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가치관”이라는 것이고 속말로 하면 “무엇이 중한디?”이다.

 

잘 살려면 가치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하겠는데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아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경우 또는 어떤 대상은 그게 실로 어려울 때가 많다.

 

가령 천만 원이 백만 원보다 가치가 큰가, 이는 셈법을 익히고 나면 누구나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다. 아주 쉽다.

 

그런데 가치를 판단하기가 애매하고 어려운 것도 많다. 특히 시간이 지나야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경우 정말 어렵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나름 감안하고 고려하고 계산해가면서 그 무엇을 판단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가령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절 대학을 마치고 일단 사회에 나가서 원치 않는 직장일지라도 취업을 하고볼 일인지 아니면 좀 더 공부를 해서 본인의 몸값을 높여가면서 기회를 엿볼 것인지, 이런 경우 미래의 일을 나름대로 계산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혼을 한다, 이 또한 미래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홧김에 결혼이란 계약을 파기할 일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해보고 또 결정한 이상 미래의 결과에 대해 감당하거나 또 대처하겠다는 각오도 있어야 한다.

 

괜찮은 직장을 다니면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해도 다 지출할 게 아니라 미래에 대비해서 주식투자를 하거나 아니면 펀드에 가입해야 할 것이며 또는 부담이 되는 거액 대출을 안고서라도 아파트를 살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산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다. 끊임없이 불확실한 결정을 해가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게 더 나은 것인지 평소에도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이상 정확하고 확실한 판단이나 결정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저 어떤 결정을 내린 다음 훗날 그 결과가 좋다면 과거의 그 결정이 좋았던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게 있다. 훗날의 결과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좋았다가 말았다가 하면서 변한다는 점이다.

 

바로 塞翁之馬(새옹지마)의 얘기가 그렇다. 처음엔 나쁜 일이었는데 나중에 복이 되고 또 복이 다시 화가 되고 이런 식으로 변해간다.

 

새옹지마란 말의 출처는 나 호호당이 너무나도 많이 읽어서 익숙한 중국 고전 淮南子(회남자)의 人間訓(인간훈) 편에 나오는 구절들을 압축한 말이다.

 

변방의 노인이 기르던 말을 잃었다가 찾았다가 하면서 화와 복이 번갈아드는 얘기를 곁들이면서 원 취지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잠깐 소개하고 싶다, 제법 흥미롭기 때문이다.

 

화와 복은 서로 바뀌어가면서 생겨나기에 그 변화를 내다보기가 어렵다. 禍福之轉而相生(화복지전이상생), 其變難見也(기변난견야).

 

이에 복은 화가 되고 화는 오히려 복이 되기도 하니 그 변화가 끝이 없으며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故福之爲禍(고복지위화), 禍之爲福(화지위복), 化不可極(화불가극), 深不可測也(탐불가측야).

 

이에 나 호호당이 하고픈 말, 드리고픈 말이 있다.

 

어느 날 때늦은 생각이 들고 이에 후회와 탄식을 할 때가 있다. 흔히 晩時之歎(만시지탄)이라 하는 거 말이다.

 

이는 삶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나중에서야 알고 깨닫게 되었을 때 생기는 후회 또는 아쉬움이다. 그 바람에 아, 내가 이것을 조금만 더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실로 착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알아야 할 때 알게 된 것이고 깨달아야 할 때 깨달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늦게 깨달았다고 한탄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헛된 아쉬움 또는 헛된 욕심이란 얘기이다.

 

건강한 젊은이에게 건강이 소중하다고 얘기해주면 그 말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일까? 건강한 젊은이에게 소중한 것은 돈과 출세인 것이지 건강? 왜 그게 중요해? 그건 대부분이 가진 것이고 따라서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을 것이다.

 

사람은 어쨌거나 자신에게 모자라고 결핍된 것에 연연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건강을 다소 해칠지언정 무리해가면서 살을 빼는 처녀가 있기 마련이고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외과를 찾는다. 심지어는 살을 빼는 과정에서 거식증에 걸려서 심할 경우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무엇에 대해 아차,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하면서 때 늦은 감이 들었다 하자.

 

그랬을 때 당황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가령 건강을 다소 잃었다고 하자. 그간 건강했기에 그간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젠 예전만큼 몸이 성하지 않으니 건강을 잘 챙겨야 하겠네 하고 새기면 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건강을 잃었기에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지 잃기 전에 그러니까 성한 몸이라면 그냥 그렇게 계속 건강할 거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아니야,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해, 하고 미리부터 대비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안전비용”이란 개념이 있다. 평소에 안전비용을 지출 또는 지불할 적엔 아깝다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때론 안전비용을 강제적으로 의무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경우나 제도도 많다.

