 수요일을 기다리면서 즐겼는데 시즌 3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 제작사 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감독에게 한 모양이다. 캐시키들! 허구이긴 하지만 정말로 차무식을 좋아했는데 결국 찌질한 정팔이에게 당하는 결말에 확 짜증이 났다. 그러나 보스 다니엘의 殺手(살수)로 나온 ‘김민’이란 배우가 정말 멋졌다. 감독이야 돈을 좀 받았겠으나 결국은 품팔이 신세,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너그럽게 이해해준다.

 

나 호호당은 넷플릭스로 일본의 환타지 애니메이션도 즐겨본다. 특히 요괴가 나오는 “나츠메 우인장”이란 애니를 좋아하는데 이게 결말을 짓고 있지 않다. 요괴들이 너무 귀엽고 인정이 있다.

 

 

블루그레이의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

 

 

얼마 전에 “야쿠자와 가족”이란 영화를 보았다. 조폭 액션물이 아니라 설 자리가 없어져가는 야쿠자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였다. 조직의 의리파 야쿠자가 좋아하는 이성이 생겨서 바닷가로 데려갔는데 그 음울한 풍경이 너무나도 감성적이었다. 저녁 무렵 하늘도 블루그레이, 구름은 더 진한 블루그레이, 물색 또한 블루그레이, 두 남녀는 그냥 역광의 실루엣. 단박에 매료되어서 복사를 떠놓을 생각이다. 언젠가 저런 느낌의 바다를 수채로 칠해볼 생각이다.

 

주연으로 나오는 배우의 이름은 아야노 고, 綾野 剛. 생일을 검색했다.

 

1982년 1월 26일, 辛酉(신유)년 辛丑(신축)월 己酉(기유)일이다.

 

2009 己丑(기축)년이 60년 순환에 있어 기세의 절정인 立秋(입추)가 된다. 프로필을 보니 입추 6년 전인 2003년에 배우로 데뷔했으니 당연히 성공해서 롱런할 운명이다.

 

데뷔 후 10년 뒤인 2013년부터 신인상 등을 타기 시작했고 2014년엔 남우주연상 등 굵직한 상을 받으면서 자리를 굳혔다. 사주를 보면 에민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이번에 본 영화에서도 그랬다.

 

여배우와 2022년에 결혼했는데 운세를 보면 아마도 결혼생활을 이어가긴 어려울 것으로 본다. 일에서 성공할 만큼 한 뒤에 결혼을 하면 으레 그렇다.

 

아야노 고의 출생지를 보니 일본 기후시라 되어있다. 岐阜市. 그러자 절로 떠오르는 생각, 그곳의 기후성은 오다 노부나가, 전국시대의 명장과 많은 인연이 있는 성이란 점이다. 사실 기후시란 명칭은 岐阜, 갈래 길이 많은 높은 언덕을 뜻하는 말인데 오다 노부나가가 성을 차지하고 일대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붙여준 명칭이다. 다시 말해서 기후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立地(입지)를 굳힌 곳이다.

 

 

안개 서린 창밖을 보며 

 

오후 6시 32분, 창밖을 보니 연무와 안개에 서려있다. 건너편 빌딩들이 흐릿하다. 안개란 단어를 모니터에 치는 순간 정훈희의 안개, 그리고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정훈희 씨와 함께 하는 송창식 선생의 기가 막힌 저음도 생각이 난다. 모두 藝人(예인)들이다.

 

특히 송창식 선생은 진정한 마스터이다. 송창식 선생은 1950년이 입춘 바닥이었고 다시 2010년이 입춘 바닥이었는데 꾸준히 여전히 자신의 음악 세계에 탐닉하고 있다. 1990년이 寒露(한로)의 운, 즉 인기 절정이었는데 그때 이미 은거를 택한 것을 보면 道人(도인)이기도 하다. 일반 예인들과는 격이 다르다. 존경한다.

 

오늘의 글은 단비가 반가워서 흥에 젖어 그냥 써 내려갔다. 액면 그대로 隨筆(수필)이다. 비에게 감사 기도를 올린다.

 

시작이 절반이고 진짜 절반에 왔으니 나머진 절로 

 

 

독립 블로그를 시작한 것이 2009년 4월이었고 티스토리에 함께 글을 올린 것이 2018년 3월 27일이었다. 그러니 독립 블로그는 14년이 되었고 티스토리는 5년이 되었다.

 

운명학과 관련해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1월부터였는데 당시 마침 인터넷 신문인 “프레시안”이 시작되면서였다. 메일을 보내서 이런 글을 쓰고 싶은데 게재해줄 수 있겠느냐 문의를 했고 그쪽에서 좋다고 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필명을 “희희락락호호당”이라 지었는데 너무 길어서 나중에 줄여서 “호호당”이라고 하게 되었다. 따라서 “프레시안”에서부터 계산하면 무려 21년과 5개월이 된다.

 

2001년 당시 내 나이는 46세였고 지금은 올 7월이면 68세가 된다.

 

시작할 당시엔 체력이 넘쳐서 한 주에 칼럼을 5개씩 올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하나가 고작이다.

 

독립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어떤 글에 2009년에 시작했으니 30년간 즉 2039년까지 글을 올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독자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러니 이제 내년 4월이 되어야 그 절반인 15년을 채우는 셈이다.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있는데 거의 절반을 채웠으니 마침내 30년을 다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싶다. 2039년이면 호호당의 나이는 84세가 된다. 그때까지는 살아서 숨 쉴 요량이다.

 

 

힘은 꺾여도 뜻은 꺾이지 말아야 하겠으니 

 

 

중국에는 “태극권”이라고 하는 무술이 있다. 무술로는 별로 시원치 않지만 養生(양생)에는 참으로 좋은 운동법이 있다. 태극권 요결이란 책에 보면 氣折意不折(기절의부절)이란 표현이 있다.

 

예컨대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공격을 할 때 내 공격의 氣勢(기세)는 상대에 의해 막히더라도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意志(의지)만큼은 꺾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 사랑한다.

 

유방과 싸워서 끝내 패배한 항우가 마지막으로 읊은 노래의 첫 구절이 바로 力拔山氣蓋世(역발산기개세)였다. 힘은 거대한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다는 것인데 비록 그렇게 하진 못하더라도 그런 뜻을 품었다면 끝까지 시도 또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니 기는 꺾여도 뜻은 꺾이지 말아야 한다는 태극권의 요결을 좋아한다. 참으로 씩씩하지 않은가!

 

나 호호당이 쓰고 있는 블로그 역시 30년을 목표로 정했다면 도중에 숨이 넘어가지 않는 이상 끝까지 도달하고자 한다. 사투리로 “끝까정” 가야 한다.

 

 

물처럼 흘러가야지! 

 

 

세상에서 뜻을 이루는 방법도 나 호호당은 잘 알고 있으니 바로 老子(노자)가 말해준 上善若水(상선약수)이다. 가장 뛰어난 것은 마치 물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물처럼 흘러가면 된다. 아래로 아래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막히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 고이면 채운 다음에 넘쳐서 가면 된다. 바다로 가겠다는 의지만 변치 않으면 물은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뜻도 있고 방법도 알고 있으니 2039년까지 글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호호당도 물처럼 흘러간다.

 

최근 2-3년 사이 체력이 분명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는데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올 들어 그간의 행로를 약간 수정할 참이다.

 

 

이제 바둑으로 치면 '큰 끝내기 국면'에 이르렀으니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먼저 상담을 당분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제자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그냥 글만 쓰는 방식이 있다. 먹고 사는 생활비 문제는 주식거래로 조달할 수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기에 가능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 시간에 블로그 글과 함께 “자연순환운명학”에 관한 전체 개설서와 각론을 써서 세상에 남겨야지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혹시라도 도중에 불현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으니 노후준비가 아니라 저승채비를 해놓아야 할 게 아닌가 싶다.

 

강의 역시 한 해 내내 하지 않고 반년 정도 하고 나머진 좀 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생각 중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강의를 하는데 그간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토요일마다 국립국악원에선 좋은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공연을 하는데 그간 가보질 못했다는 점이다.

 

“소리”라든가 아악 향악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물론 서양 클라식도 좋아하지만 나 호호당은 우리 음악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 등지의 음악을 더 좋아한다. 거문고 소리는 당연하고 일본의 세줄 현악기인 사미센이나 중국의 일곱줄 현악기인 칠현금도 꽤나 좋아한다. 그러니 시간을 낼 수 있으면 들으러 가고 싶은 것이다.

 

주식이라든가 여타 투자기법에 대해서 나 호호당은 나름의 秘法(비법)이 있지만 돈에 관한 것이니 세상에 공개할 수가 없다. 아들에게도 가르쳐줄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혹시라도 쉽게 돈을 벌 것 같으면 호호당의 아들은 자신의 싸움을 포기할 수 있겠고 심지어 손주는 나중에 痲藥(마약)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주식 강좌를 하고 있는데 그 기술을 원액이라 한다면 물을 왕창 넣어서 즉 희석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그 정도만 배우는 이가 소화해도 주식에서 돈을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 호호당의 작품은 바로 자연순환운명학이다. 나 호호당이 글로벌 권력의 중심인 미국의 하버드 대학이나 영국의 옥스퍼드 그리고 캠브리지에서 강의를 하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온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운명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 활용이 가능하니 권력 중심인 미국이나 영국 등지의 머리 좋은 친구들이 접하면 미친 듯이 연구를 해서 새롭고도 거대한 지식의 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이 유럽의 오지 산골인 루마니아의 한 수도승이 쓴 책이라서 다 멸실되었으나 36년 만에 영국의 실력 있는 생물학자가 네델란드의 헌책방에서 발견하는 바람에 현대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기본 이론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니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도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사이에 반도체 좀 만드는 바람에 알려졌을 뿐 그렇지 않았다면 사실 루마니아나 사우스 코리아나 글로벌 권력 중심에서 볼 때 별 반 차이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책을 써야 하겠다. 이제 때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약간 시간을 할애해서 수채화 작업도 즐기면서 말이다.

 

 

아쉬운 건 그저 언어에 관한 것들이라네

 

 

그저 아쉬운 것은 언어학에 관해 내가 알아낸 내용들인데 이거야말로 아깝다. 진짜 대단한 내용들인데 세상이 모르고 있으니 그저 혀를 찰 뿐이다. 하나 예를 들자면 현대중국어는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말을 한자를 써서 바꾸어놓았을 뿐이란 점이다.

