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란 결국 스킬이다. 

 

 

앞글에서 먼저 사진에 대해 말했는데 그건 이미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 그림이나 사진이나 내겐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그림의 소재를 담기 위해 사진을 사용한다는 말도 했다.

 

이제 그림에 대해 얘기한다.

 

예술 또는 아트(art)란 원래 스킬을 뜻하던 말이다. 어원을 찾아보면 “학습이나 연습의 결과 얻어진 스킬” (skill as a result of learning or practice.)이라고 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아트란 일종의 技倆(기량)이고 기술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많이 다르다. 기술이나 기량보다는 이념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기에 그렇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언젠가 별도의 글을 통해 얘기해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 호호당은 현대미술이 정치와 권력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는 점에서 거부한다. 원래의 의미 즉 스킬 즉 기술과 기량으로서의 그림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호호당 당신의 미술 그리고 그림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가? 하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그림이 스킬이고 기량인 점은 인정하지만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은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호호당의 아트는 즐거움에 대한 추구이다.  

 

 

아트 또는 그림에 대한 나 호호당의 생각은 이렇다. 아트란 그 본질에 있어 하나의 놀이이자 遊戱(유희)이며 놀이에 빠져서 반복하다 보면 스킬이 된다고. 줄이면 “놀이의 스킬”이라고 여긴다.

 

그림에 대해 내가 지향하는 바는 “즐거움”이다. 그릴 때의 즐거움, 그리고 남들이 봤을 때의 즐거움이다. 누군가 내 그림을 보면서 “히야, 이거 예술이네!” 하는 감탄사를 터뜨려 주는 것이 내 목표이다.

 

(물론 내 그림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기엔 멀고 또 멀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릴 때까지의 연습이고 숙련이다. 동시에 놀이이다. 높은 경지엔 아마도 죽는 날까지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말이다.)

 

 

그림이 사진과 다른 점

 

 

그림은 사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진은 어쨌거나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 대상의 빛이 포착되고 고정된다. (물론 최근엔 포토삽 놀이를 통해 사진작가의 감성을 개입시킬 수 있지만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자.

 

풍경을 그린다고 하자. 먼저 풍경이 있고 그를 보는 화가의 눈이 있다. 하지만 눈만이 아니라 풍경 앞에서 화가는 공기의 흐름과 냄새, 소리 등등 오관을 총동원해서 풍경을 느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풍경을 그리는 사이에 머릿속에선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생각들이 떠오르고 지워지고를 반복한다.

 

 

그림은 화가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화가가 풍경을 그리는 것은 ‘객체’로서의 풍경을 포착해서 표현하고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화가의 감수성 그리고 화가의 心象(심상)을 그리는 것이다. 화가라는 주체와 풍경이라는 객체의 구분이 아예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 호호당은 이제 사진을 떠나 그림으로 옮겨왔다.)l

 

미안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철학적인 얘기로 설명해본다.

 

먼저 불교 철학의 핵심인 5온(五蘊)으로 말할 것 같으면 풍경이라는 대상 즉 色(색) 앞에서 화가의 반응 즉 수(受)와 상(想), 행(行)과 식(識)이 곁들여지면서 그림이 그려진다.

 

이를 서양 철학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主著(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 화가는 풍경의 現像(현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화가의 마음속에서 재생산된 表象(표상)을 그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폴 세잔이 “생트 빅트와르의 산”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린 이유도 연습이나 숙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볼 때마다의 느낌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화가는 풍경 자체에서만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는 매 순간 의식 속에서 다른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그린다. 대상이 때론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희열의 감정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이 때론 슬프기도 하고 비참한 것이 때론 웃음을 자아낸다.)

 

 

잘 표현하려는 노력은 결국 즐거움에 대한 추구이다. 

 

 

하지만 그림은 궁극적으로 스킬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놀이라 여긴다. 풍경에서 얻은 것을 내 속에서 재생산한 그 무엇-표상이라 해도 되고 불교적 수상행식이라 해도 되는-을 그림으로 펼치는 일은 어렵다, 애를 써야 한다. 잘 해보려면 말이다. 그런데 잘 해보려는 그 노력과 수고는 결국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애를 쓴다, 그렇기에 즐겁다.

 

물론 그릴 당시 나 호호당의 감정이 슬펐다 해도 보는 이가 다르게, 가령 즐거운 그 무엇을 느낀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뭔가를 진지하게 느낀다면 그게 바로 나 호호당의 성공이다.

 

이게 바로 나 호호당의 아트 또는 그림에 대한 생각이다.

 

 

힘들기에 즐겁다. 

 

 

매일 매일 풍경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또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같은 풍경이라 해도 볼 때마다 달라지고,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작 그려보고자 덤벼들면 쉬운 게 없다, 모두 힘들다. 힘들기에 즐겁다.

 

성공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한 번 물어보시라, 언제가 가장 즐거웠냐고. 그러면 예전에 잘 해보려고 죽을둥살둥 눈을 부릅뜨고 애를 쓰고 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 때가 내 삶의 전성기였다고 답할 것이다.

 

 

그림, 無常(무상)함의 놀이 또는 유희

 

 

풍경을 그리든 다른 무엇을 그리든 그 모두 無常(무상)한 것들을 감수하고 내 속에서 재생산해서 그림으로 표현한다. 늘 변하는 것들을 즐기는 방법이다. 호호당의 삶도 역시 그렇다.

 

삶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것이라 여기기에 나 호호당의 아트 혹은 예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11월에 두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기에 호호당의 그림이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아주 진지하게” 노는 것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해서 이런 글을 써서 올린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조만간 미술의 역사, 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나 호호당의 쉽고 간략한 생각을 글로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글을 맺는다.)

이미지란 것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나 호호당 역시 나름의 수채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전시회를 했으니 그렇다. 올 해 11월에도 할 생각으로 준비 중이다.

 

나 호호당은 일주일에 그림을 네 장 정도 그린다. 스케치를 포함하면 더 많다. 물론 원하는 종이가 떨어져서 한동안 쉬기도 하지만 그래도 머릿속으론 늘 그림을 그린다. 길을 가다가 문득 멋진 이미지를 만났을 때 카메라가 없으면 기억해두기 위해 한참을 그 장소에 서서 머릿속에 스케치 해둔다.

 

 

사진과의 오랜 인연

 

 

먼저 사진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다.

 

예전에 오랫동안 사진을 찍었다. 내겐 그림이나 사진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처음엔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콘탁스란 독일 카메라였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1971년의 일이었다. 1949년에 만들어진 명품이었다. 초점 잡는 법이 성가셨지만 렌즈가 저 유명한 칼 자이스의 것이라 참으로 좋은 물건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이 생기자 니콘 FM-2 란 물건을 사서 참으로 장시간 사용했다. 니콘의 장점은 딴 게 아니라 그립(grip)이었다. 손가락 두 개만 걸어도 카메라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기에 휴대가 정말 편했다.

 

지금 사람들은 카메라의 원리를 전혀 모른다. 셔터와 조리개,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빛과 이미지의 조합이 얼마나 다양하고 무궁무진한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카메라가 ‘민주화’되어 버린 것이다. (인류의 역사 자체가 민주화의 역사이긴 하다.)

 

 

예전엔 셔터와 조리개의 조합을 수 백 개 외우고 다녔는데

 

 

예전엔 어떤 장소와 시각에서 빛의 상태에 따라 조리개 얼마 셔터 얼마를 해야 하는지 수첩에 적어두고 다녔다. 숙달되면 수 백 개의 셔터와 조리개의 조합을 외우고 다녔다.

 

필름 방식은 찍은 다음 그 이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같은 장면을 세 번 찍곤 했다. 감으로 노출 조금 과다, 노출 조금 부족, 그리고 최선이다 싶은 상태, 이렇게 세 번을 찍었다. 집에 돌아오면 가슴이 설렜다. 잘 찍혔을까? 하는 마음에. 다음 날 출근길에 가게에 가서 필름을 맡겼다가 오후에 가서 현상된 상태를 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앗, 망쳤다! 하면서 뒤통수를 탁 치곤 했다.

 

 

쪼는 맛을 사라지게 만든 디카

 

 

그러다가 ‘디카’가 나왔다. 찍은 다음 즉각 그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가히 혁신이었다. 그러자 이른바 ‘쪼는 맛’이 사라졌다. 화투 ‘섰다’ 놀이에서 두 장을 받아들고 한 장을 먼저 확인한 다음 그 다음 장이 과연 무엇인지 극도로 조심스럽게 엄지로 조심스럽게 밀어 까보는 재미 말이다. 그런 맛이 사라지자 한동안 사진 찍는 재미 자체가 없어질 정도였다. 이게 뭔!

 

 

환경의 제약은 창의성을 기른다. 