 

대표적으로 “건강보험”이 그렇다. 국가가 강제가입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비용을 잘 내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 이런 제도야말로 만시지탄, 때늦은 후회를 사전에 막는 좋은 제도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안전비용을 지불해가면서 살지는 않는다. 등한시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또 사실 굉장히 많고 다양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게 더 정상이다.

 

모든 것과 모든 일에 만반의 준비를 철저히 하면서 산다? 그건 신경과민, 노이로제 히스테리가 되어 오히려 명줄 재촉한다.

그러니 늦었다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들면 그럴 필요 전혀 없다는 얘기를 드린다. 늦은 것이 아니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시점부터 잘 하면 되는 일이다.

 

현재를 즐겨라 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나온 말이다. Carpe Diem, 영어로는 seize the day 정도가 된다. 오늘의 해를 붙잡아라, 이런 말인데 무엇보다 어쨌거나 지금 눈앞의 이 시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시지탄 그런 거 하지 말자.

 

호라티우스의 시를 통해 그가 읊은 것을 옮겨보자.

 

미래에 대한 믿음(또는 기대)은 최소한으로 해두고 눈앞의 지금을 붙잡아야 할 것이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훗날 니체가 말한 운명에 대한 사랑, 즉 運命愛(운명애), amor fati 또한 이미 호라티우스의 같은 시에 “주어진 대로 겪어내어야 한다”는 구절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를 즐기라는 말과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라 하겠다.

 

나 호호당, 운명학을 연구해온 사람이고 또 운명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어진 시점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운명을 사랑하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입춘이 지나 乙巳(을사)의 해가 되었다. 바깥은 여전히 孟冬(맹동)이지만 봄의 기운이 일어서고 있다. 무엇보다 해가 길어지고 있지 않은가.

 

새해에 덕담 비슷한 거 하지 않았기에 늦었지만 오늘 이 글로 새해 열심히 잘 살아보자는 말을 드린다.

 

그림에선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굉장히 춥다. 양재천을 따라 불어대는 바람 줄기가 뺨을 꼬집는다. 산책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겨울엔 신기한 것이 하나 있으니 죽은 풀과 떨어지지 않은 잎사귀들의 따뜻한 갈색이 추운 날씨를 시각적으로 보완해준다는 점이다. 걸어간다, 산다는 건 걷는 일이다. 시간의 길 위를 걷다가 어떤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걸어가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얼까? 

돌이켜보니 작년 한 해 동안 자연순환운명학 강좌를 개최하지 않았음을 알고 스스로 약간 놀랐다.

 

작년 한 해가 나 호호당에게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런대로 안정이 되었기에 자연순환운명학 강좌를 열고자 한다.

 

오랫동안 강좌를 해왔고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가르쳐드리고픈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이젠 체력적으로 부담이 제법 된다.

 

나 호호당이 오랜 세월 집요한 궁리 끝에 마침내 그 원리를 발견하고 그를 이론으로 다듬어낸 자연순환운명학은 사후에 억지로 꿰맞추는 식의 주먹구구식 중국 명리학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과학’이라 말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운명학이라 자부한다. 물론 현재로선 더 이상 밝혀내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들도 많이 남아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과학이라 여긴다.

 

사전에 준비할 것은 전혀 없고 한자를 몰라서 망설인다는 분들의 문의가 있지만 아무런 애로가 없다는 점 알려 드린다. 한자 40자 정도만 알면 되고 그 또한 강의 도중에 배우다 보면 절로 익히게 된다.

 

배우고 나면 인생 전체의 운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정도야 사실 지극히 간단한 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많은 고비들을 슬기롭게 넘길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세상의 변화하는 이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을 것이라 자부한다.

 

 

강좌 개요

 

 

강좌 개시:

- 2025 년 2월 22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강좌 기간:

- 매주 토요일 1회, 총 12번의 강좌 (공휴일이나 연휴에 해당될 경우 강좌는 그 다음 주로 순연됩니다.)

 

강좌 장소:

- YBM 강남 CBT센터 (Tel. 02-564-4172)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신논현역 신분당선 6번 출구 도보 5분)

 

수강료:

- 12회분 84 만원. 분납도 가능.

