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인생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헷갈리는 젊은이들



대학 진학할 때 성적에 맞추어 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상이나 포부에 따라 소신 지원을 할 것인지 하는 고민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당장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세월이 가서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되면 진짜 어려워진다. 취업 자체도 어렵지만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했다고 치자. 일하다 보니 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고민하는 경우도 많고 너무 일이 고된 바람에 계속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또 일은 그런대로 할 만 하지만 급여가 낮아서 고민하기도 한다. 


물론 어쩌다 보니 아예 취업 자체를 포기해버린 젊은이도 최근에 적지 않다. 얼마나 암울할 까. 그러니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이란 말, 또 대가리 박고 자살하자는 ‘대박자’까지 유행이다.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직장이 있을 경우 당연히 소득이 생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결혼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소득 수준을 생각하면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 젊은이들도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에 그냥 나도 남들처럼 비혼족을 자처해볼 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결혼을 해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겠다는 커플도 생겨나고 있다. 부부가 자녀를 출산하지 않겠다는 것은 물론 그들의 결정이겠으나 그게 자연스럽다 말하긴 어렵다. 


지금까지의 얘기들은 모두 최근 우리 젊은이들의 고민과 방황이 극도로 깊어지고 심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 대해 나 호호당이 어떤 지적을 하자는 얘긴 절대 아니다. 다만 60년 이상의 짧지 않은 세월 살아오면서 느낀 점, 알게 된 점, 그리고 자연순환운명학을 정립하고 수많은 상담을 통해 느낀 것들 중에 우리 젊은이들에게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플 뿐이다. 



덕업일치는 실로 확률이 희박하다.



늦었지만 아제 오늘의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할 때가 되었다. 바로 덕업일치에 관한 것이다. 한자로 德業一致(덕업일치). 최근엔 포털 사이트의 국어사전에도 등재될 정도이니 일반 명사가 된 셈이다. 뜻을 보면 자신이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일, 이른바 ‘덕질’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고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인데 그러면서 돈도 그런대로 잘 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러기란 확률이 희박하다. (덕업일치가 왜 어려운 가에 대해선 ‘나무위키’에도 아주 잘 소개되고 있다는 점 알려드린다. 들어가서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덕업일치란 것이 그러나 불가능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덕업일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덕업일치를 달성하려면 특별한 재능과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엄청난 열정, 기막힌 행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좋아하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인생의 나머진 다 포기할 수 있다는 거의 무모하다 싶은 용기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재능과 열정, 행운, 여기에 더해서 무모한 용기가 있어야만 덕업일치가 가능해진다. 


긴 인생을 살아가려면 중요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건강도 중요하고 돈도 벌어야 할 것이며 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 욕구란 것이 실로 가짓수가 많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간 역시 생명이고 동물이기에 후손을 이어가고픈 강렬한 욕구, 세다가 후손이 생기면 그 후손을 잘 되고 번창하게 하고픈 욕망이 당연히 생기는 까닭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기르다 보면 갖은 번잡한 일과 어려움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바람에 배우자에게 싫증이 나도 전혀 안 그런 척 연기까지 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가진 다양한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해법은 쉽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덕업일치를 이루기란 실로 어렵다.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의 실재 사례를 들어본 즉은



여기에 나 호호당이 긴 세월 상담을 해오는 과정에서 지켜본 바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의 케이스를 얘기해보겠다. 


덕업일치를 이루고 그걸 평생의 업으로 해가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나본 바에 의하면 그들 대부분이 거의 빠지지 않고 토로하는 얘기가 하나 있다는 점이다. 그게 뭔가 하면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 상황에서 본인이 그런대로 잘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더라는 얘기이다. 


궁핍한 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었기에 그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덕업일치를 이룬 대부분 사람들의 얘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일에 대한 재능이 충분한지 그게 세상에 나가서 먹힐 지 어떤 확신도 전망도 크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로 오묘하고 심오한 운명의 逆說(역설)


사실 이게 바로 삶과 운명의 지극히 깊고 오묘한 이치라 여긴다. 


선택지가 많은 자는 미련 때문에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한 결과 후회하게 되는 것이고, 재주가 많은 자는 그 많은 재주로 인해 하나의 長技(장기)를 갈고 닦지 못한다. 환경이 윤택한 자는 절실하지가 않아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지 못하니 그로서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반대로 변변치는 않아도 달리 선택지가 없다면 오로지 그 길로만 나아갈 것이다. 도중에 끊임없이 미심쩍어 하고 때론 막막하기도 하겠으나 여전히 다른 방도가 없으니 어려울 때마다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길은 계속 이어지고 점차 나아진다. 그러다 보면 먹고 살만한 수입도 얻게 되고 이에 신이 나서 더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마침내 당초 상상하지도 못했던 성공을 거두게 된다. 


덕업일치를 이룬 자에게 물어본 결과 처음부터 자신의 일을 무작정 좋아하고 즐거웠다기보다 하다 보니 손에 익고 능력도 더 생기는 과정에서 점차로 자신의 일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 실은 더 일반적이었다. 



구체적인 사례 소개



이 대목에서 실례를 하나 소개해본다. 나 호호당과 친밀한 사이라서 얘기를 좀 해도 나중에 책망하진 않을 것이라 여기기에 얘기한다. 유명한 수학강사의 인생 스토리이다. 


어려운 집안에서 생계를 꾸려갈 사람이라곤 본인 밖에 없어서 25세 무렵 대학을 마쳤으나 수학과를 택해서 다시 1학년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수학, 장래 전망은 크게 없어 보였지만 원래 좋아하는 과목이고 나중에 강사로 나서면 먹고 살 순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수학 가정교사 일로 등록금 마련은 물론이고 가계 살림도 책임졌다 한다. 그 때가 1985년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4년 동안 오로지 수학강사의 길을 걸어왔는데 지금은 서울 강남과 분당 등지에서 규모가 상당한 학원을 경영하고 있다. 경영 때문에 또 체력 때문에 시간은 줄였으나 여전히 직접 강의를 맡고 있다. 돈도 상당히 벌었다. 간단히 말해서 성공했다.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으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헤쳐 나왔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돈도 많이 벌었으니 덕업일치로 성공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나 호호당은 이런 분들을 적지 않게 알고 있고 또 상담을 통해 만났다. 



성공했다는 말까지 듣지 않아도 충분한 삶이지만



오늘의 글은 덕업일치란 것이 과연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이에 대답은 ‘가능하다’이다. 그러나 핵심을 얘기하면 덕업일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 무수한 산과 강을 넘고 건너야 한다는 점이다. 


한 번 태어나 살아보는 세상이다. 사실 굳이 성공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떠랴. 한 번 살아본다는 것이 벌써 기막힌 행운이니 말이다. 나 호호당이 보기에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짝을 짓고 자녀를 낳아서 무사히 길러낸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공이란 생각을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실은 이거야말로 대단한 사업이자 큰일인 까닭이다. 


그런데 기왕지사 한 번 태어난 것 내친 김에 성공도 하고 싶은 우리들이고 덕업일치도 해보고 싶은 욕망 누구에게나 있으니 그 또한 자연스런 욕망이다. 



치열한 세상에서 그래도 성공해보고 싶다면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다. 20122년에 작고한 미국의 유명한 진보적 작가인 고어 비달(Gore Vidal)의 말이다. “내가 잘 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실패해야만 내가 성공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이 세상은 누구에게나 성공하고픈 욕망이 있기에 치열하고 또 치열한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업일치를 통해 성공한 자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재능은 경쟁을 통해 가려지고 또 벼려지는 것이고 열정 또한 견디지 못하면 별 게 아니게 된다. 남이 실패하고 내가 선택을 받는 행운도 따라야 하겠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무모한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덕업일치를 이룬 자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부터 큰 욕심이 없고 그저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 겨우 밥만 먹고 살 수 있으면 만족이란 생각을 했던 경우가 더 많았다.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감히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어 남들로부터 저 사람은 덕업일치를 이룬 자야 하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실은 더 일반적이란 얘기이다. 



그 어떤 길도 막다른 길은 없기에



이 세상의 어떤 길도 막다른 길은 없다. 다가서다 보니 길이 막혔다고 스스로 생각을 할 뿐이라 본다. 용기를 내어 끝까지 가보면 또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샛길을 발견할 것이니 또 그 길로 걷다보면 마침내 넓은 길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인생이고 운명의 묘미라 여긴다. 


힘든 오늘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오늘의 글이 나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악다구니 투쟁으로서의 30년 전쟁



아주 오래 전 유럽에서의 일이다.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나라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장장 30년간에 걸쳐 참혹한 전쟁이 있었다. 1618년에 시작해서 1648년에 끝났기에 흔히 30년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말로는 종교 전쟁이라 하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았다. 판이 커지자 거의 모든 유럽의 나라들이 개입되면서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 악다구니 투쟁이었다. 


같은 개신교 국가이던 덴마크와 스웨덴이 반대 진영에 서서 싸웠으며 프랑스 역시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같은 가톨릭 제국인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했다. 종교적 신념보다 서로의 이익이 중요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아사리판’ 이었다. 


지역 영주나 제후들은 가톨릭교회가 가진 방대한 재산을 빼앗기 위해 졸지에 개신교로 전향하기도 했으며 헝가리 왕은 폴란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당시로선 악마로 치부하던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末世(말세)의 전쟁이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그 전쟁은 종말 전쟁이었다. 세상의 진정한 종말이 다가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기존의 모든 도덕과 가치관이 무너졌으며 중세 유럽을 이끌어오던 하느님의 율법과 예수의 가르침도 덩달아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당시 사람들에겐 실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책방에 가면 30년 전쟁을 소개하는 책이 제법 된다. 내 경우 영국 사학자 윌슨이 쓴 “유럽의 비극, 30년 전쟁사”를 아마존을 통해 구입해서 읽었고 번역판으로 베로니카 웨지우드의 “30년 전쟁”을 읽었으며 기타 여러 권의 책을 예전에 읽은 바 있다. 


그런데 워낙 일의 경위와 사정이 복잡다단해서 읽다가 포기할 정도였다. 그저 내가 받은 인상이라곤 인간의 탐욕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누군가 30년 전쟁에 대해 물어올 것 같으면 그냥 온 유럽이 외부의 오스만 제국까지 끌어들여서 싸웠던 이판사판 개판 전쟁이었으니 더 이상 알 것 없다는 식으로 얘기해준다. 묻지마, 복잡해!