 

그렇기에 그 이전의 중국 한문이나 漢語(한어), 중국인들 표현으론 古文(고문) 그리고 古語(고어)와는 유사하면서도 실은 만주어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중국어가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 만주족은 우리와 같은 갈래이기에 우리말과 근본 구조가 같은데 그걸 한자를 통해 표현하는 오늘날의 중국어, 현대중국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중국에서 보통화, 즉 보통말이라 부르지만 원래 그건 베이징어였다. 그런데 그 베이징어를 서양에선 만다린(Mandarin)이라 부른다.

 

만다린이 무엇인가 하면 만주족이 지배하던 淸(청)제국 시절엔 官話(관화), 즉 관료들이 쓰는 말이라 했는데 당시 핵심 관료들은 만주 또는 여진족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만다린이란 즉 만주족 출신의 大人(대인), 따런을 뜻했다. 滿大人(만대인)이 쓰는 말, 즉 한자를 빌려 쓰는 만주족의 말이 오늘날 중국의 표준어가 된 셈이다. 그러니 현대 중국어는 만주족의 말이다. 또 만주어는 우리말과 같은 갈래이다.

 

이런 것 말고도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지만 나 호호당이 이런 이슈를 제기하고 나서자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언어학하면 서양 사람들이 체계를 세워놓았고 우리 국내 언어학은 그걸 가져다가 포장 판매하는 방식인데 그게 그렇지 않다고 나설 자신이 없다. 학문이야말로 보수적이고 기득권의 대물림인 것을 어쩌랴! 그래서 싸울 시간이 없다. 굳이 나 호호당이 나서지 않아도 때가 되면 머리 좋은 사람들이 도전해갈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더 이상 과장할 것도 또 숨길 것도 없어서 

 

 

이런 글을 함부로 쓰고 있자니 스스로도 약간은 그렇다, 너무 큰 소리 치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젠 인생을 마무리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있어서 없는 거 지어낼 마음도 없지만 있는 거 없다고 숨기고픈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독자님들의 이해를 바란다.

 

 

그저 자축하는 의미에서 

 

 

이제 그만 마무리해야 하겠다. 오늘의 글은 호호당 블로그가 시작된 지 14년, 30년 목표의 거의 절반에 이르렀기에 自祝(자축)하는 글이었다.

 

봄날 스님과의 문답

 

 

어제는 맑은 하늘에 봄빛이 참으로 고왔다. 벚꽃도 보름이나 앞당겨 피어나건만 오늘은 바람이 시샘을 한다. 가뭄이 이어지니 비를 기다려본다.

 

어제 오후 아내가 다녀오곤 하는 절을 찾아갔다. 종로구 성북동에 있는 허름한 암자인데 나 역시 그곳 스님을 좋아하는 까닭에 간만에 찾아갔다. 세 번째 방문이었다. 일요일 오후라 가는 길은 좀 막혔으나 절은 한적했다. 미리 연락을 드렸던 터라 스님이 시간에 맞춰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갔다.

 

스님과 마주 앉자 먼저 돈 봉투를 건넸다. 스님은 이거 뭐! 하면서 시늉을 했고 나 또한 “돈에 이유가 있습니까?”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스님, 아무리 여러 불경의 여기저기를 읽고 되새김을 해도 저는 답을 찾지 못합니다” 했고 스님은 즉각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게 그렇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했다. 스님은 그냥 스님으로 계실 것입니까 아니면 勝負(승부)를 보실 생각이십니까? 하고.

 

곧 土窟(토굴)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답을 찾으면 나오고 아니면 그 안에서 그냥 죽을 생각입니다, 한 살이라도 기력이 있을 때 해볼 생각입니다. 스님의 망설임 없는 답변이었다.

 

재작년 처음 뵙을 때 이 스님은 아주머니 신도들 앞에 앉혀놓고 불경의 구절들이나 늘어놓고 있을 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종단이란 것 또한 조직이고 조직에서 잘 풀리려면 뒷배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스님은 그런 일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禪師(선사)들의 길을 따라서 가시겠다는 기색이 비쳤다.

 

그러다가 이제 드디어 결심을 한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고작 “나는 무엇인가?” 하는 話頭(화두) 하나, 그것만 가슴에 품고 토굴에 들어가서 끝을 보겠다고 하시니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진검승부!

 

가슴이 뜨거워졌다. 처음 뵈올 때부터 그랬는데 역시 승부를 보시고자 하는구나. 어쩐지 며칠 전 문득 스님을 한 번 찾아뵙고픈 마음이 들었는데 그게 까닭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에 나는 찻잔을 비우고 “그럼 이만” 하고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스님은 “혹시라도 消息(소식)의 절반이라도 얻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기약을 하셨다.

 

 

부디 한 소식 얻으시길... 

 

 

절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허름하고 민망하다. 원래 성북동의 스러져가는 가옥이었는데 어느 신도가 희사하는 바람에 절이 되었다. 법당엔 원래 회칠을 한 약사보살님만 계셨는데 그간 스님 혼자서 열심히 포교해서 생긴 돈으로 삼존불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돈을 얼마 들이지 못한 탓에 부처님도 초라하고 법당도 초라하다. 그저 스님의 정성만 갸륵하다.

 

절의 문을 나와 시멘트 계단을 내려오면서 잠시 생각을 했다. 절반의 소식이라도 얻으면 연락하겠다는 저 말씀이 10년 뒤일까 아니면 영영 듣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절로 아! 하고 감탄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 번 스님 계신 곳을 향해 뒤돌아서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성원을 보냈다. 스님, 파이팅!

 

스님은 나 호호당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시지만 나는 스님의 팔자를 알고 있다. 처음 봤을 때 지나치는 어조로 천연덕스럽게 스님의 생년월일시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거사님도 사주 좀 보십니까?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닙니다, 하고 답했다.

 

그래서 분명 '한 소식' 할 것이라 믿고 있다. 다만 그게 언제냐의 문제일 뿐.

 

佛家(불가)에선 깨침을 얻으면 “한 소식 했다”는 표현을 쓴다는 점 참고로 알려드린다.

 

도둑이나 사기꾼은 ‘한 탕’을 노리는 법이고 사업하는 이라면 한 건 터뜨려보자고 나선다. 그러니 절밥을 먹은 禪僧(선승)이라면 당연히 ‘한 소식’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 나를 매혹시키는 사람

 

 

죽기 살기. 나 호호당은 이런 마음가짐을 참으로 좋아해서 간혹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실로 매료된다.

 

백 척의 깃대 꼭대기까지 올랐다면 당연히 허공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럴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오르질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승부를 보지 않는 삶을 시시하게 본다는 말은 아니다. 시시한 삶 역시 나름의 묘미가 있는 법이니 그렇다. 다시 말해서 모든 길은 다 공평하다.

 

미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보지 않은 길”이란 시를 통해 노란 가을 숲에서 두 길을 만났는데 자신은 발자취가 더 적어보이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나머지 길 역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처럼 길은 동등하다, 공평하다. 어느 길을 가든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생겨먹은 게 있어서 발자취가 적은 길을 택하기도 할 것이고 또 조금은 더 익숙해 보이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는 얘기이다. 그저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타고난 운명의 문제이기도 하고 취향의 문제 또는 天性(천성)의 문제이기도 할 뿐이다.

 

다만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한 자를 만나면 그게 조금은 더 멋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나 호호당은 행복한 삶보다는 멋진 삶이 더 좋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절로된 自然(자연)이지만 그게 또 힘든 일이라서 

 

 

해에 따라 비가 부족하기도 하고 기온이 달라서 들쑥날쑥이지만, 올 해에도 어김없이 개나리 목련 피어나고 이어서 벚꽃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다. 무심히 보면 저 모두 절로 되는 일이기도 하고 들여다보면 모두 피 터지게 애쓰고 있다.

 

그렇다, 수유꽃도 피어났다. 아파트 단지 경내엔 수유 나무가 제법 된다. 연한 황록의 꽃이 피고 있다. 한자로는 茱萸(수유)이다. 하지만 나는 여리고 쪼그만 수유꽃을 볼 때면 ‘잠깐’을 뜻하는 須臾(수유)란 말이 생각난다. 그래 수유꽃은 잠깐 피었다 지지, 한다.

 

꽃이란 게 사실 번식을 위한 식물의 기관일 뿐이다. 그렇지만 워낙 인상이 강하고 때론 우리를 魅惑(매혹)시키는 까닭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이고 개체처럼 느껴진다. 꽃이 지면 괜히 슬프듯이 말이다.

 

장미는 원래 찔레와 같이 가시나무여서 침입을 막는 울타리 역할을 하던 나무였는데 사람들은 그 꽃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꽃은 영문을 모를 것이다, 사람들이 왜 우리를 정성을 들여 재배하고 가꿀까? 암튼 좋은 일이야, 할 것 같다.

 

 

호호당의 출구전략

 

 

나 호호당도 시들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엔 건강은 그냥 기본이고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그저 즐거운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이제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갈등이다. 즐거운 일도 좋지만 즐거운 일을 받쳐줄 몸뚱이가 시원치 않으니 그렇다.

 

그런 탓에 올 해 들어선 장차의 일을 조금씩 수정해가고 있다. 죽기 전에 자연순환운명학에 관한 개론서와 각론을 어서 마무리해야 하겠다는 생각, 체력이 필요한 강의도 조금씩 빈도를 줄이고 증시강좌는 가급적 하지 않을 생각이다. 상담도 서서히 제자에게 넘겨줄 생각을 한다. (나 호호당이 진짜 제자 또는 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직 한 명밖에 없다.) 일종의 마무리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가진 것이라곤 눈앞의 이 현실밖에 없다. 과거는 추억 속의 관념이고 미래 또한 그렇다. 그저 눈앞의 현실이 전부이다. 그러다가 언제 때가 되면 눈앞의 현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물론 세상에 태어난 자나 만들어진 자는 자연순환의 이치에 따라 변천해간다. 하지만 결국 가진 것은 눈앞의 이 찰나와 다음 찰나로 이어지는 현실이 전부이다. 그렇기에 존재에 관한 생각 그리고 存在論(존재론)적 생각은 어차피 幻影(환영)일 수도 있겠다.

 

찰나와 찰나를 이어가면서 잘 살아봐야지, 스님을 뵙고 온 호호당의 이 순간 결론이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뭔가 몰두하다 보니 시일이 흘렀네!

