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인공이 나 자신일까 아니면 유전자일까?

 

 

‘이기적인 유전자’란 제목의 꽤나 널리 소개된 교양과학 책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라고 하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가 쓴 책인데 이 방면의 베스트셀러이다. 요지는 개체로서의 생명은 유전자가 지나가는 통로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나 호호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를 내 아내의 유전자와 섞어서 아들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넘겨주었으니 사실상 나 자신이나 내 아내의 역할은 다 한 셈이라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기분이 언짢아질 수 있겠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가 겨우 유전자가 거쳐서 가는 통로 혹은 숙주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고, 더 나아가서 너는 안 중요해, 중요한 것은 유전자일 뿐이야 하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주인공이 유전자냐 아니면 개체로서의 나 자신이냐의 문제라 하겠다.

 

 

우리 인간은 자기인식을 지닌 특별한 동물이라서

 

 

우리들은 누구나 ‘나 자신’ 즉 Self 를 인지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저 유전자의 통로나 운반체가 아니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저 영국의 생물학자는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불편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나 자신 또는 self 를 인지하는 것을 자기인식 또는 自意識(자의식)이라 한다. (영어로는 Self-consciousness.)

 

하지만 자연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식물들은 그렇지가 않다. 일부 고등동물의 경우 어느 정도 자기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있지만 우리 인간처럼 고도로 통합된 자기의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일반 생명체들에 비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인간 또는 인류가 과거 어느 시기에 자아를 확고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아를 인식하게 되자 일반의 다른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골칫거리를 안게 되었다. 하나가 아니라 실로 많은 숙제를 말이다.

 

 

자기인식이 있기에 죽음이 존재한다.

 

 

그 많은 해결해야 할 숙제 중에서 가장 큰 숙제는 다름 아니라 ‘죽음’이다. 개체로서의 우리들은 조금만 철이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체의 수명은 限定(한정)이 있기 때문이다. 有限(유한)하다.

 

통합된 자기의식을 지닌 우리 인간이기에 죽음이란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흔히 생명은 유한한 삶을 산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체로서의 생명일 뿐, 전체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를 이어가는 한 죽음은 없다.

 

생명은 영원하다, 단 유전자가 이어지는 한 그렇다. 하지만 나 호호당이란 개체만 놓고 본다면 올 해 예순 넷이니 30년 뒤가 되면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거의 절대적이다.

 

 

종교, 죽음이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자기인식을 지닌 인간, 개체임을 느끼는 우리 인간들이 필사적인 궁리를 한 끝에 만들어낸 생각의 집합이 있으니 그게 바로 ‘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永生(영생) 즉 영원한 삶을 얘기한다. 몸이 죽으면 천국이나 극락에 가서 더 즐겁게 살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종교이다.

 

불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의 바탕이 된 힌두 철학은 解脫(해탈)을 주장했다. 해탈이란 해방 또는 자유를 뜻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모든 번뇌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말하는 바, 해탈은 결국 번뇌의 원인인 ‘자기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석가모니 싯다르타가 설파한 涅槃(열반) 역시 해탈을 위한 일종의 방법론이었다. 열반 혹은 열반적정이란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 즉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 가르침이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자 결국 極樂(극락)이라고 하는 세계가 실재하며 그곳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변했다.

 

번뇌라 말해도 되겠고 삶의 속박이라 말해도 되겠지만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자기를 인식하기에 타인과 아귀다툼을 하게 되고 또 개체로서의 삶은 유한하다는 문제, 즉 죽음과 관련이 된다. 모든 번뇌의 뿌리에는 죽음이 놓여있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당연히 유한한 시간 속의 존재임을 인식한다. 즉 생겨났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존재, 生滅(생멸)하는 우리들이다.

 

생겨나면 사라져야 하고 태어나면 죽어야 하니 숙명이라 하겠는데 정말 이 답답한 사슬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옛 종교는 천국과 극락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 역시 답답하고 근거가 약한 주장에 불과하다.

 

 

사랑과 자비는 죽음이란 숙제에 대한 해답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 종교는 또 한 번의 돌파를 이룩했다. 그 해답은 바로 사랑 혹은 慈悲(자비)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했던 예수의 말이 바로 그것이고 보시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랑은 내 소중한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다. 사랑이 지극하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내 목숨마저도 때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다.

 

진정으로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그건 바로 우리 누구나가 지닌 강렬한 자기인식, Self-consciousness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기인식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개체의 유한한 삶에 대한 강박감도 내려놓을 수 있다. 자기, self 가 사라지면 죽게 될 자기도 없어지고 따라서 죽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 아니라 사랑이고 자비가 된다. 이게 바로 오늘날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종교가 설파하고 있는 근원적인 가르침이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자기인식을 내려놓아야 세상 속박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다지 성공적이라 하기 어려운 종교의 가르침

 

 

리들은 매 순간 자기를 인식한다. 그렇기에 사랑과 자비를 설파한 종교의 가르침은 설령 그 말이 옳다고 긍정하더라도 순식간에 부정하는 우리들이다.

 

교회나 성당, 절에 가서 설교나 설법을 들을 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곳을 떠나오는 그 즉시 자기를 인식하게 되고 자신의 이익과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교회 주차장에서 시동을 거는 그 순간 바로 자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연계의 동물처럼 살 것을 주문하는 얘기이다. 하지만 ‘내일의 먹을 것’을 부단히 걱정해아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강렬한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에 있어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信者(신자) 수는 많아도 진정으로 자기인식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인식을 환상이라고 했던 러스트 형사의 말

 

 

이제 앞의 글에서 얘기한 바, 트루 디텍티브의 러스트 형사가 한 말, 결국 작가인 닉 피졸라토가 한 말, 인간의 자기인식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 있어 비극적인 실수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셨을 것이라 본다.

 

자기인식을 두고 환상(illusion)이라고 한 말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처럼 유전자를 이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트루 디텍티브의 결말 부분에 가서 러스트 형사의 마지막 대사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개개인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 속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해답 역시 크게 보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 같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러스트 형사의 말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으면 나라는 존재도 있고 우리도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나와 우리가 공존하는 것이고 나와 우리가 하나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 속에서 나와 우리는 부단히 충돌하고 있다. 우리도 중요하지만 역시 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優先(우선)하는 때가 더 많으니 그렇다. 우리의 크기나 규모가 커지면 그 ‘우리’란 생각은 더욱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변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나를 인정할 것 같으면 삶은 유한하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당연히 永生(영생)같은 것은 바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인정할 것 같으면 삶은 유한하지가 않다, 죽음도 넘어설 수 있다, 어쩌면 제한적이긴 하지만 永生(영생)에 근접해갈 수가 있다.

 

永生(영생)은 永遠(영원)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유한성을 의미하는 시간의 개념도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나’라는 인식, 러스트 형사의 말로는 환각이라 하지만 그 환각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우리들은 매 시간 바쁘게 살아간다. 내가 존재하는 한 삶이라고 하는 게임의 끝 즉 죽음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호호당이 제시하는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

 

 

이에 대해 나 호호당이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은 조금 다르다. 물론 감히 정답이라 주장하지는 않겠다.

 

운명이란 것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결과 운명을 연구해왔고 그러다보니 우리의 삶은 시간의 순환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환이란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언급한 바의 영원히 되돌아오는 시간, 즉 Eternal Return이다. 사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우리말로는 ‘영겁회귀’라고 번역된 바로 그 말이다.

 

‘영원히 되돌아오는 시간’은 한 번 스쳐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화살’, 오늘날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그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그리고 그 순환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은 그것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 호호당이 이룩한 것은 그 순환의 공식(formulae)를 밝혀내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저마다 순환하는 ‘삶의 수레바퀴’ 또는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레바퀴 위에선 모든 지점이 중심인 것이니

 

 

이에 우리의 삶이 수레바퀴를 타고 도는 삶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수레바퀴 위의 모든 지점 혹은 時點(시점)이 중심점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로서 매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凝縮)시킨 영원이란 것을 알게 된다는 니체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이를 더 쉽게 말하면 우리 삶의 매 순간 모든 순간이 절정의 때이자 그 자체로서 永遠(영원)이란 얘기이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그 자체로서 한 세트(set)이기에 거기에 좋고 나쁨, 선악이 어디 있는가 하는 얘기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사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다만 그 순환을 계량화해서 公式化(공식화)시켰다는 점이 다르다.

 

폭염 속에서의 사색이었다, 긴 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길고 밝은 어둠(The Long Bright Dark)

 

 

‘트루 디텍티브’란 제목의 미드를 봤다. 재미가 있다 보니 ‘계속 이어보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바람에 연이틀 잠을 자지 못했다. 폭염에 수면부족으로 그야말로 건강까지 해칠 정도였다. 물론 그림도 그리지 못 했고 글도 올리지 못했으니 일종의 여름 휴가였던 셈이다.

 

제1회의 제목부터가 멋졌다. The Long Bright Dark, 길고 밝은 어둠이란 제목. 밝다는 것인지 어둡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둠이란 것이 원래는 밝다는 것인지, 아무튼 뭔가 생각하도록 푸시(push)해오는 제목이었다.

 

주인공의 대사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많고 드라마의 전개도 복잡한 편이라 전체 내용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

 

 

닉 피졸라토, 드라마 작가의 운명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작가가 궁금해졌다. 재미가 있으니 저처럼 재미있게 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 위키에 들어가 보니 닉 피졸라토란 사람이었다. 이름부터가 이탈리아 스타일이다.

 

생년월일을 검색해봐야지. 1975년 10월 18일. 생시가 궁금해서 점성술 사이트에 들어가 봤으나 ‘unknown’이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프로필을 알고 있으니 운세 흐름을 점검하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乙卯(을묘)년 丙戌(병술)월 丁酉(정유)일이다. 따라서 입춘 바닥은 1987년 정묘년이 된다. 12세 때가 바닥이었으니 나름 곡절을 거쳐 사연을 지닌 인물임이 분명하다.

 

10월 늦가을에 태어난 이가 생년에 乙木(을목) 偏印(편인)이 있으니 사색형의 성격이고 월에 丙火(병화)가 있으니 영화나 시각 예술 방면과 인연이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와 인연을 맺은 이유를 말해준다.

