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하회마을이 유명하지만 사실 안동 제일의 경치는 가송리 부근이다. 35번 국도를 따라 청량산을 지나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고산마을 앞에서 동네 도로로 들어서면 맞은 편에 고산정이 보인다. 그곳에서 그냥 허접한 시멘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고산정에 도달한다. 고산정 앞에 서면 높은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 그림 왼쪽의 그것이다. 그 앞을 월명담, 달이 밝게 비치는 연못이란 이름인데 그 경치가 참으로 절경이다. 그림 오른 쪽의 마을이 가송마을이다. 가을 분위기를 넣어서 그렸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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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의 억지 귀성을 보고 나서

 

 

언제부터인가 명절은 좋은 연휴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기간이 되고 말았다. 명절 동안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말하는 ‘명절 증후군’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6년이었다. 벌써 25년씩이나 되었다.

 

처음엔 며느리 증후군이란 말로 시작되었다가 이젠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반적인 명절 증후군으로 정착되었다. 이번 추석 기간에도 당연히 그런 말이 들려왔다.

 

왜 스트레스를 받는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줄여 얘기하면 歸省(귀성)하는 행위 자체가 심리적 물질적 모두 합쳐서 득이 되거나 위안이 되기보다 부담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돈만 들고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필요 없다 싶은 짓은 1초도 신경 쓰기 싫어한다. 그렇다면 왜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아직도 귀성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건 오랜 문화적 풍습이고 관행이어서 거부하기엔 심리적 저항감도 상당하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니 이 또한 그렇게 오래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될 무렵엔 분명히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명절의 바탕에는 제사가 놓여있다. 제사를 하지 않거나 사라지면 사실 명절은 그야말로 연휴에 불과해진다. 어쩌면 연휴로서의 명절은 귀성이 사라진 뒤에도 오래 남을 수도 있겠다. 쉴 명분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소속감을 주던 제사의 역할이 사라졌고 잊혔으니 

 

 

제사는 종교적 행위이다. 오늘날 지자체마다 이런저런 축제가 많지만 그 역시 그 바탕에는 제사가 있다. 祝祭(축제)란 단어의 뒷 글자가 바로 祭(제), 즉 제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지자체의 축제에 가보면 제사를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축제일 수 있겠는가.

 

祭祀(제사) 줄여서 祭(제)는 종교적인 의식으로서 인류의 전 역사에 걸쳐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인류 최초의 종교는 바로 가족 종교였다. (이는 나 호호당의 주장이 아니라 종교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 이후 사회가 커지면서 부족의 신에 대해 제를 올렸고 나중엔 도시국가 형태의 나라가 되면서 나라의 신에 대한 제를 올렸지만 그럼에도 집안마다 가족의 신, 조상신에 대한 제사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다.

 

제사가 가진 가장 큰 기능은 그 제에 참가하는 사람들만이 그 가족 혹은 집단의 구성원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데 바로 그 소속감을 제사가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아직도 ‘나’라는 단어보다 ‘우리’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사라졌다. 우리란 말은 집단과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이어지려면 어떤 형태의 제사이든 거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라지고 마침내 ‘나’라고 하는 개체만 남게 된다.

 

 

신이 사라진 세상이라

 

 

유일신 신앙을 가진 기독교나 이슬람의 경우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때만이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소속감을 얻을 수 있다. 불교 역시 ‘참된 나’를 깨닫는 수행이라 하지만 대중에게 있어 불교는 부처님과 여러 보살님들에 대한 믿음이고 그 속에서 위안 즉 소속감을 얻는다. 또는 수행을 많이 한 스님, 가톨릭의 경우 聖者(성자)들에 대한 믿음이 위안과 소속감을 제공한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소위 선진산업국가들을 보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사실상 희박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 더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 니체의 말처럼 “神(신)은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경우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 주된 종교하 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그를 통해 소속감을 얻고 위안을 받는 사람들 즉 진정한 信者(신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시골 선산을 다 팔아치우자 귀성할 이유가 사라졌고