 

신청 방법:

- 제 메일(1tgkim@daum.net)로 신청을 하시면 참강 확인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

 

집앞 인근 양재천 건너 엘지엔솔 연구소가 겨울 초 경내 나무들을 모조리 쳐 없애더니 펜스를 세우고 건물을 짓기로 한 모양이다. 그간 오래된 나무들이 늘 멋진 풍치를 제공했는데 너무 아쉽다. 펜스 아래 비탈에 나무 한 그루가 겨울 하늘을 지키고 있다. 며칠 전 날 맑은 날 찍은 사진인데 수시로 눈길을 끈다. 시원해서 그런가? 싶지만 겨울 하늘에 시원한 게 좋을 것 같진 않은데. 아니면 추상성이 느껴져서 눈길을 끄는가 싶기도 하다. 

 

 

설날 연휴 끝나고 오랜만에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마침 한가하니 얼굴 볼 수 있냐고. 당연하지, 무슨 바쁜 일 있으랴,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저녁도 먹었고 특별히 갈 곳도 없어서 동네 길 건너편의 놀이터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이번 설은 화이트 설이야, 했더니 지인이 껄껄대며 웃었다. 별로 웃기는 얘기 같진 않았는데. 앞의 저 발자국은 나와 지인의 것이다. 눈 내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바로 그 다음 날 온도가 올라서 싹-하고 녹았으면 좋겠다. 이미지가 은근히 분위기가 있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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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심심풀이 삼아 재밌게 읽으시라고 시작한 연재 글이다. 연휴도 끝났으니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겠는데 아직 할 얘기가 조금 남았다.

 

이번에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알게 된 것, 아니 정리된 것이 하나 있다.

 

기존의 중국식 명리학과는 정확도와 예측 면에서 차원이 다른 자연순환운명학을 나 호호당이 발전시켜온 과정에 관한 것인데 이 또한 12진법 그리고 60진법의 정연한 규칙 속의 일이더란 얘기이다.

 

1971 辛亥(신해)년에 처음 명리학과 만나게 된 이후 12년마다 큰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1983 癸亥(계해)년에는 기존 명리학의 모든 이론을 섭렵했고 이에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서양 점성술도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주식의 움직임 또한 운명학과 연관을 지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 호호당이 처음 주식을 매수해본 것이 1983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12년이 흘러 1995 乙亥(을해)년 무렵,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중국 각지와 홍콩 대만 등 운명학에 조예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나름 새롭게 배우고 얻은 것도 있었으나 여전히 기존 명리학 체계의 한계를 더욱 깊이 인지했다.

 

다시 12년 뒤인 2007 丁亥(정해)년, 2001년부터 실제 검증을 위해 운명상담 일을 하면서 마침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자연순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맹렬히 이론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2년이 흘러 2019 己亥(기해)년, 자연순환운명학의 이론 체계를 완비하고 세밀한 디테일까지 정리해내었다.

 

이제 6년 뒤인 2031 辛亥(신해)년이 되면 명리학을 만난 지 60년이 된다. 잘은 모르겠으나 60년 한 갑자가 흘렀으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간략히 정리했지만 1983년 무렵부터 서양 점성술과 동시에 주식의 움직임을 연구하게 된 것은 기존 중국 명리학의 이론적 미비점을 인식하고 연구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자 함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사용하는 60진법, 흔히 60 花甲子(화갑자)라고 부른 것의 원 발상지는 중국이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 문명, 흔히 칼데아 천문학에서 왔음을 알게 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서양 점성술의 대가이자 천문학의 마스터인 프톨레미가 “알마게스트”란 불후의 명작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에 수소문한 결과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국의 책을 구독해서 정독 열독했다.

 

프톨레미의 “알마게스트”를 공부하다보니 이론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다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또 그를 바탕으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까지 여러 차례 정독하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2007년 자연순환의 이치 또는 법칙을 발견한 것은 그간 참으로 무수히 읽고 또 읽었던 중국의 덜 알려진 고전인 淮南子(회남자) 속의 한 문장 때문이었다.

 

회남자는 중국의 주류학문인 유학, 특히 주희의 四書三經(사서삼경)에 밀려서 경시되었고 홀대되었기에 그냥 雜家(잡가)로 분류되었고 그 탓에 회남자의 진면목을 제대로 연구해낸 학자는 그간 없었다는 생각이다.

 

타고나길 호기심이 강한 나머지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공부해보았다. 그리고 드로잉과 수채화를 평생 즐겁게 그렸다. 그리고 운명학은 참으로 평생의 반려가 되어주었다.

