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흰 구름은 습도가 높아짐을 뜻한다. 이제 무더위가 준비되고 있다. 오는 토요일 22일이면 빛의 절정인 夏至(하지), 연초면 새해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분분하다, 하지만 하지가 되었으니 올 한 해의 윤곽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다.

 

 

월드컵 시상식대에 올라보다니, 신기방기!

 

 

U 20 축구가 준우승이라고 하는 전혀 기대치 않은 대성과를 보았다. 첫 게임에서 포르투갈에게 졌을 때 아이고, 늘 하던 대로 또 경우의 수 운운 하겠구나 싶었다. 그 바람에 남아공이나 아르헨티나의 시합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와의 게임을 2-1로 이기고 16강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자 급격히 관심이 생겼다. 어? 이게 무슨 일!

 

세네갈 전과 에콰도르 전은 밤 시간 생중계로 지켜보았고 엄청나게 흥분했다. 드디어 결승전, 걱정이 앞섰다. 우크라이나, 시합을 보니 그다지 잘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더 걱정이었다. 실력으로 지면 몰라도 운이 없어서 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게임에 졌지만 여러모로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덕분에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로 “깨끗적”으로 졌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 어린 선수들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준우승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 싶다.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한일 간의 일

 

 

시합 전에 또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다. 1999년에 일본이 이 대회에서 준우승한 적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 국운은 정확하게 19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간다. 그러니 일본이 1999년에 준우승했으니 우리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또 그것이 실력이 아니라 운이 따르지 않아서 준우승에 그친다면 두고두고 찜찜할 터인데 하는 걱정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독자도 있을 것 같으니 다음의 얘기를 들어보시길.

 

60년 순환에 있어 일본의 입춘 바닥은 1945년 그리고 2005년이었다. 우리의 입춘 바닥은 1964년 그리고 2024년이 된다. 따라서 일본의 운세 흐름이 우리보다 19년 빠르다. 19년의 격차가 있다. (360년 순환에선 더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까닭에 주요 국제 행사도 한일 간 19년의 시차를 거의 정확하게 지키고 있다.

 

1964년에 도쿄 올림픽이 있었고 서울 올림픽은 1988년이었으니 24년의 시차였다.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있었고 우리는 평창에서 2018년에 있었으니 20년의 시차였다.

 

그리고 U 20 축구는 1999년에 일본이 준우승했는데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9년에 우리가 결승에 나갔다. 이 역시 20년의 시차.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일본이 20년 전에 준우승했으니 우리 역시 이번에 준우승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실력이 모자라 준우승한다면 몰라도 운이 미치지 못해 준우승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이 역시 일본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우려가 들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결과는 준우승이었다. 다만 실력에서 밀려서 졌기에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준우승 그 자체는 그야말로 한일 간의 소위 “평행이론”에 해당되고 있다.

 

 

평행 이론은 근거가 없지 않다.

 

 

물론 공식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이 그것이다. 일본은 그래본 적이 없다. 따라서 축구만큼은 우리가 일본보다 더 잘하고 있는 셈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의 기세가 일본보다는 역시 더 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본과 우리의 국운에 있어 시차가 거의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2005년이 바닥이었으니 그를 전후한 2000년대의 10년 동안 그야말로 바닥을 기었다. 우리 역시 2024년이 바닥이니 2020년대의 우리 대한민국 역시 바닥을 기게 될 것이라 추산한다.

 

내년 2020년 도쿄 하계 올림픽은 일본 부활의 신호탄이라 봐도 무방하다. 일본의 60년 운세 흐름에 있어 여름이 시작되는 立夏(입하)의 운이 바로 내년 2020년인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그로부터 19년 뒤인 2039년이 되면 우리 역시 바닥에서 일어나 또 다시 힘차게 웅비할 것이라 본다.

 

 

중국은 홍콩을 품는데 실패하고 있으니

 

 

말머리를 돌려보자. 홍콩 이슈이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자정을 기점으로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충격을 줄이기 위해 50년간 소위 “일국양제”라는 틀을 유지하겠다고 밝혔고 그로서 영국과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중국의 새로운 황제 시진핑은 그럴 생각이 없다. 자신의 권위와 아우라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일국양제라는 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가 보다. 범죄인 인도법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2014년의 이른바 우산 시위는 기껏해야 학생들과 일부 시민단체가 참여한 시위였지만 이번에 홍콩의 상당 수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이 전혀 다르다. 홍콩의 인구가 전체 700만인데 그 7분의 1인 100만 정도가 데모에 나섰다고 하니 격이 다른 셈이다.

 

그간 중국은 유커를 앞세워 돈으로 홍콩 사람들을 충분히 녹여놓았다. 중국의 통치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이번 사건을 보니 아니었다. 중국 당국의 오판이었음을 말해준다.

 

체면 엄청 따지는 중국인들이고 시진핑인데 그야말로 체면을 구겼다. 그러니 이번 일에 있어 고비만 조금 넘기고 나면 중국 중앙 정부는 홍콩 당국의 핵심 인물들을 모조리 잘라내는 것으로 분풀이를 할 것이라 본다. 너 조금만 기다려, 죽을 줄 알아! 하면서.

 

 

장차 트로이 목마가 될 수도 있는 홍콩 문제

 

 

이에 홍콩 문제에 대해 알아보고 전망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앞에서 얘기한 바,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은 1997년 7월 1일이니 이는 향후 전망을 위한 기점이고 시발점이다.

 

우선 중요한 기간은 18년이다. 즉 2015년은 홍콩의 중국화를 지켜봄에 있어서 숨어있는 급소가 된다. 그런데 2014년 우산시위가 발생했다. 홍콩의 중국화가 삐거덕대고 있음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올 해 2019년은 22년이 흐른 시점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22.5년이 되는 시점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2020년 1월1일의 상황을 보면 답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최근 범죄인 인도법안 개정을 놓고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 정도면 홍콩의 중국화가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최종적으론 24년, 12년 작은 주기가 두 번 경과한 때인 2021년 7월 1일의 상황을 보면 결정이 나겠지만 이미 그때까지 기다려볼 것도 없이 이번 시위를 볼 때 중국이 영국식 자유민주주의 방식에 익숙해진 홍콩 사람들을 동화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중국이 1997년에 홍콩을 되찾아오면서 길고 긴 國恥(국치)의 기억을 씻어내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중국의 권위적 시스템은 글로벌 소프트파워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파인 타이완의 차이잉원 총통은 봐라, 너희들이 이런 식의 일국양제를 떠들어대니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거지! 하고 一針(일침)을 놓고 있다.

 

홍콩 문제가 골치 아파진다는 것은 나아가서 장차 홍콩이 거꾸로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를 뒤흔들 수 있는 트로이 목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쯤에서 중국을 꺾어야 한다고 나선 미국에게 홍콩 이슈는 더 없이 좋은 공격무기가 되고 있다. 서방권 나라들도 은연중에 중국을 씹어대며 즐기는 눈치이다.

 

이 모두 글로벌 중화제국을 세우겠다고 나선 시진핑의 성급한 꿈, “중국몽”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로 얘기하면 중국은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고 있다. 2028년, 앞으로 9년 후면 입춘 바닥을 맞이할 것이고 그 뒤로 한 15년 정도는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화웨이 회장의 운세를 보니 역시 그럴 법도 하구나!

 

 

그런가 하면 미국이 마구 두들겨 패고 있는 중국의 대표기업이 화웨이이다. 미국은 상대를 팰 때 일단 대표기업부터 공격하면 효과적이란 것을 저번 2009년 도요타 자동차 사건에서 단단히 배웠나 보다.

 

화웨이는 런정페이(任正非)가 창립한 기업이고 여전히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양반의 생년월일을 보았더니 1944년 10월 25일이다. 甲申(갑신)년 甲戌(갑술)월 壬戌(임술)일이다. 그간의 경력을 볼 때 2012 壬辰(임진)년이 입춘 바닥이고 올 해는 그야말로 죽어라 죽어! 하는 殺運(살운)이다.

