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끝과 시작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여전히 덥기만 한데 하면서. 하지만 나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보인다, 무척이나 점잖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뻗어갈 때가 아니라 서서히 뭔가 알갱이를 만들어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로 빠르게 피어오르는 저 뭉게구름, 늦여름의 정취가 아니면 무엇이랴! 한 해가 이제 정점에 이르렀다. 기억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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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기운이 들어서는 입추

 

 

먼저 날씨 얘기부터 해본다.

 

가을의 기운이 일어서기 시작한다는 立秋(입추)가 7일 토요일이었다. 사실 입추에 가을의 조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여름의 한 가운데란 인상이 더 강하다. 그런데 이번에 묘한 점은 입추가 되면서 기온이 한 풀 꺾였다는 점이다.

 

현재 밤 11시 24분, 기온은 26도. 25도 이상이면 열대야라 하지만 그다지 무덥지 않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부터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간 너무 더워서 이젠 이 정도는 적응이 되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오늘 10일은 하루 종일 뭉글뭉글한 구름들이 여기저기 연이어 피어올랐다. 청람의 하늘과 밝게 빛나는 흰 구름, 그 사이사이에 습기를 머금은 잿빛 구름들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사라지고 또 쓸려가고 있었다. 10분만 지나도 모습이 달라지니 높은 하늘에 바람이 세찼던 모양이다.

 

나 호호당은 운명의 입춘 바닥을 지난 이후 지금껏 질리지 않고 가장 재미나 하는 것이 하늘 구경이다. 멋진 하늘을 볼 때면 저걸 수채화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궁리에 빠진다. 이렇게 칠을 하고 조금 기다렸다가 아름다운 그레이를 혼합해서 구름 그늘을 칠하고 등등.

 

그 어떤 쾌락도 채울 때마다 점점 강도가 약해져간다. 심지어는 본능적인 욕구까지도 오래 살다보니 때론 성가시고 귀찮다. 정말이지 나 호호당은 살기 위해 밥을 먹을 뿐이다. 맛있는 것은 얼추 다 먹어봤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늘 구경 그리고 그림 작업은 물리지도 질리지도 않는다.

 

하늘 구경과 그림 작업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하늘 구경을 택하겠다. 그림은 그릴 때마다 늘 도전이고 힘들고 벅차기 때문이다. (독자들께서 나 호호당이 그림을 쉽게 그리는 줄로 아실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잘 그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친분이 있는 시인이 한 명 있다. 그 양반이 몽골에 몇 달 다녀온 뒤 하는 말이 “그저 구름만 보고 왔지요,” 였다. 상당히 심심했다는 투의 말이었지만 나는 그거 참 좋았겠네! 했다.

 

이토록 하늘 구경을 즐기니 은근히 걱정도 된다. 죽은 뒤에 더 이상 하늘 구경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저 세상, 그런 게 혹시 있다면 얘기인데 그곳엔 하늘 구경보다 더 좋은 것이 있긴 할까? 싶다.

 

 

운이 좋다는데 왜 상황이 어려울까요? 하는 질문

 

 

이제 오늘의 주제로 들어가 본다.

 

며칠 전 메일로 질문을 하나 받았다. 예전에 상담 왔던 분이었는데 운의 흐름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직한 직장에서 상사와의 갈등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데 이런 일이 있으니 혹시 잘못 보신 건 아닌가 하는 문의였다. 종종 받게 되는 질문이다. 글로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독자들이 그간의 글을 모두 이해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다시 한 번 밝힌다.

 

 

운이란 결국 열정이다. 

 

 

운이란 무엇인가? 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 사람의 熱情(열정)이다. 하지만 열정이 있다고 해서 주변 사람과 갈등이 사라지거나 돈이 잘 벌리거나 하는 일이 술술 풀리진 않는다. 때론 열정이 강하다 보니 주변과 마찰을 빚는 일도 있다.

 

운이 좋다고 해서 모든 일이 풀리고 고민이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건 살아있는 한 만나기 어렵다. 인생은 그 전체가 고생이고 고통, 그렇기에 싯다르타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운이 좋다 또는 운이 상승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를 보자. 가령 문제가 생기면 그로 인해 고통을 받지만 그 문제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고 어떻게 해서든 상황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해결을 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일이 풀리기도 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면 그를 통해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게 바로 운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안 되면 안 돼요, 이런 얘길 자주 듣는다. 그건 고통 받기 싫다는 얘기일 뿐이지 될 지 안 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다만 운이 좋다면 운이 상승 중이라면 이번에 꼭 되어야 할 일이 비록 되지 않는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또 다시 노력하고 애를 쓴다. 그 노력이 반복되다 보면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면 이루어진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은 대단히 드물다. 