전쟁 결과 누군가에겐 구역질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어쨌거나 기진맥진해서 끝이 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다.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었지만 나름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고 이에 종전협상을 시작했다. 참전 당사국 대표만도 무려 109명이었다. 진통 끝에 조약을 체결했다. 오늘날 독일 서북쪽의 지역인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에서 조약문이 작성 체결되었기에 훗날 역사가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이라 부른다. 


조약문은 프랑스어로 작성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프랑스어는 국제외교의 공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오늘날 영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어 프랑스 사람들의 자존심을 긁어놓고 있다.)


길고 긴 조약문이었다. 무려 88개의 조문과 부속 문항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하시면 구글을 통해 검색해볼 수 있다. 구글 만세! 


조약을 통해 수많은 영토가 재조정되었고 엄청난 이권들이 거래를 통해 오갔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각 나라마다 그 지배자의 선택에 따라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를 결정할 자유를 갖는다는 점이었다. 


오늘날 이른바 현대 세속국가에서 당연히 인정되는 종교의 자유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물론 당시에는 각 나라의 군주나 지배자가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지 일반 백성들에게 그런 권리와 자유가 없었다. 


그 바람에 일반 시민이나 백성들은 종교 때문에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거나 탈출하는 일이 러시를 이룰 정도였고 특히 고급 기술자들의 이주나 이민으로 인해 유럽의 산업지형이 바뀔 정도였다. 



민주화는 당하는 것이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우리 젊은이들은 민주화 되었다, 민주화 당했다는 재미난 표현을 쓰곤 하는데 그 말은 참으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 민주화란 것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이지 자발적으로 되지 않는다. 유럽 역시 그 이후 민권이란 것이 생겨났으니 그 역시 민주화당한 셈이다. 


아무튼 참혹한 30년 전쟁의 결과 조약이 체결되었고 각 나라의 종교는 각국 지배자의 선택에 따라 정해지게 되었는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로선 도저히 눈 뜨고 봐 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절대에서 상대로의 이행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그 이후 세월이 갈수록 심대하고도 폭 넓은 영향력을 미쳤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으로 이 세상에 이른바 절대, 영어로 absolute 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아직도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진실이라든가 진리와 같은 것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선 그 바람에 ‘실체적 진실’이란 희한한 용어를 쓰고 있다. 들을 때마다 웃게 된다.)


眞實(진실) 혹은 眞理(진리), 영어로는 true 또는 truth 가 된다. 과거에 이런 단어는 종교적 절대권위의 차원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그런데 개신교적 가르침도 옳고 가톨릭의 그것도 옳다면 둘은 서로 상대적인 위치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치르게 했던 유럽의 30년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절대적인 것이 사라지고 상대적인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었다. 


절대적 진리가 인정받지 못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소위 正答(정답)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날 정답이란 시험을 칠 때 출제자가 정해놓은 답이 정답인 것이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정답이 없다고 한다면 각자는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는 교회의 가르침이 정답이었으니 실천하긴 어려워도 그냥 믿으면서 곧이곧대로 살기만 하면 모두 죽어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모든 것이 애매해져서 잿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1648년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전통적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말세가 왔고 불신의 지옥문이 열린 셈이었다. 



민주화와 과학혁명은 相對主義(상대주의)의 시대에 등장했다.



하지만 상대적 가치의 시대가 열리면서 민권의 시대 즉 민주주의와 과학적 사고방식이 길을 열었다.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방식은 결국 다수결이다. 그 이전에 나름 충분히 토의를 거치고 또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본 후에 유권자들이 투표를 한다. 그러면 임시적이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방향이 정해지고 결정이 난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른바 개나 소나 한 표로서의 가치는 동등한 것이 바로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다. 또 그 결정이 정답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아무런 관계가 없고 연륜이 쌓인 자나 새파란 철부지나 상관이 없다, 그저 일정 연령이 되어 투표권만 있으면 되는 세상이다. 


정답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개판 5분전인 것이고 식견과 경험이 많은 자의 관점에서 이거야말로 엉망진창인 세상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렇기에 1대1의 입장이 되면 어떤 말과 주장을 해도 그건 “님 생각이시구요!” 하면 그만인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준 과학을 보면 상대적 세계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과학의 정신은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과학적 정신은 기본적으로 회의, 즉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갈릴레이의 지동설 그리고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론이 과학의 모태인 것이다. 


이에 가설을 세우고 검증과 실험을 통해 어느 수준 이상 오류가 없으면 과학적 법칙이 된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이 틀렸다는 새로운 증거나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 유효하다. 상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나 과학 모두 상대적 세계의 산물이란 얘기이다. 



우리는 아직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시대에 머물고 있다.



이제 슬슬 나 호호당이 오늘 이 글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낼 때가 되었다. 왜 갑자기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는 17세기 유럽의 전쟁 얘기를 끄집어내어야 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결국 우리에 대해 얘기하기 위함이다. 


1950년대의 폐허에서 일어선 우리 대한민국이다. 겉으론 분명히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있지만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도 실로 많고 다양하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에 대해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아직 상대적 세계의 가치관을 우리 것으로 소화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근대화를 이끌어낸 유럽이 1648년부터 이미 절대적 세계에서 상대적 세계로 이행을 시작한 것에 비하면 그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는 여전히 절대와 상대가 함께 공존하는 헷갈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근대화, 영어로 Modernization 이란 단어가 있다. 이게 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상대적 세계로 넘어오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말해서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 또한 근대화의 근저에 놓인 상대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근대화는 합리화와 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합리화란 기존의 생각과 방식에서 벗어나 원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가능해진다. 이미 주어져 있는 정답이 아니라 그간에 정답이던 것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할 때 비로소 좀 더 나은 방식을 찾는 과정 즉 합리화가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비록 우리가 근대화를 해오긴 왔지만 그건 겉에 걸친 외투이고 속으론 미처 체화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이 그간에 생산적 결과를 가져오기 보다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옳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해온 결과 오늘에 이르러 소위 ‘진영논리’만 남았을 뿐이고 아군이 아니면 적이라는 살벌한 생각만 가득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리 정치는 이제 거의 파산 직전에 와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정치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서 이런 문제는 비단 우리 대한민국만의 문제 또한 아니다. 일본도 그렇고 중국 또한 그렇다. 동북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이 새롭게 혁신되지 않은 바탕 위에 근대화가 진행되어 왔기에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2024년이면 우리 국운의 입춘 바닥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그로서 다시 2084년에 이르는 60년에 걸친 국운 제3기가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국운 제3기가 끝나갈 무렵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상대적 세계로의 전환이 구체화되어 있지 않을까 전망해본다. 


오늘은 다소 무거운 주제였고 나름 최대한 줄였지만 글 분량도 적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얘기를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로저 페더러냐 라파엘 나달이냐?

 

 

며칠 전 2019 US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 라파엘 나달과 메드베데프의 시합을 텔레비전에서 시청했다. 긴 시합이라 도중에 그만 두었지만 나중에 나달의 승리를 확인했다. 이로서 나달은 19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에 성공하면서 20회 우승의 로저 페더러를 바짝 뒤쫓고 있다.

 

그래서 나달의 사주를 확인해보고 또 페더러의 사주까지도 확인해보았는데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주 구성이 대단히 흡사하다는 사실이었다.

 

 

사주구성이 대단히 흡사한 두 선수를 비교해본다.

 

 

라파엘 나달의 사주부터 알아본다.

 

1986년 6월 3일 오후 6시 20분이다. 따라서 丙寅(병인)년 癸巳(계사)월 戊寅(무인)일 辛酉(신유)시가 된다.

 

운기가 절정인 입추가 2008년 戊子(무자)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2008년부터 나달의 기세가 본격 상승하고 있다는 말이다.

 

로저 페더러의 경우 1981년 8월 8일 아침 8시 40분이다.

 

러니 辛酉(신유)년 丙申(병신)월 戊午(무오)일 丙辰(병진)시가 된다. 운기의 절정인 입추는 1998년 戊寅(무인)년이었다.

 

두 사람의 사주 구성을 비교해보자.

 

라파엘 나달: 丙寅(병인)년 癸巳(계사)월 戊寅(무인)일 辛酉(신유)시

로저 페더러: 辛酉(신유)년 丙申(병신)월 戊午(무오)일 丙辰(병진)시

 

유사점#1. 두 사람의 태어난 날 즉 日干(일간)이 무인이고 무오이니 모두 戊土(무토)로서 같다.

 

유사점#2. 두 사람 모두 사주 구성에 辛酉(신유)라는 코드가 들어있다. 두 사람에게 있어 신유는 빼어난 기운이자 동시에 금 기운이기에 메카닉적인 정밀성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정밀한 스트로크를 해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유사점#3. 두 사람 모두 여름철 태생이어서 열정과 에너지가 강하고 동시에 사주 천간에 丙火(병화)가 있어 공간 파악 능력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을 찾자면 라파엘 나달은 천간에 癸水(계수)가 있어 냉철한 구석이 있다는 점이고 로저 페더러는 그에 반해 공간 파악 능력이 좀 더 뛰어나다는 차이가 있다. 나달은 게임이 꼬일 때 냉정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좋다는 것이고 페더러는 기세가 강하다는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만간 나달의 시대

 

 

종합적으로 파악하자면 라파엘 나달이 로저 페더러보다 조금은 더 천재적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멀지 않아 나달이 페더러의 기록을 넘어설 것이라 여긴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로저 페더러가 정상에 오른 시기는 2004년이었으니 1998년의 입추를 넘긴 지 6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라파엘 나달의 경우 입추가 2008년이었는데 그 이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2006년 무렵엔 이미 세계 랭킹 2위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천재성이 더 돋보인다.

 

로저 페더러의 경우 작년 2018년으로서 서서히 내리막을 가는 대설의 운이었기에 이제 2020년부터는 급격히 하강세를 보일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라파엘 나달의 경우 2018년이 한로의 운이었기에 앞으로도 10년 이상 활약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조만간 로저 페더러의 기록을 갱신함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성적을 남길 수 있다는 판단이 든다.

