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사라지고 고향도 없어졌으니 

 

 

앞글에서 가족이나 가정 등등의 말이 오늘에 이르러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전통적 의미에서의 가족은 이미 소멸되고 해체되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아울러 씨족집단 즉 가족이 살고 있던 곳이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던 故鄕(고향)이었기에 이젠 사실 고향마저 소멸했다는 말도 잠깐 했다.

 

그 결과 호적법이 폐지되고 그 대신에 핵가족을 전제로 하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게다가 상속에 관한 법률인 가족법도 역시 그 적용이 크게 변해가고 있다. 가족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은 해체가 천천히 진행되어 왔기에 

 

 

그렇다면 서구 또는 서양은 어떨까? 하고 알아보면 정도는 달라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와는 달리 몇 백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정서적인 스트레스가 우리보다는 크지 않았다는 얘기.

 

가족을 뜻하는 것이 패밀리(family)인데 그 원뜻은 다소 놀랍게도 그 집안의 노비나 하인을 뜻하는 famulus란 라틴어에서 왔다는 점이다. 그곳 역시 가족들과 그 노비들로 이루어진 집단, 우리의 예전 가족과 뜻이 비슷하다. 영어의 하우스(house) 역시 원래는 귀족 씨족 집단이 거주하는 공동체의 공간인 일종의 장원을 뜻하던 말이었다.

 

우리는 아직 閥(벌)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대기업을 이루거나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집단의 사람들을 일러 재벌가라고 하고 있다. 그저 예전 단어의 殘在(잔재)일 뿐이다.

 

 

가족 안전망의 붕괴

 

 

이제 가족의 해체가 가져온 결과 특히 가족 안전망의 붕괴에 따른 현실을 얘기해보자.

 

독일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의 이론으로서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와 이익사회(게젤샤프트)가 있다. 오늘날의 현상은 공동사회 특히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사회가 거의 소멸되고 그것이 계약으로 맺어진 이익사회로 대체되었다고 하겠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공동사회의 대표적인 것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었다. 물론 같은 핏줄이라고 해서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지는 않았고 가장 큰 몫은 宗家(종가)가 물려받아 관리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혈연관계라 해도 직계부모의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이 거의 전부이고 친척 간엔 이익을 공유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예로서 부자 삼촌이 있다고 해서 조카가 혜택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부자 삼촌의 자녀는 금수저일 수 있어도 그 금수저의 사촌 동생은 흙수저인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친척이 부자라고 해서 그 득을 보긴 정말 어렵다, 요즘말로 짤없다.

 

예전에 가족의 일원이면 차별이 있긴 해도 그 자체로서 안전망이자 복지의 역할을 했는데 그 잔재가 바로 오늘날 결혼이나 장례 시의 賻儀(부의)이다. 예전 시절 종가가 부유하고 윤택할 경우 그 먼 친척 즉 가족의 일원이 빈한하면 체면 때문에라도 나름 돌봐주었다. 종가집 며느리는 손이 크고 볼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전엔 가문이나 가족, 문중이 개인의 능력보다 더 중요했다.

 

오늘날엔 가족이 없으니 안전망이 철저하게 사라졌다. 그저 핵가족 안에서의 안전망이고 복지가 사실상 전부이다.

 

 

핵가족 안에서마저 안전망이 붕괴되고 있다는 점

 

 

그런데 핵가족에서 부모 중에 한 명, 특히 남편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 집안 사정은 급격하게 어려워진다. 아내가 중병에라도 걸리면 아빠가 직장 일도 하면서 자녀도 돌보고 아내 병 치료 비용도 대야 한다. 사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혼을 할 경우 핵가족 내의 안전망도 사실상 무너진다. 예전엔 문중에서 공동으로 아이들을 돌봤다. 무수한 숙모와 숙부, 때론 많은 이모와 이모부들이 부모 노릇을 했다. 그렇기에 약간의 그늘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 장성하면 당연히 그 은혜에 보답했을 것은 물론이다.

 

 

비정상이 정상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최근에 보면 자녀가 독립해서 가정을 이루고 나가면 그 뒤에 부모를 돌보는 경우도 사실상 없다. 이는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공정치 않다. 이치에 맞지 않다. 자녀들을 키웠다면 나중에 자녀들로부터 부양을 받는 것이 옳은 이치이고 도리이지 않는가.

 

이렇게 된 데에는 오늘날 부모들의 잘못이 크다. 내가 낳은 자식 잘 되고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하다, 하지만 훗날 키워준 자녀에게서 일부라도 돌려받을 생각은 해야 그게 정상이고 이치이다.

 

이렇게 된 바탕을 보면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1980년대까지 먹고 살기가 정말 너무나도 어려웠기에 우리 부모들은 어차피 힘든 마당에 자녀 너희들이라도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으로서 고생한 恨(한)을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다.

 

좋게 보면 숭고한 희생정신이라 하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오늘날 무수히 많은 가난한 독거노인과 고독사를 양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부모의 은혜마저 나 몰라라! 하면 어떤 세상이 되는가!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다. 세상에 공짜 없는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자녀가 훗날 받은 것의 상당 부분을 갚음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의 膏血(고혈)을 빨아먹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부모의 고혈을 당연시하면서 빨아먹은 자녀가 성장해서 사회에 나가면 일반 타인들에겐 어떻게 행동할까? 타인의 등골을 빼먹고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지!

 

孝(효)라든가 유교 정신을 떠나서 이건 아닌 것이다. 시대의 새로운 정신, 공정한 마인드와도 맞지 않다. 나 호호당 생각에 우리 사회가 극도로 살벌해진 바탕에는 나만 잘 살고 잘 누리면 장땡이란 극도의 이기심이 놓여 있다고 여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견 역할을 하는 중년의 부모들, 좀 윤택하게 살아가는 중산층 또는 중상층을 한 번 살펴보자.

 

자녀 교육에 엄청난 비용을 들이붓고 있다, 스스로도 골프 좀 쳐야할 것 같고 산티아고 순례도 힐링차 다녀와야 하겠으며 차도 가능하면 뱀인지 BMW인지 그런 것도 좀 빼서 다녀야 할 판이다. 그러니 연로한 부모님에게 크게 갚음할 돈은 어렵고 그저 명절에 얼굴 내밀고 가끔 온라인으로 용돈 보내드리는 것이 고작이다. 다른 데 쓸 곳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아직은 孝(효)라고 하는 관념이 남아있어서 일종의 양심 해결이라 하겠는데 지금의 자녀들이 훗날 그 정도 양심 해결이라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지금의 기성 중년층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왜 나를 금수저로 키워주지 못했느냐 하면서 원망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라 본다.

 

 

핵가족마저 흔들리고 있는 오늘의 세상

 

 

이처럼 가족을 통한 복지와 안전망은 오늘에 이르러 철저하게 붕괴되고 핵가족마저 흔들리고 있다. 

 

명절에 고향의 부모님을 찾는 것 역시 며느리 입장에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친정 부모도 독립하면 거의 타인처럼 변해가는 판국에 시댁 부모님이 한 재산 움켜쥐고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명절에 찾아갈 이유가 없다. 반가운 일이라곤 전혀 없고 가고 오면서 힘만 든다. 그러니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족의 해체는 지금도 맹렬한 속도로 진행 중이고 가족 집단이 안전망을 제공하던 곳으로서의 故鄕(고향) 역시 이젠 관념 속 존재일 뿐이다.

 

형제일지라도 각자 독립하고 나면 각자의 능력으로 살아갈 뿐이고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을 볼 일도 거의 없다. 그나마 명절 때 한 번 보는 정도이니 오가는 情(정)도 별로 없다. 그러니 사촌지간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무슨 정이 붙겠는가. 앞으론 더더욱 그럴 것이다.

 

情(정)이 무엇인가? 이익을 주고받음에 있어 손익을 철저하게 따지지 않는 게 정이라 본다, 나 호호당은 그렇게 생각한다.

 

 

무정하고 살벌해진 우리 대한민국 

 

 

그런데 오늘날 가족의 해체로 인해 부모가 돌아가시면 형제 사이라도 사실상 남남인 판국이니 가족 안전망은 철저하게 사라졌다. 정도 사라졌다. 그저 살벌한 우리 대한민국이다.

 

돌이켜보면 2012년 대선 당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복지였다. 다른 말로 사회안전망이 가장 큰 이슈였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논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나 호호당의 생각은 이렇다. 그 이전 성장하던 시절엔 각자 열심히 좀 하면 돈 많이 벌어서 본인도 누리고 자녀들도 잘 키우고 부모님께도 잘 해드리겠다는 희망 혹은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이 되자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각자살기만으론 너무나도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던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는 생각이다.

 

 

복지 논쟁의 바탕에 깔린 생각

 

 

그러자 갑자기 복지논쟁, 이젠 나라가 나서서 해결해주시오 하고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입장에선 그 역시 모순이다. 복지비용을 늘리고 싶어도 저성장 국면이 되면 세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장차 인구가 줄어들 것이니 미래는 더더욱 어둡다. 남은 것은 이른바 가진 자들로부터 더 뜯어내거나 국채발행을 늘려 미래의 세수를 미리 앞당겨 쓰는 적자재정이 전부이다.

 

그런데 때마침 미국이 무제한 양적완화를 했으니 돈 풀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마구 적자재정을 행해 치닫기 시작한 현 정부이다. 아마도 다음 정부는 더더욱 미친 듯이 적자재정을 늘려갈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가 갈구하는 바람직한 기업은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다. 이는 옛날로 치면 종가집에서 넉넉한 인심을 베풀길 바라는 심정과 동일하다. 오늘날 복지와 안전망 역할은 일자리가 해주고 있는 셈이고 일자리를 베푸는 것은 기업인 까닭이다. 그러니 사회적 기업, 기업의 이익보다 직원들의 복지와 안전을 책임져주는 기업이 많아지길 바라는 심리의 반영이라 하겠다.

 

틀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란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바뀌었고 물질적 풍요는 비할 바 없이 커졌지만 먹고 사는 이치는 예전에 비해 어떤 면에선 더 가혹해지고 살벌해진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가족이 해체되었으니 각자살기이고 고향이 사라졌으니 심적으로 기댈 데도 없다, 그저 내 몸뚱이 하나가 밑천이다.