 

 

좋은 사진을 찍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니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께 그런 심정을 토로했더니 말씀하시길 “표준 렌즈, 52 밀리 렌즈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줌이고 광각이고 다 안 되는 거야, 오로지 표준 렌즈만 써봐!”, 하셨다. (아버지 역시 카메라에 대단한 열정과 실력을 갖추신 분이셨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한정된 환경 속에서 창의성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사체를 찾아내고 포착할 수 있어야 사진을 찍는 것이지 장비의 문제가 아니란 깨달음이었다. 그 이후 거창한 삼각대라든가 줌, 광각, 이런저런 필터 따윈 다 치워버렸다. 오로지 표준 렌즈만으로 피사체들을 찾아내고 찍고 다녔다. 1980년대 시절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 교외 등지를 열나게 돌아다녔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나오자 어이 상실

 

 

그런데 세상은 또 변해서 스마트폰이 나왔고 그 물건 안에 좁쌀만한 렌즈와 카메라 프로그램이 내장되었다. 젊은 친구들과 아줌마들이 마구 찍고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려 자랑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냥 누르기만 하면 되는 카메라 세상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포토샵이란 괴물이 또 등장했다. 보는 순간 으악! 했다. 이제야말로 기술 즉 예술의 시대가 끝이 났구나 싶었다. (예전에 IT에서 ERP가 나왔을 때 이제 일자리는 다 날아가겠구나 하는 충격과 비슷했다. 물론 사실로 확인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화가 났다, 예전에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상태에 맞추기 위해 수 백 개의 셔터와 노출 조합을 외우고 다녔건만 그게 다 쓸모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즉각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다니, 저 무식(?)한 것들이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아울러 대충 찍은 사진을 포토삽으로 갖은 조미료를 다 쳐서 그럴듯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으니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나 호호당이 스마트폰을 사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카메라의 엄청난 민주화에 대한 반발과 저항감이었다. 올드 보이! 물론 2000년대 초반 사업할 당시 맨날 받는 전화가 돈 독촉이었기에 질려서 던져 버린 이후 사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자 솔직히 사진예술 한다는 사람들은 굶어죽게 생겼다. 나 호호당이야 취미라 하겠으나 업으로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사진작가들 중에 일부는 포토삽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고 때론 보수파로 남아서 더욱 정면 승부를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가 굶어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일용직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사진작가 역시 그랬었다.)

 

물론 사진은 예술의 한 영역으로 인정받기에 평론가들, 대학에서 가르치는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막강한 비호가 있긴 하다. 사진 한 장 놓고 별의 별 철학과 담론을 올려서 마치 엄청난 작품인양 부풀림을 해주고 있다. 뭐 좋다, 다 ‘먹고살리즘’의 영역이니 이해한다.

 

 

대충 찍는 사진, 허무주의 

 

 

스마트폰 카메라가 나온 이후로도 나는 니콘 디카를 들고 대충 찍었다. 포토샵으로 보정하면 되니 말이다. 사진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은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 그까짓 이미지, 이미지는 어차피 虛像(허상) 아닌가! 하면서. 그냥 심심풀이 정도로 취급했다. 때론 상실에 대해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한동안은 좋은 곳에 가거나 생활 속에서 좋은 이미지를 포착해도 카메라를 찾지 않았다. 찍어본 들 헛것이란 생각 때문에. 그냥 좋은 것이 있으면 눈에 담아두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본격적으로 눈으로 이미지를 담기 시작했다. 이미지는 기억이 되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이 된다. 그런데 그 왜곡된 이미지는 더 나아가서 추억이 된다. 내 삶의 한 때에 대한 추억. 그리고 그 추억은 내가 소멸하면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고 세상은 여전히 그냥 있을 것이다.

 

합천 해인사 법당은 대적광전이다. 寂光(적광)이란 말, 사전에 이르길 “모든 번뇌를 끊고 적정(寂靜)한 열반의 경계로 들어가 발휘하는 참된 지혜의 빛”이라 되어 있다.

 

참 번잡한 설명이라 여긴다. 게다가 그냥 적광도 아니고 대적광이라 하니 더욱 그렇다. 부풀림이 과하다. 이렇게 비유해보자, 조용하고 어둑하고 텅 빈 방에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닫아놓은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두어 줄기 빛이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와 부딪쳐서 희부옇게 산란한다.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중죄를 짓고 감옥 1인실 방에 갇혀서 있다 보면 그러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놀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으니 번뇌에서 벗어나 적광만이 있을 것이다.)

 

사진 찍는 일에서 눈으로 담는 일로 바뀌고 그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가 마침내 나와 함께 無化(무화)될 것이니 그 자리엔 그저 두어 줄기 寂光(적광)이 남아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내가 스마트폰을 샀으니 허 참!

 

 

그런데 최근에 그러니까 7월에 스마트폰을 샀다. 나로선 일대 사건이다. 사게 된 까닭은 명확하다. 아들이 함께 가서 데이터 무제한으로 해서 사줬다.

 

첫째, 택시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작업실이 있는 강남역 일대에서 지나치는 택시를 잡기가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택시 콜 앱을 쓰기 위함이다. 결과는 만족이다.

 

둘째, 그림 소재로서의 이미지를 카메라로 찍기 위함이다. 웃긴다, 내가 생각해도. 앞에서 적광 운운하던 사람이 갑자기 열나게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으니 어이가 없다. 아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손잡이도 마련해줬다.

 

셋째, 외출 중에 비상용 연락을 위해서다. 문자나 카카오톡으로 연락할 수 있으니 좋다. 스마트폰 번호를 어지간해선 알려주지 않기에 걸려오는 전화도 거의 없다. 전부 무음 처리해 놓은 탓에 걸려온 전화는 나중에 확인하고 내가 걸면 된다. 20분 간격으로 폰을 열어본다.

 

최근 올린 그림들은 폰 카메라로 찍은 것들이 많다. 그러니 폰 잘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제 늦었지만 그림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해볼 차례가 되었는데 분량 상 다음 글에서 마무리하겠다.

비오는 밤 애기무덤을 밝히던 도깨비불

 

 

장마전선이 좀처럼 북상하지 않더니 밤부터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 남부지방엔 폭우라던데.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도깨비불 생각이 났다. 직접 체험했던 도깨비불 얘기를 좀 해보고픈 마음이 든다.

 

첫 번째 도깨비불은 군 복무 시절이었다. 장마철의 어느 날 밤,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는데 부대 막사 아래 연병장과 헬리콥터 착륙장을 지나 멀리 철책이 있었는데 그 너머 나지막한 산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마치 파도치는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빗속에 온 산이 타오를 것처럼 환했다. 저녁 자유시간이라 온 부대원들이 바깥에 나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겁을 먹는 부대원들도 꽤 많았다. 왜냐면 그 나지막한 산은 온통 애기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 쪽 초소에 나가 야간 경계를 서는 사병들은 꽤나 긴장하곤 했고 또 이런저런 괴소문도 많았는데, 바로 그 애기무덤 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타오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렇지만 나 호호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그러다가 저런 거 그냥 화학현상일 거란 말을 꺼낸 것이 계기가 되어 내기를 걸게 되었다. 가서 도깨비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무서워서 가다가 포기하면 내가 지는 게임이었다. 조건은 내무반 전원이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맥주 4박스와 과자였다. 흥미를 느낀 야간 당직 하사도 어서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날더러 짓궂게 재촉을 했다.

 

 

혼자서 비오는 밤에 애기무덤으로 올라 도깨비불을 채취해보니 

 

 

나 역시 몹시 궁금했던 터라 판초우의를 입고 철모를 쓰고 랜턴을 들고 혹시나 모르니까 대검까지 허리에 차고 비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와 동료사병, 이렇게 두 명이 가기로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겁나기 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던 나는 개의치 않고 혼자 막사를 나섰다.

 

그쪽 철책엔 초소만 하나 있을 뿐 출입문이 없었지만 이른바 ‘개구멍’이 하나 있어서 바깥으로 쉽게 나갈 수 있었다. 일단 초소에 갔더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료가 너무나도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두 시간 동안 지키고 있으려니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내가 찾아가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내기를 하는 바람에 왔다고 이유를 밝히니 너 간도 크다 하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개구멍으로 나가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오를 작정인데 그 친구더러 우리 잠깐 같이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더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휙-하고 젓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서 비 퍼붓는 언덕, 도깨비불 천지인 언덕 위로 끙끙 대며 올라갔다. 워낙 밝아서 랜턴도 사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막사에서 애기무덤이 있는 언덕까진 대략 800 미터 거리였고 그 거리에서 도깨비불 하나가 거의 농가 한 채 크기였는데 정작 다가갈수록 불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깨비불 앞에 가자 불의 크기는 손바닥 정도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작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형광빛의 조각이었다. 몇 개 집어서 연병장을 가로질러 막사로 돌아오는 도중에 랜턴으로 살펴보니 그건 뼛조각이었다.