 

 

서산에 지는 해와 오후의 작렬하는 해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 두 사람의 사주구성이 아주 흡사하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다. 로저 페더러의 경우 이제 서산에 기울고 있는 황혼의 햇빛이라면 라파엘 나달은 아직 뜨거운 오후의 작렬하는 백열의 태양이라 하겠다.

 

참고로 현재 탑 쓰리 안에 드는 조코비치의 경우도 알아보았다. 조코비치는 2001년이 입추로서 올 해의 경우 라달과 메이저 대회를 양분하고 있는 절정의 선수이지만 로저 페더러에 이어 나이와 운세 모두 약간씩 기울어가고 있다.

 

이에 전망해보면 남자 테니스의 경우 향후 5년을 본다면 라파엘 나달과 조코비치의 시대가 될 것이라 단언할 수 있겠는데 라달이 좀 더 우세할 것으로 전망한다.

 

 

기아차와 나달의 특별한 인연

 

 

라파엘 나달은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다. 기아 자동차가 메인 스폰서라는 점에서 말이다.

 

특히 재미난 점은 기아자동차의 경우 나달이 2004년 발목 부상으로 향후 전망이 극히 어두워지는 바람에 모두들 스폰서 계약을 망설일 때 과감하게 스폰서 계약을 체결해서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아 측의 판단이 대단히 정확했고 뛰어났다.

 

나달 역시 그런 기아에 대해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기에 바쁜 일정에도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전히 좋은 관계를 지속해가고 있다.

 

 

스포츠와 운세와의 관계

 

 

모든 사람에게 기세가 오르는 때가 있고 또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포츠의 경우 신체적 역량 즉 피지컬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가 젊은 시절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좋은 운세와 피지컬이 함께 가야만 빛을 볼 수 있다.

 

그 바람에 프로 스포츠 업계는 늘 희비가 엇갈린다. 유망주라고 비싼 돈을 들여 영입했으나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반대로 그냥 별 기대도 없이 썼더니 대박을 내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박병호 선수의 경우가 그렇다. 이제 막 운세가 급상승하려던 시점에 LG트윈스를 떠나 히어로즈로 옮겼는데 곧 대박이 났다. 이른바 탈쥐 효과가 그것이다.

 

그런 점을 지켜보면서 늘 흥미롭고 동시에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이론을 알아내고 정립해낸 나 호호당에게 그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 선수의 경우 애로사항이 하나 있으니 선수의 생일이 양력인지 음력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지방의 경우 1980년대 후반의 경우에도 음력 생일로 기재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이렇다. 최근 엘에이 다저스의 신인 개빈 럭스(Gavin Lux) 선수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이에 생일을 확인해보니 생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무명의 선수라서 점성술 사이트에 포착되어 있지 않다.

 

이에 생년월일만으로 추정해봐야 한다. 1997년 11월 23일생이니 정축년 신해월 기사일이다. 생시를 모르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가 된다. 상황을 보아 추정할 수밖에 없다. 2019년이 입추가 되든가 아니면 입춘 바닥이 된다. 하지만 입춘 바닥에 메이저 선수가 되는 법은 없으니 당연히 올 해 2019년이 입추가 된다.

 

활약은 입추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정도 운세에서 유망 신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면 이 선수는 장차 충분히 대박감이다. 엘에이 다저스의 주축 타자가 될 수 있는 선수인 것이다.

 

 

추석 연휴를 보내면서

 

 

오늘은 일요일, 추석 연휴가 끝나가고 있다. 직장인들은 이제 또 일하러 나가야겠네, 아이고! 하면서 울적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일부러 무거운 주제를 피했다. 우리나라의 8월은 온통 ‘조국’이었고 9월에도 조국이 될 공산이다. 다음 주면 秋分(추분)이다. 가을이 깊어질 것이다. 호호당의 기분도 가볍지 않고 다소 침울하다.

 

점차 내리막을 걸어온 우리나라의 국운은 다음 달 10월부터 한층 더 엄중하고 답답한 상황으로 들어갈 참이다. 교역 환경은 더 어려워지고 내수는 가라앉고 있으니 디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얼씬 거리고 있다.

 

(추석 연휴 때문인지 21일에 시작하는 자연순환운명학 기초강좌 클라스에 아직 여유가 있다. 많이 참여해 주시길 바란다.)

이사하는 일과 운명의 관계

 

 

상담오신 분들이 자주 물어보는 사항 종에 하나로서 이사가 있다. 언제쯤 집을 옮길 생각인데 그래도 괜찮겠냐는 질문, 이사 방향이 어떻겠느냐는 질문, 가령 현재 사는 곳에서 북쪽 방향으로 옮겨도 되는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사 시기와 방향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사라는 것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기에 당연히 중요한 일이고 큰일이다. 게다가 풍수에 대한 문화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기에 얘기를 드리고자 한다. 조금 전에 삶의 터전이라 말을 했는데 그 내용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오늘날 삶의 터전은 집이 아니라 직장이나 사업장이란 사실.

 

 

옛날은 한 마디로 말해서 농촌 사회였다. 집 앞에 바로 논이 있었으니 門前沃畓(문전옥답)이 그것이다. 물론 집 주변과 뒤로 밭도 있었겠지만. 그렇기에 이사를 한다는 것은 그 논과 밭을 버리거나 팔고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주거지와 삶의 터전은 그렇지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의 터전은 사는 집이 아니라 직장이나 사업장이란 사실이다. 먹고 사는 근간 또는 수입의 원천이 있는 곳이 바로 삶의 터전인 것인데 그게 오늘날ㅇㄴ 집과 함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거지 이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지만 예전 농촌사회, 즉 주거와 수입의 원천이 한곳에 일체화되어있던 시절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다.

 

 

거주지 이전은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하면 되는 일

 

 

따라서 중요한 것은 수입의 원천에 관한 이동이나 변화인 것이지 주거 이전은 그냥 합리적인 필요성에 근거해서 결정하면 되는 일인 것이다. 오히려 주거지는 직장 이동에 따라 옮길 수 있는 부수적인 일이 된 셈이다.

 

수입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직장의 이동이나 업종 변경, 전혀 새로운 사업을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중차대한 문제이다. 다니던 회사를 옮겼다가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며 업종을 변경했다가 쫄딱 망할 수도 있고 새로운 업종에 뛰어든다는 것 자체가 실은 엄청난 모험인 까닭이다.

 

그러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오늘날 사는 거주지 자체는 삶의 터전 즉 수입의 원천과는 큰 관계가 없기에 직업이나 업종의 변경보다는 그 중요성이 한 단계 떨어지는 일이라 여기면 된다.

 

이사에 관해 얘기했으니 이제 내 집 장만에 관해 얘기할 차례이다.

 

 

집의 두 가지 형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는 것은 엄청난 문제이고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문제이다.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선 더더욱 그렇다. 이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선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정책을 펼친다. 규제도 많고 지원책도 많다.

 

내 집 마련과 관련하여 운명학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장만하는 것 역시 운세 흐름에 있어 대충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내 집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대로 기초적인 財富(재부)를 쌓았을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엔 일반 개인을 상대로 하는 리테일 금융이 발달해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있어 그 시기는 대충 정해져 있다. (집 장만에 있어 대출 액수가 매수 가격의 1/3을 넘길 경우 그건 사실 자기 집이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말이다.)

 

집 또는 주거에는 자연순환운명학의 이치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陽宅(양택)이고 또 하나는 陰宅(음택)이다.

 

양택은 붐비는 곳에 있는 발전적인 가정의 집이다.

 

 

양택이란 문자 그대로 활기찬 집을 뜻한다. 현실에선 보면 부부가 경제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자녀를 낳고 또 키우기 위해 필요한 집을 말한다. 양택에서 중요한 점은 교통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부부의 출퇴근은 물론이고 자녀의 통학 거리 등을 감안해야 하며 영화관이나 기타 문화 활동 역시 감안해야 한다.

 

양택은 따라서 사람이 붐비는 곳일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소 소음도 많고 주변 환경 역시 고즈넉하지 않다. 그런 곳이 바로 양택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최근 우리나라의 고급 아파트들은 양택의 불편한 점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다. 교통이 좋은 곳에 있어도 단지 내에 들어서면 조경도 좋고 소음도 많지 않다, 바로 서울 강남의 고급 럭셔리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런 고급 양택에 사는 이는 많지가 않고 대부분의 젊고 활동적인 부부들은 시끄러운 동네에 살거나 아니면 서울 외곽의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불편한 통근 거리와 비용을 감내하면 살아간다.

 

결론적으로 양택에 사는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아직 발전 중에 있는 사람, 즉 운세가 상승 중이라 보면 된다.

 

 

음택은 운명적으로 일종의 무덤과도 같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또는 유학을 가면서 사실상 집을 떠나가게 되고 부부만 남게 된다. 바로 이 무렵이 부부의 재산이 가장 많은 때라 하겠다.

 

이에 시끄러운 양택을 떠나 전원주택이나 그와 비슷한 한적한 동네를 찾아 이사를 가기도 하는데 이게 바로 陰宅(음택)이다. 음택은 그 부부의 노후 생활을 위한 공간이자 실은 일종의 무덤과도 같다. 그렇기에 음택이라 한다.

 

(풍수학에서 음택이라 하면 묘를 쓰는 장지를 의미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오늘날 한 해가 멀다 하고 길이 뚫리고 열리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좋은 장지를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얘기해둔다.)

 

자녀가 떠나간 두 부부가 한적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마련하는 집이 음택이고 대개의 경우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있다. 서울의 경우 북한산 자락에 위치해서 풍경이 아름다운 고급 주택가가 그렇고 또 도심 안에 있다 해도 오래 전에 지어진 아파트인 경우가 많아서 평수는 넓은 편이지만 나무가 우거져서 그늘이 질 때가 많다.

 

예를 들자면 서울의 경우 최근에 재건축 추진으로 말이 많은 구반포 주공아파트라든가 압구정동의 현대 아파트가 일종의 음택 아파트 단지라 하겠다. 주로 나이든 부부들이 살고 있다.

 

 

음택을 장만할 때의 주의 사항

 

 

음택을 장만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음택을 마련할 적엔 어지간해선 대출을 받거나 빚을 내진 말라는 점이다. 그냥 본인의 경제적 상태에 맞추어 장만하면 되는 일이지 무리하게 빚을 내면 말하기 거북한 얘기이지만 훗날 음택 즉 일종의 운명적 무덤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다는 점이다.