 

위키에 들어가 개인의 스토리를 읽어 봐도 어린 시절 고생 좀 했음을 말해준다. 피졸라토는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계이며 가난한 노동 계층의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다.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루이지애나 주의 시골지역인 레이크 찰스로 이사했다고 하니 성장환경이 충분히 어려웠을 수 있겠다.

 

드라마의 무대가 바로 루이지애나의 레이크 찰스 지역이다. 무더운 습지대이고 토속 샤머니즘인 부두,voodoo 가 성행하는 지역인 이유를 말해준다. 자신의 어릴 적 체험에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드라마인 셈이다.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시각예술학과에 입학한 뒤 소설가가 되고자 했으나 정신적 지주였던 교수님이 사망하자 글쓰기를 포기하고 텍사스 오스틴으로 가서 바텐더 일과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ter) 일을 하며 살았다. 간단히 말해서 알바 일로 먹고 살았다는 얘기이니 그로선 일종의 방황기였던 셈이다.

 

(참고로 테크니컬 라이터란 컴퓨터나 소프트웨어 제품의 사용 설명서나 도움말 등을 작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알면 된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사실 나 호호당도 한 때 테크니컬 라이터 일을 하면서 컴퓨터 관련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었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은 바텐더 일도 하는데 이 역시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람의 운명은 입춘 바닥으로부터 18년이 지나면 결정이 된다.

 

 

아무튼 사람의 운명은 입춘 바닥으로부터 18년이 지날 무렵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의 운명은 이 무렵에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닉 피졸라토의 경우 1987년이 바닥이었으니 18년을 더하면 2005년 경이 된다. 이 무렵에 하는 일이야말로 그 사람의 길이 되는데 이에 위키에 실린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니 단편 소설을 썼다고 한다. 2003년에 한 편, 2004년 11월에 또 한 편의 단편 소설을 발표해서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작가의 길을 갈 운명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사람의 길은 입춘으로부터 18년이 경과할 무렵에 결정이 된다. 사람의 운명을 살필 때의 핵심 포인트라 하겠다.)

 

 

작가 피졸라토의 출세 코스

 

 

피졸라토는 그 이후 소설을 쓰면서 대학에서 글쓰기 과목을 맡기도 했다. 이에 서서히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으면서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의 두 편을 맡아서 원고를 썼다. 2011년의 일이었다.

 

2011년은 1987년으로부터 24년만의 일이니 이른바 먹고 사는 기반이 잡히는 운, 흔히 내가 ‘최초의 財運(재운)’이라 부르는 때였다. 피졸라토 역시 타고난 팔자대로 운명의 공식에 맞춰 살아가는 삶인 것을 확인한다. 이처럼 운명에는 公式(공식)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돈이야 좀 벌었겠지만 피졸라토는 꽤나 실망하게 된다.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에 시즌 2가 시작되기 전 그는 그만 두고 말았다.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은 큰 프로젝트라서 이른바 새끼작가의 비중은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12년 새로운 드라마의 원고를 쓰게 되었으니 바로 이번에 재밌게 본 ‘트루 디텍티브’였다. 이번엔 전체 원고를 단독으로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 총감독(executive producer), 즉 제작의 全權(전권)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 1월에 첫 방영이 된 드라마는 소위 대박이 났다. 첫 편부터 시청률이 엄청 좋게 나왔다. 이에 피졸라토는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피졸라토는 트루 디텍티브 시즌 2를 맡았었고 또 시즌 3도 계약을 했다고 한다. 또 2016년엔 개봉된 영화 ‘매그니피센트 7’, 이병헌이 출연한 그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다.

 

 

주인공 러스트 형사의 독백

 

 

드라마 속 두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러스트가 하는 대사 또한 인상이 깊었다. 이에 구글을 통해 대사 원문까지 찾아보는 정성까지 발휘했다.

약간 철학적인 내용이지만 번역해 본다.

 

“내 생각에 인간의 자의식은 진화에 있어 비극적인 실수였어. 우리 (인간)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하며 살고 있어, 자연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뭔가를 창조했어,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창조물이란 생각이 들어.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환영을 가진 탓에 고생하는 거지, 감각적인 경험과 느낌으로 둘러싸인 채 우리 모두 각자 개별적인 존재란 확신을 갖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누구도 아닌 존재인데 말이지.”

 

I think human consciousness is a tragic misstep in evolution. We became too self-aware. Nature created an aspect of nature separate from itself - we are creatures that should not exist by natural law... We are things that labor under the illusion of having a self, that accretion of sensory experience and feelings, programmed with total assurance that we are each somebody, when in fact everybody's nobody...

 

 

자아의식과 유한한 삶, 그리고 운명

 

 

주인공 러스트 형사가 하는 이 말은 결국 自我(자아)란 개념, 우리 모두 내가 나이며 나라고 하는 개별적인 존재가 있다고 여기도록 된 것은 진화의 잘못된 부산물이란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어린 시절 運命(운명)이란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운명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삶이 有限(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삶의 시간이 길어본 들 셀 수 있는 시간 단위, 길어야 백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어린 마음에도 지긋이 입술을 깨물면서 어떤 각오, 결국은 죽게 되리라는 각오를 해야 했고 삶의 무거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예닐곱 살 무렵일 것이다.

 

일곱 살 무렵이면 우리들은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의식, 줄여서 자아의식, 영어로는 self-conciousness 혹은 self-awareness 가 생길 나이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가질 필요가 없다. 대충 살아도 게으름을 피우며 지내도 때가 되면 절로 부유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엄청 피곤하게 살 때도 있을 것이니 굳이 다짐을 하면서까지 살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공부 잘 할 필요가 없다.

 

저 이 다음에 부자로 살까요? 행복할 까요? 하고 궁금해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영원한 삶이라면.

 

그리고 모든 게임은 끝 즉 엔딩 라인이 있으니까 긴박해지고 재미도 생긴다는 것을 나 호호당은 이미 열 살 무렵에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인가 아무튼 그 무렵 쯤에 사주 보는 곳을 다녀오시더니 “야, 넌 다음에 아주 잘 산다고 하더라”,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나를 몹시도 유혹했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를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의 사람이다. 그 바람에 결국 오늘날 운명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 있어 운명이란 존재는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이 아니다. 물론 아직도 더 알아볼 영역이 많이 남아있기에 그냥 학구적 대상일 뿐이다.

 

 

삶이 유한하면서 무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런데 대략 10년 전부터 삶 또한 영원한 것이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명을 연구해온 이가 영원을 얘기하는 것은 다소 모순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운명은 시간에 관한 얘기이고 영원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이다.

 

바로 트루 디텍티브의 형사 러스트의 저 대사, 사실은 닉 피졸라토의 생각이겠지만 그 말 속에서 충분히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하고픈 말은 꽤나 남았는데 글이 길어졌다. 여름 휴가 철이다. 바깥으로 나가면 더위에 죽을 판이니 꼼짝 말고 작업실 안에서 사색에 몰두해볼 참이다. 독자도 이 글을 읽으면서 사색에 빠져든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한 번 더 글로 이어가겠다.

본격 추위를 앞둔 우리 경제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운세는 1년 12달의 흐름에 비길 것 같으면 한 겨울에 들어서 있다. 작년 4월이 국운의 冬至(동지)였고 내년 10월이면 小寒(소한), 즉 본격적인 추위의 시기로 접어든다.

 

대개 겨울 추위는 동지를 지나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다가 양력 1월 초의 소한과 1월 20일 경의 대한에 이르러 가장 맹위를 떨친다. 춥다는 것은 열에너지가 적다는 것이고 이를 나라의 운으로 해석하면 나라 전체의 생기와 활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다섯 개의 겨울 설산

 

 

우리나라의 국운이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꽤나 많이 얘기해왔다. 대표적으로 내 블로그 “김태규 명리학” 코너에 가면 2008년 11월 17일자로 올린 “다섯 개의 겨울 설산”이란 글을 통해 우리 국운의 겨울 동안 겪게 될 다섯 개 사항에 대해 얘기해놓았다.

 

10년 전의 얘기지만 현 시점에 와서도 여전히 아무런 변함이 없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미국 금융위기로 촉발된 전 세계적 디플레이션

2. 국내 부동산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경제 불황

3. 중국 경제의 거품 소멸에 따른 문제

4. 김정일 이후 북한의 붕괴 등 그에 따른 통일비용

5. 우리 산업의 노후화와 수출 경쟁력 저하

 

이 중에서 1번 사항은 막대한 돈 찍어내기를 통해 일단 문제를 해결했지만 돈의 홍수로 인해 생겨난 여러 부작용과 또 그를 해소하기 위한 금리 상승이 또 다시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4번 사항은 다행히도 극한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어쨌거나 장차 북한 쪽으로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에선 아무런 변함이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5번 사항, 우리 산업의 노후화와 경쟁력 저하가 부쩍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은근슬쩍 부지불식간에 3번 문제, 중국 경제의 거품 붕괴 가능성이 커져가고 있으며 2번 문제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시작되면서 시기의 문제가 있을 뿐 회피할 수 없는 리스크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서 2008년에 언급했던 다섯 개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금융 위기 이후 울퉁불퉁해진 글로벌 경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은 그야말로 온통 울퉁불퉁하다.

 

미국의 경우 기존의 대통령들과는 스타일이 너무나도 판이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흥 강자 중국을 이번 기회에 꺾어놓기 위한 일종의 전쟁에 돌입하고 있는 미국이다.

 

다른 지역들도 크게 다르지가 않다.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난, 이른바 PIIGS 사태를 겪었고 그 중에 그리스는 국가부도 일보 직전에까지 갔으며, 영국은 브렉시트를 단행했다. 이탈리아는 국내 정치 혼란과 함께 ‘이탈렉시트’의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사실상의 집권 여당이던 사회당이 2017년 총선에서 전체 의석 577석 중에서 26석을 얻을 정도의 대참패를 통해 사실상 와해되는 일종의 선거혁명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EU 전체가 난민문제와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 국가별 이기주의 등의 문제로 힘겨운 난항을 하고 있다.