 

 

세상이치는 간단하다, 공짜는 없고 절로 되는 일은 없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빈말이 아니다. 남들 보기에 어떤 사람의 일이 절로 쉽게 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게 쉽게 된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선행 노력이 있었음을 주변에서 그리고 남들은 모르기 때문에 쉽게 되는 것처럽 보일 뿐이다.

 

大數(대수)의 법칙, law of large numbers, 즉 큰 숫자의 법칙이란 게 있다.

 

시도를 빈번하게 하고 자주 하다보면 목적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대수의 법칙에 속한다.

 

 

사람은 지극히 영리한 동물이어서 

 

 

이에 그렇다면 어떤 일이든 계속 하면 되나요?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 호호당은 물론이지요, 하고 답한다. 그런데 말이다, 인간은 득실을 따짐에 있어 지극히 영리한 동물이라서 될 성 싶은 않은 일을 무한 반복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리가 짧고 키가 작은 사람이 달리기를 무한 반복한다고 육상에서 좋은 성적을 내진 못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무한 반복해보시지요, 하고 권하고 심지어는 강제해도 하지 않는다. 내가 바보입니까? 하고 거부한다. 달리기를 하느니 차라리 체질에 맞는 레슬링을 하지요 한다.

 

그런데 인간은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영악하다. 자신에게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기 위한 시도 자체도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기회비용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껏 몇 번 해보고 나서 전 아닌데요, 한다.

 

그렇기에 어떤 일의 적성은 그 방면의 전문가가 그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할 때가 많다. 자네 이 일 한 번 해보지 그래!, 맞을 것 같은데. 하고 권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란 사람들의 말 또한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 세상은 먹고 사는 세상이라 전문가란 사람 또한 매출을 올려야 하기에 그냥 적성에 맞을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 본인에게 이득이 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반대로 자넨 좀 할 것은 같지만 최고 1류는 되긴 어려워, 하고 냉철하게 얘기해주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증권전문가? 고객에게 이런 저런 주식을 사라고 하는 사람이지 팔라고 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왜냐면 사야지만 자신이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그렇다. (그래서 증권방송을 보면 늘 판단은 고객의 책임이란 단서를 붙인다.)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서 

 

 

결국 세상에 쉽사리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긴 어렵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 역시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찾다 보면 찾아진다. 그 사이에 수업료도 내고 시간도 보내야 한다.

 

열정을 갖고 시도를 반복하는 일 그 자체도 실은 고통이다. 이리 해도 안 되고 저리 해도 안 될 때도 많다. 하지만 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 하나로 시도를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운은 지금 한창 상승 중이라 봐도 무방하다.

 

 

운 그리고 열정이란 것 역시 지속시간이 정해져 있다. 

 

 

이쯤에서 중간 정리를 좀 하겠다. 운이란 열정이라 했는데 열정이란 것 역시 무한히 이어지거나 샘솟는 것 역시 아니란 사실이다. 타고난 열정의 크기? 그거야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열정의 지속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다.

 

운 그리고 열정이란 것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소멸되면 겨울이고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하면 봄이다. 그리고 펄펄 끓어오르면 여름이고 그러면서 서서히 소진되어 가니 그게 가을이다. 전체해서 60년의 사이클이고 한 계절은 각각 15년이다.

 

(그리고 5년 60개월 주기로 동일한 현상이 반복된다, 이는 작은 주기라 하겠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때론 헷갈리기도 한다.)

 

 

밥짓는 것에 비유할 것 같으면 

 

 

이쯤에서 밥 짓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자.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솥 안에 씻어 넣고 물을 잡는다. 이로서 겨울의 끝이자 봄의 시작인 立春(입춘)이다.

 

전원을 올리면 솥 안에 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게 봄의 끝이자 여름의 시작인 立夏(입하)이다.

 

그러다가 열이 점점 더 가열되면서 쌀이 펄펄 끓어오르고 그로서 익어간다. 그게 여름의 끝이고 가을의 시작점인 立秋(입추)이다. 하지만 아직 그건 익어가는 쌀이지 밥은 아니다.

 

이제 솥 안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뜸이 들고 바야흐로 밥이 만들어진다. 그게 가을의 끝이자 겨울의 시작인 立冬(입동)이다. 이제 밥 짓는 일이 마무리되었다, 밥을 먹을 수 있다. 겨울인 것이다.

 

 

열정이 소진되는 순간 성취한다. 

 

 

사람들은 돈을 원하고 성취를 원한다. 그걸 밥이라 해보자. 밥이 언제 되는가? 하면 겨울의 입구인 立冬(입동)이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점은 열정 소멸과 동시에 성취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내적 에너지인 열정과 외적 성과가 서로 교환된다고 보면 되겠다. 잘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삶의 놀라운 逆說(역설)이다.

