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이르러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점

 

 

최근 올리는 글들은 다소 무겁다. 한 해의 가장 추운 1월 丑(축)월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던 주제들인 바, 우리 한국 사회의 과거 60년 이상에 걸친 근대화와 변화의 과정에 대한 글들이란 점에서 그렇다.

 

이번에는 우리 사회의 가족 해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내적 모순이 날로 첨예화되면서 빈부의 격차를 말하는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깊어가고 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그 정도를 돌이키기 어려운 경지까지 몰아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팬데믹이 끝났을 때 빈부의 격차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가 있을지 솔직히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가족의 해체 그리고 사회안전망

 

 

이에 사회안전망과 복지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예전 근대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선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의 역할을 맡았던 것은 바로 가족이라고 하는 테두리였다. 가족이야말로 각종 위험이나 질병, 빈곤 등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방벽이었고 울타리였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가족이 맡고 있었다는 이 말에 대해 아마도 글쎄 그럴까? 싶은 독자들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금부터 이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 그게 그랬었구나! 하고 수긍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던 가족이란 어휘 

 

 

보통 우리가 가족이라 하면 한 쌍의 부부와 그들의 미혼 자녀들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녀 한 둘 정도, 그게 가장 쉽게 떠오르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데 실은 그건 가족 중에서도 너무나도 작아서 물질로 치면 거의 原子(원자)급이라 해서 核家族(핵가족)이라 부른다. 우리들은 가족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핵가족을 연상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大家族(대가족)은? 하고 묻거나 생각해보면 조부모와 부모, 자녀와 며느리, 손주 손녀로 이루어진 가족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역시 예전엔 그 정도 가족에 대해 대가족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 역시 핵가족 즉 원자 단위는 아니라 해도 거의 分子(분자) 수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예전 사회에서 가족이란 하면 구성원이 몰락한 집안의 경우 수십, 적게는 수백, 보통은 수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거대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원래 의미의 가족과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단어만 같을 뿐 그 의미는 지금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얘기이다.

 

가족과 비슷한 단어로서 가정이 있고 좀 올드한 뉘앙스의 단어로서 家門(가문)이란 말도 있다. 또 가문과 연관되어 門中(문중이란 단어도 있다.

 

가족, 가정, 가문이란 단어들의 고통 요소는 家(가)라는 글자이다. 따라서 家(가)를 이해하고 나면 오늘에 이르러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 또 그로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심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가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家(가)란 무엇이었던가. 

 

 

먼저 家(가)란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본다.

 

家(가)란 때론 증조부와 조부모의 가족들과 형제들 그 자손들과 자손의 손주 손녀들, 때론 증손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며 뿐만 아니라 여기에 그 집안에서 봉사하는 하인들과 노비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손주들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家(가)에 속한 전체 구성원들을 예전엔 食率(식솔)이라 표현했다. 따라서 家(가)는 씨족 집단과 그 씨족에 봉사하는 노비와 머슴들을 포함하는 거대 집단이었고 그렇기에 그 구성원의 수가 때론 수만에 달하기도 했다.

 

예전엔 그런 집단이 방대한 田畓(전답)을 가문의 이름으로 소유한 채 노비와 함께 공동으로 경작하고 먹고 사는 공간 또는 실체를 莊園(장원)이라 불렀다. 중세 ‘장원경제’에서의 그 장원 말이다. 장원을 이루고 있을 경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자체 무장조직 즉 자경단을 운영하기도 했기에 시국에 따라선 지방의 거대 무장세력으로 할거하기도 했다. 그런 家(가)를 일러 族閥(족벌) 또는 門閥(문벌)이라 불렀다.

 

가령 삼국지연의에서 曹操(조조)를 보면 어쩌다가 부친이 성이 조씨인 환관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曹(조)씨가 되었지만 원래는 夏候(하후)씨였다. 하후씨는 그 조상이 유방이 항우와 쟁패해서 漢(한)제국을 세웠을 때 개국공신 제8위였던 하후영으로부터 이어져온 명문 벌족이다. 하후 집안, 즉 하후씨 가족은 후한 말기의 삼국정립 시기까지 이미 400년에 걸쳐 이어오면서 엄청난 자손과 함께 방대한 전답을 소유한 거대 족벌 집단이었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거병한 조조는 하후 가문의 수천에 달하는 식솔들을 무장시키고 군자금 역시 집안에서 조달했기에 짧은 시간 안에 거대 세력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조조의 핵심 부하 중에는 조인과 같이 6촌 동생도 있었으나 조조의 최정예 병력은 1만에 달하는 철갑기병대였는데 그 지휘를 맡았던 사람은 조씨가 아니라 ‘하후연’이었다. 같은 집안 즉 가족이었던 것이다.