 

무덤이라 하면 조용하고 편안해야 한다. 그런데 빚을 내면 나중에 60년 순환에서 바닥 근처가 되면 그간에 돈이 궁해져서 그 집을 내어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안식을 취할 무덤에서 쫓겨나서 방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경우를 나 호호당은 상담하다 보면 허다하게 본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본인에게 적합한 것인지는 물론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겠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양택이 있고 음택이 있다. 양택의 경우 전세로 사는 경우도 대단히 일반적이다. 하지만 음택인 경우 자기 소유가 많은데 최근엔 이 경우에도 대출을 받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이 된다.

 

 

기업에도 양택이 있고 음택이 있는 법이어서

 

 

재미난 점은 기업의 경우에도 음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음택을 장만한 기업의 경우 이제 팽창하고 발전하는 시기는 지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컨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경우 기업이 한창 커가던 1970년대 시절 본사는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는데 1983년에 다소 한적하고 후미진 계동사옥으로 옮겼다. 바로 그 건물이 정주영 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의 음택인 셈이다. 사실 그로서 현대그룹의 성장 또한 멈추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은 현대 그룹의 상징적 묘소인 이 음택을 2011년 4월에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되찾았고 이로서 자신이 정주영 회장의 적통임을 내외에 과시했다. 조상의 묘를 찾은 것이라 보면 되겠다.

 

그런데 정몽구 회장은 이어서 자신의 음택을 새롭게 짓고자 몇 년 전 서울 강남의 옛 한전부지를 매입했다. 글로벌 비즈니스센터(GBC)가 명분으로서 105층 규모의 랜드마크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은 비즈니스적인 것이라 하기보다는 자신과 그룹의 위세를 널리 선전하기 위함인 것이니 역으로 보면 현대자동차 그룹 이제 성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기업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자동차 그룹의 음택 부지인 셈이다.

 

이건희의 삼성그룹 역시 2008년에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서초 삼성타운을 지었는데 이 역시 이건희 회장이 이끄는 삼성그룹의 음택인 것이고 그 이후 2014년 이건희 회장은 쓰러졌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엄청난 기업이지만 이건희 회장의 시대는 마무리가 된 것이다.

 

이 정도 얘기로서 글을 마무리할 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음택을 구입하거나 지을 땐 무리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추석 연휴 무사히 잘 보내시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한 달 전 즈음에 어떤 독자께서 기존의 사주명리학과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말 다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좀 보탠 것인지가 궁금하다는 질문을 해왔다. 


2009년에 시작한 블로그를 통해 무려 1818회에 걸쳐 나 호호당의 이론에 대해 무수히 얘기해왔다. 독자께서 정말 궁금하시면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절로 아시게 될 것이란 답변을 드리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 또한 독자를 너무 고생시킬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렇다고 메일로 누누이 설명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 조만간 블로그 글을 통해 답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오늘 월요일 밤 그 약속을 지키고자 글을 시작한다. 


(나 호호당은 참으로 오랜 연구 끝에 2014년 5월 25일자로 자연순환운명학이라 것이 성립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www.hohodang.com 블로그에 올렸다. 벌써 5년도 더 된 얘기이다.)



기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핵심부터 얘기하겠다. 


기존의 사주명리학은 운명의 흐름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이론 체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자연순환운명학은 전혀 오차가 없는 정확도와 예측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사주명리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운의 흐름을 이른바 10년 단위로 찾아오는 이른바 大運(대운)이란 것으로서 설명하고자 하나 그게 말하는 이에 따라 너무나도 달라서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방법 자체가 근본적인 오류인 까닭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이 방면의 고전이자 고급 이론서인 적천수 징의나 적천수 천미를 나 호호당은 백번도 더 읽어보았으나 답이 없었다. 중국사람들은 문자의 나라답게 말은 화려해도 실속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한의학의 오랜 경전인 이른바 황제내경은 음양오행 그리고 六氣(육기)을 들어 신체의 건강과 질병을 설명하는 책으로서 그러다 보니 음양오행은 물론이고 그것에 바탕을 둔 사주명리학에 대해서도 주요한 논거가 되고 있지만, 면밀히 들여다 볼 것 같으면 이론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중요한 고전이긴 하지만 터무니없는 부분이나 이론적으로 지지리멸렬한 느낌을 주는 대목도 허다하다. 그 바람에 기존의 음양오행에 대한 이론은 물론이고 그에 바탕을 두는 명리학 역시 그렇다. 


20대 후반 마침내 끝장을 보자는 마음에서 마침내 중국 청나라 시절의 방대한 도서집성인 四庫全書(사고전서)의 술학편에 들어가 있는 수백 권의 운명학 관련 책들을 原典(원전)으로 통으로 읽게 되었다. (한문 실력은 중고등 학교 시절 어쩌다가 중국 무술 도장에 다니다가 사부님으로터 강제로 배웠던 까닭이다.)


그 결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사후적 해석은 그런대로 가능해도 향후에 대한 예측력은 많이 떨어진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기존의 운명학이나 사주명리학이라 하겠다. 


그 바람에 사주명리학이나 기타 운명학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너무 어렵고 심오해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그렇다는 점이다. 


그런 탓에 사주명리를 오래 공부하고 또 상담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소 솔직하게 ‘명리학엔 정답이 없다’는 말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런 점 때문에 반신반의를 거듭해오던 나 호호당은 1982년 말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규명되지 않은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원점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32년이 흐른 2014년 5월로서 운명의 이치와 흐름을 조금치의 오차도 없이 설명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현대적 운명학인 자연순환운명학이 성립되었음을 알리는 글을 이 블로그에 올렸다. 



자연순환운명학은 전혀 오차가 없는 법칙의 체계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이론은 1%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간 구글이나 위키피디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에 대해 근 10만명에 이르는 검증을 통해 도출해낸 법칙인 까닭이다. 정답이 없는 애매한 것이 아니라 정답이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솔직히 말해서 자연순환운명학이 성립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구글이나 위키와 같은 방대한 자료의 검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위키가 없었다면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 역시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보시대의 은혜 덕분이다. 


동양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인 한문 독해력, 위키나 구글의 영문 자료를 읽어낼 수 있는 영어 실력, 여기에 인터넷이란 정보 시대의 개막, 여기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끝내 참지 못하는 호기심을 가진 나 호호당의 성격이 합쳐져 자연순환운명학을 만들어낸 셈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은 두루뭉술하지 않다. 나 호호당의 경우 생년월일시만 알면 길어야 1분 안에 그 사람이 밟게 될 평생에 걸친 운세 흐름을 斷言(단언)해줄 수 있다. 


법칙인 까닭이고 동서양을 비롯하여 그간 어느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로서 근 수 천 년에 걸쳐 왈가왈부해오던 운명이란 것의 비밀이 비로소 해명되었다. 


따라서 자연순환운명학은 기존의 사주명리학의 맹점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긴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정확성도와 예측력을 구비하고 있는 체계적인 이론 체계이다. 그랬기에 새로운 명칭 즉 “자연순환운명학”이란 이름까지 붙였다. 



왜 과학이 앞선 서구인들은 알아내지 못했던 것일까?



가끔 이런 의문이 들곤 한다. 왜 서구 문명에선 자연순환운명학과 같이 정확한 이론이 만들어지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그렇게도 과학적이고 검증에 철저한 서구 사람들이 운명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한 것에는 그들의 문화와 관념 속에 숫자의 기본 속성에 대한 이해가 한 가지 빠져있기 때문이라 본다. 


가장 큰 이유는 서양사람들은 十進法(십진법)만 알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그것이다. 숫자를 헤아릴 때 10, 100, 1000, 이런 식의 방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의 진행에 있어 10 도 있지만 12 도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이는 12진법인 것이고 예로부터 한 다즈(dozen)라고 해서 사물을 12개로 묶는 방법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2진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나아가서 10과 12의 최소공약수는 60인 되는데 이것을 두고 60갑자라 하는 것이니 이는 60진법이다. 서양인들은 12진법과 60진법을 망각했기에 운명의 비밀, 나아가서 시간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본다. 


예컨대 경제의 장기파동을 연구해낸 콘트라티에프가 장기에 걸친 경기파동의 주기를 50-60년에 걸친다는 막연하게 주장한 이유 역시 60이란 단위가 하나의 주기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면 보다 정확하게 이론을 세웠을 것이라 본다. 


아주 간단한 것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간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세월이 지나면 나 호호당이 연구해낸 자연순환의 이치와 법칙은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 여긴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사물과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색다르고 강력한 접근수단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곧 다른 학문이나 과학 분야에 접목되어 더 풍부한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축구 영재가 있었으니



1946년 5월 22일에 태어난 아이가 있었으니 丙戌(병술)년 癸巳(계사)월 丙申(병신)일이 된다. 


생시를 몰라서 그렇긴 하지만 변화가 많은 유동적인 상황에서 공간과 위치에 대한 지각력이 뛰어난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자동차 운전을 대단히 잘 하고 특히 비행기 조종사로도 탁월하다. 


하지만 소년의 능력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서 발군의 재능으로 이어졌다. 축구 또한 끊임없이 상황이 변하는 게임이고 동시에 상대방과 우리 편의 공간 점유와 위치에 대해 특별한 감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5세의 나이에 영국 프로 축구의 최고 명문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발탁되어 훈련을 받은 결과 17세의 나이로 1군 시합에 데뷔했다. 포지션은 윙어(winger), 빠른 스피드와 환상적인 드리블 실력으로 1960년 후반 축구계를 주름잡은 최고의 공격수가 되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조지 베스트(George Best), 맨유의 전설이자 모든 영국 축구팬들의 영원한 스타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베스트가 활동하는 동안 맨유는 리그 우승 2회를 했고 1967-68 시즌에는 무려 28골이나 넣어 득점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호날두가 2007-08 시즌에 갱신하기까지 잉글랜드 1부 리그 한 시즌 윙어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더해서 1967-68 시즌에는 맨유 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컵 우승을 할 때의 주역이었다. 맨유는 붉은 악마(Red Devils)란 별명의 원조인데 바로 조지 베스트가 활약하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수려한 외모에 긴 머리를 날리면서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그의 모습, 거침이 없고 언행도 자유분방했기에 팬들은 더욱 환호했고 열광했다. 그야말로 스타 중에 스타였다. 이에 한 때는 당시 인기 절정의 록 그룹 비틀즈와 함께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로 불리기도 했다. (위키에 가서 한 번 ‘조지 베스트’를 쳐보라, 정말 잘 생겼다.)