 

 

글을 올리지 않은지 근 20일이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느라 어언 그렇게 되었다.

 

먼저 하나는 책을 읽느라 그랬다. 책을 사거나 가지고 있던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중문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면 하단에 維基文庫(유기문고)란 게 있다. 그 곳에 들어가서 八仙得道傳(팔선득도전)이란 환타지 소설을 읽었다.

 

 

환타지 소설을 읽다보니 

 

 

중국 청나라 시절의 소설이다. 여덟 분의 신선 즉 八仙(팔선)이 도술을 익히고 활약하는 내용인데 분량이 삼국지의 거의 2/3 정도 되는 장편이라 미처 다 읽지 못했다.

 

이런 소설을 중국 소설에선 장르를 神魔(신마)소설로 분류한다. 그 원조는 손오공이 등장하는 西遊記(서유기)란 하겠는데 사실 ‘소오강호’라든가 ‘사조영웅전’과 같은 무협지는 신마소설의 연장선에 있다.

 

신선을 다룬 얘기는 당연히 道家(도가) 또는 道敎(도교)와 관련이 크다. 도가 사상은 세속을 벗어나 超逸(초일)한 데가 있고 도교는 도를 닦아 신선이 되자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온통 도를 닦는 법에 관한 다양한 용어와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어 흥미롭다.

 

도가의 淸淨(청정)과 無爲(무위), 氣(기)의 수련, 丹(단)을 만드는 방법 등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러니 일찍이 숱한 무협소설을 읽었고 ‘주역참동계’라든가 갈홍이 남긴 것으로 전하는 ‘포박자’와 같은 도교 사상의 책을 접한 나 호호당으로선 이런 종류의 환타지 이야기를 엄청 좋아한다. 처음 며칠은 ‘팔선득도전’을 읽느라 시간을 보냈는데 몸이 좀 불편한 탓도 있긴 했다.

 

이제 감히 말하지만 중국의 여러 다양한 術法(술법)에 관한 책들은 신비한 데가 있긴 하지만 이론과 논리가 약하다. 차라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용호비결’ 같은 丹學(단학) 서적이 훨씬 나은 편이라 여긴다. 게다가 운명에 관해 오랜 비밀을 밝혀낸 나 호호당의 입장에서 볼 때 더더욱 논리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신비한 탓에 환타지로선 전혀 부족함이 없다.

 

 

강의 도중 스쳐가는 영감을 얻었으니 

 

 

그러던 중 주식강좌를 하는 중에 수강생들은 당연히 눈치를 차리지 못했겠으나 가르치는 과정에 내 스스로 무언가 靈感(영감)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머릿속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2월 8일 戊戌(무술)일의 일이었다. 자꾸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생각하다보니 어언 그간의 해오던 일들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이에 좀 더 시간을 내어 궁리해보자, 곧 답을 얻어서 정리가 되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그게 무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 호호당의 경우 직관적으로 무언가 이렇구나 싶은 생각이 스치면 그걸 확실하게 검증해보는 성격이라 끝까지 파고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더더욱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주식투자 정도야 이미 득도했는데 

 

 

사실 나로선 주식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정도는 이미 2017년경에 이르러 得道(득도)의 경지로 들어섰다. 그럼 떼돈이나 벌지 왜 사주팔자나 상담해주고 밥을 먹느냐 물어보는 이도 있겠지만 내 경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대답을 드린다.

 

나 호호당이란 사람 또한 일종의 특이한 사람이라서 궁리하길 좋아하지 돈을 벌고 세력을 얻어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는데 별 관심이 없다. 진실로 그렇다.

 

주식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자연순환운명학과도 연관이 크지만 그 이전에 하나의 동기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게 1987년의 일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세계

 

 

미국에선 주가의 움직임이 무작위(random)로 움직인다는 가설, 즉 랜덤워크 가설(Random walk hypothesis)이란 게 있는데 한 때 꽤나 유행을 했다.

 

당시 서른 초반이었던 나는 글쎄,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궁리하기 좋아하는 나 호호당은 “사물의 무질서”는 우리가 그 속에 있는 규칙 또는 법칙을 모르고 있기에 무질서하다고 단정을 짓는 것이지 그 안에 정연한 논리와 질서 그리고 법칙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늘 해왔다.

 

그래서 1987년 랜덤워크 가설에 관한 책을 읽은 뒤 랜덤워크가 아닐 거란 전제 하에 연구를 시작한 것이 지금 나 호호당의 주식 이론이고 기술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순환에 바탕을 두고 내가 창안해낸 기술이다.

 

(일본의 어떤 양반이 “일목균형”이란 기술을 개발했으니 우리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훨씬 나은 기법을 개발할 법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게 30년이 흘러 2017년이 되자 랜덤워크? 지랄, 뭘 모르니까 저런 말이 먹히지! 하면서 可笑(가소)롭게 여길 수 있었다. 무질서하고 랜덤으로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 마음은 편할 수 있겠으나 절대 그렇지 않다. 주가의 움직임 또한 철저하게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여간다는 것을 이제 나 호호당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 호호당이 평생에 걸쳐 즐긴 세 가지 주제 

 

 

나 호호당이 평생을 두고 연구해온 주제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언어학에 관한 것인데 그런 것이야 우리나라에서 아무 관심도 없다, 반도체나 AI를 연구해야지 언어학 따위 누군들 관심이 있으랴! 그래서 나 혼자 연구하고 알고 즐기다가 갈 뿐이다.

 

또 하나는 운명에 관한 것인데 이 분야는 나름 사람들의 관심도 있고 해서 지금 業(업)으로 하고 있다. 운명학에 관한 것은 내 나름 도달한 수준에 대해 만족하고 있기에 남은 일은 책으로 만들어 後代(후대)에게 전하고자 한다. (장차 2044년에서 2050년 정도가 되면 전 세계에 퍼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나 호호당의 사후가 될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증시에 관한 것인데 주식 정도는 사실 내게 심심한 수준이다. 그냥 하면 그냥 수익을 낸다. 땅 짚고 헤엄치기라 할까. 그래서 인연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내가 들어가서 본 새로운 경지는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올 해 2023년은 1987년으로부터 36년이 흘렀다. 세상 만물은 30년이 되면 어떤 변곡점에 도달하고 다시 6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경지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졸지에 폐관수련에 들어갔으니  

 

 

이번 우연한 계기에 시작된 연구는 그야말로 무협지에서 말하는 閉關修練(폐관수련)이었다. 무공의 고수가 다른 일이나 외부 사람의 방해를 막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새로운 무공을 닦는 일을 말한다.

 

2월 8일 戊戌(무술)일에 시작된 연구는 30일이 흘러 3월 11일 戊辰(무진)일에 이르러 火候(화후), 즉 수련의 어떤 변곡점에 들어섰고 다시 6일이 지나 3월 17일 甲戌(갑술)일로서 어떤 관문을 뚫었다. (물과 쌀을 담은 솥을 밑에서 계속 불을 지펴대니 한소끔 끓어올라 쌀이 밥이 되기 시작하는 과정을 ‘화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武陵桃源(무릉도원)의 일화,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바위 협곡 속으로 계속 들어가니 어느 순간 시야가 밝아지면서 신비한 세상 즉 도원의 仙境(선경)으로들어섰다는 도연명의 얘기처럼 새로운 세계로 나 호호당은 들어섰다.

 

오늘 3월 19일 지금 나 호호당은 그 새로운 경지를 논리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 경지는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가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왜냐면 돈에 관한 것이라서 그렇다.

 

이미 나이도 들었고 돈에 대한 욕심도 없는 나 호호당이니 그저 즐기다 갈 생각이다.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前人未踏(전인미답)의 세계를 본 것만으로 만족한다.

 

진실로 뭘 알고 있는 자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얘기, 知者無言(지자무언)이란 말이 공연한 말이 아님을 절감한다.

 

 

돈이란 게 두려운 바가 있어서 

 

 

주식강좌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그저 보통 사람들이 주식 게임을 통해 해마다 수익을 적당히 낼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면 충분하다. 돈이란 것은 두려운 바가 있는 물건이기에 그렇다.

 

운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깨우친 바, 돈이 들어왔다가 다시 떠나갈 땐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할퀴고 상처를 내고 나간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 호호당이니 그렇다.

 

돈이란 것,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소중한 물건이다. 또 그런 까닭에 돈이란 것은 사람을 철저하게 망칠 수도 있는 물건이란 생각을 늘 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의 욕망이란 놈이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놈이라서 말이다.

 

나 호호당의 경우 그저 超逸(초일)한 마음, 즉 큰 걸음걸이로서 이 世間(세간)을 건너가고자 한다. 싯다르타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받아서 살 순 없어도 執着(집착)과 渴愛(갈애)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살아야지만 갈 때 수월하게 웃으며 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진다.

 

어쩌면 이번 주식 강좌도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가르치다 보면 욕심이 나서 자칫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줄 가능성이 있으니 내 스스로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도 들고 나아가서 쉽게 돈을 벌게 되면 그게 오히려 그 사람에게 禍(화)를 초래할 우려도 들기 때문이다.

 

그냥 지내기가 심심하면 1년에 한 번 세 시간 분량의 특강 정도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자연순환운명학 강의도 장차 좀 줄이고 책 쓰는 일에 매진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

 

그간 글이나 동영상이 뜸해서 궁금하셨던 독자님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렇게 알려드린다. 정리가 끝나면 다시 그림도 그려서 올리고 글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올릴 것을 약속드린다.

만화 "딜버트"의 갑작스런 종료 

 

 

“딜버트”란 미국 만화의 작가, “딜버트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진 스콧 애덤스(Scott Adams)가 만화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되었다. 유튜브에서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한 까닭이다.

 

전 세계 65개국, 25개 언어로 2,000여개의 신문들에 연재되던 만화가 하루아침에 퇴출되었다. 나 호호당 역시 젊은 날 꽤나 즐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미국은 다인종 국가여서 인종 차별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스콧 애덤스는 끝났다, 쯧쯧!

 

이 모두 ‘운빨’이다. (운발이라 하면 알아듣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일부러 이렇게 썼다.)