 

뉴스를 보니 올 해 매출 규모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 말하면서 그래도 미국 기업들과는 잘 지내고 싶다는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이 양반 운세로 볼 때 내년이나 내후년 정도면 손들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바로 春分(춘분), 60년 흐름에 있어 가장 괴로운 때가 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출발부터 빚쟁이란 사실

 

 

부자가 되고 말고를 떠나 우선 중요한 것이 있다. 삶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빚을 지고 태어난다는 것, 따라서 모든 인생은 빚쟁이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먹고 살려면 지속적으로 수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해서 벌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니 매달 돌아오고 매달 갚아야 하는 빚과 같다. 살기 위해선 치러야 하는 일종의 代價(대가)인 셈이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자신이 빚쟁이란 사실을 모른다. 불편하거나 배가 고프면 울면 된다. 그러면 엄마가 젖을 주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으니 공짜인 셈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철이 든다. 자고 입고 먹는 것이 공짜란 아니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생은 빚쟁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옛날엔 나이 열다섯만 되면 스스로 자기의 몫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철이 일찍 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성장기간이 길어져서 철부지 20-30대도 허다하다.

 

 

철이 든다는 것은

 

 

텔레비전에 보면 리포터가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꿈이 뭐예요? 하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런 꿈 저런 꿈을 얘기한다. 다 좋다. 하지만 꿈 이전에 인생은 빚쟁이란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미리부터 삶은 빚쟁이인 까닭에 고되고 힘든 것이란 얘기를 해주는 것이 마음은 불편해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선 훨씬 도움이 된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해서 성공하는 일이 많은 것 역시 일찍 철이 들었기 때문이고 삶이 빚쟁이란 사실을 빨리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꿈이고 미래 목표 운운하기 이전에 그 점부터 알아야 하겠다.

 

어려선 부모가 부양하지만 성인이 되면 스스로 벌어야 하고 결혼하면 가족까지 벌어 먹여야 한다. 생존경쟁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부자가 될 확률은 대단히 낮은 편이지만

 

 

이 글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별로 가진 것 없이도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인데 우선 얘기할 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확률이 실은 희박하다는 점부터 얘기한다.

 

왜냐면 삶이란 돈을 모으기 이전에 매달 써야 하는 비용, 기본 경비 또는 매달 갚아야 하는 빚이 있기에 벌어서 일단 그 비용을 충당한 나머지, 즉 잉여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축적이 이루어지고 그래야만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딜 가도 치열한 경쟁이어서 쓰고 남을 정도, 쓸 거 다 쓰고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최소한의 기본 경비로만 살아간다 해도 돈을 남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세상은 치열한 곳이다.

 

그러니 돈을 남긴다는 것이 말이 쉽지 현실에선 결코 쉽지가 않다. 따라서 부자가 못 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란 것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둔다. 아울러 얘기할 것은 알고 보면 부자가 될 까닭도 특별히 없다는 사실, 또 부자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인생을 즐기면서 삶의 빚만 죽는 날까지 성실하게 갚아나갈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서 벌어서 먹고 살면서 그 사이에 나름 즐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사실 충분한 일이란 얘기이다.

 

 

노동과 무형의 자본을 함께 해야

 

 

이제 돈을 만들어내는 원동력 혹은 원천에 대해서 애기해본다.

 

돈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선적으로 사람의 노동이고 그 다음으론 자본이다. 자본에는 문자 그대로 금전이라든가 부동산 또 생산시설과 같은 유형의 자본이 있고 기술이나 지식, 노하우, 경험, 자격증과 같은 무형의 자본이 있다.

 

이번 글의 취지인 즉 앞글에서 특별한 자본 없이 돈을 버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유형자본은 제외하기로 한다.

 

노동 그 자체만으론 정말이지 절대 돈을 벌기 어렵다. 벌기 어렵다는 말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살기 위해 써야 하는 비용 즉 기본경비를 넘어 축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특별한 자본도 없는 마당에 노동 그 자체만으론 돈이 되기 어렵다고 말하면 과연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남는 것은 단 하나, 앞에서 이미 얘기한 바, 무형의 자본을 가질 수 있을 때 돈을 벌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무형의 자본, 이게 정답이고 핵심이다. 인생의 빚을 갚아나가면서 서서히 돈을 남기고 나아가서 부자가 되는 방법은 무형의 자본을 만들어내고 가지는 방법 외에는 달리 없다. 그렇기에 이것만이 방법이다.

 

 

당신의 가치는 시장에서 평가된다는 냉엄한 현실

 

 

여기서 또 한 가지 냉엄한 현실을 얘기해보자.

 

당신이 벌어들이는 收入(수입)이란 결국 당신이 세상에 베푼 서비스에 대한 代價(대가)라 하겠는데 그 대가의 액수를 정하는 것은 시장이란 점이다. 내가 이만큼 좋은 서비스를 했으니 이 정도는 벌어야 되지 않겠는가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주관적 평가에 불과하다. 수입을 만들어내는 당신의 노동과 서비스에 대한 대가는 市場(시장)의 평가에 따라 정해진다. 즉 시장가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냥 누구나 하는 노동만으로 돈을 벌기란 정말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당신의 노동이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매김을 받으려면 결국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하겠으니 그건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무형의 자본을 당신의 노동에 곁들일 때만이 돈을 모으고 부자가 될 수 있다.

 

 

무형의 자본은 가지수가 실로 많아서

 

 

앞에서 무형의 지본에는 기술이나 지식, 노하우, 경험, 자격증 등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예를 들기 위한 것일 뿐 실은 무한 가지라 할 만큼 다양하다. 그 중에는 타고난 유전에서 오는 것도 있고 또 타고난 자질을 계발해서 더 다듬어낼 수 있는 것도 있으며 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여성의 경우 타고난 미모만으로도 충분히 큰 자본이 된다. 그걸 가꾸고 약간의 시술이나 수술을 통해 다듬어 낼 것 같으면 그야말로 엄청난 자본이 될 것이며 거기에 또 다른 것들까지 함께 버무려 넣을 것 같으면 대단한 권력이 된다.

 

(최근 서울 강남역 근처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 “예쁘면 DA냐!” 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성형외과의 이름이 디에이 성형외과인 까닭이다. 보면서 혀를 찼다.)

 

남다른 미각이나 후각, 좋은 목소리와 뛰어난 눈썰미 등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이냐, 또는 어떤 인연을 만나는 냐에 따라 얼마든지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무형의 자본으로 다듬어낼 수 있다. 이처럼 먹고 사는 재주, 또 쓸 거 쓰면서 남길 수 있는 재주는 실로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길, 먹고 살면서 남길 수 있는 길이 무수히 많건 만은 대개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어떤 재주가 있는지 잘 모르는 탓에 그리고 재능을 알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다는 초조함 때문에 나름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한다.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그 결과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길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길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터이자 생지옥이다. 거의 모두가 그 길을 택하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무형의 자본을 갖춘 이를 일컫는 말이 바로 전문가란 표현이다. 전문가라 하면 대부분 자격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전문적인 재주나 경험, 기술, 식견을 가진 자라면 전문가인 것이다.

 

이제 답이 나왔다.

 

 

경쟁력 있는 무형의 자본을 갖췄을 때만이

 

 

특별한 자본 없이도 돈을 모으고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형의 자본을 갖춘 사람, 즉 전문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 게다가 수요는 많은데 그에 부합하는 전문 역량을 가진 자가 적다면 당연히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돈을 벌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사업을 하려면 금전적 자본이 우선이라 여기지만 그야말로 사업에 초보 초짜라 하겠다. 사업에 필요한 전문적 역량을 얼마만큼 갖추었느냐가 관건이고 핵심이다.