너무 빨리 찾아온 몰락의 원인



그러나 조지 베스트의 시절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관리가 되질 않았고 문란한 사생활과 알콜 중독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의 운세를 살펴보면 1966 丙午(병오)년이 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다. 그렇기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로부터 20년 정도는 좋은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관리가 되지 않다 보니 선수로서의 수명은 생각보다 빨리 마감되었다. 그가 1군 데뷔했을 때가 1963년 17세의 나이였는데 그로부터 겨우 11년 후인 1974년, 나이 28세에 벌써 염증을 느낀 나머지 남아공의 작은 축구팀으로 이적했고 이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974년은 그의 운세 흐름에 있어 秋分(추분)의 때였다. 입춘 바닥으로부터 37.5년이 경과한 때를 말한다. 


대개의 경우 운세 흐름에 있어 추분의 때는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운세이고 그로서 절정의 세월이 10년간 이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조지 베스트는 그때를 기점으로 꺾어져가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아쉽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운명



이런 경우를 두고 나 호호당은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주저앉는 이무기 팔자라고 말한다. 


이무기를 螭龍(이룡) 또는 蛟龍(교룡)이라 하기도 한다. 이무기는 전설에 의하면 차가운 물속에서 천년을 지내면 용으로 변하게 되고 그로서 여의주를 물고 폭풍우를 불러 하늘로 날아오른다 한다. 


如意珠(여의주), 맘만 먹으면 뜻대로 이루어지게끔 하는 구슬이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쳐 이제 자신의 뜻한 바를 펼칠 수 있게 된다는 염원이 담긴 전설의 보배 구슬이다. 


조지 베스트에게 있어 1974년은 이제야말로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운이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 이무기 팔자인 것이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조지 베스트를 치면 동영상이 나온다. 오늘날의 메시에 버금간다. 게다가 스피드 또한 엄청나게 빠르다. 상대 수비수가 붙기 직전 잽싸게 공을 빼돌리면서 상대편 골문을 향해 돌진한다, 거의 곡예 수준의 드리블 기술을 보여준다. 


이런 대단한 재능과 기술을 가졌던 조지 베스트였으나 아깝게도 겨우 28세의 나이, 이제부터가 절정의 세월을 보내면서 더 많은 기록과 전설을 남겼을 사람이 스스로 축구를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 뒤로도 선수 생활을 했으나 대부분 변두리 팀을 전전했고 게다가 심한 알콜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2005년 11월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나이 40대 중반인 1990년 무렵엔 알콜 중독이 심해져서 정상 생활이 불가능해졌고, 50대 중반인 2000년 초반엔 간 기능이 이미 다 망가져있었던 조지 베스트였다. 


畵龍點睛(화룡점정)이란 말이 있다. 공을 들여 멋지게 용 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 최종적으로 용의 눈동자를 점으로 찍는 것을 말한다. 눈동자만 제대로 찍어 넣으면 멋진 용 그림이 완성될 판국인데 조지 베스트는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기 직전에 붓을 떨어뜨린 셈이다.

그래서 이무기로 그쳤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왔고 순식간에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탓인지 자기 관리가 되질 않았다. 갑자기 거액을 만지게 되자 틈만 나면 술을 찾았고 환락에 빠져들었다. 


축구 기술은 타고난 천재로서 탁월했으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선 아직 미숙했던 것이고 거기에 부와 명예가 따르자 그만 우쭐하고 방종했던 탓에 조지 베스트는 인생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승천할 운에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로 남고 말았다. 그러니 비극이다. 



재능과 품성은 함께 가야만



이무기의 팔자는 자신의 타고난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자라 하겠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 호운을 맞이한 자의 경우 이런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방면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천재들일 수록 이런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능의 발전과 계발은 인간적인 성숙과 함께 이루어져야만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최근 우리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는 강정호 선수가 그렇다. 


국내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미국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고 또 그곳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는 바람에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던 강정호 선수이다. 


이 친구 역시 이무기가 될 공산이 크다. 강정호 선수의 생년월일을 보면 위키에 양력과 음력이 모두 기재되어 있어 충분히 운명을 판단할 수 있다. 1987년 5월 2일이니 丁卯(정묘)년 甲辰(갑진)월 辛亥(신해)일이다. 경력으로 볼 때 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가 2011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입추로부터 7년 반이 흐른 시점인 올 해가 바로 秋分(추분)의 운이다. 올 해부터야말로 욱일승천해야 하건만 아쉽게도 소속팀인 파이어리츠에서 해고되면서 불러줄 팀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지경에 처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올 해, 즉 추분의 운에 말이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본인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장담할 순 없지만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한창 야구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사생활 문제로 인해 쉬게 되고 그 결과 타격감을 잃으면서 재기에 실패하고 있다.

강정호 선수가 미국에 진출했을 때 나 호호당은 꽤나 기대를 했었다. 운세로 볼 때 충분히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젊은 혈기에서 오는 미성숙으로 인해 저렇게 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운 유망주들을 지켜보면서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정구범이란 고졸 신인투수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아, 그래! 잘 할까 싶어서 생년월일을 검색해보았다. 나무위키에 2000년 6월 16일이라 나와 있었다. 


庚辰(경진)년 壬午(임오)월 乙巳(을사)일이었다. 그렇다면 2015 乙未(을미)년이 입추가 된다. 이제 막 물이 오르고 있는 셈이고 내년 2000년이면 프로야구에서도 인정을 충분히 받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정구범을 데려간 NC 다이노스가 대어를 낚은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LG 가 투수 자원으로 뽑은 이민호 역시 2001년 8월 30일생이니 辛巳(신사)년 丙申(병신)월 乙丑(을축)일로서 2015년 乙未(을미)년이 입추가 된다. 정구범과 운세 흐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정구범의 경우 차분한 편이어서 꾸준할 것 같고 이민호는 다소 기복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둘 다 내년 시즌부터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 만한 하다고 본다. 과연 어느 누가 더 잘할 것인가? 하는 흥미가 생긴다. 당연히 능력의 차이가 나타나겠지만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관리 능력이 아닐까 싶다. 


제발 능력 향상만이 아니라 좋은 성품을 길러서 우리 프로야구를 빛내는 스타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무기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최근 시국도 어지럽고 반길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나라의 운기가 날로 떨어져가고 있으니 으레 그렇거니 한다. 그나마 우리의 호프 류현진 야구 보는 재미에 지냈는데 최근 극도의 부진에 빠져서 정말 아무런 흥취가 없다.



시골 청년이 무작정 상경하게 된 사연



시골 산중에 살던 아이가 있었다. 남들처럼 큰 도시에 나가서 화려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계단식 논 몇 마지기와 밭이 조금 있을 뿐이니 우린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면서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때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짓던 아이는 어느새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었는데 어느 날 신문 하단에서 서울에 있는 에어컨 가게에서 보조기사를 모집하는데 숙식도 제공한다는 내용의 작은 광고가 눈에 띄었다. 


청년은 혹시나 싶어서 연락을 했더니 그쪽에서 봉급은 적지만 해보고 싶으면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그 청년은 부모님과 상의도 하지 않고 공책을 찢어 떠난다는 사연을 적은 뒤 몰래 가방 하나 메고 서울로 상경했다. 때는 1993년 말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참으로 고생이 많았지만 꾹 참고 일했다. 적은 봉급에 근무 시간도 따로 없었다. 밤 시간이라도 전화만 오면 즉각 출장을 나가서 가정용 에어컨을 수리해야만 했다. 알고 보니 숙식제공 역시 야밤에 가게에서 전화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일하다 보니 이른바 그 바닥, 즉 에어컨 설치와 수리로 먹고 사는 세계에 대해 견문이 넓어져갔고 성실히 일한 탓에 3년을 일한 뒤 좀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곳으로 옮겼고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해갔다. 물론 그 사이에 군대도 갔다 왔다.



그 초라한 서울행이 바로 귀인의 운이었으니



그 청년은 서울로 상경한 1993년으로부터 근 26년이 흐른 2019년 현재 어느덧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로서 국내 유수의 시스템 에어컨 회사에서 전무로 재직 중에 있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바로 그 1993년에 서울로 상경한 일입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귀인의 운이었으니 말이오.”

“아니, 그 양반이 제게 귀인이었다고요, 그냥 박봉에 빡 세게 일만 했을 뿐인데요?”


“그 가게 사장님이 당신을 특별 대우해준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그 인연으로 해서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고 그 이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오늘날 업계에선 말만 하면 알아주는 기업의 전무로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 인연이 귀인이고 시골 청년을 받아준 그 사장님이 바로 귀인이지요.”


내 말에 그 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요, 당장 큰 것은 아니었어도 그게 오늘의 내 위치로까지 오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맞지요.”


상담 온 분의 운세로 볼 때 1993년은 바로 입춘 바닥으로부터 18년이 조금 지날 무렵이었기에 앞글에서 말했듯이 처음 맞이하는 귀인의 운이었던 것이다. 



송해 선생님에게 찾아든 귀인의 운



이에 또 다른 예로서 널리 알려진 분의 얘기를 하나 소개해본다. 전국노래자랑으로 현재 최고령 현역 연예인이신 송해 선생님의 얘기이다. 


송해 선생님은 1927년 5월 27일에 태어나셨기에 丁卯(정묘)년 乙巳(을사)월 辛酉(신유)일 된다. 입춘 바닥은 1971년이었다. (생시까지 알아야만 운세의 기산점인 立春(입춘)을 알 수 있지만 그간의 경력이 있으니 그냥 알 수 있다.)


운세가 기울 무렵 코미디언 생활을 시작하셨기에 큰 인기를 얻진 못하고 보조 역할에 그쳤다. 그러다가 입춘 바닥으로부터 15년, 즉 立夏(입하) 무렵에 아드님을 잃는 큰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사실 입하야말로 여러 모로 가장 어려운 때인 까닭이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중 전국노래자랑을 맡아 보겠느냐는 제의를 받았고 이에 큰 기대 없이 생계를 위해 응하게 되었으니 1988년 5월부터였다. 1971년이 운세 바닥으로부터 18년만의 일이다. 이게 바로 첫 번째 귀인의 운이었던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이야말로 오늘날의 송해 선생님을 만들어준 발판이 아닌가! 