 

운명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기 위해 주식의 움직임을 연구했다는 얘기를 앞에서 잠깐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규칙과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서양 기하학, 특히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서 얻은 지식과 통찰이 큰 바탕이 되어 주었다. 그 결과 호호당 학파라고 할 정도의 이론적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나 호호당은 이렇게 놀면서 살아왔다. 운명학을 처음 접한 것이 1971년 여름이니 이제 올 여름이면 무려 54년씩이나 된다. 16세에 만나서 54년을 함께 놀다 보니 어언 70세가 되었다.

 

70세라, 어처구니가 없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루가 팍 삭아 있다. 그러니 남은 세월 얼마나 될까? 어쨌거나 그 시간들 금쪽같이 아껴가면서 잘 써야 하겠다.

 

이제 설 연휴도 끝났으니 시리즈 글도 이것으로서 마무리를 짓는다. 끝까지 따라와준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해본다. 

 

황비홍,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본다. 중국의 무술배우 이연걸 그리고 견자단이 연기한 영화들이 워낙 흥행이 잘 되었던 탓에 말이다.

 

꽤나 많은 전설을 남긴 실존인물로서 살았던 곳은 오늘날 중국 남쪽의 대도시 광저우,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광저우에 붙은 佛山市(불산시), 중국 발음으론 포산시이다. 그래서 흔히 포산 황페이홍이라 한다.

 

사실 자세히 알아보면 횡비홍의 무용담은 대부분 지어졌거나 과장되었는데 이는 그가 무술도장과 함께 의원을 하면서 없는 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준 공덕이 많았던 점, 그리고 오늘날 그의 제자가 오늘날 홍콩의 가장 대표적인 무술인 ‘홍가권’을 널리 보급했기에 다소 부풀려진 점이 크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임세영이라 하는데 홍콩배우 홍금보가 임세영으로 출연한 영화도 있다.)

 

왜 갑자기 황비홍 얘기를 꺼내느냐 하면 나 호호당이 한 때 명리학의 원류를 찾아서 중국을 돌아다닐 때 황비홍의 고향인 포산시를 찾아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명리학 공부하는 사람치고 “궁통보감”이란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궁통보감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남부의 대도시인 광저우, 더 정확히 말하면 포산시이기에 찾아갔다.

 

나 호호당은 1994년 혼자서 호기롭게 중국을 찾아간 이래 금융시스템 컨설팅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1996년 말까지 대략 20개월 동안 중국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낸 적이 있다. (1992년에 한중수교를 했다.)

 

영업대상은 중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공상은행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산화가 미진했기에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은행전산 실무자로서의 경력을 살려서 충분히 비즈니스를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도전했었다.

 

이에 베이징에 사무실을 내고 열나게 홍보와 마케팅을 했는데 쉬는 날이나 여유가 생기면 중국 각지는 물론이고 홍콩과 마카오 대만까지 명리학의 대가라고 소문난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곤 했다.

 

돌아와서 얘기, 궁통보감을 읽어보면 기존 주류 명리학과는 결을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중국 남방의 광저우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한 것은 기본적으로 영국 상인들과의 대외무역항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 상인들이 차를 수입해가고 그 대금을 은으로 결제하면서 금융시장이 커졌으며 나중에는 영국 상인들이 은 대신에 아편을 가져오면서 또 다시 시장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흐름은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홍콩이 생겨났다.

 

아무튼 그 바람에 광저우는 거대한 도시, 거대한 시장으로 발전해갔고 인근의 포산과 동관 또한 날로 융성해갔다. 서구문물 또한 왕성하게 유입되었고 그 결과 상업적 마인드가 커지고 여타 중국의 다른 지방과는 달리 자유사상과 자본주의 사조가 많이 유입되었다.

 

주류명리학은 그 대표격의 하나로서 滴天髓(적천수)란 책이 있는데 공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법 심오하고 난해하다. (또 그 바람에 인기가 많다, 뭔가 있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주류명리학의 주된 수요층 또한 식자층 즉 지식인과 지배계급이었고 그 바람에 오가는 상담료도 상당히 거액이었다.

 

그런데 자유로운 분위기의 광저우에선 일반 상인 계층들 그리고 나중에는 서민층에까지 팔자를 논하고 운명을 물어보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저렴한 비용에 팔자를 알아보는 새로운 이론체계가 만들어졌으니 그게 바로 궁통보감이다.

