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책 속의 한 구절

 

마흔부터 지금까지 다 읽기를 십 여 차례 거듭해온 책이 하나 있다. 淮南子(회남자)라고 하는 책이 그것이다. 自然循環(자연순환)과 운명의 이치를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고마운 책이기도 하다.

 

책은 老子(노자)와 莊子(장자)를 기본으로 하고 천문 지리 등등 당시까지의 다양한 학설과 주장들을 두루 모아서 나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글귀 또한 무척 아름답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중국무술도장에서 화교 사부로부터 漢文(한문)을 익힌 것이 평생에 걸쳐 지식의 넓은 세계를 두루 섭렵하는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한문으로 된 회남자를 읽어낼 수 있고 어지간한 현대 지식은 영어 원문으로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회남자 속엔 좋은 글귀들이 많다. 그냥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곱씹다보면 문득 깨닫는 바가 있는 문장들이 많다. 이에 오늘은 그런 문장 하나를 소개하고 느낀 바 생각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原流泉浡(원류천발),沖而徐盈(충이서영),混混滑滑(혼혼활활),濁而徐清(탁이서청), 이렇게 겨우 16개 자에 불과한 문장이다.

 

약간 풀어서 옮겨본다.

 

물의 흐름이 산이나 언덕 등지에서 처음 솟을 때 우린 그것을 샘이라 한다. 비 오기 전엔 그냥 움푹한 구덩이였는데 샘물이 계속 솟아나다 보면 서서히 차오른다. 그러다가 그 물이 많아지면 마침내 구덩이 밖으로 넘치게 된다. 처음엔 바깥의 흙과 섞여서 흙탕물이지만 계속 물이 넘쳐 나오다 보면 줄기를 이루어 맑아지고 또 매끄럽게 흘러간다. 그러면 그게 시내나 개울이 된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땐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니.

 

그랬는데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다시 문장을 읽었을 땐 아니? 이렇게 대단한 말이 있었단 말인가 싶었다.

 

功(공)을 이루고 일을 성취하는 핵심이 저 16자 문장 속에 오롯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애고 한심해라!

 

 

독자님께서 물 또는 물방울이라 여기고 한 번 생각해보자. 처음 샘이 솟을 때 구덩이는 물의 양에 비하면 우주와도 같이 넓을 것이다. 작은 구덩이일지라도 한 방울 물의 입장에서 그걸 가득 채우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방울이 솟아나고 모여야 할까? 끝도 없이 모이고 또 모아야 구덩이를 채우고 그래야만 넘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엔 한심한 노릇일 것이다. 이걸 언제 다 채워? 百年河淸(백년하청)이지 싶다.

 

이렇게 처음엔 텅 빈 구덩이였지만 끊임없이 물방울이 모이다 보면 가득 차게 된다고 글에선 이르고 있다, 沖而徐盈(충이서영)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순간 넘쳐서 구덩이 바깥으로 나간다. 그러면 그곳은 마른 땅일 것이니 즉각 땅속으로 다시 스미거나 아니면 흙과 섞여서 흙탕물이 될 것이다. 아, 나는 흙탕물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흐름 즉 淸流(청류)가 되고픈 데 싶다.

 

 

청류 그리고 탁류

 

 

하지만 현실은 청류가 아니라 濁流(탁류)가 고작이다. 아니 탁류는 고사하고 그냥 마른 땅속으로 스며서 다시 사라지지 않으면 그로서 천만다행이다.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그리고 청년창업자들이 3년을 못 가서 ‘신불자’가 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로 되돌아간다. 흐름 즉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淸流(청류), 맑은 흐름을 말한다.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과 같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청류라 하면 고고하고 도도하게 자신의 원칙과 신조를 지키며 살아가는 선비를 일컫는다.

 

하지만 그런 청류는 권문세가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금수저나 다이아몬드 수저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 (고려 말 이성계의 앞길을 막았던 최영 장군이 황금 보기를 돌처럼 한 것 역시 최고 명문의 집안에 황금이 켜켜이 쌓여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이에 역사를 통해 실제의 현실은 과거에 붙고 벼슬을 하면서 끊임없이 세력에 붙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나마 현재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력을 이루어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던 이들을 黨人(당인), 즉 ‘무리의 사람’ 또는 ‘떼거리’라 불렀다. 조선시대의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등 말이다.

 

과거급제부터 실은 뒷배가 있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랬다. 이에 치사하고 더러워서 포기하거나 아니면 아예 비벼볼 데가 없어서 그냥 초야에 파묻혀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으며 살아가는 선비도 전혀 없진 않았다. 晴耕雨讀(청경우독)이란 말이 그것이다. 志操(지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이 그랬던 경우가 더 많았다.