 

사업의 경우만이 아니라 하겠으나 전문 역량을 처음부터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나 학원 같은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디까지나 현장에서의 경험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보다 더 높은 기량을 갖출 수 있고 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게 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제 마지막 얘기를 하겠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남보다 높은 경쟁력을 성취할 수 있는 재능을 적어도 한 가지씩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재능을 어떻게 발견하고 啓發(계발)해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자연순환운명학으로 바라본 재능 발견의 시기

 

 

나 호호당이 운명에 대한 연구와 상담을 통해 알아낸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람이 무사하고 편안한 환경에선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하거나 인식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아주 어려운 상황, 삶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당연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재능, 즉 자신의 재능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이치로 말하자면 60년 순환에 있어 立春(입춘) 바닥에서 15년이 흐를 무렵, 즉 立夏(입하) 때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런 기회는 일생을 통해 한 번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훗날 부자가 되고 말고는 바로 이 어려운 시기에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몸부림치면서 살 길을 찾느냐에 달린 문제라 하겠다.

 

그리고 그 이후 그걸 열심히 갈고 닦으면 그게 그 사람만의 전문성이 되고 나중엔 그 사람만의 業(업)이 된다. 이에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새 나름의 부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물론 큰 부자가 되는 것은 시대환경 즉 時運(시운)에 달린 문제라 하겠지만 말이다.

로또에 당첨된 바람에 팔자 고친 예술가

 

 

근대 프랑스 繪畵(회화)라 하면 뭐니 해도 인상주의(impressionism), 피사로, 모네, 세잔, 고흐, 마네, 르누아르, 로트렉, 고야 등의 화가들 말이다. 하지만 그 중 인상파 화가 한 명을 꼽으라 하면 당연히 클로드 모네이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었어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던 사람, 물 위에 뜬 수련 연못 그림들을 연작으로 그려낸 화가가 클로드 모네이다. 화가가 시력을 잃은 것은 마치 청력을 읽은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그 바람에 대중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으니 마케팅 효과 만점이다.

 

모네는 너무 가난해서 그림에 전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뭐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에야 살아생전에 그림 한 장에 수십억을 받는 화가들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덕분이다. 자본과 화상들이 결합해서 그림 시장을 크게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만 그려서 생활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흥미로운 모네의 일생과 운명

 

 

그런데 모네란 사람의 일생을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생활고에 시달린 탓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어느 날 로또에 당첨이 되는 바람에 한 방에 팔자를 고쳤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 역시 모네가 로또에 당첨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알려주었다. 그래서 아, 그래? 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저 양반 무슨 운에 그런 행운이 따랐지 싶어서 알아보았다.

 

생년월일을 알아보니 1840년 11월 14일로 되어있다. 평민 출신인 탓에 생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럽의 경우 귀족이라면 거의 모두 출생시각까지 기록 보존되어 있다.)

 

干支(간지)로 바꾸어보니 庚子(경자)년 丁亥(정해)월 丁丑(정축)일이다. 생시가 없어도 이력을 살펴보면 보면 금방 입춘과 입추를 알아낼 수 있다.

 

1887년 丁亥(정해)년이 立秋(입추)였고 1857년과 1917년이 立春(입춘) 바닥이었다.

 

 

로또 역시도 운이 따라야 되는 법이니

 

 

모네가 로또에 당첨된 것은 1891년이었다. 1887년이 입추였으니 그 4년 뒤는 이른바 黃金財(황금재)의 운이었다. 60년 순환에 있어 먹고 살아갈 기초가 생기는 운이라 나는 이를 황금재의 운이라 부른다.

 

역쒸! 그렇구나, 아무리 로또를 열심히 사본 들 운이 좋아야 당첨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로또를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헛일이란 사실.

 

모네가 받은 돈은 당시 액수로 10만 프랑이었다. 지금의 우리 돈으로 치면 30억에서 50억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이에 생활고에서 풀려난 모네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40Km 떨어진 센 강 근처에 연못이 딸린 전원주택을 구입했다. 서울로 치면 북한강 근처의 양평 정도라 보면 되겠다. 이리하여 훗날 모네의 대작인 수련 그림들이 바로 이 집 연못에서 탄생했다.

 

 

운이 바닥이다 보니 失明(실명)하게 된 모네

 

 

모네가 명성을 얻은 것에는 역시 실명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그 점 또한 알아보았더니 역시 일생을 통해 가장 건강이 좋지 않은 시기였다.

 

모네의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은 1917 丁巳(정사)년이었는데, 그가 두 번이나 수술을 했어도 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 시기는 1923 癸亥(계해)년이었다. 입춘 바닥으로부터 6년 뒤였다. 입춘으로부터 7.5년을 전후한 몇 년간은 모네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생의 가장 힘든 시기가 되는 법이다. 이 무렵에 심각한 병이 생기면 거의 사망한다.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그림에 매달렸다. 사실 그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었겠는가 싶다. 그리고 1926년 12월, 시력을 잃은 후 3년 뒤에 가서 결국 세상을 떴다. 폐암 때문이었다. 66년을 살았으니 당시로선 짧게 산 것은 아니다.

 

시력을 잃기 1년 전, 죽기 4년 전인 1922년 모네가 자신의 집 연못의 다리 위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남아있다. 시골 농부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채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친 모습이다. 연못엔 수련이 한창이고 다리 근처엔 덩굴이 드리워져있다. 흑백 사진이라 그런지 더 인상적이다.

 

모네의 수련 그림은 무려 250장 정도라고 한다. 나중엔 시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그런지는 몰라도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물도 수련도 거기에 비친 하늘도 없고 그저 색과 빛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뭉개지고 흐트러지고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어떤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예술가, 보헤미안의 삶과 운명

 

 

예술가의 생애를 얘기했으니 한 명 더 알아보자.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보헤미안의 얘기이다.

 

이름은 피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이고 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제1차 대전 직후까지 살다간 사람이다. 생애는 1859-1919년이었다.

 

피터 알텐베르크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오스트리아란 나라에 대해 잠깐 얘기해본다.

 

 

한 때 대단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아주 작은 나라이고 조용한 나라이지만 제1차 대전에서 패망하기 전까지 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유럽의 중부와 동남부를 아우르는 제국. 수도 비엔나는 따라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정치 사상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근대경제학의 창시자이자 한계효용이론의 제창자인 칼 멩거라든가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 언어철학의 천재 비트겐슈타인, 금빛으로 여성의 몸을 그려낸 구스타프 클림트 등등이 모두 20세기 초반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카페 센트랄과 피터 알텐베르크

 

 

그렇기에 비엔나는 토론의 도시였고 그러다보니 카페가 유명하다. 카페에 모여 앉아 갑론을박하던 세기 말적 도시였던 비엔나이다. 따라서 비엔나엔 무수한 카페들이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가게 문을 열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유명한 카페 중에 하나가 바로 카페 센트랄(Cafe Central)이다.

 

프로이드나 히틀러, 트로츠키 등등의 역사적 인물들이 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눴던 장소로 유명하다. 최근엔 우리나라 관광객들, 특히 여성들이 비엔나에 가면 거의 빼놓지 않고 들렀다 오는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에 사진과 글이 많이 올라온다. (나 호호당의 경우 1990년 비엔나에 들렀을 때 그 가게 앞에서 구경만 하고 왔다.)

 

카페 센트랄 가게에 들어가면 실물과도 같은 정교한 밀랍인형의 노신사가 앉아있는데 그가 바로 피터 알텐베르크이다. 거의 평생을 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돈벌이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비엔나 사람들이 절대 잊지 않고 추억하는 시인이자 작가였던 그는 우편물 주소도 아예 이 카페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보헤미안,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사람이었고 괴짜였다. 책을 낸 적도 있지만 그것으로 돈을 벌진 못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의 호텔 방값도 내주고 숙식도 제공했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에 대한 기억 단편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분이 있었으니 작고한 천상병 시인이다. 종로 인사동 근처, 또 이제는 이전한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구걸을 했던 시인이다. 나 호호당이 옛날 은행 다니던 시절 근처의 한국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곤 했는데 어느 날 내게 다가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50원만 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던 기억이 있다.

