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앞 인근 양재천 건너 엘지엔솔 연구소가 겨울 초 경내 나무들을 모조리 쳐 없애더니 펜스를 세우고 건물을 짓기로 한 모양이다. 그간 오래된 나무들이 늘 멋진 풍치를 제공했는데 너무 아쉽다. 펜스 아래 비탈에 나무 한 그루가 겨울 하늘을 지키고 있다. 며칠 전 날 맑은 날 찍은 사진인데 수시로 눈길을 끈다. 시원해서 그런가? 싶지만 겨울 하늘에 시원한 게 좋을 것 같진 않은데. 아니면 추상성이 느껴져서 눈길을 끄는가 싶기도 하다. 

 

 

설날 연휴 끝나고 오랜만에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마침 한가하니 얼굴 볼 수 있냐고. 당연하지, 무슨 바쁜 일 있으랴,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저녁도 먹었고 특별히 갈 곳도 없어서 동네 길 건너편의 놀이터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이번 설은 화이트 설이야, 했더니 지인이 껄껄대며 웃었다. 별로 웃기는 얘기 같진 않았는데. 앞의 저 발자국은 나와 지인의 것이다. 눈 내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바로 그 다음 날 온도가 올라서 싹-하고 녹았으면 좋겠다. 이미지가 은근히 분위기가 있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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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심심풀이 삼아 재밌게 읽으시라고 시작한 연재 글이다. 연휴도 끝났으니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겠는데 아직 할 얘기가 조금 남았다.

 

이번에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알게 된 것, 아니 정리된 것이 하나 있다.

 

기존의 중국식 명리학과는 정확도와 예측 면에서 차원이 다른 자연순환운명학을 나 호호당이 발전시켜온 과정에 관한 것인데 이 또한 12진법 그리고 60진법의 정연한 규칙 속의 일이더란 얘기이다.

 

1971 辛亥(신해)년에 처음 명리학과 만나게 된 이후 12년마다 큰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1983 癸亥(계해)년에는 기존 명리학의 모든 이론을 섭렵했고 이에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서양 점성술도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주식의 움직임 또한 운명학과 연관을 지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 호호당이 처음 주식을 매수해본 것이 1983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12년이 흘러 1995 乙亥(을해)년 무렵,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중국 각지와 홍콩 대만 등 운명학에 조예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나름 새롭게 배우고 얻은 것도 있었으나 여전히 기존 명리학 체계의 한계를 더욱 깊이 인지했다.

 

다시 12년 뒤인 2007 丁亥(정해)년, 2001년부터 실제 검증을 위해 운명상담 일을 하면서 마침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자연순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맹렬히 이론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2년이 흘러 2019 己亥(기해)년, 자연순환운명학의 이론 체계를 완비하고 세밀한 디테일까지 정리해내었다.

 

이제 6년 뒤인 2031 辛亥(신해)년이 되면 명리학을 만난 지 60년이 된다. 잘은 모르겠으나 60년 한 갑자가 흘렀으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간략히 정리했지만 1983년 무렵부터 서양 점성술과 동시에 주식의 움직임을 연구하게 된 것은 기존 중국 명리학의 이론적 미비점을 인식하고 연구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자 함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사용하는 60진법, 흔히 60 花甲子(화갑자)라고 부른 것의 원 발상지는 중국이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 문명, 흔히 칼데아 천문학에서 왔음을 알게 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서양 점성술의 대가이자 천문학의 마스터인 프톨레미가 “알마게스트”란 불후의 명작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에 수소문한 결과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국의 책을 구독해서 정독 열독했다.

 

프톨레미의 “알마게스트”를 공부하다보니 이론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다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또 그를 바탕으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까지 여러 차례 정독하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2007년 자연순환의 이치 또는 법칙을 발견한 것은 그간 참으로 무수히 읽고 또 읽었던 중국의 덜 알려진 고전인 淮南子(회남자) 속의 한 문장 때문이었다.

 

회남자는 중국의 주류학문인 유학, 특히 주희의 四書三經(사서삼경)에 밀려서 경시되었고 홀대되었기에 그냥 雜家(잡가)로 분류되었고 그 탓에 회남자의 진면목을 제대로 연구해낸 학자는 그간 없었다는 생각이다.

 

타고나길 호기심이 강한 나머지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공부해보았다. 그리고 드로잉과 수채화를 평생 즐겁게 그렸다. 그리고 운명학은 참으로 평생의 반려가 되어주었다.