 

그러니 복지! 복지! 하면서 복지타령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국가가 적자재정을 통해 복지비를 마냥 늘려갈 수 있을까? 참, 그게 문제로다. That is the question!

오늘에 이르러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점

 

 

최근 올리는 글들은 다소 무겁다. 한 해의 가장 추운 1월 丑(축)월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던 주제들인 바, 우리 한국 사회의 과거 60년 이상에 걸친 근대화와 변화의 과정에 대한 글들이란 점에서 그렇다.

 

이번에는 우리 사회의 가족 해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내적 모순이 날로 첨예화되면서 빈부의 격차를 말하는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깊어가고 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그 정도를 돌이키기 어려운 경지까지 몰아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팬데믹이 끝났을 때 빈부의 격차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가 있을지 솔직히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가족의 해체 그리고 사회안전망

 

 

이에 사회안전망과 복지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예전 근대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선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의 역할을 맡았던 것은 바로 가족이라고 하는 테두리였다. 가족이야말로 각종 위험이나 질병, 빈곤 등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방벽이었고 울타리였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가족이 맡고 있었다는 이 말에 대해 아마도 글쎄 그럴까? 싶은 독자들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금부터 이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 그게 그랬었구나! 하고 수긍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던 가족이란 어휘 

 

 

보통 우리가 가족이라 하면 한 쌍의 부부와 그들의 미혼 자녀들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녀 한 둘 정도, 그게 가장 쉽게 떠오르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데 실은 그건 가족 중에서도 너무나도 작아서 물질로 치면 거의 原子(원자)급이라 해서 核家族(핵가족)이라 부른다. 우리들은 가족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핵가족을 연상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大家族(대가족)은? 하고 묻거나 생각해보면 조부모와 부모, 자녀와 며느리, 손주 손녀로 이루어진 가족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역시 예전엔 그 정도 가족에 대해 대가족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 역시 핵가족 즉 원자 단위는 아니라 해도 거의 分子(분자) 수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예전 사회에서 가족이란 하면 구성원이 몰락한 집안의 경우 수십, 적게는 수백, 보통은 수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거대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원래 의미의 가족과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단어만 같을 뿐 그 의미는 지금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얘기이다.

 

가족과 비슷한 단어로서 가정이 있고 좀 올드한 뉘앙스의 단어로서 家門(가문)이란 말도 있다. 또 가문과 연관되어 門中(문중이란 단어도 있다.

 

가족, 가정, 가문이란 단어들의 고통 요소는 家(가)라는 글자이다. 따라서 家(가)를 이해하고 나면 오늘에 이르러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 또 그로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심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가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家(가)란 무엇이었던가. 

 

 

먼저 家(가)란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본다.

 

家(가)란 때론 증조부와 조부모의 가족들과 형제들 그 자손들과 자손의 손주 손녀들, 때론 증손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며 뿐만 아니라 여기에 그 집안에서 봉사하는 하인들과 노비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손주들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家(가)에 속한 전체 구성원들을 예전엔 食率(식솔)이라 표현했다. 따라서 家(가)는 씨족 집단과 그 씨족에 봉사하는 노비와 머슴들을 포함하는 거대 집단이었고 그렇기에 그 구성원의 수가 때론 수만에 달하기도 했다.

 

예전엔 그런 집단이 방대한 田畓(전답)을 가문의 이름으로 소유한 채 노비와 함께 공동으로 경작하고 먹고 사는 공간 또는 실체를 莊園(장원)이라 불렀다. 중세 ‘장원경제’에서의 그 장원 말이다. 장원을 이루고 있을 경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자체 무장조직 즉 자경단을 운영하기도 했기에 시국에 따라선 지방의 거대 무장세력으로 할거하기도 했다. 그런 家(가)를 일러 族閥(족벌) 또는 門閥(문벌)이라 불렀다.

 

가령 삼국지연의에서 曹操(조조)를 보면 어쩌다가 부친이 성이 조씨인 환관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曹(조)씨가 되었지만 원래는 夏候(하후)씨였다. 하후씨는 그 조상이 유방이 항우와 쟁패해서 漢(한)제국을 세웠을 때 개국공신 제8위였던 하후영으로부터 이어져온 명문 벌족이다. 하후 집안, 즉 하후씨 가족은 후한 말기의 삼국정립 시기까지 이미 400년에 걸쳐 이어오면서 엄청난 자손과 함께 방대한 전답을 소유한 거대 족벌 집단이었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거병한 조조는 하후 가문의 수천에 달하는 식솔들을 무장시키고 군자금 역시 집안에서 조달했기에 짧은 시간 안에 거대 세력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조조의 핵심 부하 중에는 조인과 같이 6촌 동생도 있었으나 조조의 최정예 병력은 1만에 달하는 철갑기병대였는데 그 지휘를 맡았던 사람은 조씨가 아니라 ‘하후연’이었다. 같은 집안 즉 가족이었던 것이다.

 

삼국지에서 남쪽 오나라의 손권 역시 북방에서 대규모로 이주해온 손씨 가족집단의 일원이고 노숙이나 주유 역시 북방에서 난리를 피해 이주해온 거대 씨족 집단의 일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은 유비이다, 몰락한 황실의 후손으로서 돗자리나 만들어 팔던 영세한 자영업자가 황실의 혈통이란 점 하나를 마케팅해서 장비와 관우와 함께 나중에 나라까지 세웠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유비야말로 亂世(난세)의 영웅이었다.

 

이제 가족이란 것이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족은 옛날로 치면 가족의 지극히 작은 일부였던 것이고 이에 핵가족이란 단어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최근엔 이혼의 일반화로 인해 부모 중 한 쪽만 있고 거기에 자녀 역시 하나인 가족도 대단히 많다. 원자보다 더 작은 미립자 즉 ‘쿼크’ 가족이라고나 할 까.

 

 

가문이란 무엇이었는가. 

 

 

이제 家(가)를 이해했으니 家門(가문)이란 단어를 알아볼 차례이다.

 

예전에 家(가)가 공동으로 거주하던 마을,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대장원의 경우 방비를 위해 거주구역은 木柵(목책)으로 둘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커다란 대문이 하나 있었으니 이를 家門(가문)이라 했다.

 

이에 그 문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 혈연적 관계인 사람들과 그 가문의 노비나 하인들 역시도 門中(문중), 문 안에 사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때론 기존의 전답만으론 인구 압력이 커져서 차남이나 삼남 등이 일부 식솔을 이끌고 외지로 나가 별도 땅을 개간하거나 투쟁을 통해 빼앗은 땅에 자리 잡기도 했는데 이를 分家(분가)라고 했다.

 

이 경우 원래의 문중이 있는 곳을 本貫(본관)이라 하고 그 본관을 이끌어가는 핵심 그룹을 宗家(종가)라 불렀다. 또 그에 속한 일원을 宗中(종중) 사람이라 했다.

 

 

가정이란 단어 역시 뜻이 달랐으니 

 

 

이제 家庭(가정)이란 말도 알아보자. 집안의 마당이란 뜻이지만 사실 뜻은 그렇지가 않다. 단어에 포함된 庭(정)이란 글자 역시 오늘날과는 전혀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임금님 앞에서 신하들이 모여서 아침 회의를 하던 것을 두고 朝廷(조정)-오늘로 치면 국무회의가 열리는 청와대 본관 회의실-이라 했다.

 

이를 확대 연장해서 한 家門(가문) 안에서 가장 권력자인 집안 어른이 자녀와 며느리, 하인과 노비 등등 수십 혹은 수백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대청마루에 서서 지시하고 훈계하던 앞의 마당을 廷(정)에서 약간 작다는 의미의 한자를 만들어 庭(정)이라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그런 의미의 가정은 없다.

 

오늘날 단출해지고 또 규모가 작아진 가정에서 庭(정)은 바로 아파트의 거실이다. 그곳에서 식구가 다 모여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엄마가 딸에게 일찍 좀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자녀들이 항변도 하고 힘들다는 변명도 한다. 바로 그 거실이 家庭(가정)이다.

 

 

가족, 화살촉으로 구분이 되던 씨족 집단 

 

 

이제 마지막으로 家族(가족)에 대해 알아보자. 家族(가족)이란 단어의 뒤에 붙은 族(족)이란 단어는 화살촉을 의미한다. 촉이란 말 자체가 한자 族(족)의 우리말 변형이다.

 

옛날 중국 북방이나 만주 몽골 지역의 경우 여러 씨족으로 이루어진 부족이 가을이면 함께 수렵에 나서곤 했다. 일종의 전투 훈련이기도 했다. 이때 가족 즉 가문마다 화살촉에 각자 다른 색실이나 끈을 매달았는데 이는 다른 씨족이나 가문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노루나 사슴, 산돼지 등의 짐승을 잡을 것 같으면 일단 노비들이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 모은다. 사냥이 다 끝나면 짐승의 몸에 꽂힌 화살촉을 보고 어느 가족 또는 가문의 소유인 가를 구분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가족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가족은 어느 집안의 화살촉이었던 것이다.

 

가족 역시 씨족집단이기에 그 수가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천에 이르기도 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는 그것, 엄마 아빠 그리고 자녀 한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家(가)는 莊園(장원)을 운영했고 북방 유목 수렵 사회에서 가는 화살촉으로 구분되는 家族(가족)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제 家(가)란 단어와 그와 관련된 가족이나 가정, 가문, 문중, 종중, 종가 등등에 대해 다 설명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가족이 사라졌기에 고향 역시 사라지고 말았으니. 

 

 

지금까지 가족이나 가정, 가문 등의 원래 뜻을 알았으니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말이 사실임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조금 덧붙이면 우리가 흔히 故鄕(고향)이라 부르는 말의 원뜻은 씨족집단인 가족이 터를 잡고 있던 곳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러 고향이란 것도 실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말이다.

 

다음 글에선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생겨난 문제점, 그리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와의 관련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고령화에 대한 공포

 

 

“재수 없으면 120세까지 살 게 된다”, 일본의 공포괴담이다. 흐흐흐, 설마? 하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60세에 은퇴해서 60년을 벌지 않고 까먹으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 그야말로 호러 스토리가 된다.