 

매장된 아기들의 뼈? 아니면 야생 짐승의 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백 기의 애기무덤이 있는 곳이니 아마도 아기들의 뼈가 유력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그곳에 묻힌 아기들, 태어나서 얼마 살아보지 그 아기들을 생각하니 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환한 내무반 안으로 들어오자 초록으로 빛나던 그 뼛조각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방 사라졌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나는 부대 내에서 간이 큰 사병으로 소문이 났다. 나로선 전혀 무서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훗날에도 나는 귀신 나온다는 흉가가 있으면 혼자 찾아가 밤을 보낸 적도 두어 번 있다. 귀신을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시 만나게 된 비오는 밤의 도깨비불

 

 

이제 두 번째 도깨비불 얘기를 해본다.

 

군 제대 후 동원훈련 때였다. 독수리훈련인가 뭔가 잘 모르겠지만 서울 병력이 졸지에 강원도 인제의 예비사단에 편성되어 훈련을 했다. 야산에 올라 텐트도 치고 낮엔 꽤나 먼 거리의 행군도 했다. 군 복무 중에도 그렇게 심한 훈련은 받아보지 않았는데 이게 웬 고생이냐 했다.

 

그 때는 1984년의 여름철이었다. 장마철은 지났지만 1주일의 훈련 중에 사흘이나 비가 내려서 애를 좀 먹었다. 비가 오면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산길을 걸어가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비닐로 된 우의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철모 쓰고 장비를 차린 상태에서 산길을 걷다 보면 엄청나게 땀을 쏟아야 한다.

 

저녁이 되어 야산 사면에 쳐놓은 군용 A텐트로 돌아오니 마치 집에 돌아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저녁 급식을 마친 직후에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텐트 안은 미리 건초를 잘 깔아놓았고 위치도 좋아서 물이 스며들지 않아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뭐야? 싶어 바깥으로 나가보니 건너편 산언덕이 온통 도깨비불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미 군 복무 시절에 도깨비불로 인해 명성을 떨친 바 있었기에 저거 별 거 아니야, 燐光(인광)이야 하면서 잘 알고 있다는 투의 말을 했더니 동료 예비군들의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가서 가져오지요, 그냥 가긴 심심하니 뭘 좀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졸지에 30만원 빵의 게임이 되었다. 아군 30명, 적군 3명, 1인당 만원씩 걸었다. 내가 다녀올 것이니 도깨비불을 가져오면 30만 원 중에서 15만원은 내가 먹는다는 조건이었다. 저편 언덕까지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왕복하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랜턴을 들고 언덕을 올라 도깨비불을 금방 채취해서 돌아왔다. 으레 짐승의 뼈일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 불빛은 초록의 형광 혹은 인관이었지만 가져와서 다 함께 살펴보니 오래된 나무껍질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 조각을 간직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물을 뿌려도 더 이상 그 신비한 초록의 빛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파트 정원에 던져버렸다. 그저 15만원을 벌었을 뿐이다.

 

 

집단이 야지에서 이동하면 사고가 난다.

 

 

여담이지만 연대 규모의 예비군 병력이 야지에서 이동하다 보니 안전사고로 인해 무려 3명의 예비군이 사망했다는 점이다. 당시엔 그 정도 뉴스는 보도되지도 않았다.

 

사망 경위를 보면 허무하다. 훈련을 마치고 땀에 절어서 텐트로 돌아온 예비군이 시원한 개울이 있는 걸 보고 야호-하면서 풍덩 뛰어 들었다가 바로 심장마비로 죽었다. 강원도 인제 계곡의 물은 여름에도 엄청나게 차갑다. 무릎가지 들어가도 견디지 못한다.

 

또 한 명은 행군 중에 지쳐서 지프차에 실려 갔는데 그 지프차가 어쩌다가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그 결과 그 예비군만 튕겨나가서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에 전 예비군이 귀가 교통비로 받은 돈 천원을 박스로 만든 부조함에 넣어 주었다. 예비군이 대략 2천명 정도였으니 2백만 원 정도였을 것인데 당시 1984년으로선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때 배웠다. 장병들이 일정 장소에 머물지 않고 장비와 함께 움직이다 보면 안전사고가 난다는 사실을. 이동 자체가 안전사고를 초래한다는 사실.

 

 

나라에 대한 배신감

 

 

나 호호당은 현역 복무를 했고 동원예비군, 지역예비군, 나중에 민방위까지 착실하게 다 했건만 나중에 그 모든 의무로부터 해제되는 날 국가로부터 감사하다는 쪽지는 물론이고 영화표 한 장도 우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금도 불쾌해하고 괘씸하게 여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가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국가에 그 정도까지 충성을 다했으면 고맙다는 인사치레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요즘엔 도깨비불이 보이질 않으니 

 

 

그런데 요즘엔 비가 내려도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전국 도깨비들이 전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나?

 

 

莊子(장자)와의 추억

 

 

비 내리고 번쩍 버번쩍 번개치면 잠시 뒤 천둥소리 들려오는 일요일 밤, 아니 월요일 자정 넘은 시각, 창가 작은 탁자 위에 莊子(장자)를 펼쳐놓고 앉았다. 두 시간 정도 읽고 음미하다가 감흥이 일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재에 꽂혀 있던 책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살펴보니 ‘현암사’ 출판사에서 나왔고 인쇄는 1980년 2월 29일에 5쇄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책 역시 첫 번째 책은 아니다.

 

분명한 기억이 있다. 장자를 처음 산 것은 1973년 가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잠깐 일탈하는 기분으로 책을 샀었다. 책방에서 책을 사서 들고 나오면서 입시를 앞둔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게 초판본이었고 나중에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책이 어디론가 가서 보이지 않아서 다시 샀는데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책이다.

 

 

古文(고문)의 힘

 

 

한문 중에서도 연대가 오랜 古文(고문)은 읽는 맛이 사뭇 다르다. 형용사나 수식어가 적어서 마치 直球(직구)를 던지듯이 말하고 있다. 글쓴이는 자신의 생각을 어떤 방어논리도 없이 그냥 툭-하고 내뱉고 있다. 읽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고려도 없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식이다.

 

기원 전 200-300년 경, 장자가 생각을 글로 옮길 적만 해도 종이에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竹簡(죽간)이라 하는 대나무 조각에 칼로 글을 새겨야 했기에 대단히 수고로웠으리라. 이에 당시의 모든 문장은 최대한 압축적이다.

 

나 호호당은 이처럼 압축적인 古文(고문)에 매료된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 말이고 글인데, 심지어는 뉘앙스가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분쟁도 생기고 권력자 앞에선 때론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 옛 한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냥 스트레이트로 생각을 밖으로 던진다.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향해 던진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현대문에서 이런 直心(직심)의 문장은 소설가 김훈 선생의 글에서나 느껴볼 수 있다. 김훈 선생은 말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타락해있다고. 김훈 선생은 또 말하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들을 신뢰한다고. 그 분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세속에선 위험한 말들

 

 

나 호호당은 고려대학을 나왔다, 고려대의 敎示(교시)는 자유, 정의, 진리이다. 먼 옛날 입학 당시 참으로 멋진 교시라고 여겼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선 그것들이 참으로 위험한 말들이라 여긴다.

 

자유, 정의, 진리,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자’의 영역이라 여긴다. 저 말들이 인간 사회로 들어오면 위험해진다. 인간 세상에선 너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다르고 너의 진리가 나의 진리가 다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인 까닭이다. 정의라든가 진리와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끝도 없이 싸우게 만든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면서 상대를 제거한다.

 

 

버려야만 편할 것 같은데...

 

 

이에 장자는 말하고 있다, 아니 말했다 무려 2천년하고도 3백년 전에. 세상의 모든 가치, 소중한 것은 큰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권력과 명예 따윈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니라고. 진리와 정의란 것 역시 차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이니 세속의 모든 것들은 눈을 크게 뜨고 보면 터럭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투쟁과 게임을 비웃고 있다. 그 까이 꺼 별 거 없어! 하면서 코웃음 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앞둔 그 가을에 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 머리가 띵-했다. 이게 뭔 소리야? 했다. 하지만 당장 대학엔 가고 볼 일 같았고 긴 인생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니 일단 不問(불문)에 붙였던 莊子(장자).

 

그 이후 긴 세월 사이에 간간히 다시 접해왔고 그럴 때마다 받는 느낌은 달랐다. 하지만 밤늦은 이 시각 다시 읽어도 여전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그저 별 게 아닐 뿐더러 모든 것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길 때만이 대자연과 더불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마구마구 직구를 날려 오고 있는 莊子(장자)이다.

 

장자의 저 말들은 따르기가 절대 쉽지 않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그 무엇을 버리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omething, 그런 면이 있다. 물론 우리 모두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먹고 산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젖히고 올라서야 하는 일이며 때론 누군가를 제거해야 하는 끔찍한 일도 견뎌야 한다. 먹고 살려면 독해야 하고 독해져야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란 말씀 또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길 때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말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넌 그냥 가난하게 살다가 가라 해도 군말 없이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절대 쉬운 얘기가 아니다.