 

운명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기 위해 주식의 움직임을 연구했다는 얘기를 앞에서 잠깐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규칙과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서양 기하학, 특히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서 얻은 지식과 통찰이 큰 바탕이 되어 주었다. 그 결과 호호당 학파라고 할 정도의 이론적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나 호호당은 이렇게 놀면서 살아왔다. 운명학을 처음 접한 것이 1971년 여름이니 이제 올 여름이면 무려 54년씩이나 된다. 16세에 만나서 54년을 함께 놀다 보니 어언 70세가 되었다.

 

70세라, 어처구니가 없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루가 팍 삭아 있다. 그러니 남은 세월 얼마나 될까? 어쨌거나 그 시간들 금쪽같이 아껴가면서 잘 써야 하겠다.

 

이제 설 연휴도 끝났으니 시리즈 글도 이것으로서 마무리를 짓는다. 끝까지 따라와준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해본다. 

 

황비홍,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본다. 중국의 무술배우 이연걸 그리고 견자단이 연기한 영화들이 워낙 흥행이 잘 되었던 탓에 말이다.

 

꽤나 많은 전설을 남긴 실존인물로서 살았던 곳은 오늘날 중국 남쪽의 대도시 광저우,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광저우에 붙은 佛山市(불산시), 중국 발음으론 포산시이다. 그래서 흔히 포산 황페이홍이라 한다.

 

사실 자세히 알아보면 횡비홍의 무용담은 대부분 지어졌거나 과장되었는데 이는 그가 무술도장과 함께 의원을 하면서 없는 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준 공덕이 많았던 점, 그리고 오늘날 그의 제자가 오늘날 홍콩의 가장 대표적인 무술인 ‘홍가권’을 널리 보급했기에 다소 부풀려진 점이 크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임세영이라 하는데 홍콩배우 홍금보가 임세영으로 출연한 영화도 있다.)

 

왜 갑자기 황비홍 얘기를 꺼내느냐 하면 나 호호당이 한 때 명리학의 원류를 찾아서 중국을 돌아다닐 때 황비홍의 고향인 포산시를 찾아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명리학 공부하는 사람치고 “궁통보감”이란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궁통보감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남부의 대도시인 광저우, 더 정확히 말하면 포산시이기에 찾아갔다.

 

나 호호당은 1994년 혼자서 호기롭게 중국을 찾아간 이래 금융시스템 컨설팅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1996년 말까지 대략 20개월 동안 중국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낸 적이 있다. (1992년에 한중수교를 했다.)

 

영업대상은 중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공상은행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산화가 미진했기에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은행전산 실무자로서의 경력을 살려서 충분히 비즈니스를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도전했었다.

 

이에 베이징에 사무실을 내고 열나게 홍보와 마케팅을 했는데 쉬는 날이나 여유가 생기면 중국 각지는 물론이고 홍콩과 마카오 대만까지 명리학의 대가라고 소문난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곤 했다.

 

돌아와서 얘기, 궁통보감을 읽어보면 기존 주류 명리학과는 결을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무척 흥미롭다.

 

중국 남방의 광저우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한 것은 기본적으로 영국 상인들과의 대외무역항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 상인들이 차를 수입해가고 그 대금을 은으로 결제하면서 금융시장이 커졌으며 나중에는 영국 상인들이 은 대신에 아편을 가져오면서 또 다시 시장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흐름은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홍콩이 생겨났다.

 

아무튼 그 바람에 광저우는 거대한 도시, 거대한 시장으로 발전해갔고 인근의 포산과 동관 또한 날로 융성해갔다. 서구문물 또한 왕성하게 유입되었고 그 결과 상업적 마인드가 커지고 여타 중국의 다른 지방과는 달리 자유사상과 자본주의 사조가 많이 유입되었다.

 

주류명리학은 그 대표격의 하나로서 滴天髓(적천수)란 책이 있는데 공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법 심오하고 난해하다. (또 그 바람에 인기가 많다, 뭔가 있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주류명리학의 주된 수요층 또한 식자층 즉 지식인과 지배계급이었고 그 바람에 오가는 상담료도 상당히 거액이었다.