 

 

우리 사회를 보자. 과거의 농어촌공동체는 이미 철저하게 없어져버렸다. 더불어 1990년대에 이르러 시골의 문중 땅이나 先山(선산) 역시 국토개발로 인해 다 팔아치워졌다. 그러니 시댁의 어른 중에 돈 되는 땅이나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가진 이 또한 이젠 거의 없다. 1996년부터 명절 며느리 증후군이 생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며느리의 경우 시골 시댁에 내려가서 눈도장을 찍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귀성하는 부부의 경우 남편이 아내를 달래가면서 내려가야 하고 바삐 올라와야 한다. 처갓집도 가주는 것이고 그렇다. 하지만 그 자녀들의 경우 시골에 가면 아무런 재미가 없다. 어릴 적엔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았겠으나 좀 크고 나니 취직은 어떠하니, 결혼은 할 거니 등등 짜증나는 잔소리만 듣게 된다. 가기 싫은 것이다. (그 결과 자녀와 손주를 보고픈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꾸로 올라온다, 역귀성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공동체는 제사 또는 제식을 통해 작용하는데 

 

 

그 어떤 공동체도 그 구성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상징적인 것, 또는 상징이 있다. 그게 바로 제사이고 축제이며 의식이다. 그 대상이 먼저 가신 부모님이든 조상신이든 하느님이든 호국영령이든 아무튼 뭔가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를 통해 그 一員(일원)임을 확인하고 그로서 구성원이 되어 소속감을 얻는다.

 

구성원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정신적 물질적 도움 혹은 扶助(부조)를 받는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를 함께 나눈다. (온라인으로 송금하는 것 역시 일종의 부조이지만 직접 행사에 참가하는 것에 비하면 소원하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미립자 전자 알갱이가 되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낱알이고 모래알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이다.

 

그 결과 OECD 나라 중에서 공동체 의식이 가장 희박한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여타 선진산업국가들의 경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사실상 희박해졌지만 그럼에도 공동체적인 요소는 여전히 살아있다. (예를 들자면 유럽에서 축구팀이란 공동체의 한 상징이며 그를 통해 소속감을 얻는다. 하지만 우린 프랜차이즈 시스템이란 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이제 우리 사회는 공동체가 없어졌다. 공동체야말로 귀속감의 원천이고 대표적인 사회안전망인데 말이다.

 

그러니 이젠 나와 내 가족이 의지할 곳은 그저 내가 가진 돈과 재산만이 전부이다. 또 하나 유행하는 대안이 바로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연신 선거철마다 무상복지를 흔들어댄다.

 

 

갑질, 차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는 사회

 

 

공동체가 없어졌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한 남이 되었다. 그 결과 연봉을 얼마 받느냐, 대기업이냐, 아이폰 가지고 다니느냐, 강남에 사느냐 무슨 차를 모느냐 등등 오로지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남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편이다 싶으면 그로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바로 차별이다. 서로를 차별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이상하고도 살벌하며 駭怪(해괴)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수 십 년간 오로지 진보와 발전만을 외치며 달려오는 사이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대단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 때 1인당 GDP가 높아지면 행복할 줄 알았었고 그 기준에서 보면 우린 분명 선진국이다. 그런데 힘들고 외롭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 저소득 국가 사람들의 삶이 우리보다 더 괜찮아 보인다, 왜냐면 거기엔 공동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2천만이 살고 있는 서울과 수도권, 여기에 일부 지방의 산업도시, 이게 사실상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그 대한민국은 치열하고 살벌한 전쟁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벼운 존재이다. 언제든 ‘쌩을 깔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허공 속에 떠다니는 전자 미립자 알갱이와도 같다. 데이트 역시 두어 번 만나면 안녕이다. 별 볼 일 없기 때문이고 기대조차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어차피 결혼할 상대도 아니니 서로 가벼운 것이다.