 

 

이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릴 때도 있으니 내가 돌았나? 

 

 

그러니 문득문득 죽음이야말로 安息(안식)처럼 다가올 때도 많다. 죽으면 자유고 나발이고 진리고 정의고 그런 따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오래 살아서 본전은 다 챙겼고 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사는 건 개고생인 것이 확실해!

 

 

새벽 2시, 이제야 서재 건너편 LG 전자 연구소 빌딩의 불들이 절반 정도 꺼지고 있다. 월요일 새벽 시간이다. 토요일 저녁 9시 경 연구소의 불이 70% 정도 꺼져 있었다, 웬일이니? 했다. 그래도 토요일이라서? 그랬는데 일요일 저녁이 되자 거의 모든 층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일요일 저녁이건만 죄다 야근이구나! 했고 월요일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불이 절반 정도 소등이 되고 있다.

 

저 정도의 대기업 연구소에 들어가서 일을 하려면 고등학교 시절 전국 수험생의 상위 5%에는 들었을 것인데 그 상위권 학생들은 오늘에 와서 늘 야근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엄마들은 “우리 아들, LG전자 들어갔어” 하면서 자랑스러워했을 거 아닌가.

 

물론 돈은 중소기업보다 더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내 보기엔 일주일에 적어도 3-4일 이상은 야근하며 살고 있는 대기업 연구소 직원들이다. 워라벨? 허구이고 허상일 수밖에 없는 우리 대한민국, 수출 즉 하청으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이다. 부엌 쪽 창 건너편의 삼성전자 연구소도 별반 차이가 없다.

 

저 친구들 당연히 이공계 출신일 것이니 고등학교 시절 삼각함수 공식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세게 외웠을 것이다. 그거 못 외우면 이른바 “수포자”가 되고 그러면 이공계 진학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 호호당은 선생님에게 삼각함수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가 불려 나가서 뺨따귀 얼얼, 귓구멍 멍멍하게 한 대 맞은 기억이 난다.)

 

 

차라리 2류 인생이 더 행복할 것도 같아서

 

 

일요일 자정이 가까울 무렵 책 읽기 직전에 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아들의 얘기인 즉 이렇다. 아빠는 쟤네들이 불쌍한 가봐, 늘 저거 볼 때마다 얘기하잖아. 그런데 지금 야근하는 저 친구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과연 불만 따위를 갖고는 있을까 싶기도 해. 주변 동료들이 다 하니까 할 거야. 그런데 사실 어쩌면 중소기업 다니는 2류가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른바 2류 인생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 아예 바라보지 않으면 그렇게 한 평생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니. 아파트 포기하고 빌라 살고 돈 올려달라고 하면 고민도 해가면서 그럭저럭 살다 가면 되는 일 아닌가. 도중에 주식 좀 했다가 홀딱 날린 뒤 반성도 좀 해가면서 말이다.

 

공기업 사원 또는 공무원, 우리 사회에서 極上(극상)의 좋은 일자리이다. 게다가 이번 LH 사건처럼 몰래몰래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그런 직장에 다니는 사람 만나서 얘기해보면 그 또한 고초와 불만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거야 이 세상 어딜 가나 그럴 것이니 따지고 싶지 않다.

 

LH, 지주회사 형태를 검토하고 있다는데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간에 생겨난 엄청난 부채를 회사를 쪼갤 때 누가 덮어쓰느냐 하는 것인데 내년 대선이 달린 현 정권이 쉽게 편하게 풀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우리나라만의 장점(단점이기도 하지만)이 달리 무엇이랴, 아니다 싶으면 사정없이 갈아 치우고 엎어버리는 무서운 추진력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LH여, 안녕!

 

 

헛소리의 莊子(장자)

 

월요일 새벽 2시 40분, 맞은 편 LG 연구소의 등불이 1/4만 정도만 남고 거의 꺼졌다. 쉬러 가거나 잠시 집에 간 것 같다. 나도 잘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부터 읽고 있던 莊子(장자)를 다시 서가에 갖다 놓았다. 莊子(장자)의 얘긴 아무래도 헛소리야!

 

 

미안한 마음이다, 젊은 연구소 직원들은 저처럼 피 튀기면서 과업을 해가고 있는데 호호당은 늙었다는 것을 핑계로 빗소리 들으며 莊子(장자) 따위나 읽고 있으니 말이다.

 

비가 부슬부슬해졌다. 글도 마무리한다. 발밑에서 졸고 있던 강아지가 이제 가서 자자고 보채는 눈빛이다.

 

(이 글은 간밤에 썼다.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니 꿈속에서의 일 같기도 하다.)

수액 주사를 맞으며 

 

심한 설사를 했다, 임플란트 이식한 뒤 먹은 항생제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틀 동안 죽만 먹었더니 기력이 떨어져서 동네 의원에 가서 영양제 수액주사를 맞았다. 작년에 처음 맞아보았는데 1시간이 꽤나 무료했었다. 그래서 이번엔 작은 책을 한 권 들고 나섰다. 마침 봄비도 내리니 우산도 쓰고 말이다.

 

책 제목은 徒然草(도연초). ‘내키는 대로 대충 써 내려간 허튼 글’이란 뜻인데 이를 오늘날의 문학 장르로 치자면 바로 隨筆(수필)이 된다. 700 년 전 일본 중세의 글인데 여태 다 읽어보진 않았고 읽다 말다를 반복했을 뿐이다. 워낙 심심하다고나 할까, 간도 약하고 향도 연한 국물 맛.

 

누운 채 수액을 맞으면서 한 손으로 치켜들고 읽다보니 팔이 저리고 졸음이 왔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밝아져서 눈을 떠보니 간호사가 등을 켜고 바늘을 빼는 것이었다. 어느새 1시간이 지났으니 역시 들고 간 책 덕분인 셈이다.

 

 

봄비 내리니 좋아서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비가 오고 있었지! 의원으로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들고 나섰다. 길가 쪽의 소리가 요란했다. 빗물을 치고 나가는 자동차 바퀴 소리, 물이 튀어 오르면서 만들어지는 희부연 물안개, 저런 소리와 풍경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비를 좋아하는 것이다.

 

 

수필이란 단어

 

 

앞의 얘기인 바, 隨筆(수필)이란 말은 일본에서 도연초가 만들어진 것과 거의 같은 때, 중국 南宋(남송) 시절에 지어진 容齋隨筆(용재수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容齋(용재)라는 수식어이다.

 

그 뜻하는 바는 室僅容膝書齋(실근용슬서재), 풀이하면 겨우 무릎이 들어갈 정도의 아주 작은 서재가 된다. 가난한 文人(문인)이 옹색하게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가 앉을 정도의 아주 작은 서재에서 글을 썼다는 것이니 글쓴이의 모습과 상황이 마치 눈앞에 환하게 보이는 듯도 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간간이 우산을 내려서 일부러 찬 이슬비가 얼굴을 적시도록 했다. 이슬비 올 때 특히나 이런 짓을 좋아한다. 이는 마치 미용실에서 커트할 때 머리를 축이기 위해 뿌리는 스프레이와도 같다.

 

 

비에 젖어 함초롬한 철쭉

 

 

오면서 보니 철쭉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분홍과 하양, 그리고 영산홍이라 부르는 주황의 철쭉들이 새로 돋은 잎사귀들과 함께 촉촉이 젖고 있었다. 영산홍,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는 뜻의 이름인 映山紅(영산홍)이다. 철쭉은 원래 중국에서 躑躅(척촉)이라 하는데 이게 변해서 철쭉이 되었다.

 

척촉? 왜 이렇게 어려운 漢字(한자)를 썼을까? 하면 그 뜻이 산에 꽃이 하도 아름답게 피어나니 길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기에 머뭇거리고 저기에서 또 머뭇거리게 만든다는 뜻이다. 머뭇거릴 躑(척), 머뭇거릴 躅(촉)이다. 봄날 산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어려운 한자를 쓰긴 했으나 나름 용납이 된다.

 

철쭉은 이름도 다양하다. 앞의 영산홍을 비롯하여 杜鹃花(두견화)라 하기도 하고 온산이 가득 붉다 해서 满山红(만산홍), 山石榴(산석류)라 부르기도 한다. 몇 년 사이 지어진 아파트 단지는 그야말로 온통 철쭉으로 가득하다. 보기 좋고 잘 자라고 비용도 적게 들어서 조경의 ‘가성비’가 꽤나 좋아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오늘 글은 마침 도연초 즉 ‘내키는 대로 대충 써 내려간 허튼 글’이란 제목의 책을 두 어 페이지 읽고 온 터라 액면 그대로 徒然(도연)하게 써 보고픈 마음에서 쓰고 있다. 그러니 좀 더 생각을 따라가 본다.