 

그런데 자유로운 분위기의 광저우에선 일반 상인 계층들 그리고 나중에는 서민층에까지 팔자를 논하고 운명을 물어보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저렴한 비용에 팔자를 알아보는 새로운 이론체계가 만들어졌으니 그게 바로 궁통보감이다.

 

궁통보감은 전혀 난해하지 않다. 마리가 좀 되면 열심히 두어 달 암기해서 시장에 나가 좌판을 깔면 바로 돈을 벌 수 있다. 속성 학습이 가능하다는 얘기. 짐작컨대 속성 학원도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시쳇말로 “민주화”라는 개념이 있는데 명리학에서도 일종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중국에서 이리저리 탐문하다 보니 궁통보감의 원조는 광저우 인근 포산시에 있다는 것이었고 이에 그 원조 책을 보기 위해 포산시를 찾아갔다. 1995년, 나 호호당의 나이 마흔의 일이었다.

 

그런데 실로 웃기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식이나 식당의 경우 원조란 개념이 있는데 알고 보면 원조의 또 원조가 있기도 하다. 나중엔 진짜 원조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궁통보감의 원조찾기에서도 발생했다.

 

그 결과 네 번이나 원판 궁통보감을 비싼 가격에 주고 샀다. 살 때마다 이번이 진짜다 하면서 샀지만 말이다. 나중에 어느 게 진짜 원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1840년대의 아편전쟁을 전후해서 포산시에서 어느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론체계란 짐작이 갔다.

 

궁통보감의 이론은 너무 圖式(도식)적이란 점에서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보여주었다.

 

아무튼 나 호호당은 원조 궁통보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제법 적지 않은 돈을 썼다. 지금도 젊은 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 가끔 미소를 짓곤 한다.

 

이번 시리즈 글은 명리학의 발전 과정을 더듬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 호호당이 운명학과 인연을 맺고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일들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우연한 인연으로 漢文(한문)을 익힌 바람에 중국 문학의 原典(원전)들은 물론이고 명리학의 고서적들을 집적 접하고 공부해볼 수 있었다.

 

명리학 분야만 해도 정말 책이 수백 종류가 넘는데 찬찬히 읽어가면서 보니 오리지널이다 싶은 책은 20개가 채 되지 않았다.

 

註(주)를 달고 풀이해 놓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거기에 비평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이론과 학문이 발전한다. 하지만 대다수 책은 마치 컴퓨터로 복사해서 가져다 편집하듯이 단순했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조금 가미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느낀 바, 어떤 분야이든 명석한 이는 드물고 헛된 명성을 얻고자 책을 남긴 이가 대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마친 후 직장에 들어가서도 운명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바람에 꾸준히 책을 찾아서 읽고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정해진 운명이라 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 시간을 내어 직접 사람을 만나 검증해보기로 했다. 직접 사람을 만나서 사주를 물어보고 동시에 그 사람의 인생 살아온 얘기를 들어가면서 검증해보는 작업이었다.

 

직장이 당시 조흥은행 본점(지금은 신한은행 광교빌딩)이라 청계천의 광교였기에 미리 연락해서 명동이나 종로 광화문 일대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다.

 

예컨대 1970-80년대 부동산과 증권가의 큰손으로 명성을 떨친 “광화문 곰”, 고성일 씨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성공 스토리를 청취하면서 그의 사주와 대조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공한 사람의 경우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만나고 나면 의의로 쉽게 자신의 얘기를 즐겁게 털어놓았다.

 

얘기를 들으면서 감탄도 하고 놀라는 표정도 지어주면 상대는 신이 나서 나중에 또 보자고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만났던 터라 상대가 아쉽다 하면서 또 보자고 하면 퇴근 후에 다시 시간을 잡아서 만나기도 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만이 아니라 정반대로 특이한 인물을 어렵게 만나기도 했다.

 

가령 살인사건의 당사자로서 死刑(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옥중면회를 통해 사연도 듣고 나중에 어쩌다 정이 들어서 십여 차례 면회를 간 적도 있다. 어느 날 면회를 갔더니 형이 집행된 바람에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먹먹한 가슴을 안고 되돌아온 적도 있다.

 

어떤 사주를 가졌기에 살인을 저지를까? 또는 살인을 해야하는 압력을 받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젊은 시절의 나 호호당은 호기심 천국이자 만빵이었다.