 

저 사람 좀 이상하네 했더니 바둑 두던 내 친구가 웃으면서 ‘아니야, 저 사람 미친 사람이 아니야, 시인인데 기원에 오면 동냥을 하고 그 돈으로 막거리 마신다고 하던데, 한국기원 단골 손님들은 다 알아, 저 분 이상하지만 좋은 분이라 하면서 대우해주는 눈치이던 걸’ 하는 것이었다.

그 분이 바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라는 시, 즉 귀천을 남기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그 묘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예술가의 사주

 

 

다시 돌아가서 피터 알텐베르크, 생일을 알아보니 1859년 3월 9일이고 생시는 불명이다. 간지로 바꾸니 己未(기미)년 丁卯(정묘)월 丙午(병오)일이다. 그냥 척 봐도 예술가임을 짐작케 한다. 사실 예술가나 시인들은 금전에 대한 욕망이나 감각이 둔한 편이다. 그렇기에 예술 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 세상에 가장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력을 보니 처음 책을 낸 1896년 丙申(병신)년이 입추였고 그 30년 전인 1866 丙寅(병인)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1859년에 태어났으니 어린 시절 정확히 몰라도 심각한 좌절을 겪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카페 센트랄에 죽치면서 비엔나 거리를 오가는 여성들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고 또 글을 썼는데 그게 당시로선 화제를 모았다. 일종의 페미니스트였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머물던 카페를 소재로 시를 남기는 바람에 카페 측에서 밀랍인형을 만들어 추념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남긴 글 중에 이런 위트 있는 글귀가 있다. 소개해본다.

 

“신은 천재들 안에서 생각하고 시인들 안에서 꿈을 꾸지만 잠은 나머지 평범한 우리들 안에서 잔다.”




외국인 투자가 개방된 것은 1992년이었다. 그 5년 전인 1987년 무렵 우리 경제 급성장과 증시 상승에 따라 외국자본의 국내 시장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우리 시장이 완전 개방되자 2002년을 기점으로 대량 투자가 이루어졌다. 


2012년부터 우리 경제는 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진입했고 이에 1992년으로부터 30년이 경과한 2022년이면 외국인 투자가 빠져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얼마 전에 글로 썼었는데 다시 한 번 영상으로 만들어보았다. 



夜半(야반)의 風雨(풍우)에 해당화 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

 

 

천 년 전 중국에 글재주가 대단히 뛰어난 才女(재녀)가 있었다. 우리로 치면 황진이 격이라 보시면 되겠다.

 

그녀에게 어느 날 이런 詩想(시상)이 떠올랐다.

 

가까운 사람과 간밤에 술자리를 펼치고 정담을 나누었지, 창밖엔 밤새 비바람이 쳤지, 비는 적었으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었지, 바깥은 을씨년스럽고 술자리는 따뜻했으니 분위기는 더욱 좋았지. 얘기 나누던 중에 잠시 걱정이 스쳐갔지, 바람이 세차니 뜰에 핀 초여름 해당화 붉은 꽃이 저러다 다 지고 말 것 같다고. 새벽녘 친구는 돌아가고 깊은 잠에 들었는데 문득 밝은 빛이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시중드는 아이가 창에 드리운 햇빛 가리개를 걷고 있더군, 몸을 일으키니 아이쿠, 아직 술기운이 남았구나, 아이에게 물었지, 애야, 해당화 꽃이 어때? 아이는 바깥을 내다보곤 말하길 멀쩡한 것 같은데요, 왜요? 절로 나오는 혼잣말,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보나마나 풀빛은 무성해지고 붉은 꽃빛은 줄었을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이에 그녀는 시를 지었다.

 

昨夜雨疏风骤(작야우소풍취),浓睡不消殘酒(농수불소잔주),

试问卷簾人(시문권렴인),  却道海棠依舊(각도해당의구)

知否(지부)? 知否(지부)?  应是绿肥红瘦(응시녹비홍수)。

 

우리말로 옮겨본다.

 

간밤에 비는 성기었으나 바람은 세찼었지,

단잠을 잤음에도 술기운이 남았구나,

발 걷는 이에게 물어보았더니

해당화는 아직 그대로라고,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으레 녹색은 살이 오르고 붉은 빛은 야위었을 터인데.

 

 

이청조,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여류시인

 

 

이 시를 지은 이는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여류시인인 李淸照(이청조). 탁월한 감성이 우미한 문체에 실려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시는 그냥 시가 아니라 곡에 실어서 부르는 노랫말인데 이런 시를 詞(사)라고 한다. 중국 송나라 시절에 유행했다 해서 宋詞(송사)라 한다. 당나라 시절의 唐詩(당시)와 함께 중국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詞(사)를 잘 만드는 이는 대중들에게 인기도 엄청 많았다고 한다. 노래는 역시 가사가 중요한 법이니.

 

이청조는 넉넉한 학자 문인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많은 책과 글을 접했고 또 문장 연습을 했다. 18세에 명문 부호의 귀공자에게 출가를 했다. 워낙 윤택한 형편이라 남편은 벼슬에 뜻이 없고 그저 애호하는 학문을 연구했고 이에 이청조 또한 남편을 도와 함께 연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부부는 한 세월 정말 호사롭게 잘 보냈다. 吟風弄月(음풍농월)의 호사로운 삶.

 

 

세상일은 늘 어긋나는 법이어서

 

 

최상류층의 삶을 남편과 함께 누리다보니 특별히 욕심낼 것도 없었고 이에 이청조는 자신의 호를 易安居士(이안거사) 또는 漱玉(수옥)이라 지었다.

 

易(이)는 쉽다는 뜻이고 安(안)은 편안하다는 뜻이다. 거기에 居士(거사)라고 했으니 세상에 나가 출세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지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또 漱玉(수옥)에서 漱(수)는 물에 씻는다는 뜻이고 玉(옥)은 구슬 옥이니 물에 말끔하게 씻어낸 옥구슬이란 의미이다. 세상의 험한 때나 먼지 같은 따윈 묻히고 않고 살겠다는 뜻이다.

 

상류층 지식인의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지만 한편으로 교만하다. 따라서 不吉(불길)한 이름이다. 그냥 이대로 순탄하게 잘 살겠다는 것이니 얼핏 좋은 말 같다, 씻어낸 옥구슬이니 먹고 살기 위해 아귀다툼 같은 건 아예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 또한 일견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나 호호당이 말하는 운명 순환의 60년을 살아가다보면 늘 편하고 쉬울 순 없는 노릇이고 늘 고고하고 맑게 자존심 지켜가면서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란 얘기이다.

 

그러니 易安居士(이안거사)나 漱玉(수옥)이란 이름을 썼다는 것은 장래의 불행과 고난을 약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나중에 이청조는 정말이지 갖은 風箱(풍상)과 苦楚(고초)를 겪게 된다. 인생 후반은 易安(이안)하지 않고 險難(험난)했으며 씻어낸 옥구슬이 아니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굴욕을 맛봐야 했다.

 

 

사주팔자로 알아본 이청조의 삶과 운명

 

 

위키에 그녀의 생년월일이 나와 있고 구글에 들어가 검색해보니 맞는 것 같아서 이쯤에서 그녀의 운명 순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양력으로 1084년 3월 13일생이니 甲子(갑자)년 丁卯(정묘)월 戊辰(무진)일이 된다.