 

 

실은 진달래를 더욱 좋아하기에

 

 

사실 난 철쭉보다는 그와 친척 관계인 진달래를 훨씬 더 좋아한다. 철쭉은 꽃에 독성이 있지만 진달래는 순해서 그 꽃을 부침개로 해서 먹기도 한다. 花煎(화전)이 바로 그것이니 우리 풍속에 화전놀이란 것이 있었다는 사실.

 

음력 3월 경, 정확히 말하면 음력 삼월삼짇날, 대충 바로 이맘때 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서 전병에 올려 먹던 봄놀이 풍속이 그것이다. 당연히 막걸리도 한 잔 함께 마시면서 노래하고 춤도 추고 놀았을 것이다. 경기민요 중에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를 가잔다.”, 이런 가사를 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진달래를 더 좋아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 아니다. 진달래는 환한 양지에서 피어나기 보다는 소나무 그늘 밑에 피어나는 꽃, 哀調(애조) 어린 꽃이라서 더 좋아한다. 철쭉이야 아파트 단지, 가까운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진달래는 바깥으로 나가야 볼 수 있다.

 

좀 더 얘기하면 진달래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기 보다는 멀리 산그늘 속에 서린 분홍빛 안개와도 같은 모습이 훨씬 정취가 있다. 봄날 먼 산 아지랑이도 그렇지만 연분홍의 안개와도 같은 진달래,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기 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그냥 얌전하게 피어있는 꽃이 진달래라 하겠다. 국도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고 또 지나쳐 가게 되는 꽃으로서의 진달래를 더욱 사랑한다.

 

꽃잎도 철쭉처럼 억세지 않고 하늘하늘 거린다. 빛깔도 연하고 성질도 순하고 여리다. 그렇기에 김소월의 시는 참으로 대단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님이여, 굳이 나를 버리고 떠나간다면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으나 여리고 순한 저 진달래꽃을 마구 짓밟고 가셔야 할 것이오, 하는 절규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니 세월 참 많이도 흘렀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볼 것 같으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참으로 가볍고 또 가볍다. 세월이 변한 탓이란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비 그치고 글도 끝나고 

 

 

글을 쓰다 보니 비가 그쳤다. 아니, 해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늘 이상하다, 자영업자라고 할 수 있는 나 호호당이다. 그런데도 토요일이 되면 마음이 가벼워지니 말이다. 나로선 토요일에 강좌를 하기에 가장 바쁜 날인데 홀가분해지니 이게 무슨 조화 속인가! 사람의 행동거지에 습관이 있듯 마음이나 생각에도 습관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 이런 생각 하지 말아야겠다. 4월부터는 곰곰이 헤아려보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느낌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생각보다는 행동적으로 지내다가 10월 하순이 되면 다시 생각 속으로 침잠하기로 올 봄에 마음을 먹었으니 말이다. 환한 계절이 왔으니 내 속을 들여다보느니 바깥으로 눈을 돌려 차라리 하늘에 떠가는 무심한 흰 구름을 보는 게 백배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니 마침 흰 구름이 피어오른다. 뭉게구름 같기도 한데 몽글몽글한 맛은 나지 않는다. 아직은 여름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시인이 얘기해주었다. 몽골에 가서 한 철을 보냈는데 망망한 초원이라 그저 떠다니는 구름만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 좀 무심하게 지내보자 그리고 살아보자 무심하게.

 

(이 글은 어제 토요일 점심 무렵에 쓴 글이다.)

 

식목일 앞두고 봄비 넉넉하게 내리니 그야말로 고맙구나. 중국발 먼지들도 말끔히 씻어내겠지! 아파트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양재천 건너편의 건물들과 빌딩들이 빗줄기 속에 희부옇다. 양재천은 어느새 넘쳐날 참인데 물가 산책로의 벚꽃은 젖어서 더 연분홍이고 수양버들의 신록은 더욱 청신하다.

 

물안개서린 경치를 보고 있노라니 떠오른다. 아, 누구였더라? 多少樓臺煙雨中(다소루대연우중)이란 구절을 남긴 이가? 두목 아님 유종원이었던가? 찾아보니 중국 당나라 시절 杜牧(두목)의 江南春(강남춘)이란 시 마지막 구절이다.

 

강남의 봄, 여기서 말하는 강남은 오늘날 중국의 남경 즉 난징 일대를 말한다. 찾은 김에 시를 소개해본다.

 

江南春(강남춘)

 

千里鶯啼綠映紅 (천리앵제록영홍)

水村山郭酒旗風 (수촌산곽주기풍)

南朝四百八十寺 (남조사백팔십사)

多少樓臺煙雨中 (다소루대연우중)

 

천리에 꾀꼬리 울고 신록의 빛은 붉은 꽃잎에 어리고

강마을 산동네마다 술집 깃발 바람에 나부끼네,

남조의 수도였던 이곳엔 절이 무려 사백팔십 개였다는데

뽀얀 봄비 속에 많은 누각들이 희부옇게 비쳐오네.

 

당시 여관을 겸했던 술집들은 술 酒(주)자를 새긴 깃발을 높이 세워놓고 오가는 길손들을 불렀는데 그 깃발이 강촌이나 산촌 어딜 가나 시원한 봄바람에 나부낀다 말하고 있다. 풍요롭지 않은가? 시인은 그 길을 나귀나 수레를 타고 느릿느릿 지나오면서 술과 음식도 먹고 잠도 잤던 왔던 모양이다.

 

이에 중국의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386~589) 당시 양자강 남쪽에 세워진 南朝(남조)의 수도였던 난징에 도착하니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에 전망을 볼 수 있는 누대에 오르니 수많은 절들의 탑과 누대들이 뽀얀 안개비속에 흐릿하게 보인다고 적고 있다.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강남의 비내리는 풍경이구나! 하면서. 

 

시인은 중국 당나라 시절의 사람(803년-852년)이다. 통일 이전 양자강 남쪽에 있던 역대 나라들은 문화가 발달했고 불교 또한 융성해서 도읍인 난징-당시엔 건강이라 불렀지만-엔 절이 무려 480개나 되었다는데 시인은 그 찬란했던 문화의 자취를 봄비 속에 되새겨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양자강 이남인 강남 일대를 水鄕(수향)이라 부른다. 기온이 따뜻하고 비가 잦으며 안개도 자주 어려서 餘白(여백)의 美(미)가 넘치는 중국 수묵화의 본고장이다. 그 중에서 소주와 항주는 오늘날에도 해마다 봄이면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리는 명승지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소주 항주 3박4일 55만원, 이런 광고가 인터넷에 늘 오르곤 했던 그 소주 항주 말이다.

 

나 호호당은 1994년 4월 경에 중국을 처음 돌아다녔다. 당시 항주에 들렀을 때 호수 사이로 난 제방길로 아침 산책을 했다. 수양버들 신록 우거지고 액면 그대로 꾀꼬리가 울고 대고 있었다. 호반에는 태극권 하는 노인네들도 많이 보였다. 그때 아, 여기가 책에서나 보던 중국의 水鄕(수향) 강남의 정취구나 하고 확인했던 추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항주를 찾아갔지만 처음의 인상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다.

 

글을 쓰다 보니 비가 조금 잦아들고 있다. 양재천은 관악산에서 내려온 물로 해서 산책로까지 넘쳐나고 있다.

치과를 찾다, 춘분의 혁신

 

 

앓던 어금니를 뺐다. 진작 했어야 하겠지만 나는 으레 늦는다. 올 해는 3년간 미루었던 이빨 치료를 해야 한다, 뺄 건 빼고 때울 건 때우고 몇 개는 임플란트로 박고, 연말이나 되어야 끝날 것 같다.

 

그간 왼쪽으로 주로 씹다 보니 얼굴의 균형이 많이 무너졌고 오른쪽 엉덩이 근육에도 무리가 생겼다. 작년 초부터 미루기 시작한 치과치료가 겨우내 이어지더니 마침내 새 해 春分(춘분)이 되자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끝까지 버틴 셈이다. 이에 작심을 했으니 長征(장정)이 시작되었다.

 

 

이빨 치료는 역시 두려운 바가 있어서

 

 

이빨 치료에서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마취 주사라든가 발치에 따른 약간의 통증 또는 임플란트 봉을 받는 수술도 아니다, 나 호호당에겐 최고의 치과 주치의가 있기에 그런 일은 그 친구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다. 주사를 맞은 뒤 마취가 퍼질 때까지 하게 되는 치석 제거 작업, 꽤나 두렵다, 강한 수압의 찬물이 치주 근처에 닿으면 그 자체만으로 신경 발작이 생겨서 양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정말 싫은 것은 발치하고 상처 부위를 꿰맨 다음 지혈을 위해 거즈를 2시간 동안 꽉 물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잔뜩 피비린내 나는 거즈가 혀에 닿고 인후를 통해 코로 올라오면 구토를 하게 된다. (그러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살그머니 재빨리 거즈를 갈아 물어야 하는 데 그 또한 부담이다.)