 

참고로 얘기하면, 운발에서 발이란 말은 우리말의 ‘손과 발’에서의 발이다. 가령 ‘빗발’이란 말은 한자어인 雨脚(우각)이란 말에서 왔는데, 가령 소나기가 올 때 비구름의 이동에 따라 비가 집중되는 곳이 옮겨간다, 이를 비의 발이라 했기에 그런 표현을 쓴다.

 

 

생년월일시를 찾아서 살펴보니 역시 그렇네

 

 

궁금해서 생년월일을 찾아보았더니 음, 이제 물러갈 때가 맞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957년 6월 8일 오전 2시 반, 사주는 丁酉(정유)년 丙午(병오)월 辛亥(신해)일 己丑(기축)시이다.

 

따라서 2001년 辛巳(신사)년이 60년 운세 순환, 즉 운발에 있어 立秋(입추)가 되고 30년 전인 1971년과 그로부터 다시 60년 뒤인 2031년이 입춘 바닥이 된다. 따라서 올 해는 애덤스에게 있어 冬至(동지)의 운이다.

 

동지의 운은 그 어떤 것도 조심하고 웅크려야 하는 때인데, 결국 저런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의 근본 원인은 좀 더 거슬러 가야 한다. 애덤스의 경우 원래 비판적인 말을 많이 해왔고 특히 정치나 사회 이슈와 관련해서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잡음이 적지 않았는데, 특히 그가 2018년부터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해온 것이 이번 일의 단초가 되었다.

 

자신의 운이 쇠하는 것은 당연히 몰랐을 것이고 원래 비판적인 말을 많이 해오던 사람이라 이번 일은 진작부터 정해진 코스였던 셈이다.

 

결국 운발이 다한 셈이다. 운이 괜찮을 땐 실수를 해도 넘어가는데 말이다.

 

 

운발에는 철저하게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거 

 

 

운명을 연구해오면서 늘 느끼고 그게 거듭되다 보니 생겨난 所懷(소회)가 있다. 사람의 입장에선 운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부침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견지에선 사람을 만들어 키우고 일을 하게 하서 功業(공업)을 이루게 한다,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부귀를 누리게 하다가 이윽고 때가 되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이백의 詩(시)에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이란 구절이 있다. “하늘이 나의 재주를 만들었으니 반드시 쓸 데가 있으리라” 하는 내용이다.

 

저 말이 맞다, 그런데 다시 새겨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재주 자체는 功(공)을 이루게 하더라도 사람 자체는 期限(기한)이 있어 때가 되면 폐기 처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스콧 애덤스의 성공과 실패 

 

 

딜버트 만화와 딜버트의 법칙으로 한 때를 풍미했던 스콧 애덤스의 스토리를 전반적으로 한 번 정리해보자.

 

1971 辛亥(신해)년, 그의 나이 14세 무렵 입춘 바닥이었다. 1979년 춘분, 그냥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경영학 석사(MBA)도 취득했다. 그러고선 은행 창구(teller) 일도 하면서 나름 열심히 자기계발을 했다.

 

그러다가 1986년의 어느 날 어릴 적부터 소질이 있던 만화 작업을 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바로 立夏(입하)의 운이었으니 뭔가 땅거죽을 뚫고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직장 생활과 개인적으로 만화 습작을 병행했다.

 

결국 그 만화가 바로 “딜버트”였고 어렵지만 서서히 발전해서 드디어 1989년부터 일부 매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1989년은 그에게 있어 60년 순환에 있어 본격 여름이 시작되는 小滿(소만)의 운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주어진 운의 프로그램대로 살아갈까! 참 신기하기도 하지.

 

독자들의 피드백을 작업에 최대한 반영하면서 만화 딜버트는 점차 인지도가 높아져갔다. 이에 애덤스는 1995년에 가서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71년 입춘 바닥으로부터 24년, 12년이 두 번 지날 무렵이면 누구나 나름의 재주와 적성으로서 생계의 틀을 갖추게 되는데 그의 타고난 天職(천직)은 만화작가였던 것이다.

 

연재하는 신문이 800개에 달하자 그는 더욱 자신감이 붙어서 1996년 입춘 바닥으로부터 25년이 지난 시점에 가서 “딜버트의 법칙”이란 책을 간행했다. 그리고 이로서 영향력을 갖춘 인플루언서(Influencer))의 길로 접어들었다.

 

(딜버트의 법칙은 국내에서도 출간되었고 나 호호당도 구매해서 낄낄 대면서 흥미롭게 잘 보았다.)

 

그 이후 2001년 입추를 맞이한 뒤 더욱 승승장구해서 전 세계 매체 수백 군데에 그의 만화가 연재되면서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때가 되었으니 물러날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 立冬(입동)의 운이 되면 열정이 사라지고 그러면서 재미가 없어지는 법인데 그의 경우 2016년이었다. 그 직전 그는 블로그를 통해 트럼프 지지를 표명하면서 정치 쪽에 발을 들였는데 실은 이게 亡兆(망조)라 해도 무방하다.

 

2021년부터 조 바이든 정부가 들어섰고 그로서 그의 발언은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2021년은 辛丑(신축)년, 大雪(대설)의 운이니 본격적으로 물러날 준비에 착수해야 했건만 삶이 무료해진 그는 더욱 날카로운 발언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이번 일로 거의 돌이키기 어려운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번 일 역시 애덤스의 실수라기보다는 세상이 사람을 쓰고 난 뒤 버리는 모습이란 생각을 한다.

 

“딜버트의 법칙”은 1990년대 미국 내에서 기업의 인수 합병(M&A)과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등이 성행했던 시절 직장의 풍토를 묘사하고 있다. 그 흐름이 30년이 흘러 이제 완연히 바뀐 것이고 따라서 애덤스 또한 시대를 놓친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유명인사가 되거나 셀럽이 되면 그 다음엔 명성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구매 충동을 일으킨다. 애덤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어서 팔기도 하고 또 실패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의 관점에서 보면 2016년 입동의 운으로서 박수 받으면서 서서히 퇴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세하는 법

 

 

사람의 처세는 다음과 같으면 滿點(만점)이다.

 

60년 순환에 있어 입하에 준비해서 하지가 되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다시 30년이 흘러 입동이 되면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하다가 동지로서 모든 것을 접고 무대 뒤로 퇴장하면 아무런 일이 없다.

 

스콧 애덤스의 경우 올 해가 동지의 운이다. 그간에 물러날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강제로 물러나게 된다, 즉 强退(강퇴)의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역사를 살펴봐도 동지 넘어서까지 과욕을 부리다가 삶 전체가 실패로 끝났던 일들로 가득하다. 이를 일러 時節(시절)을 몰라서 그렇다 라고 말한다.

 

 

강원도 어느 산사 마당에 핀 홍매화  

 

 

2003년 어느 봄날이었다. 강원도의 작은 암자에 가서 하루를 묵었다. 어쩌다 인연이 되어 바둑 친구가 된 스님이 그 암자에 계시는 바람에 2001년 봄, 그리고 2002년 봄에도 그 암자를 찾아서 두어 밤을 보냈었다.

 

밤새 바둑을 두었기에 새벽 무렵 잠이 들었다가 대낮이 되어서야 깨어난 터였다. 멍을 때리면서 무심히 바깥을 내다보았다.

 

요사채 앞마당에 홍매화 한 그루가 있었는데 우연히도 연이어 개화 시기였던 모양이다. 그냥 방안에서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 매화를 보려는 것도 아니었다. 밖을 내다보는데 마침 그곳에 매화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고 그러면서 매화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가건만 매화는 그냥 그 자리에서 한창 만개하고 있었다. 마치 작년 재작년의 그 매화꽃 같아 보였다. 처음엔 그저 봄이 되어 다시 피어난 꽃일 뿐이라 했는데 그 꽃들이 내게 “아냐, 난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야”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혼자 슬쩍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번쩍 들었다.

 

꽃이란 게 사실 오래 피어있지도 않는다, 만개했다가 시시각각 시들어간다. 그런대 그런 저 꽃들을 다른 꽃이라 해도 되겠으나 같은 놈이라 해도 말이 되네 싶었다.

 

 

늘 떠나가지만 늘 되돌아온다면 

 

 

모든 게 無常(무상)해서 늘 변해간다고 하지만 달리 보면 늘 같은 모습이니 有常(유상)이라 해도 되네, 새롭게 피어난 꽃이 분명하건만 실은 같은 행위를 늘 반복하고 있잖아?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으니 같은 거잖아, 즉 常(상)하다 해도 될 것 같았다.

 

늘 떠나가지만 늘 되돌아온다, 거 참 이상하네, 신기하네, 그 생각에 매달려 하염없이 그 매화꽃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이란 게 화살처럼 한 번 쏘고 나면 핑-하고 날아가서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 보통의 관념인데 나는 그 순간 시간이란 게 순환하는 어떤 무엇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에 더 마음이 갔다.

 

시간이란 사물의 변화를 설명해주는 툴(tool)이다. 그런데 변화하면서도 늘 같은 모습으로 반복된다면 시간을 순환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정한 때에 이르면 해마다 늙어간다, 하지만 그건 몸을 많이 써서 그런 것일 뿐 시간이 우리를 늙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고물이 되는 건 많이 달려서 그렇지 시간이 가서 그런 것도 아니듯 말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시작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 호호당의 오랜 연구 과제였던 “자연순환운명학”이 胎動(태동)하고 있었다.

 

가만 있어봐, 지구상의 대표적인 순환의 숫자는 60 이다. 고대 바빌론의 60진법, 이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오는데 걸리는 날자, 즉 365일과 나머지 지저분한 숫자들에서 왔다. 옛 사람들도 1년이 365.2425... 으로 이어지는 무한소수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냥 깔끔하고 아름답게 360으로 정리했다.

 

황도대의 태양이 하루에 1도씩 움직여서 1년이면 360도를 움직여서 제 자리로 돌아온다고 했다. (거 봐라 돌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시간은 돌아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360을 60이 여섯 번 이어지는 숫자로 한 것이 바로 60 進法(진법)이다. 그 60 진법을 가져다 중국에서 만든 것이 甲子(갑자) 乙丑(을축), 으로 이어지는 60갑자인 것이고.

 

지금도 시간 단위는 여전히 60 진법을 쓰고 있다. 한 시간은 60분, 1분은 60초. 60을 나누어서 12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 하루는 24시간, 중국에선 12시진, 그런가 하면 1971년까지 영국의 1파운드는 12 실링이었다.