 

나머지 국가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베네수엘라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디폴트 위기에 직면해있고 아르헨티나는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긴축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멕시코는 1929년 이후 무려 89년 만에 좌파 정권이 등장했으니 이 역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중국은 공산당 1당 독재에서 한 술 더 떠서 시진핑 1인 독재 체제로 들어갔다. 미국과 유럽이 빈틈을 보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보다 강력한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이 시진핑 1인 체제의 명분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저런 변화는 장기적으로 볼 때 결코 무사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물론 우리나라 또한 유럽이나 미국의 변화에 버금가는 변화를 겪었으니 바로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실로 상상하기 어려웠던 이런 변화들이 생겨난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이는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해 글로벌 정치 경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저런 일들은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가 어려워지자 여기저기에서 드세게 일고 있는 거친 파도들인 것이다.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저처럼 온통 울퉁불퉁한 글로벌 환경을 감안하면서 이제 우리 문제로 돌아와 보자.

 

탄핵 이후 등장한 현 정부는 시장의 가격 결정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소득주도 성장론을 펼쳐왔다. 그간 우리 경제가 날로 어려워지는 가운데 등장한 중도좌파 성향의 현 정부로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최근 문 대통령이 최저임금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자영업 담당 비서관을 신설키로 하는 등 현실적 제약에 부딪치고 있다. 특히 5개월째 연이어 취업자 증가폭이 10만 명 선에 머물면서 일자리 부진, 특히 제조업 쪽에서의 취업자 감소가 우리 경제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정책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비판론이 대두되자 문 대통령은 며칠 전 그간 쓰지 않던 새로운 용어인 ‘포용적 성장’을 언급하고 나섰다. 규제개혁과 성장 문제에 좀 더 신경을 쓰겠다는 약간의 정책적 변화라 하겠다.

 

나 호호당으로선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경제를 살려보고자 하는 현 정부의 의지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아울러 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선악 시비를 가릴 입장도 아니다. 왜냐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호호당은 우리 경제가 금년 말부터 좋지 않은 조짐이 더 나타나고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나 호호당이 연구해온 ‘자연순환운명학’ 이론에 바탕을 둔 예측이다.

 

 

나 호호당이 생각하는 우리 경제의 문제점

 

 

다만 나 호호당의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우리 경제는 2000년대 중반부터 급증해온 막대한 가계부채 문제, 경제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방치해온 좀비기업의 문제, 돈이 부동산 쪽으로만 유입된 결과 생겨난 부동산 가격의 고공행진, 이 세 가지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고서는 우리 경제가 순조롭게 항해해나가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이유 역시 그 이면에는 높은 부동산 가격으로 인한 임대료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난 봐도 그렇다.

 

시간을 놓고 보면 돈과 자금이 부동산 쪽으로 편향되었을 때 경제 전체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 경제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사실 부동산 고공행진은 비단 우리 경제만의 문제도 아니다. 뉴욕이나 런던, 파리와 같은 국제적 대도시들의 부동산 가격 상승 또한 막대한 양적완화와 차이나 머니의 유입으로 실로 엄청났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 경제에 부동산 문제가 거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쉽게 판단될 성질이 아니다. 아울러 고가의 부동산 문제는 그 자체로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경제 구조는 외부 환경의 충격에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길 경우 사후적으로 그것이 부동산 거품이었던 것으로 추인되는 경우가 많다 하겠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외부로 보도되지 않은 중국의 금융 관련 소식을 하나 전해드린다. 그간 중국은 ‘그림자 금융’을 통한 대출이 전체 대출의 57%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번 달에 정확히 규모를 알 순 없으나 분명 심상치 않은 사고가 터졌다.

 

중국 정부가 급작스럽게 그림자 금융을 취급하는 금융회사들에 대해 연말까지 장부를 투명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러자 7월 들어 200 여개의 금융회사 오너와 간부들이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판국인데 중국 정부는 이 일에 대해 일체 언론 통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며칠 전 중국에서 입국한 현지인으로부터 들은 소식이다.)

 

시진핑 1인 체제 이후 중국은 전 국민에 대한 광범위한 감찰과 통제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중국의 거품 붕괴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발생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고가의 부동산 문제, 가계부채 문제, 좀비기업의 문제는 외부 충격에 대단히 취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순환운명학적 관점의 예측

 

 

나 호호당이 읽고 있는 운세 흐름으로 볼 때 금년 10월이면 우리 경제에 좋지 않은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내년 5월은 어떤 중대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전문적인 설명을 해보면 내년 5월은 己亥(기해)년 己巳(기사)월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天干(천간)의 글자는 모두 己土(기토)로서 동일하건만 地支(지지)는 해의 亥水(해수)와 월의 巳火사화)가 충돌하는 사나운 국면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제조 2025”

 

 

중국은 2015년 5월 8일자로 “중국제조 2025”이란 문건을 발포했다. 전체 문장은 대단히 길고 내용 또한 복잡하지만 그 취지는 글 첫머리에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제조업은 국민경제의 주체로서 立國(입국)의 근본이자 興國(흥국)의 도구이며 우리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기틀이다. 강대한 제조업이 없이는 나라와 민족의 강성함을 이룰 수 없다. 이는 18세기 중엽 이래로 세계 강국들의 흥쇠와 우리 중화민국이 분투해온 역사에 있어 두루 증명된 바 있다.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을 만들어내고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국력의 종합적인 상승은 물론이고 국가의 안전 보장, 나아가서 세계적인 강국을 건설함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이다.”

 

(制造业是国⺠经济的主体,是立国之本、兴国之器、强国之基。⼗⼋世纪中叶开启⼯业文明以来,世界强国的兴衰史和中华⺠民族的奋⽃史一再证明,没有强⼤大的制造业,就没有国家和民族的强盛。打造具有国际竞争⼒的制造业,是我国提升综合国力、保障国家安全、建设世界强国的必由之路.)

 

요약하면 중국이 글로벌 수준에서 제조업 강국이 되어보겠다는 뜻으로서 전혀 어떤 문제도 없어 보인다.

 

 

중국 전략의 문제점

 

 

문제는 그 방법론에 있다. 앞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중국은 무역을 일종의 전쟁 즉 국제적 商戰(상전)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런 사고방식에 기초하여 저들의 제조업을 발전시킴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첨단 기술을 탈취해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중국이 사용하는 핵심 수단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대한 내수시장 규모를 내세워 타국의 첨단기술기업들을 합작이나 합자 방식으로 끌어들여서 기술을 배우거나 탈취해내는 방법이다. (흔히 말하는 현금을 들고 흔드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중국 유학생들을 통한 첨단 기술 습득과 아울러 뇌물 공여의 방식으로 타국 기술 기업의 기술 보유자들을 매수하는 방식이다.

 

공식적으론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아도 오늘에 이르러 중국의 이런 반칙적인 수법들은 널리 알려져 있고 공공연히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이 내세운 ‘중국제조 2025’는 2025년까지 중국 제조업 역량을 글로벌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서 앞서의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것이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다 하겠다.

 

 

미국이 무역 전쟁을 일으킨 명분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한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문제를 삼은 대목도 실은 이 점이다.

 

미국이 한 해에 중국과의 무역에서 수천 억 달러의 적자를 보고는 있지만 사실 그게 근본적인 문제라 보긴 어렵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글로벌 통화인 달러를 가진 나라인 까닭이다.

 

얼마든지 찍어내면 되는 달러를 주고 중국으로부터 저가의 생필품을 가져와 쓴다는 점에서 미국은 사실 중국을 고맙게 여겨도 된다.

 

다만 기존 강자인 미국의 입장에서 도전자인 중국을 지금 꺾어놓지 않으면 장차 어렵겠다는 견제 심리라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땅한 명분도 없이 중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해댈 순 없는 노릇이니 이에 미국이 이번 무역 전쟁을 통해 시정하고자 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지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란 점이다. 그 바람에 미국의 대 중국 무역 적자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고 보는 미국이다.

 

둘째, 중국은 미국의 첨단 기술을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고 훔쳐내는 방식으로 2025년까지 세계 최대 최고의 제조업을 육성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미국은 이 시점에서 확실하게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중국 내수시장, 엄청나게 큰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그게 다른 나라에 있어선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얘기하면 우리나라의 수출에 있어 액수 면으로는 중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제품은 중국 내수시장에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우리 경제에 있어 영양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극히 폐쇄적인 중국 내수시장

 

 

중국 내수시장은 폐쇄적인 일본 시장에 버금갈 정도,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폐쇄적이다.

 

나 호호당은 오래 전 2년에 걸쳐 중국에서 사업을 했던 경험이 있다. 중국어 회화도 별 무리가 없고 한문 독해력 또한 중국의 어지간한 인문계통 지식인들보다 한 수 위이다. 보통의 중국인들은 대학을 나왔다 해도 漢文(한문), 그들 말로는 古文(고문)을 읽지 못한다.

 

그렇기에 중국 사람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 호호당이 보기에도 중국인들은 내수시장을 외국 기업들에게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오로지 외국 기업들의 기술을 훔쳐내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특히 정부 관리들은 그런 생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또 그것을 애국이라 생각한다.

 

 

우리 경제에 있어 중국의 실질적인 영양가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 경제에 있어 중국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측면이다. 작년 2017년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978억 달러였고 우리 GDP가 1조5300억 달러였으니 우리 경제에서 중국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6.4%에 달한다. 미국의 2.6%에 비하면 상당히 크다.

 

우리가 미국보다 중국산 물품을 훨씬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 경제의 일자리 창출에 있어 중국 수입품은 미국에 비해 훨씬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많아도 수출이 훨씬 크기 때문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년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은 1421억 달러로서 수입 978억 달러에 비해 무려 450 억 달러 흑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대중 수출 품목 중에 중국 내수시장에서 소비되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용을 말하면 우리 수출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반제품들로서 중국의 우리나라 현지기업이나 공장에서 완제품이 되어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붙이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기업들은 그저 저렴한 중국의 인건비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수출품 중에 그나마 중국 내수시장에서 소비되는 것은 화장품 정도가 고작이고 중국 기업과 합작기업인 현대차 중국 현지 공장에서 제조된 자동차가 중국 자동차 내수 시장의 5% 정도를 점유하고는 있으나 저가 모델이란 점에서 판매 마진도 사실 대단히 적을 것으로 추산이 된다. (현대차 그룹에 이 점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삼성 스마트폰의 경우 중국 내수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적다. 그런 까닭에 삼성은 최근 인도에 거대한 스마트폰 공장을 지었다. 더불어 롯데나 신세계 등의 중국 현지 유통기업들은 그간 철저하게 손해를 보았을 뿐이다.

