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비홍,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본다. 중국의 무술배우 이연걸 그리고 견자단이 연기한 영화들이 워낙 흥행이 잘 되었던 탓에 말이다.
꽤나 많은 전설을 남긴 실존인물로서 살았던 곳은 오늘날 중국 남쪽의 대도시 광저우,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광저우에 붙은 佛山市(불산시), 중국 발음으론 포산시이다. 그래서 흔히 포산 황페이홍이라 한다.
사실 자세히 알아보면 횡비홍의 무용담은 대부분 지어졌거나 과장되었는데 이는 그가 무술도장과 함께 의원을 하면서 없는 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준 공덕이 많았던 점, 그리고 오늘날 그의 제자가 오늘날 홍콩의 가장 대표적인 무술인 ‘홍가권’을 널리 보급했기에 다소 부풀려진 점이 크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임세영이라 하는데 홍콩배우 홍금보가 임세영으로 출연한 영화도 있다.)
왜 갑자기 황비홍 얘기를 꺼내느냐 하면 나 호호당이 한 때 명리학의 원류를 찾아서 중국을 돌아다닐 때 황비홍의 고향인 포산시를 찾아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명리학 공부하는 사람치고 “궁통보감”이란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궁통보감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남부의 대도시인 광저우, 더 정확히 말하면 포산시이기에 찾아갔다.
나 호호당은 1994년 혼자서 호기롭게 중국을 찾아간 이래 금융시스템 컨설팅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1996년 말까지 대략 20개월 동안 중국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낸 적이 있다. (1992년에 한중수교를 했다.)
영업대상은 중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공상은행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산화가 미진했기에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은행전산 실무자로서의 경력을 살려서 충분히 비즈니스를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도전했었다.
이에 베이징에 사무실을 내고 열나게 홍보와 마케팅을 했는데 쉬는 날이나 여유가 생기면 중국 각지는 물론이고 홍콩과 마카오 대만까지 명리학의 대가라고 소문난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곤 했다.
돌아와서 얘기, 궁통보감을 읽어보면 기존 주류 명리학과는 결을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중국 남방의 광저우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한 것은 기본적으로 영국 상인들과의 대외무역항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 상인들이 차를 수입해가고 그 대금을 은으로 결제하면서 금융시장이 커졌으며 나중에는 영국 상인들이 은 대신에 아편을 가져오면서 또 다시 시장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흐름은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홍콩이 생겨났다.
아무튼 그 바람에 광저우는 거대한 도시, 거대한 시장으로 발전해갔고 인근의 포산과 동관 또한 날로 융성해갔다. 서구문물 또한 왕성하게 유입되었고 그 결과 상업적 마인드가 커지고 여타 중국의 다른 지방과는 달리 자유사상과 자본주의 사조가 많이 유입되었다.
주류명리학은 그 대표격의 하나로서 滴天髓(적천수)란 책이 있는데 공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법 심오하고 난해하다. (또 그 바람에 인기가 많다, 뭔가 있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주류명리학의 주된 수요층 또한 식자층 즉 지식인과 지배계급이었고 그 바람에 오가는 상담료도 상당히 거액이었다.
그런데 자유로운 분위기의 광저우에선 일반 상인 계층들 그리고 나중에는 서민층에까지 팔자를 논하고 운명을 물어보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저렴한 비용에 팔자를 알아보는 새로운 이론체계가 만들어졌으니 그게 바로 궁통보감이다.
궁통보감은 전혀 난해하지 않다. 마리가 좀 되면 열심히 두어 달 암기해서 시장에 나가 좌판을 깔면 바로 돈을 벌 수 있다. 속성 학습이 가능하다는 얘기. 짐작컨대 속성 학원도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시쳇말로 “민주화”라는 개념이 있는데 명리학에서도 일종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중국에서 이리저리 탐문하다 보니 궁통보감의 원조는 광저우 인근 포산시에 있다는 것이었고 이에 그 원조 책을 보기 위해 포산시를 찾아갔다. 1995년, 나 호호당의 나이 마흔의 일이었다.
그런데 실로 웃기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식이나 식당의 경우 원조란 개념이 있는데 알고 보면 원조의 또 원조가 있기도 하다. 나중엔 진짜 원조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궁통보감의 원조찾기에서도 발생했다.
그 결과 네 번이나 원판 궁통보감을 비싼 가격에 주고 샀다. 살 때마다 이번이 진짜다 하면서 샀지만 말이다. 나중에 어느 게 진짜 원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1840년대의 아편전쟁을 전후해서 포산시에서 어느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론체계란 짐작이 갔다.
궁통보감의 이론은 너무 圖式(도식)적이란 점에서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보여주었다.
아무튼 나 호호당은 원조 궁통보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제법 적지 않은 돈을 썼다. 지금도 젊은 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 가끔 미소를 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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