 

官印(관인)이 相生(상생)하는 사주이니 귀티가 절로 풍겨난다. 생시를 모르긴 해도 연월일만으로도 강직하고 총명하며 자부심이 강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살면서 한 번 크게 바닥을 치고 굴욕을 당해야만 타고난 그릇을 마침내 완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시는 모르지만 이력을 보면 1098 戊寅(무인)년이 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고 태어나기 16년 전인 1068년과 1128년 戊申(무신)년이 입춘 바닥이 된다.

 

1094년에 태어났으니 운세는 立夏(입하)를 막 지난 무렵, 따라서 성품도 발랄했을 것이다. 18세에 시집갔는데 1101년 辛巳(신사)년이었다. 입추를 지나 벼꽃이 피는 處暑(처서)의 운이었다. 그러니 좋은 혼처를 만났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없기에 세월이 흘러 1126년 丙午(병오)년 북쪽의 여진족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했고 태상황과 황제 모두 여진족의 포로로 끌려가는 큰 일이 발생했다. 이를 중국 역사가들은 “정강의 변” 靖康之變이라 한다. 당시 年號(연호)가 정강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해서 송나라는 망했고 황제의 동생이 양자강 남쪽으로 피신하여 다시 조정을 세웠는데 이를 역사에선 南宋(남송)이란 부른다.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을 보면 정강의 변에 대해 자주 언급이 된다. 아울러 중국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충신 장군 岳飛(악비)의 이야기도 당시의 일이다.

 

아무튼 이청조 부부는 양자강 북쪽에 근거가 있었는데 엄청난 전답과 재산을 다 포기하고 양자강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리고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1128년 戊申(무신)년,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이 급기야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 나이 44세의 일이었는데 이는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임을 말해준다.

 

그 이후 생활고 등등으로 재혼을 했지만 한마디로 사기결혼이었기에 금방 이혼하고 만다. 정말이지 이청조의 자존심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 것은 당연한 얘기.

 

그 뒤로도 이청조는 죽을 때까지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렇다. 사망한 해도 1151년, 1155년, 1156년 등등 여러 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망각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처절하고 비참한 심사를 노래에 담았으니

 

 

그녀가 외롭게 홀몸이 되어 갖은 풍상을 겪는 가운데 남긴 聲聲慢(성성만)이란 詞(사)를 풀어서 옮겨본다.

 

찾아보고 또 찾아보지만

차디찬 늦가을 바람에

처량하고 비참한 슬픔만 밀려오네,

잠시 따듯하다가 금방 차가워지는 무정한 계절에

마음 둘 곳 없어 두세 잔 싱거운 술을 들이켜 보지만

어찌 이겨낼 수 있으리!

저녁이 되어 급한 바람 부는 하늘을 날아가는 저 기러기

정말 가슴이 아프구나,

한 땐 반가운 소식도 전해주었는데.

 

그녀의 처량한 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풍요를 누리는 가운데 초여름 밤비에 뜰의 해당화 질 것을 걱정하던 섬세한 시인이 저토록 처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청조는 참으로 좋은 집안에 태어나 명문가에 시집을 갔고 좋은 사람 만나서 한 세월 잘 누렸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또 긴 법, 때가 되자 갖은 고초를 겪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 인생 살다가는 일, 쉽게 볼 일도 그렇다고 어렵다고만 볼 일이 아님을 이청조의 고사가 잘 전해주고 있다.

 

이청조의 인생은 고달팠지만 그녀가 남긴 시와 사들은 천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면서 동아시아 문학의 거대한 바탕을 만들어놓았다.

 

 

글을 쓰게 된 사연

 

 

최근 케이블 방송에서 ‘녹비홍수’란 제목의 중국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이는 글머리에 소개한 시의 마지막 네 글자 绿肥红瘦(녹비홍수)에서 따온 제목이다. 최근 와이프가 밤 10시만 되면 텔레비전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리모컨을 움켜쥔 채 앉아서 지켜보게 만들고 있는 드라마이다.

 

이청조의 녹비홍수, 저 시를 읽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浮生六記(부생육기)라고 하는 중국 고전수필에 관한 것이다. 중국 청나라 시절 수필문학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에 보면 신혼살림을 차린 주인공이 아내가 지은 사랑스런 시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옮겨본다

 

가을기운 스며드니 사람 모습은 야위는데

서리에 물든 노란 국화는 더욱 살이 오르네.

 

秋侵人影瘦(추침인영수),霜染菊花肥(상염국화비)

 

이청조의 绿肥红瘦(녹비홍수)에서 肥(비)와 瘦(수)를 차례를 거꾸로 해서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향력은 오늘날 중국과 우리 일본 등의 대중가요에 있어 여전히 진하게 풍겨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어떤 젊은이가 어떻게 하면 특별한 자본 없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요? 하고 내게 질문을 해왔다. 


농담조로 대답했다, 워렌 버핏에게서 돈벌이에 관한 힌트 하나 얻으려고 점심식사 자리에 무려 42억씩이나 지불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자네는 내게 공짜로 물어보겠다고 하니 그게 좀. 


젊은이는 내 농담에 약간 당황했는지 우물쭈물했다. 


이에 금방 우스갯소리라고 무마했지만 사실 그 농담은 젊은이의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었다. 공짜는 세상에 없다는 얘기. 


그러고 나서 나는 “이제 두 번째 답을 말씀드리지” 했더니 젊은이는 의아해하면서 “두 번째요?”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다시 웃으면서 “조금 전에 얘기했지 않은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이야. 


젊은이는 얼굴을 붉혔다. 아, 네!



가진 것 없이 돈을 벌려면 자기착취가 정답이다.



이어서 얘기했다. 두 번째 답은 특별한 자기자본이 없이 남보다 더 돈을 벌려 하면 결국 ‘자기착취’밖에 없다네. 


자기착취요? 그게 무슨?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는 것은 기업가들과 자본주들이 결국 타인을 착취함으로써 초과이윤을 남기는 점에 관한 것이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뭔가 더 남기려면 어딘가에서 더 얻어내야 한다는 점은 나 호호당도 동의한다. 


하지만 힘없고 특별한 자본도 없는 자가 더 벌고자 할 때 가장 선량하고 쉬운 방법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더 착취하고 갈취하는 방법이 아니겠냐고 풀어서 얘기를 해주었다. 


달리 말하면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거나 같은 시간이라면 더 많은 노력을 하는 방법이 자기착취라고 얘기해주었다. 그 밖에 달리 무슨 신통한 방법이 있겠냐고 말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젊은이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생활의 질이... 하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질은 양이 된 다음에 따질 일



석연치 않은 기색이 보여서 一針(일침)을 놓았다. 질은 양이 된 다음에 따질 문제라고. 


특별한 자본이 없다면 특별한 재주라도 있어야 할 것이고, 그게 없다면 특별한 백그라운드라도 있든가 그도 아니면 결국 스스로의 노동력과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우선 그것을 다소 무리하게 쓰는 방법,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갈취하고 착취하는 것이 방법이 된다고, 따라서 생활의 질은 나중 문제라고 얘기해주었다. 


실망한 표정이었다, 젊은이는. 


그래서 한 번 더 침을 놓았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자네가 태어나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갈취하고 착취할 지라도 돈이 되기만 한다면 어디든 달려갔고 무엇이든 하고자 안달이었다네. 


그야말로 사실이고 이른바 팩트이다. 



예전의 대한민국을 떠올려보다



말을 하다 보니 문득 스쳐가는 옛일이 있다. 1980년대 초반, 정확하게 1982년의 일이다. 


나 호호당은 그 해 은행에 입사해서 영업점에 배치되었고 그곳 외환업무 팀에서 수출환어음 매입, 즉 네고(Nego)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한 섬유봉제업체의 공장 현장에 실사를 나가는 일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 5시였다. 상사의 지시인 즉 정말로 24시간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졸지에 새벽 3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엄청 투덜거리면서 생전 처음 가보지 않은 컴컴한 길에 나서야 했다. 