 

그런 호기심의 대표적인 대상 중에 하나가 바로 巫俗(무속)인이었다. 오늘날엔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엔 무당이나 보살을 찾아가서 점을 보긴 했어도 평소엔 꺼려하고 심지어 무서워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남산 쪽과 미아리 쪽에 점집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거길 찾아가서 점을 치러 왔다고 하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복채도 섭섭하지 않게 내면서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어떤 계기로 또 사유로 그렇게 무당이 되었는지? 물어보는 방식으로 많은 무당들을 만나보았다. 그런 뒤 그 무당의 사주와 대조해서 무당이 된 시기 등을 따지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근 백 명에 가까운 무당들과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공통된 특이점이 하나 있다. 그건 80% 이상의 무당들은 심한 우울증을 앓던 사람들이란 점이다. 그들이 어떤 인연을 만나 무당이 된 뒤 증세도 호전되고 건강해져서 그 길을 가는 무당이 많았다.

 

무당들 또한 신의 세계나 영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간 많은 무당들을 만나보면서 나 호호당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할 순 없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처음 대면했을 때 무당이 무심코 한 마디 툭 던지는 말은 실로 대단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당들이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 호호당에게 사주 상담을 받는 고객 중에 무당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긴 안목에서의 흐름을 살피는 능력은 나 호호당이 무당들보다 한창 위라고 하겠다.

 

8-9세기 경 중국에서 성리학이 등장하자 그에 발을 맞추어 새로운 명리가 등장했다.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균형 즉 발란스(balance)였다. 이는 성리학 그리고 주자가 중시한 中庸(중용)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중용은 흔히 말하는 사서삼경의 四書(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그 중용이다. 대학과 중용은 원래 별도로 있던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오래된 서적 禮記(예기) 안에 들어있던 일부 내용인데 주희가 이를 신유학, 성리학의 핵심 사상으로 세웠다.

 

중용이란 간단히 말해서 치우지지 않는 것, 그리고 어떤 선을 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가령 조선시대 학문을 열심히 닦았던 정조는 활을 대단히 잘 쏘았다.

 

살이 과녁에 꽂히면 그를 的中(적중) 또는 中(중)이라 한다. 서른 발을 쏘는 과정에서 스물아홉 발이 다 과녁에 들어갔을 때 정조는 마지막 화살을 일부러 허공으로 쏘았다. 다 맞히는 것은 중용에 어긋난다고 여긴 것이다.

 

중용이란 퍼펙트한 거, 즉 완벽함이라든가 백점 만점을 좋게 여기지 않는 정신이다.

 

정성을 다하는 것은 좋으나 완벽한 것에 집착하다 보면 지나치기 마련, 즉 오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변태가 되기 때문이다. 才勝德(재승덕), 재주가 덕성을 넘어서는 것을 경계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신명리학 또한 중용의 정신에 따라 균형을 중시했다. 적당해야 좋다는 사상이다. 너무 튀지도 그렇다고 너무 평범한 것도 다 좋지 않다. 약간은 튀는 구석이 있되 모든 면이 그러면 좋지 않다, 대충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새로운 명리였다.

 

균형을 중시하는 것, 오행의 균형 그리고 상생상극의 적절함이 있어야 좋은 팔자라는 것인데 이런 방식의 사주보는 법, 즉 看命(간명)법을 子平(자평)법이라 한다. 지금의 명리학은 이 자평법을 근간으로 조금씩 발전해왔다.

 

오늘은 설날이기에 좀 더 가벼운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이에 중용과 오행의 상생상극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의 글을 마련하고자 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한 해 身數(신수), 운세를 보고자 찾는 것이 있으니 土亭秘訣(토정비결)이다. 이 책에 대해 조금 얘기 드릴까 한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시대 당시 좀 튀던 인물이다. 1500년대 사람이고 명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주류 학문인 성리학보다는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 다소 사이드 계통의 학술에 관심이 더 많았으며 부귀와 출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지은 책이 결코 절대 아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이지함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토정비결이 만들어진 시기 또한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지함의 이름을 팔면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시중에 책이 있고 또 팔려나간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이른바 무슨무슨 秘訣(비결)이란 것에 대해 좀 얘기할 까 싶다.

 

지금도 유튜브에 가면 중국에서 나온 推背圖(추배도), 즉 등을 밀어주는 그림이란 예언서에 관한 영상들이 많이 있다. 당나라 시절 7세기 경의 奇人(기인)이었던 이순풍과 원찬강이 공동저자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을 보면 측천무후의 등장에서부터 등소평의 등장까지 기가 막히게 예언하고 있고 정확하다. 마지막으로 제3차 세계대전까지 예언하고 있다.

