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강박증에 빠진 우리 대한민국

 

 

처음 글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과거의 우리 전통과 단절된 나라란 사실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 글에선 우리 사회가 전통과 단절된 결과 겪게 되는 갈등이 너무나도 크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전통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애기했다.

 

이제 이번 주제를 마무리하는 글을 시작해보자.

 

우리 대한민국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면에선 변화에 중독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사회는 뭐든 늘 새롭게 더 좋게 바꾸고 변화시켜 가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이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하는 말이 연일 들려오는 사회, 정치인들 그리고 사회운동가들, 여타 학식과 비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선거 때마다 그리고 평소에도 책과 저술을 통해 부단히 토해내는 말들이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리고 6.25 전쟁 이후, 1987년 민주화 이후 등등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바꾸어왔다. 물론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고 많은 방면에서 좋아졌고 나아졌다. 사실이다.

 

오늘의 글로벌 삼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고 이건희 회장이 1997년 책을 통해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자고 혁신을 주문한 끝에 만들어진 것 분명 인정한다. 선거 때마다 무지막지한 혁신과 개혁을 하내겠다는 대선 주자들의 약속도 물론 대부분이 빈말이었으나 그럼에도 우리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 역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언젠가 이정현이란 여가수가 부른 ‘바꿔’란 제목의 노래가 생각난다. 검색해보니 1999년이었다. 꽤나 히트를 친 노래였다. “바꿔 바꿔 바꿔 모든걸 다 바꿔” 하고 절규하듯 노래하던 기억이 난다.

 

 

변화란 힘든 것인데 그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말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그렇게나 많이 바꾸고 뒤집고 엎어버리고 변화하고 변신해왔는데 아직도 ‘빛의 속도’로 바꾸어야 할 것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는 얘기이다.

 

나날이 껍질을 벗지 않으면 정말이지 평범하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우리 현실이고 실정인가 싶다.

 

바꾼다는 것은 기존의 틀이나 루틴이 현실에 잘 적용되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이다. 바꾼다는 것은 새롭게 길을 찾아가고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그건 그야말로 고생길이다.

 

그런 까닭에 이제 나 호호당의 귀에 뭔가 바꾸자는 얘기는 계속해서 고생을 해보자는 얘기로까지 들린다.

 

과거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트로츠키의 주장 중에 유명한 것으로서 “영구혁명론”이란 것이 있다. 영어 제목으론 ‘Permanent revolution’이다. 젊은 시절엔 그게 뭔지 잘 몰라도 말 자체만으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진정한 무엇이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혁명을 지속해가야 한다는 그 패기에 크하! 하고 감탄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만 이룩하면 정말이지 잘 살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의 문제점과 불만에 대해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을 때 나 호호당은 지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끝이 없구나! 엔드리스(endless)이구나! 했다.

 

 

툭 하면 바꾸자고 하니 몸살이 날 지경인데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로도 정권이 바뀌면 으레 한 번쯤은 개헌설이 흘러나온다. 헌법이란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인데 그걸 정권 교체기마다 나온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5년마다 근본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우리에겐 문제가 많은 걸까?

 

헌법이란 그 정신부터가 최상의 이성과 지성을 담았기에 한 번 제정되면 기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헌법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란 얘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헌법 개정 즉 개헌을 툭 하면 일반 법률 조항 바꾸듯이 바꾸려고 한다.

 

문재인 현 정부가 시작할 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연실색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크고 작은 문제야 어느 나라나 있는 법인데 우리 대한민국은 그래도 글로벌리 전 세계적으로 반열에 드는 나라가 아니던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그야말로 ‘꿈의 나라’여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요소가 그렇게나 많이 부족한가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 한 때 텔레비전 방송에서 MC가 ‘어떤 남성을 이상형으로 생각하시나요?’ 하고 여성 연예인에게 질문하면 ‘저는 남자다운 남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는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남자다운 남자가 어떤 남자를 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듯이, 나라다운 나라 역시 어떤 나라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그래봐야 멋 좀 부려본 정치 레토릭에 불과하니 말이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 깃든 변화강박증 혹은 중독 현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오리지널인 영국은 아예 헌법, 즉 명문화된 헌법이 없다. 성문헌법이 없어도 될 정도로 잘 확립된 정치적 사회적 전통이 견실 확고하게 자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 글로벌 최강국이자 우리의 모델인 미국의 경우 헌법은 원래의 초기헌법 조항이 7개, 즉 7개조가 있고 추가로 수정된 조항 27개조가 전부이다. 27개의 수정 조항 역시 건국 초기에 수정된 것이 대부분이고 합중국이 쪼개질 뻔 했던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론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이웃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헌법이 만들어졌을 때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최고의 법적 틀이란 의미에서 不磨(불마)의 헌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대전 패망 이후 수정이 있었을 뿐이다. 소위 평화헌법이 그것이다.