 

옛날 사서삼경을 읽고 공자왈 맹자왈 하면 배운 사람, 지식인 또는 文人(문인)이었던 시절의 얘기이다. 일반 常民(상민)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고 한 수 접어주었다는 얘기이다. 지체가 있으셨던 문인들이었다.

 

 

보통 사람은 반은 맑고 반은 탁한 법이어서

 

 

하지만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에도 淸流(청류)가 있고 濁流(탁류)가 있으며 청류나 탁류 또한 그 안에 여러 등급이 있다.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겉으론 청류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이면을 보면 여전히 빌붙어야만 뭔가 자리를 차지하고 행세를 할 수 있다. 나름 인정받는 이른바 대학교수, 주요 일간지나 방송국의 기자나 논평가, 고위직 공무원들도 때가 되면 정치권과 어떻게 해서든 인연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종교계 또한 그런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정권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그 청류란 사람들에게 생사가 달린 큰일이다.

 

반대로 탁하고 천한 것 같이 보여도 실은 청류 또는 淸貧(청빈)한 이도 있다. 실로 천태만상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절반은 맑고 절반은 탁하다. 반청반탁. 맑고자 해도 맑을 수가 없고 탁하고자 해도 그렇게까지 탁하긴 어려운 보통의 사람들이다.

 

이제 다시 앞에서 소개한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서서히"란 말이 중요하다

 

 

처음엔 텅 비었으나 서서히 차오르고 처음엔 진흙탕 물이지만 서서히 맑아진다고 하고 있다.

 

沖而徐盈(충이서영),濁而徐清(탁이서청).

 

공통의 요소는 서서히 즉 徐(서)란 글자에 있다.

 

처음 어떤 일을 시작한 사람이 즉각 대박을 내는 경우는 없고 현실은 정반대, 대다수가 도중에 실패로 끝이 난다. 채워야 할 공간이 한 방울의 물에 비하면 너무나도 큰 까닭이다. 성공하려면 그저 하염없이 구덩이에 물을 채워야 한다. 다시 한 번 얘기이지만 서서히 徐(서).

 

처음부터 고고하고 지조가 있으며 원칙을 지키며 살아갈 순 없는 세상이다. 밥을 먹어야 하고 생활을 해야 하며 ‘소확행’도 해야 할 것이니 우선 당장은 돈부터 벌어야 할 것이다.

 

돈 버는 일이 어디 그리 쉽나, 타고난 두뇌와 끈기를 바탕으로 명문대학 나오고 집안 뒷받침도 있어야만 사회 진출의 첫발부터 연봉이 괜찮은 곳에서 시작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것이고 정치인들은 또 그런 불만과 불평등을 내세워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다.

 

최근의 N포 세대들을 보노라면 마치 옛날 초야에 묻혀 살아가던 선비 생각이 난다. 오늘날엔 교육수준이 그런대로 다 높고 토익(TOEIC) 점수도 제법 되니 모두 선비 계급 아닌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섬기는 나라는 예전의 淸(청)제국이 아니라 미국이니 四書三經(사서삼경)이 아니라 영어를 공부해야 함도 당연지사.

 

그나마 다행인 건 옛날엔 계급이 확실했지만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이고 데모크라시라서 정말 좋아진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소확행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N포로 살 것인가 또는 공무원 시험 간신히 붙거나 나름 취업해서 딩크로 갈 것인가, 혹은 자녀를 낳고 지지고 볶으며 살 것인가, 금수저 배경이었다 해도 오늘날의 재산은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으니 그 누구도 보장된 삶을 살긴 어렵다.

 

험한 세상이다, 하지만 언젠들 편한 세상 있었으랴 싶다. 세상은 항시 末世(말세)인 법.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런 속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물방울이 구덩이를 끊임없이 채워야만 차오르고 처음엔 흙탕물일지라도 하염없이 물이 치솟다 보면 마침내 淸流(청류)를 이루고 흔연히 흘러갈 수 있다는 얘기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니 청류 탁류 따질 일도 아니고 어느 세월에? 하면서 한탄할 일도 아니다. 청류가 탁류되고 탁류가 청류될 수 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산골짜기의 샘물이 모이면 시내가 되고 개울이 되며 그게 또 모여서 강이 川(천)이 되고 그러다가 더 모이면 江(강)을 이루어 유장하게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간다.

 

이를 일러 源遠長流(원원장류)라 한다. 물의 근원이 저 멀고 먼 산으로부터 길게 흘러왔으니 바다로 간다는 얘기이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니 내(川)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 하는 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의 구절 또한 그것이다.

 

회남자의 한 구절이 내게 이런 거야 하며 알려준 내용을 글로 풀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