 

 

"시간의 화살"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간을 쏘아진 화살로 보는 관념은 내가 알기로 아우구스티누스, 4세기 경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그 양반이다. 한 번 쏘아져서 멀리 날아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우리를 많이 힘들게 하고 슬프게도 한다.

 

연인과 데이트하고 나서 헤어질 때 괜히 또 봐, 이런 말을 하겠는가! 되돌아온다는 말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See you again, 짜이찌엔(再見), 우리 다시 만나요, 잘 가고 또 봐, 등등.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直線(직선)으로 파악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한 것은 신학 敎理(교리)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겠으나 나중에 근대 이후 과학이란 놈이 위세를 떨치면서 그런 식으로 대못을 박으면서 아주 그렇게 확정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인생 한 번 살다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게 싫어서 여러 문화권에선 輪回(윤회)와 轉生(전생)을 더 믿었던 것이다. 기독교 또한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긴 하지만 신앙을 잘 가지면 죽어서 알 수 없는 으슥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간다고 위안을 삼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오늘날 사실상 무신론 또는 회의주의가 더 우세한 시대란 점을 감안하면 “시간의 화살”이란 관념은 아주 고약하다. 공주를 많이 한 스님일수록 윤회와 전생을 잘 믿지 않는 눈치이고 목사님들도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란 생각을 은연중에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더욱 더 그렇다. 우리를 불안케 한다.

 

이런 얘긴 그만하고 아무튼 2003년 어느 봄날 산사에서 나는 자연순환학의 기초 개념을 세울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몸으로 느껴보니 

 

 

산사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60년을 한 해 열 두 달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5년은 한 달이 된다. 그리고 한 해 12개월의 순환을 통해 나타나는 모습이 사람에게 그대로 나타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으로서 사람의 운명을 설명해보자, 이게 토대가 되었다.

 

그 이후 나는 한 해의 순환을 아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 시기에 맞추어 움직이고 변화해간다.

 

그 바람에 24 節氣(절기), 즉 각 절기마다 나타나는 변화와 현상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했다. 나중엔 다시 72候(후), 즉 5일마다의 변화도 체감할 수 있었다.

 

변화해가지만 다시 되돌아온다, 반복하면서 변화해간다.

 

 

이젠 나름 도가 통했지만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이제 나는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이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는지 또 어떤 절기를 지나고 있는지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보지 않아도 直感(직감)한다. 거의 틀림이 없다. 모습과 자세, 목소리, 차림, 말과 행동을 통해 고스란히 다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부유한 때는 그 사람 운의 60년 순환에 있어 立冬(입동) 무렵이다. 자신감과 함께 여유도 부리면서 약간은 교만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재미난 세월은 다 보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면 꽤나 실망하겠지.

 

겉모습이 초라해 보이고 가진 게 없어 보여도 눈빛이 형형하고 도전적이면 이제 夏至(하지), 즉 6월 22일의 절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룬 건 없지만 벌써 여러 번의 큰 싸움을 치르면서 체화된 전투력이 있어 보이면 8월 하순의 모습, 處暑(처서)인 사람이다.

 

 

가장 아름다운 절기는 소만이라네 

 

 

그런데 사람이 나 호호당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때가 따로 있으니 바로 5월 20일 경의 小滿(소만)이다. 힘든 과정을 겪었기에 겸손하고 가식이 전혀 없다. 위선이나 자신감도 없다, 그저 말갛다. 그리고 푸릇푸릇하다.

 

운세가 소만을 지나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때도 끼지 않았고 화려함도 전혀 없지만 그 사람의 본 면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미모를 떠나서 그 아름다움에 늘 탄복한다.

 

5월 하순의 밤공기를 생각해보라. 그 무렵이면 밤에도 寒氣(한기)가 없다. 자켓을 벗고 걸어도 전혀 춥지 않다, 셔츠 소매를 걷을 것 같으면 사랑스런 밤공기가 살을 어루만진다. 바람도 부드러운 微風(미풍)이다. 낮으로 시간을 내어 바깥에 나가면 화창한 초여름의 신록이 상큼하다. 그리고 문득 뻐꾸기 우는 소리도 들린다. 모든 게 사랑스럽다.

 

5월 하순의 그 모든 싱그러움이 60년 순환의 소만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선 체취로서 동작으로서 그리고 목소리 속에서 느껴진다. 당장은 어떤 미래도 있어 보이지 않지만 실은 이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가진 게 없기에 가능성은 無限(무한)의 영역이다, 그 무한한 가능성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한다.

 

이건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소만의 운인 사람에게선 모두 그렇다. 몇 년 전 70대 후반의 어르신이 상담을 왔다 갔는데 운세가 소만이었다. 몸은 늙어서 볼품이 없었지만 눈빛은 5월 하순이었다. 지병이 있어서 스스로 얼마 살 지 못한다고 토로하시면서 지나온 삶이 무척 힘들었다는 말쓴도 하셨다. 하지만 달리 어떤 恨(한)이나 바람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 분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고 있었다.

 

속으로 이 분은 앞으로 5년 정도 더 사시겠구나 하고 짐작을 했다. 아마도 그 정도 사셨을 것이라 본다. 다만 확실하게 자신하는 것은 그 분은 죽음으로의 과정이 아주 수월했을 것이란 점이다. (죽을 때 고생하는 것도 역시 운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운이 아니라 삶의 생체적인 순환, 즉 신체적인 나이로 치면 21살 무렵이 5월 하순, 즉 小滿(소만)이 된다. 21살의 젊은이, 얼마나 싱그러운가! 그에 비하면 나 호호당은 67년을 더 살았으니 이제 한 겨울로 들어서고 있다. 약간 슬프다.

 

재밌지 않은가? 21살 청년의 모습을 50이 넘은 사람일지라도 운세가 소만일 경우 그 청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물론 그게 육체적인 젊음이 아니라 정신적인 자세나 태도이지만 말이다.

 

 

초봄에 5월 하순의 情景(정경)을 그리게 되니

 

그러고 보니 이제 초봄이다, 오는 19일 일요일이 雨水(우수), 쌀쌀한 초봄의 바람이 실어오는 들녘의 쑥과 냉이의 향을 상상해보면 좋겠다.

 

나 호호당은 몸으로선 이미 46년 전에 5월 하순의 小滿(소만)을 아무 것도 모르고 흘려보냈다. 그렇지만 이제 석 달만 지나면 5월 20일의 소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매를 걷고 초여름 밤공기 그리고 소프트한 바람에 몸을 맡겨볼 생각이다. 늘 변화해가지만 늘 되돌아오는 순환 속에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또 상상해본다, 80 중반의 늙은 호호당이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면서 5월 하순의 들녘을 걸어가는 모습을 연상해본다. 그냥 그 초여름의 들판에서 어쩌다가 쓰러져 삶을 마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복된 삶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다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늘 변화해가지만 늘 다시 반복되듯이.

이제 슬슬 얘기를 시작해볼 때가 되었으니 

 

 

내년 2024년부터 우리 국운의 세 번째 60년 순환이 시작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국운의 360년 장기 순환에 있어 제1기는 1904년부터 60년간, 제2기는 1964년부터 60년간이었으니 이제 곧 제3기 60년 순환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60년씩 6번 이어지는 360년 순환이다.

 

360년보다 더 장기인 2,160년의 순환 역시도 역사 연구를 통해 검증해낸 바 있으나 그게 우리의 삶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니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360년 주기는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봄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기준점들을 제시해준다.

 

다시 한 번 얘기지만 우리의 360년 국운은 1904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머리에 담아두고 시작해보자.

 

 

해마다 입하가 되면 만물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라서 

 

 

360년을 1년으로 볼 것으로 같으면 1994년은 1904년 시작점에서 90년이 흘렀으니 360년의 1/4이 경과하는 시점이 된다. 한 해의 1/4이 경과한 때는 양력 5월 5일 경이고 절기는 立夏(입하)가 된다.

 

굳이 친절하게 한 번 더 정리하면 1994년은 우리 360년 국운 순환에 있어 여름이 시작되는 때라 하겠다.

 

입하는 여름의 기운이 머리를 내미는 때, 그 이전까지 이미 존재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이제 본격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때란 점이 중요하다. 아주!

 

이해를 돕기 위해 작년 2022년을 보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적인 예로 미국 연준은 작년 5월 초 뒤늦게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감지하고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그로서 전 글로벌 경제가 긴축 모드로 들어갔다. (찾아보면 이런 예가 참으로 많지만 그렇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가보자.)

 

금년 2023년 역시 며칠 전 입춘이 지났으니 이미 많은 것들이 새롭게 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바로 5월 6일 새벽부터란 얘기이다. 그 이전까진 그저 느낌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명확한 모습을 알기가 어렵다.

 

그러니 2023년 계묘년이 어떤 한 해가 될 것인지는 올 해 입하인 5월 6일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1994년은 우리 국운 360년 흐름에 있어 입하였으니 

 

 

다시 돌아가서 1994년은 1904년에 시작된 360년 장기 순환에 있어 立夏(입하)의 때, 즉 대한민국이란 새로운 나라가 구체화(shaping-up)되기 시작한 때였다.

 

1994년을 전후한 시점의 일들을 살펴보면 1904년부터 360년간 즉 2264년까지 이어지는 장기 흐름 속에서의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성격을 보여줄 것인지를 예고하고 있다는 말이다.

 

1992년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스스로를 문민정부라 했다. 文民(문민)정부, 군인 출신이 아닌 일반 국민이 수립한 정부라는 뜻으로 이전 박정희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온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장기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김영삼 정부 사람들은 인지하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1904년에서부터 보면 일제 치하의 강권 통치, 그리고 해방 이후 민주주의 훈련 기간에 이어 군사 통치를 마무리하는 정권의 등장이었고 이때에서야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의 “민주공화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96년에 우리는 선진국 클럽이라 할 수 있는 OECD에 가입했다. 주요 경제국 멤버가 된 셈이다.

 

문민정부 그리고 OECD 가입, 이 두 가지 일은 향후로도 우리 대한민국이 2264년까지 민주공화국이자 경제 선진국으로 남아있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나 호호당이 지금 향후 240년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이.

 

글쎄? 싶으면 한 가지 예를 더 제시해본다. 이전의 360년 우리 국운은 1544-1903년까지였는바 그 입하에 해당되는 해는 1634년이었다. (물론 1994년으로부터 360년 전이다.)