 

삼국지에서 남쪽 오나라의 손권 역시 북방에서 대규모로 이주해온 손씨 가족집단의 일원이고 노숙이나 주유 역시 북방에서 난리를 피해 이주해온 거대 씨족 집단의 일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은 유비이다, 몰락한 황실의 후손으로서 돗자리나 만들어 팔던 영세한 자영업자가 황실의 혈통이란 점 하나를 마케팅해서 장비와 관우와 함께 나중에 나라까지 세웠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유비야말로 亂世(난세)의 영웅이었다.

 

이제 가족이란 것이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족은 옛날로 치면 가족의 지극히 작은 일부였던 것이고 이에 핵가족이란 단어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최근엔 이혼의 일반화로 인해 부모 중 한 쪽만 있고 거기에 자녀 역시 하나인 가족도 대단히 많다. 원자보다 더 작은 미립자 즉 ‘쿼크’ 가족이라고나 할 까.

 

 

가문이란 무엇이었는가. 

 

 

이제 家(가)를 이해했으니 家門(가문)이란 단어를 알아볼 차례이다.

 

예전에 家(가)가 공동으로 거주하던 마을,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대장원의 경우 방비를 위해 거주구역은 木柵(목책)으로 둘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커다란 대문이 하나 있었으니 이를 家門(가문)이라 했다.

 

이에 그 문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 혈연적 관계인 사람들과 그 가문의 노비나 하인들 역시도 門中(문중), 문 안에 사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때론 기존의 전답만으론 인구 압력이 커져서 차남이나 삼남 등이 일부 식솔을 이끌고 외지로 나가 별도 땅을 개간하거나 투쟁을 통해 빼앗은 땅에 자리 잡기도 했는데 이를 分家(분가)라고 했다.

 

이 경우 원래의 문중이 있는 곳을 本貫(본관)이라 하고 그 본관을 이끌어가는 핵심 그룹을 宗家(종가)라 불렀다. 또 그에 속한 일원을 宗中(종중) 사람이라 했다.

 

 

가정이란 단어 역시 뜻이 달랐으니 

 

 

이제 家庭(가정)이란 말도 알아보자. 집안의 마당이란 뜻이지만 사실 뜻은 그렇지가 않다. 단어에 포함된 庭(정)이란 글자 역시 오늘날과는 전혀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임금님 앞에서 신하들이 모여서 아침 회의를 하던 것을 두고 朝廷(조정)-오늘로 치면 국무회의가 열리는 청와대 본관 회의실-이라 했다.

 

이를 확대 연장해서 한 家門(가문) 안에서 가장 권력자인 집안 어른이 자녀와 며느리, 하인과 노비 등등 수십 혹은 수백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대청마루에 서서 지시하고 훈계하던 앞의 마당을 廷(정)에서 약간 작다는 의미의 한자를 만들어 庭(정)이라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그런 의미의 가정은 없다.

 

오늘날 단출해지고 또 규모가 작아진 가정에서 庭(정)은 바로 아파트의 거실이다. 그곳에서 식구가 다 모여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엄마가 딸에게 일찍 좀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자녀들이 항변도 하고 힘들다는 변명도 한다. 바로 그 거실이 家庭(가정)이다.

 

 

가족, 화살촉으로 구분이 되던 씨족 집단 

 

 

이제 마지막으로 家族(가족)에 대해 알아보자. 家族(가족)이란 단어의 뒤에 붙은 族(족)이란 단어는 화살촉을 의미한다. 촉이란 말 자체가 한자 族(족)의 우리말 변형이다.

 

옛날 중국 북방이나 만주 몽골 지역의 경우 여러 씨족으로 이루어진 부족이 가을이면 함께 수렵에 나서곤 했다. 일종의 전투 훈련이기도 했다. 이때 가족 즉 가문마다 화살촉에 각자 다른 색실이나 끈을 매달았는데 이는 다른 씨족이나 가문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노루나 사슴, 산돼지 등의 짐승을 잡을 것 같으면 일단 노비들이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 모은다. 사냥이 다 끝나면 짐승의 몸에 꽂힌 화살촉을 보고 어느 가족 또는 가문의 소유인 가를 구분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가족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가족은 어느 집안의 화살촉이었던 것이다.

 

가족 역시 씨족집단이기에 그 수가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천에 이르기도 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는 그것, 엄마 아빠 그리고 자녀 한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家(가)는 莊園(장원)을 운영했고 북방 유목 수렵 사회에서 가는 화살촉으로 구분되는 家族(가족)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제 家(가)란 단어와 그와 관련된 가족이나 가정, 가문, 문중, 종중, 종가 등등에 대해 다 설명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가족이 사라졌기에 고향 역시 사라지고 말았으니. 

 

 

지금까지 가족이나 가정, 가문 등의 원래 뜻을 알았으니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말이 사실임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조금 덧붙이면 우리가 흔히 故鄕(고향)이라 부르는 말의 원뜻은 씨족집단인 가족이 터를 잡고 있던 곳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러 고향이란 것도 실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말이다.