 

원래 은퇴란 것은 餘生(여생), 즉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 예전엔 대충 5년에서 길면 10년 정도의 시간을 편하게 쉬다가 가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여생이 이젠 길어도 너무 길어졌다. 기술의 혁신과 발전으로 인해 영양분 공급이나 醫療(의료)가 너무 좋아져서 생겨난 새로운 모순이다.

 

바이오 기업들이 퇴행성 관절염이나 치매, 암 발병에 듣는 약까지 개발할 것 같으면 공포괴담 정도가 아니라 120세가 현실이 될 것도 같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것들

 

 

이에 오늘은 늙어가면서 겪는 일에 대해 약간 얘기해본다. 블로그 독자들은 아마도 나보다 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니 이런 얘기를 들어두면 각자 나중의 삶에 대비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이제 66년하고도 7개월을 살고 있다. 노년 같기도 하고 때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늙으면서 생겨난 신체의 변화

 

 

먼저 노년이다 싶은 점부터 따져본다. 작년에 디스크 문제로 인해 좌골신경통을 겪었다. 처음엔 왼쪽 다리가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비되고 심하게 통증이 왔다. 타고나길 유연해서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으리라 여겼던 착각이 깨지면서 심적인 충격은 더 컸다.

 

여름엔 어쩌다 한 번씩 눈의 흰자위 실핏줄이 터지면서 붉은 눈이 되곤 한다. 마치 뱀파이어의 눈처럼 된다. 안압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다행히도 매주 한 번씩 왕진 오는 한의사 분이 침으로 해결해주고 있다. (나 호호당에겐 실력이 비범한 한의 주치의가 있다.)

 

작년 가을엔 귀에서 소음이 들려서 이비인후과를 찾았더니 돌발성 난청이란 것이었다. 테스트를 했더니 왼쪽 귀의 청력이 정상에서 조금 밑으로 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양반 약간 엉터리였다. 한의 주치의가 와서 이문혈에 침 한 대를 놓았더니 달팽이관 쪽에 청량한 느낌이 오더니 그냥 나았다.

 

작년 가을엔 또 갑자기 혈압이 생겼다. 약간 어질어질해서 혹시나 하고 혈압을 재봤더니 140에서 160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여태껏 늘 120-80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운동, 특히 스쿼트를 조심해서 무리하지 않고 한 달간 했더니 혈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체 근력이 약해지면서 그랬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젠 저녁 8시 이후에 뭔가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서 불편하다. 정 출출하면 쌀밥 두 숟가락 정도 김에 싸서 잘 씹어서 삼키고 물을 마신다. 전체 식사량도 40대 시절에 비하면 40% 정도로 줄었다. 소식하면 장수한다고 하지만 실은 소화가 되질 않으니 소식하게 되는 것 같다.

다행한 점은 평소 육류를 그다지 자주 먹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아서 혈당이 지극히 정상이란 점이다. 당뇨 걱정은 전혀 없다는 얘기. 술 먹다 보면 기름진 고기를 먹게 되고 그 결과 통풍으로 고생하는 이도 많다. 친구가 통풍인데 아파도 너무 아프다는 것이다. 통풍은 치료도 어렵고 재발도 잘 된다.

 

생각해보니 뇌기능도 많이 퇴화되었지 않나 싶다.

 

어려서부터 암기력이 정말 좋았다. 가령 연도나 명칭을 많이 기억해야 하는 國史(국사)의 경우 깡그리 다 외웠기에 국사시험은 늘 백점이었다. 영어 단어도 한 때 3만 단어까지 외웠던 적이 있다. 두꺼운 영어사전을 펼치면 거짓말 좀 보태서 절반은 아는 단어였다.

 

40대 초반까진 적는 게 귀찮아서 웬만하면 외우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게 힘들고 성가셔서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바람에 암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 여유가 생겨나기에  

 

 

나이가 들면 이해력이 더 좋아진다는 통설이 있는데 내 생각엔 살면서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하면서 다양한 데이터베이스가 생기는 탓에 보다 종합적인 사고력을 갖추는 것 같다.

 

흥미로운 예를 하나 들어본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 척 봐도 거짓말인 것은 알겠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하는 점에 대해선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단순한 상황 같아도 그 젊은이가 내게 거짓을 고할 땐 그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순식간에 여러 개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그 이유가 몇 개 되지 않아 보여서 바로 확인해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젠 왜 그럴까? 하면서 일단 판단을 유보한다. 그 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천천히 확인해간다. 거짓을 말할 땐 실로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 보니 거짓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요즘 말로 빅 데이터가 쌓여있기 때문이다.

 

내침 김에 얘기하면 젊은 사람의 경우 상대방이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정신이 멀쩡해 보인다면 궁색하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당장 너 거짓말 하는구나! 하고 추궁은 하지 않아도 거짓말이란 사실 자체는 금방 알아차리고 그 점을 기억해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늙은 생강이 괜히 맵다는 말 하는 게 아니란 얘기.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살아온 햇수가 좀 되다 보니 데이터베이스가 쌓여있긴 하지만 그 역시 실은 숱한 偏見(편견)들의 집합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확률이 조금 더 줄었을 뿐이기에 여전히 섣부른 판단이나 확신을 경계한다. 거짓말만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도 쉽사리 부정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그로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종의 여유 공간 즉 버퍼(buffer)는 항상 간직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말들을 간단히 줄여보면 상대방의 궁색한 변명이나 거짓말에 대해 알아도 속아주면서 넘어가는 게 때론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경륜 즉 삶의 ‘짬밥’이 있는 노년의 너그러움이 아닌가 싶다.

 

 

몸이 늙어갈 뿐

 

 

지금까지는 67세나 되었으니 이젠 노년이구나 싶은 점에 대해 얘기했는데 반대로 여전히 별로 노년도 아니구나 싶은 점에 대해서도 얘기해본다.

 

세는 나이로 예순하고도 일곱이다. 방금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거울을 보니 목주름이 쳐져있고 눈 아래도 축 처졌음을 확인하고 왔다. 그러니 피지컬리 노년임은 인정하고 시작한다.

 

내 생각에 예순 일곱의 사람은 그 안에 어린 아이도 있고 10대의 반항기도 있으며 20대의 왕성함, 30-40대의 뜨거움, 50대의 노련함, 그리고 60대의 느긋함이 모두 함께 同居(동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다 있다!

 

가끔 코털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뽑게 된다. 그 결과 콧속에 염증이 생겨서 며칠 불편하다. 이건 40대 정도에 하던 버릇인데 이 바보짓을 내가 또 했구나 싶으면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아이고, 아직도 젊었어!, 뻔히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 순간의 장난기 그리고 약간의 쾌감에 빠져 이 짓을 또 했구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론 바보짓을 반복하는 것이 꼭 싫지만은 않다. ‘바보짓은 젊음의 특권’인데 아직도 그 특권을 누리고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다. 난 젊었어, 이런 짓을 또 하고 있으니! (그런데 말이다. 난 젊었어! 하는 자체가 늙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늙긴 늙은 것이다. 인정!.)

 

하고자 하는 얘기는 몸은 분명 한 해 한 해 늙어가고 있으나 정신은 여전히 멀쩡하다는 점이다. 물론 호르몬 변화, 즉 체내 케미스트리의 변화로 인해 생각이나 사고의 변화야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게 실은 전혀 나쁘지 않다. 눈앞의 삶을 훨씬 더 편안하게 관조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 ‘노년의 축복’이라 하겠다.

 

 

늙어가면서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한 가지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로 조심해야 할 점 한 가지만 알려드린다. 주변의 후배나 젊은이들을 상대로 ‘지적질’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경륜이 쌓였으니 당연히 어린 후배들의 행동이나 생각에 부족한 점이 느껴질 법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점을 지적하거나 훈계하려 들지 말라는 점이다.

 

앞에서 바보짓은 젊음의 특권이란 말을 했는데 바로 그렇다. 젊은이나 후배들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세련되어 진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말로 지적하거나 훈계한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냥 두면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알아서 잘 하게 될 것이다.

 

가르침은 스스로가 가르치고 스스로가 배우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을 해주고 싶다면 상대가 당신의 생각에 대해 들어볼 用意(용의)가 있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한다. 상대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그냥 지켜봐 주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들을 생각도 없고 받아들일 준비도 없는 후배에게 나름 도와준답시고 말을 쉽게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간섭이고 무례한 언행에 불과하다. 그게 바로 ‘꼰대질’이다.

 

젊은이는 失手(실수)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늙은이는 젊은 후배가 실수를 하면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도닥여주면 된다. 반성은 젊은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렇다. 우리 모두 실수를 통해 더 세련되어진다. 그게 삶이라 여긴다.

 

변화강박증에 빠진 우리 대한민국

 

 

처음 글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과거의 우리 전통과 단절된 나라란 사실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 글에선 우리 사회가 전통과 단절된 결과 겪게 되는 갈등이 너무나도 크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전통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애기했다.

 

이제 이번 주제를 마무리하는 글을 시작해보자.

 

우리 대한민국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면에선 변화에 중독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사회는 뭐든 늘 새롭게 더 좋게 바꾸고 변화시켜 가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이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하는 말이 연일 들려오는 사회, 정치인들 그리고 사회운동가들, 여타 학식과 비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선거 때마다 그리고 평소에도 책과 저술을 통해 부단히 토해내는 말들이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리고 6.25 전쟁 이후, 1987년 민주화 이후 등등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바꾸어왔다. 물론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고 많은 방면에서 좋아졌고 나아졌다. 사실이다.

 

오늘의 글로벌 삼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고 이건희 회장이 1997년 책을 통해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자고 혁신을 주문한 끝에 만들어진 것 분명 인정한다. 선거 때마다 무지막지한 혁신과 개혁을 하내겠다는 대선 주자들의 약속도 물론 대부분이 빈말이었으나 그럼에도 우리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 역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언젠가 이정현이란 여가수가 부른 ‘바꿔’란 제목의 노래가 생각난다. 검색해보니 1999년이었다. 꽤나 히트를 친 노래였다. “바꿔 바꿔 바꿔 모든걸 다 바꿔” 하고 절규하듯 노래하던 기억이 난다.