 

개뻥이다! 등소평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다면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등소평의 집권 이후, 즉 1980년대 이후라고 보면 된다. (나 호호당이 중국의 지인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2010년대 초반이다.)

 

여기에 적당히 3차 대전 운운하면서 겁을 주고 있으니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책이 꽤나 팔렸다.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松下秘訣(송하비결)이란 책이 나와서 한동안 이목을 끌었다. 조선 시대 말기, 즉 19세기 사람인 송하노인이 썼다고 하는데 2003년에 출판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2 FIFA 월드컵, 노무현 대통령 당선 등을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예언내용은 출판된 이후인 2004년부터는 죄다 틀린다. 따라서 이 책은 2003년에 누군가 지어서 바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직도 개정판이 나오고 여전히 조금씩은 팔려나간다는 점이다. 몽땅 틀려도 그게 오히려 연막이고 언젠가는 기가 막히게 맞을 거야! 하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를 圖讖(도참)이라 한다. 대부분의 도참은 오래 전에 어떤 기인이나 유명인사가 남겼다는 식으로 소개되지만 실은 바로 그 시대에 만들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또 때가 되면 그리고 사회가 혼란해지면 또 나올 것이다. 기대가 된다.

 

중국 사람들이 예로부터 가짜 만드는 일에 대단히 능숙하고 재주가 있다. 설날 잘 보내시길. 이동 중에 조심하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AD 1세기부터였지만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중국 당나라 시절의 현장 스님을 전후로 해서 나뉜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모셨던 그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그 현장 스님 말이다.

 

그 답답한 친구 현장 스님 이전의 번역된 불경을 舊譯(구역), 즉 옛날 식 번역이라 하고 현장 스님부터 번역된 불경을 新譯(신역)이라 할 정도로 크게 나뉜다. 7세기 중반이다.

 

불교 철학은 중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중국 지배계급과 지식인층에게. 그때까지의 중국 철학에 비해 불교 철학은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사변적이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련되고 있어 보였다. 음메 기죽어!

 

이에 자칫 외래문물이 중국 철학과 지식 시장을 다 차지할 것 같은 두려움이 날로 커지자 중국 지식인들 또한 대응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람이 당나라 시절의 韓愈(한유)이다. 唐(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서 이른바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그 한유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도 불교에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문장과 사상이 있다면서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것이 더 좋다는 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인도의 불교가 뛰어났다는 반증이라 하겠다.

 

아무튼 중국 지식인들은 불교 철학을 흡수하고 그를 활용해서 중국식의 대항 논리와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었으니 이게 바로 새로운 유학 즉 新儒學(신유학)이다. 이를 국내에선 주로 성리학이라 부른다.

 

신유학은 정씨 형제와 주돈이 등을 거치면서 나중에 朱子(주자)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이 대목에서 理氣(이기)에 관한 학설이 성립되었다.

 

이제 중국 지식인들 또한 세련된 철학, 엄청 있어 보이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나 호호당 또한 궁리하기 좋아하고 지적 허영심도 많아서 젊은 시절부터 불교철학과 성리학, 서구의 관념철학 등등 두루 섭렵해보았지만 나이 70이 되니 그게 다 쓰잘데기, 즉 쓰잘마리가 없다는 판단이다. 뭘 어쩌자는 건지, 원래 인문학적 지식이란 게 다 그렇다.

 

그러자 운명술도 바뀌어야 했다. 원래 문자를 좀 쓰는 직업인지라 고객들도 문자를 알고 쓰는 지식인이나 지배계급이었기에 그랬다. 이제 더 이상 神煞(신살)로 보는 법은 잘 먹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운명술 또한 命理學(명리학)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신유학 즉 性理學(성리학)이란 말에 대응하는 의미였다.

 

타고난 성품을 性(성)이라 한다면 그것의 이치를 따지는 것이 性理學(성리학)이다. 그런데 그런 성을 부여한 것은 하늘일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명령했다는 의미에서 命理學(명리학)이 된 것이다.

