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에 대한 공포

 

 

“재수 없으면 120세까지 살 게 된다”, 일본의 공포괴담이다. 흐흐흐, 설마? 하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60세에 은퇴해서 60년을 벌지 않고 까먹으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 그야말로 호러 스토리가 된다.

 

원래 은퇴란 것은 餘生(여생), 즉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 예전엔 대충 5년에서 길면 10년 정도의 시간을 편하게 쉬다가 가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여생이 이젠 길어도 너무 길어졌다. 기술의 혁신과 발전으로 인해 영양분 공급이나 醫療(의료)가 너무 좋아져서 생겨난 새로운 모순이다.

 

바이오 기업들이 퇴행성 관절염이나 치매, 암 발병에 듣는 약까지 개발할 것 같으면 공포괴담 정도가 아니라 120세가 현실이 될 것도 같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것들

 

 

이에 오늘은 늙어가면서 겪는 일에 대해 약간 얘기해본다. 블로그 독자들은 아마도 나보다 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니 이런 얘기를 들어두면 각자 나중의 삶에 대비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이제 66년하고도 7개월을 살고 있다. 노년 같기도 하고 때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늙으면서 생겨난 신체의 변화

 

 

먼저 노년이다 싶은 점부터 따져본다. 작년에 디스크 문제로 인해 좌골신경통을 겪었다. 처음엔 왼쪽 다리가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비되고 심하게 통증이 왔다. 타고나길 유연해서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으리라 여겼던 착각이 깨지면서 심적인 충격은 더 컸다.

 

여름엔 어쩌다 한 번씩 눈의 흰자위 실핏줄이 터지면서 붉은 눈이 되곤 한다. 마치 뱀파이어의 눈처럼 된다. 안압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다행히도 매주 한 번씩 왕진 오는 한의사 분이 침으로 해결해주고 있다. (나 호호당에겐 실력이 비범한 한의 주치의가 있다.)

 

작년 가을엔 귀에서 소음이 들려서 이비인후과를 찾았더니 돌발성 난청이란 것이었다. 테스트를 했더니 왼쪽 귀의 청력이 정상에서 조금 밑으로 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양반 약간 엉터리였다. 한의 주치의가 와서 이문혈에 침 한 대를 놓았더니 달팽이관 쪽에 청량한 느낌이 오더니 그냥 나았다.

 

작년 가을엔 또 갑자기 혈압이 생겼다. 약간 어질어질해서 혹시나 하고 혈압을 재봤더니 140에서 160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여태껏 늘 120-80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운동, 특히 스쿼트를 조심해서 무리하지 않고 한 달간 했더니 혈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체 근력이 약해지면서 그랬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젠 저녁 8시 이후에 뭔가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서 불편하다. 정 출출하면 쌀밥 두 숟가락 정도 김에 싸서 잘 씹어서 삼키고 물을 마신다. 전체 식사량도 40대 시절에 비하면 40% 정도로 줄었다. 소식하면 장수한다고 하지만 실은 소화가 되질 않으니 소식하게 되는 것 같다.

다행한 점은 평소 육류를 그다지 자주 먹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아서 혈당이 지극히 정상이란 점이다. 당뇨 걱정은 전혀 없다는 얘기. 술 먹다 보면 기름진 고기를 먹게 되고 그 결과 통풍으로 고생하는 이도 많다. 친구가 통풍인데 아파도 너무 아프다는 것이다. 통풍은 치료도 어렵고 재발도 잘 된다.

 

생각해보니 뇌기능도 많이 퇴화되었지 않나 싶다.

 

어려서부터 암기력이 정말 좋았다. 가령 연도나 명칭을 많이 기억해야 하는 國史(국사)의 경우 깡그리 다 외웠기에 국사시험은 늘 백점이었다. 영어 단어도 한 때 3만 단어까지 외웠던 적이 있다. 두꺼운 영어사전을 펼치면 거짓말 좀 보태서 절반은 아는 단어였다.

 

40대 초반까진 적는 게 귀찮아서 웬만하면 외우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게 힘들고 성가셔서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바람에 암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 여유가 생겨나기에  

 

 

나이가 들면 이해력이 더 좋아진다는 통설이 있는데 내 생각엔 살면서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하면서 다양한 데이터베이스가 생기는 탓에 보다 종합적인 사고력을 갖추는 것 같다.