 

 

변화란 힘든 것인데 그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말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그렇게나 많이 바꾸고 뒤집고 엎어버리고 변화하고 변신해왔는데 아직도 ‘빛의 속도’로 바꾸어야 할 것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는 얘기이다.

 

나날이 껍질을 벗지 않으면 정말이지 평범하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우리 현실이고 실정인가 싶다.

 

바꾼다는 것은 기존의 틀이나 루틴이 현실에 잘 적용되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이다. 바꾼다는 것은 새롭게 길을 찾아가고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그건 그야말로 고생길이다.

 

그런 까닭에 이제 나 호호당의 귀에 뭔가 바꾸자는 얘기는 계속해서 고생을 해보자는 얘기로까지 들린다.

 

과거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트로츠키의 주장 중에 유명한 것으로서 “영구혁명론”이란 것이 있다. 영어 제목으론 ‘Permanent revolution’이다. 젊은 시절엔 그게 뭔지 잘 몰라도 말 자체만으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진정한 무엇이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혁명을 지속해가야 한다는 그 패기에 크하! 하고 감탄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만 이룩하면 정말이지 잘 살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의 문제점과 불만에 대해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을 때 나 호호당은 지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끝이 없구나! 엔드리스(endless)이구나! 했다.

 

 

툭 하면 바꾸자고 하니 몸살이 날 지경인데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로도 정권이 바뀌면 으레 한 번쯤은 개헌설이 흘러나온다. 헌법이란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인데 그걸 정권 교체기마다 나온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5년마다 근본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우리에겐 문제가 많은 걸까?

 

헌법이란 그 정신부터가 최상의 이성과 지성을 담았기에 한 번 제정되면 기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헌법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란 얘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헌법 개정 즉 개헌을 툭 하면 일반 법률 조항 바꾸듯이 바꾸려고 한다.

 

문재인 현 정부가 시작할 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연실색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크고 작은 문제야 어느 나라나 있는 법인데 우리 대한민국은 그래도 글로벌리 전 세계적으로 반열에 드는 나라가 아니던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그야말로 ‘꿈의 나라’여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요소가 그렇게나 많이 부족한가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 한 때 텔레비전 방송에서 MC가 ‘어떤 남성을 이상형으로 생각하시나요?’ 하고 여성 연예인에게 질문하면 ‘저는 남자다운 남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는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남자다운 남자가 어떤 남자를 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듯이, 나라다운 나라 역시 어떤 나라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그래봐야 멋 좀 부려본 정치 레토릭에 불과하니 말이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 깃든 변화강박증 혹은 중독 현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오리지널인 영국은 아예 헌법, 즉 명문화된 헌법이 없다. 성문헌법이 없어도 될 정도로 잘 확립된 정치적 사회적 전통이 견실 확고하게 자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 글로벌 최강국이자 우리의 모델인 미국의 경우 헌법은 원래의 초기헌법 조항이 7개, 즉 7개조가 있고 추가로 수정된 조항 27개조가 전부이다. 27개의 수정 조항 역시 건국 초기에 수정된 것이 대부분이고 합중국이 쪼개질 뻔 했던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론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이웃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헌법이 만들어졌을 때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최고의 법적 틀이란 의미에서 不磨(불마)의 헌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대전 패망 이후 수정이 있었을 뿐이다. 소위 평화헌법이 그것이다.

 

헌법과 관련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영국이나 미국, 일본이 우리보다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바꿔서 좋다면 당연히 바꿔야 할 것이다.

 

 

전통의 단절이 바람직한 면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선 우리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이처럼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면 전통이 없어진 바람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던 점이 있다. 우리야말로 6.25 전쟁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과거 1950-1980년대까지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모질고 억척이고 독한 악바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정도까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없었지 않을까 싶기에 그렇다.

 

하지만 언제까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뒤집고 엎고 바꾸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革新(혁신), 수레에 씌운 가죽을 바꾼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이제 바꿀 가죽이 남긴 남은 걸까 싶다, 우리 모두 한 번뿐인 인생인데 2-3년 쓰면 버리는 스마트폰처럼 계속해서 바꿔가기엔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다는 말을 지금 나 호호당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지나치게 각성된 우리 대한민국

 

 

어린 시절부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상기해본다.

 

과거엔 만주 땅까지 호령하던 고구려는 외세를 끌어들인 비겁한 신라에게 망했다는 얘기, 고려 시대엔 문신들이 무인들을 하인 부리듯 부리다가 떼죽음 당했다는 얘기. 몽골에 대해 끝까지 항쟁하는 삼별초를 고려 조정까지 합세해서 없애버렸다는 얘기.

 

조선시대는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탐관오리들이 다 해먹은 나라였다, 충신이 바른말 하면 잘리거나 귀양 갔다는 얘기, 이순신 장군의 억울한 얘기, 선조란 임금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애진작에 도성 한양을 비우고 튀었다는 얘기, 학정에 들고 일어난 민초들의 동학운동은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 당했다는 얘기, 나라밖의 새로운 문물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문을 닫고 우물 안 개구리 하다가 폭삭 망했다는 얘기, 해방과 건국 이후에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바람에 여전히 어렵다는 얘기 등등 부끄러운 역사로 가득하다.

 

물론 각성을 촉구하고 앞으론 잘 되자고 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自虐(자학)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지나치게 각성된 것 같기도 하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가질 법도 하다. 전통은 일단 사그리(?) 버리고 볼 그 무엇으로 치부해야만 개념이 있는 현대 한국 시민 자격이 있을 것도 같다.

 

 

변화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점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언제까지? 바꾸고 엎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바꿔왔건만 양극화는 왜 더 심해지는 걸까. 변화 자체에 대해 이젠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을 더 해봐야 하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혔으니 상호 타협해가면서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해가는 것이 경상도 방언으로 ‘확 다 바까삐리’ 하는 것보다도 실은 더 나은 방식이 되는 건 아닐까.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하고 다듬어 가다보면 그게 전통이 될 것이고 이후에 자리를 잡으면 훨씬 더 편안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3회에 걸쳐 적지 않은 얘기들을 했지만 머릿속에는 미처 꺼내지 못한 말과 생각들이 더 많다. 그래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주제였고 역시 꺼내다 보니 이 정도 분량의 글로선 어림도 없음을 알 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야겠다. 다만 너무 줄이다 보니 원래의 의도가 과연 조금이라도 전달이 될까 싶은 염려도 많다. 아무튼 오늘 글로서 마무리한 것에 대해 스스로 안도할 뿐이다. 긴 한 숨, 휴-.

 

다시 원래 하던 ‘운명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야지 싶다.

 

쉽지도 않고 머리도 무거운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 드린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또 새벽이다. 바깥은 무지막지한 한파가 몰아쳐 오고 있다. 제발 마지막 동장군의 행차이시길...

 

우리는 정말로 전통과 단절되었는가? 

 

 

앞의 글에서 우리 민족은 예전의 전통을 상실했고 단절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여전히 전통이라고 인식하고 여기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도 들 것이다.

 

여전히 유교적인 효와 충의 관념도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며 절을 찾는 수백만 신도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싶을 것이다.

당연한 질문이다. 그래서 답을 해야 하겠다, 그건 전통이 아니라 전통의 잔재라고 말이다.

 

먼저 유교부터 살펴보면 예전 시절에 유교는 그야말로 나라의 가르침, 즉 國敎(국교)였으니 오늘에 비유하자면 우리가 국가이념으로 삼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유교는 사라지고 그저 묵은 동양철학의 일부로서 일부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남아있다. 일종의 문화유적, 심하게 말하면 문화적 殘在(잔재)라 하겠다.

 

따라서 유교적 가치인 효라든가 충에 관한 관념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강도와 정도는 예전과는 비할 바가 없다. 그저 遺風(유풍)에 불과하다.

 

불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불교는 이미 조선시대를 통해 일종의 하위문화 정도로 격하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엔 심한 통제를 받았다. 현재 우리 불교의 주류인 조계종만 해도 그 명칭이 생겨난 것은 고려 시대이지만 그로부터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 아니다. 1962년에 박정희 정권이 모든 절을 통폐합하고 나서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새롭게 붙였다. (그 뒤에 대처승의 심한 반발과 법정 투정을 통해 태고종이나 천태종 등도 인정을 받았다.)

 

불교의 경우 종교이자 국가통치이념인 유교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새롭게 중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시아를 통틀어 기독교가 뿌리를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유일한 나라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한 가지만 지적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수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아시아 지역의 무수히 많은 나라들 중에 기독교(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필리핀의 경우 기존의 토속 신앙 위에 로마가톨릭이 덧씌워졌을 뿐이다. 일본에서 교회는 이국적 취향의 결혼식 장소로나 이용될 뿐이고 사회주의 이념의 중국은 기독교가 거의 없다, 다만 도교적인 관념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중국이다.

 

왜 우리 대한민국만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종교에 관해선 그다지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는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겠지만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전통의 종교가 지녔던 가치와 권위가 사실상 사라져버렸고 여기에 6.25 전쟁을 거친 뒤 우리가 세계 최강국이자 선진국인 미국을 모델로 하는 발전해가는 과정, 즉 美國化(미국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종교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슬람이 주류인 서남아시아 지역에 기독교가 들어갈 수 있었던가?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인도 사상과 혼합된 이슬람이 들어가서 불교와 섞이긴 했으나 새로운 종교가 우리처럼 단시간 내에 들어와 자리를 확실하게 잡은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이전의 전통과 엄청난 단절을 겪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면에서 미국을 모델로 미국화되고 있는 우리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미국화(Americanization)되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우스갯말로 미국을 ‘천조국’이라 부르고 反美(반미)운동권하던 이들이 기득권이 되면서 자녀들을 대거 미국 유학을 시키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의 일개 주로 편입되지 않는 이상 완전히 미국화되진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방면에서 미국적 요소들이 가득 듬뿍 들어차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수학의 微分(미분)처럼 미국 쪽으로 무한히 수렴한다고 할까!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이고도 엄청나게 강한 욕구, 즉 본능의 하나로서 모든 문화와 전통의 뿌리에 자리한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 미국 드라마 “섹스 앤 시티”가 방영된 이래 우리의 성윤리는 사실상 미국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예전에 ‘혼전 성관계’란 말은 입에 올리기만 해도 가십거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녀가 혼전에 섹스를 하면 이른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섹스와 결혼은 별 관련이 없게 되었다. 성 모럴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뀐 셈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나날이 엄청난 변화 속에서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라면 좋은 게 아닌가 싶겠지만 사실 변화는 그 자체로서 우리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변화 스트레스에 대해 이젠 만성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일상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일상으로 느낀다 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성이 되었을 뿐인데 이는 우리의 멘탈이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 몸은 정직하게 그 고통과 갈등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

 

이번에 전통과 단절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꺼내게 된 배경 역시 바로 이 대목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과거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고 소비도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윤택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성원이 힘들어하고 갈등의 총량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이라고 나 호호당은 보고 있다.