 

다음 글에선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생겨난 문제점, 그리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와의 관련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고령화에 대한 공포

 

 

“재수 없으면 120세까지 살 게 된다”, 일본의 공포괴담이다. 흐흐흐, 설마? 하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60세에 은퇴해서 60년을 벌지 않고 까먹으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 그야말로 호러 스토리가 된다.

 

원래 은퇴란 것은 餘生(여생), 즉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 예전엔 대충 5년에서 길면 10년 정도의 시간을 편하게 쉬다가 가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여생이 이젠 길어도 너무 길어졌다. 기술의 혁신과 발전으로 인해 영양분 공급이나 醫療(의료)가 너무 좋아져서 생겨난 새로운 모순이다.

 

바이오 기업들이 퇴행성 관절염이나 치매, 암 발병에 듣는 약까지 개발할 것 같으면 공포괴담 정도가 아니라 120세가 현실이 될 것도 같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것들

 

 

이에 오늘은 늙어가면서 겪는 일에 대해 약간 얘기해본다. 블로그 독자들은 아마도 나보다 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니 이런 얘기를 들어두면 각자 나중의 삶에 대비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이제 66년하고도 7개월을 살고 있다. 노년 같기도 하고 때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늙으면서 생겨난 신체의 변화

 

 

먼저 노년이다 싶은 점부터 따져본다. 작년에 디스크 문제로 인해 좌골신경통을 겪었다. 처음엔 왼쪽 다리가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비되고 심하게 통증이 왔다. 타고나길 유연해서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으리라 여겼던 착각이 깨지면서 심적인 충격은 더 컸다.

 

여름엔 어쩌다 한 번씩 눈의 흰자위 실핏줄이 터지면서 붉은 눈이 되곤 한다. 마치 뱀파이어의 눈처럼 된다. 안압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다행히도 매주 한 번씩 왕진 오는 한의사 분이 침으로 해결해주고 있다. (나 호호당에겐 실력이 비범한 한의 주치의가 있다.)

 

작년 가을엔 귀에서 소음이 들려서 이비인후과를 찾았더니 돌발성 난청이란 것이었다. 테스트를 했더니 왼쪽 귀의 청력이 정상에서 조금 밑으로 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양반 약간 엉터리였다. 한의 주치의가 와서 이문혈에 침 한 대를 놓았더니 달팽이관 쪽에 청량한 느낌이 오더니 그냥 나았다.

 

작년 가을엔 또 갑자기 혈압이 생겼다. 약간 어질어질해서 혹시나 하고 혈압을 재봤더니 140에서 160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여태껏 늘 120-80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운동, 특히 스쿼트를 조심해서 무리하지 않고 한 달간 했더니 혈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체 근력이 약해지면서 그랬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젠 저녁 8시 이후에 뭔가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서 불편하다. 정 출출하면 쌀밥 두 숟가락 정도 김에 싸서 잘 씹어서 삼키고 물을 마신다. 전체 식사량도 40대 시절에 비하면 40% 정도로 줄었다. 소식하면 장수한다고 하지만 실은 소화가 되질 않으니 소식하게 되는 것 같다.

다행한 점은 평소 육류를 그다지 자주 먹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아서 혈당이 지극히 정상이란 점이다. 당뇨 걱정은 전혀 없다는 얘기. 술 먹다 보면 기름진 고기를 먹게 되고 그 결과 통풍으로 고생하는 이도 많다. 친구가 통풍인데 아파도 너무 아프다는 것이다. 통풍은 치료도 어렵고 재발도 잘 된다.

 

생각해보니 뇌기능도 많이 퇴화되었지 않나 싶다.

 

어려서부터 암기력이 정말 좋았다. 가령 연도나 명칭을 많이 기억해야 하는 國史(국사)의 경우 깡그리 다 외웠기에 국사시험은 늘 백점이었다. 영어 단어도 한 때 3만 단어까지 외웠던 적이 있다. 두꺼운 영어사전을 펼치면 거짓말 좀 보태서 절반은 아는 단어였다.

 

40대 초반까진 적는 게 귀찮아서 웬만하면 외우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게 힘들고 성가셔서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바람에 암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 여유가 생겨나기에  

 

 

나이가 들면 이해력이 더 좋아진다는 통설이 있는데 내 생각엔 살면서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하면서 다양한 데이터베이스가 생기는 탓에 보다 종합적인 사고력을 갖추는 것 같다.

 

흥미로운 예를 하나 들어본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 척 봐도 거짓말인 것은 알겠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하는 점에 대해선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단순한 상황 같아도 그 젊은이가 내게 거짓을 고할 땐 그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순식간에 여러 개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그 이유가 몇 개 되지 않아 보여서 바로 확인해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젠 왜 그럴까? 하면서 일단 판단을 유보한다. 그 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천천히 확인해간다. 거짓을 말할 땐 실로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 보니 거짓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요즘 말로 빅 데이터가 쌓여있기 때문이다.

