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의 진정한 뜻

 

 

우리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한다. “슬기로운 인간”이란 뜻이다. 이런 표현에 대해 그냥 우리 인간들이 머리가 좋긴 하지, 암!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슬기롭다는 저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문득 알게 되었다.

 

인간의 조상은 대략 600-700만 년 전에 존재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는 것이 이젠 거의 정설이다.

 

사실 지구상에는 우리 인간과 흡사한 동물들이 꽤나 많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많은 인류가 있었는데 그간에 깡그리 멸종하고 말았다. 오로지 우리들 즉 현세인류만이 살아남아서 번성하고 있다. 옛날엔 다양한 인류가 있었지만 다 멸종했다. 멸종한 인류 중에 가장 최근의 일이 바로 네안데르탈인이다. 그들은 사실상 우리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 역시 석기를 제작하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지만 약 2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 사이에 멸종했다.

 

다시 얘기지만 우리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대목에서 며칠 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은 까닭은 

 

 

일단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이유는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장 강인하고 영리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류 중에서 가장 독한 놈이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란 생각. (어쩌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장 강인하고 영리했다는 사실은 바로 앞의 사피엔스, 즉 슬기롭다는 표현과 같은 말이다. 그냥 슬기로운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머리를 잘 썼다는 뜻이다. 더 줄이면 우리 인간은 투쟁이나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이골이 날 정도로 머리를 잘 쓰는 생명체’라 해야 마땅하겠다. 바로 이게 호모 사피엔스의 뜻이란 걸 며칠 전에 깨달았다.

 

우리 인간은 환경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면 환경을 바꾸려 시도한다. 그런데 환경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바꾸거나 없애 버리고자 한다. 그건 바로 우리가 거는 싸움, 즉 挑戰(도전)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땅이 부족했기에 바다 위에 말뚝을 무수히 박아서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우리 조상들 역시 농지가 부족하자 바다를 막아서 농지로 탈바꿈시켰다. 네델란드 사람들은 습지에서 물을 퍼낸 다음 제방을 쌓아서 옥토로 만들었다. 최근엔 저탄소 운동도 마찬가지.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愚公移山(우공이산)이 아닐까 싶다. 어리석은 늙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인데 사실 그 영감은 어리석지가 않다, 산을 옮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끈질기고 강인한 의지를 가진 전형적인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인 셈이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磨斧爲針(마부위침)의 성어도 마찬가지.

 

생존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하게 강인하고 영리했기에 오늘날 우리들 즉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 역시 생존과 투쟁, 번영을 위해선 대단히 지독하고 영악할 거라 여긴다. 나 호호당도 마찬가지.

 

정리하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선 대단히 영악하고 투쟁적이기에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아서 번성하다보니 잃어버린 것

 

 

그런데 그러다 보니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 크게 잃어버린 것, 상실해버린 것이 있다. 바로 만족이다.

 

오랜 투쟁을 거쳐온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 속에 만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 심어져서 체질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적 형질이란 얘기이다.

 

물론 우리 모두 짧은 기간 동안엔 만족할 줄 안다. 배가 고프다가 식사를 하고 나면 행복하다. 크든 작든 욕망이나 바람이 충족되면 일정 기간 동안은 만족한다, 즉 행복해한다. 산사를 찾아서 부처님과 보살님 전에 절을 올리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만족하게 된다. 하지만 돌아오면 바로 전쟁이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不滿(불만)하는 동물”, 만족에 머물지 못하는 고등 생명체인 것이다.

 

 

인간은 불만의 동물이기에 영악하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이란 생각을 며칠 전에 하게 되었다. 불만의 동물.

 

왜 싸우는가? 하면 무언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싸움이란 그냥 말싸움만이 아니라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가득하다.

 

인간 사이의 죽이고 죽는 싸움이 너무 심해서 과거 한 때 수컷의 유전자 개체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에 가면 ‘스톤 헨지’라고 하는 고대 문명의 거대한 상징물이 있는데 그것을 만든 종족들은 외부 침입자들에 의해 수컷의 경우 깡그리 죽임을 당했다.

 

 

영원히 싸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떡 하나가 있고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 당 하나는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죽이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이란 얘기이다.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물론 처음엔 서로 죽는 게 무서워서 하나를 반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둘 다 굶주려서 견딜 수가 없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어디선가 또 다른 떡 하나를 만들어내고자 협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결국엔 싸우고 또 죽인다.

 

그런데 오랜 진화 과정, 생존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인류는 불만하는 것이 체질화되다 보니 떡 하나가 제법 커서 두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싸우거나 제거하려든다.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만족한다. 하지만 곧 먹는 것만으론 불만이다. 그래서 또 다른 시도를 한다. 영악하기에 끊임없이 더 좋은 방법, 또 다른 만족을 추구하는 호모 사피엔스이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해결되면 만족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얼마 안 가서 “삶의 질”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협조는 잘 싸우기 위한 전략의 하나일 뿐 

 

 

더러 주장하기를 인간에겐 투쟁과 경쟁, 즉 싸움의 본성도 있지만 협조의 DNA도 있다는 말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협조는 우리 인간이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를 일러 사회적 동물이라 부른다.

 

다만 단서가 있다, 공동의 적이 있을 때 서로 협조하게 되고 때론 협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때 우리 인간은 협조를 한다. 협조는 결국 이기고 성취하기 위한 전략 또는 수단일 뿐이다.

 

공동의 적을 물리치거나 제거했다고 하자, 또 협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하자, 잠시 만족해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불만에 쌓이게 된다.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이나 행복이란 것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진화되었기에 그간의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었고 지구상에서 가장 무섭고 강력한 종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흔히들 가진 놈이 더 인색하다는 말이 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를 비난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 호호당의 생각은 이렇다. 가령 옛날에 전세살 돈도 없던 당신이 어느 날 마침내 100억을 벌었다고 하자. 엄청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과 만족,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진다. 불만에 찬 당신은 500억을 벌고 싶어진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당신은 여전히 허튼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남들 눈에는 인색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지 못해서 불만이고 가진 자는 더 가지지 못해서 불만이다. 가지지 못한 자나 가진 자 모두 잠시는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결국 모두가 불만이다.

 

불만하는 인간은 투쟁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게 없다 싶으면 싸울 대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한다. 심지어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있다.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른바 전도를 위해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나 호호당의 귀엔.

 

그렇기에 이 세상 특히 인간 세상은 영원한 투쟁이 이어지고 있고 또 이어져갈 것이라 본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먼 옛날 대학 다닐 당시 라이벌 대학과의 스포츠 경기에서 외치던 구호가 생각난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참으로 공연한 말이 아니었음을 새삼 느낀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 얼마나 전투적이고 투쟁적인가, 아들 녀석이 2000년대 중반 의경 출신인데 시위대가 저 노래를 부르면서 밀고 들어오면 의경들도 함께 부르면서 방패를 들고 위치를 고수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싸움을 잘 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엄청 싸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 쪽이 건드는 바람에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곧잘 싸운다.

 

설이다. 귀성하실 분은 전략을 잘 짜서 신속하게 귀성했다가 신속하게 돌아와서 푹 쉬거나 즐기시길 바란다. 놀러 가실 분들은 최대한 전략을 잘 수립해서 다녀오시기 바란다. 짧은 귀성 후 놀러 가실 분들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전략을 잘 짜야 하겠다. 설 연휴 또한 하나의 투쟁이고 전쟁이니 말이다.

쓴 웃음을 지으면서  

 

증시 기법 강좌를 올렸는데 수강신청이 별로이다. 그래서 약간 쓴 웃음을 짓게 된다. 대다수가 올 해 증시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고 별 재미가 없으니 저런 거 배워봐야 그럴 것이다 하는 생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오늘은 광고도 겸해서 주식하는 법에 대해 얘기를 좀 할까 한다. (사실 코인도 방법은 마찬가지이지만 너무 실체가 없는 물건이라 어지간하면 만류하고 싶다.)

 

오늘 내용만 잘 이해해도 독자님들의 투자 철학이나 접근법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니 차근차근 읽어 주셨으면 한다.

 

 

개미들은 주로 손해를 본다, 그 이유는 뭘까?

 

 

먼저 얘기할 것은 증시든 뭐든 주로 개인(개미)들이 손해를 본다는 점이다. 이는 이른바 ‘팩트’이다. 그렇다면 왜 개미들이 손해를 보는 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증시의 주체는 개미가 있고 그 반대편에 외국인투자자, 줄여서 외인들이 있으며 그 중간에 기관투자자, 줄여서 기관들이 있다.

 

그런데 외인들이 손해 보았다는 뉴스는 거의 듣기 어렵다. (간혹 금융위기 발생 시엔 대형 참사가 나기도 하지만 평상시엔 꾸준히 수익을 올린다.) 기관들 역시 때론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수익을 낸다.

 

외인과 기관이 벌어들인다고 하면 잃는 이는 누구일까? 당연히 개미가 된다. 증시는 제로섬 게임, 누군가 벌면 누군가는 잃게 되는 게임인 까닭에 그렇다.

 

이에 왜 그런가, 어떤 이유에서 개미들이 잃게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외인들과 기관들이 벌고 개미들이 잃게 되는 것은 외인들과 기관들이 개미들보다 똑똑해서 그런 것은 아니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펀드매니저들이 물론 일반 수준 이상의 학력과 두뇌를 갖추긴 했지만 그게 그들이 수익을 올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란 점이다.

 

(정말이지 탁월한 감각과 노하우를 지닌 쪽은 오히려 개미들 중에 있다. 다만 그 숫자가 지극히 적을 뿐이다.)

 

 

접근법의 차이

 

 

외인과 기관이 벌고 개미가 손실을 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투자에 대한 접근법이 다르다는 점에서 온다.

 

지금부터 주목!!

 

외인이나 기관은 주식을 資産(자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개미들은 商品(상품)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개미들이 손실을 본다. 이게 중요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쉬운 예를 들어본다.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을 얘기해보자.

 

아파트는 거주하는 곳이다. 물론 투자 목적으로 별도로 장만해놓기도 한다. 그런 부동산은 좀처럼 쉽게 사고팔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資産(자산)이라 한다. 하나 사 놓고 그냥 쭉 살거나 아니면 장기 투자 자산으로 취급하기에 매매 건수가 적다. 하루에도 주식을 서너 번 사고팔고를 거듭하는 초단타 개미들의 거래 건수에 비하면 정말이지 너무너무 거래건수가 적다.

 

간단히 말해서 부동산을 하나 장만해 놓았다는 얘기는 미래 또는 노후를 대비해서 든든한 자산을 하나 준비했다는 얘기가 된다. 외인과 기관들이 수익을 올리는 까닭은 주식을 자산으로 바라보고 보유하고 있기에 수익이 난다.

 

외인들이나 기관들이 고객의 돈을 맡을 때 그를 자산관리 또는 웰스 매니지먼트(WM)라 하는데 그건 고객의 돈을 장기적으로 불려주거나 최소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가치를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가진 주식을 다 팔아치우는 법은 절대 없다. 그들에게 돈을 맡긴 고객이 끊임없이 돈을 찾아나가기도 하지만 그만큼 새 고객이 유입되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안정적인 국고채나 우량 회사채를 기본으로 해서 글로벌 우량기업들의 주식을 편입하고 여기에 다소 수익이나 위험도가 높은 약간의 모험성 정크본드나 주식의 유망 종목을 편입해서 운용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이고 약간의 위험수익률을 가미할 뿐이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선 한 번 사서 편입하면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매도하지 않는다. 물론 매도도 하지만 그건 사실 프로그램 매매일 때가 많다. 프로그램 매매란 개미 눈물만큼 먹어보자는 것에 불과하다.