그 해 초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1982년 초까지 이른바 통행금지란 것이 있어서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진 통행이 금지되었다는 사실. 길을 가다 경찰에게 잡히면 새벽 통금 해제 때까지 파출소 유치장 신세였다. 


공장 안에 들어갔더니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엄청나게 요란했고 수백명의 여공들이 뿜어낸 체온과 땀으로 인해 공장 내부는 늦가을인데도 희부연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순간 감동을 받았다, 이 새벽에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들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구나, 정말이지 그건 감동이었다. 


한 여공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더니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시간이 아니라 뽑아낸 수량으로 돈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야근수당을 챙길 수 있으니 밤 시간 근무가 더 즐겁다는 그 분의 대답이었다. 놀면 뭐 해유, 돈 벌어야지 하던 그 힘찬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3교대가 아니었다. 12 시간씩 2교대였다.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일하고 교대하는 방식인데 야간 근무엔 수당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일하는 도중에 1시간 식사시간이 있지만 더 벌기 위해 몸만 괜찮으면 간식으로 때운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는 당시엔 와이셔츠, 최근엔 드레스셔츠라고 하는 의류제품을 만들어서 해외로 수출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의 수출신용장과 환어음 매입이 바로 내 담당이었기에 있었던 일이다. 


12시간 노동만 해도 중노동이다, 뿐만 아니라 뽑아낸 수량으로 돈을 버는 ‘성과시스템’이었기에 참으로 극심한 노동이었다. 하지만 그 여공들은 돈 버는 재미에 스스로를 사정없이 착취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중노동 정도는 아주 흔한 일, 일종의 풍토였다. 


나 호호당 역시 근무시간이 과다하긴 마찬가지였다. 은행 영업점 외환계에서 일하다보니 퇴근시간은 주로 밤 11시였다. 아침 9시 반부터 시작해서 밤 11시까지였으니 그 또한 거의 12시간 근무였다. 물론 야근수당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저녁식사는 근처 한식당에 가서 냉면이나 육개장 정도는 사인만 하면 먹을 수 있었다. 


사실 나 호호당이 은행에 들어간 이유는 오후 4시 반이면 셔터 내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히게 좋은 직장, 이른바 워라벨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정작 들어가서 보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이거 힘들어서 안 되겠네, 좀 더 편한 직장으로 옮겨야 하겠네 하고 생각했지만 월급 타는 재미, 또 동료 직원들과의 끈끈한 정이 생긴 탓에 그냥 지내기로 했다. 한편으로 직장 옮기는 것이 성가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풍토를 말하면 사무직 직원, 이른바 화이트칼라는 장차 출세를 할 몸이니 야근수당 따윈 당연히 받지 않아야 하고 미래가 없는 생산직 종사자, 소위 블루칼라는 야근수당을 받는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가소롭다. 


게다가 야근수당은 없어도 상대하는 업체로부터 명절을 비롯해서 때때로 돈 봉투를 받거나 고급 술집에서 접대를 받곤 했기에 충분히 야근수당을 대체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였기에 그렇게 받는 돈 봉투는 정말 짭짤했다. 그 돈으로 젊은 수컷답게 안마시술소도 가고 퇴폐이발소도 가고 동료들과 술도 먹고 때론 책도 살 수 있었으니 나름 충분히 즐거운 시절이었다. 


옛일에 대한 회고는 이 정도 하기로 한다. 



대한민국은 자기착취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



하고자 하는 말은 대한민국 자체가 자기착취를 통해 자본을 형성하고 기술을 발전시켜온 대표적인 나라였다는 얘기이다. 그 덕분에 오늘에 이르러 세계 유수의 산업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문제는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나라 자체는 그런 식으로 독하게 발전하고 성장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빈부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졌고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와는 또 다른 오늘날의 문제



최근 젊은이들을 보면 돈을 모아서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돈은 없어도 ‘소확행’을 즐긴다. 하지만 대우가 괜찮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일자리는 하늘에 별 따기 식이 되고 있어 괴로워한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평균적인 삶의 기대치 역시 덩달아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그런 기대치를 어느 정도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졌다. 이게 바로 최근 젊은이들의 비극이다. 이에 반해 예전에는 기대 자체가 없었다, 그저 어느 정도의 생활만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쩔 수 없어서 창업하는 사람들



에서 얘기한 그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젊은이 역시 어쩌다보니 어쩔 수 없이 창업을 하게 된 경우였다. 이를 두고 나는 창업을 당했다고 표현한다. 


창업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괜찮은 직장을 얻지 못한 젊은 층이고 또 하나는 중년에 퇴직을 한 경우이다. 직장에서 밀려나다 보니 놀 순 없고 창업을 한 것이다. 


어쩌다가 창업을 한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장차 사업의 성공은 둘째 치고 서바이벌 자체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든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물론 나 호호당 역시 돈벌이에 성공한 사람은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하긴 좀 좀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직장 생활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해왔기에 얻은 경험, 여기에 더해서 그간 상담해오는 과정에서 취부에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무수히 들어왔기에 그런 점도 있다. 


글이 길어졌으니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오늘 글의 핵심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 가진 것 없이 돈을 벌려면 자기착취가 우선이란 얘기를 했다. 다음 글에서 계속해서 돈 버는 방법에 관한 나머지 얘기들을 들려드리고자 한다.







이번에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 영화에 있어 큰 쾌거이지만, 나 호호당은 이러한 사건을 단순히 바라보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이야 물론 뛰어난 감독이었지만, 그가 이런 작품을 만들기까지 그 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한국 영화의 발전 과정에 대하여 다뤄 보았다.



추신 - 이수만, SM의 HOT와 SES에 대하여 사실 관계에 작은 착오가 있었다. 노땅의 실수이니 너그러이 봐주었으면 한다.


처음 있는 일

 

 

상담오신 분 중에 자신의 운세 바닥이 언제였는지를 사실상 정확하게 맞히신 분이 있었다. 그간의 많은 상담 중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분의 말씀인 즉 그간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과 최근의 동영상 강좌를 보다 보니 ‘통밥’으로 얼추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대단하시다고 선뜻 인정을 해주었다.

 

운세의 최저점이자 바닥, 반대로 말하면 새로운 60년 순환의 시작점은 立春(입춘)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느끼기로 가장 힘든 시점은 그로부터 7.5년이 흐른 춘분의 시점이 된다. 그 분은 자신의 춘분 시점을 정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에 나는 입춘 바닥은 사실 그로부터 7.5년 전이라고 나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춘분, 각성의 때

 

 

이처럼 가장 암울하고 힘들다고 느끼는 시점은 60년 순환에 있어 그 시작점인 입춘이 아니라 그로부터 7년 반이 흐른 春分(춘분)이 된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면서 그 이후부턴 낮이 더 길어지는 시점이다. 바로 이때가 고통스런 覺醒(각성)의 때가 된다. 각성이 무엇인가? 어떤 잘못이나 사실 등을 깨달아서 알게 됨을 말한다. 잘못한 것을 깨달아서 알게 될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아,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내가 너무 놀고 있었구나, 그간 내가 너무 세상을 몰랐구나! 등등 뒤늦은 한탄, 즉 晩時之歎(만시지탄)을 한다.

 

각성 또한 하나의 빛으로부터 온다. 어느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줄기 빛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통찰을 유발케 하고 그것은 마침내 각성으로 이어진다. 그게 바로 춘분의 빛이다. 춘분이 지나면 밤 시간보다 낮 시간이 길어지기에 그런 것이다.