 

궁통보감은 전혀 난해하지 않다. 마리가 좀 되면 열심히 두어 달 암기해서 시장에 나가 좌판을 깔면 바로 돈을 벌 수 있다. 속성 학습이 가능하다는 얘기. 짐작컨대 속성 학원도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시쳇말로 “민주화”라는 개념이 있는데 명리학에서도 일종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중국에서 이리저리 탐문하다 보니 궁통보감의 원조는 광저우 인근 포산시에 있다는 것이었고 이에 그 원조 책을 보기 위해 포산시를 찾아갔다. 1995년, 나 호호당의 나이 마흔의 일이었다.

 

그런데 실로 웃기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식이나 식당의 경우 원조란 개념이 있는데 알고 보면 원조의 또 원조가 있기도 하다. 나중엔 진짜 원조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궁통보감의 원조찾기에서도 발생했다.

 

그 결과 네 번이나 원판 궁통보감을 비싼 가격에 주고 샀다. 살 때마다 이번이 진짜다 하면서 샀지만 말이다. 나중에 어느 게 진짜 원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1840년대의 아편전쟁을 전후해서 포산시에서 어느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론체계란 짐작이 갔다.

 

궁통보감의 이론은 너무 圖式(도식)적이란 점에서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보여주었다.

 

아무튼 나 호호당은 원조 궁통보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제법 적지 않은 돈을 썼다. 지금도 젊은 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 가끔 미소를 짓곤 한다.

 

이번 시리즈 글은 명리학의 발전 과정을 더듬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 호호당이 운명학과 인연을 맺고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일들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우연한 인연으로 漢文(한문)을 익힌 바람에 중국 문학의 原典(원전)들은 물론이고 명리학의 고서적들을 집적 접하고 공부해볼 수 있었다.

 

명리학 분야만 해도 정말 책이 수백 종류가 넘는데 찬찬히 읽어가면서 보니 오리지널이다 싶은 책은 20개가 채 되지 않았다.

 

註(주)를 달고 풀이해 놓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거기에 비평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이론과 학문이 발전한다. 하지만 대다수 책은 마치 컴퓨터로 복사해서 가져다 편집하듯이 단순했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조금 가미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느낀 바, 어떤 분야이든 명석한 이는 드물고 헛된 명성을 얻고자 책을 남긴 이가 대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마친 후 직장에 들어가서도 운명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바람에 꾸준히 책을 찾아서 읽고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정해진 운명이라 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 시간을 내어 직접 사람을 만나 검증해보기로 했다. 직접 사람을 만나서 사주를 물어보고 동시에 그 사람의 인생 살아온 얘기를 들어가면서 검증해보는 작업이었다.

 

직장이 당시 조흥은행 본점(지금은 신한은행 광교빌딩)이라 청계천의 광교였기에 미리 연락해서 명동이나 종로 광화문 일대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다.

 

예컨대 1970-80년대 부동산과 증권가의 큰손으로 명성을 떨친 “광화문 곰”, 고성일 씨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성공 스토리를 청취하면서 그의 사주와 대조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공한 사람의 경우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만나고 나면 의의로 쉽게 자신의 얘기를 즐겁게 털어놓았다.

 

얘기를 들으면서 감탄도 하고 놀라는 표정도 지어주면 상대는 신이 나서 나중에 또 보자고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만났던 터라 상대가 아쉽다 하면서 또 보자고 하면 퇴근 후에 다시 시간을 잡아서 만나기도 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만이 아니라 정반대로 특이한 인물을 어렵게 만나기도 했다.

 

가령 살인사건의 당사자로서 死刑(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옥중면회를 통해 사연도 듣고 나중에 어쩌다 정이 들어서 십여 차례 면회를 간 적도 있다. 어느 날 면회를 갔더니 형이 집행된 바람에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먹먹한 가슴을 안고 되돌아온 적도 있다.

 

어떤 사주를 가졌기에 살인을 저지를까? 또는 살인을 해야하는 압력을 받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젊은 시절의 나 호호당은 호기심 천국이자 만빵이었다.

 

그런 호기심의 대표적인 대상 중에 하나가 바로 巫俗(무속)인이었다. 오늘날엔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엔 무당이나 보살을 찾아가서 점을 보긴 했어도 평소엔 꺼려하고 심지어 무서워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남산 쪽과 미아리 쪽에 점집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거길 찾아가서 점을 치러 왔다고 하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복채도 섭섭하지 않게 내면서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어떤 계기로 또 사유로 그렇게 무당이 되었는지? 물어보는 방식으로 많은 무당들을 만나보았다. 그런 뒤 그 무당의 사주와 대조해서 무당이 된 시기 등을 따지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근 백 명에 가까운 무당들과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공통된 특이점이 하나 있다. 그건 80% 이상의 무당들은 심한 우울증을 앓던 사람들이란 점이다. 그들이 어떤 인연을 만나 무당이 된 뒤 증세도 호전되고 건강해져서 그 길을 가는 무당이 많았다.