 

게다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후라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한 데 그 또한 꽤나 참아야 한다는 점이다. 담배는 중독성이 워낙 강해서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면 끊기 어렵다, 이런 것을 왜 배워가지고 고생을 하는지. 예전엔 흡연은 성인 남자의 認證(인증)이던 시절이 있었다.

 

 

치료의 고통을 잊기 위해 사색에 빠져들다

 

 

오늘은 치료하는 시간 내내 겨울 동안 사색했던 불교 철학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집중했다. 그러자 절로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4 세기 경 인도의 바스반두가 짓고 중국의 삼장법사가 한역한 “大乘五蘊論(대승오온론)” 속의 구절인 苦謂生時有乖離欲(고위생시유괴리욕)이 그것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괴로움 즉 苦(고)란 그것이 생겨날 때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다.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 겨우내 여러 번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어떤 무엇이 내게 생겨나고 일어날 때 그로부터 벗어나고 등지고픈 마음을 가지는 게 苦(고)라고 하니 말이다.

 

마취주사를 맞고 발치 전에 하는 치석제거라든가 이어서 이빨을 빼는 등등 모두가 고통이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이빨이 아파서였다. 그간에 염증이 나서 수시로 뻐근하고 아팠으니 그 모든 것이 고통 즉 苦(고)였음이다.

 

그러니 이빨을 빼는 수술이나 치료 모두 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건만 그 역시 나름의 고통과 불편함을 겪어야 하니 그 또한 싫어서 참고 참다가 결국 더 이상 있다가는 왕창 더 큰 苦(고)를 겪을 것이 틀림없기에 치과를 찾아온 나였다. 고통 앞에서 나 호호당은 그야말로 비굴하고 옹졸하다.

 

 

태어난 게 죄라면 죄

 

 

시술의자에 누워서 눈을 가린 채 어금니가 쑥-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의 말이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바수반두(세친)여, 당신의 말씀 또한 역시 전혀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게 근본적인 착오였던 것 같습니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삶을 苦(고)라고 했긴 하지만 삶에는 즐거움 즉 樂(락)도 있다. 반대급부도 있다는 말이다. 바스반두는 樂(락)에 대해 樂謂滅時有和合欲(락위멸시유화합욕)이라 했다. 즐거움이란 그것이 사라질 때 다시 만나서 합치고픈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라 했지 않던가 말이다.

 

 

고통과 즐거움은 균형이 깨져 있기에 

 

 

하지만 살아보니 알게 되지만 고통이란 것은 그것을 겪을 때마다 힘들다, 어려운 것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움이란 그것을 겪을 때마다 그 세기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는 모순이 있다는 게 문제, 큰 문제라 하겠다. 삶에 있어 즐거운 날 그다지 많지 않고 괴로운 날이 훨씬 많다, 이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핵심 문제가 제기된다.

 

삶에서 괴로움은 많고 즐거움이 적다면 분명 밑지는 것인데 왜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살고자 하는 것일까?

 

 

산다는 건 사실 남는 장사가 아니란 사실

 

 

사는 게 이빨이 아파서 끙끙 앓는 것이고 죽는 게 앓던 이빨을 빼고 염증을 없애는 치료라 본다면 실은 미리미리 이빨을 치료하라고 하는 것처럼 어서어서 확-죽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죽을 때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건 앓던 이빨 빼는 수술이라 여긴다면 잠깐 눈 딱 감고 어디 한 번 죽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생짜로 죽는 게 아니라 안락하게 세상을 여의는 약도 있다는데 말이다.

 

지나간 겨울 동안 읽고 사색했던 열권 이상의 불교 철학책 속에 담긴 것들을 간략하게 줄여 말할 것 같으면 이빨 계속 아파하지 말고 어서 치과를 찾아가라는 것, 즉 살면서 고생하지 말고 삶으로부터 어서 떠나라는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건 염세적인 생각이 절대 아니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득실을 따져보는 얘기, 즉 냉철한 理性(이성)에 바탕을 둔 생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살고자 하는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거즈를 꽉 문 채 계속 생각해보니 왜 내가 더 살고자 하는 바람을 갖는 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인 즉 이건 그냥 본능 때문이란 답이 나왔다. 머리로는 산다는 것이 밑지는 장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작정 무조건 살고자 하는 원천적인 욕망과 바람이 유전자 속에 로직(logic)으로서 심어진 채 태어났기에 살고자 한다, 이게 답이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 또 한 가지를 문득 알게 되었다, 왜 우리에겐 본능이란 이름의 원천적 욕망이 심어져 있는 가에 대해서.

 

본능이란 우리의 계산머리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또는 작동한다 해도 수시로 망각하게끔 지상명령으로서 심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똑똑한 척 해도 결국에 가선 소위 ‘깔때기’처럼 “시끄럽다, 그냥 살아, 무작정 살아보라고!”, 이렇게 이래저래 따져본 들 정해진 답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이란 사실이다.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나는 크게 외쳤다. 옛 썰! 무작정 살겠씸더!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집 현관에 들어서니 아내와 아들이 바라보는 터라 약간 지치고 힘든 표정을 지었다, 고생했으니 약간의 엄살 정도는 부려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어쩌면 우주 자체가 엄청나게 많을 가능성도 있으니 

 

 

우리의 우주 즉 유니버스(universe)가 빅뱅으로 해서 생겨났다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다양한 데 그 중에 하나로서 어쩌면 우주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무진장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다. 멀티버스(Multiverse) 가설이 그것이다. 평행우주란 말도 있는데 이 역시 우주가 중중무진일 때 가능한 얘기이다.

 

어차피 현재로선 빅뱅 이론이든 다른 주장이든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론이야말로 맘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담론의 영역이란 점에서 멀티버스 가설도 능히 생각해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1921년까지만 해도 우주란 우리가 속한 은하계가 전부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윈 허블이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은하밖에 존재하는 별개의 은하란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면서 우주는 엄청나게 커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은하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특히 에드윈 허블의 이름을 딴 허블 망원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멀고 먼 우주 저편의 은하들로부터 날아온 빛들을 사진으로 찍어내고 있다. 이에 천문학자들은 오늘날 “관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우리가 은하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이 2조 개나 되며 은하 속의 별은 지구에 있는 모래알의 개수보다도 더 많다고 보고 있다.

 

 

멀티버스는 아주 오래 전 인도에서 이미 제시되었으니 

 

 

그런데 이 대목에서 돌이켜보면 멀티버스라든가 평행우주와 같은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사실 대단히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힌두철학 내지는 불교철학의 우주론이 바로 그것인데 그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서 우리에게도 친근한 불교의 세계관이자 우주론인 三千大天世界(삼천대천세계)가 그렇다.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멀티버스 혹은 평행우주란 점은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은 고대 인도 사람들의 생각부터 알아보자.

 

 

위치값 기수법을 발명해낸 힌두인들

 

 

고대 인도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십진법 체계를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으며 기원후 400년 무렵엔 ‘0’이란 숫자를 발명함으로써 숫자를 표시함에 있어 그야말로 위대한 혁신인 “위치값 기수법”을 창안했다.

 

Positional notation!

 

이게 생소한 말 같지만 사실 우리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가령 320,671이란 숫자를 생각해보자. 이 숫자 안의 ‘0’은 천 단위에 붙는 숫자란 점이다. 즉 숫자의 위치에 따라서 수의 크기를 우리 모두 거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숫자를 한자 기수법으로 표시하면 三十二萬六百七十一이 된다. 얼마나 불편한가!

 

거기에 이런 식의 기수법으로 곱하기나 나누기를 하려면 그야말로 골 때린다. 더 골 때리는 건 로마식 기수법으로 곱셈이나 뺄셈을 하려면 일반인은 아예 불가능하다. 가령 6천명의 군단이 석달 동안 작전하기 위해 보급해야 할 식량을 계산한다고 해보자. 하루 세 끼, 3달간 보급, 필요한 물자는 밀과 우유, 버터, 치즈라 한다면 그 계산만으로도 하루의 시간으론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힌두(고대 인도)식 위치값 기수법이 발명되었기에 힌두인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큰 수를 상상해내고 만들어내고 자유자재로 계산해낼 수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 역시 그런 기수법 때문에 개념화될 수 있었다.

 

 

우주 속에 우리와 같은 생명체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세계란 것이 오늘날 와서 보니 우리 은하계 속의 무수히 많은 별 중에서 그저 그런 별인 태양, 그리고 태양이 거느린 아주 작은 먼지 알갱이에 불과한 여러 행성들 중에 하나인 行星(행성)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양계에 속한 행성 중에 생명체가 사는 있는 행성은 우리 지구밖에 없다. 혹시라도 화성 지하에 미세한 유기체 또는 생명이 살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살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에서 이 시각에도 미국이 보낸 로봇이 화성 표면을 삐그덕-대면서 돌아다니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우주 안에 존재할 확률을 수천 兆(조)분의 1로 추정하고 있다. 거의 없다고 해도 되는 희박한 확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지구 밖에 또 있을 거란 점에 대해 희망을 걸어보고 있는 것은 나름의 충분한 근거가 있다.