 

자고 나면 변화해있고 또 변화에 따라가고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인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겪는 갈등의 근원적인 이유는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 문제, 어려운 취업, 좋은 일자리의 절대 부족, 무지막지한 가계부채와 부동산 가격 상승, 정치적으론 극심한 진영 갈등과 투쟁 등등 당면한 문제점들이 태산과도 같이 산적해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런 어려움과 갈등으로 인해 힘들어하기 보다는 그 바탕에 깔린 전통의 부재와 단절이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데 말이다, 전통의 부재와 전통의 단절로 인해 우리가 심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 어쩌면 독자들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나 호호당 또한 이 대목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오래 전부터 이 주제에 대해 말하길 망설였다.

 

 

전통이란 결국 세월 속에서 잘 다듬어진 루틴(routine)이기에 

 

 

앞의 글에서 전통의 의미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얘기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해보자.

 

전통이란 것이 생기려면 그 이전에 모범적이고 준거가 되는 틀이나 式(식)이 있어야 한다.

 

틀이나 식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령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장 적합하다 싶은 방법이 제시될 것이고 그게 나중에 틀이 되고 式(식)이 된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기준이자 표준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 번 틀이나 식이 정해졌다고 해서 그게 영구적으로 반복되고 답습되지 않는다. 새로운 상황이 생겨나면 다시 그에 걸맞게 수정이 가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에 어렵사리 정해진 틀이나 식이라 해도 그것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면서 세월의 경과와 함께 더욱 세련되어진다. 결국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어지다 보면 그게 훗날에 가서 전통적인 틀 또는 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니 그를 줄여서 전통이라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국가나 사회가 질서 있게 유지되려면 법이 있어야 한다. 이른바 법치국가인 것이다. 그런데 법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이전 오랜 세월 동안에 생겨난 전통적인 처리방법과 절차 등에 대해 그 국가나 사회가 명문화된 룰(rule)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도 실은 기본적으로 전통문화란 사실이다. 새로운 풍속이나 유행이 생겨나면 그를 문화라 부르진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과 세월이 흘러서 그게 나름 정착이 되면 新(신)문화라 부르고 그게 나중에 더 오래 되면 수식어 없이 그냥 문화라 한다. 이에 더 오래 되면 전통문화가 된다. (전통문화가 반드시 자생적으로 사회 내부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롭게 해법을 모색하다 보니 힘들기만 한 우리 대한민국

 

 

지금까지 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을 했는데 그렇게 한 까닭은 전통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전통이 없거나 단절된 사회일 경우 생겨나는 모든 새로운 문제와 상황에 대해 준거가 되는 틀이나 식이 없다는 얘기가 되고, 그 결과 늘 새롭게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찾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변화가 생길 때마다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나름의 루틴(routine)이나 방법론이 없다면 그 사회는 그를 해결하기 위해 늘 엄청난 갈등과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스트레스가 많아지고 또 누적될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 사회이다. 전통이 없다는 말, 전통과 단절되었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검증되고 다듬어지고 확립된 좋은 루틴이 없다는 뜻이기에 그 결과 전 구성원이 더 많은 고통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말이 된다. 바로 우리가 그렇다.

 

다음 글에서 최종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전통문화가 사실상 없는 나라, 우리 대한민국

 

 

역사는 있지만 傳統(전통)은 거의 사라져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우리가 그렇다, 대한민국. 전통이란 것이 거의 사라지다 보니 이젠 그 단어의 뜻마저 실은 모르고 사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너무 심한 말이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물론 전통이란 말의 의미나 뜻에 대해 모두들 대충 대강 알고들 있다. 하지만 왜 전통이 있어야 했는지 왜 그걸 지켜가야 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어제가 설날이었다. 몇 년 전부터 설이나 명절에 관한 뉴스를 볼 것 같으면 가족이나 친지간에 화기애애한 모습에 관한 것보다는 갈등에 대한 것이 더 많다. 고향집을 찾아야 하는 남편과 가기 싫은 아내 간의 갈등, 고향에 내려가면 취업이나 결혼 등등 답하기 싫은 질문을 받느라 스트레스만 받는다는 청년들의 이야기.

 

 

전통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전통과 관련해서 한 번 생각해봄직한 얘기들을 해보겠다. 사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지만 꽤나 무거운 주제인지라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이번 설을 계기로 힘을 내어본다.

 

먼저 전통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부터 한 번 살펴본다.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 따위가 계통을 이루어 현재까지 전해진 것”이라 되어 있다.

 

사전의 풀이는 4개의 의미 요소로 구성되고 있다. 집단이나 공동체라고 하는 전통의 주체가 있다. 다음으론 과거로부터 이어져온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이란 뜻이 있고 마지막으론 계통을 이루어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말이 들어있다.

 

뜻을 알았으니 이제 이를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에 대해 적용해보자.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은 별개의 주체이다. 

 

 

주체인 집단이나 공동체란 측면부터 본다. 우리의 전통이라 하면 우리 민족이 가진 전통이 대상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가진 전통이 될 수도 있다. 한민족과 대한민국은 사실 다른 주체인 까닭이다.

 

우리 민족이라 하면 나름 유구한 역사 흐름을 가진 집단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란 주체는 1948년에 헌법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의 이념과 틀을 가지고 출발했기에 이제 겨우 72년을 조금 넘긴 신생의 주체이다.

 

우리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란 말인데 그 이전엔 사실 그랬던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였다.

 

엄밀히 말하면 헌법이 제정된 1948년 이전과 이후 사이엔 엄청난 단절이 존재한다.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한 지 겨우 72년 남짓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심지어 노비 또는 머슴 신분인 사람들도 있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인해 법적으론 사라졌으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1950년 6.25 전쟁 이후였다.

 

게다가 우리 헌법, 즉 대한민국의 지도이념이자 나라를 이끌어가는 기본 틀이라 할 수 있는 헌법만 해도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주체적으로 창안하고 다듬어낸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수입되었다는 점이다.

 

서구민주주의를 기본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헌법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 대한민국의 국가적 전통이란 것이 있다면 그 가장 오랜 淵源(연원)이라 해봐야 겨우 72년 6개월에 불과하다.

 

 

우리 겨레의 전통은 이어져왔지만 

 

 

물론 우리 겨레의 전통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어릴 적엔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란 말을 들었는데 최근엔 반만년이란 말마저 우리 헌법엔 빠져있다, 아마도 단군의 존재와 개국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지적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 겨레의 전통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나 호호당의 개인적 견해론 676년 통일신라의 출현을 우리 겨레의 시발점으로 본다.

 

이처럼 통일신라 시절부터 따진다 해도 지금까지 1345년이나 되었으니 오래된 민족이고 겨레라 봐도 절대 무리가 아니다. (민족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선 이 글에선 논의를 생략하기로 하자.)

 

그러니 그 긴 세월 사이에 많은 전통이 생겨났을 것이고 또 이어져왔을 것이 틀림없다.

 

통일신라 이후 중국의 여러 사상이 유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유교와 불교, 도교 사상, 음양오행 사상들이 그것이다. 이런 외래 문물들이 그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우리 겨레 고유의 사상이나 풍습과 섞이고 혼합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마찰을 빚으면서 시간을 두고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져왔을 것이다.

 

 

우리 고유의 것은 많지도 않고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란 점

 

 

관련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게 과연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하고 알아보면 약간 변형이 되긴 했지만 그 출처는 기원 전 200년경에 저술된 중국의 회남자란 책이다.

 

(그런데 최근 10년 사이엔 이 속담이 거의 귓전에 들리지 않는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이는 최근 10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여성의 권리 문제에 대해 엄청나게 변화해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회남자란 책이 어느 시점에 우리 쪽으로 들어왔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통일신라 이후의 어느 시점이 아닐까 싶다.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앞의 속담이 우리의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이른바 우리 것, 우리 쪽 ‘오리지널’로 알고 있는 수많은 금언과 속담들도 알고 보면 외래 사상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것이 대단히 많다. 수많은 전설 또한 그 원형을 살펴보면 시골이나 지방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중국이 오리지널이 경우가 압도적이다. 그만큼 우리 겨레는 이웃의 강국이자 대국인 중국 쪽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전통이라 해서 그것이 우리 고유의 자생적인 것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 또한 밝혀둔다.)

 

예전에 대중 인기가 엄청나게 많았던 고우영이란 만화작가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남긴 유작으로 ‘일지매’란 연재만화가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일지매가 우리 쪽 그러니까 조선 시대의 오리지널 설화로 알고 계셨다.

 

하지만 중국 것이다. 일지매 이야기는 임진왜란 이후 중국 소설이 조선시대 양반 계층 사이에서 그리고 나중엔 일반 常民(상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 그 시절에 국내로 유입되었다. 제목부터 一枝梅(일지매)이고 매화 한 가지란 뜻이다. 저자는 중국 명나라 말기 베스트셀러 작가인 ‘능몽초’란 사람이고 그가 지은 단편소설 모음집인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란 책의 제39장에 일지매 얘기가 나온다.

 

이런 얘기들을 늘어놓는 것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대한민국이 아닌 우리 겨레 또는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에 그 사이에 수많은 방면에서 수많은 전통들이 만들어져왔고 이어져 왔다는 점이 중요할 뿐 그 중에 순수 우리 것이 어느 정도냐를 따지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순수 우리 것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만도 아니란 점, 따라서 꼭 우리 고유의 것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바람직하고 좋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를 바탕으로 전통으로 만들어 가면 되는 일이라 본다.