 

저는 언제쯤이면 일이 술술 풀릴까요? 하고 묻는 이가 있다. 그러면 얘기해준다, 당신의 열정이 소진되는 순간에 일이 이루어진다고. 다 때가 있다고.

 

어젯밤에 쓴 글인데 오늘은 하늘이 다소 흐리고 먼지도 많았다. 오늘 하늘은 별로였다.

이번 올림픽, 1984년 이래 최악의 성적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우리는 금메달 6개 포함 19개의 메달을 땄다. 그리고 이번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와 총 20개의 획득했다. 같은 메달 수이지만 당시엔 종합순위 10위였고 이번엔 16위였다. 최악의 성적이다. (메달 수는 거의 같지만 신규 종목이 늘어난 까닭이다.)

 

최악의 성적이라 말하는 것은 우리가 1984년 이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던 것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의 여파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12위를 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늘 10위 안에 들었다. 그렇기에 이번의 16위는 최악이다.

 

 

36년만에 기세가 꺾인 대한민국

 

 

더 중요한 점은 1984년으로부터 36년-실제론 37년-만의 일이란 점이다.

 

세상 만물은 36년이 지나면 反轉(반전)의 흐름이 오는데 이번 올림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60년 순환을 하나의 원운동으로 보면 30년이 흐르면 반대 위치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 반전이 구체화되는 것은 36년이다. 이로서 우리의 국운이 꺾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겨우 스포츠 따윌 가지고 그렇게 볼 수 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올림픽과 같은 글로벌 행사야말로 그 나라의 국운, 운세 흐름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세상 흐름이 36년이 경과할 무렵에 반전이 구체화되는 것은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니다. 그간 블로그를 통해 무수히 알려드린 바 있다.

 

비근한 예로 우리가 일제에게 강제 합병을 당한 것이 1910년이었는데 36년이 채 안 되는 1945년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이런 예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볼 수 있으며 나라만이 아니라 기업의 흐름이나 개인의 인생사에서도 너무나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언어가 타락한 시대

 

 

언론이나 미디어들은 우리의 부진에 대해 애써 변명하거나 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묻어 버리려 하고 있다.

어떤 언론의 기사를 보니 메달 수는 적었어도 젊은 세대들은 경기를 즐겼고 팬들 또한 여기에 환호했다고 쓰고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올림픽 경기 역시 경쟁이고 싸움이다. 오랜 기간의 훈련을 거쳐 국가 대표로 선발이 되고 각국의 쟁쟁한 선수들과 맞서 겨루는 올림픽 무대는 평생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있을 수 있는 선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무대이고 동시에 싸움터이다. 그러니 그걸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

 

여자배구의 글로벌 천재인 김연경 선수가 브라질이나 세르비아, 터키와 같은 강팀과 시합을 치르면서 즐겼다고 보는가? 온갖 악이란 악을 다 써가면서 혼신을 다해 싸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선수들은 물론이고 팬들도 환호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경기를 즐긴다는 표현에 대해 심하게 얘기하면 그건 출전한 선수들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이 없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그걸 즐긴다고 하니.

 

김훈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이 시대는 언어가 타락한 시대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동감이다. 즐긴다는 말의 의미마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뜻? 아니면 안 되면 말고 하는 마음가짐? 도대체 모르겠다. 스마트폰으로 게임 한 판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패배를 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패배를 뼈에 새기는 자만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미국 선수들이 간혹 게임을 즐긴다는 식의 표현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僞善(위선)이다. 미국 선수의 경우 올림픽 국가대표로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수 생활을 하든 다른 일을 하든 관계없이 대단한 경력으로 인정이 된다. 그러니 반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반만 맞는다고 하는가 하면 미국 역시 假飾(가식)과 僞善(위선)으로 가득한 나라이기에 이왕 진 거 차라리 즐겼다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미국적 매너이자 멘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 스포츠 선수가 올림픽에서 성적을 얻지 못하고 또 스스로 실망한 나머지 다른 길을 찾을 것 같으면 그야말로 인생이 피곤하고 고달파진다. 우리 사회는 한 발 발을 들였으면 죽으나 사나 그 길 또는 그 바닥에서 비비고 들러붙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긴 어둠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것이니 

 

나 호호당은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기세가 꺾였음을 확인했다.

 

가슴이 많이 아프다. 비단 이번 성적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걸어야 할 길고 긴 어둠의 가시밭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책의 말을 인용하면 이제부터 우리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것임을 알기에 그렇다.

 

물론 사람은 금방 적응한다, 상황이 어려워도 겪다 보면 당연시하게 된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1955년생이라 그간의 모든 일들을 내 눈으로 지켜봤고 그간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는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았던 시절과 지금

 

 

예전엔 서울 인 대학이든 지방 대학이든 대충 학점을 따고 졸업만 하면 그에 맞추어 그럭저럭 직장이란 곳에 취업을 했다. 명문대학 졸업생들은 대기업에, 그렇지 않은 졸업생들은 중견기업이나 또는 중소기업에 입사를 했다. 그러면 결혼을 했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아파트 청약도 했고 그러다 보면 국민주택 규모인 25평 아파트, 지금으로 치면 85 제곱미터 이하의 아파트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낳고 부양했다.