 

이젠 최소한의 공동체인 가족마저 해체될 판이다. 결혼하자니 집을 구할 수 없고 집을 마련한다 해도 아기를 낳을 생각이 없다. 아기를 양육할 돈으로 차라리 우리끼리 잘 쓰고 즐기다가 나중에 애정이 식으면 이혼하자는 식이다. 그러니 굳이 결혼식을 할 이유도 없어지고 있고, 그냥 살다가 어느 날 헤어지면 그만이란 생각이다.

 

그저 드라이한 소비사회, 향락만 추구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마저 잃었으니

 

나 호호당은 최근 젊은이들을 대하노라면 그저 측은하다. 불쌍하다. 기댈 곳도 의지할 데도 없으니 FIRE 족인가 뭔가 그저 자신의 능력으로 최대한 많이 벌어서 일찍 은퇴해서 자신의 삶을 즐겨보자는 것이 기껏이고 한껏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될 까 싶다.)

 

그런 그들에게 왜 너희들이 어렵고 힘든지 얘기를 해주어도 아마 공감하지 못할 것 같다. 예전엔 삶의 ‘폭압’을 견디게 해주던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더 측은하고 불쌍하다.

 

나 호호당 역시 모른다. 낱알이 되고 미립자 전자 알갱이가 되어버린 것을 어떻게 다시 결집토록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다.

 

2000년 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 다시 돌아갈래!” 하고 외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을 모르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저 기대해볼 것이라곤 작용이 강하면 반작용도 있다는 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면 살기 위해서라도 길을 찾는 움직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이 있다. 국운의 입춘 바닥은 2024년, 하지만 그게 이렇게 되리라곤 전혀 알지 못했다. 정말 헐! 이다.

늦가을 강변, 해질 녘이다. 낙동강 상류, 오래 전이다. 아마도 청량산 자락이 물과 만나는 어느 곳이었다. 그저 황홀해서 바라보다가 미처 사진을 찍지 않고 돌아온 적이 있다. 물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해는 방금 산마루를 넘어간 때였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기억의 기묘한 집합체, 따라서 저 강과 가을 산 역시 나의 일부가 되어있다. 아직도 저 곳에 가면 저렇게 남아있을까? 다소 변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때의 산과 강은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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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이 모일 것이니 대박 나겠네요! 

 

 

천화동인 화천대유, 이제 이 문구들은 바야흐로 전 국민의 상식이 되게 생겼다. 周易(주역)에는 64 개의 점괘가 있는데 그 중에서 13번째가 천화동인이고 14번째는 화천대유이다. 모두 주역의 대표적인 吉卦(길괘)이다. 점을 쳐서 이 괘를 얻으면 아주 길하다는 말이다. 잘 되시겠네요!

 

먼저 그 뜻부터 잠깐 알아본다.

 

天火同人(천화동인)은 드높은 하늘 아래 밝게 빛나는 불(태양)이 있으니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넓은 들 여기저기에서 모여들어 큰일을 성취한다, 험난한 일을 치를지라도 무리가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火天大有(화천대유)는 하늘 위로 높이 불(태양)이 올랐으니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늘이 때에 맞추어 호응을 하니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고 中道(중도)를 얻어 크게 얻을 것이란 의미를 갖는다.

 

두 괘를 합쳐서 설명하면 어딜 가도 뜻밖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니 그들이 모여들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성취할 것이며 마침 時運(시운)도 따라주니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란 말이 된다.

 

이를 예컨대 대통령 선거라 치면 많은 득표를 통해 당선된다는 말이 된다.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지주 대신에 일을 관리하는 '마름'만 해도 무려 천 억을 먹었다 하니 

 

 

그리고 돌아가는 판을 보니 크게 해먹기 위해 여야 정치인들에게 거액의 보상을 해주고 입을 막은 뒤 ‘누군가’ 벌린 프로젝트이다. 야당 의원이 50 억을 가져갔고 모 여당 의원의 자녀는 아파트 분양 등등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어보니 또 다른 정치인들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다.

 

관련 변호사만 해도 무려 천억을 먹은 뒤 미국으로 잠적했다고 하니 그 ‘누군가’가 가져간 돈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각자 생각할 몫이다.)

