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이런 말은 좀 어려워서 

 

 

가령 누군가 독자에게 “당신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해온다면 “글쎄요, 제 가치관이라, 딱히 이렇다고 말하기가...” 하면서 망설이게 될 공산이 크다.

 

이에 당장 말로 답하기가 어려우시면 어디 한 번 시간을 갖고 글로 써보시죠, 이런 제의를 받으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가치관,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만 무척 추상적인 데가 있어서 말이든 글이든 명료하게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질문의 방식을 바꾸면 쉬워진다

 

 

이럴 때 질문을 바꾸면 아주 쉬워진다.

 

당신이 마음속으로 닮고 싶은 사람, 또는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실 터인데 한 번 말씀해보시죠, 이렇게 물어보면 쉽다.

 

누구나 마음속에 닮고픈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을 것이고 멋지다고 여겨지는 사람 또한 당연히 있을 것이니 바로 그 사람 혹은 사람들을 답하면 된다.

 

닮고픈 사람, 멋진 사람, 또는 동경하는 사람, 한 명이어도 좋고 여러 명이어도 상관이 없다.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당신의 가치관을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왜 당신이 그 사람을 존경하는지 닮고자 하는지 아니면 멋지다고 여기는지 등등을 한 번 살펴볼 것 같으면 그게 바로 당신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로서 그 사람이 역사의 인물인 이순신 장군이라 하자. 그러면 떠오르는 생각으로 忠節(충절), 희생정신, 지략 등등 여러 요소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으니 悲壯美(비장미)도 넘친다.

 

이에 당신이 이순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悲壯美(비장미)에 있다면 당신은 나름 영웅의 오연한 기개를 높은 가치로 치는 사람인 것이니 이미 벌써 당신의 가치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순신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로서 또 다른 요소를 더 높게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그건 그 사람 나름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좋아하고 동경하고 닮고자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서 내가 무슨 까닭으로 저 사람들을 닮고 싶거나 멋지다고 여길까? 하고 생각해보면 바로 그 과정 자체가 당신의 다양한 가치관을 스스로 나타나게 만든다. 나아가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그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인물을 本(본)으로 삼고 있나요? 

 

 

우리말에 “본받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本(본)을 따라 한다는 말이다. “본보기”란 말도 本(본)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본뜨다”는 말 역시 본으로 삼아 그대로 만든다는 말이다.

 

本(본)이란 한자어에는 “모범으로 삼을 대상”이란 뜻이 있는데 바로 그 말이다.

 

영어 용어로서 역할 모델(Role Model)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미국의 로버트 머턴(Robert Merton)이란 사회학자가 만들었고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 역할 모델이란 바로 本(본)과 의미가 같다. 이미 우리말에 좋은 표현이 있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써온 단어이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本(본)이 바로 당신의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의를 갖춘 인사말로서 “성불하세요”,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成佛(성불)이 무언가? 바로 부처님처럼 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을 본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나 호호당은 불교에 대한 信心(신심)을 가졌지만 부처님이 나 호호당의 本(본)은 아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엄청나게 존경하지만 그렇게 되기란 사실 어림도 없는 얘기가 아닌가!

 

부처님이나 예수님, 닮고자 해도 그게 너무나 벅차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당연히 없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본을 삼으면 된다.

 

이처럼 本(본)은 역사상의 인물이나 偉人(위인)이 아니어도 되고 살아있는 셀럽이나 유명인이 아니어도 된다. 예컨대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닮고픈 사람이야, 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독자야말로 좋은 아버지를 둔 훌륭한 분이자 동시에 복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절대 무방하다.

 

본은 당연히 사람이어야 하고 또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본을 가진 당신의 가치관도 명확해지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본은 여러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건 그 여러 사람들이 가진 여러 좋은 요소들의 조합이 바로 당신의 가치관이란 것을 말해준다.

 

본은 어려서부터 지닐 수도 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처한 환경과 경험에 따라 바뀌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정상이다.

 

 

나 호호당의 마음속 本(본)

 

 

나 호호당의 예, 즉 나 호호당의 본을 들어본다.

 

어려선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했던 탐험가 마젤란이었고 중학교 시절엔 史記(사기)를 쓴 사마천과 프랑스 혁명이 낳은 풍운아 나폴레옹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실크로드를 탐험했으며 중국 간쑤성 둔황 막고굴의 유물을 연구해서 학계에 알렸던 영국의 “아우렐 스타인 경”이었다. 또 둔황이란 중편 소설을 쓴 일본의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 또한 호호당의 본으로 남아있다.

 

사실 더 있지만 독자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겠기에 생략한다.

 

마젤란, 사마천, 나폴레옹, 아우렌 스타인 경, 그리고 이노우에 야스시, 이런 사람들이 나 호호당의 본이라 하겠는데 왜 그런 가를 잘 따져보면 그 속에 나 호호당의 가치관이 잘 버무려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탐험가적인 기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기존의 틀을 넘어서려는 破格(파격), 자신의 안위나 영달보다는 그 너머 더 큰 것을 지향하는 이상주의적 성향 등이 있다.

 

나 호호당이 자연순환운명학이란 새로운 운명의 과학을 만들어낸 것, 증시에 대해 독창적인 기술을 다듬어낸 것 등은 바로 앞의 본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와 지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각자의 마음속 本(본)이야말로 각자의 가치관을 나타낸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이로서 오늘 이런 글을 쓰게 된 진짜 이유에 대해 얘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끝났다. 지금까지는 세팅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일까? 

 

 

올 해 초 “산다는 것, 그리고 잘 잘 산다는 것”이란 책을 엮어서 내놓았다. 책을 내고 나서 그 제목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 호호당의 마음속에 커다란 화두로 자리를 잡아왔다.

 

사는 것은 태어난 이상 어차피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할 것이니 그렇다 치고 그를 떠나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과연? 하는 질문이었다.

 

오늘의 글은 그 질문에 대해 그간 숙고해온 나름의 해답이다.

 

잘 산다는 것은 저마다 마음속에 지닌 본을 따라서 또 본을 받아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얘기이다.

 

저마다 本(본)이 다를 것이니 正答(정답) 또한 당연히 없다. 본이란 것이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요, 그렇게 되어야 할 까닭 또한 없다. 저마다의 가치관이야말로 다양성의 기틀이다. 그 다양한 가치관들이 때론 충돌하고 갈등하기도 하고 거꾸로 타협하거나 조정을 보고 또 조화를 이루면서 이 세상이 만들어져왔고 또 만들어져가는 것이니 말이다.

 

올 해 초에 책을 엮으면서 제목을 달고 난 뒤 가지게 된 숙제이자 화두는 과연 잘 산다는 것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간의 사색을 거쳐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만들었다.

 

각자의 마음속 멋지고 존경하고 닮고 싶은 어떤 이를 本(본)으로 삼고 따르고 받아서 사는 것, 꼭 本(본)대로 되진 않을지언정 최대한 유사해지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잘 산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답변이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지만 독자들에게도 작은 도움이나 어드바이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또는 기대를 하면서 이런 글을 올린다.

 

 

상강이 지났으니 2022년도 저물어가네

 

 

이제 서리가 내린다는 霜降(상강)이 지났다. 가을 수확이 본격화되었고 그로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2022년 또한 얼마 안 가서 過去(과거)가 될 것이니 늘 해마다 이맘때면 늘 感慨(감개)한 무엇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