 

조선왕조 시절인데 그 무렵에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일은 바로 1623년의 仁祖反正(인조반정)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었다. 이 두 사건이 그 이후 조선의 향방을 결정했다 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다.

 

인조반정을 통해 조선은 西人(서인)의 나라로 정착이 되었으며 새롭게 흥기한 만주족의 나라에 어설프게 저항했다가 복속하게 되자 성리학의 정통주의가 근저에서부터 뒤흔들렸다. 그 결과 겉으론 名分(명분)이고 속으론 實益(실익)을 쫒는 위선적 구조의 조선이 되고 말았다. 영조 정조 시절 잠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이미 대세는 西人(서인)과 세도가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다른 나라 사례들 

 

 

360년 국운에 있어 90년이 경과할 무렵은 그 나라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사실. 좀 더 실감이 가도록 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알아본다.

 

미국의 경우 1773년부터 2133년까지 이어지는 360년 흐름인데 시작점에서 90년 뒤인 1863년에 게티즈버그 연설이 있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를 세우자고 역설한 링컨의 연설이 그것이고 그 무렵 미국은 남북 전쟁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합중국 즉 United States, US 가 되었다. 그 바람에 링컨은 미국의 國師(국사)가 되었다. (흔히 조지 워싱턴을 미국의 아버지라 하지만 실은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일본의 경우 1765년부터 2125년까지인데 시작점에서 90년 후는 1855년인 바 그 무렵인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최신예 군함들에 의해 250년간 이어온 쇄국정책을 깨고 開港(개항)을 당했다. 결국 일본은 지금까지도 애매한 형태이긴 하지만 나라의 군대가 없고 자위대만 있는 미국의 종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한 때 미국에게 대들었다가 아주 묵사발이 난 뒤로 지금까지 착한 나라 일본이다.)

 

독일, 강국이니 한 번 보자. 1770년이 시작점이니 90년 후는 1860년이 된다. 그 무렵 독일 안의 강국인 프로이센 왕국이 대두되고 1862년에 훗날 ‘철혈재상’으로 불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독일 전체가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예를 들자면 10 여개도 더 되겠지만 분량 상 줄이고 얘기를 이어가 본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입하가 되면 모습이 구체화된다는 것, 셰이핑 업이 된다는 얘기였다. (물론 개개인의 운명 흐름도 60년 순환에서 15년이 흐른 입하 무렵이면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사람은 100년을 살 지 못하니 60년 순환이 중요하다.)

 

 

국운 제3기는 맹렬한 팽창의 때가 될 것이니 

 

 

그런데 오늘 서두에서 제시한 화두는 “우리 국운 제3기”였다. 내년 2024년에 시작해서 2084년까지 이어지는 60년 국운이다.

 

우리 국운 360년 흐름을 1년이라 볼 것 같으면 국운 제3기는 양력으로 6월 6일의 망종에서 8월 8일 경의 立秋(입추)에 해당이 된다. 자 상상해보라, 6월부터 8월 초까지의 모습을.

 

기온이 계속 해서 오를 것이며 습도도 덩달아 오른다, 이른바 濕熱(습열)이 들어선다. 이에 곡식은 빠르게 자랄 것이며 만물이 저마다 다투면서 맹렬하게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 우리 국운 제3기는 그런 때가 된다. 팽창의 60년이 될 것이라 본다. 그간 속으로 축적된 에너지가 국운 3기가 되면 서슴없이 외부로 바깥으로 주변으로 뻗어갈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될 것은 물론이다. 그냥 평화롭게 순탄하게 뻗어가는 법은 세상에 없으니 말이다.

 

 

입하를 보았으니 하지까지 보고싶어서 

 

 

그런데 오늘 나 호호당이 우리 국운 제3기에 대해 갑자기 얘기를 꺼낸 것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2039년, 지금으로부터 16년 뒤를 전후한 무렵에 있을 일들이 너무나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2039년이면 1904년으로부터 135년이 지날 무렵인데 왜 무엇이 그렇게 궁금할까? 하면 바로 그 때가 우리 국운 360년에 있어 夏至(하지)의 때에 해당이 되기 때문이다.

 

360년 흐름에 있어 90년 후인 입하와 135년 후인 하지를 볼 것 같으면 그로서 나머지 기간들의 흐름을 사실상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시점을 알면 360년 전체를 가늠할 수 있기에 

 

 

두 點(점)을 이으면 線(선)이 만들어진다. 물론 순환은 시간의 원운동이지만 그 두 지점만 알 수 있으면 원운동에 있어 반지름의 규모와 角速度(각속도)를 계산해낼 수 있다. 그러니 내게 긴 작대기와 적당한 장소를 주시오, 그러면 거대한 地球(지구)라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했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이다.

 

오늘날 글로벌을 다스리는 미국의 경우 입하에 게티즈버그의 연설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하지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국은 1773년에 시작했으니 135년 후는 1908년이 된다. 이 무렵 미국은 기존의 최강국이자 리더인 대영제국을 상대로 도전장을 던졌으니 그 상징은 바로 “대백색함대”이다.

 

대백색함대, 한자로 쓰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어렵다. 그래서 영어로 표현하면 쉽다. Great White Fleet 이다. 희게 빛나는 대규모 전함들의 거대한 함대.

 

당시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강성해지는 자국의 군사력과 해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16척에 달하는 초대형 전함을 만들고 외양을 하얀 페인트로 칠해서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났던 까닭에 그렇게 불렀다. 이 거대한 함대는 1907 년 말부터 1909년 2월 초까지 전 세계를 항해하면서 미국의 존재감을 만방에 과시했다.

 

쇠퇴해가는 대영제국에 이어 이제 전 세계의 公海(공해)는 모두 미국의 이권 영역이 될 것임을 전 세계에 알린 일대 사건이었다.

 

미국의 두 지점, 게티즈버그 연설과 대백색함대를 이을 것 같으면 미국은 인민의 손으로 세워진 합중국으로서 전 세계 바다를 아우르게 된다는 말이 된다. 정확하다, 오늘날 미국의 항공모함 전단은 전 세계 바다 어떤 곳이든 빠른 시간 안에 접근해서 위력을 投射(투사)할 수 있는 글로벌 최고 강국이 아닌가 말이다.

 

이처럼 360년 순환에서 두 지점을 연결하면 그 나라의 모습이 구체화된다.

 

 

몸 아껴가며 지켜봐야지 

 

 

우리는 입하에 문민정부와 OECD 가입이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45년 후인 2039년에 과연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때의 일만 볼 수 있으면 2264년까지의 흐름은 충분히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니 그게 궁금해서라도 나 호호당은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다. 만 84세가 되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보고 알게 되면 한 마디 남길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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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무쌍한 우리나라 여성

 

 

유튜브에서 본 동영상,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뉴욕의 어느 IT 계통에서 일하다가 정리해고 당한 젊은 우리나라 여성의 얘기였다. 그간 열심히 해왔고 혹시라도 일자리가 없어질 것에 대비해서 급여의 절반을 무조건 저축해오긴 했지만 정작 일을 당하고 나니 충격이 크다.

 

재취업할 수 있을 거야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용기도 내어본다, 달리 이런 생각도 든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행운이었기에 이제 어쩌면 운이 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쩌지?

 

야, 대단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영상을 셀프로 찍어서 올릴 정도면 멘탈 갑이네 싶었다. 왜 저 힘든 나라에 가서 고생하고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거야 스스로의 선택.

 

 

이제 운이 다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저런 생각 또는 걱정,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몇 번씩은 해보게 된다. 이제 운이 다한 것이 아닐까? 나는 더 해보고 싶은데 운이 더 이상 받쳐주지 않는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 말이다.

 

이런 걱정에 대해 답을 해주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다.

 

정답을 알려드린다, 이런 걱정을 누군가 하고 있다면 그 누군가의 운은 아직 한창 뻗어가고 있다고, 앞길이 창창하다고.

창창, 한자로 蒼蒼(창창). 푸르고 또 푸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푸르다고 할까? 설명해보면 우리가 맑은 날 바깥에 나가 먼 경치를 바라보거나 먼 산을 바라보면 푸른 기색을 볼 수 있다. 이를 한자어로 嵐氣(남기)라고 한다.

 

따라서 앞길이 창창하다, 푸르다는 말은 갈 길이 저 멀리 아스라이 푸른 빛이 감도는 먼 곳까지 이어져있다는 말이 된다.

이 대목에서 삶과 운명의 비밀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한다.

 

저 멀리까지 가고픈 의지 또는 의욕이 있는데 운이 다해서 못 가는 법은 없다는 점이다. 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즉각 앞으로 스트레이트하게 시원하게 뻗어가진 못 한다 해도 결국엔 갈 수 있다. 돌아갈 수도 있겠고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으나 마음만 있다면 끝내 가게 되고 갈 수 있는 것이 삶과 운명의 이치이자 팩트이다.

 

에이, 뻥이지, 가고 싶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지,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더 일반적일 것도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의지가 있고 의욕이 있는 한 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게끔 이 세상은 만들어져 있다.

 

 

가지려면 비용을 치러야 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져라, have it! 이게 세상의 진리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진짜 그렇다. 이제 곧 70이 되는 호호당이 쓸데없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게 그렇기에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김광진 씨의 “편지”란 노래가 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오” 하는 노랫말. 애달픈 짝사랑의 노래이다.

 

저 대목에서 중요한 말은 “이제 나는 돌아서겠오”이다. 보라, 스스로 돌아서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말장난하려고 시작한 얘기가 아니다. 앞서의 그 여성도 경력을 더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드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at any cost 또는 at all costs, 이렇게 표현한다. 이게 핵심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치를 용의가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우리가 걸 수 있는 가장 큰 비용은 삶 전체라 하겠다. 목숨을 건다, 이게 다 건다는 표현이다. 올인(all-in)이다.

 

 

결국은 비용 대비 효과의 문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원하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이는 결국 원하는 것에 상응하는 비용의 문제로 귀착이 된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가다가 이게 내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거나 그 과정에서 비용이 너무 커서 견딜 수가 없다고 판단할 때 그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물론 포기한다고 해서 잘못 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뜻을 세우고 의욕을 가지고 해보다가 그만 두거나 포기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은 현명해지고 지혜가 생긴다.

 

포기와 좌절은 우리를 단련시켜서 강하게 만들며 또 현명하게 만들어준다.

