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새해의 윤곽은 아직...

 

 

봄의 시작이자 한 해의 시작인 立春(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봄은 시작되지 않았고 여전히 겨울이다. 우리가 체감하는 봄은 2월 3일의 입춘으로부터 15일이 지난 2월 18일 雨水(우수)가 되어야 시작된다. 그러니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이다.

 

다시 얘기지만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이번 새해가 어떤 해가 될 것인지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냥 좋은 해가 되길 바랄 뿐이다. 새해에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를 전망하려면 가장 빨라야 4월 하순의 穀雨(곡우)는 되어야 한다.

 

왜 새해가 되었지만 한 해를 전망할 수 없다는 걸까? 그 이유를 알아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밤 12시 자정이 넘으면 새 날이 시작된다. 하지만 새 날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즉시 활동하진 않는다. 자정 넘긴 시각이면 대다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 밥도 먹고 이런저런 준비를 마친 뒤 일터로 나간다.

 

여기서 잠깐, 일터란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보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싸움터 즉 戰場(전장)이라 보면 정확하다. 우리가 새해가 되고 그 새해를 예상해본다는 것은 새해의 전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해보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새 날의 전망은 일터에 나가봐야만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좋은 하루가 될 것인지 아니면 힘든 하루가 될 것인지는 일터에 나가봐야만 윤곽이 그려진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서 일을 시작하는 시각은 대부분 오전 9시 경이다.

 

한 해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새 해가 밝았지만 아직은 한밤중과 같다. 4월 하순이 되어야만 하루로 치면 8시 반 정도와 같다. 8시 반 경이면 아직 업무가 시작되진 않았어도 하루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듯이 새해의 일도 4월 하순은 되어야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전망

 

 

뭐니 해도 올 한 해의 가장 큰 궁금증은 코로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백신이 제대로 들어올 지, 들어온다면 언제쯤일지, 효과는 충분할지, 그리고 그 결과 우리 모두 바라는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궁금하다.

 

앞날을 예측함에 있어 자연순환운명학이란 날카로운 도구를 갖고 있는 나 호호당도 새 해 벽두부터 이렇다 하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해본다면 이렇다.

 

팬데믹 선언이 작년 3월 12일 무렵에 있었으니 그로부터 18개월이 경과한 금년 9월 12일 경이면 급기야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까 한다. 18은 변화의 수인 까닭이다. 그리고 20개월이 흐른 11월이면 어느 정도 코로나 종식에 대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가 사실상 끝이 난거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는 때는 2년이 흐른 2022년 3월 11일 경은 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가 지나간 뒤가 어떤 면에선 더 두렵다. 

 

 

그런데 설령 코로나가 끝이 난다 해도 그 이후가 어떤 면에선 더 두렵다. 자영업자들은 사실상 이제 망했거나 거의 거덜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란 점, 그리고 올 해 중에 상당히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그러니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경제가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가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무진장 돈을 풀었으니 돈의 가치는 엄청나게 떨어진 마당에 소득은 늘긴 고사하고 줄어들고 있으니 이미 사람들의 실질적인 소비생활 무지막지하게 많이 위축되었으며 빈부 격차는 극도로 벌어진 판국이다. 그런데 그런 흐름이 코로나 이후에 어쩌면 더 본격화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보복소비가 있을 거란 전망도 있지만 그거야 잠시 반짝이일 것이고 그 이후론 그야말로 시름시름 앓게 될 경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어쩌면 시름시름 앓는 게 최상일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를 포함해서 글로벌 경제가 혼절 상태로 들어갈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경제 나아가서 글로벌 경제, 이런 얘기는 이쯤으로 접어두고 오늘은 다른 얘기 하나 드린다.

 

 

꿈과 희망, 그리고 비전이란 것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최근과 같이 어려운 시대엔 꿈과 희망을 가지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 없다는 말도 그렇다.

 

그런데 말이다, 꿈과 희망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생을 한 50년 이상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지만 대다수의 삶은 꿈과 희망보다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것만 해도 바쁘고 힘들다. 부유하게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대단히 힘들다는 사실, 그렇기에 그렇게 먹고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는 점을 중년을 지내보면 절로 알게 된다.

 

가만히 서있으면 뒤처진다. 나름 힘껏 달리고 있어야만 옆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다. 모두가 힘껏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속도 운동만으론 앞서가기가 어렵다. 가속을 더 붙일 수 있어야만 주변보다 앞설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주변과 함께 가고 있다면 그건 등속도 운동이라 하겠는데 그게 바로 대다수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먹고 살고 있는 모습이다.

 

등속도 운동은 꿈과 희망을 동력으로 하지 않는다. 그냥 현실을 견디는 것이 등속도 운동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 또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냥 현실을 견디고 버티는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의욕과 탐욕, 운의 상승과 하강

 

 

또 하나의 얘기를 드린다.

 

갖고 싶은 게 있다고 하자. 그냥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것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상이 현재 서 있는 곳으로부터 첩첩한 산을 무수히 넘어가야만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로서 그것을 갖고픈 마음의 진실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용을 치러서라도 가지고 싶은 물건인지 아니면 그렇게 비싼 비용을 치를 것이라면 그건 아니다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앞의 마음을 意慾(의욕)이라 한다. 욕심과 함께 거기에 意志(의지)가 함께 실린 것이다. 뒤의 것을 貪慾(탐욕)이라 한다. 탐하는 욕구만 있을 뿐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치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의욕과 탐욕, 꿈과 희망, 미래에 대한 비전, 이런 얘기는 나름의 깊은 연관성이 있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첫째, 의욕을 가진 자라면 運(운)이 상승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탐욕만 있다면 그건 이제 운이 하강하는 사람이다.

 

둘째, 꿈과 희망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고 버티다 보면 그로서 어느 순간 꿈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꿈과 희망은 所定(소정)의 힘든 과정을 겪은 자만이 가져볼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셋째,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실은 더 일반적이고 정상이다. 마래에 대한 비전은 의욕을 가지고 오랫동안 노력해온 사람만이 어느 순간에 가서 그 빛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한 때 블루오션 전략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그 블루오션이란 것이 바로 그렇다.

 

꿈과 희망은 역경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 상태가 더 지속되면서 의욕을 가지고 발전해가다 보면 마침내 미래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의욕을 가지고 노력하는 자만이 어느 때에 이르러 꿈과 희망을 품게 되고 그게 더 이어지면 환한 비전이 그 사람의 망막에 홀연히 비쳐오고 그려진다.

 

오랜 세월 운명에 대해 연구해오다 보니 어느 날 운과 명의 이치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알게 된 사실이 바로 노력하는 것이 운의 상승이고 시쳇말로 거저 먹으려들기 시작하면 운이 맹렬히 하강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그래서 세상은 사실 공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