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이다. 하지만 마치 사회 각층에서는 이 분쟁이 일시적인 일이며, 다시금 미중이 화해를 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리라 예상하지만 그건 다분히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적 사고일 뿐이다.


둘의 전쟁은 매우 장기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은 시작일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하여 강의해 보았다.



클로드 모네의 삶과 운명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그 양반의 그림들을 보았다. 나는 모네의 초기 그림들을 더 좋아한다. 멀리 미루나무가 있는 환한 벌판의 그림이 눈에 더 들어왔다. 그래서 그려보았다, 물론 내 감성과 내 터치로. 하지만 모네를 따라해본 것은 분명하다. 붓으로 찍어 칠하는 방법, 점묘법으로 칠했다. 점묘법은 그림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즐겨하는 기법은 아니지만 오늘은 즐거웠다. 하늘에 새가 날고 있는 것은 고흐의 벌판이 떠올라서였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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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에 당첨된 바람에 팔자 고친 예술가

 

 

근대 프랑스 繪畵(회화)라 하면 뭐니 해도 인상주의(impressionism), 피사로, 모네, 세잔, 고흐, 마네, 르누아르, 로트렉, 고야 등의 화가들 말이다. 하지만 그 중 인상파 화가 한 명을 꼽으라 하면 당연히 클로드 모네이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었어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던 사람, 물 위에 뜬 수련 연못 그림들을 연작으로 그려낸 화가가 클로드 모네이다. 화가가 시력을 잃은 것은 마치 청력을 읽은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그 바람에 대중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으니 마케팅 효과 만점이다.

 

모네는 너무 가난해서 그림에 전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뭐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에야 살아생전에 그림 한 장에 수십억을 받는 화가들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덕분이다. 자본과 화상들이 결합해서 그림 시장을 크게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만 그려서 생활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흥미로운 모네의 일생과 운명

 

 

그런데 모네란 사람의 일생을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생활고에 시달린 탓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어느 날 로또에 당첨이 되는 바람에 한 방에 팔자를 고쳤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 역시 모네가 로또에 당첨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알려주었다. 그래서 아, 그래? 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저 양반 무슨 운에 그런 행운이 따랐지 싶어서 알아보았다.

 

생년월일을 알아보니 1840년 11월 14일로 되어있다. 평민 출신인 탓에 생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럽의 경우 귀족이라면 거의 모두 출생시각까지 기록 보존되어 있다.)

 

干支(간지)로 바꾸어보니 庚子(경자)년 丁亥(정해)월 丁丑(정축)일이다. 생시가 없어도 이력을 살펴보면 보면 금방 입춘과 입추를 알아낼 수 있다.

 

1887년 丁亥(정해)년이 立秋(입추)였고 1857년과 1917년이 立春(입춘) 바닥이었다.

 

 

로또 역시도 운이 따라야 되는 법이니

 

 

모네가 로또에 당첨된 것은 1891년이었다. 1887년이 입추였으니 그 4년 뒤는 이른바 黃金財(황금재)의 운이었다. 60년 순환에 있어 먹고 살아갈 기초가 생기는 운이라 나는 이를 황금재의 운이라 부른다.

 

역쒸! 그렇구나, 아무리 로또를 열심히 사본 들 운이 좋아야 당첨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로또를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헛일이란 사실.

 

모네가 받은 돈은 당시 액수로 10만 프랑이었다. 지금의 우리 돈으로 치면 30억에서 50억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이에 생활고에서 풀려난 모네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40Km 떨어진 센 강 근처에 연못이 딸린 전원주택을 구입했다. 서울로 치면 북한강 근처의 양평 정도라 보면 되겠다. 이리하여 훗날 모네의 대작인 수련 그림들이 바로 이 집 연못에서 탄생했다.

 

 

운이 바닥이다 보니 失明(실명)하게 된 모네

 

 

모네가 명성을 얻은 것에는 역시 실명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그 점 또한 알아보았더니 역시 일생을 통해 가장 건강이 좋지 않은 시기였다.

 

모네의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은 1917 丁巳(정사)년이었는데, 그가 두 번이나 수술을 했어도 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 시기는 1923 癸亥(계해)년이었다. 입춘 바닥으로부터 6년 뒤였다. 입춘으로부터 7.5년을 전후한 몇 년간은 모네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생의 가장 힘든 시기가 되는 법이다. 이 무렵에 심각한 병이 생기면 거의 사망한다.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그림에 매달렸다. 사실 그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었겠는가 싶다. 그리고 1926년 12월, 시력을 잃은 후 3년 뒤에 가서 결국 세상을 떴다. 폐암 때문이었다. 66년을 살았으니 당시로선 짧게 산 것은 아니다.

 

시력을 잃기 1년 전, 죽기 4년 전인 1922년 모네가 자신의 집 연못의 다리 위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남아있다. 시골 농부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채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친 모습이다. 연못엔 수련이 한창이고 다리 근처엔 덩굴이 드리워져있다. 흑백 사진이라 그런지 더 인상적이다.