 

(자산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사실 절대 나쁘지 않은 데에는 또 하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선 나중에 별개의 글로 자세하게 설명 드리겠다.)

 

 

개미들은 주로 트레이딩에 치중하기에 잃게 된다. 

 

 

그에 반해 개미들은 주식을 상품으로 본다. 상품이라 함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팔겠다는 뜻이다. 즉 상품을 트레이딩(trading)하는 것이 개미들이다.

 

그런데 그 트레이딩이란 것이 절대 쉽지 않다. 누구나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자 한다. 그런데 싸게 살 기회는 장세가 조정을 보이거나 폭락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그럴 땐 대부분의 개미들은 겁이 나서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장이 정상 궤도로 들어가서 다시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해야만 매수한다. 그럴 경우 모든 주식이 빠른 시간 안에 비싸져버린다.

 

장이 조정을 받을 때 운이 좋게 용감하게 싸게 샀다고 하자. 수익률이 40% 정도 나온 상태인데 매도 물량이 상당히 나온다 싶으면 수익도 남겼으니 팔아버린다. 그러고 나면 이제 문제가 생긴다.

 

다른 싼 주식을 찾아보지만 어지간한 주식은 그 사이에 벌써 다 올라 있다. 그래서 증권 방송도 시청하고 종목 추천도 받아보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장이 정상화된 뒤엔 사실상 모든 종목이 제 가격을 찾아갔거나 찾아가기 직전인 상태이기에 괜찮다 싶어서 다른 종목을 사게 되면 십중팔구는 ‘물리게’ 된다.

 

분만 아니라 물린 상태에서 보유하고 있다 보면 저번에 낸 수익도 몽땅 까먹기도 하고 이에 아니다 싶어 손해 본 주식을 팔고 교체하면 또 물린다. 그러다 보면 결국 손해 상태가 유지된다. 이게 일반 개미들의 현실이다.

 

작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폭락한 증시가 급격하게 되살아나는 국면에서 용감하게 매수해서 크게 재미를 본 개미들이 등장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이에 너도 나도 주식 매수에 나섰는데 사실 그 시점에서 이미 트레이딩을 위주로 개미들에게 재미를 볼 기회는 사실상 사라졌다.

 

뒤늦게 뛰어든 개미들은 초보답게 크고 안전하고 우량한 주식인 삼성전자를 많이 샀는데 당연히 수익을 낼 수 없었다. (국민주가 되면 수익이 나지 않는다. 나 호호당의 경우 2018년 삼성전자가 1/50 로 주식분할을 한 후부터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

 

올 해 증시는 지지부진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작년 말 나는 지인들에게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2차 전지 주식이나 신재생 에너지, 반도체 쪽은 당분간 손대지 말라고 조언해주었다. 단기간에 너무 올랐으니 또 다시 급격한 상승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 그렇다면 개미들은 어떻게 주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해볼 차례가 되었다.

 

 

정법과 정도는 사실 수익률이 크지 않다는 점

 

 

가장 正法(정법)이자 正道(정도)는 외인이나 기관처럼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주식을 할 것 같으면 트레이딩을 하지 말고 자산으로 삼아서 투자를 하라고 얘기해준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나 호호당은 이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 방식이 수익을 내긴 어렵지 않아도 연간 수익률로 볼 때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에서 하지 않는다.

 

수익률을 많이 내기 위해선 역시 트레이딩을 해야 한다. 그런데 트레이딩을 할 것 같으면 정말이지 기존에 알려진 이론이나 기법 따위로는 절대 초과 수익률을 낼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결국 남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개미는 역시 트레이딩, 하지만 탁월해야 하는 법

 

 

트레이딩이란 결국 증시의 변동성 또는 Fluctuation 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주식은 오르더라도 내리면서 오르고, 내리더라도 오르면서 내린다. 일직선으로 오르내리는 주식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38년간 그 변동성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방법을 연구해왔고 이에 충분히 잘 대처하면서 수익을 내고 있다.

 

또 한 가지 나 호호당은 주식을 사서 물리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관심이 가면 보초를 세우는 셈 치고 소량 샀기에 그렇다. 그런 주식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비로소 자세하게 관찰하고 움직임을 파악한 다음 매수 시점을 찾아낸다. 바로 그 매수시점을 찾아내는 기술이 핵심이다.

 

물린 주식의 경우 1차 매수시점이 있고 2차가 있으며 3차 매수시점이 존재한다. 그래서 현금이 필요하다.

 

나 호호당의 경우 원금이 2000만원인데 횡보장세나 조정장이면 원금의 35-45% 정도 포지션을 잡고 있으며 상승장에선 65%까지 늘린다. 원금 전액을 다 집어넣는 경우는 절대 없다.

 

따라서 조정장에선 60% 정도, 상승장에선 35% 정도의 현금을 늘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게 나 호호당이 수익을 올리는 원천이다. 일종의 예비군이고 기회다 싶으면 그 예비군을 단기 투입해서 수익을 올리거나 본전을 되찾은 뒤 즉시 빠져나온다. 그런 다음 원래의 포지션만으로 수익을 올린다.

 

(내 경우 2020년 장에선 지나치게 수익률이 높았는데 그건 장세가 그랬던 탓이다. 올 해의 경우 수익률은 원금의 50% 정도인데 이는 올 증시가 횡보 장세인 까닭이다.)

 

장세를 늘 잘 알고 있어야 하고 2-3가지 정도의 시나리오는 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움직이면 어떻게 되고 저렇게 움직이면 또 어떻게 된다는 정도는 기본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낚시꾼이 되어야지 물고기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내 말인 즉 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사람이 트레이딩을 하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건 그저 내 돈을 운에 맡기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단기 급등주는 어떤 시점에서 들어가서 어떤 시점에서 빠져나올지 꿰차고 있어야 수익을 올린다. 나머지 보통의 종목 역시 6개월 이내엔 어떻게 움직일 것이다 정도는 알고 해야 수익을 올린다.

 

그렇기에 증시 강좌를 열고 있다. 와서 배운다고 해서 100%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운 뒤 2년 정도만 열심히 익히고 연습해보면 평생 어렵지 않게 적절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당신은 낚시꾼이고 증시가 당신의 낚시터가 되어야지 낚시꾼은커녕 물고기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하지만 나 호호당으로부터 배우고 나중에 열심히 익히면 당신도 “탁월한 개미 낚시꾼”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나 호호당의 물건, 자연순환운명학이나 증시기법 모두 진짜 물건이다.

 

 

 

공상을 많이 하다보니 생긴 능력

 

평생 공상, 그리고 공상에 개연성을 더 붙인 결과 궁리와 연구, 그리고 그림.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그건 결국 공상을 좀 더 잘 해보려는 의도였을 뿐이다.)

 

공상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이상한 능력도 얻게 되었다.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눈앞에 천애절벽의 낭떠러지를 만들어낼 수 있고 바다 앞에 서 있을 수 있으며 모래바람 세게 불어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 가운데에 서있을 수도 있게 되었다. 요즘 자주 소개되는 가상현실보다 내가 하는 공상 속의 현실이 더 리얼할 것이다. 뻥이 아니다. 연습하다 보면 된다.

 

 

가령 바닷가 백사장을 만들 것 같으면 

 

 

가령 어느 백사장을 만들어보자.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된다. 공상은 눈을 뜬 채 하는 게 더 진짜다. 안면도 해수욕장에 여러 번 다녀왔고 해운대는 물론이고 국내 여러 해변을 가봤다. 미국 플로리다의 어느 비치도 다녀왔으며 프랑스의 도빌 바닷가도 다녀왔으며 영국 콘월의 바닷가도 산책했다. 뿐만 아니라 책이나 잡지, 텔레비전 등을 통해 만났던 그 모든 바닷가도 있다. 그러니 재료는 충분하다, 얼마든지 내 맘대로 꾸며낼 수가 있다.

 

먼저 하늘을 떠올려본다. 흐린 날이냐 맑은 날이냐에 따라 물색이 달라진다. 물의 색깔과 떠다니는 해초의 종류, 그 색깔과 냄새, 희고 검은 형형색색의 조개껍질, 파도의 세기와 높이, 소리, 밀려들었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물살의 흐름과 소리, 모래사장의 모래알 굵기와 형태, 색깔, 모래사장의 길이와 폭, 내 발에 밟히는 감촉,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마릿수, 비행하는 모습, 멀리 송림이나 다른 나무들, 한쪽 저 편의 바위와 절벽, 절벽의 돌 색깔, 주름과 층, 바람의 강도와 바람 속에 실린 이런저런 냄새들. 이런 것들로 만들어내면 된다.

 

그리고 시각도 중요하다. 오후 나절로 해도 되고 이른 아침으로 만들어도 된다. 이런 모든 것들, 풍경화를 그리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구름의 종류와 모습, 햇살의 강도, 빛의 방향은 순광 아니면 역광? 그도 아니면 비스듬히 들어오는 사광? 빛의 입사각도에 따라 생기는 그림자의 길이, 기온과 공기 중의 수분 등등 여러 재료들을 마음대로 혼합해서 지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택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생각들과 요소들, 즉 상상의 재료들이 내 눈앞을 스쳐간다. 온몸의 감각기관들과 그 기억들, 불교적으로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의 六根(육근)를 총 동원하면 얼마든지 리얼하게 구성해낼 수 있다.

 

 

공상과 현실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우리의 뇌는 일정한 순간 오로지 한 가지 일만 처리한다. 다만 아주 짧은 순간이라 해도 순차적으로 아주 많은 것들을 처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늘 종합적으로 느끼고 감수한다고 착각할 뿐이다. (물론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알아서 우리 몸의 일들을 처리해주는 기가 막히게 정교한 자율신경계가 있어서 우리가 정상적으로 살 수 있긴 하다.) 그러니 바닷가를 머릿속으로 구성하는 것도 한 가지 요소들을 빠른 시간 안에 순차적으로 만들어 가면 된다. 공상과 현실은 전혀 차이가 없다. 정말이다.

 

공상은 현실에서 해낼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가령 우주 끝으로 가보자 하고 마음먹는 순간 우주의 끝에 도달한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게 없다고 하지만 공상은 그런 제약이 없다. (물론 우주의 그 끝을 본 사람이 없으니 그곳이 어떨지 모른다, 각자 상상하기 나름이다.)

 

공상 속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보자기 하나 덮어쓰고 배트맨이 되기도 하고 우주를 지키는 용사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은 재미가 없어서 

 

 

공상은 물론 虛構(허구)이다. 그런데 허구면 어떤가? 꼭 리얼, 요즘말로 ‘레알’이어야만 하는가. 재미있으면 되는 일이다.

아줌마들이 달콤한 환타지 멜로 드라마에 빠져서 앓이를 하는 것, 그게 허구인 줄 몰라서 그렇겠는가? 허구 역시 그 나름의 한 세계인 것이다.

 

오히려 현실 레알의 세계는 주로 재미가 없다. (물론 재미없는 공상은 하지 않으면 된다.)

 

가령 독자께서 평소 벼르고 벼르던 먼 나라 관광지로 떠난다고 해보자. 좋다, 베트남의 하롱베이라고 해두자. 하롱베이를 만날 때까지 공항에서부터 수속 받고 비행기 타느라 고생하고 현지 비행장에서 다시 입국 수속을 밟고 그런 다음 얼굴 모르는 가이드를 만나서 버스를 타고 간다. 시간 많이 걸리고 피곤하다. 하롱베이에 간다는 기대감 하나로 버티면서 간다.

 

이처럼 현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의미도 없고 별 재미도 없다. 하지만 공상에선 하롱베이로 직행한다. 즉각 바다 한 가운데 크루즈를 타고 놀 수 있다.

 

공상이 더 좋지 않은가!