 

앞에서처럼 현재 ‘관측 가능한’ 우주 안에 은하계만도 2조개나 되고 별은 지구에 있는 모든 모래 알갱이보다 더 많다고 하니 별에 속한 행성은 더더욱 많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행성의 숫자가 거의 무한대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 또한 분명히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봄직도 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멀티버스

 

 

그러면 이제 三千大天世界(삼천대천세계)가 무엇인지 간단히 얘기할 때가 되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지구를 그냥 하나의 세계라 하면 그것이 천 개 모인 세계를 小天(소천)세계라 하고 또 그것이 천 개 모인 세계를 中天(중천)세계, 다시 그것이 천 개 모인 세계를 大天(대천) 세계라 한다.

 

천 배씩 세 번 곱한다고 해서 三千(삼천), 즉 三千大天世界(삼천대천세계)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구와 같은 행성이 전체해서 10억 개가 있는 세계인 셈인데 부처님은 바로 이 대천세계를 하나의 교화영역으로 한다고 인도 불교의 초기철학이론서인 “아비달바구사론”에 적혀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선 부처님 또한 무수히 많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삼천대천세계 역시 무수히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 그게 바로 멀티버스이고 동시에 평행우주론이 되기도 한다.

 

 

힌두사상, 인류 최고의 환타지

 

 

고대의 인도 즉 힌두 사상과 불교철학을 접해보면 그 스케일과 깊이에서 사람을 혹하게 만든다. 기존의 그 어떤 환타지보다 더 뛰어난 환타지가 아닌가 싶다.

 

최근 들어 다양한 우주이론이 등장하고 있다. 앞서의 멀티버스라든가 평행우주만이 아니라 초끈이론이란 것도 제법 자주 귓전에 들려온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쉽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론이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되지 않는 바람에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 제시된 이론이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 모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선 그저 그런 게 있나 보다 하는 정도에 그친다. 이에 관한 과학교양서들이 적지 않지만 글이 아니라 수학 또는 數式(수식)으로 제시된 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한 그건 이해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

 

불교에선 하나의 세계는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欲界(욕계)를 포함해서 色界(색계), 無色界(무색계)로 이루어진 33天(천)의 수직적 구조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시공간에선 도무지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혹시나 초끈이론이 말하는 11차원의 세계가 바로 그런 구조를 허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초끈이론은 물리학자들의 아이디어일 뿐이지 검증할 길이 전혀 없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상상은 변함이 없고 또 기발하다.

 

일요일 저녁 드라마에서 엄마가 군 입대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장면을 보다가 갑자기 오래 전 기억 속의 한 장면이 툭-하고 눈앞에 떠올랐다. 쌀쌀하고 찌푸린 봄날 아침, 대문을 나서는 내 뒤를 조금 뒤따라오시던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시고 팔을 어깨 위로 올려 손짓을 한 번 하시면서 “이젠 가니” 하고 한 말씀 하셨다.

 

이젠 가니,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가느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잘 가라는 것도 아니고 어서 가라는 것도 아닌 그 한 말씀. 사실 그 날 하늘이 정말 흐렸던 것인지 아니면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서운한 눈빛이 그랬던 것인지 이젠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소리의 기억이 눈의 기억보다 더 오래가는 것일까?)

 

입대한 날자를 기억한다. 1978년 3월 4일, 그러니 어머니와 작별한 그 아침은 3월 3일의 아침이었을 것이다. 헤아려보니 43년 전의 일이다. 그때 어머니는 오십이셨고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지금 어머니는 故人(고인)이 되셨고 나는 예순일곱이다. 눈앞으로 그간의 세월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낮은 소리로 “엄마!” 하고 중얼거려본다.

 

중학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봄날 밤이었다.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울고 있던 내게 어머니가 다가와 왜 우니, 속상한 일이라도 있니?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 아무 일도 없어...” 하고 답했다. 어머니는 자리로 돌아가시고 나는 다시 누워서 이불을 덮어쓰고 조용히 한참을 울먹였다.

 

울먹였던 이유?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가 훗날 어느 날엔가는 돌아가시리란 생각에 슬퍼서 울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 눈동자엔 물기가 서린다. 그래서 어머니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니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신다. 엄마!

 

솔직히 말해서 나 호호당은 평생 단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그저 남들 앞에서 ‘우리 어머니께서’, 이렇게 얘기했을 뿐이다. 아버지께서 먼저 가신 후 16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지만 모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저 엄마와 함께 살다가 돌아가셨을 뿐이다. 아내 입장에선 시어머니를 모셨겠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 어머니께서 융으로 만들어주신 잠옷 바지의 가랑이가 낡아서 결국 찢어졌다. 잠옷이라든가 또 여름철엔 마로 된 바지나 셔츠를 늘 재봉틀로 만들어주셨는데 이젠 남은 옷이 거의 없다. 아내는 이제 입을 수가 없으니 버리자고 했지만 아쉬워진 나는 아내에게 다른 천으로 바지의 헤어진 곳을 덧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땜방!

 

이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취들이 하나씩 사라져간다. 그럴 때마다 그만큼씩 멀어져가서 아스라해지는 느낌이다. 면적에서 점으로 그리고 더 작은 점으로. 이젠 그 분들이 먼 지평선 언저리에서 있고 없고 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나 또한 늙어가고 있으니 다시 보게 될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멀어져가는 것인지 가까워져가는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이 50이 될 무렵까진 저승이라든가 영혼의 존재를 전혀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저승이라든가 영혼의 문제는 내가 죽어보지 않는 한 규명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죽으면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자연 속으로 환원될 거란 생각만 했다. 그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세월을 좀 더 보내면서 저승과 영혼의 ‘있음’을 기대하는 쪽으로 조금식 옮겨왔다. 그렇게 바라면서 사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아선 모르는 일이니 낙관하는 것이 비관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겠는가.

 

엄마가 남긴 옷가지와 물건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니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시 만날 날이 한 해 한 해 가까워진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더 좋다는 얘기.

 

혹여라도 저 세상이 있다면 부모님은 물론이요 얼굴을 모르는 조상님들이 반겨줄 것이며, 동작동에서 내가 주던 밥을 먹다가 세상을 떠난 저 많은 길고양이들이 떼로 몰려나올 것이고 또 먼저 보낸 강아지들도 왈왈, 반갑다고 뛰어와 내 품으로 안길 터이며 귀엽던 토끼 ‘초롱이’도 깡총하고 폴짝 뛰어들 것이니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온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그저 가엾고 애처롭다는 생각만 든다. 모두들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늙어가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드라마 장면에서 시작된 기억을 글로 옮겨놓다 보니 마치 꿈속 길을 걸어온 것만 같다.

 

이런 글을 올려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올려본다. 그냥 호호당의 환타지 정도로 너그러이 여겨주시길 바라면서.

 

 

달을 따라서 물을 따라서 

 

 

고개를 올려 달을 보면서 서너 걸음, 다시 시선을 수평으로 내려 몸을 가누고 다시 달을 마주하고, 바로 옆은 느릿느릿 내려가는 양재천, 나도 보조를 맞추어 더디 걸었다.

 

밤 11시, 달은 하늘 정중앙에 둥실 걸렸는데 옅은 무리가 서렸다 말았다 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의 달보다는 아주 엷은 면사포 사이로 비치는 저 모습이 더 신비로운 법이지! 예식장 단상에 올라 살짝 긴장한 모습의 빛나는 新婦여!

 

자정 무렵인데도 밤공기는 차갑지 않고 오히려 시원한 느낌, 갈 때는 양재천 물가는 쪽으로 걸었고 돌아올 때는 서쪽으로 가는 달과 함께 1시간 이상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닐다 돌아왔다. 때론 걸음을 멈추고 물가의 수양버들에게 다가가 날씬하게 벗은 실가지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져보기도 했다, 물이 올랐는가? 그러자 점심 무렵 택배로 보내온 고로쇠 물이 떠올랐다. 집에서 나오던 참이라 보낸 이가 누군지 미처 확인도 못 했지만 입안은 벌써 달착지근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맛있기만 한 오곡밥 

 

 

정월 대보름, 달이 커서가 아니라 정월 십오야의 보름달이라 대보름이다. 아점으로 오곡밥 참 많이도 먹었다, 맛있게. 식어도 맛이 좋은 오곡밥. 간이 되어 있어 찬이 없어도 그 자체로서 맛이 있는 오곡밥.

 

설음식은 기름져서 부담되지만 오곡밥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담백하고 고소하며 아기자기하다. 곡식마다 씹히는 맛이 달라서 재미도 있다. 오곡이라 해도 꼭 다섯 가지 곡식만 넣으란 법도 없고 지방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나는 것이 오곡밥이다.

