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사라지고 고향도 없어졌으니 

 

 

앞글에서 가족이나 가정 등등의 말이 오늘에 이르러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전통적 의미에서의 가족은 이미 소멸되고 해체되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아울러 씨족집단 즉 가족이 살고 있던 곳이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던 故鄕(고향)이었기에 이젠 사실 고향마저 소멸했다는 말도 잠깐 했다.

 

그 결과 호적법이 폐지되고 그 대신에 핵가족을 전제로 하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게다가 상속에 관한 법률인 가족법도 역시 그 적용이 크게 변해가고 있다. 가족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은 해체가 천천히 진행되어 왔기에 

 

 

그렇다면 서구 또는 서양은 어떨까? 하고 알아보면 정도는 달라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와는 달리 몇 백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정서적인 스트레스가 우리보다는 크지 않았다는 얘기.

 

가족을 뜻하는 것이 패밀리(family)인데 그 원뜻은 다소 놀랍게도 그 집안의 노비나 하인을 뜻하는 famulus란 라틴어에서 왔다는 점이다. 그곳 역시 가족들과 그 노비들로 이루어진 집단, 우리의 예전 가족과 뜻이 비슷하다. 영어의 하우스(house) 역시 원래는 귀족 씨족 집단이 거주하는 공동체의 공간인 일종의 장원을 뜻하던 말이었다.

 

우리는 아직 閥(벌)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대기업을 이루거나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집단의 사람들을 일러 재벌가라고 하고 있다. 그저 예전 단어의 殘在(잔재)일 뿐이다.

 

 

가족 안전망의 붕괴

 

 

이제 가족의 해체가 가져온 결과 특히 가족 안전망의 붕괴에 따른 현실을 얘기해보자.

 

독일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의 이론으로서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와 이익사회(게젤샤프트)가 있다. 오늘날의 현상은 공동사회 특히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사회가 거의 소멸되고 그것이 계약으로 맺어진 이익사회로 대체되었다고 하겠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공동사회의 대표적인 것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었다. 물론 같은 핏줄이라고 해서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지는 않았고 가장 큰 몫은 宗家(종가)가 물려받아 관리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혈연관계라 해도 직계부모의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이 거의 전부이고 친척 간엔 이익을 공유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예로서 부자 삼촌이 있다고 해서 조카가 혜택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부자 삼촌의 자녀는 금수저일 수 있어도 그 금수저의 사촌 동생은 흙수저인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친척이 부자라고 해서 그 득을 보긴 정말 어렵다, 요즘말로 짤없다.

 

예전에 가족의 일원이면 차별이 있긴 해도 그 자체로서 안전망이자 복지의 역할을 했는데 그 잔재가 바로 오늘날 결혼이나 장례 시의 賻儀(부의)이다. 예전 시절 종가가 부유하고 윤택할 경우 그 먼 친척 즉 가족의 일원이 빈한하면 체면 때문에라도 나름 돌봐주었다. 종가집 며느리는 손이 크고 볼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전엔 가문이나 가족, 문중이 개인의 능력보다 더 중요했다.

 

오늘날엔 가족이 없으니 안전망이 철저하게 사라졌다. 그저 핵가족 안에서의 안전망이고 복지가 사실상 전부이다.

 

 

핵가족 안에서마저 안전망이 붕괴되고 있다는 점

 

 

그런데 핵가족에서 부모 중에 한 명, 특히 남편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 집안 사정은 급격하게 어려워진다. 아내가 중병에라도 걸리면 아빠가 직장 일도 하면서 자녀도 돌보고 아내 병 치료 비용도 대야 한다. 사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혼을 할 경우 핵가족 내의 안전망도 사실상 무너진다. 예전엔 문중에서 공동으로 아이들을 돌봤다. 무수한 숙모와 숙부, 때론 많은 이모와 이모부들이 부모 노릇을 했다. 그렇기에 약간의 그늘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 장성하면 당연히 그 은혜에 보답했을 것은 물론이다.

 

 

비정상이 정상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최근에 보면 자녀가 독립해서 가정을 이루고 나가면 그 뒤에 부모를 돌보는 경우도 사실상 없다. 이는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공정치 않다. 이치에 맞지 않다. 자녀들을 키웠다면 나중에 자녀들로부터 부양을 받는 것이 옳은 이치이고 도리이지 않는가.

 

이렇게 된 데에는 오늘날 부모들의 잘못이 크다. 내가 낳은 자식 잘 되고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하다, 하지만 훗날 키워준 자녀에게서 일부라도 돌려받을 생각은 해야 그게 정상이고 이치이다.

 

이렇게 된 바탕을 보면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1980년대까지 먹고 살기가 정말 너무나도 어려웠기에 우리 부모들은 어차피 힘든 마당에 자녀 너희들이라도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으로서 고생한 恨(한)을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다.

 

좋게 보면 숭고한 희생정신이라 하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오늘날 무수히 많은 가난한 독거노인과 고독사를 양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부모의 은혜마저 나 몰라라! 하면 어떤 세상이 되는가!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다. 세상에 공짜 없는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자녀가 훗날 받은 것의 상당 부분을 갚음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의 膏血(고혈)을 빨아먹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부모의 고혈을 당연시하면서 빨아먹은 자녀가 성장해서 사회에 나가면 일반 타인들에겐 어떻게 행동할까? 타인의 등골을 빼먹고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지!