 

하롱베이 가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연출해내느냐? 할 것 같으면 독자가 이미 그 비슷한 곳을 가본 경험만 있다면 나머지는 세계테마기행 같은 영상 프로그램을 유튜브 들어가서 살펴본 뒤에 거기에 생각을 입히면 바로 하롱베이가 된다. 익숙해지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그런 까닭에 나 호호당에게 있어 호텔 델루나 속의 장만월은 허구의 세계 속에서 실존하고 있다. 귀엽고 앙증스러우며 앙칼진 장만월을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지은이란 배우이자 아이유란 가수를 만나고픈 생각은 별로 없다. 내겐 이지은보다 장만월이 더 레알이다.

 

 

쓸데없는 욕심들도 사라졌으니 

 

 

공상을 많이 하고 잘 하다 보니 또 다른 의도치 않은 효과도 있기에 그 얘기를 좀 해본다.

 

예전에 어쩌다가 庭園(정원)이란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런저런 국내외의 여러 정원들을 구경하다가 흥취가 생겼다. 그래서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대지 1000 평 정도의 정원 아니면 10만평의 정원 등등 이런저런 구상을 많이 했다. 그 바람에 정원 만드는 방법에 관한 책도 많이 사서 읽고 연구도 했으며 설계도 했다.

 

그런데 한 15년 전의 일이다. 덕수궁 정원을 산책할 때의 일이다. 이 정도의 정원이면 나쁘진 않아, 그런데 이게 만일 내 소유라 한다면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골치가 아파졌다. 재산세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서울 한 복판에 저런 엄청난 땅을 개인의 사유물로 하고 있으니 사람들로부터 비난도 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리 또한 장난이 아니다,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다. 돈 들고 욕 박 터지게 먹고 신경 쓰일 것이니 이건 할 짓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 것이 아니지만 입장료 몇 푼만 내면 언제든지 오면 된다. 그렇다면 그게 더 좋다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그게 뭐 어때서. 호젓하게 혼자 놀고 싶다?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지워버리면 되는 일,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은가. 그때 깨달았다.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진다는 것은 그에 따른 즐거움과 쾌락이 물론 있다, 동시에 지불해야 할 것들도 많다. 덕수궁 정원? 그냥 내 꺼라 생각하고 언제든지 오면 되는 일. 내 것이니 쓰레기 같은 거 버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게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을 하늘의 달, 그게 임자가 있고 소유주가 있는가, 그런 것 따지지 않아도 능히 風流(풍류)할 수 있지 않은가. 숲속의 솔바람 소리 역시 마찬가지. 듣고자 하면 당장 지금 내 귀에 그 소리 들려온다. 그 소리가 어떤지 알기에 들어봤기에 듣고자 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어지간한 욕구는 상상으로 거의 다 카버가 된다. 그간 살아오면서 겪었던 충동이나 욕구 들을 거의 다 경험해보았으니 이젠 그냥 불러내어 재구성하면 된다, 더 환상적으로. 그러니 굳이 또 다시 현실에서 해보겠다고 나설 필요도 사실 없다.

 

그러다 보니 욕심들이 왕창 사라졌다.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살면 충분하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언젠가 죽을 터인데 그 전에 고생 좀 적게 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될지 그거야 모르는 일. 그냥 착하게 살면 혹시?

 

 

흥미진진하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상상하다 보니 

 

 

공상을 주제로 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끝이 없다. 대충 줄여야 하겠기에 한 가지만 얘기한다.

 

재미있는 장편 역사소설이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환타지 소설,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 일본의 요괴를 소재로 하는 ‘항설백물어’ 등을 읽다 보면 그냥 열나게 진도가 나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재미난 이야기가 끝이 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갑자기 헛헛해진다. 이에 늘 공상한다, 흥미진진하지만 끝이 나지 않는 그런 소설이나 이야기 책 없을까? 하고.

 

흥미진진하면서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즉 네버 앤딩 스토리!

 

한 때 아예 내가 써볼 까 하는 생각도 정말 많이 했다. 쓰다 보면 아무래도 궁리를 많이 하게 될 것이고 원고의 진도도 느릴 것이며 도중에 고통도 따를 것이며 그만 두고픈 마음도 들겠지만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과정 자체가 어쩌면 네버 앤딩 스토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도중에 작가인 내가 죽을 것이니 그거야말로 네버 앤딩이 아닐까?

 

하지만 결국 소설 만들기 작업에 착수하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으니 우리 모두의 삶 자체가 각자에게 있어 네버 앤딩 스토리란 사실이다. 죽는 날까지 이어지니 그건 그 사람의 네버 앤딩 스토리로서 손색이 없다.

 

물론 각자의 이야기를 남이 보거나 들으면 별로 또는 전혀 재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스스로 재미만 있으면 되지.

 

내일이 동지, 그러니 동짓달 긴긴 밤엔 이런 얘기가 어쩌면 더 어울릴 것도 같다. 호호당의 공상 놀이는 끊임없이 이어져간다.

 

(주식기법 강좌를 올렸다. 긴 말 하기 싫어서 안내문을 간단하게 했다. 감히 자신하지만 이런 기술 세상에 없다는 점만  알려드린다.)

공상, 평생의 취미

 

 

나 호호당은 어린 시절부터 늘 공상놀이에 빠져 놀았다. 그렇다고 또래 친구들과의 놀이를 싫어하진 않았으나 혼자 방구석에 기대어 별별 공상을 하면서 노는 게 사실 가장 즐거웠다.

 

확실하게 기억한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무렵의 일이다. 시험 시간에 한 문제가 나를 아차차! 하게 만들었다. 분명 그 전날 공부하면서 참고서에서 슬쩍 본 기억이 나는데 답을 쓸 순 없었다. 후회가 순간 밀려왔다, 그걸 좀 더 봤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

 

1955년생인 나 호호당은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라 늘 수시로 시험을 치르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회초리에 맞는 건 늘 있는 일상의 생활이었다. 특히 4학년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보곤 했다. 정말 빡-센 시절이었다.

 

당시 내가 속한 4학년 4반은 88명이었다. 내가 반장이라 잘 기억하고 있다. 4학년이 되자 중학교 진학할 아이들과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구분하진 않았다.

 

차이점은 중학교 진학할 아이들은 관리대상이어서 시험을 본 뒤 틀린 문제 숫자만큼 종아리나 손바닥을 회초리로 맞아야 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맞지 않았다. 30개 틀리면 30대를 맞던 시절이었다. 반에서 늘 1등이던 나는 두세 대 맞곤 했다. 그러니 앞의 후회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한 문제에 매 한 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시간 스톱 神功(신공)

 

 

며칠 뒤 공상에 빠졌다. 주제는 시간 정지.

 

시험을 보는 데 시간 스톱! 하면 시간이 정지한다. 나는 그 시간에 평소처럼 활동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멈춰버린다. 모든 것이 스톱이다. 나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게 시간 스톱이었다.

 

그러면 풀 수 없는 문항에 대해 참고서를 끄집어내어 답을 알아낸 다음 참고서를 집어넣는다. 그런 다음 시간 고(go)! 한다. 시험은 만점일 수밖에 없다.

 

이 학생은 평소 모든 학생의 모범으로서 시험은 늘 만점을 받으니 참으로 훌륭한 학생입니다. 이에 특별한 표창장을 수여합니다. 나는 단상에 올라있고 교장선생님은 흥겨운 목소리로 내게 상장과 부상으로 뭔가 준다. 그러면 선생님들 포함해서 모두가 박수 짝짝! 난 턱을 괴고 이런 공상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공부를 잘 하라는 것은 훗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많은 월급 받으면서 편히 살기 위함이란 것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본들 앞의 과정 싹 다 뺄 것 같으면 결국 돈을 많이 벌기 위함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자 나만의 신통력인 시간스톱을 달리 쓰면 되겠구나 싶었다. 돈이 필요하면 그때 가서 시간스톱! 걸어놓고 은행에 간다, 금고에서 돈 다발을 몇 개 들고 나오면 되지 뭐! 싶은 것이었다. 들고 나와서 한 동안 흥청망청 쓰다가 떨어지면 다시 시간스톱을 걸면 되네,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시험 따윈 전혀 의미가 없어졌다, 모르는 문항이 나온다고 해서 그때 참고서를 뒤질 일이 아니란 깨달음을 얻었다. 공부 잘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든지 돈을 가져올 수 있게 되자 이제 남은 건 그냥 노는 일밖에 없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보고 공상 실컷 하고 그렇게 지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재미가 없어졌다. 뭔가 열심히 해야 할 일이 없어지자 인생이 그야말로 허무해졌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그래서 이러다간 절로 들어갈 일만 남으리라 싶어서 뭔가 좀 교정이 필요했다. 가령 평생 살면서 시간스톱을 열 번만 걸 수 있다는 식으로.

 

 

시간 되돌리기 神功(신공)

 

 

궁리는 하다 보면 진화하고 발전하는 법이다. 시간스톱은 열 번만 가능하되 시간 되돌리기, 즉 과거로 돌아가는 힘을 열 번 정도 가지면 어떨까 싶었다.

 

그냥 대충 살다가 이거 망했다 싶으면 잘 생각해서 망하게 되는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망하는 원인부터 아예 하지 않는다, 뭐 이런 식이었다. 가령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 터인데 마누라 될 사람이 나중에 보니 영 아니다 싶으면 시간 빽(back)! 해서 그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퇴짜를 놓는 식 같은 거.

 

그런데 그 또한 문제가 있긴 했다. 처음에 좋아서 살다가 나중에 싫어졌는데 옛날 소설 같은 걸 보니 또 시간이 지나자 그 나쁜 마누라가 엄청 좋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시간 되돌리기는 버틸 만큼 버텨 보다가 영 아니다, 이건 진짜 아니다 싶은 순간이 오면 그때 빠구! 하는 식으로 써야 되겠네 하고 좀 더 깊은 성찰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간 스톱은 열 번, 시간 되돌리기는 일생 동안 단 세 번만 가질 수 있으면 적당하고 좋은 인생을 살 수 있겠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땅속 투시  神功(신공)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공상이 시작되었다. 학교 수업 중에 선생님께서 우리나라는 당파 싸움만 하느라 늘 나쁜 놈들이 해먹기만 했으며 게다가 진짜 아쉬운 것은 귀중한 역사 유물이나 보물들이 파괴되었고 어딘가 땅속에 묻혀 있을 거란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가령 귀한 고려청자들이 어딘가 땅속 어떤 곳에 파묻혀 있을 터인데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 당시 자동차나 반도체가 없던 시절, 우리가 겨우 자랑할 수 있는 거라곤 고려청자 정도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외국인들이 우리 고려청자를 보면 뿅-간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능력이 필요했다. 눈을 감으면 또 다른 눈이 떠지는데 그 눈은 땅속을 투시할 수 있는 눈이다. 그러면 소실된 역사 문화 유물들을 뚜뚜뚜-하면서 다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좀 더 기능을 강화할 것 같으면 그냥 그 장소에 가지 않아도 전국을 투시할 수 있게 하자, 그러면 그냥 다 보인다는 식이다.

 

그래서 어느 날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신기한 소년이 무진장 소중한 고려청자 창고, 땅속 20미터에 묻혀있던 보물창고를 찾아내다! 식으로 나온다. 기자들이 물어본다, 학생 어떻게 그걸 알아내었습니까? 아 네 그건요, 어느 날 그냥 보였어요, 거길 파보라고 하는 강렬한 충동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정부 부서에 신고를 했고 이에 문화재 공무원 아저씨들이 했죠 뭐. 별 거 아닙니다.