 

내침 김에 얘기하면 젊은 사람의 경우 상대방이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정신이 멀쩡해 보인다면 궁색하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당장 너 거짓말 하는구나! 하고 추궁은 하지 않아도 거짓말이란 사실 자체는 금방 알아차리고 그 점을 기억해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늙은 생강이 괜히 맵다는 말 하는 게 아니란 얘기.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살아온 햇수가 좀 되다 보니 데이터베이스가 쌓여있긴 하지만 그 역시 실은 숱한 偏見(편견)들의 집합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확률이 조금 더 줄었을 뿐이기에 여전히 섣부른 판단이나 확신을 경계한다. 거짓말만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도 쉽사리 부정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그로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종의 여유 공간 즉 버퍼(buffer)는 항상 간직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말들을 간단히 줄여보면 상대방의 궁색한 변명이나 거짓말에 대해 알아도 속아주면서 넘어가는 게 때론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경륜 즉 삶의 ‘짬밥’이 있는 노년의 너그러움이 아닌가 싶다.

 

 

몸이 늙어갈 뿐

 

 

지금까지는 67세나 되었으니 이젠 노년이구나 싶은 점에 대해 얘기했는데 반대로 여전히 별로 노년도 아니구나 싶은 점에 대해서도 얘기해본다.

 

세는 나이로 예순하고도 일곱이다. 방금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거울을 보니 목주름이 쳐져있고 눈 아래도 축 처졌음을 확인하고 왔다. 그러니 피지컬리 노년임은 인정하고 시작한다.

 

내 생각에 예순 일곱의 사람은 그 안에 어린 아이도 있고 10대의 반항기도 있으며 20대의 왕성함, 30-40대의 뜨거움, 50대의 노련함, 그리고 60대의 느긋함이 모두 함께 同居(동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다 있다!

 

가끔 코털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뽑게 된다. 그 결과 콧속에 염증이 생겨서 며칠 불편하다. 이건 40대 정도에 하던 버릇인데 이 바보짓을 내가 또 했구나 싶으면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아이고, 아직도 젊었어!, 뻔히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 순간의 장난기 그리고 약간의 쾌감에 빠져 이 짓을 또 했구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론 바보짓을 반복하는 것이 꼭 싫지만은 않다. ‘바보짓은 젊음의 특권’인데 아직도 그 특권을 누리고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다. 난 젊었어, 이런 짓을 또 하고 있으니! (그런데 말이다. 난 젊었어! 하는 자체가 늙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늙긴 늙은 것이다. 인정!.)

 

하고자 하는 얘기는 몸은 분명 한 해 한 해 늙어가고 있으나 정신은 여전히 멀쩡하다는 점이다. 물론 호르몬 변화, 즉 체내 케미스트리의 변화로 인해 생각이나 사고의 변화야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게 실은 전혀 나쁘지 않다. 눈앞의 삶을 훨씬 더 편안하게 관조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 ‘노년의 축복’이라 하겠다.

 

 

늙어가면서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한 가지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로 조심해야 할 점 한 가지만 알려드린다. 주변의 후배나 젊은이들을 상대로 ‘지적질’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경륜이 쌓였으니 당연히 어린 후배들의 행동이나 생각에 부족한 점이 느껴질 법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점을 지적하거나 훈계하려 들지 말라는 점이다.

 

앞에서 바보짓은 젊음의 특권이란 말을 했는데 바로 그렇다. 젊은이나 후배들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세련되어 진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말로 지적하거나 훈계한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냥 두면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알아서 잘 하게 될 것이다.

 

가르침은 스스로가 가르치고 스스로가 배우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을 해주고 싶다면 상대가 당신의 생각에 대해 들어볼 用意(용의)가 있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한다. 상대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그냥 지켜봐 주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들을 생각도 없고 받아들일 준비도 없는 후배에게 나름 도와준답시고 말을 쉽게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간섭이고 무례한 언행에 불과하다. 그게 바로 ‘꼰대질’이다.

 

젊은이는 失手(실수)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늙은이는 젊은 후배가 실수를 하면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도닥여주면 된다. 반성은 젊은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렇다. 우리 모두 실수를 통해 더 세련되어진다. 그게 삶이라 여긴다.

보헤미안 랩소디, 마마!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시청했다. 평소 극장에 가는 것을 성가셔 하는 탓에 그냥 흘려보냈는데 좋구나 싶었다.

 

보고 난 소감, 삶의 진지한 모습을 다루는 영화는 늘 애잔하고 애처롭다. 어쩌다가 게이가 된 바람에 에이즈로 죽은 프레디 머큐리, 하지만 대중 스타다운 죽음 같기도 하다. 게이나 양성애자, 골치 아픈 문제인데 아들에게 물었더니 유전적 소양보다 전립선 쾌감에 맛을 들이면 게이가 된다는 설이 최근 학설이라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생년월일을 검색해보았더니 1946년 9월 5일로 나온다. 태어난 시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아침 5시 10분설이 가장 유력하다. 출생지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앞바다 인도양에 위치한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으니 표준시와 진태양시의 오차가 대략 24분 정도. 이에 아침 5시 10분에서 24분을 빼면 4시 46분 즉 寅(인)시라 볼 수 있다.