 

중국 내수시장의 규모가 큰 것이 사실이고 또 우리 수출에 있어 중국의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중국은 우리 경제에 있어 영양가는 지극히 적다고 봐도 전혀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무역전쟁은 기본적으로 미국에게 승산이 크다.

 

 

돌아가서 얘기이다.

 

이번 미중 간의 무역 전쟁은 그 승산이 미국에게 있는 게임이다. 중국이 2015년에 ‘중국제조 2025’란 원대한 구상을 밝힌 것부터가 미국에게 빌미를 준 셈이기도 하다.

 

이에 어느 수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중국이 미국에게 꼬리를 내리는 선에서 귀결을 보게 될 것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고 장기화될 경우 미국이 입는 손해보다는 중국이 입게 될 內傷(내상)이 훨씬 더 커질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불어 장차 몇 년 안으로 중국에 진출했던 우리 기업들 대부분이 중국으로부터 철수해서 동남아나 인도로 옮겨갈 공산이 크다는 생각도 든다. 商戰(상전)이란 발상을 가진 중국은 여전히 나라간의 거래를 통해 상호 이익을 볼 생각을 하기 보다는 이득을 취하고 나중에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중 무역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우리에게도 대단히 부정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순 없다.

 

 

섣부른 중국의 도전

 

 

1980년대 후반 일본은 미국을 다소 우습게 여겼다가 결국 큰 코를 다친 바 있다. 이번 중국의 미국에 대한 글로벌 패권에 대한 도전 역시 시기상조란 생각을 한다.

 

시진핑의 원대한 꿈인 ‘중국몽’이라든가 남사군도 문제, 强軍夢(강군몽), 중국제조 2025와 같은 플랜들이 기본적으론 시진핑 1인 체제의 정당화를 위한 목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바람에 공연히 섣불리 미국의 반격을 초래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중국은 이제 맛이 갔다.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고 있다는 전도 알려 드린다. 2020년 정도가 되면 중국은 내부로부터 수많은 문제와 갈등이 불거지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중국은 禍(화)를 자초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전히 낡은 사고의 중국은 이번에 화를 자초한 셈이라 본다.

 

아울러 최근 김정은의 북한이 정상 회담 이후 또 다시 애매모호한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역시 뒤를 봐주는 중국이 어려워지면 별 도리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어떤 독자의 질문

 

 

어떤 독자가 메일을 통해 이런 질문을 해왔다. “개인이 운이 겨울에 접어들어 그릇이 차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리를 하기직전에 예민하면 연륜으로 촉으로 알 수 있는 겁니까?”

 

메일을 읽고 나서 ‘궁금하면 내게 물어보러 오시면 될 것을...’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좀 더 본격적으로 알고 싶으면 강좌를 들으면 더 좋겠고 말이다. 물론 독자의 경우 다른 사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메일로 물어보는 것이리라.

 

질문은 간단하지만 제대로 답하려면 말로 해도 몇 시간을 해야 할 정도의 질문이라 하겠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초반 강의 전 과정을 다 들어도 모자랄 판이니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이에 그냥 넘어갈 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에 남아서 시간을 들여서 좀 더 생각해보니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한 번은 만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니 질문을 한 그 분에게만 얘기하기 보다는 여러 독자들과 공유하는 게 더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에 충분한 설명이 되긴 어렵겠으나 그래도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모든 경우의 수에 맞는 답을 드리긴 어렵다는 점.

 

 

운세가 겨울이 된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고 각양각색이다. 그러니 그 모두에 맞추어 답을 해줄 순 없다는 점부터 얘기해둔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따라서 약간은 寓話(우화)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운이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말은 한 해 동안의 가장 큰 수확인 추수가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운명의 겨울이란 말이 가진 뜻

 

 

겨울이란 가을 추수를 마치고 쉬는 農閑期(농한기)라 보면 된다. 이제 바쁜 일손을 쉬게 하고 한가롭게 지내는 때란 의미이다.

 

가을에 수확을 보고 나면 내년 초여름, 정확히 말하면 보리 수확철까지 그리고 하지에 감자가 나올 때까지 수확이 없게 된다. 이를 60년 흐름으로 환산하면 무려 수확이 없는 시기가 무려 30년씩이나 된다.

 

 

가을 수확이 풍성한 경우에 있어서

 

 

가령 가을 수확이 대단히 풍성했다고 해보면 이제 내년 봄까지 편안하게 ‘마실’이나 다니면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늦봄부터 슬슬 땅을 갈고 씨를 부리면 되는 일이다. 굳이 필요 이상의 무리를 하거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 대해 실례를 들면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대부호 빌 게이츠를 들 수 있다. 빌 게이츠는 1997년부터 겨울에 접어들 무렵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에 2005년 운세의 겨울 동지에 은퇴해서 지금까지 놀고 있다. 물론 휴식 시간이 길다 보니 다소 지루하다는 애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소 가을 수확이 풍성했다고 해도 욕심이 과하거나 또는 그냥 편히 쉬는 성격이 아닌 탓에 가을에 걷은 수확을 봄까지 기다리지 않고 겨울 벌판에 또 다시 뿌린다면 어떻게 될까?

 

겨울에 뿌린 씨앗들은 모조리 얼어 죽을 것이고 식량도 부족해져서 봄이 되면 굶주리게 될 것이다. 나 호호당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무수히 경험한 바 있다.

 

 

가을 수확이 풍성하지 않은 경우에 있어서

 

 

이제 반대로 가을 수확이 충분치 않거나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를 얘기해보자.

 

가을 수확이 충분치 않은 경우는 봄에서부터 여름까지의 경영이 충실하지 않았거나 능력에 비해 욕심이 과한 나머지 충분치 않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런 경우는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둘 여유가 없다. 비유한다면 개미와 배짱이의 우화에서 배짱이 격이라 하겠다. 겨울의 추위가 심해져도 어떻게 해서든 자리를 지키거나 아니면 품을 팔아서라도 겨울을 나고 봄을 견디면서 이래저래 먹을 것이 풍부해지는 여름까지 버텨야 한다.

 

운세가 겨울이다 보니 열정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의욕도 떨어져 있지만 상황논리 상 그만 접고 편히 쉴 입장이 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했다면 겨울에 잘 지낼 수도 있었을 터인데 내가 너무 허송세월했네 하는 한탄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현장을 지켜야 한다.

 

 

때가 가을인지를 모르는 바람에 범하는 愚(우)에 대하여

 

 

약간 다른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가을 수확이 풍성했지만 인생 두 번 살아본 게 아니라 초보이다 보니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가을이 이어질 것이란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경우도 대단히 흔하다.

 

이는 자영업이나 사업자가 아니라 고급 월급쟁이 중에 이런 경우가 많다. 풍성한 가을을 보내다 보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줄로 알고 다소 방만해져서 過用(과용)을 하고 있다가 겨울이 깊어져서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절감하는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야말로 한 겨울에 닭이 맨발로 다닌다고 오뉴월인 줄 안다는 우리 속담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실수를 깨닫고 더욱 신중하게 앞날을 대비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오히려 더 무리한 길을 선택할 때도 많다. 실수가 또 다른 실수를 부르는 격이다. 가령 평생 사업이라곤 해보지 않은 퇴직자가 소중한 퇴직금을 자본으로 해서 소규모 사업을 차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실패하게 되면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된다. 설상가상이다. 이런 경우도 대단히 흔하다.

 

그런가 하면 풍성한 가을의 운에 얻어지는 그 소중한 수확, 내년 초여름까지 그것으로 나야하는 소중한 수확을 어쩌다 보니 자녀 교육비로 홀랑 다 털어 넣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이는 특히 급여 수준이 높은 고급 월급쟁이로 지낸 사람들 중에서 흔히 보게 된다.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이해가 간다. 이에 능력이 닿는 데까지 밀어주겠다는 중산층 또는 중상층 사람들이 많다. 그 바람에 비싼 해외유학을 보내게 되고 그 결과 정작 부부의 노후 준비는 부실해지는 경우가 그렇다. 게다가 자녀가 결혼하게 되면 또 돈이 든다.

 

많은 급여임이 분명하지만 그 바람에 상당한 액수를 자녀 교육비로 쓰고 거기에 소비 수준도 조금씩 높아지다 보면 나중에 정말 뒷감당이 어렵다. 그러다가 운이 어느 날부터 기울고 직장에서 밀려나게 되면 그야말로 막막해진다.

 

좋은 직장에 다닐 정도의 사람이니 능력도 분명 뛰어난 인재라 하겠지만 정작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와서 해보지 않은 생경한 일에 뛰어들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새로운 일은 능력을 떠나 세월이 필요한 법이니 그렇다.

 

이에 소중한 퇴직금까지 사업으로 다 털어먹고 나면 앞길이 암울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이는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나 중상층 사람들에게 실로 흔한 일이다.

 

 

자신의 때를 대부분의 사람이 自覺(자각)한다고 보지만

 

 

사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굳이 나 호호당을 찾아와 운세 흐름을 묻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흐름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제대로 인지했다 하더라도 그게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상 생각은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다.

 

빌 게이츠의 경우 정확한 타이밍, 물러날 때에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양반이 무척이나 명석한 까닭도 있다 하겠으나 그보다는 돈을 벌 만큼 벌었던 터라 이제 굳이 억지로 더 벌려고 할 이유가 없었기에 냉철하게 자신의 흐름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본다.

 

급할 때일수록 여유를 가지란 말이 있다. 마음에 여유가 있다 보면 대개의 경우 사람은 일에 대해 정확한 결정과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 그런 여유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겨울의 중간점인 冬至(동지)의 운에 내리는 선택은 그야말로 중요하다.

 

 

특히 15년간의 겨울에 있어 늦겨울로 접어드는 때, 즉 겨울 시작으로부터 7.5년이 흘렀을 때, 절기로 말하면 冬至(동지)의 때가 되었을 때 내리는 선택과 결정이야말로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 결정과 선택에 따라 그 이후 15년간의 행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운명의 동지에 섣부른 판단을 하거나 무리한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예기치도 않은 뜻밖의 우환을 겪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참고로 빌 게이츠는 바로 그 동지의 때에 참으로 싹싹하게 물러났다는 점 알려드린다.)

