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의 진정한 뜻

 

 

우리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한다. “슬기로운 인간”이란 뜻이다. 이런 표현에 대해 그냥 우리 인간들이 머리가 좋긴 하지, 암!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슬기롭다는 저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문득 알게 되었다.

 

인간의 조상은 대략 600-700만 년 전에 존재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는 것이 이젠 거의 정설이다.

 

사실 지구상에는 우리 인간과 흡사한 동물들이 꽤나 많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많은 인류가 있었는데 그간에 깡그리 멸종하고 말았다. 오로지 우리들 즉 현세인류만이 살아남아서 번성하고 있다. 옛날엔 다양한 인류가 있었지만 다 멸종했다. 멸종한 인류 중에 가장 최근의 일이 바로 네안데르탈인이다. 그들은 사실상 우리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 역시 석기를 제작하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지만 약 2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 사이에 멸종했다.

 

다시 얘기지만 우리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대목에서 며칠 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은 까닭은 

 

 

일단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이유는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장 강인하고 영리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류 중에서 가장 독한 놈이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란 생각. (어쩌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장 강인하고 영리했다는 사실은 바로 앞의 사피엔스, 즉 슬기롭다는 표현과 같은 말이다. 그냥 슬기로운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머리를 잘 썼다는 뜻이다. 더 줄이면 우리 인간은 투쟁이나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이골이 날 정도로 머리를 잘 쓰는 생명체’라 해야 마땅하겠다. 바로 이게 호모 사피엔스의 뜻이란 걸 며칠 전에 깨달았다.

 

우리 인간은 환경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면 환경을 바꾸려 시도한다. 그런데 환경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바꾸거나 없애 버리고자 한다. 그건 바로 우리가 거는 싸움, 즉 挑戰(도전)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땅이 부족했기에 바다 위에 말뚝을 무수히 박아서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우리 조상들 역시 농지가 부족하자 바다를 막아서 농지로 탈바꿈시켰다. 네델란드 사람들은 습지에서 물을 퍼낸 다음 제방을 쌓아서 옥토로 만들었다. 최근엔 저탄소 운동도 마찬가지.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愚公移山(우공이산)이 아닐까 싶다. 어리석은 늙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인데 사실 그 영감은 어리석지가 않다, 산을 옮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끈질기고 강인한 의지를 가진 전형적인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인 셈이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磨斧爲針(마부위침)의 성어도 마찬가지.

 

생존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하게 강인하고 영리했기에 오늘날 우리들 즉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 역시 생존과 투쟁, 번영을 위해선 대단히 지독하고 영악할 거라 여긴다. 나 호호당도 마찬가지.

 

정리하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선 대단히 영악하고 투쟁적이기에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아서 번성하다보니 잃어버린 것

 

 

그런데 그러다 보니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 크게 잃어버린 것, 상실해버린 것이 있다. 바로 만족이다.

 

오랜 투쟁을 거쳐온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 속에 만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 심어져서 체질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적 형질이란 얘기이다.

 

물론 우리 모두 짧은 기간 동안엔 만족할 줄 안다. 배가 고프다가 식사를 하고 나면 행복하다. 크든 작든 욕망이나 바람이 충족되면 일정 기간 동안은 만족한다, 즉 행복해한다. 산사를 찾아서 부처님과 보살님 전에 절을 올리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만족하게 된다. 하지만 돌아오면 바로 전쟁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不滿(불만)하는 동물”, 만족에 머물지 못하는 고등 생명체인 것이다.

 

 

인간은 불만의 동물이기에 영악하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이란 생각을 며칠 전에 하게 되었다. 불만의 동물.

 

왜 싸우는가? 하면 무언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싸움이란 그냥 말싸움만이 아니라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가득하다.

 

인간 사이의 죽이고 죽는 싸움이 너무 심해서 과거 한 때 수컷의 유전자 개체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에 가면 ‘스톤 헨지’라고 하는 고대 문명의 거대한 상징물이 있는데 그것을 만든 종족들은 외부 침입자들에 의해 수컷의 경우 깡그리 죽임을 당했다.

 

 

영원히 싸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떡 하나가 있고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 당 하나는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죽이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이란 얘기이다.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물론 처음엔 서로 죽는 게 무서워서 하나를 반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둘 다 굶주려서 견딜 수가 없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어디선가 또 다른 떡 하나를 만들어내고자 협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결국엔 싸우고 또 죽인다.

 

그런데 오랜 진화 과정, 생존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인류는 불만하는 것이 체질화되다 보니 떡 하나가 제법 커서 두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싸우거나 제거하려든다.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만족한다. 하지만 곧 먹는 것만으론 불만이다. 그래서 또 다른 시도를 한다. 영악하기에 끊임없이 더 좋은 방법, 또 다른 만족을 추구하는 호모 사피엔스이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해결되면 만족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얼마 안 가서 “삶의 질”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협조는 잘 싸우기 위한 전략의 하나일 뿐 

 

 

더러 주장하기를 인간에겐 투쟁과 경쟁, 즉 싸움의 본성도 있지만 협조의 DNA도 있다는 말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협조는 우리 인간이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를 일러 사회적 동물이라 부른다.

 

다만 단서가 있다, 공동의 적이 있을 때 서로 협조하게 되고 때론 협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때 우리 인간은 협조를 한다. 협조는 결국 이기고 성취하기 위한 전략 또는 수단일 뿐이다.

 

공동의 적을 물리치거나 제거했다고 하자, 또 협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하자, 잠시 만족해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불만에 쌓이게 된다.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이나 행복이란 것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진화되었기에 그간의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었고 지구상에서 가장 무섭고 강력한 종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흔히들 가진 놈이 더 인색하다는 말이 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를 비난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 호호당의 생각은 이렇다. 가령 옛날에 전세살 돈도 없던 당신이 어느 날 마침내 100억을 벌었다고 하자. 엄청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과 만족,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진다. 불만에 찬 당신은 500억을 벌고 싶어진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당신은 여전히 허튼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남들 눈에는 인색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지 못해서 불만이고 가진 자는 더 가지지 못해서 불만이다. 가지지 못한 자나 가진 자 모두 잠시는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결국 모두가 불만이다.

 

불만하는 인간은 투쟁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게 없다 싶으면 싸울 대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한다. 심지어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있다.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른바 전도를 위해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나 호호당의 귀엔.

 

그렇기에 이 세상 특히 인간 세상은 영원한 투쟁이 이어지고 있고 또 이어져갈 것이라 본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먼 옛날 대학 다닐 당시 라이벌 대학과의 스포츠 경기에서 외치던 구호가 생각난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참으로 공연한 말이 아니었음을 새삼 느낀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 얼마나 전투적이고 투쟁적인가, 아들 녀석이 2000년대 중반 의경 출신인데 시위대가 저 노래를 부르면서 밀고 들어오면 의경들도 함께 부르면서 방패를 들고 위치를 고수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싸움을 잘 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엄청 싸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 쪽이 건드는 바람에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곧잘 싸운다.

 

설이다. 귀성하실 분은 전략을 잘 짜서 신속하게 귀성했다가 신속하게 돌아와서 푹 쉬거나 즐기시길 바란다. 놀러 가실 분들은 최대한 전략을 잘 수립해서 다녀오시기 바란다. 짧은 귀성 후 놀러 가실 분들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전략을 잘 짜야 하겠다. 설 연휴 또한 하나의 투쟁이고 전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