 

그런데 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어린 내가 거길 파세요 한다고 게으른 공무원 아저씨들이 그 말을 들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고고학과를 가야 하겠구나 생각했다. 공부는 좀 하니까 서울대학 고고학과 정도는 갈 수 있으리라 싶기도 했고 앞에서 얘기한 시간 스톱을 살리면 입시 시험장에서 시간을 스톱시켜 놓고 참고서를 펼쳐놓고 시험을 보면 된다는 생각도 했다. 이왕이면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 정도로 할까? 하지만 약간 성가시게 된다.

 

기자들이 수석 입학 했으니 인터뷰를 하자고 할 것이고 그러면 학생, 수석 축하해요, 그런데 왜 법대나 의대를 지망하지 않고 고고학과를 했지요? 그러면 나는 나라의 명예와 발전을 위해 우리나라도 고고학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고 답한다. 그러면 기자들이 더 감격해서 천재 수석 학생, 부와 명예를 버리고 학문의 길을 택하다! 이런 식의 기사 제목을 달겠구나 생각하니 그냥 히죽해죽 웃음이 났다.

 

그런 다음에 서울대 고고학과 마치고 문화재청에 들어가 실무자로 일하면서 평생 동안 수 백 여 곳의 귀중한 유물과 궁궐터를 발견한다. 위대한 고고학자로 살다 간다. 그 또한 나쁘진 않다. 아마 나에 대한 책도 훗날 나오겠지? 흠, 그거 뭐 나쁘지 않아, 이런 생각을 하며 또 공상을 이어갔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평생 공상을 하며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개연성이 있어야 공상도 재미가 있어서

 

 

그런데 중학교 갈 무렵엔 공상만이 아니라 좀 더 정교한 조건들이 붙기 시작했다. 그냥 순수하게 무진장의 무한한 능력에 관한 공상이 아니라 좀 더 실천 가능하고 구현 가능한 공상 쪽으로 옮겨갔다. 리얼한 뭔가가 있어야 좀 더 흥미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최근 하는 말로 ‘개연성’이 필요했다.

 

 

언어에 대한 궁금증, 평생의 취미

 

 

중학교 2학년 초, 어느 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주제를 하나 발견했으니 그건 ‘언어 발생’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 떠오른 것은 ‘바람’이란 단어였다. 왜 바람이라 할까? 하는 궁금증이 출발이었다.

 

며칠 궁리해보니 바람이란 단어는 ‘불다’란 단어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이 분다, 바람 불다 등등, 바람이란 단어의 자음은 비읍과 리을이고 불다 역시 비읍과 리을이다. 바람에서 마지막 받침 미음은 명사를 만들기 위함이고 ‘불다’에서 -다는 종결 어미이다. 따라서 같다.

 

중학교 시절이니 영어 단어와도 비교했다. 영어로 바람은 wind, 그렇다면 영국에선 왜 바람이라 하지 않고 ‘윈드’란 발음으로 정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잘 생각해보니 유사점이 있었다. 그래서 언어학에 관한 책을 한 권 샀고 그러다 보니 또 사게 되었다.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샀는데 사장님이 넌 중학생이 어떻게 이런 책을 사니? 하고 물으셨고 나는 그냥 궁금해서요,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나 호호당은 얼마 전 글로 썼듯이 보수동 책방 골목의 아이였다.

 

영어 선생님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넌 단어 외우기도 바쁠 터인데 그런 건 왜 묻니? 하고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답변을 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결국 내가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은 독학이 유일한 길이란 결심만 굳히게 되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평생 독학이고 외로운 연구였다. 자연순환운명학 역시 그 결과물 중에 하나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말 바람이 일본에서 뭐라 하며 중국에선 뭐라 발음할까? 독일은 영국과 비슷하다고 하니 된 셈이고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선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바람에 나 호호당은 삼십대 시절 거의 70여개의 언어와 단어에 대해 사전과 문법책을 찾아서 혼자 연구하고 궁리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언어학자였다.

 

글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써야 하겠다. 추운 겨울날 이런 글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독자님들도 재밌어 하셨으면 좋겠다.

사쓰마, 일본학자들도 모르는 지명

 

 

일본 동남단 규슈의 가장 아래쪽에 가고시마현이 있다. 이 땅의 옛 명칭은 사쓰마, 한자론 薩摩(살마)였다. 그런데 왜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에 대해선 일본인들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시점은 5세기 무렵부터라고 되어 있다.

 

사쓰마, 현대한자어 소리론 살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바다 건너 일본의 오래된 지명이니 뭐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사람들도 모르는 이 ‘사쓰마’란 명칭은 우리말을 포함해서 저 멀리 몽골과 만주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일대의 언어에서 왔기에 오늘 이렇게 얘기를 해본다. 우리말의 뿌리와 먼 흔적들을 찾아서 나서보자는 얘기이다.

 

 

시라무렌이란 강이 북쪽 멀리 아득한 곳에 있으니 

 

 

사쓰마란 명칭의 뜻을 알기 위해 먼저 북쪽 아득히 멀리 오늘날 중국에 속한 내몽골 자치구에 가본다.

 

그곳에 큰 강이 하나 흘러간다. 강의 이름은 시라무렌이다. 때론 사르모론이라고도 한다. (중국어 표기로 발음하면 시라무룬) 이 강은 내몽골의 북서쪽에서 발원해서 동남쪽으로 흘러 랴오허(遼河,요하)와 합류한 다음 보하이만(발해만)으로 들어가고 결국 서해 바다가 된다.

 

지명들이 나오니 머리가 복잡할 수도 있겠지만 약간 참으면서 따라오시길.

 

시라무렌이란 이름의 뜻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다. 빛나는 물이다.

 

‘시라’란 말은 빛난다, 희다, 밝다, 이런 뜻이다. 시라무렌이란 이름에 대해 옛 중국인들은 潢水(황수)라고 적고 있다. 潢(황)은 누를 黃(황)에 물 水(수)를 왼쪽에 붙인 글자다.

 

그런데 흔히 누를 黃(황)이 노랗다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건 정확한 뜻이 아니다. 저녁놀의 놀처럼 환하게 빛난다는 뜻이다. 노랗다와 놀은 뿌리가 같은 말이다.

 

중국 북방의 黃河(황하)가 흙탕물이라서 누런 강이라 하는게 아니고, 환하고 빛나게 흘러가는 강이란 뜻에서 붙여진 명칭인 것과 같다. 이에 중국인들은 시라무렌에 대해 중국의 황하와 구분 짓기 위해 물 水(수)변을 붙여서 潢水(황수)라고 표기했다.

 

그러니 시라는 빛난다, 환하다, 희다란 뜻이고 무렌은 물, 즉 강이 된다.

 

시라무렌은 희게 빛나는 물이자 강인 것이다.

 

 

청천강 역시도 같은 이름이어서 

 

 

이제 북한에 있는 청천강이란 이름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맑은 淸(청)에 내 川(천)이다. 물이 맑으니 희고 빛날 것이다. 청천강의 옛 이름은 薩水(살수였다. 저 유명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수장시킨 살수대첩의 그 강 이름이다.

 

왜 薩(살)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살이란 발음은 ‘사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이는 앞에서 소개한 ‘시라’무렌 혹은 ‘사르’모론과 같다, 청천강의 원 이름 역시 시라무렌이었던 것이다. 맑고 희게 빛나는 강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맑을 淸(청)을 붙여서 淸川(청천)강이 되었다.

 

(지명은 한 번 이름이 정해지면 집요하게 원래의 뜻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지명의 보수성이라 언어학자들은 표현한다.)

 

따라서 시라무렌이란 이름은 일종의 보통 명사라 하겠다.

 

 

부여의 백마강 역시 같은 이름이어서 

 

 

그렇기에 시라무렌은 우리 남한에도 있다. 충청도의 부여,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그곳을 끼고 흐르는 강은 이름이 白馬(백마)강인데 실은 이 이름 역시 동일한 뜻이다. 白(백)은 희다는 뜻이니 시라와 같고 무렌이 마로 발음되어 말 馬(마)를 붙인 것이다.

 

옛날 백제가 망했을 때 일본은 백제 부흥을 위해 거국적으로 병력을 모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당나라 군대와의 결전에서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천황이 서거하자 태자는 즉위식을 뒤로 물릴 정도로 전력을 다한 백제부흥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무슨 이유로 당시 바다 건너 일본이 총력을 다해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을까?

 

실은 여기에 한일 고대사의 모든 비밀이 다 숨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그렇다.

 

 

백제의 멸망이 일본을 등장시켰으니

 

 

잠시 주제에서 비켜가는 얘기지만 좀 하면 이렇다.

 

일본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옮겨놓은 일종의 分國(분국)이었던 까닭이다. 이에 백제 부흥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야 일본이란 나라가 본격 등장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8년이다. 그러자 일본의 덴무 천황은 스스로를 ‘天皇(천황)’'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 정했다. 그 이전까진 천황이라 칭호도 일본이란 국호도 없었다. 이는 한반도에 있던 本國(본국) 백제가 망했기에 그 뒤를 계승하고자 정식으로 自立(자립) 또는 獨立(독립)한 것이다. 더불어 그런 큰 의미를 담은 것이 686년에 만들어진 朱鳥(주조)란 연호이다. 주조, 붉은 새, 결국 태양새이자 백제의 상징이다.

 

백제가 망한 것과 일본이 등장한 것이 비슷한 시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란 얘기이다. 

 

일본은 따라서 백제인들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그 이전에 도래해온 가야,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사람들이 세운 나라인 것이다.

 

다시 돌아가자.

 

앞에서 소개한 백강 전투에서의 백강은 바로 백마강과 동일 명칭이다. 백마가 희게 빛나는 물, 즉 강이니 바로 백강이다. 백마가 바로 백강이다.

 

 

사쓰마 역시 같은 이름인 것이니 

 

 

우리와 일본의 말을 비교해볼 때 가령 우리말의 물에서 받침소리 리을이 일본에 가선 ‘쓰’나 ‘즈’로 변한 경우가 대단히 흔하다는 점이다. 물이 미즈로 변한 것 역시 리을이 지읒으로 바뀐 현상이다. 우리말과 일본말을 비교해보면 흔하게 나타난다.

 

앞에서 ‘시라’ 또는 ‘사르’란 말 역시 같다. 리을이 일본에서 시옷이나 지읒으로 변할 것이다. 따라서 시라나 사르는 일본에 가서 시즈나 사쓰로 변한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면 이제 일본의 사쓰마로 가보자. 한자론 薩摩(살마). 이 말은 사실 시라무렌 혹은 사르모론과 같다. 사르가 사쓰로 변했고 마는 그냥 붙어있다. 그래서 사쓰마인 것이다.

 

사쓰마의 뒷소리 ‘마’가 ‘미즈’로 변하지 않고 그냥 붙어있다는 것은 이 지명이 만들어진 때가 대단히 오래 전임을 말해준다. 대단히 오래 전의 일이라 일본사람들도 그 뜻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힌트가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 규슈의 옛 사쓰마 지역에 가면 ‘사쓰마센다이’란 도시가 있다. 한자로 薩摩川内市(살마천내시)이다. 이 도시의 가운데를 흘러가는 강의 이름은 그냥 川内川, 일본말로 센다이이다.

 

무슨 놈의 강 이름이 어째서 천안의 천이라 할까? 하면 원래는 薩摩川(살마천)이었고 진짜 오리지널은 薩摩(살마)였기 때문이다. 살마에 다시 川(천)을 붙인 것은 우리말의 ‘역전앞’과 같은 표현이다. 역 앞이 驛前(역전)인데 일반 상민들이 한자를 몰라서 그렇듯이 말이다.

 

이제 좀 정리를 해보자.