 

무당들 또한 신의 세계나 영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간 많은 무당들을 만나보면서 나 호호당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할 순 없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처음 대면했을 때 무당이 무심코 한 마디 툭 던지는 말은 실로 대단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당들이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 호호당에게 사주 상담을 받는 고객 중에 무당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긴 안목에서의 흐름을 살피는 능력은 나 호호당이 무당들보다 한창 위라고 하겠다.

 

8-9세기 경 중국에서 성리학이 등장하자 그에 발을 맞추어 새로운 명리가 등장했다.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균형 즉 발란스(balance)였다. 이는 성리학 그리고 주자가 중시한 中庸(중용)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중용은 흔히 말하는 사서삼경의 四書(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그 중용이다. 대학과 중용은 원래 별도로 있던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오래된 서적 禮記(예기) 안에 들어있던 일부 내용인데 주희가 이를 신유학, 성리학의 핵심 사상으로 세웠다.

 

중용이란 간단히 말해서 치우지지 않는 것, 그리고 어떤 선을 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가령 조선시대 학문을 열심히 닦았던 정조는 활을 대단히 잘 쏘았다.

 

살이 과녁에 꽂히면 그를 的中(적중) 또는 中(중)이라 한다. 서른 발을 쏘는 과정에서 스물아홉 발이 다 과녁에 들어갔을 때 정조는 마지막 화살을 일부러 허공으로 쏘았다. 다 맞히는 것은 중용에 어긋난다고 여긴 것이다.

 

중용이란 퍼펙트한 거, 즉 완벽함이라든가 백점 만점을 좋게 여기지 않는 정신이다.

 

정성을 다하는 것은 좋으나 완벽한 것에 집착하다 보면 지나치기 마련, 즉 오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변태가 되기 때문이다. 才勝德(재승덕), 재주가 덕성을 넘어서는 것을 경계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신명리학 또한 중용의 정신에 따라 균형을 중시했다. 적당해야 좋다는 사상이다. 너무 튀지도 그렇다고 너무 평범한 것도 다 좋지 않다. 약간은 튀는 구석이 있되 모든 면이 그러면 좋지 않다, 대충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새로운 명리였다.

 

균형을 중시하는 것, 오행의 균형 그리고 상생상극의 적절함이 있어야 좋은 팔자라는 것인데 이런 방식의 사주보는 법, 즉 看命(간명)법을 子平(자평)법이라 한다. 지금의 명리학은 이 자평법을 근간으로 조금씩 발전해왔다.

 

오늘은 설날이기에 좀 더 가벼운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이에 중용과 오행의 상생상극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의 글을 마련하고자 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한 해 身數(신수), 운세를 보고자 찾는 것이 있으니 土亭秘訣(토정비결)이다. 이 책에 대해 조금 얘기 드릴까 한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시대 당시 좀 튀던 인물이다. 1500년대 사람이고 명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주류 학문인 성리학보다는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 다소 사이드 계통의 학술에 관심이 더 많았으며 부귀와 출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지은 책이 결코 절대 아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이지함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토정비결이 만들어진 시기 또한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지함의 이름을 팔면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시중에 책이 있고 또 팔려나간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이른바 무슨무슨 秘訣(비결)이란 것에 대해 좀 얘기할 까 싶다.

 

지금도 유튜브에 가면 중국에서 나온 推背圖(추배도), 즉 등을 밀어주는 그림이란 예언서에 관한 영상들이 많이 있다. 당나라 시절 7세기 경의 奇人(기인)이었던 이순풍과 원찬강이 공동저자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을 보면 측천무후의 등장에서부터 등소평의 등장까지 기가 막히게 예언하고 있고 정확하다. 마지막으로 제3차 세계대전까지 예언하고 있다.

 

개뻥이다! 등소평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다면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등소평의 집권 이후, 즉 1980년대 이후라고 보면 된다. (나 호호당이 중국의 지인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2010년대 초반이다.)