 

동지의 때에 무리를 하는 바람에 어려워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나라 역시도 그렇다. 가령 미국의 경우 국운의 동지는 2005년이었는데 바로 이 해 서브 프라임 모기지 론의 신규 대출이 절정을 보인 것이 결국 2008년의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독자의 질문에 대한 호호당의 대답

 

 

이제 앞서 독자의 질문 즉 “개인이 운이 겨울에 접어들어 그릇이 차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리를 하기직전에 예민하면 연륜으로 촉으로 알 수 있는 겁니까?”에 대해 대답을 드리고자 한다.

 

충분히 연륜이나 촉으로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면 감지할 때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촉으로 느끼고 감지한다 해도 이미 그간에 생겨난 흐름 상 가령 노후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새롭게 수익원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입장에 있을 경우가 그것이다.

 

이에 지금쯤 접어야 한다고 느낄 지라도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다면 감으로 느껴지고 촉이 왔다 한들 처한 환경이 용납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출구전략, 말처럼 쉬운 게 아니어서

 

그렇기에 출구, 즉 엑시트(exit)를 말과는 달리 실천에 옮기기란 사실 대단히 지난한 일이 되는 것이다. 앞 사람의 행적을 비판하긴 쉬워도 정작 스스로 때가 되어 경우에 맞게 행동하기란 그래서 어려운 법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도박판에서 이번 한 판만 잘 되면 털고 일어나겠다는 사람들이 왜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일어서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도박꾼이 이번 한 판만 하는 마음이 들 땐 이미 늦은 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퇴사가 유행이라 하던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退社(퇴사)란 말이 꽤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한 여성 작가가 쓴 책 ‘퇴사하겠습니다’가 살기 팍팍한 우리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모양이다.

 

직장은 생존과 생활을 위한 투쟁의 장이니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에 사표를 쓰고 직장을 그만 두는 퇴사는 그 자체로서 속을 후련하게 풀어주는 행위가 되니 憧憬(동경)하는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에 들어가 잘 다니고 있었고 그만 둘 특별한 이유도 딱히 없었지만 그냥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 미련 없이 퇴사했습니다. 이런 퇴사의 변을 접하면 정말이지 아우라가 넘친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인 마당에 거길 그만 두었다는 것이고, 잘린 것이 아니라 그냥 그만 두었다는 말도 그렇다. 게다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용기 있게 그만 두었다는 말은 더더욱 멋이 있다. 멋지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다수의 젊은 직장인들에게 있어 퇴사는 막연한 꿈이나 동경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 감각이 있는 젊은이라면 그렇다.

 

 

나 호호당 역시 퇴사하고픈 마음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나 호호당은 퇴사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의 생각에 대해 십분 공감한다. 왜냐면 나 호호당 역시도 그런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 그런대로 잘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었던 나 호호당이다.

 

직장을 그만 둔 때가 1993년이었고 39세였다. 올 해 2018년으로서 64세가 되었으니 벌써 어언 25년 전의 일이다. 5년만 지나면 30년 전의 일이 된다.

 

맡은 일만 그런대로 하고 있으면 매월 어김없이 25일엔 월급이 입금되었다. 저축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다음 달 25일이면 또 다시 돈이 입금되는데 무슨 저축? 하는 생각으로 지냈던 시절이 두고두고 그립다.

 

 

젖과 꿀이 흐르던 시절에서 매달 돈을 창조해내어야 하는 시절로

 

 

직장을 그만 둔 뒤 나는 매달 필요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돈을 번다는 느낌이 아니라 매달 필요한 돈을 만들어내는 느낌, 버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오늘날까지 25년간 살아왔다.

 

그 기간 동안 매달 필요한 돈을 어김없이 창조해낼 수 있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때론 꾸어서 쓰기도 하고 때론 줄여서 쓰기도 했다. 그랬다가 나중에 꾼 돈을 갚느라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다. 빌린 돈이나 대출을 처음부터 떼어먹을 배짱이 없다면 돈이란 것은 아예 빌리거나 대출받는 게 아니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매달 일정한 날에 꼬박꼬박 계좌에 돈이 입금되던 시절, 그 시절이야말로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꿀이 내리던 시절로 추억되었다. 안정된 월급쟁이 팔자야말로 정말로 전생에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사람에만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다시 보고는

 

 

몇 년 전 밤에 텔레비전을 통해 쇼생크 탈출을 보았다. 물론 전에 봤던 영화이다. 모건 프리드먼이 팀 로빈스와 함께 정작 감옥을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팀 로빈스더러 혼자 가라고, 나는 그냥 여기에 있겠다고 말하던 장면에서 울컥 했다.

 

바깥에 나가면 자유가 있겠지만 여기에 남아있으면 안정된 감옥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나로선 더 편하다는 모건 프리드먼의 말이었다. 그 대사를 들으면서 격하게 공감했다. 그래 나라도 저 입장이라면 모건 프리드먼의 선택을 따를 것 같아, 자유로운 바깥세상은 너무 힘들거든,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이 났다, 39세의 나였다면 모건 프리드먼의 말에 병신! 이란 말을 했을 것 같은데 50이 넘은 나는 모건 프리드먼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으니 세월의 차이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묻게 되었다, 어느 놈이 진짜 나일까? 하는 물음.

 

분방한 성격으로 태어났고 어려서 유복하게 자랐다. 명문 고등학교와 나름 명문 대학을 나와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에서 일했지만 나로선 불만이었다. 구속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삶은 마치 노예와도 같아서 엄청 싫었다.

 

 

자유의 공간은 야생의 삶, 동물의 왕국이었다.

 

 

그래서 멋지게 퇴사하고 자유를 택했더니 그 공간은 신나게 꿈을 펼칠 수 있는 기대했던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野生(야생)의 장, 동물의 왕국이었다. 먹거나 먹히거나 둘 중에 하나인 거친 세상이었다.

 

먹이사슬에 있어 포식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포식자라 해도 역시 수시로 굶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며칠 굶은 어미 표범이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내비치는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게 된다.

 

동물의 왕국에선 먹고 생식하는 것 이상의 더 좋은 세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먹을 수 있고 짝을 지어 새끼를 낳을 수만 있다면 또 그 새끼들을 일정 기간 부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1993년 퇴사를 하고 몇 년이 지나니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다. (참고로 얘기하면 나 호호당은 1997년이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이었다.)

 

 

무일푼 신세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

 

 

순 자산이 마이너스 3천만원인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한 선배가 직장을 그만 두고 사업 길에 나섰다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되자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장례식장의 영정 앞에서 나 호호당은 체면 불구하고 목을 놓아 펑펑 대성통곡을 했다. 울고 나서 알았다, 무일푼인 상태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제로는 벌어서 모으기만 하면 즉각 플러스가 되지만 마이너스는 열심히 벌어서 빚을 다 갚아야만 비로소 제로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대략 2년 정도의 세월 동안 아내가 조심스럽게 건네던 말, ‘여보 이번 달 생활비 좀 줄 수 있어?’ 하는 그 나지막하고 풀기 없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답을 했었다. 응, 조금 기다려봐, 또는 글쎄, 아무튼 알았어, 이번 달엔 어려울 것 같아, 당신이 좀 구해보지 그래 등등의 답을 하곤 했다.

 

그런 순간마다 내가 미쳤지, 왜 별 이유도 없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을까? 하는 후회에 젖어들곤 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그 곳을 내가 스스로 왜 떠났을까 하는 自歎(자탄)의 세월이었다.

 

 

고생의 세월을 보내면서 깨닫게 된 것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 호호당의 형편도 많이 좋아졌다. 여전히 매달 돈을 창조해내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예전에 비하면 엄청 편해졌다. 그러다보니 그간 세월 속에서 알게 된 것, 몸속으로 녹아든 것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본다.

 

이런 얘기들이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아니면 고생을 좀 해봐서 그런지 지금은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그냥 지금이 내 삶의 전성기라 여긴다.

 

구애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逍遙遊(소요유)의 세계를 설파한 莊子(장자)가 제시한 이상향인 無何有之鄕(무하유지향)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내 발밑이란 것을 알고 있는 나 호호당이다. 그러니 이젠 莊子(장자)를 존경하지도 않는다. 당연한 말을 좀 멋있게 풀어놓았을 뿐이라 여긴다.

 

고생을 좀 해봤더니 삶에 대한 미련도 사실 없어졌다. 사는 게 고생인데 오래 살겠다는 것은 고생을 더 많이 하겠다는 것, 그게 무얼 그리 좋다고 오래 하겠다는 것인가 싶다. 말로는 90까지 살아보겠다고 호언을 가끔 뱉고는 있지만 정확한 내 속내는 그저 때가 되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니 스님들이 오랜 참선 끝에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깨달음도 전혀 궁금하지도 부럽지도 않다. 돈을 벌고 창조하는 과정에서 고생해온 내가 어쩌면 더 한 수 위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편으로 고생하는 삶이 바로 좋은 삶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고생 좀 더 하면서 오래 살아봐야지 하는 앞의 말과는 상반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하다. 그때그때 생각이 좀 다르다.

 

또 한 편으론 야생의 공간에서 그간 어쨌거나 25년간이나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온 것은 내 능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여태껏 나를 숨 쉬게 하는 것은 내 알량한 능력만으론 될 순 없는 일 같다는 말이다. 나 호호당은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기에 나를 숨 쉬게 하고 밥을 먹게 해주는 것은 그냥 저 ‘위대한 세상’이란 생각을 한다.

 

그러니 때가 되어 저 위대한 세상이 ‘야, 호호당 이젠 그만 살아’ 하고 명령해오면 군말 없이 따를 준비도 되어 있다. ‘그간 살려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옵니다요’ 하면서 순순히 명령을 따를 생각이다. 다시 얘기하면 내가 살고 죽는 일, 더 풍요롭게 사느냐 아니면 힘들게 사느냐 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란 얘기이다. 권한 밖의 일에 나설 이유가 없으니 그렇다.

 

그런 과정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실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속에서 運(운)과 命(명)의 이치를 이젠 알아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궁금해 하던 것, 호기심을 충분히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나름 만족이다.