첫 번째 귀인의 운은 슬며시 찾아드는 법이니



첫 번째 귀인의 운에 이어 두 번째 귀인의 운이 찾아오면 그건 누구나 이건 정말 행운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하게 되지만 사실 첫 번째 찾아오는 운은 그런 실감이 들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실은 그게 더 중요한 발판이 된다. 


상담을 하다 보면 첫 번째 귀인의 운에 직장에 입사한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런 경우 그 인연이 발판이 되어 그 이후 세월이 지나면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그 직장에서 성공하거나 아니면 옮겼더라도 그 때의 인연이 발판이 되어 잘 발전해간다. 


또 어떤 아주머니는 첫 번째 귀인의 운에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경우도 많이 본다. 두 사람 모두 가진 것은 없었으나 그 이후 합심해서 집안이 번창하는 경우가 바로 이 케이스이다. 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은 아저씨와 결혼한 것이란 얘기를 드렸더니 씩 웃으면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하고 긍정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웃은 적이 있다. 


이처럼 첫 번째 귀인의 운은 이처럼 슬며시 찾아든다. 그렇기에 그게 행운이란 것을 미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는 얘기이다. 



飮水思源(음수사원)이란 사자성어



飮水思源(음수사원)이란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대로 잘 성장해서 사회적 성취도 이루었다고 할 때, 그 뿌리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부모님이 잘 길러 주셨고 만나는 사람들이 도와주고 때론 야단도 치면서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니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면 당장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처신도 크게 잘못이 없게 된다는 의미를 담은 사자성어이다. 


나 호호당이 보기에도 첫 번째 귀인의 운을 만나서 그 이후 무난하게 잘 성장해왔다면 반드시 그 근원인 첫 번째 귀인의 운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고 본다. 이 세상은 어떤 면에서 내 능력으로 살아가는 곳이지만 동시에 사람은 사람과의 인연 속에서 발전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의 앞부분에서 사례로서 소개했던 그 분에 대해서도 예전에 서울로 오도록 인연을 만들어준 그 에어컨 가게 사장님을 한 번 찾아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사람 하기에 달린 일



귀인의 운은 그냥 찾아드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을 때만이 찾아든다. 저 친구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좀 도와주고 싶은데 하는 마음, 저 사람 경력은 부족해도 일하는 자세를 보니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 이처럼 주변의 눈이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미래에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인연을 맺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결과가 좋을 것이고 악연을 만나면 좋지 못한 결과를 보게 되겠지만 그 또한 생각해보면 결국 내 생각과 태도에 달린 문제라는 점이다. 악연을 만났다고 그 사람을 원망하기보다 왜 그런 사람을 내가 선택했을까 하는 점부터 생각해볼 일이란 얘기이다.

 

그렇기에 모든 일은 결국 본인의 태도에 달린 문제가 된다. 



처음의 마음가짐을 잃다 보면



하지만 사람은 긴 시간을 두고 볼 때 늘 한결같지 않다. 고생할 적엔 성의가 넘치던 사람이 다소 상황이 풀리고 먹고 살만 해지면 방심한 나머지 처음의 마음가짐 즉 初心(초심)을 잃게 되는 것이 또 사람인 것이니 그게 바로 운이 하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60년 순환에 있어 세 번에 걸쳐 귀인의 운이 찾아든다고 말했는데 세상 이치는 공평해서 반대로 세 번에 걸쳐 귀인을 내 스스로 떨쳐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 운의 바닥에 이르러 고생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경우 스스로 근신하고 자중하거나 그간의 일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를 두고 물러날 때를 안다고 말한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결국 세상사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즉 進退(진퇴)의 시기를 알면 운이 바닥에 들어서도 큰 무리가 없고 그저 조용하게 세월을 보내며 또 다시 찾아온 순환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 실례로서 미국의 세계적 갑부이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오너인 빌 게이츠는 1975년에 사업을 시작해서 2005년에 은퇴를 단행했다. 30년만의 일이니 이는 60년 순환의 절반이다. 


빌 게이츠가 사업에 나선 1975년은 나서기만 결국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夏至(하지)의 운이었고 그가 물러난 2005년은 이제 물러나면 그 뒤로 아무런 탈이 없는 冬至(동지)의 운이었다. 그러니 가히 道士(도사)라 불러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하겠다. 


그러니 목이 말라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떻게 해서 내 입속으로까지 들어올 수 있었느냐를 생각해보는 마음 자세, 이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잃지 말아야 하는 생각이라 하겠다. 


(자연순환운명학 기초이론 강좌 공고를 블로그에 올렸다. 그 코너에 강좌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짧은 동영상도 붙여놓았다는 점 알려드린다. )






나는 언제쯤이면 귀인을 만날까? 하는 궁금증

 

 

살아가면서 보노라면 우리 주변의 어떤 이는 뜻하지 않게 사람을 잘 만나서 일이 척척 풀리거나 생각 밖의 행운을 만나서 눈부시게 발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일을 두고 항간에선 흔히 貴人(귀인)을 만났다고 말한다. 예부터 써오는 말이니, 원 의미대로 풀이해보면 지체가 높은 사람으로부터 은전을 입어 신세가 풀렸다는 말이 되는데, 현실에선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꼭 사람이 아닐지라도 예기치 않은 좋은 기회를 잡아서 일이 잘 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가령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한 사람이 ‘아이고, 나는 언제쯤에나 귀인을 만날꼬!’ 하는 푸념을 할 때도 자주 사용된다.

 

이에 오늘은 이른바 귀인의 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 혼자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란 점부터 알 필요가 있다. 바깥에 나가 내 돈을 주고 밥을 사먹는다 해도 밥 파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 사람은 혼자만의 사람이 아니란 얘기이다.

 

이는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기업을 포함해서 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독립 자존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오늘날 최강국인 미국마저도 다른 여타 나라들을 무시하고 외면한 상태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든 나라는 으레 국가 행정부서 중에 외교(Foreign Affairs)를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 운영한다. 어쨌거나 함께 살아가는 세상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일상생활에서 주변 사람이나 타인들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끊임없이 주고 또 받으며 살아간다. 이런 뻔한 말을 여기에서 하는 까닭은 귀인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특별한 귀인의 운 또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니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는 귀인은 다소 특별한 사람이나 또는 예기치 않았던 좋은 기회에 관한 것이다.

 

나 호호당은 2014년에 이르러 자연순환의 이치를 과학적으로 검증해낸 이래 줄곧 지속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귀인의 운이 구체적으로 언제 사람에게 찾아오는 지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내용을 얘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귀인을 만나는 운은 작게는 5년 즉 60개월마다 한 번씩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일생을 통해 가장 크고 특별한 귀인의 운은 60년 순환을 통해서 세 번에 걸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는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귀인의 운은 언제 작용하는가 하는 시점의 문제가 남는다. 이 점에 대해 얘기해보면 60년 순환의 경우 입춘 바닥 시점으로부터 최초 귀인의 운세는 17-18년 정도 경과할 무렵에 찾아들고 그 다음으로 27-28년, 마지막으로 37-38년이 경과할 무렵에 찾아온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적은 귀인의 운세는 매 5년 60개월 사이클마다 27-28개월이 경과할 무렵에 찾아온다. 이는 앞의 운에 비해서 비교적 작은 귀인의 운이라 하겠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이제 구체적인 사례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을 예로서 설명해보자.

 

 

첫 번째 귀인의 운

 

우리나라의 경우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 시점은 1964년이었다. 그런 이후 1981년 9월 서울 하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었다. 솔직히 당시로선 개최를 신청하긴 했으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다지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덜커덕 하고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서울 올림픽은 단순한 체육 행사가 아니었다. 우리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비극적인 희생을 겪는 등 당시 사회 분위기는 대단히 암울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개최지로 선정된 다음에도 과연 우리가 올림픽이란 거창한 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신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망외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 1981년 9월의 서울 올림픽 개최지 선정이었다.

 

(훗날 우연한 계기에 알게 된 사실로서 우리 서울이 선정된 배경에는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빈곤하고 초라한 개발도상국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고 마침 그 무렵 우리 정치는 1987년 민주화와 함께 경제 또한 비약적인 약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81년 가을의 서울 올림픽 개최 확정은 그런 면에서 오랜 시련을 겪던 우리 대한민국으로선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최초의 귀인 운이었다.

 

 

두 번째의 귀인 운

 

 

두 번째의 귀인 운은 1992년에 찾아들었다. 1964년 국운의 입춘 바닥으로부터 28년이 흐를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이후 일종의 조정기로 접어든 상태였다.

 

그러자 지나치게 올랐던 증시가 조정을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여 주었는데 그 무렵 증시를 부양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슈는 증시개방, 즉 외국인 투자 허용이었다.

 

1986-1988년까지 3년 동안 우리 경제의 엄청난 성장과 함께 우리 기업들의 질적 양적 성장 또한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소식을 접한 외국 펀드들의 투자 허용 요청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참이기도 하다.

 

이에 당시 정부는 1992년 8월 증시가 극도로 부진에 빠질 무렵 마침내 증시 개방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이에 허우적대던 우리 증시는 순식간에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1992년 8월의 증시개방 건이 그것이다.

 

증시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좋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 자체만으론 투자자들만 환호성을 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증시개방은 그야말로 우리 경제의 성장 발전에 있어 두고두고 힘이 되는 메가톤 급 호재였던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 들어오자 우리 기업 운영의 모든 면에 있어서 투명성을 요구받기 시작했고 동시에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국제시장 기준에 맞는 경영 표준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1992년의 증시 개방은 우리 경제의 개방과 글로벌화, 즉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개방경제의 틀로 우리가 변화해감에 있어 엄청난 역할을 했기에 두 번째 귀인의 운이었다는 말을 한다. 증시 개방을 통해 성장에 필요한 자본 조달이 그 이전에 비해 훨씬 용이해졌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귀인의 운

 

 

이제 우리 경제에 있어 마지막의 귀인 운에 대해 얘기해보자. 그것은 운세 상으론 2002년의 일이었으나 현실적으로 2003년 3월에 발생했다. 이 역시 1964년 바닥으로부터 28년만의 일이라 하겠다.

