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양백 사이로 가는 길)
兩白(양백)이란 太白(태백)산과 小白(소백)산을 아우르는 말이다. 예전에 산을 좀 타는 사람에게 이 말을 배웠는데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의 秘境(비경)은 80%가 태백과 소백 사이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이 지역은 북한강과 남한강, 낙동강의 상류 물줄기를 이루는 곳들이기도 하다.
방태산에서 시작된 내린천은 소양강을 만들고 이윽고 북한강을 만든다. 오대산에서 시작된 물은 남한강 수계로 흘러가는데 밑으로 정선 아우라지와 소금강, 동강의 가수리와 어라연 계곡, 영월의 법흥사 계곡과 맑디맑은 주천강을 지나고 단양을 지나서 충주호에 이르러 남한강이 된다.
그리고 영주의 부석사, 단풍 화려한 청량산, 안동 도산서원 상류의 가송리 계곡, 또 그 왼쪽의 하회마을과 회룡포, 그 아래의 주왕산 국립공원에 이르는 물줄기는 낙동강을 만들어간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니 그야말로 혼자 보기 아까운 절경들이 이어진다.
이를 압축해서 표현이 바로 兩白之間(양백지간), 즉 태백과 소백의 사이에 있는 비경들이다.
나 호호당은 50 이전에 해외여행을 좋아했지만 그 이후론 어느덧 우리나라 여행을 더 애호하게 되었다. 금전적 부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금연을 해야 하는 비행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담배를 끊었기에 해외여행이 더 좋으냐 묻는다면 여전히 아니오, 이다. 이젠 해외여행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양백지간의 장소들 하나하나마다 예외 없이 추억이 서려있고 그 추억 속에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어려 있다. 옛 사랑, 옛 사람, 한때 인연이 되었던 그리운 얼굴들이 한 장소를 떠올리면 절로 눈앞을 스쳐간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이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락이 끊어진 이도 있고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며 여전히 자주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생각할 때마다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돌이켜보니 양백지간의 여기저기를 가서 노닐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간단히 말해서 시간 많은 野人(야인)이 된 뒤부터였다. 대략 지금까지 25년간의 일이고 나 호호당의 나이 마흔 중반부터의 일이었다.
중년의 호호당이 좀 노닐다 보니 어느덧 노년의 호호당이 되었고 그 사이에 도끼자루는 썩었다.
양백지간으로 나가려면 거의 통과하게 되는 지점이 하나 있으니 만종 분기점이다. 영동고속을 타고 달리다가 문막 휴게소에서 유부우동을 한 그릇 먹은 뒤 출발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곳, 그냥 직진하면 강릉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진부IC로 나가서 정선 쪽이나 오대산 쪽으로 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오른 쪽으로 꺾어서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선다.
만종분기점을 지날 때면 으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프랑스 화가 밀레의 유명한 작품 제목인 ‘만종’이 그것이다. 밀레 작품의 만종은 晩鐘, 즉 교회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이고 만종분기점의 만종은 萬鍾, 즉 만개의 종이니 뜻이 다르다.
그런데 언젠가 영월 법흥사를 갔다가 돌아오면서 만종분기점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저녁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차창 밖의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으니 늦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내 귀에 멀리서 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상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만종분기점을 지날 때면 늘 밀레의 그림이 연상되고 교회의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뒤로도 양백지간으로 나가느라 만종분기점을 무수히 지나다녔다. 직진하기도 하고 오른 쪽으로 꺾기도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한 15년 전 쯤이었을까? 만종분기점을 지나면서 내겐 아직도 길고 긴 삶의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만종분기점의 그 저녁 종소리는 그냥 여느 하루의 저녁이 아니라 내 삶의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어갔다. 호호당의 삶도 저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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