 

 

모두 동북아시아 공통조어의 갈래

 

 

시라무렌 혹은 사르모론은 몽골말로 알려져 있다. 시라 또는 사르가 희고 빛난다는 뜻이라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우리말속에도 뜻이 약간 변했을 뿐 고스란히 남아있다.

 

새벽이란 말을 보자. 원형은 새밝이다. (박혁거세의 ‘박’이 밝인 것과 같다.) 뜻은 새롭게 밝아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원래 새나 시, 또는 실까지 포함해서 희다는 뜻이었다. 이에 새벽은 ‘희게 밝아오는’ 것인데 나중에 새란 말이 새롭다(new)는 뜻으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밝음, 새벽이 되었다.

 

참고로 덧붙이면 일본에서 우리 삼국시대의 新羅(신라)를 ‘시라기’라고 하는 것 역시 시라, 사르 등과 같은 소리가 일본에 그냥 남아있기에 그런 것임을 밝혀둔다. 신라의 원 명칭이 사로, 한자로 斯盧였으며 서라벌 역시 ‘서라’에 마을을 뜻하는 ‘벌’이 붙은 것이다. 시라, 서라, 사로, 모두 같은 소리이다.

 

그렇기에 시라무렌 혹은 사르모론이 몽골말이라 하지만 사실 우리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말 역시 동일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된다. 시라무렌 혹은 사르모론은 薩水(살수) 즉 청천강이고 백마강이며 백강이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쓰마가 되었다. 말을 글로 바꿀 수 있는 字母(자모) 즉 낱자가 없어서 한자의 음을 빌렸 표기했을 뿐 모두 원래 비슷한 소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라무렌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본다. 시라무렌강이란 표현은 물 즉 江(강)이란 말 뒤에 또 江(강)을 붙인 격이니 웃긴다.

 

 

중국이 억지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

 

 

시라무렌은 동북아시아,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걸쳐 유목민들에게 있어 대단한 쟁탈의 요지였다. 중국이 억지투성이의 동북 공정을 진행하는 이유 역시 이른바 紅山(홍산)문명 때문이다. 그런데 홍산문명의 발원지가 바로 시라무렌 일대란 사실이다. 홍산문명은 황하 문명보다 수천 년을 앞선 문명이기에 중국이 억지로 무리해가면서 중국 역사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말갈이나 선비, 거란, 여진, 그리고 단군조선, 부여와 고구려 등을 포함한 모든 동북아시아 만주 일대의 나라들이 기본적으로 시라무렌 일대의 신화와 전설을 공유하고 있다.

 

일례로 동명성왕의 어머니인 柳花(유화)부인의 유화란 버들꽃 즉 버드나무의 꽃을 뜻하는데 버들은 물가 식물로서 지금도 시라무렌 일대의 대표적인 수종이다. 일반적으로 유화부인이 노닐던 장소가 압록강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시라무렌이었다. (그리고 시라무렌은 이름만 달리 할 뿐 북만주 일대에 몇 개나 된다.)

 

나 호호당이 보기에 시라무렌이 흘러서 합치는 랴오허의 서쪽 지역은 좀 더 유목을 위주로 했고 동쪽은 농경을 더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민족은 랴오허 동쪽의 갈래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혈통이나 언어에 있어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진 않다.

 

 

기록으로 남겨두는 까닭  

 

 

이것으로서 물 즉 강이란 말에 얽혀있는 동북아시아 말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약간 복잡하고 어렵게 느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우리말의 먼 흔적들을 찾아보는 이런 글이 언젠가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감에 있어서 관련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도 같아서 올린다. 

미중간의 전쟁가능성? 어림도 없는 얘기!

 

 

JP 모건 은행이 금년 여름 100% 지분의 중국법인을 오픈했다. 중국 금융의 중심인 상하이 포동 지구의 동방명주 탑의 인근 금융 중심가에 커다란 빌딩으로 자리를 잡았다. 배터리 자동차의 테슬라 역시 중국 자회사를 전액 지분으로 출발했다. 트럼프 때부터 중국을 패겠다고 시작한 미중 경쟁이지만 내용을 보면 거꾸로 양국의 관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어떤 이는 미중 전쟁의 가능성을 점치지만 내용을 보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미국과 중국은 싸우면서 협력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엄포를 놓고 지랄을 떨지만 인내하면서 시간이 가면 결국 그들이 미국을 넘어설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는 것이고, 미국은 일단 잇속을 차리면서 중국을 마침내 입맛대로 길들일 수 있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대한민국 또한 그 사이에서 양쪽의 눈치를 봐가면서 최대한 이득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다.

 

 

통치자의 입장에선 敵(적)이야말로 소중한 존재

 

 

통치자의 입장에선 라이벌 국가가 있거나 敵國(적국)이 있으면 정말 해먹기 편해진다. 국내 여론을 결집시킴에 있어 그 이상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트럼프가 시작한 것을 바이든이 냉큼 받아서 일종의 적국으로 중국을 대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역시 미국이란 라이벌을 재임 중에 마침내 따라잡는 대위업, 즉 중국몽을 구현하려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우리의 경우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反美(반미)정서를 상당히 활용했다. 하지만 그게 될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시작 후 즉각적으로 그만 두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반미는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을 알아서 그 대신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 이른바 抗日(항일)을 활용했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도 쓸데없이 독도에 점퍼 차림으로 찾아가서 일본을 쬐려 보면서 자극했다.)

 

 

나라 역시 적국이나 라이벌 국가가 있어야 분발하고 발전하는 법이니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가 잘 되지 않는 까닭으로 나라의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란 글을 쓰기도 했다. “적을 만들다”란 책이 그것인데 읽으면서 낄낄 거렸다. 그래, 일단 적이나 라이벌이 있어야만 분발하지! 암.

 

정말 그렇다. 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가 과거 수십 년간 열심히 분발해온 배경에는 한 때 우리를 强占(강점)했던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력한 의견일치가 있다. 그 바람에 한일전 스포츠는 그 어떤 종목이든 상관없이 거의 전쟁이다. 국가대표로서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투지가 엄청나다. 일본 선수들 역시 우리의 그런 자세를 인지하고 있다. 한일전 야구에서 일본이 패할 것 같으면 일본 대표팀 감독은 그것으로서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이유 따질 것 하나 없다, 졌으면 그만 둬야 한다.

 

적이 없는 나라들은 흐물흐물해진다. 유럽이 과거 두 번의 엄청난 희생을 야기했던 전쟁을 겪었고 이어서 미소간의 냉전이 끝나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유럽연합(EU)을 만들면서 더더욱 그렇다. 유럽의 경제는 더 이상 아무런 탄력이 없다. 그냥 늙어가는 힘없는 유럽이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한 것은 탄력 없는 나라가 되기 싫다는 전 국민적 의사표시였다고 본다.

 

최근 유럽의 일이 다소 수상하다. 하지만 이 역시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러시아 독재자 푸틴의 정치적 동기가 밑바탕이라 하겠다.

 

일본 역시 적이나 라이벌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한 때 거의 미국을 앞질렀다고 여겨지던 일본이 1990년 말 버블 붕괴 이후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역시 상전이었음을 확인한 일본이다. 대신에 중국을 라이벌로 하자니 이젠 너무 커져버렸고 우리 대한민국을 라이벌로 하자니 마음이 영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역시 국가적 방향설정이 어려운 것이고 결과 나라꼴이 지지부진하다. 그냥 ‘시크’한 체 하는 일본이다.

 

 

하지만 적의 존재가 늘 통치자에게 이득이 되진 않아서 문제 

 

 

하지만 라이벌 국가나 적국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를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통치자 또는 독재자에게 늘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중국 시진핑과 공산당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젊은 20-30대 연령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미국이나 외부 국가들에 대해 反感(반감)을 표출하면서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다. 왜 우리가 미국에게 양보해야 하느냐, 우리가 뭐가 모자라서 약한 자세로 일관하느냐 하면서 이른바 “국뽕” 정서가 너무 팽배해진 것이 시진핑과 공산당을 곤혹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어론 ‘환구시보’, 영어론 ‘글로벌 타임즈’라고 하는 중국 관영 신문이 있다. 영문판을 보면 늘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고 특히 타이완의 움직임에 대해선 대단히 민감하다. 늘 강경어조로 일관한다. 그런데 최근 글로벌 타임즈의 책임자가 글을 잘 못 올렸다는 비판을 받고 경질되었다. 논조가 미국에 대해 유화적이란 이유에서였다.

 

늘 강경어조의 대미비판을 ‘펌프질’함으로서 공산당 1당 독재의 명분으로 써먹었는데 그러다 보니 감정적이기 쉬운 젊은 층의 반미정서를 너무 키워놓았고 지금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이에 공산당은 젊은 층에 영합하는 차원에서 책임자를 경질했다.

 

 

북한의 반중정서 

 

 

또 한 가지 재미난 점은 북한 역시 상당한 反中(반중)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991년 말 소련이 붕괴한 후 북한을 지탱하는 외부에서의 원조와 도움은 사실상 중국이 맡아왔다.

 

북한은 한 때 고난의 행군이란 끔찍한 饑餓(기아)사태를 겪었다. 당시 통치를 맡은 김정일로선 그것을 반중적 태도를 통해 해소했고 그런 흐름은 현재 김정은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그 바람에 북한을 원조하면서도 툭-하면 북한으로부터 굴욕적인 언사를 듣게 되는 중국이다.

 

우리 역시 이래저래 알게 모르게 북한을 많이 도왔지만 조금만 삐딱하면 즉각 무지막지한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북한이다. 중국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현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 남북연락사무소를 장쾌하게 폭발하는 장면을 태연하게 연출하는 북한이다. 그러니 정부로선 그야말로 꽤나 곤욕이다.

 

북한은 잃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늘 강경 자세이고 벼랑끝 외교를 펼친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친 “절대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 하겠다. (물론 비밀이 보장되는 남북 간의 대화에선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고 부드러운 대화도 많이 오갈 것으로 추정한다.)

 

 

희망을 보여준 북한의 김정은 

 

 

김정은이 트럼프를 충동질하고 그로서 담판을 지으려던 시도는 참으로 기발했다. 여차하면 중국을 엿 먹이고 미국과 붙어서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발로 끝이 났다.

 

그간 북한은 미국을 비롯하여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너무나도 잃어버렸기에 미국은 먼저 비핵화부터 하자고 요구했고, 김정은으로선 일단 홀딱 벗고 들어가야 하는 판국이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패했다고 본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김정은의 진정한 속내를 읽어낸 것 같아서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본다. 최근 김정은은 “우리의 주적은 오로지 전쟁 그 자체”란 말을 했는데 그 말은 전쟁만큼은 하기 싫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니 희망적이다. 저도 자식을 낳고 살다 보니 죽긴 싫은가 보다!

 

게다가 최근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압박을 하는 형국이라서 기상천외한 옵션이 생겨나고 있다. 북한을 미국이 보호해주고 경제 원조와 개발은 우리 쪽에서 맡는 방안이다.

 

그게 실현될 경우 그간 북한을 하나의 완충지대로 삼아오던 중국으로선 엄청난 전략적 손실이 된다. 물론 당장 실현 가능성은 낮다 해도 그런 옵션이 있다는 것 자체로서 중국에겐 엄청난 압박이 된다.

 

북한이 미국의 피보호국이 된다면 당장 남북의 통일은 어렵겠지만 북한이 약간 친미적인 독재국가로 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독재 권력의 이양은 천천히 해도 되는 일 아니겠는가. 물론 시진핑은 그로서 체면을 구기고 失脚(실각)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의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미워해도 너무 미워할 일은 아닌 것이니 

 

 

이제 대충 정리하자. 오늘은 발전하고 분발하려면 라이벌이나 적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다. 미중간의 대립 역시 경제가 망가져버린 미국의 입장에서 가상 적국으로서 중국이 필요해진 것이고 황제 시진핑으로선 재임 중에 타도 미국을 통해 중국몽을 구현해가는 먹잇감으로서 미국이 소중하다.