 

1997년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고 이에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우리 경제에 대한 많은 정보가 개방되었다. 그러자 외국 투자 펀드들은 우리 기업들의 미래 투자가치가 높다는 점을 발견 또 인식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부 또한 외국인 투자에 대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선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2002년 노무현 정부가 등장하자 반미 성향에 대한 우려로 인해 잠시 머뭇거렸던 외국인 투자자들의 걱정이 해소된 것은 2003년 3월 17일 새벽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미국 부시 대통령과의 통화를 통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렸고 이에 그 소식을 전해들은 외국인 투자의 엄청난 물길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로서 우리 경제는 사실상 양적 질적 수준 모두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니 또 한 번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마지막 귀인의 운이었다.

 

현재 우리 경제는 실물 부문이나 금융부문 공히 전적으로 개방된 글로벌 경제체제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 대한민국은 글로벌 전체적으로도 손에 꼽는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내용만 충실하다면 더 이상 자본 조달 때문에 투자가 어려운 일은 사라졌다.

 

이처럼 우리 대한민국 역시 삼 세 번에 걸쳐 귀인의 운을 맞이했고 또 그를 활용하여 성공가도를 달려왔다.

 

 

다음 글에선 개인의 경우에 대해 얘기할 참이니

 

 

오늘은 개인의 경우에 대해선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 않았다. 실제 상담 사례를 통해 그간 무수히 확인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일이라 섣불리 노출하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실감이 떨어질 것이기에 다음 글에서는 널리 알려진 공인의 경우와 개인의 경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 없게끔 조심스럽게 각색을 해서 얘기해볼 까 한다.

 

(자연순환운명학 기초강좌 공고를 올렸다. 다음 달인 9월21일부터 시작하는 강에 평소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많은 분들의 호응을 바란다.)

떠날 채비를 하는 여름



그저께 밤엔 공기가 꽤나 서늘했고 간밤엔 약간 더웠다. 여름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채비할 시간 정도는 주어야겠지. 여름이 떠난다 싶으니 잠들기 직전 문득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떠올랐다, 그가 노래한 여름에 관한 시들과 글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올 여름 내가 한 일이 뭐였지 싶어서 생각해보니 밤하늘을 밝히던 목성을 여러 차례 바라본 것이 전부였구나 싶었다. 


23일 금요일이면 더위가 멈춘다는 處暑(처서)가 되니 가을의 첫날이 시작될 것이다. 아울러 벼꽃이 필 것이고 쌀알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삶과 운명



작업실에 나와서 헤르만 헤세의 생년월일시를 확인해봤다. 1877년 7월 2일 저녁 6시 반에 태어났다. 丁丑(정축)년 丙午(병오)월 丙子(병자)일 丁酉(정유)시.

 

사주를 보고 나니 헤세가 유독 여름을 예찬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헤세 자신이 바로 여름날의 태양이었던 것이다. 그가 여름을 예찬한 것은 자신의 내면과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헤르만 헤세의 본질은 7월 2일 여름날 저녁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이었던 것이다. 유럽의 여름은 우리처럼 炎天(염천)은 아니다, 그냥 따뜻한 날들이 여름이기에 바로 헤르만 헤세 자신인 것이다. 


운세 순환을 살펴보니 丙子(병자)년이 입춘 바닥이 되고 丙午(병오)년이 운기의 절정인 입추가 된다. 


그래서 확인 차 헤르만 헤세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역시! 운기의 절정인 1906 丙午(병오)년에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Unterm Rad)를 발표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가 생각난다. 


소설 속의 수레바퀴란 다름 아닌 “운명의 수레바퀴”인 것이니 60년을 하나의 기간으로 돌고 있는 순환의 수레바퀴이다. 그 바퀴의 아랫부분은 바로 운세의 밑바닥인 입춘을 전후한 기간이 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데미안”은 1919년에 발표되었으니 그의 운세로 보면 10월 하순의 霜降(상강)운이 되니 작가로서의 秋收(추수)를 보던 때였다. 


헤르만 헤세는 ‘불의 날’에 태어났기에 그림 그리기가 취미였다. 아울러 불교 철학에 심취했다. 그리고 삶의 과정을 보면 그 역시 운명의 정해진 公式(공식)대로 살다간 것이다. 


그의 운세가 서서히 기울어가던 무렵 독일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시작했고 이에 그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나치즘의 광기가 절정을 치닫던 1936년은 丙子(병자)년, 그의 운세는 입춘 바닥이었다. 스위스로 망명한 이후 독일 내에서 헤세는 매국노로 치부되었다. 


헤세와 토마스 만이 떠나가면서 위대했던 독일 낭만주의와 성장소설의 전통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독일에선 귄터 그라스라든가 하인리히 뵐, 헤르타 뮐러와 같은 훌륭한 작가들이 나왔지만 그건 모두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의 압제 그리고 사회가 개인에게 가해오는 부당한 폭력에 대한 사회 고발 소설이란 점에서 결이 전혀 다르다.) 



사주를 보면 사람의 내적 본질이 눈에 들어온다.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알면 그 사람의 내면에 간직된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두고 나 호호당은 그 사람의 象(상)을 본다고 말한다. 물론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경험과 오랜 사색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가령 빛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차가운 봄날 먹구름 잔뜩 찌푸린 봄날 점심 무렵에 태어난 태양이다. 잿빛 구름 사이로 간간이 가렸다가 비치는 멜랑콜리한 해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햇빛 화창한 남프랑스로 옮겨가자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림에 전념했던 것이다. 먹장구름에 가린 멜랑콜리의 봄날 햇빛은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자신이었다. 癸丑(계축)년 乙卯(을묘)월 丙申(병신)일 癸巳(계사)시가 고흐의 사주인데 이 코드들이 내 눈엔 그렇게 읽혀진다. 


낮에 시작한 글을 늦은 밤 시간 다시 이어간다. 오늘 밤 역시 열기가 제법이다. 



호호당 역시 타고난 운명의 화가인 탓에



나 호호당 역시 타고난 운명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사는 것은 아니기에 직업 화가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냥 화가이다. 열심히 또 진지하게 그리고 있고 그리는 것을 무척이나 즐긴다. 하루라도 그림을 하지 않으면 허무한 생각이 드니 매일 그린다.

불의 날에 태어났지만 물을 좋아하기에 그림 중에서도 물을 쓰는 수채화를 즐긴다. 


유화를 해보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예전엔 경제 사정으로 유화는 물감이나 도구 등등 비용이 많이 들어서 손을 대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사정은 아크릴이나 유화를 하려면 맘껏 칠할 수 있는 화실이 필요한데 그럴 형편이 되진 않았기에 비교적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드로잉이나 수채화를 그린다. 


사실 내겐 그림에 있어 많은 스승들이 있다. 마음에 드는 모든 그림들이 바로 내 스승이다. 그림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면서 기법이나 표현을 따라해 본다. 그리고 그림에 관한 책도 제법 읽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은 평생 딱 한 시간, 고등학교 미술선생님께서 수업 후에 나를 불러서 자신의 그림을 놓고 얘기해주신 것이 전부이다. 


잠깐이지만 미대로 진학해볼 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금방 포기했다. 1950년대 생이라 예전엔 미대 간다고 하면 고등 룸펜, 다른 말로 백수 실업자 되기 딱 좋다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께선 야, 평생 먹고 살 거 집에 있냐? 하면서 놀리셨고 선친께서도 그냥 취미로 하려므나!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평생 내 속에서 꿈틀거렸고 이에 나이 50을 넘기면서 그냥 그리기로 마음 먹었다. 시력이 살아있고 손을 움직일 수 있는 한 그리면서 즐기기로 했다. 나 호호당 역시 화가인 것이다. 운명의 화가. 



로트렉, 불운의 삶을 그림으로 채웠던 화가



로트렉이란 프랑스 화가의 그림을 매우 좋아한다.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 잠깐 알려드릴까 한다. 


풀 네임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이다. 


1864년 11월 24일 오전 6시에 태어났다. 이에 사주는 甲子(갑자)년 乙亥(을해)월 癸巳(계사)일 乙卯(을묘)시가 된다. 운명의 입춘과 입추를 산출해보면 癸亥(계해)년이 입춘 바닥이고 癸巳(계사)년이 입추가 된다. 


그가 태어나기 직전의 해가 癸亥(계해)년이었으니 로트렉은 사실상 운명의 바닥 근처에 태어난 셈이다. 13살 때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고 다음 해 외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았다. 현대 의학에선 유전적 질환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집안은 부유했지만 운세 바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악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평생 난쟁이 불구로 살아야 했던 로트렉이다. 흔히 물랭루즈의 화가로 알려진 이 사람의 본질을 말해본다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24일에 내리는 겨울비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 속엔 따뜻한 양지를 향하는 강렬한 希求(희구)를 품고 있다. 


이런 타입은 어쩔 수 없이 알콜 중독과 섹스 중독자가 되기 쉬운데 로트렉은 파리의 물랭루즈를 드나들면서 술을 즐기고 무희들과 사랑을 했으며 또 그림을 그렸다. 그로 인해 매독에 감염되었고 이에 결국 35년이란 짧은 삶으로 끝내고 말았다. 


로트렉은 귀족 출신이었지만 불구였기에 신분이 비천한 무희들에 대해 동질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양지를 향하는 그의 내적 정열은 그림을 통해 표출되었다. 나는 그의 작품 하나를 파리의 오르세이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다. 두 연인이 침대에서 깊은 잠에 든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작품의 제목이 “침대 안에서”였다. Le Lit. 


두 연인이 포근한 이불을 덮어쓰고 마주해있는 모습, 눈은 반쯤 뜬 상태. 아마도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의 모습인 것 같았다. 눈이 풀려있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선들이 엇갈리는 가운데 붉은 색을 주된 톤으로 하는 그 그림은 평생 기억에 남아있다. 