 

여기에 적당히 3차 대전 운운하면서 겁을 주고 있으니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책이 꽤나 팔렸다.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松下秘訣(송하비결)이란 책이 나와서 한동안 이목을 끌었다. 조선 시대 말기, 즉 19세기 사람인 송하노인이 썼다고 하는데 2003년에 출판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2 FIFA 월드컵, 노무현 대통령 당선 등을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예언내용은 출판된 이후인 2004년부터는 죄다 틀린다. 따라서 이 책은 2003년에 누군가 지어서 바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직도 개정판이 나오고 여전히 조금씩은 팔려나간다는 점이다. 몽땅 틀려도 그게 오히려 연막이고 언젠가는 기가 막히게 맞을 거야! 하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를 圖讖(도참)이라 한다. 대부분의 도참은 오래 전에 어떤 기인이나 유명인사가 남겼다는 식으로 소개되지만 실은 바로 그 시대에 만들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또 때가 되면 그리고 사회가 혼란해지면 또 나올 것이다. 기대가 된다.

 

중국 사람들이 예로부터 가짜 만드는 일에 대단히 능숙하고 재주가 있다. 설날 잘 보내시길. 이동 중에 조심하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AD 1세기부터였지만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중국 당나라 시절의 현장 스님을 전후로 해서 나뉜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모셨던 그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그 현장 스님 말이다.

 

그 답답한 친구 현장 스님 이전의 번역된 불경을 舊譯(구역), 즉 옛날 식 번역이라 하고 현장 스님부터 번역된 불경을 新譯(신역)이라 할 정도로 크게 나뉜다. 7세기 중반이다.

 

불교 철학은 중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중국 지배계급과 지식인층에게. 그때까지의 중국 철학에 비해 불교 철학은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사변적이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련되고 있어 보였다. 음메 기죽어!

 

이에 자칫 외래문물이 중국 철학과 지식 시장을 다 차지할 것 같은 두려움이 날로 커지자 중국 지식인들 또한 대응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람이 당나라 시절의 韓愈(한유)이다. 唐(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서 이른바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그 한유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도 불교에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문장과 사상이 있다면서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것이 더 좋다는 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인도의 불교가 뛰어났다는 반증이라 하겠다.

 

아무튼 중국 지식인들은 불교 철학을 흡수하고 그를 활용해서 중국식의 대항 논리와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었으니 이게 바로 새로운 유학 즉 新儒學(신유학)이다. 이를 국내에선 주로 성리학이라 부른다.

 

신유학은 정씨 형제와 주돈이 등을 거치면서 나중에 朱子(주자)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이 대목에서 理氣(이기)에 관한 학설이 성립되었다.

 

이제 중국 지식인들 또한 세련된 철학, 엄청 있어 보이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나 호호당 또한 궁리하기 좋아하고 지적 허영심도 많아서 젊은 시절부터 불교철학과 성리학, 서구의 관념철학 등등 두루 섭렵해보았지만 나이 70이 되니 그게 다 쓰잘데기, 즉 쓰잘마리가 없다는 판단이다. 뭘 어쩌자는 건지, 원래 인문학적 지식이란 게 다 그렇다.

 

그러자 운명술도 바뀌어야 했다. 원래 문자를 좀 쓰는 직업인지라 고객들도 문자를 알고 쓰는 지식인이나 지배계급이었기에 그랬다. 이제 더 이상 神煞(신살)로 보는 법은 잘 먹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운명술 또한 命理學(명리학)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신유학 즉 性理學(성리학)이란 말에 대응하는 의미였다.

 

타고난 성품을 性(성)이라 한다면 그것의 이치를 따지는 것이 性理學(성리학)이다. 그런데 그런 성을 부여한 것은 하늘일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명령했다는 의미에서 命理學(명리학)이 된 것이다.

 

내용 또한 성리학의 수준에 맞추어 세련되고 격조가 있어야 했기에 조잡한 神煞(신살)법은 지식인 계층에게 인기가 팍-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神煞(신살)을 위주로 하는 古法(고법)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운명학의 소비 시장이 나뉘었다. 지배계층과 문인 지식층을 대상으로 고상한 말과 현학적인 개념이 들어가는 새로운 명리학과 일반 평민을 대상으로 간단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古法(고법)으로 나뉜 것이다.

 

오늘날에도 唐四柱(당사주)라고 해서 그림책으로 되어 있어 음력생일만 알면 누구나 금방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실은 神殺(신살)을 위주로 하는 古法(고법)에서 겁주는 말을 대폭 덜어내고 좋은 말을 듬뿍 넣어서 대중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복채를 듬뿍 낼 수 있는 지배계층과 그 지배계층에게 영향력이 큰 문인 지식층에겐 理氣(이기)와 같이 좀 더 현학적인 단어를 써가며 운명을 에측하고 풀이하는 새로운 명리가 주류로 등장했다.