 

미중간의 진짜 전쟁? 그런 얘기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혹시 쌍방 실수로 일어날 순 있겠으나 희박한 얘기이고 그저 적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도 얻은 것이 있다. 미사일 사거리 제한을 다 풀었고 그로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군사강국으로 올라서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글을 겨우 두 번 만에 썼다. 어지럼증이 그만큼 가신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났다.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에 온 이래 지금껏 살고 있다. 계산해보면 생후 18년 7개월을 부산, 그 이후 47년 8개월을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선친은 북한의 평양이니 나 호호당의 고향은 평양이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평양과 부산의 기질을 가진 서울 사람이다.

 

말투 역시 평양 방언과 부산 방언이 섞인 서울말이다. 여기에 처가가 제주도인 까닭에 약간의 제주 말이 섞여있고 전라남도 바닷가 쪽 친구들이 많다 보니 그 역시 어색하게 섞여있다. 남도 말은 특유의 맛깔과 발음의 편의성이 있어 자주 쓰게 된다. 나름 공식석상에선 서울말을, 편한 자리에선 부산 말과 전라도 말을 편하게 섞어 쓰고 때론 제주 말도 들어가며 부산 친구를 만나면 그 즉시 부산말로 둔갑한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당신의 정체성이 무엇이오? 하고 물어볼 것 같으면 아, 저는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아이입니다 하고 답할 수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아이, 이게 나 호호당의 정체성이다.

 

내 영혼이 다듬어지고 벼려진 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도로 가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거리를 재어보니 겨우 100 미터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엔 그 거리가 제법 길고 컸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3 겨울 대학 입시 직전까지 근 10년 동안 그곳을 일주일 중에 6일 정도를 오고 갔다. 거의 3천 번을 왕복했으니 그곳이 바로 ‘나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부산 부평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수동으로 이사를 간 뒤부터 그곳은 매일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고 좋아서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쉬는 날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난 으레 책방골목의 어느 서점에 있었다. 늘 책을 구경하거나 만지고 있었고 때론 책을 샀다. 책방골목의 모든 사장님들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오는 아이를, 나중엔 학생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진 매일 동네 만화방이었고 4학년 때부터는 늘 책방골목에 있거나 지나다녔다. 당시엔 헌책방 골목이라 불렀다. 물론 중고서적만 있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매일 지나다녀야 했던 이유도 있다. 그곳을 지나는 길이 집에서 용두산 공원 아래에 있는 중국무술 도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3 여름방학까지 일요일이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도장에 나가야 했다. 사부님은 중국 화교분이셨는데 무술 수련이 끝나고 수련생들이 돌아가고 나면 나는 혼자서 사부님 앞에 앉아서 한문을 배웠다.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시간이 없으면 책방 골목을 바람처럼 스쳐갔고 시간이 나면 어슬렁거리며 책 구경을 했고 여유가 있으면 책을 만지작거렸다. 뛰어갈 땐 책방 아저씨들이 야, 이놈아, 조심해랏! 하고 외마디를 던지셨고 어슬렁거릴 때면 익숙한 무관심으로 대하셨다. 책을 만지고 있으면 그거 괜찮아, 사서 읽지 그래 하고 꼬드기곤 했다.

 

친구들 또한 내가 집에 없으면 책방 골목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친구를 데리고 길 건너 편 부평동 시장 쪽의 중국집 ‘옥생관’이란 곳에 가서 짜장 곱빼기를 휘말아 먹곤 했다. 집안 경제사정이 넉넉했던 탓에 짜장면이나 우동, 짬뽕, 때론 탕수육까지 으레 내가 샀다.

 

당시로선 비싼 청요리였기에 친구들은 얻어먹는 재미 탓에 무시로 책방골목에 와서 나를 찾았다. (대만 화교인 옥생관 사장님은 넌 그게 그렇게 맛있냐? 하며 신기해하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엄지척을 날리곤 했다.)

 

책방골목에서 정말이지 무던히도 책을 많이 샀고 또 읽었다. 내가 莊子(장자)를 처음 만난 곳도 그곳이었고 삼국지연의 역시 그랬다. 일본 요시카와 에이지와 박종화 두 분의 삼국지가 그것이다. 당시 샀던 책 중에 지금도 열 몇 권 정도는 내 책꽂이에서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평생 읽고 또 읽은 책들이고 내 보물이기도 하다. 그 책들은 컴퓨터 인쇄가 아니라 삐뚤빼뚤한 활자 인쇄의 책들이다.

 

물론 헌 책방에서만 책을 산 것은 아니다. 그곳에선 주로 내 용돈으로 샀고 고가의 책이나 양장본은 엄마를 졸라서 용두산 공원 근처의 대형 서점에서 사곤 했다.

 

고2 때 대양서적(?)에서 나온 “세계사상대전집 50권”을 전질로 산 적이 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폼을 잡을 땐 정말 아우라가 있었다. 든 것 없는 너희들이 무얼 알겠니, 이런 정도는 읽어주셔야 철학과 사상을 논해도 논하지! 하면서.

 

그리고 정말이지 끔찍이도 비쌌던 세계문화사란 책, 하드카버에 책 두께도 권당 6센티미터는 되고 크기도 A4 사이즈의 5권짜리 전집을 샀다. 너무나도 비싸서 그 책만큼은 엄마와 타협을 본 끝에 책방골목에서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아마도 지금 물가로 치면 5권짜리가 대략 7백만원, 중고서적 또한 5백만원은 충분히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1960년대 당시 국내에서 나온 책 중에선 가장 최고가의 한정판 책이었다. 학원사 출간.

 

그 책을 열 번 이상 읽었다. 지금도 세계 역사에 대해선 당시의 熱讀(열독)을 기초로 그 이후 읽은 천 권 이상의 책을 합쳐서 내 머리 속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인생은 참 그렇다. 대학 진학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고 그 바람에 대학 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부잣집 도련님께서 학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苦學(고학)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 바람에 학비 마련을 위해 그 아끼던 내 영혼과도 같은 세계문화사 전집을 청계천 헌책방에 나가서 팔아야만 했다. 중고 가격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학비 마련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긴 했다.

 

나 호호당은 1974년도 학번이다. 당시 고려대 최고 커트라인의 법대 행정학과에 진학했지만 사실 나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없다. 학비 마련을 위해 그 책을 팔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 책을 넘기고 돈을 손에 쥐었을 때의 내 심정은 참으로 처참했고 무참했다.

 

지금도 가끔 고려대 동창회 사무실인가 그 비슷한 곳에서 연락처를 갱신하시고 동창회비를 좀 내시라고 하는 지로 통지문을 받곤 한다. 돈을 내지 않는다, 나름의 원한에 대한 소심한 복수심 때문이다.

 

사회생활하면서 고려대 동문이시군요! 하고 반가워하는 동문들을 자주 만났다. 물론 친해보자고 하는 행동이지만 그건 또 다시 치유되지 않은 내 깊은 상처를 자극하는 꼴, 나는 냉담한 미소로 응대하곤 했다. 세계문화사를 내게서 앗아간 고려대학교, 지금도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 졸업한 이후 취업 탓에 성적증명서를 발급받느라 고려대학교를 한 번 찾아갔을 뿐 그 이후론 그 쪽으로 지나간 적도 거의 없다.

 

사실 고려대학이 무슨 잘못이랴! 그건 내 사정이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이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고려대학교를 용서해줄 마음이 약간 생겨난다. 다시 놀란다, 졸업한 지 40년이 되었건만 지금까지도 응어리가 있다는 사실이.

 

그 책을 팔아야 했던 일은 보수동 책방골목의 아이였던 내게 너무나도 엄청난 참사였고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하고 은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여전히 아프다.

 

직장을 다니게 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내 영혼은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 머물렀고 다시 교보문고로 옮겨갔다. 그 또한 종로 교보문고에서 지금은 강남 교보문고로. 내 작업실에서 3분 거리에 있는 강남 교보문고는 사실 나 호호당 개인의 서재이다. 내가 현 작업실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고백하건대 1974년 부산을 떠난 이후 여태껏 부산을 겨우 네 번 들렀다. 그곳은 내게 喪失(상실)의 장소인 까닭이다. 그 사이에 딱 한 번 책방골목을 찾아갔었는데 너무 변해있었다. 내가 알던 아저씨들은 한 분도 거기에 없었다.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 이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전히 그곳에 보수동 책방골목이 있지만 ‘나의 책방골목’은 거기에 없었다.

 

늙은 나 호호당은 서울에 잘 살고 있지만 책방골목의 아이는 그 거리 어딘가에서 지금도 울먹이면서 서성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아이가 그곳을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언젠가 解寃(해원)의 굿마당을 차려주어야 하겠다.

 

글을 마치려 하니 문득 “양들의 침묵”이란 소설이 생각난다.

詩語(시어)는 침이 되어 가슴을 찔러오니

 

 

최근 시집을 한 권 받았다. 읽다 보니 가슴에 가시가 몇 개 푹-하고 찔러 들더니 깊이 박혔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본 이는 알겠지만 가늘고 예리한 침 끝이 피부와 근육 속으로 들어올 때 찌릿하고 새큰거린다. 굵은 침은 당연히 조금 더 묵직하다.

 

묘한 것은 그럼에도 그 부위가 시원하다는 점이다. 피부가 가려운 것은 긁으면 되지만 피부 아래 어딘가가 근질대거나 불편하면 방법이 없다. 그럴 때 침이 들어오면 그래, 거기야, 찔러주니까 아프지만 시원하네! 한다. 이번 시집의 느낌 또한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詩(시)를 즐겼다. 중학교 때 우연한 계기로 한문을 배웠고 암기력이 좋았던 까닭에 대학 시절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시, 이른바 唐詩(당시)를 몇 백 수와 英詩(영시) 수 십 편을 암송할 정도였다.

 

하지만 뭘 알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시라고 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그 맛과 깊이를 알아가는 것임을 지금에 와서 느낀다.

 

 

詩興(시흥)을 다시 일깨워준 시인 안상학 

 

 

자연순환운명학을 다듬어갈 무렵 한 시인을 만났다. 안상학, 공부하러 왔는데 강의 후 회식자리를 통해 많이 친해지게 되었고 또 그 분의 시가 너무 훌륭해서 매료되었다. 杜甫(두보)의 시를 연상케 하는 그의 시가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그에게 자연순환의 이치를 알려 주었고 그는 내게 한동안 잠들어 있던 내 안의 詩興(시흥)을 강렬하게 일깨워주었다.

 

안상학 시인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인, 그 바람에 안동 가송리란 곳, 그야말로 안동의 絶景(절경)을 안내해주었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이후 나는 다시 맘껏 시를 즐기기 시작했고 지금껏 즐겨오고 있다. 중국 고금의 시인들과 우리와 일본의 시들, 멀리 서구의 시인들, 최근엔 릴케가 남긴 “두이노의 비가”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 릴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독일어를 다시 공부하기도 했다. 일본어도 한동안 공부했는데 그 역시 일본의 시를 제대로 읽어보기 위함이었다.

 

詩人(시인), 그들은 우리가 평소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들, 사람들, 사물들을 갑작스럽게 神靈(신령)한 그 무엇으로 소개시켜주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오늘날의 진정한 靈媒(영매)인 셈이다.

 

 

오래 전이 詩語(시어)들이 다시 생각나서 

 

 

시적 감수성이 되살아나자 오래 전에 내다버린 많은 시집들, 특히 꽤나 심취했던 오규원 시인의 詩語(시어)들이 귓전에 다시 들려왔다. (여전히 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 들렸으리라.)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제목을 다시 찾아보니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이다.)