 

60년에 걸친 순환에 있어 춘분의 때를 지내보지 않았거나 또는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사람은 그 고통과 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나 호호당이 겪었던 춘분의 기억

 

 

이에 나 호호당 개인의 경험을 예로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나 호호당은 1955년생인데 1997년이 입춘 바닥이었고 이에 2004년, 내 나이 마흔아홉에 춘분의 때를 보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당시의 고통과 각성을 기억한다, 몸에 새겼던 것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한심하고 못났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유복한 환경에 태어나 명문의 고등학교와 명문 대학을 나왔고 군 복무 후엔 급여도 좋고 근무환경도 어렵지 않은 은행에서 일했다. 어쩌다 보니 부잣집 사위가 된 바람에 내가 장만한 아파트 한 채, 아내가 받아온 아파트 2채, 그 바람에 1990년 무렵엔 강남 서초에 아파트만 3채, 거기에 상당한 주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윤택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늘 인기가 많았고 상도 여러 번 탔다. 직장생활하면서는 모 신문사가 주최하는 사진전에도 응모해서 상도 받았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교양도 풍부했고 한문에 밝아서 중국 원전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며 중국어회화에도 능했다. 아울러 영어 회화도 1980년대 당시로선 일류 축에 속했다. 나름 엘리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 호호당에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사람과 세상을 밑으로 깔고 보는 교만함이 내 속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시건방진 태도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5년 전인 1992년, 小寒(소한)의 때부터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고 이에 12년이 흘러 春分(춘분)의 운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월세 집에 틀어 박혀 보내는 신세, 망해도 너무 심하게 망한 零落(영락)의 신세가 되어 있었다.

 

서른일곱부터 풍상의 세월 12년을 겪다보니 어언 마흔아홉, 머리가 허옇게 세어가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이 어느새 홍안이 백발 되고 상전이 벽해로 변해있었다. 내 딴엔 똑똑한 줄 알았더니 천만의 말씀, 정말로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는 한스러움만 가슴 가득 밀려왔다.

 

건강도 엉망이었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댄 탓에 호흡곤란의 천식으로 고생을 해야 했고 체중 또한 숨쉬기가 거북할 정도로 불어 있었다.

 

특히 괴로웠던 것은 그 세월 사이에 잘 될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많았건만 그 모두를 시시하다 여겨서 외면하고 어쩌면 그렇게 망하는 길만 찾아서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悔恨(회한)이었다.

 

이에 스스로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해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쯤에서 세상에서 퇴장하고픈 마음이었지만 그 또한 쉬운 일도 아니고 게다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살아갈 날 또한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내 운세 흐름 상 춘분인 2004년 여름부터 다음 해 가을까지 줄곧 스스로를 自責(자책)하면서 보냈다.

 

 

각성한 결과 얻게 된 새로운 마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 작정을 했다, 앞날을 살아가면서 세상 그 누구라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나의 선생님으로 삼을 것이며 작은 기회라도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붙잡아 보겠다. 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으면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각오였다.

 

이게 나 호호당이 운명의 춘분을 보내면서 가지게 된 새로운 마음 자세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바로 그 무렵부터 나 호호당이 발견해낸 운명의 법칙인 자연순환운명학의 연구가 크게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론의 모델링이 되지 않아 포기해야 하는가 싶은 좌절감이 여러 차례 나를 괴롭혀왔지만 그럴 때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돌차구가 열리고 또 열리곤 했다. 이에 나는 2014년 어느 날에 ‘자연순환운명학’이란 초유의 학문이 세상에 등장했다는 글까지 썼다. 그 또한 10년의 노력이었다.

 

이렇게 나 호호당은 60년 순환에 있어 춘분의 때를 보냈다. 처절할 정도로 각성을 하고 반성을 했더니 얼마 가지 않아 큰 報償(보상)이 주어졌다.

 

 

각성이 가져다 준 報償

 

 

2007년 바닥으로부터 10년이 흐른 淸明(청명)의 때가 되자 가진 것은 없어도 그저 밥 먹고 숨 쉬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게 되었다. 매일 변하는 날씨와 하늘만 바라봐도 행복감을 느꼈다.

 

물론 늘 돈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살아있음 그 자체만으로 좋았다. 마치 몸속에서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큰 병 앓고 나서 내 몸 마음대로 쓰고 다니는 것만 해도 즐거운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세상에 살아있는 그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내 스스로 지은 호를 生命(생명))을 애호하고 세상의 모든 모습 즉 色(색)을 애호한다는 의미에서 호생하고 호색한 사람, 줄여서 好好堂(호호당)이라 지었다.

 

나 호호당의 얘기는 이 정도까지만 하겠다. 운명의 순환 속에서 춘분의 때, 입춘 바닥으로부터 7.5년이 경과했을 때 겪는 이런 상황은 사람에 따라, 즉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처지, 나이에 따라 무수히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려운 가운데 각성을 하게 된다.

 

 

되돌아본 우리 대한민국의 춘분

 

 

우리 대한민국 역시 1964년이 국운의 입춘이었기에 1972년 무렵이 춘분이었다. 사람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곤궁했고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일상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모든 것을 다 걸었고 유신독재를 단행한 상태였다.

 

당시 유행하던 말은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 안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으니 우리 스스로 自己卑下(자기비하)가 극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우리의 지식인들은 낙담했고 또 통분했다. 이에 김지하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란 시를 씀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표출했던 것은 1975년이었다.

 

하지만 훗날에 보니 박정희도 옳았고 김지하도 옳았다. 한 사람은 세계 최빈국의 대한민국을 강철과 같은 의지로서 경제발전의 기틀을 놓았고 또 한 사람은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당시 나 호호당은 대학생이랍시고 박정희를 매우 증오했었지만 말이다.

 

 

기적을 만들어낸 우리 대한민국

 

 

며칠 전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우리 영화의 빛나는 금자탑을 세웠다. 1992년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개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우려했었으나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 그로부터 우리 영화는 크게 발전해왔고 마침내 저런 큰 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 우리는 개방을 통해 성공을 거듭해왔기에 개방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그 말이 새삼 기억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FTA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지지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하지만 그 분 역시 크게 옳았다.

 

돌이켜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40대 세대만 해도 그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겪지 않았기에 그렇다.

 

 

새로운 국운의 순환을 앞에 두고

 

 

이제 앞으로 5년 후가 되면 또 한 번 국운의 입춘 바닥이다. 그렇기에 올 해부터 많은 것이 어려워지고 새로운 엄중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32년이 되면 시름 깊은 가운데 또 한 번의 큰 覺醒(각성)을 하게 될 것이다.

 

2032년은 앞으로 13년, 따라서 나 호호당은 아마도 그 무렵까진 살아있을 공산이 크다. 그러니 그 무렵에 가서 우리가 또 어떤 깨우침을 얻게 될 것인지 지켜볼 수 있겠다. 각성의 알맹이를 보면 그 속에 향후의 미래가 또 보일 것이니 말이다.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말

 

 

“가난이 문을 두드리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 이런 재치 넘치는 말,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우연한 계기에 나는 이 말이 아일랜드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처음 쓴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아니었다. 영국 속담이란 말도 있고 독일의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아프리카의 오래된 속담이란 주장도 있다. 어쩐지 아프리카 쪽이 오리지널이 아닐는지 싶다.

 

가난이 문을 두드리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 영어 표현으론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버전이 있다.

 

When poverty comes in at the door, love flies out of the window.

When Poverty Knocks at the Door, Love flies out of the Window.

 

100퍼센트 맞는 말이라 하긴 그렇지만 거의 그런 것 같다.

 

 

시대 차이, 세대 차이

 

 

집안에 가난이 찾아들면 유교적 관념을 지녔던 예전 어머니들은 애정은 없어도 자식들 보며 참고 살았지만 최근의 부부들은 곤궁해지면 이혼할 확률이 무척 높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난해지면 애정은 사라진다, 다만 예전과 지금의 차이는 그냥 참고 견디며 한 세상 사느냐 아니면 이혼하느냐 정도라 하겠다.