 

사주는 丙戌(병술)년 丙申(병신)월 壬午(임오)일 壬寅(임인)시가 되고 이에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은 1932년과 1992년 壬申(임신)이 된다. 반대로 운기의 절정인 입추는 1962 壬寅(임인)년이다.

 

실제 그가 죽은 것이 입춘 바닥 직전 해인 1991년 11월 24일이니 앞의 사주 분석은 나름 신뢰가 간다.

 

그가 에이즈에 걸린 것은 1987년이라 하니 바닥 5년 전의 일이다. 운세가 한창 하강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그가 퀸이란 밴드를 결성한 때는 1970년이었으니 운세 상으로 秋分(추분)의 때였다. 이 무렵이면 사람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때인데 마침 그 해 본격 활동을 시작했으니 시작하자마자 무난하게 성공 가도를 걸었다.

 

그가 남긴 대표작은 단연코 1975년에 발표한 싱글 음반인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이로서 세계적인 그룹, 요즘 시쳇말로 ‘월클’에 올랐다. 운세 상으로도 1975년은 한 해의 계절로 치면 10월 하순의 수확을 보는 때, 이를 나는 霜降(상강) 재운이라 부른다. 사실 그 노래가 프레디 머큐리 음악의 절정이었다.

 

노래는 그저 마마! 하는 소리만 귓전에 쟁쟁하다. 그저 애처롭다는 생각만 든다.

 

 

나 호호당은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정령이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오랜 세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팔자를 통해 운명을 추리하고 앞일에 대해 상담도 하고 자문도 해주다 보니 나 호호당 자신은 이제 보통의 사람과는 약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이에 경험 또한 그 사람의 생에 일어난 일들을 기초로 한다. 남의 경험에 대해 들을 때도 있겠지만 그건 체험이 아니다.

 

그런데 나 호호당은 남의 경험이긴 하지만 수없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속의 내밀한 얘기와 고뇌, 걱정, 털어놓기 힘든 경험들을 무수히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 그러다 보면 감정이입도 될 때도 많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통해 그 사람의 운명이 전개되는 시간표를 알고 있기에 그런 요소들이 훗날 그 사람에게 있어 어떤 영향을 가져올 지에 대해서도 짐작이 간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나 호호당은 그 많은 사람들의 생애가 마치 나 호호당이 윤회와 전생을 거쳐 오면서 과거생에 체험했던 나 호호당의 삶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나 호호당 스스로가 마치 수만 번의 생을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스스로 너무나도 오래 살아온 精靈(정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재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면서도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착각, 또는 반지의 제왕 속에 나오는 나무정령인 ‘엔트’와도 같은 느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숱한 일들과 사람들의 일을 지켜본 그 나무정령 말이다.

 

 

현실을 살아가기 보다 추억의 삶이 더 많아졌으니 

 

 

게다가 나이마저 이젠 예순 일곱이 되다 보니 개인적으로 체험한 세상일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어려서 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김영삼 대통령의 쇳소리, 김대중 대통령의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특유의 빠른 어조, 김종필 총리의 어눌한 듯 느긋한 충청도 억양, 노무현 대통령의 열정적인 목소리, 이명박 대통령의 쉰 목소리, 박근혜 대통령의 부드러우면서도 결단이 가득한 음성, 구강 구조로 인해 공기가 빠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음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인들의 개성에 가득한 저마다의 목소리 들이 일순에 귓전에 울려오고 그 모습들이 내 눈앞을 스쳐간다.

 

젊은 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런저런 음성과 야단치는 목소리, 개인적으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의 정겨운 목소리와 표정의 다양한 뉘앙스, 극진히 사랑했던 먼저 간 강아지의 쾌활한 울음소리와 미소, 죽기 직전의 그 이별을 고하는 표정 등등 수많은 표정과 소리가 일순에 지나간다.

 

거기에 더하여 평생 즐겨 읽어온 많은 나라와 대륙들의 역사와 인물들의 스토리들이 더해져서 늦은 밤 시간 글을 쓰거나 사색에 빠지거나 책을 읽다가 문득 문득 과연 나는 사람인가 정령인가에 대해 헷갈리게 된다.

 

 

부러운 이도 없고 밑으로 보는 이도 없어졌으니 

 

 

그러다 보니 또 한 가지 생겨난 것이 있으니 이 세상에 그 어떤 이도 부러워하거나 밑으로 보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점도 있다. 사람 중에는 천재도 있고 부자도 있으며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많다. 물론 그 반대는 더 많다. 그런데 천재도 부럽지가 않고 부자도 부럽지가 않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 호호당이 밑으로 내려보거나 한심하다 여기는 사람 또한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없어졌다. 예전에 있었는데 말이다.