 

흥미로운 예를 하나 들어본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 척 봐도 거짓말인 것은 알겠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하는 점에 대해선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단순한 상황 같아도 그 젊은이가 내게 거짓을 고할 땐 그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순식간에 여러 개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그 이유가 몇 개 되지 않아 보여서 바로 확인해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젠 왜 그럴까? 하면서 일단 판단을 유보한다. 그 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천천히 확인해간다. 거짓을 말할 땐 실로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 보니 거짓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요즘 말로 빅 데이터가 쌓여있기 때문이다.

 

내침 김에 얘기하면 젊은 사람의 경우 상대방이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정신이 멀쩡해 보인다면 궁색하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당장 너 거짓말 하는구나! 하고 추궁은 하지 않아도 거짓말이란 사실 자체는 금방 알아차리고 그 점을 기억해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늙은 생강이 괜히 맵다는 말 하는 게 아니란 얘기.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살아온 햇수가 좀 되다 보니 데이터베이스가 쌓여있긴 하지만 그 역시 실은 숱한 偏見(편견)들의 집합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확률이 조금 더 줄었을 뿐이기에 여전히 섣부른 판단이나 확신을 경계한다. 거짓말만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도 쉽사리 부정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그로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종의 여유 공간 즉 버퍼(buffer)는 항상 간직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말들을 간단히 줄여보면 상대방의 궁색한 변명이나 거짓말에 대해 알아도 속아주면서 넘어가는 게 때론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경륜 즉 삶의 ‘짬밥’이 있는 노년의 너그러움이 아닌가 싶다.

 

 

몸이 늙어갈 뿐

 

 

지금까지는 67세나 되었으니 이젠 노년이구나 싶은 점에 대해 얘기했는데 반대로 여전히 별로 노년도 아니구나 싶은 점에 대해서도 얘기해본다.

 

세는 나이로 예순하고도 일곱이다. 방금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거울을 보니 목주름이 쳐져있고 눈 아래도 축 처졌음을 확인하고 왔다. 그러니 피지컬리 노년임은 인정하고 시작한다.

 

내 생각에 예순 일곱의 사람은 그 안에 어린 아이도 있고 10대의 반항기도 있으며 20대의 왕성함, 30-40대의 뜨거움, 50대의 노련함, 그리고 60대의 느긋함이 모두 함께 同居(동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다 있다!

 

가끔 코털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뽑게 된다. 그 결과 콧속에 염증이 생겨서 며칠 불편하다. 이건 40대 정도에 하던 버릇인데 이 바보짓을 내가 또 했구나 싶으면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아이고, 아직도 젊었어!, 뻔히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 순간의 장난기 그리고 약간의 쾌감에 빠져 이 짓을 또 했구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론 바보짓을 반복하는 것이 꼭 싫지만은 않다. ‘바보짓은 젊음의 특권’인데 아직도 그 특권을 누리고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다. 난 젊었어, 이런 짓을 또 하고 있으니! (그런데 말이다. 난 젊었어! 하는 자체가 늙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늙긴 늙은 것이다. 인정!.)

 

하고자 하는 얘기는 몸은 분명 한 해 한 해 늙어가고 있으나 정신은 여전히 멀쩡하다는 점이다. 물론 호르몬 변화, 즉 체내 케미스트리의 변화로 인해 생각이나 사고의 변화야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게 실은 전혀 나쁘지 않다. 눈앞의 삶을 훨씬 더 편안하게 관조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 ‘노년의 축복’이라 하겠다.

 

 

늙어가면서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한 가지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로 조심해야 할 점 한 가지만 알려드린다. 주변의 후배나 젊은이들을 상대로 ‘지적질’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경륜이 쌓였으니 당연히 어린 후배들의 행동이나 생각에 부족한 점이 느껴질 법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점을 지적하거나 훈계하려 들지 말라는 점이다.

 

앞에서 바보짓은 젊음의 특권이란 말을 했는데 바로 그렇다. 젊은이나 후배들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세련되어 진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말로 지적하거나 훈계한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냥 두면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알아서 잘 하게 될 것이다.

 

가르침은 스스로가 가르치고 스스로가 배우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을 해주고 싶다면 상대가 당신의 생각에 대해 들어볼 用意(용의)가 있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한다. 상대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그냥 지켜봐 주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들을 생각도 없고 받아들일 준비도 없는 후배에게 나름 도와준답시고 말을 쉽게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간섭이고 무례한 언행에 불과하다. 그게 바로 ‘꼰대질’이다.

 

젊은이는 失手(실수)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늙은이는 젊은 후배가 실수를 하면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도닥여주면 된다. 반성은 젊은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렇다. 우리 모두 실수를 통해 더 세련되어진다. 그게 삶이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