 

내용 또한 성리학의 수준에 맞추어 세련되고 격조가 있어야 했기에 조잡한 神煞(신살)법은 지식인 계층에게 인기가 팍-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神煞(신살)을 위주로 하는 古法(고법)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운명학의 소비 시장이 나뉘었다. 지배계층과 문인 지식층을 대상으로 고상한 말과 현학적인 개념이 들어가는 새로운 명리학과 일반 평민을 대상으로 간단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古法(고법)으로 나뉜 것이다.

 

오늘날에도 唐四柱(당사주)라고 해서 그림책으로 되어 있어 음력생일만 알면 누구나 금방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실은 神殺(신살)을 위주로 하는 古法(고법)에서 겁주는 말을 대폭 덜어내고 좋은 말을 듬뿍 넣어서 대중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복채를 듬뿍 낼 수 있는 지배계층과 그 지배계층에게 영향력이 큰 문인 지식층에겐 理氣(이기)와 같이 좀 더 현학적인 단어를 써가며 운명을 에측하고 풀이하는 새로운 명리가 주류로 등장했다.

 

그러면 다음 글에선 새로운 명리는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사주 책을 공부하다보니 무슨 무슨 살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널리 사회에 퍼져서 살이란 관념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있다.

 

살, 한자로 殺(살)보다는 煞(살)이란 글자를 더 사용한다. 의미는 둘 다 같다, 죽일 살이다.

 

“에라, 급살 맞아라”, 참 무서운 저주의 말이다. 急煞(급살), 갑자기 닥치는 재앙과 액을 뜻한다. “곡성”이란 오컬트 영화에선 무당이 煞(살)을 날린다. 저주의 대상에게 액을 투척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煞(살)이란 무서운 뜻의 말인데 그 출처는 중국의 고대 민속 신앙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종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걸리게 되거나 사망할 경우 煞(살)을 맞았다는 식으로 해석이 되었다.

 

가령 코로나19는 코로나19煞(살)이었던 것이다. 균이 득실거리는 오염된 물을 마실 경우 수인성 전염병, 가령 콜레라에 걸렸으니 그 또한 살이었다. 콜레라살이었다.

 

이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액은 모두 煞(살)이었던 것이고 이런 관념은 오래 전 운명에 관한 術學(술학)이 등장할 때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중국의 경우 대략 8세기 이전의 운명술, 이를 古法(고법) 명리란 하는데 운명을 예측할 때 거의 모든 것이 살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살을 맞느냐, 팔자에 살이 끼었느냐를 따졌다.

 

“역마살”이란 게 있다. 나이가 좀 들면 절로 주변을 통해 듣게 되고 알게 되는 개념이다.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 떠돌게 되는 운명을 뜻한다.

 

최근엔 해외 관광을 다녀오거나 직장을 옮길 경우에 역마살이 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역마살은 상당히 두려운 개념이었다.

 

옛날에 농촌 경제 시절에 집을 떠나 외지로 나갈 경우 도중에 강도를 만날 수도 있었고 또 상한 음식을 먹거나 또는 독감에 걸려 죽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집 떠나면 고생이란 하지만 예전엔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했다. 이에 역마살은 그야말로 공포의 살이었다.

 

그리고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원진살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도 한다. 서로 원망하고 다투게 되는 살을 말한다. 원망할 怨(원)에 성낼 嗔(진)이다. 참으로 핑계대기 좋은 살이 아닐 수 없다.

 

부부가 되어 살다 보면 서로 간에 의견이나 취향이 다르다 보니 으레 다툴 때도 있고 싸우기도 한다. 그런데 원진살이 껴서 그런 것이니 풀어줄 수 있다, 돈만 좀 내면 풀어줄게 식이다. 무속인이나 사주쟁이들의 좋은 영업 상품이다.

 

아무튼 옛날 명리, 즉 古法(고법)에선 神(신)과 煞(살), 줄여서 神煞(신살)로만 얘기했는데 그 바람에 신살의 종류가 수 백 개나 되었다. 그 중에 의미가 좋은 것은 별로 많지가 않고 흉한 것이 대부분이다. 원래 산다는 게 좋은 일은 적고 흉한 일은 많기 마련이니 그렇다. 이를 문자 좀 써서 凶多吉小(흉다길소)라 한다.

 

그 많은 살 중에 명칭부터 흥미로운 것들이 꽤나 많다. 斧劈煞(부벽살), 즉 도끼로 내려침을 당하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받는 재액, 요즘 시쳇말로 아작이 나는 재액이 있고 피를 흥건히 흘리고 죽는다고 하는 血光煞(혈광살)이 있다.