 

그 결과 어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나만이 아니라 萬人(만인)이 가지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욕심을 내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걸 가지려면 萬人(만인)을 다 넘어서야만 되는 일이니.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꼭 그것을 가지고 싶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할 것이다. 건다고 해서 꼭 될 턱이 없다, 목숨을 거는 놈이 나 말고도 몇 명은 될 터이니 말이다. 그랬을 때 그것을 얻을 확률은 대략 10% 정도 된다.

 

올인을 하고도 성사될 확률이 1/10에 불과할 때 고민을 좀 해봐야 한다. 목숨을 거는 게임이니 성공하려면 나머지 아홉 명을 다 죽여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게 바로 오징어 게임이다.

 

돌아가서 얘기이다.

 

내가 가지려는 것을 포기시킬 수 있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이다. 계속해서 하고픈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 공연히 運(운)을 핑계로 삼을 일이 아니란 얘기이다.

 

 

진짜 '레알'한 세상의 이치 다섯가지

 

 

세상의 액면 그대로의 이치, ‘레알’한 이치를 이제 다섯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

둘째,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그에 따른 비용이 든다는 사실.

셋째, 원하는 것과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잘 따져서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

넷째, 가지려고 하는 자가 여럿일 경우 가장 높은 비용 혹은 가격을 부르는 자가 가지게 된다는 사실. (경매의 이치)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상응하는 비용을 다 치르고 가지긴 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즉 가성비가 기대보다 못할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고 그게 단순한 단기 게임이 아니라 전 인생에 걸친 시도였다면 그야말로 삶의 空虛(공허)를 맛보게 될 수도 있겠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그 개지랄을 떨었단 말인가! 하면서.

 

 

運(운)을 핑계 삼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운이 다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법은 없다, 다만 지레 알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뿐. 그리고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 또한 아니란 사실이다.

 

욕망은 삶의 근원적인 推動力(추동력), 즉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동시에 盲目(맹목)적인 에너지이기도 하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누군가 나 호호당에게 물어온다면 “응, 그건 욕망 자체야” 라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이 말은 나 호호당이 생각해낸 답이 아니다. 오리지널은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 삶은 갈애와 집착의 두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러 천 년 전에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분 말이다.

 

渴愛(갈애), 기가 막힌 표현이다. 목이 마른 사랑이라 하니 그렇다. 먼 옛날 논산 훈련소에서의 추억이다, 훈련 중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마구 갈증이 날 때 콜라 한 병 마셨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執着(집착), 마음에 매달아 놓은 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는 안타까움, 이 또한 기가 막힌 표현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걸 다 버리고 극단적인 苦行(고행)을 한 결과 이건 길이 아니네! 하면서 돌아섰던 싯다르타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쿨 가이(cool guy)!

 

 

삶이란 무엇인가? 하면 갈애와 집착이라 

 

 

우리 모두 욕망을 한다, 그리고 욕망을 하다가 견딜 수가 없으면 내려놓을 일이고 비용을 치를 용의가 있으면 끝까지 가본다, 이게 우리의 삶이다. 덧붙여서 한 마디,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게 행복해진다는 보장 또한 절대 없다. 이게 이 세상에서 운과 명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감히 자신하는 나 호호당의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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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병 중에 어이가 없던 구절이  떠올라서 

 

 

코로나19 탓에 거의 열흘 만에 글을 쓴다. 발열 후 앓은 것은 나흘인데 그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기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코로나는 후유증이 있다.

 

앓고 있는 와중에 머리를 스쳐간 구절이 하나 있었다. 찾아서 올려본다.

 

이 세상은 나에게 모습을 주어서 그 위에 실어놓았고 내게 삶을 주어서 수고롭게 하며 또 내게 늙음을 주어 편하게 해주며 마침내 죽음을 주어 나를 쉬게 한다.

 

원문은 이렇다. 大塊(대괴) 載我以形(재아이형), 勞我以生(노아이생), 逸我以老(일아이로), 休我以死(휴아이사).

 

大塊(대괴)는 직역하면 큰 덩어리란 말로서 커다란 땅 또는 나아가서 이 세상을 뜻한다. 태어나기 전의 나는 형태가 없었으니 일단 모양을 갖추어서 세상에 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삶이란 것을 주어서 고생시킨다, 맞는 말이다, 삶이 없었다면 힘든 일이 있었으랴! 그런데 계속 고생만 시키는 것은 아니고 늙게 해서 그나마 좀 편안하게 해준다고 하며 마침내 죽음을 선물함으로써 영원한 休息(휴식)을 준다고 한다.

 

20년 전에 열심히 읽었던 淮南子(회남자)란 옛 책 속에 실린 구절이다. 처음 이 구절을 대했을 때 사실 좀 어이가 없었다. 삶을 통해 고생시킨다는 저 말, 늙음을 주어 사람을 그런대로 편안하게 한다고 하며 죽음으로써 아주 쉬게 한다고 하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늙는다는 것, 누구나 일단 싫어하는 말인데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다. 틀릴 말도 아닌 것이 늙으면 체력이 떨어지고 그 바람에 성질도 좀 누그러뜨린다, 성질을 내려고 한들 힘이 없어서 절로 온순해진다.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또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해 나를 아주 쉬게 한다고 한다. 그렇지 죽어야만 모든 게 편하지, 더 이상 불편하거나 힘들 여지가 없으니 그 또한 틀리지 않다.

 

 

세상사 받아들이기 나름인가

 

 

하지만 저 구절은 전부 反語(반어)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듯이 산다는 것은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할 터인데 살아가는 바람에 고생한다고 한다. 늙음도 죽음도 모두 그렇다. 우리가 싫어하는 일들을 다 좋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꽤나 충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묘하게 틀린 말도 아니네 싶었다. 어떤 일이든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았다.

 

언뜻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설파한 싯다르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 책이 만들어진 것은 중국에 불교가 처음 소개되기 적어도 백년도 더 훨씬 전의 일이다. 저 구절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나니 사람이네, 그러니 나는 과연 나비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그리고 어느 것이 진짜 꿈일까? 를 묻고 있는 莊子(장자)의 영향을 받은 글이다.

 

참고로 회남자 속 첫째 글은 老子(노자)의 계열이고 둘째 글은 莊子(장자) 계열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노자와 장자는 내용적으로 달라도 많이 다르다. 노자는 ‘돌직구’이고 장자는 세상 가치관을 뒤엎는 逆說(역설)이지만 老莊(노장)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실 그들에 대한 큰 결례이다.

 

그런데 앓고 있는 와중에 저 구절이 떠오른 까닭에 대해 얘기를 좀 해야 하겠다.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해준다고 했는데 그 편안함에도 대가가 있다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코로나19를 걸린 뒤에 별 고통 없이 쾌유되는데 늙고 나니 뒷맛이 꽤 세다. 늙었다고 그냥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력이 부족해서 힘을 쓰지 못하는 탓에 남 보기에 편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앓다 보니 힘이 들고 그래서 투정 부릴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문득 저 회남자의 구절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성인이라도 命(명)을 받아야 뜻을 펼칠 수 있다는 저 위험한 말

 

 

회남자의 두 번째 글, 장자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저 글은 제목이 “숙진훈”인데 이왕 읽은 김에 모처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글 속에는 “聖人(성인)이라도 命(명)을 얻어야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다”는 표현도 나온다. 읽으면서 슬쩍 웃게 된다.

 

덕이 크고 재주가 있어도 하늘로부터 받은 명 즉 天命(천명)이 있어야만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는 말인데 이 대목이야말로 옛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命(명)이란 運(운)을 말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가령 “저 친구 진짜 대단한 것 같은데 時運(시운)이 따르지 않다 보니 그냥 저렇게 별 볼일 없이 일생을 지내는구나!” 하고 안타깝거나 애석하게 여길 때가 있다.

 

그래서 출세나 성공이란 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을 떠나 그저 우연 또는 福不福(복불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좀 위험하다. 좋은 명이나 호운이 주어지는 게 우연한 확률의 문제라 여길 경우 세상을 원망하게 되는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난 운이 따르지 않아서 내가 가진 능력이나 노력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자기변명 또는 자기합리화의 빌미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에 주변의 누군가가 자신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성공하거나 출세할 것 같으면 그를 시기하거나 원망하게 하는 치졸한 생각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쟤는 나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대인 관계 특히 윗사람에게 ‘아부’를 잘 하는 바람에 저렇게 잘 나가는 거야, 하는 생각 등등 말이다.

 

이 대목에서 阿附(아부)라든가 阿諂(아첨)이란 표현에 대해 약간 얘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부란 표현은 원래 阿附迎合(아부영합)이란 사자성어로 많이 쓰이던 표현이다. 또 그와 연관해서 曲學阿世(곡학아세)란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벼슬길에 나아가야만 입신출세할 수 있던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의 유교문화, 즉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통해 만들어진 弊端(폐단)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상업 문화 즉 장사하는 것 즉 장사치를 천하게 보던 구시대의 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적 전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상한 형태로 끊임없이 변용되면서 살아있다.

 

 

장사의 시대에 있어 영합하는 기술이야말로 핵심 스킬이건만

 

 

오늘의 시대는 누가 뭐래도 비즈니스의 시대, 즉 商業(상업)의 시대이다. 장사나 비즈니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의 니즈(needs)에 부응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고객의 취향에 영합하고 아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장사의 스킬이라 하겠다.

이는 비단 장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조직이든 학문의 세계이든 권력을 쥔 사람의 취향에 영합하는 것은 생존의 필수 기술이란 사실이다. 이는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불변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양 특히 앵글로 색슨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상업 문화이기에 그런 점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목적 달성을 위해 이른바 간과 쓸개를 아낌없이 다 털어내는 것을 당연시한다. 우리 역시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과거 유교 신분 사회에 있었던 ‘선비’의 자세를 높이 사는 풍토가 조금은 남아있다.

 

선비, 재물이나 권세를 탐하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더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말이다. 이 선비에 대한 존중은 오늘에 이르러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이란 말과 통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비판적 지식인이란 사람들 또한 권력과 출세에 대해 그렇게 강직하지가 않다. 권력이 불러주기만 하면 금새 감사합니다, 땡큐 하면서 달려가지 않는가. 우리 사회의 경우 예전에 소위 군사독재 시절에만 해도 비판적 지식인들이란 게 그나마 성립 가능한 얘기였지만 민주화가 된 이후론 그런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비판적 지식인이란 게 오히려 서구 인문학(liberal arts) 세계에선 가능하다. 일단 정년을 보장받고 나면 얼마든지 체제를 비판해도 어느 선에선 기꺼이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것이 인간의 심성에 관한 것이고 일정 부분 과거 종교가 맡았던 역할을 대행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특히 인문학이란 게 우리 사회 내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길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글을 정리해야 하겠기에 조금 더 얘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길은 이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한 번 정리해본다.