 

 

사실상 모든 전통이 사라지고 단절되었으니 

 

 

그런데 말이다. (이제부터가 이 글의 핵심 대목이다.) 우리 민족 혹은 겨레의 전통이란 것이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실상 거의 파괴되고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파괴되고 단절된 이유를 찾자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6.25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단절

 

 

첫 번째로 한국전쟁을 계기로 해서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사실상 몰락하거나 해체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남쪽의 대표적 기득권 계층이었던 전라도 지주계층이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토지개혁이 그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 또한 복잡다단하고 문제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지주계층이 사라져버렸다.)

 

한국 전쟁 직후만 해도 우리 경제는 농업경제였기에 지주계층의 해체는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재벌 그룹이 일시에 사라진 것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되겠다.

 

부를 가진 계층이 사라지면 그들이 누리고 즐기던 취향이나 문화도 사라진다. 대표적으로 판소리나 창을 포함해서 우리가 國樂(국악)이라 부르는 것이 그렇다. 오늘에 이르러 국가 보조금이나 지원이 없다면 벌써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대중의 수요가 사실상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에 국악 하는 예술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중의 수요를 만들어보고자 갖은 노력과 시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전통예술인 문인 수묵화 역시 실은 마찬가지이다.

 

그런 고급의 취향이나 문화는 과거의 엘리트 층, 즉 지주계층이나 벼슬을 하던 양반 계층이 누리고 소비하던 것이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과거의 엘리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까닭이다.

 

 

경제구조가 단시간에 모조리 변했으니. 

 

 

두 번째 이유를 들어보면 우리 경제 구조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획기적으로 변해버렸다는 점이다. 1960년대 초반의 농업경제에서 겨우 20년 만에 공업경제로 변했고 다시 20년 만에 정보 디지털 경제로 전환해왔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경험한 나라나 민족 혹은 겨레는 보기 드물다. 그야말로 桑田碧海(상전벽해).

 

근대화를 이룩한 서구 국가들은 적어도 수백 년에 걸쳐 변화해왔고 미국 또한 200년에 걸쳐 변화했다. 이웃의 일본이 상당히 단기간이었지만 그 역시 우리에 비하면 훨씬 길고 아울러 저들 고유의 것을 포기한 게 그다지 크지 않다. 이웃의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이미 상업경제가 꽤나 고도화되어가고 있었다.

 

경제는 먹고 사는 일이고 따라서 돈과 이익에 관한 일인데 우리는 그게 불과 수십 년 만에 송두리째 몽땅 변해버렸다는 점에서 전통과의 단절은 어쩔 수 없었다.

 

 

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기에 

 

 

이제 마지막 요인을 얘기해보자. 바로 신생 대한민국, 1948년에 서구 모델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국가 이념인 헌법의 제정으로 그 이전의 통치나 지도 이념과는 철저하게 이별을 고했다. 이 점에 대해선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이 정도에서 일단 오늘의 글은 마무리한다. 생각은 두 번으로 나눌 예정인데 어쩌면 그 이상까지 이어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설인데 이런 글을 올리게 되니 독자들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묘한 것은 설을 쇠다 보니 이런 글을 써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작은 대단히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치과의사인 후배와 저녁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다. 저녁 여섯 시에 만나서 어딜 가서 먹지? 하다가 사무실 맞은 편 골목에 있는 수제 햄버거 집을 갔다. 테이블이 네 개 되는 아주 작은 가게이지만 내 생각에 국내에서 가장 맛있는 수제 햄버거 집이다. (내 사무실은 강남 교보타워 빌딩이 있는 신논현역에서 5백 미터 거리에 있다.)

 

거리가 조금 되는 터라 가끔 찾아간다. 식사를 하는 데 창밖으로 눈발이 비쳤다. 일기 예보에 퇴근 시간 눈발이 비친다더니 정말 그러네! 하면서 내리는 눈을 지긋한 눈으로 감상했다. 가게 안의 불빛과 어울려 마치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았다.

 

맛있게 먹은 후 가게를 나서니 눈발이 아니라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카페엔 가지 못하기에 커피를 사서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대화를 마친 뒤 밖으로 나서니 저녁 8시였다. 서울시는 제설을 잘 하니까 간선 버스들은 잘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진 낭만적 분위기.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

 

 

하지만 교보 타워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재난 영화가 시작되었다. 차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얘기하면 귀가하는 코스는 사무실에서 강남역 버스 정루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탄 뒤 양재역으로 가서 서초 18번 마을버스로 환승한 뒤 우면동 아파트로 간다. 평소라면 사무실에서 집까지 40분 정도 소요된다.

 

인도 측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보니 늘 타던 버스는 63분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이거 비상 상황이구나. 그래서 다시 강남대로 중앙에 있는 버스 정류소로 갔다. 강남역에서 양재역까지 가는 버스가 거긴 많으니 금방 타겠지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버스를 타긴 했다. 그런데 30분이 지났어도 버스는 정류장에서 100 미터 거리에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내 옆에 섰던 승객들은 일행이 셋이었는데 한 사람이 약간 술에 취했는지 부아를 부리기 시작했다. 왜 차가 안 가냐고? 그러자 덜 취한 옆의 사람이 앞 차가 안 가니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저 앞 차는 왜 안 가냐고요, 왜? 하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속으로 웃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도 덩달아 부아가 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지나자 승객들이 일제히 차 좀 세워주세요, 기사 아저씨! 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결국 기사 양반은 차로 복판에서 문을 열었고 승객의 2/3 정도가 내렸다. 나도 내렸다. 사람이 밀집된 공간에서 코로나도 무섭고 거기에 장시간 동안 서서 버틸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강남역 지하철역에 가서 신분당선을 타면 양재역으로 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기에 내렸다.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구두 밑창에 눈이 박혀서 노면 접지력이 전혀 없어졌다. 강남역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데 겁이 벌컥 났다. 그곳의 계단은 모서리가 금속으로 되어 있어 엎어지면 무릎을 크게 다칠 수 있다.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얼마 후 허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 전날 와이드 스쿼트와 런지라고 하는 아주 괴로운 운동을 바야흐로 시작한 터라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다 뭉쳐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작년 좌골신경통을 앓으면서 허리 단련을 위해 스쿼트와 런지를 시작한 것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 된 셈이었다.

 

 

어려웠던 판단의 갈림길

 

 

아무튼 분당선을 탄 것은 좋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양재역에서 내리느냐 아니면 한 정거장 더 가서 AT 센터에서 내리느냐였다. 나름 열심히 판단을 했다.

 

양재역에 내릴 경우 마을버스마저 제대로 오지 않으면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거리는 대략 3.5 킬로미터. 하지만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좋다. AT 센터에서 내리면 그냥 걷는 수밖에 없지만 거리는 1.5 킬로미터 정도, 하지만 통행이 드문 길을 가야 하기에 수북하게 눈 쌓인 길을 걸어야 할 것이고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기에 도중에 일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내 나이 이제 예순 일곱, 체력이 예전만 못한 처지라 자신이 서질 않았다.

 

양재역에서 내렸다. 지하에서 무거운 걸음으로 올라가 마을버스 정류장에 가 보니 역시 차가 쉽게 오지 않았다. 양재역 사거리 저 편에 도곡동 방면에서 오는 언덕길이 문제였다. 멀리서 보니 후륜구동의 외제차들이 빌빌거리고 앞길을 막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시다시피 벤츠와 같은 독일차들은 후륜구동이 많다. 눈길 언덕을 만나면 거의 기동불능이다.)

 

 

본격적인 공포 스릴러의 시작

 

 

20분이 걸려 마을버스가 왔는데 그 안에 빼꼭히 들어찬 승객들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저걸 타고 한 시간 이상은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안에 혹시라도 무증상 감염의 젊은이와 코를 맞대고 인연을 맺었다간 난 간다, 담배 피는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그야말로 저승행 아닌가!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양재역에서 교육개발원 입구-흔히 일동제약 4거리라고 부른다-까지 걷는데 도중에 나지막한 언덕길이 있다. 그곳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신발 밑창에 박힌 눈이 얼어서 신발 바닥의 요철이 사라진 터라 그냥 빙판길과 같았다.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넘어지면 그냥 넘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름의 落法(낙법)이었다. 버티다가 넘어지면 다친다.

 

교육개발원 입구 정류장까지 걸어서 도착했다. 버스타길 포기했지만 그나마 좋은 것은 정류장의 벤치에 열선이 있어서 따듯하다는 점이었다. 벤치에 앉아 허리도 좀 펴고 다리도 떨어보고 하면서 몸을 풀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점검도 했다. 괜찮은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사무실에서 출발한 지 1시간 40분이 흘러 9시 40분이었다. 다시 걸으면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생각을 했다. 어느 코스를 택하지?

 

버스길을 따라 걸어가면 도중에 언덕을 또 넘어야 한다. 그래서 큰 길에서 벗어나 양재천 변에 산책로가 있는 작은 길을 택했다. 가면서 보니 양재천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또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눈이 10 센티미터 이상 쌓인 길을 걷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구두 속으로 녹은 눈이 스며들어 양말이 온통 젖은 상태였기에 더욱 난감했다.

 

 

어려울 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생각을 바꿔서 동네 골목길로 들어갔다. 편의점 불빛이 보였던 것이다. 들어가서 따뜻한 홍삼 음료수를 하나 마시고 나니 몸이 다시 좀 풀렸다. 다시 양재천로로 나와서 걸었다. 도중에 차로가 경부고속도로 교량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길이 있었는데 승용차 4대가 제멋대로 뒹굴고 서 있었다. 접촉 사고였다. 그런데 차 주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차를 굴릴 수 없게 되자 버려두고 걸어간 모양이었다.

 

도중에 지나가는 차를 향해 태워달라고 여러 번 손을 흔들었지만 허사였고 그냥 천천히 걸었다. 다시 두 번 더 미끄러졌지만 落傷(낙상)은 없었다. 멀리 아파트의 불빛이 보였다. 체력도 완전 떨어진 터라 아주 천천히 뒤뚱거리면서 걸었다.

