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운명이란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 또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호호당이 운명의 감춰진 이치를 밝혀내기 위한 길에 오르리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어쩌다보니 求道者(구도자)가 된 셈이다.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전혀 몰랐지만 당시 부산은 한창 사주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팔자를 잘 본다고 하는 어느 유명한 분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아들이 판검사 팔자라고 했다면서 얼굴색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그를 떠나서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가 있지? 하고 의아해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학교 짝지와 함께 부산의 영도다리 밑으로 구경을 갔다. 무당들이 점을 쳐주는 작은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가게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장군님, 귀여운 동자들 또 예쁜 선녀들 그림이 있었고 색상도 울긋불긋한 것이 전혀 다른 세계였다. 간간히 묘한 방울 소리도 들려와서 약간 겁도 나고 또 호기심도 일었다.

 

그 친구, 짝지의 말인즉 그 사람들이야말로 미래의 일을 기가 막히게 예측해낸다면서 자기 엄마가 수시로 여길 온다는 것이었다. 택일 즉 날도 받고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꼭 들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로선 꽤나 혼란했다. 그 무당들은 저마다 신을 받았다고 하는데 교회에서 말하는 그 하느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그 신이 바로 하느님인지 등등 나로선 전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두 살 위 누나에게 물었더니 무당들이 말하는 신은 저급하고 교회의 하느님은 훨씬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영 시원치 않았다. 학교 선생님에게 물었더니 하느님 즉 신은 세상과 우주에 단 한 분이며 무당들이 말하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이에 그 이유 즉 근거를 물었더니 그냥 그런 것으로 알면 된다고 하셨다. 겉으론 수긍하는 척 했지만 속으론 전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에 대해 짝지 말로는 무당들의 신은 수시로 무당의 몸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는데 유일신이자 지고의 신은 절대 나타나지 않으니 그게 더 수상한 거 아닌가? 하는 지적에 오히려 그게 더 그럴 듯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평양에서 함께 피난을 내려오신 나이 드신 스님이 가끔 우리 집에 오시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꽤 적지 않은 돈을 봉투에 담아드리는 모습을 곁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 스님이 6학년 봄인가, 나를 부산 동래의 범어사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당시로선 몰랐지만 천왕문을 지나가는데 눈이 부리부리한 장군들이 나를 아래로 쬐려보는 것이 꽤나 무서웠다.

 

스님, 저 분들은 신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불교에서 악귀를 쫓아내는 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높고 크신 분은 부처님이란 말씀이셨다.

 

당시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그러면 부처님은 신인가요? 교회의 하느님과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하고 물었다. 스님은 웃으실 뿐 애매한 얘기만 들려주셨다. 나중에 너 스스로 정답을 찾아보렴!

 

그 바람에 내가 궁금해 하는 문제, 신의 존재 증명은 점점 더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훗날의 숙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지? 하는 궁금증은 좀 더 파고들면 알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참고로 밝히면 이번 글은 설 연휴 동안 독자님들에게 그냥 가볍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짧게 이어가는 시리즈의 시작이다. 이에 단락의 중간 제목도 붙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