 

나 역시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런 잠 이루지 못하는 밤 아니 새벽에 이 말들이 귀에 들리고 울렸다.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하는 저 말, 그래 그게 맞다, 조진 몸이면 더 조진다 한들 뭔 상관?, 그러자 또 들려왔다, “詩(시)는 敗北(패배)이니 승리여 오해말라”는 시인의 통쾌한 말도 들려왔다.

 

오규원 시인의 시들은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라고 일러 주었다.

 

그랬다, 나 호호당의 삶 역시 여느 사람처럼 조금도 근사하지 않다, 근사할 이유가 전혀 없는 내가 시를 좀 즐기며 산들 더 밑질 일도 없을 것이고 그렇기에 앞으로 승리란 명패가 붙었다고 해서 크게 관심 두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을 했다.

 

산다는 것, 삶이라고 하는 것은 승리라든가 패배라든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다짐은 일종의 해방, 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수십 억 인간들 중에서 나 호호당이 겨우 내가 나라는 전혀 근거 없는 이유만으로 승리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패배할 것도 없다. 그냥 살다 가는 것, 그게 그냥 가장 좋다, 하고 다짐했다.

 

오규원 시인의 시들을 한참 좋아하던 시절은 1980년대 전후였는데 그게 30년이 흘러 내 속에서 되울림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편해졌고 다시 많은 시인들을 시집을 통해 만났지만 시흥을 다시 촉발한 계기는 안상학 시인과의 만남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냥 시를 즐겼다. 편히, 거리낌 없이.

 

 

거들떠 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하여 

 

 

그러다가 며칠 전 또 한 권의 좋은 시집과 만났다. 시인의 이름은 박인숙, 시집의 제목은 “침엽의 생존방식”이었다. 작년 8월에 나온 시집이다.

 

시집 제목이자 그 안에 실린 시 “침엽의 생존방식”을 여기에 옮겨본다.

 

활엽을 꿈꾼 시간만큼 목마름도 길어

긴 목마름의 절정에서 돋아난 가시들

침엽은 햇살도 조금 바람도 조금

마음을 말아 욕심을 줄인다

대리운전하는 내 친구 금자

밤마다 도시의 휘청임을 갈무리하는 사이

보도블록 위에 포장마차로 뿌리내린 민수씨

그들은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바람 속에 붙박여 시간을 견디는 일이

침엽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의 몫이므로

뾰족이 가둔 눈물이 침엽의 키를 늘이고

세월을 새겨나가는 것

그들의 계절에는 극적인 퇴장

화려한 등장 따위는 없다

한가한 날 고작 흰 구름 몇 가닥

바늘 끝에 걸쳐두거나

흐린 겨울 하늘이 너무 시릴 때

눈꽃으로 피사체를 만들어보거나

혹한의 계절에도 홀로

숲의 푸른 내력을 지키는 건 침엽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생존방식이 숲을 깨우고

바람의 깃털을 고른다

햇살도 이 숲에선 금빛으로 따끔따끔 빛난다

 

그렇다, 우리 모두 넓적하고 두툼한 활엽을 매달고 햇빛을 듬뿍 받으며 살았으면 한다. 하지만 현실은 기껏해야 가느다란 침엽이 고작인 경우도 있다. 아니 흔하다. 이에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살긴 살아야 하니 방법은 욕망을 안으로 말아 들인 뒤 시간을 忍苦(인고)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내 팔자지 뭐 하면서.

 

침엽을 매달고 태어난 그들은 박수갈채와 함께 피날레를 장식하는 일도 또 짜잔-하고 멋지게 나서는 일은 없다, 관심의 바깥이다. 하지만 온 천지에 엄혹한 겨울이 찾아들었을 때 숲의 푸름을 지켜가는 이들은 오히려 침엽, 침엽수들이다. 겨울 빈 숲에 찾아든 바람도 재우고 햇빛도 침으로 찔러서 따끔따끔 광채를 더한다, 침엽수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된다고 본다. 그런 까닭에 나 호호당은 왜 모기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왜 지구상에 있어야 하는지 늘 묻게 된다.

 

물론 이런 생각은 인간의 입장이다. 그런 인간의 처지에서 볼 때 창조주가 있다면 그 분의 失手(실수)라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실수를 가장한 더 깊은 뜻이 담겨있을 수도 있겠다. 반대로 창조주의 ‘있음’을 부정하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 모두에겐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해 존재의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그런 게 있었어? 하고 궁금해 하실 것도 같다. 그래서 알려드린다. 그 능력의 이름은 바로 ‘사랑’이라고.

 

방금 소개한 시 한 편은 평소 우리 눈에 밟히는 않는 주변의 존재들도 좀 보아주기도 하고 만져주기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침엽으로 찔러오고 있다. 찔렸으면 당연히 아파야 한다. 그래야만 신경이 살아있고 그로서 죽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제 마무리를 한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작고한 오규원 시인이다.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

 

하지만 그 말을 이렇게 정정해야 하겠다.

 

詩(시)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우리의 오롯한 삶만이 담겼다고.

 

(그저께 반가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안상학 시인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안상학 시인이 카톡으로 알려왔다. 너무 반가워서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최근 이석증으로 몸이 불편한 탓에 당장은 참는다, 다 나으면 올 겨울 쯤 안동 가송리로 내려가서 안동소주를 놓고 또 다시 밤을 새워 고금의 일을 얘기하고 시에 대해 맘껏 풀어볼 생각이다.)

 

글 한 편 쓰고나니 다시 조금 어지럽다. 쉬어야 하겠다. 

 

상쾌한 하늘을 보며 아, 시월이구나! 했는데 현재 시각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고 밤 10시 14분이다. 늘 시월은 빨리도 잘도 지나간다. 이번 시월은 23일 상강부터 하늘에 구름이 보이지 않았는데 마지막 날은 종일 흐렸다.

 

늦가을 정취는 맑은 날도 좋고 흐린 날도 좋으며 비가 내려도 좋다. 시월은 어쨌거나 모두 정취가 있다. 그러니 빨리 가나 보다.

 

한 해를 하루로 치면 시월은 戌時(술시),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 사이, 이미 해는 졌고 누군가에겐 나이트 가든 파티의 시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가로등 등불을 어깨에 받으며 쓸쓸히 걸어가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절정의 시간이고 누군가에겐 悲感(비감)의 시간이다.

 

비감, 슬픈 감정이란 말이다. 이런 말을 자판으로 쳐놓고 보니 문득 “백년의 고독”이란 문구가 떠오른다. 그런데 두 개의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소설 제목이고 또 하나는 같은 이름의 일본 소주가 그것이다.

 

어느 날 중국 출장을 다녀온 친구가 술 한 병을 주었다. 술 이름이 百年孤獨(백년고독)이었다. 바이니엔꾸두? 그냥 중국 백주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일본 술이었다. 허 참! 중국 사람들이 일본 술을 마시다니 거 신기하네! 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아직도 그게 일본 술이란 것을 모르고 지낼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거 소설 제목 “백년의 고독”을 따서 지은 거 아닌가? 싶었다.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랬다. 이름 잘 지었네, 고달프고 외로울 때 한 잔 하란 얘기겠지, 좋은 이름이야.

 

이미 전에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은 바가 있었는데 혼란스럽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서 엄청 헷갈렸다. 그런데 문장 속에 마구 던져지는 대사와 묘사들은 엄청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가볍게 그냥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읽다가 말았다. 이거 잘 못 낚이면 한참 가겠구나 싶어서 그만 두었다. 정확한 표현으론 빠져나와야 했다.

 

왜? 내가 머나 먼 남미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까지 느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다 읽지도 않았지만 소감을 말하면 삶이란 표현할 길 없는 고독이구나 했다. 그 이후로도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게 술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또 다시 ‘백년의 고독’과 만났으니.

 

그러다가 몇 달인지 아니 한 두 해 지나선지 잘 모르겠지만 술을 개봉해서 한 잔 마셨다. 작업실이었다. 이런 술은 혼자서 마셔야지, 당연히 獨酌(독작)을 해야지만 그래도 술 이름에 걸맞는 예우가 아니겠어! 하면서 두어 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테이블 맞은 편 서가에 소설 “백년의 고독”이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서 책을 가져왔다 들쳐보았다. 역시 매혹적이고 혼란스러웠다. 이건 아니야, 그만 두자 하면서 다시 다른 책들 사이에 끼워놓았다. (나중에 그 책을 폐기했다, 다시 읽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그리곤 창밖을 내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름이었는데 갑자기 바깥 하늘이 겨울처럼 느껴졌다. 술기운이 돌자 이름답게 외로워졌던 모양인데 그게 寒氣(한기)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춥고 외로워’가 함께 다니는 말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당시의 풍경과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수도 있으리라. 언젠가 얘기했지만 나 호호당은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을 믿지 않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獨白(독백)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얼마 전 어떤 여자가 술을 한 병 줬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하는 영화 대사였다. 홍콩의 왕가위 감독이 만든 “동사서독”이란 영화가 그것이다. 왜 이 대사가 떠오르지? 하고 생각해보니 백년고독과 醉生夢死(취생몽사), 나름 맥이 연결되는 탓에 그랬던 모양이다.

 

백 년 동안 외롭게 지낼래 아니면 취해 살다가 꿈꾸듯이 죽을래? 뭘 택할 거니? 누군가 내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답했다. 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백년고독으로 가야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는 자문자답이었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여름날이 겨울처럼 추워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三伏(삼복)에 生寒(생한)이라, 복더위에 추위를 느끼면 그건 참 그런데 싶다.

 

이제 11월 1일이 되었다. 시월은 갔다. 2021년의 시월은 영원히 저편으로...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신기해한다.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이건만 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되나? 사라진 과거이고 아직 오지도 않았고 아예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닌가. 미래가 온다면 그건 이미 현재일 터인데.

 

아무튼 아쉽다, 시월이 갔다는 것이. 그래서 위안해본다, 11월의 날들도 시월처럼 좋을 것이라고, 최소한 11월 7일의 입동 전까진 戌月(술월)이니 사실상 시월과 같을 것이라고. 아직 일주일씩이나 남았지 않은가.

 

저녁 무렵에 본 단풍이 생각난다.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그리고 싶어진다. 사실 늘 그림을 그리거나 그릴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여름에 겨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겨울에 여름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공연한 말이 아니다. 가을에 봄의 벚꽃 피는 정경을 그릴 것 같으면 분홍꽃이 차갑고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러면 묻곤 한다. 제대로 벚꽃을 그렸지만 가을이라서 보는 내 눈이 쓸쓸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그려지는 건지 그걸 모르겠다.

 

겨울 말미가 되면 계절에 지친 나머지 화창한 봄날을 그려보곤 한다. 그런데 그 그림을 나중에 늦봄이 되어 다시 펼쳐보면 ‘지나치게’ 봄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 봄은 분홍의 벚꽃만 피는 것도 아니요, 마냥 화창하고 화사한 것만은 아닌데 겨울에 그린 봄 그림은 늘 ‘오버’를 한다.

 

앞에서 술 얘기를 꺼내다 보니 술이 한 잔 마시고 싶어졌고 이에 냉장고에 가서 뒤져보니 백세주가 조금 남아있다. 가져와서 한 잔 마신 뒤 다시 한 잔을 잔에 채워놓았다. 엷게 썰어놓은 단무지 한 점을 씹으면서 보니 접시 위의 노란 단무지가 은행잎처럼 보인다. 역시 가을이구나, 단무지가 은행잎으로 보인 적은 난생 처음이다.