 

남편이 잠자리를 해주지 않아서 늘 혼자서 안방을 지켜야 하는 寡宿(과숙)살, 홀몸이 되어 지내는 孤身(고신)살, 흰 호랑이에게 횡액을 당한다는 白虎大(백호대)살 등등 살벌한 공포의 살들이 많다.

 

무서운 살이 많아야만 사실 영업이 된다. 선생님, 어떻게 풀거나 모면할 길이 없을까요? 하고 고객이 간청을 해오면 운명을 봐주는 술사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의 옷차림이나 기색을 살펴 견적을 뽑은 다음 한껏 우려내었을 것이다.

 

이에 사주쟁이가 싫어서 절을 찾아가 스님에게 물어볼 것 같으면 그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게 다 너의 전생에 쌓은 業(업)이라 하니 말이다.

 

어쩌다 보니 절 얘기 즉 불교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불교의 중국 유입이야말로 새로운 방식의 중국 철학과 운명학을 등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이들과 밖에서 뛰어노는 것도 즐거웠고 그림을 즐겨 그려서 동네에 소문이 났었고 초등학교 가서부터 내 그림은 언제나 교실 뒤편 벽에 붙어있었다. 별명이 학교 대표 화가였다.

 

하지만 가장 즐기는 것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언가 상상하거나 궁리하기였다. 당시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라 학업에도 신경을 써야 했지만 여전히 시간만 나면 혼자서 상상놀이 그리고 골똘하게 궁리하길 즐겼다.

 

참으로 수백 수천의 궁리 항목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미래를 어떻게 미리 알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늘 되풀이해서 떠올리곤 했다.

 

궁리하길 좋아하다보니 자연히 독서도 많이 하게 된다. 책에서 지식을 얻고 또 그를 바탕으로 궁리와 추론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이에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 직전까지 집 근처의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쳇말로 책방골목에서 죽을 쳤고 친구들도 나를 보고 싶으면 으레 책방골목으로 찾아왔다.

 

그러다가 저녁 7시가 되면 용두산 공원 아래 중국 무술 도장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한 다음 청소를 했고 8시 반이 되면 사부님 앞에 가서 1대1 방식으로 漢文(한문)을 배웠다.

 

그렇게 보수동 책방골목과 무술도장을 매일 오가던 어느 날 어느 책방에서 ‘사주비전’이란 책을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무렵이었다. 저게 뭐지? 싶어서 들춰보니 사람의 미래를 태어난 연월일시에 근거해서 귀신 같이 예측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음, 이게 바로 예전에 우리 엄마가 내 팔자를 보고 왔다는 것의 이론적 바탕을 적어놓은 책이구나 싶어서 얼른 샀다. 1971년이었다.

 

그런데 벌써 신뢰가 가질 않는 것이 秘典(비전)이라면 비밀리에 소수의 제자에게만 전수하는 것이어야 할 터인데 이렇게 책으로 나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공부해보기로 했다. 읽어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전혀 아닌 것도 같았지만 친구들 만났을 때 ‘썰’을 푸는 용도로 쓰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게 나 호호당이 운명학과 만나게 된 첫 시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1971년이었다. 왜 이 연도를 강조하느냐 하면 그로부터 정확하게 30년이 흘러 2001년에 나 호호당이 사주 가게를 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60년을 하나의 주기로 해서 순환한다. 그렇기에 30년은 그 반환점인데 나 호호당이 명리학이란 것을 만난 지 30년 만에 본격적으로 운명학에 뛰어들었다는 얘기, 다시 말해서 30년 전에 맺은 緣(연)이 30년 뒤에 가서 業(업)이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0년은 60년의 절반, 한 바퀴 빙 둘러서 돌아오는데 60년이 걸리는 동그라미 즉 원이 있다고 해보자. 어떤 점에서 출발해서 30년이 지나면 그 동그라미의 출발점에서 가장 먼 지점, 즉 반대되는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님 저는 정말이지 죽을 지경입니다. 더 이상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하고 누군가 상담 시에 하소연을 해오면 그 말이 진실이라면 30년 뒤에는 가장 행복한 때가 되가 되겠네요, 하고 얘기해준다.