 

 

어떤 젊은이와의 만남, 그 데자뷔

 

 

작년의 일이었다. 괜찮은 직장에서 퇴사를 결심한 한 젊은이가 상담 차 나를 찾아왔던 적이 있다. 내성적이고 지적인 젊은이였다, 꿈도 큰 친구였다, 마치 오랜 세월 저편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팔자를 체크해보니 역시나 이제 고생길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래서 결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얘기해주었지만 그 젊은이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래서 ‘고생하게 될 거야, 그런데 자네는 스타일을 보니 내가 걸어온 길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크군!’ 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군대 가는 젊은이에게 군대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주어도 군대를 알 순 없듯 고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해줄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고생하게 될 거야 하는 말만 했다. (그 젊은이의 가는 길에 가호가 있기를!)

 

젊은이가 떠나간 후 혼잣말을 했다. 참 모르겠네, 고생을 안 하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고생 좀 겪으며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 도무지 그걸 모르겠네. 우리 안의 羊(양)이 좋은지 울타리를 튀어나간 양이 좋은지 그걸 모르겠네.

 

 

命(명)이 있고 運(운)이 있을 뿐

 

 

그냥 타고난 命(명)이 있고 변해가는 運(운)이 있어 그에 맞추어 살아갈 뿐, 달리 무엇이 있겠나 싶다.

점입가경의 미중 무역 전쟁

 

 

미중 무역 전쟁이 점입가경이다. 이번 전쟁은 그야말로 21세기 후반의 글로벌 패권을 놓고 다투는 전쟁으로서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사활을 건 싸움이다. 이상한 성격의 미국 대통령이 어느 날 홧김에 시작한 그냥 해프닝이 아니란 얘기이다. 이미 2008년부터 예정되어 있던 미중 두 나라의 필연적인 충돌 과정이라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이에 이번 글에선 미중 무역 전쟁의 배경에 놓인 생각과 이념의 차이와 갈등을 살펴보고 나아가서 이번 전쟁의 승패에 대해 예견해보는 글을 마련하기로 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크지 않다.

 

 

작년 2017년 미국의 수입은 2조 3520억 달러였는데 그 중에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5055억 달러로서 전체 수입액의 21%를 차지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5055억 달러는 물론 큰 액수이지만 미국의 1년 GDP 19조 3600억 달러와 비교해보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겨우 2.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저가의 물품을 수입해 쓰고 있는 것 같지만 미국 전체 경제 규모에 비하면 사실 그저 그렇다는 얘기이다.

 

이를 좀 더 실감나게 얘기해보면 가령 당신이 한 해에 5천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면 그 수입 중에서 한 해에 130만원 어치의 중국산 제품을 소비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한 달에 대략 11만원 정도가 된다.

 

이번에 트럼프가 중국산 물품의 1/10에 대해서 25%의 관세, 그리고 또 4/10에 대해선 10%의 관세를 매겼으니 관세로 인한 제품가격의 상승은 평균 6.5%가 오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한 달 소비 11만원에 적용해보면 한 달에 7천원 정도를 더 부담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미국이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보복관세를 올려도 그것으로 인한 미국 소비자들의 피해 또는 악영향은 미국 언론들이나 야당인 민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진 않다는 점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기본적으로 중국에게 불리한 게임이다.

 

 

반면 중국의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은 2017년 1300억 달러로서 수출 5,055억 달러에 비해 1/4 규모이다. 한 해 흑자가 3700억 달러 이상이다. 그렇기에 중국이 미국과 같은 규모로 보복 관세를 매겨도 절대 액수에서 게임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문제는 중국의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은 대두나 반도체, 항공기와 같은 것들인데 이는 중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해하는 품목이란 점도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 트럼프가 시작한 무역전쟁은 나름 충분한 승산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고 반대로 중국은 정면 대응보다는 어떻게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미국의 날카로운 銳鋒(예봉)을 피할 수 있느냐에 승패가 갈릴 전망이다.

 

 

무역 전쟁에 대한 중국의 대응 방법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식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이미 그 내용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것은 13억 인구의 광대한 내수시장이다. 이에 중국 내수시장을 더욱 개방함으로써 미국을 포함한 서방기업들을 유혹하고 나섰다. 내수시장에 대한 접근을 보다 수월하게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중국dl 지난달 외국인 투자 네거티브 리스트를 작년의 63개에서 48개로 줄인 것이 그것이다. 금융의 경우 은행업의 전면 개방과 더불어 여타 금융 부분에 대해선 외자지분을 51%로 확대함은 물론이고 2021년까진 전면 폐지하겠다는 중국이다. 뿐만 아니라 인프라 분야인 철도와 송전망, 철도운송, 해상운송 등의 분야에서 외자제한을 폐지하고 자동차 분야는 2022년까지 전면 개방을 공언하고 나섰다.

 

중국 내수시장의 대폭 개방을 통해 중국은 미국의 관세 보복에 대응하고 나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기존 중국의 정책에 있어 대단히 큰 변화라고 하겠다.

 

 

미국의 진정한 의도

 

 

사실 미국이 이번 중국 전쟁에서 중국에게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그냥 단순히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수출에 상응하는 정도로 많은 수입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얘긴 그다지 현실성이 없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역 수지 균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기업들의 첨단 기술을 훔쳐내지만 말고 제대로 돈을 주고 사서 쓰게끔 만들려는 데 있다고 본다. 지적 재산권 문제인 것이다.

 

기술을 미국으로부터 돈을 주고 사서 쓰게 될 경우 그냥 돈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으로 미국 기업들 나아가서 미국에게 종속될 것이니 그로써 미국은 중국을 하위 종속 국가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진정한 힘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우수 인재들이 창출해내는 신기술과 그를 산업적 상업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도록 돕는 벤처 금융 인프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패권 전쟁이자 이념과 사상의 투쟁이다.

 

 

이번 미중 무역 전쟁은 그런데 그냥 기존 선두주자와 후발 주자간의 패권 싸움이란 측면도 있지만 그 배경과 바탕에는 전혀 다른 이념과 사상의 갈등과 다툼도 놓여 있다는 점이다.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의 영국 스타일과 동류인 미국은 수출과 수입이 많아지고 그런대로 수지 균형만 맞출 수 있다면 무조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수출 수입을 통해 일자리가 많이 창출될 것이니 균형 잡힌 무역은 그 자체로서 이익이고 상호간에 ‘윈윈’이란 생각을 하는 미국이다. 뿐만 아니라 수지가 어느 정도 적자라 해도 달러라고 하는 수단을 가진 미국으로선 사실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무역에 대한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商戰(상전)의 사상, 중국식 重商主義(중상주의)

 

 

중국인들의 머릿속에서 국제 무역이란 나라간의 무역을 통한 전쟁, 즉 商戰(상전)이란 생각이다. 많이 내다 팔면 승리하는 것이고 많이 사 들여오면 지는 전쟁으로 여기는 중국인들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위로는 시진핑에서부터 공산당 전체 그리고 정부 관리와 기업인들, 아니 전 중국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商戰(상전)의 사상은 근대 초 유럽 초기 자본주의 시절의 重商主義(중상주의)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근대 초기 국제 화폐라곤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던 시절, 무역을 통해 다른 나라에 물건을 많이 팔고 그 대가로 금이나 은을 많이 가져옴으로써 富强(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중상주의의 핵심이다.

 

다만 중국식 商戰(상전)의 개념은 중상주의적 발상에 더하여 서구 열강의 공세 앞에서 무력했던 청나라 말기의 중국식 계몽주의가 덧붙여져서 형성되었다. 무기나 정식 전쟁으로선 서양 열강을 이길 수 없으니 장사를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인 것이다.

 

 

商戰(상전), 그리 낯선 생각은 아니지만

 

 

무역을 商戰상전)으로 보는 생각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낯선 생각이 아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1980년대까지도 중상주의적 발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정희 시절의 우리나라 역시 수출을 통해 국내 산업을 발전시켜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1990년대의 거품 소멸 이후 수출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고민 중에 잇고 우리 역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사조가 들어왔으며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 이후 흐름이 상당히 변해왔다.

 

하지만 중국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해외 시장을 장악해서 글로벌 전체로부터 중국이 이득을 보고 그로서 글로벌 패권국이 되어보자는 중국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달러를 대체하고 위엔화를 글로벌 통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국이다.

 

 

영미식 가치관과 중국식 가치관의 싸움

 

 

무역으로 윈윈할 수 있다는 영미 스타일의 사고방식과 국제 무역을 일종의 전쟁 즉 商戰(상전)으로 여기는 신흥 강국 중국의 생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무역을 일종의 전쟁으로 여긴다면 상대국의 기술을 훔쳐내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라 하기 어렵다. 전쟁에서 적국의 기밀 정보를 빼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뇌물을 주어 이득을 취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렇기에 중국인들은 겉으로야 하는 말을 떠나 속으론 기술 도둑질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통쾌하게 여긴다.

 

 

시장 개방에 대한 중국의 근본 의도

 

 

그간 중국은 거대 내수 시장을 내세워 외국 기업들이 들어오도록 허용했지만 예외 없이 합작투자 방식이었다. 특히 중국 기업이 지분을 더 많이 갖는 구조였는데 이는 합작을 통해 외국 기업들의 선진 기술을 빼내기 위한 의도가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나 호호당의 중국인 친구는 예전에 상대에게 걸려들도록 덧을 놓는다는 표현을 썼다. 참새 잡이를 위해 먹이를 조금 주어놓고 열어주면 다 들어올 것이고 때가 되면 그물을 덮어서 일망타진할 것이라고 껄껄 웃고 있었다.

 

이는 비단 그 중국 친구만의 특별한 생각이 아니라 보통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란 점에서 사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 하겠다.

 

이번 무역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은 이제 약간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이나 기타 무시할 수 없는 강국들에 대해선 비교적 페어플레이로 상대해줌으로써 시비의 여지를 줄이고 반면 우리 대한민국이나 기타 약소국에 대해선 사정없이 비관세 장벽으로 조이는 이중 플레이를 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할 말이 많아서 도중에 썼다가 날려버린 내용도 많았는데 여전히 할 얘기가 많이 남았다. 그런데 글이 길어졌다. 이에 나머지 얘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아줌마처럼 생긴 ‘듣보잡’ 감독의 놀라운 능력

 

 

저 감독은 생긴 게 꼭 아줌마네 아줌마, 크로아티아 시합을 관전하면서 아들에게 건넨 말이었다.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그래, 아빠. 아들의 변이었다. 그런데 그 아줌마처럼 생긴 ‘듣보잡’ 감독이야말로 결승에 진출한 크로아티아의 진정한 비밀병기였다는 사실.