 

 

무사귀환,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에필로그 

 

 

집에 도착하니 11시 15분, 출발이 8시였으니 3시간 15분의 어드벤처였다. 재난영화 한 편 찍은 건지 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사귀환, 천만다행, 개고생.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셨다. 발목도 불편하고 등판이 좀 이상하다. 회복 훈련을 위해 천천히 스쿼트를 다시 했더니 허벅지에서 불이 났다. 아서라, 그냥 쉬자.

 

 

편하게 되자 너그러워지는 이해심과 아량

 

 

오후 들어 뉴스를 보니 버스타고 집에 가는데 12시간 걸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경우를 알게 되니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난 그래도 괜찮았네 하면서 싱글거리게 된다.

 

기온이 너무 차가워서 염화칼슘 약발이 듣지 않았다는 서울시의 해명인지 변명인지도 들었다. 이해한다, 차가 움직일 질 못하니 제설이 아예 어려웠을 거란 점도 납득한다. 어제 폭설은 일종의 자연재해로 치부한다. 기상청의 예보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늘 그랬던 것이니 이해하기로 한다. 몸이 편하니 마구 너그러워진다.

한 때 수출대국이었던 중국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 전 쯤에 중국은 그야말로 수출대국이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은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이웃의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지, 나아가서 유럽 나라들에겐 너무나도 갖고 싶은 ‘꿈의 물건’들이었던 까닭이다.

 

얼마 전만 해도 ‘메이드 인 차이나’라 하면 조잡한 저가 물건의 대명사로서 쓰고 버리는 물건이었으나 당시의 중국산 물건은 품질을 넘어 희소성까지 갖춘 귀한 물건들이었다.

 

서양인들이 좋아했던 물건을 잠깐 제시해본다.

 

生絲(생사)꾸러미, 두 올로 꼰 명주실, 흰색 비단실, 색색의 비단실, 금실로 수가 놓인 비단, 다양한 색상과 문양의 직물, 두꺼운 비단, 아마와 면포, 사향, 안식향, 각종 장식천, 침대 장식품, 침대보와 수가 놓인 벽걸이용 태피스트리, 방석, 융단, 진주, 루비, 사파이어, 수정, 금속 그릇, 놋쇠 주전자, 도자기 등등이다.

 

여기에 더하여 서책이라든가 문방사우인 종이와 붓, 먹, 벼루, 사향이나 침향과 같은 향료 등은 당시 조선과 일본 등에서 널리 선호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먼 유럽에서 배를 타고 온 서양의 무역상, 처음엔 포르투갈 이어서 스페인, 그 다음에 네델란드와 영국 등등의 무역상들이 중국을 상대로 팔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은으로 받고 물건을 팔았던 중국

 

 

사고는 싶어도 팔 게 없으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인데 단 한 가지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銀(은), 즉 실버였다.

 

사실 서양인들도 처음부터 은이 남아돌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뒤 대량의 은이 매장된 광산을 발견하고 채굴하면서 급기야 무역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엔 대량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1570년대의 포토시 광산(지금의 볼리비아)이 그것이다.

 

일본 역시 은 광산(1530년의 이와미 은광산)이 개발되면서 필요한 중국산 물건들을 다량으로 사갈 수 있었고 우리의 경우 은 대신에 저 유명한 고려인삼을 통해 중국과 무역할 수 있었다. 조공무역.

 

그런데 당시 명나라 시절의 중국에선 왜 그다지도 은을 좋아했던 것일까? 가령 중국에서도 은이 많이 생산되었다면 서양인들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은을 받는 거래를 별로 반기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 조정이 세제를 개혁해서 모든 세수를 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초기에 세금은 곡식과 같은 현물 납부가 원칙이었고 경우에 따라 비단이나 화폐 등으로 내는 것도 허용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운반이 편리한 동전으로 내게 되었고 나중엔 무게에 비해 가격이 높은 은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이를 一條鞭法(일조편법)이라 한다.

 

 

은을 통해 화폐시장경제로 넘어간 중국

 

 

그렇게 되자 중국은 사실상 은에 바탕을 둔 화폐경제로 전환했고 이에 다량의 은이 필요해진 마당에 때마침 남미의 포토시 광산과 일본의 이와미 은광으로부터 은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이 대단히 많이 필요해진 중국이었기에 은의 시세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높아졌는데 이것이 바로 무역이 가능해진 바탕이 되었다. 서양 무역상들은 본국에서 저렴하게 사들인 은을 중국에 가선 비싸게 넘겨주었고 대가로 받은 중국산 물건들 역시 유럽에 가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최근 국제금융에서 흔히 하는 엔 캐리나 달러 캐리와 원리가 같다.)

 

당초 중국 명나라를 일으킨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모든 백성이 관리들의 계도 아래 태어난 동네에서 살면서 자급자족하는 경제를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실천하려고 했다. 일종의 ‘유교식 공산주의’라 하겠다. (원래 유교의 이념은 공산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시장 화폐 경제

 

 

그렇기에 명나라는 해외와의 교역을 싫어했고 또 금지했으니 이를 해금정책이라 한다. 海禁(해금), 즉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 즉 해외무역을 엄히 금했던 것이다. 우리 식 표현으론 조선 말 대원군이 실시했던 쇄국정책이다.

 

해외와의 교역이 발전하고 늘어나면 자연히 상인들이 부자가 되고 그러면 주자학을 익혀 관리가 된 사대부들과 맞먹으려 들고 아울러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농촌경제가 시장경제로 넘어가면서 인구의 이동이 늘어나고 빈부의 차이가 커지는 것을 우려했던 중국 명나라였다. 경제가 정체된 상태에서 가난해도 좋으니 사농공상의 신분제 아래 얌전히 살다가라는 것이 중국 유교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게 되면서 경제는 급속히 시장경제로 바뀌어갔고 이에 조정에선 아무리 해외와의 교역을 막아도 바다로 나가서 한탕 해보려는 바닷가 사람들의 욕구를 막을 순 없었다. 간단히 말해 돈 되는 일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결국 중국 조정은 1567년에 가서 해금정책을 폐지했고 그 이후 경제는 급속도로 시장경제, 상품경제로 이행했으며 그로 인해 중국 경제의 생산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은이란 돈이 경제 내의 윤활유가 되어 경제를 원활하게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의 유통이 늘어나자 자본이 형성되었고 그러면 투자가 일어난다. 이에 대단위 비단공장이 생겨나고 벼농사 짓던 농민들은 자체적으로 소비하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뽕나무를 심어 原絲(원사)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식량은 사서 먹으면 되는 식으로 바뀌었다.

 

 

기득권을 누리던 사대부 계층에게 말세나 온 것과 다름 없었으니 

 

 

이런 식의 변화는 유교 지식인들에게 그야말로 말세가 온 셈이었다. 농부가 식량을 자체 생산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의 원재료인 원사를 생산해서 돈을 벌고 쌀은 사다먹게 되었으니 이건 정상이 아니란 생각을 했고 또 그냥 농부가 아니라 자본력을 갖춘 부자 농부가 사업가로 변신해가는 것이 그야말로 못마땅했던 것이다.

 

경제가 시장경제, 화폐경제로 변해가자 사농공상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商人(상인)들이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유교 지식인 또는 사대부들 사이에선 널리 퍼져갔다. 자칫 상인이 저들보다 위에 올라설 수도 있는 위험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유교 지식인들과 관리들이 막을 순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부가 늘어나면서 백성들의 삶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부의 편중에 따라 양극화가 진행되는 폐단 또한 당연히 생겨났다.

 

 

결국 나름의 절묘한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으니 

 

 

그런 뒤 명나라는 만주족에게 정복을 당했고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이 무렵이 되자 새로운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관리들에게 후원을 하거나 뇌물을 주었고 관리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선 상인들 특히 巨商(거상)들의 협조 또는 기부가 필수적이었다. 가령 홍수가 나서 다리가 무너지면 으레 지역의 거상들이 기부를 해서 다리를 복구하는 식이었다. 정부엔 그런 예산이 없었다.

 

청나라 시절의 중국 사대부 계층을 紳士(신사)라고 한다. (지금도 우리가 쓰는 표현, 신사 양반이란 말이 그것이다.)

 

신사 계층의 기반은 농촌의 토지였다. 즉 지주계급이었으며 소작인들로부터 받는 식량을 돈으로 바꿔서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곤 자녀를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갔다. 하지만 나중엔 신사층도 자녀의 일부는 공부를 시키지 않고 장사를 배우게 했다.

 

반면 상인들은 토지에 집착하지 않았고 뭐든 돈이 되는 것이면 사들이고 또 내다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상인들 역시 돈이 생기자 자녀의 일부를 장사만 시키는 게 아니라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해서 관리로도 진출해갔다.

 

그러자 신사층과 상인층의 구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져갔고 섞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절 관리의 급여는 너무나도 적어서 금전적인 유혹에 약하기 마련이었는데 지역 상인들의 후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상인들은 돈으로 사업상의 利權(이권)을 얻었고 관리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致富(치부)를 했다. 돈과 권력의 딜, 또는 거래였다.

 

청나라 시절의 이런 타협과 결합은 당시 조선으로도 유입되었고 그 바람에 흔히 얘기되는 영조와 정조 이후로 들어오면서 일반화되었으며 특히 세도정치를 통해 극심해져서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한 중국식 부패의 원형

 

 

지금 말하는 이 타협과 절충이야말로 중국식 부패의 원형이라 하겠다. 우리의 경우 1980년대 이후 공무원의 처우가 극적으로 개선이 되면서 대폭 줄어들었지만 중국은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하다.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이 방식으로 통치를 해가고 있으며 권력을 잡고 있다는 말이다. 청나라 시절의 중국과 현재 중국 공산당 통치의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중국 공산당은 국가 전체적으로 근간이 되는 사업의 경우 철저하게 국영기업을 통하고 있기에 공산당의 중소상인에 대한 통제력은 막강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산당 간부라든가 관리가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권사업에 상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치부하는 것은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다.

 

 

중국식 부패가 이어지는 한 중국은 어렵다. 

 

나 호호당은 중국식 부패에 대해 현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서 나름 납득을 하고 있다. 내가 만나본 중국인들 역시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탓에 중국이 향후 글로벌 세계를 이끌만한 자격을 갖추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알림:

 

당초 13일로 예정되었던 주식투자기법 강좌는 코로나2.5 단계 연장으로 인해 20일로 일주일 순연되었음을 알립니다. 장소는 강남역 근처의 강의장인 CNN the Biz(Tel:02-564-4172)이고 시각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402호나 502호 중에 한 강의실이 될 것입니다.