 

노란 물을 들인 달고 짭짤하며 물기 빠진 무 슬라이싱, 꽤나 일본적이다. 술 안주거리로도 충분히 걸작이다.

 

겨울 말미가 겨울이 지루하고 여름 말미면 여름아, 어서 가라 하는데 왜 가을은 가는 게 아쉬울까? 그러니 가을은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다. 봄은 생기발랄한 맛도 있지만 窮氣(궁기)도 보인다. 하지만 가을은 그저 풍요롭고 화려하다. (그런데 약간은 의심스럽다, 이런 생각은 아직 내가 가을 안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시월이 갔다, 그러니 이제 슬슬 한 살 더 먹을 준비를 해야 하겠다. 시월은 참 빨리 지나간다.

가을이 되면 연밭은 처량해진다. 

 

 

가을장마 제법이더니 어제는 약간 흐렸고 오늘 역시 가는 비가 조금 내린다. 빨래가 마르지 않아 마나님께서 툴툴댄다.

 

이번 비가 신기한 것은 북태평양에서 들어오는 비구름이 아니란 점이다. 인도와 미얀마 사이의 벵골 만에서 펌프질이 된 비구름이 중국의 운남, 보이차로 유명한 그곳을 지나 쓰촨성의 충칭, 그리고 양자강 남안으로 흘러와선 상하이 부근에서 서해로 들어와 비를 뿌리고 있다. 동남풍이 아니라 서남풍인 것이다.

 

초가을 비가 내릴 때면 으레 시든 연밭이 생각난다. 처서가 지났으니 이제 연꽃도 지고 연밭도 시들 때가 되었을 것이다. 꽃과 잎 다 지고 물위로 뻗은 가지만 남은 연밭은 참으로 처량하다. 비가 약간 거셀 것 같으면 수면 위로 빗방울이 다시 튀어 오르면서 희부연 물안개가 서린다. 볼 만 하다.

 

 

시절의 영화를 뽐내는 물가의 풀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연못 주변의 풍경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물가의 풀들을 모두 애호한다. 약간 소개한다.

 

떠다니는 놈들이 있으니 뿌리도 물 안에서 떠다닌다. 흔히 부평초라 불리는 개구리밥, 생이가래, 부레옥잠, 자라풀 같은 놈들이다.

 

그런가 하면 뿌리는 물속 땅에 내리고 물위로 떠있는 아이들도 있다. 수련이나 마름, 가래, 순채, 이런 아이들인데 수련은 정말이지 사람을 매혹시킨다. 모네의 그림을 연상해보라, 환상이지 않은가.

 

물가에서 자라는 놈들 중엔 창포와 갈대, 부들, 물억새가 있다. 그 중에서 창포와 부들을 유난히 좋아한다. (부들을 말려서 방석을 만들면 그게 바로 부들방석이니 그야말로 부들부들하다, 쿠션이 아주 좋다.) 물가 근처엔 더러 수선화도 보인다.

 

물가나 연못 위엔 연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놈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한 계절을 치장한다. 時節(시절)의 榮華(영화) 아니겠는가!

 

비오는 날의 연못이 운치로는 으뜸이지만 밝고 화창한 여름날의 연못 역시 대단히 멋지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수면 위에 어려서 환상적이다.

 

꽃 지고 잎사귀 말라서 비틀어지거나 떨어지고 그저 물 위로 솟은 가지만 남은 연밭은 그 시절이 지났음을 알린다. 感傷(감상), 보노라면 마음이 슬퍼진다. 물론 늦가을에도 석양빛을 받아 은빛 광채를 뿌리는 억새와 갈대가 있지만 그건 사실 게임 끝난 뒤의 여흥을 위한 갈라쇼(gala show)일 뿐이다.

 

 

좋아하는 시 한 수 

 

 

연밭 얘기로 시작했으니 나 호호당이 좋아하는 漢詩(한시) 한 수를 소개해볼까 한다.

 

사실 詩(시)란 물건은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가 없다. 그 언어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걸 그대로 느껴야지 번역하게 되면 그건 시의 魂(혼)이 날아가고 그저 유해만 남는다.

 

하지만 유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나 호호당이 번역한 것부터 들려드린다. 제목은 水閣(수각)이고 중국 송나라 시절의 張耒(장뢰)라고 하는 문인이 썼다.

 

장맛비 길게 이어지니 연못물 찰찰 넘쳐나려 하고

긴 여름 처마 밑 창가엔 서늘한 공기 넉넉하여

근무 중 잠시 눈을 붙였더니 창랑의 꿈을 꾸었는데

누운 채 연밭에 이는 바람소리 빗소리를 듣노라.

 

원문은 이렇다.

 

積雨荒池水欲平,軒窗長夏有餘清. (적우황지수욕평 헌창장하유여청)

公餘一枕滄浪夢,臥聽風荷受雨聲. (공여일침창랑몽 와청풍하수우성)

 

풀이해보면 이렇다.

 

장맛비 길게 이어지니 말랐던 연못에 물이 넘치려하고 창가에 다가가니 서늘한 바람 넉넉히 일고 있구나, 근무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낮잠을 잤더니 창랑의 꿈을 꾸었다네, 깨어났지만 딱히 바쁘지도 않고 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그냥 누워 있는데 창밖 저편 연밭에는 바람이 스치고 못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려오네, 이런 내용이다.

 

일곱 자로 된 구절의 마지막 소리가 平(평), 淸(청), 夢(몽), 聲(성)이니 받침소리가 모두 ‘이응’으로 맺고 있어 운율이 좋다.

 

 

滄浪(창랑)이란 단어

 

 

사실 滄浪(창랑)이란 단어는 중국 문학사에서 너무나도 유명하다. 詩經(시경)과 함께 중국 고대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楚辭(초사)에 실린 굴원의 漁父詞(어부사) 속에 ‘창랑의 물’이란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창랑물 깨끗하면 갓끈을 씻고 창랑물 더러우면 발이나 닦으렴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혼자 고고하게 놀다보면 인생 피곤해진다, 너!, 하는 경고성 멘트이다. 굴원은 그 점을 잘 알면서도 에이 더럽다!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절개이고 지조이다.

 

어부사에서 굴원이 말한 창랑의 물은 오늘날 중국 후난성의 강인 바, 세월과 함께 점점 먼 거리로 나가서 중국 동해 바다, 즉 우리나라로 치면 서해 그리고 남중국해의 멀고 먼 섬으로 바뀌고 그 섬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식으로 바뀌어왔다. 滄浪洲(창랑주)가 그것이다. 서해 바다의 三神山(삼신산)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滄浪(창랑)이라 하면 중국인들에게 바다 멀리 푸른 물결 흰 파도가 이는 이상향을 뜻한다.

 

또한 창랑은 滄浪亭(창랑정)으로 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창랑정은 약 3천평 정도의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저택이다. 상하이 서쪽에 있는 쑤저우에 있다. 쑤저우는 청나라 시절부터 이른바 번화로운 江南(강남)을 대표하던 도시로서 운하가 사통팔달되어 있다. 쑤저우는 청나라 시절의 뉴욕이었다.

 

庭園(정원), 중국식 표현으론 園林(원림)을 갖춘 대저택들이 쑤저우에 가면 참으로 많은데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더불어 창랑정은 쑤저우 4대 정원으로 손꼽힌다.

 

창랑정이 더 유명해진 것은 바로 중국 수필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浮生六記(부생육기) 속에 언급된 때문이기도 하다.

 

관련해서 나 호호당은 어쩌다가 중국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부생육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냐고 물어보곤 한다. 아니오, 모르는데요, 하면 속으로 저 양반 허세를 부리네, 하고 생각한다. 읽었다고 답하는 이가 있으면 음- 좀 그렇군 하고 여긴다. 그러다가 혹시 원문으로도 읽으셨는지요? 하고 물어본 뒤, 예-하는 답을 들으면 중국문학 전문가로 인정해준다.

 

그 정도쯤 되면 唐詩(당시)나 宋詞(송사) 역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며 唐宋傳奇(당송전기)에도 밝을 것으로 생각해도 별 문제가 없다.

 

오늘날의 중국은 대국주의를 내세우는 탓에 시쳇말로 ‘어그로’를 끌고 있고 그 결과 우리들에게 영 별로인 나라가 되고 말았다. 모두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의 잘못이다. 하지만 청나라 중기까지의 중국은 그야말로 문화대국으로서 우리에게도 좋은 영향을 많이 끼쳤다. 事大(사대)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나 호호당은 현대 중국에 대해 별로 얘기하지 않는다. 시시한 나라로 보기에 관심이 없다.

 

창랑이란 단어는 국내의 경우 유진오 선생이 남긴 “창랑정기”란 단편소설이 있다. 소설 속의 창랑정은 오늘날 마포구 당인동에 있는 서울화력발전소에 있었던 조선말 고급 관리의 저택이다. 물론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유진오, 대단히 명석한 분으로서 젊을 땐 맑시스트였고 법학자였으며 일제 말기엔 친일 문학인이었으며 해방 이후엔 우리나라의 제헌 헌법을 기초했으며 이승만 정권 당시의 토지개혁에 큰 공을 세웠다. 아울러 나 호호당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분이며 박정희 시절엔 신민당 총재를 지냈으니 그게 참 복잡하다.

 

(이처럼 우리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진흙탕이라 명료하게 정리하고 평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공부하고 연구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 슬슬 마칠 때가 되었는데 조금만 더 얘기해본다.

 

 

주돈이의 애련설

 

 

흔히 성리학이란 불리는 신유학의 주요 창시자이자 “태극도설”을 남긴 “주돈이”는 연을 몹시 사랑한다 해서 愛蓮說(애련설)이란 시를 남겼다. 유교의 가치관을 연꽃을 통해 표현한 시이다. 나 역시 연꽃을 좋아하지만 물가의 모든 풀은 다 사랑한다.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젊은 시절엔 돈을 많이 벌어서 멋진 연못을 만들고 주변에 다양한 풀과 꽃을 심고 멋진 정자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나 호호당의 중요한 인생 목표였다. 그 바람에 남원 광한루의 연못도 봤고 부여 궁남지도 구경했으며 기타 여러 곳의 연못과 삼신산을 구경했다. 나 호호당도 화가이니 만일 그게 성취되었다면 한국의 모네가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물론 내 그림 수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연꽃, 그냥 蓮(연)이라 하자.

 

조선왕조가 남긴 아름다운 궁전인 창덕궁의 안쪽 정원에 가면 무엇보다 뛰어난 부용지와 부용정이 있다. 더 깊숙한 곳에 가면 단아하고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연못 이름은 애련지이고 정자 이름은 애련정이다. 이 정자는 조선 숙종, 장희빈의 남편이었던 그 유명한 양반이 지었다. 애련지, 애련정, 모두 주돈이의 애련설에 따왔다고 한다.

 

창덕궁엔 그리고 관람지도 있다. 묘한 것은 춘당지는 창경궁 영역이란 점이다.

 

그리고 경복궁엔 가면 향원지와 향원정이 있는데 이 역시 주돈이의 애련설 중에 “향기가 멀리 간다”는 문구에서 따왔다. 경복궁엔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경회루가 있는 연못이 있다. 합쳐서 6개의 연못, 그 주변의 누각과 정자는 조선 왕조 시절 정원 양식의 白眉(백미)라 하겠다.

 

 

연못이란 연꽃이 있는 못을 뜻한다. 

 

 

그리고 참! 잊을 뻔 했다. 연못이란 말 자체가 연을 심어놓은 못, 한자론 蓮池(연지)가 된다는 점 알려드린다. 연못에 연꽃이 없다면 그건 연못이 아니라 그냥 못인 셈이다.

 

이제 파란 하늘 흰 구름도 보고 싶다. 장마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