 

야구는 선수들이 하는 게임이지만 축구는 그야말로 감독의 역량에 달려있다. 축구에 관심 있는 팬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크로아티아하면 일단 모드리치가 떠오른다. 그런데 저 모드리치가 저렇게나 체력이 좋았던가! 저 놈 약 먹은 거 아냐? 역시 아들에게 건넨 멘트였다.

 

 

전 선수들을 죽도록 뛰게 만든 놀라운 리더십

 

 

기억하기로 모드리치가 대단한 선수인 것은 확실하지만 저렇게 악착같이 뛰어다니는 모습은 이번 월드컵이 처음이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모드리치만이 아니라 전 크로아티아 선수들을 죽도록 뛰게 만든 이는 바로 저 아줌마처럼 생긴 무명의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목요일 새벽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시합을 지켜보던 나는 전반 후반을 1대1로 끝내고 연장전에 들어갈 무렵이 되자 크로아티아가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전까지도 나는 잉글랜드가 이길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연장전에 들어가자 크로아티아 선수들이 더 살아서 생생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앞의 두 게임 모두 연장전을 치르고 승부차기를 거치면서 올라온 크로아티아였고 평균 연령도 크로아티아가 많다고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는 1명의 선수도 교체하지 않은 상황에서 연장전에 들어간 마당에 모든 선수가 더욱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지, 저 괴력은?

 

역시 ‘국뽕’이 마약보다 더 센 거 같다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기다렸다가 승부수를 띄운 감독의 놀라운 전략

 

 

그런데 크로아티아 감독은 연장전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교체선수들을 차례로 투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키치의 역전골이 터졌다. 그 순간 아, 그렇구나, 저 아줌마 감독이 연장전까지 예상하고 교체선수들을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반면 영국의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교체 선수가 다 써버린 탓에 부상 선수를 교체할 수가 없었다.)

 

크로아티아의 진정한 비밀병기는 감독이었다.

 

 

크로아티아의 진정한 비밀병기는 모드리치나 만주키치같은 선수들이 아니라 엄청난 조직력을 이끌어내었을 뿐 아니라 저들을 정말 죽도록 달리게 만든 저 아줌마 감독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간만에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우리가 이탈리아에게 역전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경기가 크로아티아의 승리로 끝나자 강렬한 감동이 내 가슴을 강타했다.

 

우와 저건 감독이네, 감독, 그렇지 아들? 아들 답하길 응, 맞아. 영웅 감독이 그렇게 탄생하고 있었다.

 

야, 아들 저 감독 생년월일 검색해봐, 빨리. 아들이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줄라트코 달리치의 운세 분석

 

 

즐라트코 달리치, 참 이상한 이름의 이 사나이는 1966년 10월 26일생이었다. 丙午(병오)년 戊戌(무술)월 戊午(무오)일.

 

생시를 모르니 올 해 2018 무술년이 立秋(입추) 아니면 立春(입춘)이 된다. 그래서 위키에 올라온 달리치의 캐리어를 검색해보니 금방 알 수 있었다. 올 해 2018년으로서 저 친구는 立秋(입추)의 운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 결승전이 남았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크로아티아의 우승 여부를 떠나서 최고의 스타는 바로 저 달리치 감독이다. 스타 탄생.

 

세 번의 게임을 모두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올라온 팀이니 선수들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을 터, 당연히 프랑스의 우승 가능성을 점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게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지금부터는 나 호호당을 완전히 매료시킨 저 크로아티아 선수들과 달리치 감독에 대해 베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데가 어린 나이에 못된 버릇부터 배운 얄미운 움바페를 생각하면 더욱 크로아티아를 응원하게 된다.)

 

 

크로아티아를 응원한다 그리고 베팅한다.

 

 

이미 합리성이나 이성 따윈 접어두기로 했다. 그저 저 멋진 크로아티아와 감독의 기적적인 우승을 기원한다. 그래서 크로아티아에 베팅한다. 돈을 걸라고 해도 기꺼이 걸겠다. 잃어도 좋다, 이럴 때 질러야지 언제 지르겠는가!

 

기껏해야 축구의 변방인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의 프로팀 감독직이나 맡아봤던 사람이다. 유럽 축구계에서 볼 때 잘 해야 C 클래스의 무명 감독 경력이 전부인 그가 인구 4백만의 작은 나라 선수들을 이끌고 세계 축구의 최정상 결전장인 월드컵에 나와 결승에까지 진출시켰다.

 

물론 크로아티아, 월드컵 4강의 경력을 지닌 나라이다. 선수들도 유럽 프로팀에서 뛰고 있기에 수준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번에 크로아티아가 결승에까지 오를 것을 예상한 전문가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었으랴. 기껏 16강이나 8강 언저리에서 탈락하면 그래 그 정도면 잘 했어 하는 평가를 받았을 크로아티아였다.

 

역시 축구는 감독의 게임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줄라트코 달리치, 그의 운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 세계 축구의 주 무대에 등장한 셈이고 앞으로 18년 정도는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갈 대스타 감독의 데뷔 무대가 바로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이었다.

한 해의 반환점에 시작된 미중 무역 전쟁

 

 

저번 주 7일은 小暑(소서)이었고 이로서 한 해의 절반, 즉 반환점을 통과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소식, 미국과 중국이 결국 무역전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역전쟁 개시와 동시에 미국의 이지스 구축함이 중국과 대만 사이의 바다인 ‘대만해협’을 (강행) 통과했다, 무력시위인 셈이다.

 

1988년 미국 의회는 일본으로부터의 무역 적자를 시정하기 위해 이른바 ‘슈퍼 301조’를 통과시킨 뒤 일본 자동차 수출에 대해 법을 발동했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로부터 30년만의 일이다.

 

당시는 일본이 위협이었던 것이고 이번엔 중국이 미국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일본과는 달리 글로벌 패권까지 넘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갈등 국면은 당시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고 할 수 있다.

 

 

30년 만에 다시 시작된 패권 전쟁

 

 

흥미로운 점은 이번 무역전쟁은 1988년으로부터 30년만의 일, 30년은 60년 순환의 절반에 해당되는 때란 점에서 글로벌 형세는 또 한 번의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하겠다.

 

이번 미국의 관세 조치를 전쟁으로 치면 일종의 前哨戰(전초전) 성격이 짙다. 일단 중국 제품 340억 달러에 대해서만 25% 관세부과를 실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 주 뒤에 추기로 160 억 달러에 관세를 부가할 방침이라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 중국의 전체 대미 수출액의 10%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전초전이란 말을 한다.

 

중국의 대미 수출은 2017년의 경우 5,055억 달러였기에 이번에 일단 그 1/10에 대해서만 관세조치를 취한 것이고 향후 중국이 계속 버티면 중국의 대미 수출 전체에 대해 관세조치를 취하겠다는 트럼프이다.

 

반대로 중국의 미국으로부터 수입액은 2017년 1,299억 달러였다. 중국이 미국과 동일한 25%의 관세율을 적용할 경우 액수만 놓고 보면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중국은 관세 보복에 더하여 또 다른 방법, 즉 비관세 장벽을 최대한 가동할 가능성이 크다.

 

비관세 장벽이란 간단히 말해서 중국에 진출해있는 미국 기업들을 상대로 골탕을 먹이거나 통관 지연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이미 당장 중국 당국은 관영 미디어를 동원해서 미국 여행이 무척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되풀이해서 내놓고 있다. 이는 보나마나 중국 당국이 자국 중국 관광객의 미국 여행 금지 조치를 단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이라 하겠다.

 

(참고로 얘기하면 중국 관광객들이 미국 여행에서 지출하고 있는 비용은 연간 332억 달러, 일본인들이 미국에서 지출하는 160억 달러의 두 배에 달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우려되나니

 

 

문제는 우리 경제이다. 우리의 수출 구조는 미국에 대한 직접 수출도 크지만 부품이나 중간재를 중국으로 수출하고 그곳에서 완성된 완제품이 미국으로 수출되는 비중이 훨씬 크다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치고 받는 무역전쟁은 우리 경제에 막대한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경제는 온통 惡材(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판국에 미중 무역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정부는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비롯해서 여러 방면에서 대응책을 내놓음으로서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이번의 미중 무역전쟁처럼 우리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경 즉 글로벌적인 환경변수들은 예전보다 더 나빠지고 있다.

 

이제 너그럽던 개방형의 글로벌 리더 미국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 트럼프의 표현처럼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인의 돼지 저금통’이 되진 않겠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 전쟁,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

 

 

해마다 양력 7월에 있는 小暑(소서)와 大暑(대서) 무렵이면 그 해의 行路(행로)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법인데, 이번 소서엔 등장한 일은 미중 무역 전쟁이었으니 올 한 해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되고 있다.

 

일단 일이 터진 이상 미중 양국이 쉽사리 타협에 나서진 않을 것이라 본다. 타협이 실패했기에 무역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두 나라 모두 단단히 각오를 하고 시작했을 것이니 그렇다.

 

예전 일본의 경우 군사적으로 미국의 보호국이라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군말 하지 않고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일본 경제의 파국을 초래했고 그로서 기세등등하던 일본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중국은 이번 미국의 공세에 대해 나름으로 끝까지 해보겠다는 결의를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중국은 1당 체제 나아가서 사실상 1인 독재 체제란 점에서 어지간한 어려움 정도는 통제할 수 있으니 능히 버텨나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미중 무역전쟁은 시작된 이상 꽤나 오래 이어질 공산이 크다.

 

 

어려운 우리 경제에 대한 또 하나의 외부 악재

 

 

물론 미중 무역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우리만의 경우는 아니다.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의 피해가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수출은 우리 경제의 제1차적인 버팀목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일이 장기화될 경우 우리에게 미칠 악영향은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란 점이다.

 

이미 일부 경제연구소에선 올 하반기부터 급격한 내수경기 불황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경기 후퇴 국면을 넘어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얘기이다.