 

적은 인원으로 제한하는 바람에 정원 초과가 되었고 이에 2차 강좌도 하게 되었는바, 같은 장소와 시각이며 날짜만 일주일 뒤인 9월 27일 일요일이란 점 알려드립니다. 물론 개개인에게 별도의 메일 통지도 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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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엔 책이 많다, 집에도 많다. 세어보지 않아서 몇 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 한 번 세어보다가 지쳐서 그만두었다. 장마가 가셨지만 여전히 비가 내린다, 태풍 ‘마이삭’이 몰고 오는 비. 울적한 기분이 들어 작업실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全眞七子 全書(전진칠자 전서)”란 제목의 중국책이다. 오래 전 상하이의 신화서국에서 샀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책을 산 뒤 부산한 거리를 조금 걸어서 난징동루의 동쪽 끝, 와이탄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고급호텔 화평반점에 가서 필레미뇽 스테이크를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스테이크 향이 코끝에서 살아난다. 이젠 먼 옛 일, 그 때가 1996년이었으니 아련하다.

 

책은 전진칠자와 그 스승인 왕중양의 얘기들을 담고 있다. 왕중양은 중국 고대 新(신)도교의 개창자로서 전진파를 열었는데 그에겐 일곱 명의 뛰어난 제자 道士(도사)들이 있었으니 전진칠자라 한다. 그 중 한 명인 장춘진인 구처기는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에도 등장해서 현대에 와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長春眞人(장춘진인)은 물론 실존 인물이다. 당시 중국 북방을 정벌하던 몽골의 대 영웅 칭기즈 칸을 만나서 不死(불사)는 불가능하고 그저 살생을 금하고 덕을 베풀면 편히 오래 살 수 있다는 솔직한 말로 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던 사람이다. 영원한 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니 그 호가 참으로 멋지다.

 

왕중양도 그렇고 구처기를 포함한 전진칠자들 모두 도를 닦는 道士(도사)였을 뿐인데 훗날 무협작가들에 의해 엄청난 무공의 고수로 재탄생된 셈이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책을 진지하게 접할 날이 있을까? 생각하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내 서가엔 중국에서 나온 책들, 영문판 책들 번역판이지만 큰 도서관이 아니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책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젠 좀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언젠가 아들 녀석에게 야, 이담에 내가 가고 나면 이 책들 보관 아니 보존해 줄 거니? 하고 물었더니 아뇨! 하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여전히 많이 사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지런히 폐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냥 넋 놓고 살 때가 아니라 언제든 가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서가로 다시 눈을 돌리니 ‘헬레니즘 철학’이란 놈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의 앤소니 롱이란 학자가 쓴 책이다. 그래 좋다, 헬레니즘 그리고 철학, 그런데 어쩌라고, 이제 인생 다 살았다 해도 되는 내가 오래 전 철학자란 사람들이 생각하고 다듬어낸 생각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그 책 역시 이젠 이별해도 될 것 같았다. 창밖에선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다.

 

철학, 젊은 날엔 꽤나 진지하게 접했던 대상이다. 하지만 오래 살아보니 저런 것들, 저런 사람들의 생각을 몰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철학이란 그저 옛날 명석했던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런 것의 群集(군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대략 20년 전부터 들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들과 접하게 된 뒤론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애당초 철학이란 것은 그 자체로서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의 말은 나름 충분히 옳다. 철학자는 자신이 쓰는 용어부터 그 의미가 규정되어 있지 않기에 심하게 얘기하면 헛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

 

가령 자유에 대해 논한다고 해보자. 철학자들 저마다 생각하는 자유란 말이 의미하는 바가 같을 순 없다. 그러니 자유에 대해 논의하려면 먼저 자유의 개념에 대해 합의를 보아야 할 것이고 또 그러다 보면 자유를 규정하는 단어들 역시 또 다시 합의를 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그 어떤 것도 규정할 수 없고 따라서 논의할 수가 없게 되니 철학은 애당초 성립 불가능이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저 말은 고대 힌두철학의 한 갈래인 니야-야(Nyāya) 학파의 因明(인명)철학과 유사한 맥락이 있다. 불교철학과도 연관이 깊은데 소개하자니 독자들 머리만 아플 것이고 해서 예를 하나 들겠다. 여기에 소가 있다고 하자, cow 말이다. 니야-야 학파에선 소는 소가 아닌 것을 배제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소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자세히 따지고 들면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소는 토끼라든가 양, 염소 등등의 것들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아가서 가령 진리라든가 실체 그리고 보편자 등과 같이 서양 철학에서 중요시여기는 개념들은 그저 인간의 환상이고 착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어진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얘긴 죄다 헛소리란 것이다.

 

대충 동의한다,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러니 내게 있어 인류 역사에 있어 존재했던 수많은 현자들과 철학자들의 말들은 그저 그들이 남긴 좋은 수필, 즉 에세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아끼던 책들을 이젠 좀 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좀 더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구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것들을 내가 지니고 끝까지 보관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생각이 이런 식으로 미치자 서가에서 책들을 대략 수 십 여권 뽑아내었다. 잘 하면 책꽂이 하나 정도는 여유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해마다 2월 하순의 우수가 되면 책을 버린다. 벌써 몇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아낀다고 여기던 책들은 절대 폐기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런 생각들이 일종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끼던 책들마저 이젠 필요 없게 여겨진다.

 

지금 저 책들과 이별을 하면 나중에 또 찾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은근히 생긴다. 뭐 또 다시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구해도 더 이상 입수할 수 없는 책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후회하지 뭐.

 

창가에 다가가 비 내리는 거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모든 생각은 장마가 길고 비가 많아서 생긴 울적함 때문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다. 멜랑꼴리라고 하는 놈 말이다. 가끔 살다보면 이 한 몸뚱이가 그저 구차하게 여겨질 때도 있는 법이니 책 정도야 능히 그럴 법도 하다 싶다. 하지만 이까짓 몸뚱이 하다가도 코로나19에 걸릴 까봐 조심하게 되는 우리 아니겠는가.

 

사실 난 이제 수시로 바뀌는 내 기분이나 정서 같은 것은 스스로도 신뢰하기가 그렇다. 오늘 기분이 나쁘다, 또는 더럽다 해도 내일이면 또 바뀔 수 있는 것,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실이 또 그렇다.

 

처음에 책들을 확 버릴 생각으로 마구 뽑아내었지만 이윽고 생각을 돌려서 며칠 더 두기로 했다. 바닥에 어지럽게 벌려 놓을 순 없어서 구석으로 밀었다. 그간 아끼던 것들이니 내일 기분이 바뀌면 또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운명의 입춘 바닥을 지내오면서 한 가지 나아진 점도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각을 많이 한 뒤에 결정을 하고 또 결정을 내렸으면 결과가 나올 때까진 계속 해간다는 식이다. 그때그때의 분위기나 정서에 휘둘리지 않는다. 의지가 강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워낙 내 스스로 나에게 속아봤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를 믿지 않는다.

 

밤이 되니 비는 더 내린다.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줄기차게 내린다. 기온도 많이 내리고 있다. 오늘밤 그러니까 태풍 지나가는 아침엔 기온이 21도까지 내리고 이후로도 줄곧 내려서 이제 열대야는 끝이 났다.

 

이제 열흘 정도만 지나면 여름 내 무성하던 연밭도 시들 참이다. 넓적한 잎사귀 간 곳 없고 앙상한 가지만 수면 위에 그림자 비치는 처량한 연밭에 내리는 가을비도 계절의 한 정취인데 말이다.

 

윈디(windy)에 들어가 보면 태풍 마이삭이 지난 뒤에도 하나가 더 온다고 나와 있다. 태풍 3연타인 셈이다. 그러니 맑은 날씨는 다음 주 월요일 이후에나 볼 수 있겠다.

오늘 글은 문자 그대로 雜文(잡문)이었다.

나 호호당은 1998년 무렵 주식투자 당시 운 좋게 성공한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크게 좌절한 바 있습니다. 그 이후 20년 간 연구한 결과 마침내 알아낸 필승불패의 투자기법에 대한 강좌를 개최합니다. 강조라기보다는 기술 전수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참가 대상은 그간 저로부터 자연순환운명학을 배운 제자들에 한정됩니다.

 

꽤나 많은 생각을 한 결과 인연이 되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이 기법을 알려드리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에 강좌를 개최합니다. 그간 연구해낸 전부를 공개할 생각은 아니고 성공을 담보하기에 충분한 2 가지 기술에 대해서만 공개할 생각입니다.

 

참가대상: 10명 미만.

 

참강 조건: 자연순환운명학 이수자로서 봉 차트와 이동평균선에 대해 기초지식을 가진 자, 아울러 나름 주식투자 경력이 좀 있는 자.

 

참강료: 1인당 150만원.

 

신청 방법: 배우고자 하는 동기와 필요성에 대해 제 메일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밝혀주시면 살펴본 후 통지해드립니다.

 

강의일시: 9월 13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

 

강의 장소: 코로나 관계로 아직 미정이고 사람 간의 간격을 충분히 둘 수 있는 큰 강의장을 선정해서 추후 메일로 통보할 예정입니다.

 

주의사항: 녹음이나 녹화가 허용되지 않으며 배운 뒤 저의 사전 양해나 허락 없이는 제3자에게 유출하지 않겠다는 것, 그로 인해 있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선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를 강의장 현장에서 받는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기법을 알고 숙지하고 나면 이른바 데이트레이딩을 하거나 또 단타를 치거나 혹은 중기 거래이든 스윙거래이든 또는 면 장기 투자이든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주식필승기법을 연구하게 된 것 역시 증시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운명학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필승불패의 투자 기법을 알아낸 저로선 전혀 급한 생각도 없습니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채웠기에 이미 본전은 뽑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큰돈을 벌고픈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저로선 그냥 천천히 해가면서 즐길 일이라 봅니다. 그렇기에 이번에 기법을 공개하는 까닭은 혹시나 실전 혹은 死藏(사장)될 수도 있는 기술을 인연되는 제자들에게 전수해주자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