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빨로 미소짓던 옛 사랑
주 2회 필라테스를 한다. 8층 스튜디오에서 운동을 하던 중 잠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연립 주택 옥상의 빨랫줄에 널린 하얀 이불 홑청들이 바람을 안고 깃발처럼 펄럭 일렁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서 다시 운동 자세를 잡는데 눈앞에 그림 하나가 스쳤다, 하얀 치아로 미소 짓던 옛 사랑.
갑자기 왜 생각이 나지, 무슨 영문으로? 하다가 금방 까닭을 알아차렸다. 시월이기 때문이었다. 시월은 돌이켜보는 계절이다.
그 사람 지금도 이빨이 희고 건강할까? 생각해보니 그냥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임플란트 많이 심었겠지. 지금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아볼 순 있을까? 아마도 갸우뚱하지 않을까.
월요일 8일 새벽에 寒露(한로), 찬 이슬의 때였고 그로서 戌(술)월이 시작되었다. 한 해를 통해 가장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한 달이다. 여름의 무더운 대기를 가득 메웠던 수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무 잎사귀들은 말라서 떨어진다. 빨래도 잘 마른다, 앞서의 하얀 이불 홑청처럼.
살갗 또한 끈끈하지 않아서 만지기 좋은 계절이다. 아침녘 잠에서 깰 때 손으로 배와 가슴 그리고 아랫배를 쓸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어서 몸을 돌려 등과 허리 엉덩이 쪽도 만져주게 된다. 그리곤 기지개를 한 번 시원하게 켜준다. 시월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에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계절 또한 시월이다. 그런데 그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거나 지금 곁에 없다면 얼마나 생각이 나겠는가? 어딜 가도 외롭고 쓸쓸하지 않겠는가.
시월은 되돌아보는 계절
그러니 지나간 사랑을 되돌아보는 계절 또한 시월인 것이다. 그래서 맑은 하늘 아래 일렁대는 이불 홑청이 옛 사람의 하얀 치아로 되돌아와서 잠시나마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이다.
나 호호당의 삶은 아직 날들이 많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앞날을 바라보기보다는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일이 더 많으니 그렇다.
엊저녁 어쩌다가 “존 르 카레”, 스파이 소설의 대가였던 그 양반이 생각이 났다. 아직 살아있을까? 싶어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2020년에 사망했다. 역시!
약간 뜻밖인 것은 “자칼의 날”을 쓴 “프레더릭 포사이스”가 비록 86세의 나이이긴 하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점이다. 속으로 이 양반도 가셨겠지 하면서 검색했는데 말이다. 하기야 워런 버핏도 아직 정정하다.
문학계의 경우 재작년 88세로 돌아가신 이어령 작가의 부인이자 문학평론가이신 강인숙 여사님이 아직 살아계시다. 곧 91세가 되신다.
하지만 나 호호당이 젊은 날 존경했거나 추앙했던 여러 분야의 대가들과 마스터들이 최근 검색해보면 대다수가 故人(고인)이다.
조금 살펴보니 30년대 생은 이제 거의 떠났고 존경하는 정현종 시인을 필두로 황동규 황석영 이문열 김훈과 같은 40년대 생들이 아직은 그런대로 건재하다. 10년 뒤가 되면 그들 또한 거의 떠날 것이고 다시 그 10년 뒤엔 50년대 생인 나 호호당의 세대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소프트랜딩?
따라서 나 호호당의 삶도 마무리 국면이다. 건강하게 내 몸을 가눌 수 있는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았길 기대하고 있지만 확률로 치면 최대 20년 짧게는 10년, 평균 15년의 여생이다.
아침에 양재천 길을 따라 산책하면서 하늘을 올려본다. 푸른 하늘 저 편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멀리 화살을 쏘아 올리듯이 던져본다. 내가 없다는 거, 죽었다는 것이 뭐니? 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큰 소리로 물어보기도 한다.
죽음,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 태어나서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생경하다.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긴 하다, 바로 잠들었을 때이다. 그 시간 동안 꿈을 꿀 때도 있지만 의식이 없는 시간들도 많다. 죽음도 아마 그런 거겠지 하고 유추해본다.
갑자기 일이 닥치면 너무 놀라서 허둥지둥할 것 같아서 미리 연습을 해놓으려는 생각이다. 올 해 들어서 그러니까 세는 나이로 70이 된 연초부터 계속해서 이 생각에 매달려왔다, 죽음에 대해 소프트랜딩을 위해.
아직도 열렬한 그 무엇이 가슴 속에 가득해서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나 호호당의 가슴 속엔 여전히 뜨겁고 열렬한 그 무엇이 가득하기에 죽음맞이를 시작했구나 하고.
“죽음맞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다. 다만 “-맞이”는 명사 뒤에 붙어 사용하는 접미사이니 만들면 되는 어휘이긴 하다.
시월의 하늘은 명랑한 생각을 하면 명랑해지고 우울한 사념을 가지면 하늘도 음울해진다. 빛의 강도와 구름을 가리는 해에 따라 무시로 수시로 변하는 시월의 하늘이다. 하늘이 그러하니 사람의 생각도 따라서 그렇게 된다.
올 해 양재천 물가엔 억새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날씨가 이상해서 강아지풀만 잔뜩 있고 갈대와 억새가 적어서 볼 때마다 아쉽다.
단조로운 일상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는 거
멀리서 젊은 남녀, 근육질의 남녀 다섯 명이 조를 짜서 힘차게 달려온다. 리더 격의 사내가 구령을 붙이고 있다. 구리 빛 살갗 위로 땀이 번지르 반지르. 남녀 모두 엉덩이와 허벅지가 탱탱하다. 와 부럽다!, 그리고 축원한다, 부디 오래 건강하시길.
나이가 들어서 새삼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은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 아니라 일상 속의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이란 점이다. 그냥 반복되는 일상, 약간은 지루하고 단조로워서 가끔 벗어났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런 삶, 그런 게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시월이다, 좋은 계절이다. 단조롭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즐겁게 이어가보자. 독자님들도 멋진 일상의 날들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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