 

 

물 건너 세상의 풍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 건너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엔 이혼을 하게 되면 결국 돈 문제가 되니 아예 결혼식이나 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동거하는 커플이 거의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낳더라도 결혼신고는 하지 않는다 한다. 우리로 치면 사생아가 되는 셈인데 그쪽에선 별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또 서구의 부자들은 결혼할 당시부터 변호사를 통해 이혼할 경우의 재산 문제에 대해 사전에 합의해둔다고 한다. 이혼이 금기가 아닌 탓에 일종의 사전 출구전략인 셈이다.

 

최근 뉴질랜드에서 온 제자가 전해준 새로운 얘기인 즉, 뉴질랜드에선 남녀가 만나서 사귀더라도 이름을 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아니면 가명이나 애칭을 사용한다고 한다. 언제든 결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를 낳아도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동거할지언정 결혼을 하지 않는 풍토는 주로 북유럽 그리고 미국의 경우 남부의 감리교 지역을 제외한 개신교 지역에서 그렇다. 로마 가톨릭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선 여전히 결혼을 하는 모양이다.

 

 

이혼 문제로 국민투표까지 했던 이탈리아

 

 

놀랍게도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이탈리아는 1974년에 이혼을 합법화할 것인가를 놓고 거국적 행사인 ‘국민투표’까지 단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투표는 거의 전 유권자가 참여할 정도로 대단한 이슈였으며 투표 결과 이혼 합법화에 찬성하는 이가 59.26%, 합법화 반대가 40.74%가 나와서 결국 이혼이 합법화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투표 문항이 적절했느냐를 놓고서 나중에도 엄청난 사회적 물의가 있었으며 가톨릭 종교 지도자들은 말세라고 하면서 개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출처: wikipedia, "1974 Italian divorce referendum")

 

우리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부터 그러니까 121년 전에 이미 근대적 형태의 이혼제도가 도입된 것에 비하면 가톨릭 전통의 이탈리아는 정말 대단하다.

 

 

흔들리는 있는 결혼 제도

 

 

우리의 경우 먹고 살기가 팍팍해진 최근에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른바 非婚(비혼)이 이슈가 되고 있지만 멀지 않아 우리도 어쩌면 서구의 풍조를 따라갈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결혼이란 법적 제도가 맹렬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 호호당 생각하기로 우리도 동거를 통해 낳은 아이가 사생아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그나마 출산율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이혼소송은 결국 돈 싸움

 

 

나 호호당은 법대를 나온 까닭에 대학 동기 중엔 법조인이나 변호사를 했거나 하고 있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꽤 오래 전 변호사 사무실을 하는 한 친구로부터 “이혼소송이란 결국 돈 싸움이야 딴 거 없어” 하는 말을 듣고 약간 놀랐던 적이 있다. 지금에서야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인데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이혼소송은 결국 돈 싸움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남편의 외도 때문에 이혼 소송을 고려하는 여성들이 많다. 그런데 소송의 동기인 즉 억울하고 원통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나는 “민사 소송은 결국 돈 싸움입니다, 법이 부인의 억울 원통함을 풀어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금전적인 보상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라고 말해준다.

 

이처럼 상담하다 보면 부부의 이혼 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혼의 이유를 보면 물론 불륜도 많지만 불륜 자체가 최종적인 동기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애정이 식었다 해도 돈 문제만 없으면 그냥저냥 지내다가도 결국 돈 문제, 형편이 어려워지면 이혼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부부가 갈라설 무렵이 되면 부부가 잘 살고 있던 예전보다 금전적으로 어려워진 경우가 많아서 더 치열한 소송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남편의 수입이 너무 없어서 아예 위자료를 포기하고 합의 이혼하는 딱한 여성들도 많다.

 

상담을 통한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대부분의 경우 이혼하는 시점은 부부 모두 운세가 한창 내리막길을 걷고 있거나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바닥을 전후한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이 입춘 바닥을 보내고 이제 운명의 여름, 즉 입춘 바닥에서 15년이 흐른 이후에 이혼을 하는 경우 이혼한 다음에 더 나은 삶을 사는 경우도 꽤나 된다는 점이다.

 

 

노년의 이혼은 참으로 문제, 특히 남성에게

 

 

그간의 상담경험과 연구에 의하면 이혼이 최악이 되는 경우는 중년의 이혼보다도 60대 이후의 이혼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혼은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운세 순환이 내리막일 때 하게 된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 운이 내리막이라면 장차 수입이나 직업 사정도 어려워질 것이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돈 문제에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특히 그 당사자가 남성인 경우 상당히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돈만 충분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새롭게 결혼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나이든 여성의 경우 이혼을 해도 예컨대 저임금이긴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가 남자들보다 나은 것 같고, 게다가 자녀의 집안일을 돌보면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정말 어려워진다.

 

 

돈과 행복의 관계

 

 

돈 얘기가 나와서 얘기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이 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다. 하지만 행복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타고난 자질 즉 건강이나 재주, 취미나 관심 등과 더불어 타고난 품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란 것은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난 문제이다.

 

(가령 나 호호당의 경우 호기심이 많아서 늘 연구하고 궁리하는 것이 있어 전혀 심심하지가 않다. 게다가 그림 재주가 있어서 늘 그리면서 즐긴다. 그런 까닭에 나 호호당은 스스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은 이처럼 돈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하지만 불행은 돈이 없으면 바로 닥친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의 취미나 관심, 또는 숨겨진 재능 같은 것을 시험해볼 시간이나 기회가 돈벌이 때문에 원천 봉쇄된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하다.

 

그렇기에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불행을 피하는 방파제 또는 방화벽 역할은 분명히 해준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돈이 사라지면 즉 가난이 닥치면 그런 까닭에 사랑은 창문을 통해 날아간다. 가난이 닥치면 사랑만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건강도 행복도 나아가서 삶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다시 얘기지만 돈이 반드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진 않겠지만 우리의 삶을 받쳐주는 필수 요건이고 바탕인 것이다.

 

 

돈, 젊음, 그리고 미모

 

 

돈 얘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다. 젊음과 美貌(미모)이다.

 

사실 젊음과 미모 이 두 가지는 남녀 불문하고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대단한 財貨(재화)라 하겠다. 특히 여성에게 미모는 절대적인 무기이다. 모두가 미모를 가진 것은 아니기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하지만 젊음은 한 때 누구나 가지는 것, 그런 점에서 적어도 한 가지만은 평등하다. 물론 최근엔 돈만 있으면 성형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미모도 소유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긴 하다. 미모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젊음이나 미모는 세월과 함께 감가상각이 이루어지는 재화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면 돈만 남는다. 심지어 돈은 이자가 붙으니 감가상각과는 거리가 있다. 불편한 진실이다. (물론 돈이 행복을 살 순 없다는 점 또한 다시 한 번 강조해둔다.)

 

최근 이상하게도 이혼이나 결별과 관련된 상담이 잦다. 그런 탓에 이 글을 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이란 게 결국 변하더라고요. 몇 년 전에 상담하러 오신 분이 했던 말이다. 여운이 많이 남았고 그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오랜 사색 끝에 미처 정답을 얻진 못했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과 욕망, 특히 에로틱한 욕망은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짧다는 생각. 사랑은 좀처럼 변하지 않지만 욕망은 그렇지가 않다는 생각.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내리사랑, 즉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간해서 변하지 않지만 커플 간의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도 판별하기 어렵다는 생각, 또 순수한 사랑이라 해도 가난이 닥쳐오면 시험을 받게 된다는 생각 등이 그것이다. 더 생각해볼 것이 많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일을 할때에 이것이 성공할지 아닐지 누구나 궁금해한다. 그리고 나 호호당은 이것에 대해 매우 간결하고도 정확한 판별법을 알고 있다.


오늘은 어떤 일에 대해 단기적인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강의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