 

참 웃긴다, 조국인가 하는 양반,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빚을 졌다고 실토한 그 양반은 블라인드 펀드인가 뭔가를 하다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인 윤석열씨에게 뒷덜미를 잡혔고 그 결과 윤석열씨는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뛰고 있다. 그 펀드 역시 사전에 봉쇄되어서 그렇지 이번 천화동인 화천대유 펀드와 같은 성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탈 없이 잘 되었으면 그 역시 수천억은 大有(대유)했을 것이니, 화천대유할 뻔 했던 것이다.

 

 

해 먹는 게 장땡, 불변의 진리란 말인가! 

 

 

이젠 양심이고 도덕이고 윤리, 이런 것들에 대해선 유권자들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현 정부 들어 이어진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학습 효과가 생겨서 만성이 된 탓이라 본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런데 뭘 굳이 신경을 써! 하는 것 같다. 그저 내 수중에 생기는 게 있으면 그 자를 찍어줄 심산인가 보다.

 

대통령께서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선언하고 보장했으니 이젠 그렇게 되었다 치고 일단은 내게 유리한 자를 택해야지 하는 대선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예전에 “해먹는 게 장땡”이란 말이 있었는데 그게 좀 바뀌긴 했다. 해먹는 게 장땡이긴 하지만 그 판에 나도 국물 한 숟가락은 조금 먹어보자는 식으로. 나라꼴이 실로 우습게 되어간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호호당 역시 내년 3월 대선에 대해 흥미가 많다. 하지만 누가 되느냐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어느 누구가 되느냐에 따라 펼쳐질 상황이 많이 다를 것 같아서 그게 흥미롭다는 말이다.

 

낭만파의 윤석열이냐, 개천용인 이재명이냐? (아무래도 이낙연이나 홍준표는 지금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을 뿐 내년 대선의 결선 주자는 아닌 것 같지만 모를 일이다. 그 또한 지켜봐야 한다.) 다만 모든 것이 흥미롭기 그지없다.

 

속내를 밝히자면 나 호호당의 진짜 관심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점에 있지 않다.

 

 

이제 586 정치인들은 물러갈 것이니 

 

 

진짜 관심은 이제 민주화운동권 세대, 87 민주화 세대 정치인, 흔히 586 정치인들이 이제 물러갈 때가 되었는데 그게 어떤 과정을 밟으면서 퇴장하게 되는 걸까? 하는 점이다.

 

 

우리 정치를 되돌아보면 

 

 

이에 우리의 과거 정치를 한 번 되돌아보자.

 

이승만 대통령, 미국을 우리의 후원세력으로 끌어들임으로서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분이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 우리 경제의 발전과 민생 복지의 구체적인 틀을 초석 위에 얹었으니 이 두 분은 우리 현대사는 물론이고 우리 국운의 향후 흐름에 있어서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혁혁한 영웅이다,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1987년의 민주화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찬란한 한 순간이었다.

 

1987년의 직선제 개헌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란 두 분의 위대한 민주 투사, 그들의 노력과 군부 집권에서 민권 이양의 결단을 내린 노태우, 이 세 분의 업적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민주화로의 이양을 강력하게 압박했던 미국의 공로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바로 오늘날 기득권 세력이 되어버린 87 민주화 세대가 있다.

 

87 민주화 세력 혹은 세대는 그로서 그 이후 우리 정치의 근본적인 동력이 되었으며 그것이 최초로 구체화된 것은 2000년 초반의 노사모였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말이다. 이젠 그 이름만으로도 古色(고색)이 蒼然(창연)하다.

 

노무현이야말로 87 세대의 진정한 리더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추천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3당 합당에 반대해서 독자의 길을 가는 결단력을 보여주었으며, 호남 지역을 발판으로 하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선 전 근대적 정치라고 비판하면서 각을 세웠다가 야권분열을 정리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과 합세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면서 부산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결과 낙선했다.