 

그저 저마다의 삶이 있을 뿐이란 생각, 그리고 어떤 누구의 삶도 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노라면 그저 애처롭다는 생각만 든다. 혹시나 해서 얘기인데,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 호호당의 인격이 세월 속에서 수양이 되고 도야가 되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란 점 알아주시기 바란다.

 

그냥 부러운 사람도 없어졌고 나보다 못하다 싶은 사람도 없어졌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나 호호당의 눈엔 모든 사람이 애처로울 뿐이다. 저 노래 기막히게 부르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 또한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을 보라, 잘 났건 못 났건 저마다 얼마나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가, 자신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보고자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가 말이다. 그러니 애처롭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다.

 

돈 많은 사람들의 삶도 잘난 사람의 삶도 알고 보면 다 거기에서 거기, 정말이지 오십 보 백 보, 그러니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 저마다 갖고 있는 모자란 점으로 해서 열등감을 얼싸안고 몸부림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누구나 그렇다.

 

 

예로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삶을 들여다 볼 것 같으면 

 

 

연예인, 빛나는 영광만큼이나 힘들고 애처로운 사람들이다. 연예인의 길을 시작하면 마땅히 대중의 스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스타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마냥 행복한 것 또한 아니다.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애로와 장애가 있다는 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예를 들어본다.

 

미국만 아니라 전 세계를 매료시켰고 지금도 여전히 전설이다. 위대한 비틀스의 멤버인 존 레논이나 폴 메카트니 역시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처럼 대단한 그가 세상을 떠난 나이는 겨우 42세였다. 거의 요절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11세부터 노래를 시작해서 30년간 노래하다가 1977년에 죽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약이나 무분별한 술 담배 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중 스타답게 마약 중독이나 에이즈 같은 것으로 죽지 않았다. 원인은 참으로 뜻밖이다. ‘똥독’에 중독이 되어 죽었다. 똥을 제대로 싸지 못해서 죽었다.

 

연예인의 문제는 인기가 없으면 갈 데가 없다는 점이고 인기가 생겨서 바빠지면 정말이지 대소변을 편히 볼 시간마저 없다. 투어 콘서트를 하다 보면 생체 리듬이 무너지고 무대에서의 긴장 때문에 또 그렇다. 며칠 변을 보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다 보면 변비가 되고 이에 설사약을 먹어 강제로 해결하기도 한다.

 

(작년 미스터 트롯 프로그램 예선에서 어떤 가수는 목을 풀기 위해 계속 물을 마시다가 정작 노래할 시간이 되자 방광이 차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탈락했던 일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변비와 설사를 반복하다가 결국 대장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가 죽은 뒤 부검을 했더니 똥이 대량으로 검출되었고 대장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져 있었으며 똥독으로 인해 심하게 부어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운세는 1974 甲寅(갑인)년이 입춘 바닥이었는데 그 직전인 1973년 하와이에서 자선공연을 했다. “알로하 프롬 하와이”가 그것이다. 나 호호당이 보기에 그건 팬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서비스였다.

 

그런 이후 1975년경부터는 대변을 거의 보지 못해 심하게 고통 받았고 1977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 스타답게 죽은 뒤에도 사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최고의 스타가 똥을 싸지 못해서 죽다니! 하는 말을 듣기 싫었던 모양이기도 하고 비즈니스에 연관된 사람들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가 사망한 것은 1977년이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밝힌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모든 생명이 그저 애처롭다. 

 

 

태어난 자에게 세상은 한 번 살아보는 마당과도 같은 곳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하기에 삶은 즐거움과 아울러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생명들이 내 눈엔 그저 애처롭다.

 

(한동안 생각에 빠져 글을 자주 올리지 못했는데 최근에 올리는 글들이 그런 사색의 편린들이라 하겠다.)

 

새 봄의 첫날이 꽤나 터프하구나! 

 

 

오늘은 雨水(우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봄의 첫날이다. 그런데 아침 기온이 무려 영하 10도나 된다고 봄의 첫 날이 꽤나 터프하다.

 

우수로서 하늘과 땅이 맹렬하게 움직이면서 새 해를 열어간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움직인다는 것은 무슨 말이며 새 해를 열어 간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하늘과 땅이 맹렬히 움직이다는 말의 의미

 

 

간략하게 설명 좀 해드린다.

 

날은 비록 춥지만 땅속은 이미 녹기 시작해서 물이 위로 오른다. 땅속 온도가 오르니 겨우내 얼었던 땅속의 물이 서서히 위로 올라온다, 이를 두고 地氣(지기)가 상승한다고 말한다. 우수는 해가 가장 짧은 12월 20일 경의 동지로부터 60일 정도 지난 때, 일조시간도 많이 길어졌다. 이를 일러 天氣(천기)가 下降(하강)한다는 표현을 한다.