 

글로벌 시대, 온 세상 음식을 모두 맛을 보았다 해도 과장이 아닌 오늘날에도 여전히 질리지 않고 맛이 좋으니 옛 사람들은 얼마나 즐겁게 먹었을까나.

 

 

무수한 조상님들 

 

 

옛 사람 얘기를 하니 생각이 난다. 내가 이 시각에 존재한다는 것은 먼 조상들이 어쨌거나 짝을 지어 출산하고 먹이고 보호해주면서 길러 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란 사실. 나 호호당의 성은 金(김)이지만 사실 그건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신뢰하기도 어렵다.

 

나의 조상 중에는 농부도 있었을 것이고 노비도 있었을 것이다. 만주 벌판을 말 타고 돌아다니는 유목민도 있었을 것이며 무쇠팔을 가진 무사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해 바다에서 해적질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때론 글 읽는 선비도 있었을 것이니 그게 무슨 상관, 오늘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저 무수히 많은 남녀 조상님들의 짝짓기를 통해 용케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5대 앞의 조상님들만 생각해도 32개의 유전체 즉 게놈(genom)이 내 몸속에 존재한다. 10대 위로 가면 1,024개, 15대 위로 가면 무려 32,768개의 게놈을 내 몸속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 몸속엔 32,768분에 달하는 조상님들의 영혼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15대 해봐야 450년 전이다. 한반도에 부여라든가 고구려와 같은 나라들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이 되는 기원 전후 즉 2000년 전으로 갈 것 같으면 게놈의 숫자가 앞서 말한 32,768개의 4제곱일 것이니 그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숫자가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 호호당 간에는 멀고 가깝고의 차이가 있을 뿐 혈연관계가 있다는 말이 된다. 나 호호당의 속에 온 인류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실은 기적인 것이니

 

 

짝을 짓는다는 것, 그를 통해 아이를 만들고 길러낸다는 것, 실로 엄청난 일, 至難(지난)한 과업이다. 수렵 어로 시절엔 배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며 농경사회가 시작된 다음에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서로 간에 싸우고 죽이고를 반복했을 것이며 질병의 공격에도 견뎌내면서 천만다행으로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내 조상님은 죽지 않았기에 내가 존재한다.

 

무지막지한 생존본능이고 번식본능이라 하겠는데 그 엄청나게 질긴 욕구와 욕망이 내 속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 발로 걷기 시작한 지 65년도 더 되었으니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다녔으며 또 자동차와 기타 운송수단을 타고 다녔겠는가, 그런데 그 사이에 한 번도 큰 충돌 사고 없이 지금까지 몸 멀쩡하게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 이건 어떤 면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닌가 싶다.

 

또 그 세월 사이에 무수히 많은 나쁜 바이러스와 세균들이 내 몸속으로 침입해 왔을 터인데 그저 감기 좀 앓았을 뿐 죽을 정도에 이른 적은 없었다는 사실, 그랬기에 오늘 역시도 저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19 저 악당 놈과 스치는 일이 있을까봐 겁내고 조심해가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

 

담배를 즐기지만 평소 백신 따윈 무시하던 나는 작년 코로나19가 유행하자 쫄렸다. 저거 걸리면 이번에야말로 난 간다. 난생 처음으로 폐렴 백신도 맞고 독감 백신도 접종했다. 일단 폐렴이나 독감부터 방비한 다음에 코로나19와는 거리를 멀리하겠다는 이 탁월한 생존전략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무수한 조상님들로부터 물려받은 본능적 지혜이자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지, 암!

 

밤이 지나 토요일 아침, 강아지들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 간밤 달님은 지금쯤 내 발밑을 가고 있겠지 싶었다. 다시 모니터 앞에 돌아와 앉으니 자기 전에 읽던 책이 펼쳐져 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이야기 

 

 

대승오온론, 한자론 大乘五蘊論, 먼 옛날 AD 300년 경에 인도의 불교철학자였던 바스반두, 흔히 세친이라 불리는 분이 지은 불교의 유식철학에 관한 책, 이를 중국 당나라의 삼장법사인 현장이 한문으로 정리해놓은 책이다.

 

如薄伽梵略說五蘊。一者色蘊。二者受蘊。三者想蘊。四者行蘊。五者識蘊。云何色蘊...

 

박가범(세존), 즉 부처님께서 간략히 설하신 바에 따르면 오온이란, 첫째가 색온이고, 둘째 수온이며, 셋째는 상온이고 넷째는 행온이며 다섯째는 식온이라, 그렇다면 색온이란 무엇인가 하면..., 이런 식으로 이어지면서 불교철학의 핵심 정수를 간략하게 풀이하고 있는 책이다.

 

삼십대 시절 독파하겠다고 나섰다가 던져버린 책이다. 그런데 30년이 흘러 다시 읽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그 사이에 무엇이 내 속에서 변했기에 그럴까? 물론 그 사이에 많은 책을 접했고 아울러 삶의 경험이 쌓여 왔기에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긴 하다.

 

얼마 전부터 이 책을 암기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자 3,119자로 이루어진 책이고 옛날 학승들은 일단 외우고 나서 연구했다고 하니 흉내를 내보고 있다. 암기력 저하를 다소 늦추어보자는 의도도 있다.

 

외우는 것은 힘이 들긴 해도 여러모로 편리하다. 지하철에서 버스 안에서 아니면 길을 걷다가 또는 산책하면서 떠올릴 수 있고 그러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을 떠올려놓고 한 단어씩 따져가며 궁리해볼 수 있다. 지루한 체력단련, 가령 스쿼트 같은 것을 할 때도 시간이 잘 간다. 암송하다 보면 때론 전혀 읊조리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뇌 속에서 소리를 재현하는 것이니 참 묘하다.

 

삼장법사 현장스님, 손오공이 나오는 西遊記(서유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삼장법사 현장의 엄청날 정도의 멍청함과 고지식함에서 나온다.

 

척 봐도 나찰이고 나쁜 악귀들이건만 삼장법사는 순진하게 속는다, 오히려 손오공을 나무란다. 그 탓에 삼장법사는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고 손오공은 투덜거리면서 악귀나 나찰을 물리치고 스승인 삼장법사를 구출해낸다. 하지만 삼장법사는 반성하거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법이 없다, 또 다른 악귀들에게 속아 넘어간다. 병신! 바보, 이렇게 열을 받게 하면서 서유기는 이어진다.

 

막장 드라마에선 악당이 드라마의 힘이듯이 서유기에선 삼장의 멍청함이 전재해가는 원동력이다. 요즘 '펜트하우스'란 드라마에서 흰 눈동자 다 드러내고 악쓰는 여배우가 얼핏 보이던데, 촬영 끝나면 눈 좀 아플 것이다.

 

그런데 실제의 삼장법사 현장스님이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옮겨놓은 문장들을 음미하다 보면 기가 막힌다. 저거야말로 천재의 파워! 이에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유전자의 조합에서 만들어진 극소수 천재들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보통의 우리들은 그냥 먹고 살기 바쁘고.

 

 

능력의 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별 차이가 없을 때 오십보 백보란 말을 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오십보와 오십일보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대다수 사람의 경우 능력의 차이란 사실 뭐 있겠는가 싶다. 경상도말로 “니나 내나”.

 

천하갑부 빌 게이츠, 나 호호당과 동갑이다. 내가 생일이 두어 달 빠르다. 저 친구와 나와의 차이, 돈에 있어선 내가 좀 밀리는 편이고 사는 재미는 내가 저보다 앞선다 여긴다. 피장파장.

 

그런데 피장파장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하고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원래 말은 彼丈夫我丈夫(피장부아장부)였다. 이 말을 빨리 발음해보면 피장파장이란 축약어가 된다. 뜻은 너도 사내 나도 사내이니 무슨 차이가 있으리! 하는 말이다.

 

집의 모든 창을 30분 이상 열어놓고 있어도 전혀 춥지가 않다. 화창한 초봄의 하늘, 동풍이 불어와 중국발 먼지를 거꾸로 중국 내륙 쪽으로 쑤셔박고 있으니 서해 바다마저 깨끗하다. 상쾌통쾌, 공기가 좋아서 상쾌하고 중국 미세먼지들을 도로 돌려주고 있으니 통쾌하다. 正義(정의)가 구현되고 있음이다.

 

 

하루가 지나 다시 달님과 마주하니 

 

 

다시 늦은 밤이 되었고 간밤의 달과 다시 마주한다. 24시간이 지난 셈이다.

 

어제와는 달리 환한 달빛 속에 10년 전에 죽은 우리 강아지 가을이의 미소도 보이고 달 토끼 그림자를 찾다 보니 강아지보다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우리 미니토끼 초롱이의 활달하던 모습도 보인다. 情(정)이란 놈은 한 번 들면 단박에 잊히는 법은 없고 세월의 거리만큼 조금씩 멀어져서 그저 아스라해지는 모양이다.

 

달빛에 취한 글이라 지울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마무리하기로 한다. 글을 마치고 창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둥글고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