 

헌법과 관련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영국이나 미국, 일본이 우리보다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바꿔서 좋다면 당연히 바꿔야 할 것이다.

 

 

전통의 단절이 바람직한 면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선 우리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이처럼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면 전통이 없어진 바람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던 점이 있다. 우리야말로 6.25 전쟁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과거 1950-1980년대까지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모질고 억척이고 독한 악바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정도까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없었지 않을까 싶기에 그렇다.

 

하지만 언제까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뒤집고 엎고 바꾸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革新(혁신), 수레에 씌운 가죽을 바꾼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이제 바꿀 가죽이 남긴 남은 걸까 싶다, 우리 모두 한 번뿐인 인생인데 2-3년 쓰면 버리는 스마트폰처럼 계속해서 바꿔가기엔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다는 말을 지금 나 호호당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지나치게 각성된 우리 대한민국

 

 

어린 시절부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상기해본다.

 

과거엔 만주 땅까지 호령하던 고구려는 외세를 끌어들인 비겁한 신라에게 망했다는 얘기, 고려 시대엔 문신들이 무인들을 하인 부리듯 부리다가 떼죽음 당했다는 얘기. 몽골에 대해 끝까지 항쟁하는 삼별초를 고려 조정까지 합세해서 없애버렸다는 얘기.

 

조선시대는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탐관오리들이 다 해먹은 나라였다, 충신이 바른말 하면 잘리거나 귀양 갔다는 얘기, 이순신 장군의 억울한 얘기, 선조란 임금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애진작에 도성 한양을 비우고 튀었다는 얘기, 학정에 들고 일어난 민초들의 동학운동은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 당했다는 얘기, 나라밖의 새로운 문물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문을 닫고 우물 안 개구리 하다가 폭삭 망했다는 얘기, 해방과 건국 이후에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바람에 여전히 어렵다는 얘기 등등 부끄러운 역사로 가득하다.

 

물론 각성을 촉구하고 앞으론 잘 되자고 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自虐(자학)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지나치게 각성된 것 같기도 하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가질 법도 하다. 전통은 일단 사그리(?) 버리고 볼 그 무엇으로 치부해야만 개념이 있는 현대 한국 시민 자격이 있을 것도 같다.

 

 

변화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점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언제까지? 바꾸고 엎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바꿔왔건만 양극화는 왜 더 심해지는 걸까. 변화 자체에 대해 이젠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을 더 해봐야 하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혔으니 상호 타협해가면서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해가는 것이 경상도 방언으로 ‘확 다 바까삐리’ 하는 것보다도 실은 더 나은 방식이 되는 건 아닐까.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하고 다듬어 가다보면 그게 전통이 될 것이고 이후에 자리를 잡으면 훨씬 더 편안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3회에 걸쳐 적지 않은 얘기들을 했지만 머릿속에는 미처 꺼내지 못한 말과 생각들이 더 많다. 그래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주제였고 역시 꺼내다 보니 이 정도 분량의 글로선 어림도 없음을 알 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야겠다. 다만 너무 줄이다 보니 원래의 의도가 과연 조금이라도 전달이 될까 싶은 염려도 많다. 아무튼 오늘 글로서 마무리한 것에 대해 스스로 안도할 뿐이다. 긴 한 숨, 휴-.

 

다시 원래 하던 ‘운명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야지 싶다.

 

쉽지도 않고 머리도 무거운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 드린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또 새벽이다. 바깥은 무지막지한 한파가 몰아쳐 오고 있다. 제발 마지막 동장군의 행차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