 

天氣(천기)가 내려오고 地氣(지기)는 오르기 시작한다. 이를 현대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지로부터 해가 길어지지만 땅은 계속 식어간다. 해가 길어지면 땅도 따듯해져야 할 터인데 옛 사람들은 도무지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가 길어지는데 땅은 왜 더 식어가서 추워지지? 하는 궁금증이었다.

 

현대 과학은 이 현상을 대단히 쉽게 설명을 한다. 햇빛, 光子(광자)가 날아와 땅에 닿으면 그 즉시 땅이 데워지는 것이 아니라 時差(시차)가 존재한다. 이에 지속적으로 햇빛 알갱이 광자, 보다 정확하게는 전자파의 하나인 적외선이 날아들면 마침내 식어가던 땅의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를 輻射熱(복사열), 영어로 radiant heat 라고 한다.

 

그러면 땅속에서 얼음 알갱이로 있던 물이 녹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지표면의 건조한 공기는 지표 아래의 물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연이어 지속되는 현상, 땅속에선 물이 녹아서 위로 올라오고 그러면 공기 중으로 다시 상승한다. 이게 본격화되면 봄날 아지랑이 현상이 생겨난다.

 

우수로서 물이 땅속에서 지표로 오르고 다시 대기 속으로 상승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천지의 준동은 모든 생명들의 준동을 유발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 하늘과 땅의 순환에 맞춰 진화해왔기에 당연하다.

 

 

생명은 따뜻하고 윤기가 나고 말랑하다. 

 

 

바깥에 나가보면 나뭇가지도 메말라 있고 덤불의 이런저런 풀들도 말라있다. 거의 바싹 마른 미라(mirra) 상태이다. 하지만 우수가 지나면 겉으로 바싹 말라있는 것 같아도 정작 만져보면 확연히 다르다. 뻣뻣하지가 않고 낭창댄다.

 

왜 낭창댈까? 하면 뿌리로부터 물이 위로 올라와 가지 끝까지 도달했기에 유연해지는 것이다. 이미 생명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유연하다, 말랑하다, 뻣뻣하지가 않다. 반대로 죽어가는 것은 마르고 뻣뻣해진다.

 

물이 올라서 표면이 반짝거리는 것을 두고 우리는 潤氣(윤기)가 난다고 한다. 죽어가는 것은 윤기가 적어지고 빠진다, 죽고 나면 윤기가 없다. 여성들이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름 성분이 포함된 보습제를 바르는 까닭?, 간단하다, 아직 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熱氣(열기)가 있다. 따뜻하다. 손발이 차가워지면 죽어가는 것이다. 나 호호당 역시 중년의 나이까진 손발이 겨울에도 따끈따끈했다, 그런데 예순이 넘어가면서 이젠 그렇지가 않다, 겨울엔 손이 시리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열과 수분이 오르고 열과 수분이 속에서 남으면 바깥으로 나온다, 그런 자는 말랑하고 따뜻하고 윤기가 난다. 그게 생명이고 살아있음이다.

 

다시 돌아가서 얘기이다. 우수로서 해는 더 길어지고 땅도 녹는다. 그러니 지금은 북한 땅인 청천강 물도 해빙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땅속에서 위로 물이 오른다. 물이 오르면 윤기가 생겨난다. 모든 생명들이 활기를 띈다. 풀과 나무는 땅속에서 잔뿌리를 내밀어 물을 빨아올리고 위로 올리니 잔가지 끝까지 말랑해진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은 기지개를 켜고 사람 역시 심장 박동이 올라가면서 활동이 왕성해진다.

 

 

우수,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이 준동하는 날

 

 

이를 두고 모든 생명을 포함해서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이 준동하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간결한 축약인가! 시적이고 상징적이며 아름답지 않은가! 또 이제 비로소 생명이 꿈틀대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새 해를 열어젖힌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 사이에 놓인 中氣(중기)이다. 오늘은 우수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24 절기 모두가 저마다 나름의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한 해의 순환을 나타내는 24절기, 즉 12節氣(절기)와 12中氣(중기)로 나누어 표현하는 이 오래된 방법은 시적이자 상징적이며 그 속엔 물리적 순환만이 아니라 생명 순환의 심오함까지 담아내고 있다.

 

한 해가 순환하는 모습은 60년 순환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 더 길게는 360년 순환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 이상의 기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운세가 우수에 이르면 어떤 모습일까?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어떤 이의 현재 때가 우수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그 사람에게 벌어지고 있을까? 한 번 얘기해보자.

 

그 사람의 현재 겉모습은 지금 우수의 마른 가지처럼 겉보기엔 바싹 말라있을 것이다. 거칠하고 건조한 외양일 것이다. 하지만 우수에 이르러 겉으론 마른 가지일 지라도 만져보면 말랑해지고 있듯이 그 사람 역시 겉으론 전혀 볼품이 없고 대다수 사람들이 외면한다. 즉 전혀 존재감이 없다. 망했으며 앞날이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수로부터 땅 속에서 물이 오르듯 그 볼품없는 사람 역시 서서히 봄날을 준비해가고 있다. 땅속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람 속에선 뭔가 새로운 것이 준비되고 있지만 심지어 본인 스스로도 그런 줄 모르고 그저 절망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이미 포기하고 있다.

