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원에 수유 만발하고 곳곳에 매화도 피어나는데 오늘은 비바람이 제법 거세다. 흥취가 일어서 잠시 산책을 나갔더니 갈피 없는 바람에 우산을 가누지 못한다.

 

겨울 지나가고 봄이 와서 저처럼 宛然(완연)하고 또 蔓延(만연)하다. 해마다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겨울은 죽어가거나 죽음의 때이고 봄은 다시 蘇生(소생)과 復活(부활)의 때이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일, 즉 非可逆(비가역)적이건만 자연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만들어놓는다.

 

며칠 전 “사람도 꽃처럼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2019년에 개봉된 ‘찬실이는 복도 많지’란 영화 속 대사라고 한다.

 

구례 화엄사에 홍매가 피었다는 소식, 수백 년 세월 동안 봄이면 회춘(回春)해 싱싱한 꽃으로 다시 돌아오는 매화의 얘기를 하면서 앞의 말과 대조시키고 있었다.

 

그게 그렇다. 사람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꽃은 되돌아온다. 그래서 슬프다.

 

하지만 이건 우리들의 착각이다. 꽃 또한 작년에 피었던 꽃은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 올 해 피어난 꽃은 또 다른 꽃일 뿐이다. 꽃 또한 한 번 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호호당 김태규”란 자는 한 번 가면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하지만 호호당과 비슷한 자는 인류가 이어지는 한 다시 태어날 것이고 또 죽어갈 것이다.

 

삶의 모든 기쁨과 슬픔은 결국 우리가 자기 자신, 즉 自我(자아)를 강하게 인지하고 인식하기에 가능하다.

 

개체로서의 자각, 즉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도 꽃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 무엇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이 얘기는 멀리 갈 것 없이 불교에서 말하는 諸法(제법)이 無我(무아)하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래서 나 호호당은 이 가르침이 싫다. 삶은 단 1회의 기회이자 공간이고 시간이기에 애틋하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흘러갈 뿐이라면 그게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대목에서 나 호호당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떠올린다. 길이 든 서로에게 있어 어린왕자와 장미는 세상에 둘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삶에 대한 집착이 어리석은 迷妄(미망)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 호호당은 하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도 하나뿐이고 당신도 하나뿐이다. 물론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아름답고 슬프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風雨(풍우)가 휘젓고 다닌다. 2024년 봄의 정취이다.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