 

신규 취업 부진, 기업의 투자 부진, 가계 부채로 인한 소비 위축, 반도체를 제외한 전반적인 산업 경기 부진 등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악재들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미중간의 무역 전쟁까지 터졌으니 갈수록 첩첩산중의 형국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어려워질 것으로 예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나 호호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경제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측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예측은 예측인 것이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 또한 해오고 있었다.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란 다름 아니라 올 해 7월까지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올 해 7월 己未(기미)월은 2017년 4월 甲辰(갑진)월부터 시작된 60개월의 순환 과정에 있어 15개월이 경과하는 때이다. 그렇기에 7월의 상황이 파악되면 그로서 향후 45개월 즉 2022년 4월까지의 흐름을 무난히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7월 小暑(소서)가 되자마자 결국 미중 무역 전쟁이 발발했다. 미중 간의 타협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내수 경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더욱 수출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

 

 

한중 교류와 교역의 축소 가능성

 

 

게다가 이번 무역 전쟁은 통상과 교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란 거대 세력이 글로벌 雌雄(자웅)을 가리는 거대한 투쟁의 일부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 마당이라 현재 미국은 우리에게 보다 더 확실하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해오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 들어 추진되기 시작한 이른바 ‘신 남방정책’이란 것 그리고 이번에 문 대통령이 인도와 싱가포르 두 나라를 방문하는 것 역시 미국의 대 중국 포위망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참고로 얘기하면 미국이 과거 수십년간 쳐다보지도 않던 인도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새롭게 시작된 일로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란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기업들이 기존에 투자했던 중국 내 비즈니스는 향후 급속도로 위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심하게 얘기하면 추가 투자는 물론이고 기존에 있던 것도 다 때려치우고 나와야 할 판이다.)

 

다시 말해서 1992년 우리가 중국과 수교한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온 한중 교류와 교역이 이제 축소 쪽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고 나아가서 향후 우리 경제 구조에 또 한 번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번 미중 간의 무역 전쟁은 그 자체로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一波萬波(일파만파)의 파급 효과를 가져 올 것이란 점이다.

 

 

호호당의 향후 예측

 

 

마지막으로 향후 우리 경제의 향방에 대해 언급하면 올 10월 壬戌(임술)월부터 좀 더 구체적인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내년 5월 己巳(기사)월, 즉 지금으로부터 10개월 뒤가 되면 상당히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클 것으로 추산이 된다.

옴 진리회 교주 처형

 

 

1995년 3월에 발생했던 도쿄 지하철 살인가스 사건, 출근길의 도쿄 지하철 5개 차량에 맹독 가스를 뿌린 결과 13명을 숨지게 하고 6천명 이상을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게 만든 엄청난 테러였다. 그 주범인 邪敎(사교) 옴 진리교의 교주였던 ‘아사하라 쇼코’가 오늘 7월 6일 아침에 처형되었다. 가담자 6명도 함께 처형되었다.

 

점심 무렵 뉴스를 듣고 나서 아, 그래 그 미친 놈, 인상도 더럽게 생긴 놈이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이제야 처형이라, 일본의 행정도 어지간히 느리구나 싶었다. (일본은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이다.)

 

 

아사하라 쇼코의 사주와 운세 분석

 

 

그 사악한 놈의 사주가 궁금해졌고 이에 알아보았다.

 

아사하라 쇼코, 생년월일은 1955년 3월 2일이고 생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생시를 모르니 정확한 성격 분석은 어렵다. 그러나 그간의 경력이 알려져 있으니 운세 흐름 정도는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乙未(을미)년 戊寅(무인)월 壬戌(임술)일이다. 3월 2일 초봄에 태어난 壬水(임수)이니 환타지가 꽤나 강한 자로서 사주 구성 상 충동적이고 격한 데가 있는 자임을 말해준다.

 

운세 순환을 보면 1962년과 2022년이 立春(입춘) 바닥이고 1992년이 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다.

 

1955년에 태어났으니 운세가 한창 기울 때 태어났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왼쪽 눈은 볼 수가 없고 오른 쪽 눈은 시력 1.0 정도였다고 한다.

입증된 바는 없지만 부친이 실명한 것은 수은 중독으로 인한 ‘미나마타 병’ 때문인 것 같고 그로 인해 큰 형 역시 맹인이었던 것을 보면 아사하라 역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먼저 간단하게 그의 운명 사계절부터 알아보자.

 

1955-1962: 운명의 겨울

1962-1977: 운명의 봄

1977-1992: 운명의 여름

1992-2007: 운명의 가을

2007-2022: 운명의 겨울

 

 

비뚤어진 심성과 종교의 잘못된 만남

 

 

아사하라의 경우를 보면 장애를 안고 태어나 청년기까지 풀리는 일이라곤 하나 없던 불우한 젊은이였다. 그러다가 1977년 운세 흐름이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도가의 신선술과 인도의 요가 그리고 불교 등을 통해 정신적 만족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결국 과대망상이 발동한 나머지 동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자기 멋대로 종합해낸 결과 새로운 邪敎(사교)를 창시하게 되었다.

 

이에 1987년 아사하라의 운세가 한창 뻗어가던 小暑(소서)의 운, 한 해로 치면 7월 초와 같은 때에 ‘옴 진리회’라는 사교단체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악인도 운을 만나면 상황이 좋아지는 법이니

 

 

이처럼 악인이나 미친놈도 운을 만나면 상황이 좋아지고 발전하는 법, 교세도 날로 커져갔다. 여름철이 되면 논의 벼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해가 되는 잡풀도 함께 무성해지는 이치라 보면 된다.

 

이후 아사하라는 활발히 포교활동을 전개했고 달라이 라마를 만난 것을 자신의 포교활동에 최대한 활용하는 마케팅 능력도 보여주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아사하라가 이상한 또라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티벳 불교의 일본 주재 대표는 옴 진리회와의 관계를 일체 단절했다.)

 

교세가 성장하자 급기야 일본 국회의원인 중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던 아사하라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썩은 세상을 청소할 필요가 있다면서 무장투쟁노선을 천명했다.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썩은 세상을 싹 쓸어버리고 자신은 정화된 맑은 세상을 다스리는 법황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늘 대량의 LSD을 투약하며 지냈던 아사하라는 40-50명 정도의 젊은 여성 신도들로 이루어진 하렘(harem)을 만들어 놓고 즐겼다. 아사하라 본인은 ‘최종의 해탈자’인 까닭에 얼마든지 복수의 여성신도들과 즐겨도 관계가 없다, 젊은 여성들과의 성행위는 그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최종 해탈자로서의 의무라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 과대망상이 부른 참극

 

 

아사하라는 종말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실행에 옮긴 대형 사건이 1995년 3월 20일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었다.

 

사린(sarin)은 독극물인 시안화물보다 100배 이상 독성이 강한 물질로서 액체나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 중추신경계 특히 시신경을 마비시키며 계속 되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극독 물질이다. (아트로핀 주사,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기억이 날 것이다. 바로 이 주사가 사린 가스 중독에 대한 응급 처치약이다.)

 

대형 독가스 테러를 일으킨 아사하라는 사건 즉시 여러 가담자들과 함께 신속하게 체포되었지만 일부는 2012년이 되어서야 모두 검거되었다.

사형수는 모두 13명인데 이번에 아사하라를 포함해서 7명이 교수형으로 집행당했고 아직 6명이 남아있다.

 

 

사형 집행이 20년 이상 지연된 이유

 

 

그런데 일본 정부는 사형 제도가 유효한 데 왜 그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것이 꽤나 궁금했다. 이에 나무위키에 실린 글을 보니 제법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유가 나름 흥미롭다. 아사하라의 사형을 빨리 집행하면 나머지 신도들에게 있어 그는 순교자가 될 것이고 사형장소는 聖地(성지)가 되어버릴 것이니 그럴 바엔 살려둬서 욕보이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형집행 전까지도 옴진리교 신도들이 구치소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 된다. 게다가 아사하라의 사형이 집행될 것 같은 기미가 있을 때마다 또 다른 신도가 자수를 해서 사형 집행을 미루는 식으로 20년 넘게 집행을 질질 끌어왔는데 이제 더 이상 범행 가담자가 없다는 판단 끝에 이번에 집행을 했다는 것이다.

 

선천성 장애로 태어나 세상과 사회에 적대감을 품은 한 젊은이가 종교의 신비함에 빠져들었고 그러다가 제 멋대로 이상한 종교를 만들어내었다. 운이 따르다 보니 열심히 포교를 한 결과 적지 않은 신도들이 생겨났고 그로서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마약에 빠져 현실감각을 상실한 아사하라는 마침내 자신의 미친 망상을 실천에 옮겼고 그로서 대형 테러 사건의 장본인이 되었다.

 

 

악의 씨앗이 뿌려지면 악의 열매를 맺게 되니

 

 

도쿄 지하철 테러는 그의 운세가 한창이던 시절에 발생했다. 1962년이 입춘 바닥이었으니 1992년이 입추였고 그 3년 뒤인 1995년의 일이었으니 한 해로 치면 8월 하순, 즉 處暑(처서) 무렵과 같다.

 

처서는 벼꽃이 피고 그로서 쌀알이 매달리는 때, 따라서 아사하라라는 독성 잡초가 때가 되어 꽃을 피워 올리고 그로서 악의 열매를 매달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1995년 3월의 도쿄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이었던 셈이다.

 

2022년이 아사하라에게 있어 또 한 번의 입춘 바닥이 되는데, 결국 그 4년 전인 올 해 사형 집행을 당했다. 인간 세상은 언제나 이런 미친 또라이가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런 미친놈의 말이 귀에 솔깃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사하라의 사주와 그간의 일들을 살펴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있다. 중국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켜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신흥종교의 교주 홍수전과 유사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물론 스케일은 다르지만 사건의 본질은 동일하다.

 

홍수전 역시 과거에 낙방하고 암울한 시절 계시를 받아 신흥 종교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고 아사하라 역시 마찬가지. 다만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내부의 모순이 첨예한 때였기에 보다 대형 사고로 비화되었을 뿐이다.

 

 

일본의 국운이 기울 때 터진 사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는 공교롭게도 일본이 경제 거품 붕괴로 사회 전체가 암울한 때 일어났다. 게다가 사건 발생 두 달 전엔 고베 대지진이 발생했으니 당시 일본의 국운은 2005년 입춘 바닥을 향해 한창 속도가 기울고 있던 때였다. 나라의 운이 기울면 이런 이상한 사고가 빈발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