 

그러면 다음 글에선 새로운 명리는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사주 책을 공부하다보니 무슨 무슨 살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널리 사회에 퍼져서 살이란 관념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있다.

 

살, 한자로 殺(살)보다는 煞(살)이란 글자를 더 사용한다. 의미는 둘 다 같다, 죽일 살이다.

 

“에라, 급살 맞아라”, 참 무서운 저주의 말이다. 急煞(급살), 갑자기 닥치는 재앙과 액을 뜻한다. “곡성”이란 오컬트 영화에선 무당이 煞(살)을 날린다. 저주의 대상에게 액을 투척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煞(살)이란 무서운 뜻의 말인데 그 출처는 중국의 고대 민속 신앙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종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걸리게 되거나 사망할 경우 煞(살)을 맞았다는 식으로 해석이 되었다.

 

가령 코로나19는 코로나19煞(살)이었던 것이다. 균이 득실거리는 오염된 물을 마실 경우 수인성 전염병, 가령 콜레라에 걸렸으니 그 또한 살이었다. 콜레라살이었다.

 

이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액은 모두 煞(살)이었던 것이고 이런 관념은 오래 전 운명에 관한 術學(술학)이 등장할 때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중국의 경우 대략 8세기 이전의 운명술, 이를 古法(고법) 명리란 하는데 운명을 예측할 때 거의 모든 것이 살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살을 맞느냐, 팔자에 살이 끼었느냐를 따졌다.

 

“역마살”이란 게 있다. 나이가 좀 들면 절로 주변을 통해 듣게 되고 알게 되는 개념이다.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 떠돌게 되는 운명을 뜻한다.

 

최근엔 해외 관광을 다녀오거나 직장을 옮길 경우에 역마살이 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역마살은 상당히 두려운 개념이었다.

 

옛날에 농촌 경제 시절에 집을 떠나 외지로 나갈 경우 도중에 강도를 만날 수도 있었고 또 상한 음식을 먹거나 또는 독감에 걸려 죽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집 떠나면 고생이란 하지만 예전엔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했다. 이에 역마살은 그야말로 공포의 살이었다.

 

그리고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원진살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도 한다. 서로 원망하고 다투게 되는 살을 말한다. 원망할 怨(원)에 성낼 嗔(진)이다. 참으로 핑계대기 좋은 살이 아닐 수 없다.

 

부부가 되어 살다 보면 서로 간에 의견이나 취향이 다르다 보니 으레 다툴 때도 있고 싸우기도 한다. 그런데 원진살이 껴서 그런 것이니 풀어줄 수 있다, 돈만 좀 내면 풀어줄게 식이다. 무속인이나 사주쟁이들의 좋은 영업 상품이다.

 

아무튼 옛날 명리, 즉 古法(고법)에선 神(신)과 煞(살), 줄여서 神煞(신살)로만 얘기했는데 그 바람에 신살의 종류가 수 백 개나 되었다. 그 중에 의미가 좋은 것은 별로 많지가 않고 흉한 것이 대부분이다. 원래 산다는 게 좋은 일은 적고 흉한 일은 많기 마련이니 그렇다. 이를 문자 좀 써서 凶多吉小(흉다길소)라 한다.

 

그 많은 살 중에 명칭부터 흥미로운 것들이 꽤나 많다. 斧劈煞(부벽살), 즉 도끼로 내려침을 당하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받는 재액, 요즘 시쳇말로 아작이 나는 재액이 있고 피를 흥건히 흘리고 죽는다고 하는 血光煞(혈광살)이 있다.

 

남편이 잠자리를 해주지 않아서 늘 혼자서 안방을 지켜야 하는 寡宿(과숙)살, 홀몸이 되어 지내는 孤身(고신)살, 흰 호랑이에게 횡액을 당한다는 白虎大(백호대)살 등등 살벌한 공포의 살들이 많다.

 

무서운 살이 많아야만 사실 영업이 된다. 선생님, 어떻게 풀거나 모면할 길이 없을까요? 하고 고객이 간청을 해오면 운명을 봐주는 술사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의 옷차림이나 기색을 살펴 견적을 뽑은 다음 한껏 우려내었을 것이다.

 

이에 사주쟁이가 싫어서 절을 찾아가 스님에게 물어볼 것 같으면 그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게 다 너의 전생에 쌓은 業(업)이라 하니 말이다.

 

어쩌다 보니 절 얘기 즉 불교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불교의 중국 유입이야말로 새로운 방식의 중국 철학과 운명학을 등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