 

하지만 그 決氣(결기)야말로 ‘바보 노무현’의 등장이었고 ‘영웅 노무현’의 탄생이었다. 그 결과 우리 정치사상 처음으로 팬클럽인 ‘노사모’가 등장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다.

 

2002년 연말 대선에서 영웅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 이로서 군부 독재와 3김의 시대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열린’ 정치를 하자고 했고 모두가 ‘우리’가 되자고 했다. ‘열린우리당’의 당명이 그것이다.

 

열린 정치란 아군과 적군이 오로지 이기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 아니라 생각이 다를지라도 끊임없이 평화적으로 논쟁하고 타협해가면서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이 달라도 결국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노무현은 이제 정치란 투쟁을 止揚(지양)하고 타협을 통해 주고 받으면서 결국 하나이자 우리가 되는 大乘(대승)의 정치를 志向(지향)한 인물이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뒤 야당이 쓸데없이 시비를 걸어오자 ‘정 그러면 우리 권력을 나눕시다, 聯政(연정)을 합시다,’ 하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이미 기가 빠지고 그저 출세나 노리는 야당 정치인들은 기겁을 해서 이게 무슨 함정이지? 하면서 받아줄 배짱마저 없었다. 난 그 이후 여태껏 당시 야당과 그 후신인 국민의 힘 모두를 배알도 없고 거세된 내시환관의 무리로 여기고 있다.

 

87 민주화 세대는 노무현의 이상을 따라 정치권 안으로 들어왔고 권력을 잡았다. 새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될 것임을 굳게 다짐하면서 말이다.

 

 

권력의 단맛에 취한 586 정치인들 

 

 

그런데 말이다. 권력이란 어지간히 굳은 심성의 소유자가 아닌 한, 사람을 타락시키는 모양이다. 권력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단맛을 보던 그들이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내놓게 되자 변해버렸다. 이상과 열정은 잃어버리고 그저 복수욕과 권력욕만 남은 모양이다. (역사가 늘 그러했기에 특별히 87 정치인들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대목에서 약간 비약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분량 관계상 생략한다.)

 

현재 우리 정치의 주역이자 기득권은 87 정치인들이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이제 그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본다. 2017년 문재인 정권의 등장이 바로 87 민주화 세대의 종말점이라 여긴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아니었고 87 민주화 정치인들은 이제 우리 역사와 정치의 발전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저 기득권이 되어 逆行(역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9년 여름의 ‘조국 사태’였다.

 

 

자연순환의 도식

 

 

자연순환의 이치에 따라 도식을 제공하면 이렇다.

 

60년 순환에 있어 15년은 한 마디이자 한 계절이다.

 

1987년 386 민주화 세력의 등장, 15년이 흘러 2002년으로서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함께 민주화의 완성, 15년이 흘러 2017년으로서 87 정치인들의 역할 종료.

 

1987년에서 2017년까지 세어보면 30년이다. 30년은 60년 한 순환주기의 절반이기에 生(생)과 成(성), 消(소)와 滅(멸)의 4단계 과정에 있어 두 번째와 세 번째인 成(성)과 消(소)에 해당이 된다. 그러니 이제 滅(멸)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니 그게 2017년이다.

 

아니, 현재 시퍼렇게 살아있는 87 정치인들을 두고 滅(멸)의 단계라 하니 어리둥절하실 수 있겠다. (그런 까닭에 나 호호당은 여간해선 속내를 밝히지 않는다. 스스로 왕따 되는 일이니.)

 

하지만 지금 남아서 시퍼렇게 활동하는 저들은 혼백이 날아간 뒤 남은 形骸(형해)에 불과하다. 그리고 저 형해들은 1987년으로부터 36년이 흐른 2023년이 되면 순식간에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공을 세웠고 그 보상도 받고 누렸으니 이제 물러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간 수고 많으셨다.

 

국민의 힘, 더불어민주당, 모두 향후 10년도 못 가서 해체될 것이고 그 빈들에 새로운 풀과 나무가 들어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