 

孝(효)라든가 유교 정신을 떠나서 이건 아닌 것이다. 시대의 새로운 정신, 공정한 마인드와도 맞지 않다. 나 호호당 생각에 우리 사회가 극도로 살벌해진 바탕에는 나만 잘 살고 잘 누리면 장땡이란 극도의 이기심이 놓여 있다고 여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견 역할을 하는 중년의 부모들, 좀 윤택하게 살아가는 중산층 또는 중상층을 한 번 살펴보자.

 

자녀 교육에 엄청난 비용을 들이붓고 있다, 스스로도 골프 좀 쳐야할 것 같고 산티아고 순례도 힐링차 다녀와야 하겠으며 차도 가능하면 뱀인지 BMW인지 그런 것도 좀 빼서 다녀야 할 판이다. 그러니 연로한 부모님에게 크게 갚음할 돈은 어렵고 그저 명절에 얼굴 내밀고 가끔 온라인으로 용돈 보내드리는 것이 고작이다. 다른 데 쓸 곳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아직은 孝(효)라고 하는 관념이 남아있어서 일종의 양심 해결이라 하겠는데 지금의 자녀들이 훗날 그 정도 양심 해결이라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지금의 기성 중년층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왜 나를 금수저로 키워주지 못했느냐 하면서 원망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라 본다.

 

 

핵가족마저 흔들리고 있는 오늘의 세상

 

 

이처럼 가족을 통한 복지와 안전망은 오늘에 이르러 철저하게 붕괴되고 핵가족마저 흔들리고 있다. 

 

명절에 고향의 부모님을 찾는 것 역시 며느리 입장에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친정 부모도 독립하면 거의 타인처럼 변해가는 판국에 시댁 부모님이 한 재산 움켜쥐고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명절에 찾아갈 이유가 없다. 반가운 일이라곤 전혀 없고 가고 오면서 힘만 든다. 그러니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족의 해체는 지금도 맹렬한 속도로 진행 중이고 가족 집단이 안전망을 제공하던 곳으로서의 故鄕(고향) 역시 이젠 관념 속 존재일 뿐이다.

 

형제일지라도 각자 독립하고 나면 각자의 능력으로 살아갈 뿐이고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을 볼 일도 거의 없다. 그나마 명절 때 한 번 보는 정도이니 오가는 情(정)도 별로 없다. 그러니 사촌지간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무슨 정이 붙겠는가. 앞으론 더더욱 그럴 것이다.

 

情(정)이 무엇인가? 이익을 주고받음에 있어 손익을 철저하게 따지지 않는 게 정이라 본다, 나 호호당은 그렇게 생각한다.

 

 

무정하고 살벌해진 우리 대한민국 

 

 

그런데 오늘날 가족의 해체로 인해 부모가 돌아가시면 형제 사이라도 사실상 남남인 판국이니 가족 안전망은 철저하게 사라졌다. 정도 사라졌다. 그저 살벌한 우리 대한민국이다.

 

돌이켜보면 2012년 대선 당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복지였다. 다른 말로 사회안전망이 가장 큰 이슈였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논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나 호호당의 생각은 이렇다. 그 이전 성장하던 시절엔 각자 열심히 좀 하면 돈 많이 벌어서 본인도 누리고 자녀들도 잘 키우고 부모님께도 잘 해드리겠다는 희망 혹은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이 되자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각자살기만으론 너무나도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던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는 생각이다.

 

 

복지 논쟁의 바탕에 깔린 생각

 

 

그러자 갑자기 복지논쟁, 이젠 나라가 나서서 해결해주시오 하고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입장에선 그 역시 모순이다. 복지비용을 늘리고 싶어도 저성장 국면이 되면 세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장차 인구가 줄어들 것이니 미래는 더더욱 어둡다. 남은 것은 이른바 가진 자들로부터 더 뜯어내거나 국채발행을 늘려 미래의 세수를 미리 앞당겨 쓰는 적자재정이 전부이다.

 

그런데 때마침 미국이 무제한 양적완화를 했으니 돈 풀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마구 적자재정을 행해 치닫기 시작한 현 정부이다. 아마도 다음 정부는 더더욱 미친 듯이 적자재정을 늘려갈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가 갈구하는 바람직한 기업은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다. 이는 옛날로 치면 종가집에서 넉넉한 인심을 베풀길 바라는 심정과 동일하다. 오늘날 복지와 안전망 역할은 일자리가 해주고 있는 셈이고 일자리를 베푸는 것은 기업인 까닭이다. 그러니 사회적 기업, 기업의 이익보다 직원들의 복지와 안전을 책임져주는 기업이 많아지길 바라는 심리의 반영이라 하겠다.

 

틀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란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바뀌었고 물질적 풍요는 비할 바 없이 커졌지만 먹고 사는 이치는 예전에 비해 어떤 면에선 더 가혹해지고 살벌해진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가족이 해체되었으니 각자살기이고 고향이 사라졌으니 심적으로 기댈 데도 없다, 그저 내 몸뚱이 하나가 밑천이다.

 

그러니 복지! 복지! 하면서 복지타령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국가가 적자재정을 통해 복지비를 마냥 늘려갈 수 있을까? 참, 그게 문제로다. That is the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