 

대학을 마치지 않았어도 나름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소 힘들긴 했어도 성실하게 살다 보면 그 또한 중년에 이르러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나라 발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세대는 이른바 586 세대들이다. 데모하다가 졸업하면 그냥 대충 취업이 되었고, 외환위기로 인해 앞의 선배들이 죄다 쓸려나가는 바람에 기업의 중추 자리를 차지하고 권력과 호사를 누렸으며 운동권 사람들은 민주화의 공로와 감성적 포퓰리즘을 앞세워 오늘날 우리 정치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무조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바로 그들의 자녀들 즉 94년을 중심한 세대들은 살벌한 취업경쟁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면서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다. (나 호호당은 MZ 세대란 말은 허구라 여기기에 사용하지 않는다.)

 

 

장장 18년에 걸친 고난의 행군 

 

 

각설하고, 이제 우리는 장장 18년에 걸쳐 이어지는 험하고 먼 길의 입구에 섰다. 2021년부터 2039년까지의 세월이다. 그 먼 길의 도중에 앞으로 11년 뒤인 2032년이 되면 실로 앞길이 캄캄하단 것을 모두가 알고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때가 우리 국운의 春分(춘분)인 까닭이다.

 

60년 순환에 있어서의 춘분을 한 해라 놓고 보면 3월 22일 경이고 하루라 한다면 새벽 6시 반이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는 시각이다. 이제 멀리서 빛이 비쳐오지만 그간에 어둠만을 겪은 사람들은 아침은 영영 밝지 않을 것이란 절망에 빠진다. (이제 끝이다 하는 절망의 순간이야말로 새 빛이 들어서는 순간이란 점, 묘하지 않은가!)

 

2032년이 되면 현재 우리가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수출 대기업들이 전반적으로 부진의 늪에 빠져있을 것이다.

 

우리 경제, 먹고 사는 근본은 우리의 수출 대기업들이 전 세계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收入(수입), 달러벌이에 달려있다. 그를 통해 내수가 돌아가고 이에 우리 모두가 먹고 살며 미래를 꿈꾼다.

 

정치가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란 결국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역할이지 먹을 것을 창출해내진 못한다는 사실이다. 먹을 것을 만들어냄에 있어 정치는 잘 해야 보조 역할에 그친다.

 

올림픽만 해도 그렇다, 예컨대 양궁은 현대자동차, 체조는 포스코가 지속적으로 후원해왔다. 반면에 레슬링의 경우 후원사가 없어지면서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스포츠란 게 일시적인 행사 후원 정도론 결코 성장하거나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우리 수출 대기업들이 10년 뒤 부진해지면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 행사에서 우리가 성적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20위 바깥으로 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올림픽은 우리들의 관심사에서 서서히 멀어져갈 것이다. 성적이 나지 않으면 그렇지 않겠는가.

 

올림픽에서의 성적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게 바로 우리 경제의 활력이고 나아가서 나라 전체의 총체적인 힘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바로미터’인 까닭이다.

 

 

장차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고 견뎌야 할 것인지 

 

 

그런데 1984년 이래 36년 만에 대한민국의 기세가 꺾였다. 가슴이 아프다, 다시 기세를 살려내고 도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느 선까지 올라서려면 또 다시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물론 나 호호당 역시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각오를 다져본다.

남산으로 오르는 경리단길이다. 아랫쪽에 붉은 벽돌의 대성교회가 보인다. 대성 교회 저멀리 보이는 고층건물, 지도에서  방향을 정해서 찾아보니 삼각지역 인근의 용산파크자이 아파트가 아닌가 싶다. 비싼 아파트!  먹선으로 드로잉을 하고 음영 부분에도 먹을 썼다. 하지만 때론 물감으로도 칠했기에 정확한 구분은 되지 않는다. 이 그림 역시 연필로 기본 스케치를 하지 않고 바로 먹선으로 그렸다. 밑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 사이에 흥이 싹 달아난다. 그러니 각도가 조금 어긋나더라도 분방하게 그리고 칠하는 것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시절 석고상, 아그리파인지 뭔지 하는 것을 그릴 때도 연필로 측정하지 않고 그냥 바로 그리다가 미술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은 기억이 난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돼! (한 때 딱!) 그런데  말이다, 너 좀 그린다. 끼가 있네!" 하셨다. 원 그림보다 약간 무거운 느낌이지만 그거야 스마트폰으로 대충 찍은 탓이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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