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길들여지니 바꿀 수가 없네. 

 

 

토요일 주말이다. 마음이 한가롭다. 사실 내겐 평일과 주말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내 경우 주말 강의로 해서 평일보다 더 바쁘건만 주말이 되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아마도 여섯 살 유치원 시절부터 직장을 그만 둘 때까지의 세월, 계산해보니 33년의 생활리듬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주중에 온(on)하고 주말에 오프(off)하는 리듬은 월급쟁이의 리듬이다. 그런데 내 경우 1993년 말부터 月給(월급)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년이면 그런 거 없이 30년이 된다. 월급이란 것을 받아본 것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은행원으로서의 11년에 불과하다. 그 이후 29년간 집을 팔아서 또 사업과 프리랜서, 그 이후엔 상담업과 강좌 등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매달 정해진 날 통장에 돈이 찍히는 그 월급이란 거, 게다가 간간히 나오는 보너스란 거, 받을 땐 몰랐지만 그 이후 두고두고 그리워했다. 요즘말로 ‘개꿀맛’이었다.

 

 

잃어야만 고마워지니 아, 모순이여! 

 

 

삶의 모순은 뭔가를 잃었을 때야 그것의 소중함, 아니 소중했음을 느낀다는 점이다. 월급을 받을 땐 그게 고마운지 전혀 몰랐다.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 있을 때 잘 하자는 마음 또한 그다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존재, 사람이나 강아지 등등, 좋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안기는 원인이기도 해서 있을 때 잘 하자는 마음 또한 가끔은 몰라도 늘 지닐 순 없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존재, 인간이여!

 

 

어떨 때 사람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KTX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거나 시내버스 타고 귀가할 때 등등.

 

얼마 전 체력이 달려서 아침 식후 그리고 자기 전에 스트레칭과 근력강화를 제법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체력이 회복되었다 싶은 순간부터 슬슬 하지 않기 시작했다. 속으론 이래선 안 되는데, 해야지 하고 다짐도 했지만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하니 안 하게 된다. 귀찮아! 역시 외양간은 소를 잃은 뒤에 고치는 법인가 보다.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할 이유가 없다 싶으면 “1초”라도 그 방면에 신경을 쓰기 싫어하는 나를 들여다본 것이다. 참, 인간이란 게 이처럼 교활하고 영리하고 간사하구나 싶다. 내 스스로 이렇게 변덕스러우니 남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리!

 

친한 이가 있어 내게 잘 해주고 있다면 그건 내가 그 이에게 뭔가 주는 것이 있을 때만이 그럴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 해주고 있다면 그 역시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얻고 있는 그 무엇이 있을 때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내게 잘 해주던 이가 연락이 끊어지거나 소원해지면 더 이상 내가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없을 때일 것이다. 그걸 두고 그 사람이 배신했다고 여긴다면 그게 더 염치없는 생각이 아닐까.

 

주는 게 있어도 상대가 내게 주어야 하는 것이 더 크다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게 될 것이다. 내가 받는 게 있어도 그로서 내가 주어야 할 것이 더 크거나 부담이 된다면 내 스스로 그 사람과의 연락을 줄이게 될 것이다.

 

(주는 받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성질의 것이냐 하는 문제는 따지질 말자. 골치 아픈 얘기이니.)

 

체력이 좀 생기니 운동 하지 않게 되는 나, 얻을 것이 없다 싶으면 상대와의 연락을 줄이게 되는 나, 이 모두 나란 존재가 얼마나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며 영리한 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여러모로 그냥 보통의 사람인 내가 그렇다는 사실은 남도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기주의, 생명체의 본능

 

 

좀 더 생각해보면 이 영민함과 교활함, 타산성은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생겨난 이래 특히 고등생명체인 포유류가 등장하면서부터 생존과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버전 업이 되어온 무수히 많은 프로그램들이 DNA를 통해 이어지고 또 그것이 잘 작동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간만 가자는 것, 참 영리한 전략

 

 

잘 할 것도 없고 그저 ‘중간’만 가자는 생각. 이거 생각해보면 볼수록 대단히 뛰어난 자기보호 프로그램이다. 뭘 모를 때는 앞서가자, 좀 튀어보자, 이런 생각도 들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록 이건 아니다. 그냥 가운데에 서 있자는 생각이 작동한다.

 

다큐 영상에서 많이 봤다. 덩치가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거, 포식자가 공격해올 때면 더더욱 무리를 짓는다. 포식자에 대해 공격하진 못해도 뭉쳐 있으면 포식자의 먹잇감이 될 확률이 줄어든다. 내가 그 물고기라고 하자, 내 바로 곁에 나와 똑 같은 놈들이 우글거린다. 그러니 포식자가 나를 집중적으로 먹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과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군중심리란 것 역시 그런 것이라 본다. 공격할 때도 무리를 짓고 방어할 때도 무리를 짓는 게 안전하다.