 

나 호호당은 기존의 중국 사주명리학에서 출발했지만 그것들이 지닌 수많은 논리적 虛構(허구)들을 알게 되었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전혀 새롭게 길을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이후 오랜 연구 끝에, 사실 본의 아닌 연구, 도중에 수없이 포기했던 연구 끝에 마침내 자연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작용하는 순환의 이치,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자연순환운명학이 된다.

 

다시 다음 글에서 이어간다. 눈이 너무 내려서 큰일이다. 죄다 얼어붙을 것이다. 큰 길이야 염화칼슘 때문에 괜찮겠으나 여느 동네 길이나 골목길은 넘어져서 다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니 걱정이다.

 

그런 일을 걱정하는 것, 나 호호당 또한 그런 것을 조심해야 할 나이인 까닭이다. 예전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보고 흥취가 일어 나름 내 식으로 그려본 상상화이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놀일 것이다. 나 호호당이 좋아하는 서해 안면도의 바닷가 같기도 하다. 인적이 적은 안면해수욕장을 가장 좋아한다. 동해 바다가 거친 남성이라면 서해 바다는 살결 부드러운 여성이다. 연일 그림을 그리다가 오늘부터 글을 올린다. 설 연휴 내내 한 편씩 이어가는 시리즈 글이 되겠다. 심심풀이 땅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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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운명이란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 또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호호당이 운명의 감춰진 이치를 밝혀내기 위한 길에 오르리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어쩌다보니 求道者(구도자)가 된 셈이다.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전혀 몰랐지만 당시 부산은 한창 사주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팔자를 잘 본다고 하는 어느 유명한 분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아들이 판검사 팔자라고 했다면서 얼굴색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그를 떠나서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가 있지? 하고 의아해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학교 짝지와 함께 부산의 영도다리 밑으로 구경을 갔다. 무당들이 점을 쳐주는 작은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가게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장군님, 귀여운 동자들 또 예쁜 선녀들 그림이 있었고 색상도 울긋불긋한 것이 전혀 다른 세계였다. 간간히 묘한 방울 소리도 들려와서 약간 겁도 나고 또 호기심도 일었다.

 

그 친구, 짝지의 말인즉 그 사람들이야말로 미래의 일을 기가 막히게 예측해낸다면서 자기 엄마가 수시로 여길 온다는 것이었다. 택일 즉 날도 받고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꼭 들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로선 꽤나 혼란했다. 그 무당들은 저마다 신을 받았다고 하는데 교회에서 말하는 그 하느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그 신이 바로 하느님인지 등등 나로선 전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두 살 위 누나에게 물었더니 무당들이 말하는 신은 저급하고 교회의 하느님은 훨씬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영 시원치 않았다. 학교 선생님에게 물었더니 하느님 즉 신은 세상과 우주에 단 한 분이며 무당들이 말하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이에 그 이유 즉 근거를 물었더니 그냥 그런 것으로 알면 된다고 하셨다. 겉으론 수긍하는 척 했지만 속으론 전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에 대해 짝지 말로는 무당들의 신은 수시로 무당의 몸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는데 유일신이자 지고의 신은 절대 나타나지 않으니 그게 더 수상한 거 아닌가? 하는 지적에 오히려 그게 더 그럴 듯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평양에서 함께 피난을 내려오신 나이 드신 스님이 가끔 우리 집에 오시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꽤 적지 않은 돈을 봉투에 담아드리는 모습을 곁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 스님이 6학년 봄인가, 나를 부산 동래의 범어사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당시로선 몰랐지만 천왕문을 지나가는데 눈이 부리부리한 장군들이 나를 아래로 쬐려보는 것이 꽤나 무서웠다.

 

스님, 저 분들은 신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불교에서 악귀를 쫓아내는 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높고 크신 분은 부처님이란 말씀이셨다.

 

당시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그러면 부처님은 신인가요? 교회의 하느님과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하고 물었다. 스님은 웃으실 뿐 애매한 얘기만 들려주셨다. 나중에 너 스스로 정답을 찾아보렴!

 

그 바람에 내가 궁금해 하는 문제, 신의 존재 증명은 점점 더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훗날의 숙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지? 하는 궁금증은 좀 더 파고들면 알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참고로 밝히면 이번 글은 설 연휴 동안 독자님들에게 그냥 가볍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짧게 이어가는 시리즈의 시작이다. 이에 단락의 중간 제목도 붙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