 

물이 오른다는 것, 사람에 있어선 신체적인 현상도 있지만 정신 즉 멘탈에 있어서도 물이 오른다. 멘탈에 있어 물이 오르는 현상은 사실 고통을 수반한다. 물이 오른다, 즉 생명력이 다시 주입되는 것이기에 고통스럽다.

 

고통이란 것은 사실 살아보자는 몸부림이다. 신체 어느 부위에 상처가 났을 때의 가장 첫 번째 현상이 痛覺(통각)이다. 아프다. 아파야만 우리 몸의 모든 시스템들이 그 상처 부위에 자원을 집중할 것이고 회복시키려 나설 것이기 때문에 통증이 오고 아프다. 아픈 것은 그 부위에 주의를 집중시키라는 우리 몸의 지상명령이다.

 

그렇기에 운세가 우수에 이른 자가 깨어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대표적인 증세가 통증이다. 신체의 통증도 있겠으나 정신 즉 멘탈의 통증은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 한심함, 자괴감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난 왜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하고 自問(자문)하게 된다. 사람은 영리해서 엄살을 부린다, 그 바람에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확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살라고, 문제점을 고쳐서 한 번 다시 잘 살아보라고 통증이 오는 것인데 죽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자기기만!

 

 

이생망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꽤 오래 전부터 ‘N포세대’란 말이 유행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이생망’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냉정히 말하면 그게 바로 자기 기만이다. 살고 싶으면 살고 싶다고 해야 하고 잘 살아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쳐야지 왜 이번 생은 망했으니 포기한다고 엄살을 부리는가.

 

엄살은 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어느 정도 통하는 법이지 계속 하면 통하지 않는다. 적당히 해야 효과가 있다. 장기엄살전략은 상책이 아니다.

 

기득권 기성세대를 무찌르고 쳐부수고 우리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되어야 겠소 하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부라리며 덤벼들어도 어려운 판국에 ‘이생망’이 무엇이란 말인가.

 

안타깝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지만 정말 속내를 말하자면 엄살 그만 부리고 정신 바짝 차려서 당신들이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스스로 셀프로 만들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가진 자와 기득권자들은 절대 그냥 물러가지 않는다. 가진 것을 알아서 내려놓는 자는 소설 속에서나 있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겪은 경험과 노하우도 풍부하다. 눈치도 빠르고 비위도 잘 맞추며 거짓말도 잘 한다. 실전에 강하다.

 

그러니 그냥 싸움에 나설 경우 젊은이들은 판판이 깨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깨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덤벼들어야 한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란 말이 공연한 말이겠는가.

 

속아도 보고 깨져도 보고 나뒹굴기도 하면서 단련이 된다.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힘이 젊은이들에게 있기에 後生可畏(후생가외), 즉 부지런히 기량을 갈고닦은 후배는 선배를 능가할 수 있으니 두려운 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운은 내년 2022년이 大寒(대한)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줄어드는 파이를 놓고 저마다 차지해 보겠다고 난리통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그저 맥 빠지고 김빠진 넋두리를 한다, ‘이생망’이라고.

 

 

우리 국운의 우수를 기다리고 지켜볼 터이니 

 

 

하지만 5년 뒤 2027년이 되면 국운의 雨水(우수)를 맞이한다. 나 호호당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그 때 가서도 젊은이들이 그런 자기기만을 일삼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정신 차리게 될 지.

 

나 호호당의 나이 올 해로서 예순하고도 일곱이다. 갖은 세상의 맛을 두루 씹어도 보고 핥아도 본 묵은 생강이다. 하지만 속내를 한 번 털어놓는다, 정권과 정치인들이 젊은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저 그렇게 해 줄 것 같은 ‘척’을 하고 시늉을 낼 뿐이라고.

 

그러니 그냥 넋 놓고 있을 일이 아니란 얘기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무슨 혁명을 하라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 나라로서의 경험을 제법 오래 해왔으니 조용하고 힘차게 또 지속적으로 당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가면 될 일이라 본다. 힘차게 장강의 앞 물결을 밀어내는 뒷 물결이 되라는 얘기이다. 

 

오늘은 雨水(우수), 천지가 준동하는 첫날이다. 그렇기에 우수는 새 생명과 젊음의 첫 날이다. 우리 국운의 우수인 2027년이 되면 당연히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蛇足(사족)으로 한 마디, 우수가 되었으니 집안부터 청소해보자. 주변이 깨끗해지면 정신도 덩달아 맑고 깨끗해진다. 평범하지만 한 해를 알차게 만들어갈 수 있는 秘訣(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