 

정치 관련 기사의 밑에 달리는 댓글이란 것 역시 일종의 군중심리이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니 결과는 동일하다. 예전엔 댓글이 군중의 심리에 상당히 영향을 주었을 것 같지만 이젠 전혀 그렇지도 않다. 특히 기사를 쓴 기자를 향해 ‘기레기’란 표현을 달았다 치면 그 댓글의 신뢰도는 빵점이 아니라 마이너스가 된다. 기레기란 표현을 쓰는 순간 그 익명의 독자는 쓰레기가 된다. 그런 댓글에 ‘좋아요’를 누른 숫자가 많으면 쓰레기가 많이 쌓였다는 생각만 든다.

 

 

사춘기 때나 튀고 싶지

 

 

스스로 일반의 대중과는 다른 존재이고 싶어 하는 심리는 광고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물론 사춘기를 이제 막 지난 청년이라면 그런 말에 낚여도 무방하다. 사춘기의 핵심이란 게 짝짓기 철을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경쟁 상대에 비해 이성을 더 유혹할 수 있는 ‘전략무기’를 개발 장착해야 하는 시기인 까닭이다.

 

그러니 있어보여야 하고 예뻐져야 하고 섹시해야 하고 그 결과 몸매도 가꾸어야 하고 얼굴도 수려해져야 하며 굴곡 드러나는 쫄바지도 입어야 하며 또 나름 머릿속에 든 게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처음엔 그래도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고 싶기에 자신 스스로의 것으로만 해결하려 든다. 타고난 몸매와 용모, 두뇌 등등. 결투로 치면 1대1 승부인 셈이다. 나름 기사도와 공주의 명예를 걸고 하는 승부이고 경쟁이다.

 

 

공정과 평등 정의란 것

 

 

그러다가 대학 갈 무렵이나 사회에 진출할 때가 되면 이제 정정당당한 승부만으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섹시해도 돈이 없으면 꽝-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특히 남자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세월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남자는 돈, 여자는 미모인 것은 크게 변함이 없지 않은가.

 

요즘 젊은이들은 예전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등과 정의, 공정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는데 이 역시 정면승부만으론 힘들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더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나 호호당이 대학에 가고 군대 가던 시절, 직장에 들어가던 시절만 해도 별로 그렇지 않았다.

 

공부 잘 하면 좋은 학교 갈 수 있었지만 돈으로 몰래 좋은 학교 가는 것 또한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 동기 중에 뒷구멍으로 들어온 친구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 군대 갔더니 소위 빽 좋은 애들은 놀고먹는 부대나 보직을 차지했지만 으레 그런 가 보다 했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좋은 부서는 으레 누군가의 연줄이 작용하고 있었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여겼다. 그 시절엔 불평등이 기본이었고 불공정이 질서였으며 정의로운 세상은 과연 글쎄 그게 될까 싶었다.

 

평등과 정의, 공정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우리 사회가 그만큼 평등해지고 정의롭고 공정해졌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젊은이들의 불만 또한 더 커졌다. 옛날엔 체념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으니 불만할 수밖에 없다.

 

참 신기해한다. 세상 좋아지니 불만이 더 늘어난다는 이 현실이. 거 참.

 

 

더 치열해진 우리 사회

 

 

어차피 맛있는 떡은 한정되어 있다. 그 떡을 먹으려면 예전엔 실력과 연줄이 함께 공존하면서 인정을 받았다. 오늘에 이르러 연줄이나 빽, 아빠 찬스 같은 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 그 떡을 먹을 확률은 미세하지만 분명 높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예전엔 아예 포기하는 자가 많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게 오늘엔 그 누구도 포기할 생각이 없기에 확률은 더 낮아진 감이 든다.

 

맛있는 떡이 열 개라 하자. 옛날엔 백 명이 있었지만 엔트리에 50명만 참가시켰다면 오늘날엔 90명에게 엔트리가 주어지니 먹을 확률이 더 떨어지고 있다. 50명 사이의 경쟁과 90명 사이의 경쟁은 당연히 90명의 경쟁이 더 힘들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젊은이들도 죽을 맛이고 그 젊은이를 사회에 진출시켜야 하는 부모도 죽을 맛이다. 당연히 돈 없는 노인들을 돌 볼 여유는 1도 없다.

 

세상 분명 좋아지긴 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價値(가치)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착시 효과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