 

공부 잘 해서 고수입을 보장받는 의대를 가든가 아니면 이공계통을 통해 유학을 다녀와서 대기업 기술직 쪽에서 한 자리 하든가, 그게 아니라 인문계통이라면 로스쿨을 통해 갖은 빽과 줄을 동원해서 좋은 로펌에 들어가서 열심히 아부하면서 돈을 벌든가, 그게 아니면 5급 국가고시에 승부를 거는 길이 그것이다.

 

또는 집안에 돈이 좀 있어서 진작부터 국제학교를 통해 외국 명문대에 진학해서 커리어를 만들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최소한 이른바 스카이(SKY) 간판이라도 붙이고 사회에 진출하든가, 이런 것이 이른바 정규 코스이다.

 

비정규 코스가 없진 않다. 미모가 출중하거나 특출한 재능이 있을 경우 예체능 쪽으로 죽기 살기로 진출해보는 길이 그것이다. 확률적으론 대단히 희박하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성공의 길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심플하다. 그나마 예전엔 이런저런 길들이 제법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아파트 한 채만 잘 굴려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숨막혀할 수밖에.

 

 

운은 우연이 아니란 사실

 

 

불변의 한 가지는 노력이 바로 運(운)이란 사실이다. 나 호호당이 평생에 걸친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 한 가지가 바로 이 점이다.

1964년의 소설 "무진기행"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64년에 무진기행이란 단편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 그 소설을 1979년 군대 복무 시절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되었다. 24살 시절이니 그런 거 읽을 법도 하지 않은가.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가상의 도시였는데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안개 霧(무)에 나루 津(진), 즉 안개 나루였는데 소설의 주제가 바로 안개와 나루였다.

 

안개는 시야를 가린다. 지나온 곳을 덮어버리고 이제 갈 방향 또한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사람은 고립된다, 움직임을 방해하진 않지만 눈을 가려서 머뭇거리고 지척이게 한다.

 

나루는 배틀 타고 떠나는 곳이다. 저편에서 건너오거나 이편에서 건너가는 곳이다. 어디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떠나오는 곳이다.

 

소설이 1964년에 나왔으니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 세상은 참혹했고 처절한 가운데 “미국 스타일”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은 몸부림을 쳤다, 우선은 당장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좀 더 잘 살고 좀 더 가져보기 위해. 물론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엄청나게 돈을 벌어대고 있었다.

 

소설의 문장 역시 그 이전과는 다른 서구 스타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설을 낼 때 23세였던 젊은 작가 김승옥 씨는 당시의 우리 사회에 대해 환멸과 허무를 보았던 것 같다. 금전만능과 이기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

 

그런데 돌이켜보면 어이가 없다, 1964년 전후의 우리가 참으로 못 살고 처절하긴 했으나 지금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금전만능이고 이기주의인가를 따져보면 오히려 그 때가 더 인간적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생각과 가치관이 철저하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돈이 최고였고 지금도 돈이 최고이지만 바뀐 것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그러니 김승옥 작가는 현재의 세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만.)

 

 

2022년의 영화 "헤어질 결심"

 

 

얼마 전 “헤어질 결심”이란 영화를 넷플릭스로 봤다. 슬픈 결말의 영화는 가급적 피하려 하는데 박해일이란 배우에 낚여서 보게 되었다. 조금만 힘이 들면 즉각 ‘나가기’를 누를 생각이었는데 30분이 지나자 나올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 빠져 버렸다.

 

영화 장면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내가 영화 속을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이건 내 스스로 만든 안개, 또는 結界(결계)인데 빠져나올 수가 없구나, 그냥 가보자, 끝까지.

 

보면서 알게 되었다, 소설 무진기행을 소재로 해서 만든 박찬욱 감독의 영화였다. 이번엔 사회 풍토에 대한 허무와 환멸이 아니라 사랑이 주제였는데 그 사랑 또한 안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니 2022년 버전 무진기행이다. 그래서 정훈희와 송창식이란 두 가수가 옛날에 히트 친 노래 “안개”를 부르고 있었다. 감독이 공들여 만들어낸 엔딩이었고 두 가수는 絶唱(절창)을 남겼다. 노래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려면 정말이지 결심, 毒(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려면 마음을 단속해서 단단히 묶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이를 죽이거나 내가 죽어야 한다. 할 짓이 못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떨까 늘 궁금하다. 가벼운 연애나 사귐, 가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스타일과 심리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만나다 보면 정말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미리 헤어질 준비 또는 방어막을 치고 만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나의 지레짐작일 것이다, 인간이 그리 쉽게 변할 턱이 없으니 신세대라고 해서 구세대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것 같진 않다는 점에서.

 

 

60년 전과 지금의 차이 

 

 

흥미로운 점 하나는 소설이 1964년에 나왔는데 영화는 2022년이란 점이다. 거의 60년 간격이다. 60년은 하나의 순환주기 아닌가.

 

소설이나 영화 모두 시대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을 것인데 무진기행의 안개와 헤어질 결심 속의 안개는 기본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오늘에 이르러 더 이상 금전만능이니 이기주의니 하는 그런 말 자체가 아예 들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이젠 그게 너무나도 기본이 되어서 더 이상 그런 얘기 자체가 불필요해서 그런 게 아닐까.

 

1964년의 풍토는 힘든 현실 속에서 오히려 낭만주의가 꽃을 피웠다면 오늘날은 먹고는 살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냉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차이 정도가 아닐까.

 

감정과 감상이 넘치는 낭만주의, 감정과 감상을 자제하는 냉소주의. 낭만과 냉소는 그러니 對極(대극)이다.

 

이런 생각도 든다, “헤어질 결심”이란 영화 제목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의 풍토가 헤어지는 것이 예사 보통의 일이 되어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추론 자체가 너무 드라이한 것 같다.)

 

 

사랑과 죽음은 등가교환

 

 

사랑이란 게 알고 보면 실로 두려운 것이다. 왜냐면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기에. 죽을 만큼 사랑해! 너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느낄 때 절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그러니 진짜 사랑은 죽음과 等價(등가)이고 같은 무게를 지닌다. 따라서 진짜 사랑은 두려운 것이 맞다.

 

이쯤에서 시니컬하게 가보자. 생명과학자의 관점으로.

 

자연계에서 유성생식, 즉 짝을 지어서 번식을 하는 모든 생명체를 보면 짝을 짓는 것과 죽음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벼는 8월 하순에 자신의 씨앗, 즉 쌀알을 매달고 그 이후 사력을 다해 그 알 속으로 자신의 모든 영양분을 쏟아 넣는다. 그러곤 말라서 죽는다. 거미 또한 늦가을에 짝짓기를 통해 알을 낳고 죽는다. 늦가을 나비 또한 마찬가지. 어떤 놈은 심지어 알이 부화해서 새끼가 나오면 자신의 몸을 먹잇감으로 내어주기도 한다.

 

수사슴은 암컷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 불필요하게 커다란 장식물, 즉 장대한 뿔을 만들어 올린다. 그 바람에 행동이 불편해지고 때론 나뭇가지에 걸려 죽기도 한다.

 

異性(이성)을 만나야만 이어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이다. 자연계에서 사랑과 죽음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등가교환인 것을 알 수 있다. 맞바꾼다는 말의 속말인 ‘다이다이’이고 한자로 對對(대대)이다.

 

종교로 가서 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요한 복음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반대편에는 죽음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저 구절이야말로 전통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점프하는 엄청난 탈바꿈이다. 야훼는 원래 두렵고 경외해야 하는 절대자였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사랑’ 그 자체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종합하면 사랑은 짝짓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엄청난 과업이고 죽음 또한 짝짓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이 단순한 걸 가지고 무진장 시니컬한 표현의 제목을 달아 일약 유명해진 생물학자가 바로 리처드 도킨스이고 그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이다.

 

이기적인 유전자, 저 표현은 책을 파는 데 있어선 효과가 있었겠으나 별로 탐탁하지가 않다, 유전자가 그냥 이어질 뿐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유전자가 무슨 이기적인가? 그냥 생명이 이어져가는 수단일 뿐인데 말이다. 오히려 나 호호당은 도킨스 스스로 어지간히 죽음을 무서워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전자 너만 이기적으로 살아남고 그 통로인 나 자신은 죽는구나! 하는 억울함.

 

지금까지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며칠 동안 가지게 된 생각들을 글로 옮겨보았다.

 

이제 나 호호당의 경우 작년 내내 몸이 불편한 가운데 몸의 노쇠해감을 느끼다 보니 얻은 것이 하나 있다고 얼마 전 글에 썼다. 사랑과 죽음은 하나란 사실이고 둘 다 자연과 세상, 생명, 정확히 말하면 짝을 짓는 생명들의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란 것이 그것이다. 살면서 사랑했으니 죽음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란 깨달음.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한 "무진기행"

 

 

안개, 사실 매력도 많다.

 

안개는 경계를 허문다. 안개 속에선 경계가 허물어지다 보니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우리가 안개 속에서 느끼는 불안은 바로 내가 너무 나에게만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와 다른 무엇이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감 같은 거.

 

2023년의 대한민국, 가히 안개 속이라 말할 수 있다. 五里霧中(오리무중)! 당분간 다가오는 모든 미래는 안개에 가려져 있다고 보면 된다. 겨울 안개.

 

하지만 놀랄 것 전혀 없다. 우리나라는 이미 2017년부터 안개 속으로 진입했으니 그렇다. 이 안개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2032년 국운의 춘분을 맞이해야만 비로소 그 안개가 조금씩 걷힐 것이고 청명한 시야는 다시 세월을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안개”의 노랫말처럼 2023년 초, 세월의 짙은 안개 속에서 무수히 많은 낮은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앞길을 가로 막아온다. 하지만 저 안개는 작가 김승옥 씨가 소설 속에 적고 있듯이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女鬼(여귀)가 품어 내놓은 입김”이 아니라 우리 속의 불안일 뿐이다.

 

우리 모두 무진기행을 또 다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