상상화일까 아니면 실제 사람들 앞에서 포즈를 잡아달라고 해서 그린 것일까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두 연인의 피곤한 듯 지친 듯 마주 보는 그 모습은 보기에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린 때가 1892년경이라 되어 있다. 로트렉의 나이 26세 무렵이고 운세 순환으로 보면 입추가 1893 癸巳(계사)년이니 그림에 대한 열정이 한창일 때의 걸작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도 오래 살기를 구차하게 여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절망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의 희구는 어둠 속에서 잠시 명멸하는 빛무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 서면 그저 침묵하게 되니



예술이란 분야에서 평론가는 좋든 싫든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대가의 그림이든 유명 화가의 그림이든 아니면 서툰 작가의 그림이든 상관없다. 그림 앞에 서면 사실 말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눈을 바삐 움직이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또 물러서서 전체를 음미해보다가 이윽고 물끄러미 바라보게 될 뿐이다, 좋은 그림이다 싶으면 더 오래 앞에 서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의 잔상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변형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세월이 지나 다시 예전에 본 그림 앞에 서면 때론 깜짝 놀랄 때도 있다. 그간 내 머릿속에 있던 그림과 눈앞의 실물은 엄청난 괴리를 나타내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 생각해본다, 그간 나는 그 그림을 내 가슴 속으로 끌어들인 다음 거기에 다시 내 식으로 다시 긋고 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그림인 것이다. 


밤이 깊어간다. 시각을 보니 새벽 1시 35분을 알리고 있다. 오타를 수정하고 후딱 올려야지.

 

(로트렉의 그림에 대해 얘기했더니 고마운 독자께서 그림 속의 연인들은 남녀가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들이라고 알려주었다. 아주 좋아하는 그림이었는데 그런 줄 전혀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이 더욱 매력적이다.)

 


 

글로벌 경제 침체의 강력한 신호가 나타났으니

 

 

지난 주 글로벌 증시는 “R의 공포”가 엄습한다고 난리가 났다. R은 경기침체를 뜻하는 Recession, 미국 시간으로 지난 주 수요일 오전 한 때 미국 채권시장에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10년 만기 국채의 금리가 1.623%를 나타내면서 2년 만기 국채의 1.634%를 깨고 내려가는 장단기 금리역전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향후 경기침체가 올 것을 나타내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이다. 과거 사례로 볼 때 특히 미국 국채 2년물과 10년물의 금리가 역전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경기침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라는 말처럼 오늘날 모든 돈은 미국의 뉴욕 금융시장으로 흘러가고 흘러나온다. 금융시장에도 여러 형태가 있지만 뭐니 해도 가장 대표적인 시장은 미국 국채시장인데 바로 그 시장에서 장단기 금리역전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장기 채권의 금리는 단기 채권보다 높아야 정상인데 그게 거꾸로 된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10년 만기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비정산적으로 많다는 것을 뜻한다. 수요가 많다 보니 수익률 즉 금리도 낮아진다.

 

이는 10년 후를 바라볼 때 마땅히 돈을 굴릴 곳이 적어졌다는 말이 된다. 돈을 굴릴 곳, 즉 투자할 곳이 없다 보니 그럴 바엔 가장 안전하고 현 시점에선 그래도 수익률이 좋은 미국 국채에 돈을 넣어두겠다는 것이다. 글로벌 전체적으로 투자가 줄면 그게 바로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그러니 이번에도 거의 글로벌 경기침체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원인에서 그렇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 국채 시장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그게 미국만의 사정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자금의 동향이 미국 국채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일본이 중국보다 미국 국채를 더 많이 보유하게 되었으니

 

 

그런데 이번 금리 역전 현상과 관련해서 묘한 일이 한 가지 더 발생했다. 금년 6월로서 일본이 중국보다 미국 국채를 더 많이 보유하게 된 일이다. 일본은 1조1220억 달러였고 중국은 1조1120억 달러로서 일본보다 적어진 것이다.

 

그간 미국이 중국을 심하게 압박할 경우 중국은 보유 중인 막대한 액수의 미국 국채를 매도함으로써 미국 금융시장에 일대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번 일로 알 수 있듯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게다가 미국의 국채 수익률이 영국이나 독일, 일본 등에 비해 높은 편이어서 국가의 자금을 관리해야 할 입장에서 본다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런 까닭에 중국 금융의 고위직 인사 역시도 현실적으로 미국 국채 말고 달리 투자할 곳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글로벌 침체는 중국에서 시작될 것 같으니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일어나면 평균적으로 22개월 후에 경기침체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에 22개월 후를 계산해보면 내후년 즉 2021년 6월경이 된다. 辛丑(신축)년 甲午(갑오)월이란 얘기인데 이 무렵에 경기침체가 발생한다면 그 震源(진원)은 단연코 중국이 아닐까 싶다.

 

바로 그 무렵 정도에 중국의 국운이 아주 흉흉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격화된 홍콩 시위가 더더욱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어쩌면 홍콩 문제와 맞물려서 중국발 글로벌 침체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얼마 전에도 얘기했지만 2021년은 중국이 홍콩을 돌려받은 1997년 7월 1일로부터 정확하게 24년이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60년 순환에 있어 24년이란 기간은 사물의 큰 흐름을 살필 때 그 성패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때가 된다.

 

이미 중국의 홍콩 흡수는 최근의 일로 볼 때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해졌으며 그 결과는 2021년이면 알 수 있다는 말을 얼마 전 글에서 했다.

 

홍콩은 중계무역의 기지일 뿐 아니라 전 세계 금융의 흐름이 아시아와 중국으로 연결되는 핵심 중계 시장이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제로금리와 함께 양적완화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액수의 잉여 달러가 싱가포르와 홍콩의 은행들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만일 홍콩 문제가 악화될 겨웅 그 자금이 역으로 흐르게 될 경우 그건 중국의 금융 붕괴가 될 것이다.

 

 

홍콩을 특별 대우해온 미국

 

 

오늘날 홍콩은 두 가지 수익원, 즉 밥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금융을 포함한 중계 기지의 역할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원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중국 당국이 의도적으로 밀어주는 지원, 즉 관광객의 유입을 통한 수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중요한 변수가 하나 있다는 점이다. 홍콩의 자금 중계나 물류 중계의 기능은 사실상 미국이 그간 홍콩에게 특별한 지위를 인정해오고 있기에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5년 전인 1992년에 미국은 별도의 입법 조치를 통해 홍콩을 정치, 사법, 교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 지역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특별 우대 혜택을 부여해왔다. (U.S.-Hong Kong Policy Act)

 

그런데 이번 홍콩 당국이 추진했다가 일단 연기된 범죄인 인도법안이 추진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미국이 홍콩 특별법에 대해 수정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수정 법안의 주된 내용은 해마다 홍콩의 자치 수준을 점검하고 기준에 미달된 경우 그간 홍콩에 부여해온 특별대우를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미국의 홍콩에 대한 특별대우가 취소될 경우 중국 본토와 동일한 관세를 부여하게 되고 아울러 전략적 물자의 수출을 제한하는 등의 다양한 제재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송환법 역시 강행될 경우 취소 요건이 된다.

 

그렇기에 중국은 그간에 홍콩을 길들이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서 관광객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수익은 홍콩이 중계기지 역할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에 비하면 그야말로 ‘껌값’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특별대우가 취소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만 해도

 

 

만일 홍콩에 대해 미국이 특별대우를 취소할 경우 홍콩은 그저 그런 펑범한 지방 도시로 전락된다. 관광과 도박으로 먹고 사는 마카오보다 더 못한 처지로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그간 중국은 홍콩의 특수한 위치를 활용해서 무역창구로 활용해왔으며 게다가 필요한 해외자금 또한 홍콩을 통해 조달해왔다는 점에서 미국의 취소가 있을 경우 중국 또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잃는 결과가 된다. 엄청난 국가적 손실.

 

만일 미국의 홍콩 특별대우 취소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일 경우 홍콩에 영업장을 가진 수많은 은행들은 싱가포르로 옮겨가려 할 것이고 덩달아 그간 중국 본토로 중계해준 막대한 달러 대출, 거의 수조 달러의 자금 회수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중국 금융위기를 무조건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이 홍콩을 특별대우해준 배경은 그것이 미국 금융계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 은행들은 홍콩 은행들을 통해 자금을 중계하면서 벌어들이고 있는 중간 마진이나 수수료가 실로 막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미국 금융계는 현재 미국 민주당 쪽에 서 있다. 그렇기에 특별대우 취소 역시 미국이 쉽게 결정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크지 않다고 하겠다.

 

무역이든 금융이든 거래가 줄어들거나 막히면 어차피 쌍방 모두 피해가 발생한다. (이번 한일 간의 문제도 마찬가지, 장기화될 경우 모두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문제는 어느 쪽의 손실이 더 크냐 하는 점이다.

 

 

영국(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同床異夢(동상이몽)

 

 

이에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장기적으로 중국을 이 시점에서 꺾어놓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의견일치를 볼 경우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점이다. (미국은 실제로 가끔 여야가 초당적 의견일치를 보기도 한다.)

 

홍콩 반환 시에 중국은 50년간 홍콩의 특별한 지위, 즉 기존의 홍콩의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일국양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넘겨주는 영국(미국 포함)과 넘겨받는 중국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영국은 홍콩에 개방형 민주주의 시스템을 심어놓았기에 50년에 걸쳐 결국 중국의 공산당 독재체제를 개방형 자유민주주의로 이끌어 내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고 반대로 중국은 50년에 걸쳐 홍콩 주민들에게 떡을 던져주면서 길들이면 충분히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로 흡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얘기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홍콩 시위는 의도를 떠나서 어느 쪽 판단이 옳았는지를 가늠하는 前哨戰(전초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번 미국 채권시장에서 발생한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은 결국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가 줄어들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홍콩 시위와 함께 금리 역전 현상을 함께 해석할 경우 어쩌면 그동안 세계의 자금을 빨아들이던 최대의 흡수처이자 투자처였던 중국이 이제 더 이상 그 역할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흐름이 이번 홍콩 시위를 통해 더 악화될 경우 미중 무역전쟁에 이은 새로운 격전장으로서 중국에게 보다 더 치명적인 뇌관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하겠다.

 

내년 트럼프 재선 여부에 많은 것들이 달려있다는 얘기

 

 

이 모든 상황은 결국 내년에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본다. 트럼프가 재선될 경우 결국 미국 유권자들이 중국을 꺾어놓자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제야말로 글로벌 판국이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미구에 돌이켜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지난 세월은 참으로 봄날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우리 주변을 보면 편한 곳이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