 

모네의 수련 그림은 무려 250장 정도라고 한다. 나중엔 시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그런지는 몰라도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물도 수련도 거기에 비친 하늘도 없고 그저 색과 빛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뭉개지고 흐트러지고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어떤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예술가, 보헤미안의 삶과 운명

 

 

예술가의 생애를 얘기했으니 한 명 더 알아보자.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보헤미안의 얘기이다.

 

이름은 피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이고 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제1차 대전 직후까지 살다간 사람이다. 생애는 1859-1919년이었다.

 

피터 알텐베르크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오스트리아란 나라에 대해 잠깐 얘기해본다.

 

 

한 때 대단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아주 작은 나라이고 조용한 나라이지만 제1차 대전에서 패망하기 전까지 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유럽의 중부와 동남부를 아우르는 제국. 수도 비엔나는 따라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정치 사상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근대경제학의 창시자이자 한계효용이론의 제창자인 칼 멩거라든가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 언어철학의 천재 비트겐슈타인, 금빛으로 여성의 몸을 그려낸 구스타프 클림트 등등이 모두 20세기 초반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카페 센트랄과 피터 알텐베르크

 

 

그렇기에 비엔나는 토론의 도시였고 그러다보니 카페가 유명하다. 카페에 모여 앉아 갑론을박하던 세기 말적 도시였던 비엔나이다. 따라서 비엔나엔 무수한 카페들이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가게 문을 열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유명한 카페 중에 하나가 바로 카페 센트랄(Cafe Central)이다.

 

프로이드나 히틀러, 트로츠키 등등의 역사적 인물들이 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눴던 장소로 유명하다. 최근엔 우리나라 관광객들, 특히 여성들이 비엔나에 가면 거의 빼놓지 않고 들렀다 오는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에 사진과 글이 많이 올라온다. (나 호호당의 경우 1990년 비엔나에 들렀을 때 그 가게 앞에서 구경만 하고 왔다.)

 

카페 센트랄 가게에 들어가면 실물과도 같은 정교한 밀랍인형의 노신사가 앉아있는데 그가 바로 피터 알텐베르크이다. 거의 평생을 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돈벌이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비엔나 사람들이 절대 잊지 않고 추억하는 시인이자 작가였던 그는 우편물 주소도 아예 이 카페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보헤미안,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사람이었고 괴짜였다. 책을 낸 적도 있지만 그것으로 돈을 벌진 못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의 호텔 방값도 내주고 숙식도 제공했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에 대한 기억 단편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분이 있었으니 작고한 천상병 시인이다. 종로 인사동 근처, 또 이제는 이전한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구걸을 했던 시인이다. 나 호호당이 옛날 은행 다니던 시절 근처의 한국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곤 했는데 어느 날 내게 다가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50원만 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던 기억이 있다.

 

저 사람 좀 이상하네 했더니 바둑 두던 내 친구가 웃으면서 ‘아니야, 저 사람 미친 사람이 아니야, 시인인데 기원에 오면 동냥을 하고 그 돈으로 막거리 마신다고 하던데, 한국기원 단골 손님들은 다 알아, 저 분 이상하지만 좋은 분이라 하면서 대우해주는 눈치이던 걸’ 하는 것이었다.

그 분이 바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라는 시, 즉 귀천을 남기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그 묘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예술가의 사주

 

 

다시 돌아가서 피터 알텐베르크, 생일을 알아보니 1859년 3월 9일이고 생시는 불명이다. 간지로 바꾸니 己未(기미)년 丁卯(정묘)월 丙午(병오)일이다. 그냥 척 봐도 예술가임을 짐작케 한다. 사실 예술가나 시인들은 금전에 대한 욕망이나 감각이 둔한 편이다. 그렇기에 예술 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 세상에 가장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력을 보니 처음 책을 낸 1896년 丙申(병신)년이 입추였고 그 30년 전인 1866 丙寅(병인)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1859년에 태어났으니 어린 시절 정확히 몰라도 심각한 좌절을 겪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카페 센트랄에 죽치면서 비엔나 거리를 오가는 여성들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고 또 글을 썼는데 그게 당시로선 화제를 모았다. 일종의 페미니스트였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머물던 카페를 소재로 시를 남기는 바람에 카페 측에서 밀랍인형을 만들어 추념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남긴 글 중에 이런 위트 있는 글귀가 있다. 소개해본다.

 

“신은 천재들 안에서 생각하고 시인들 안에서 꿈을 꾸지만 잠은 나머지 평범한 우리들 안에서 잔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알비의 풍경이다. 그림 가운데의 웅당한 건물은 알비 대성당이다.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마치 요새나 성채처럼 생겼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옛날에 그러니까 1200년 초반 이곳 알비를 중심으로 카타리파라고 하는 이단 종파가 세력을 키우는 바람에 결국 로마교황청은 전쟁을 일으켰다. 알비 십자군 전쟁이다. 농민들을 중심으로 크게 힘을 얻은 카타리 파의 교리는 상당 부분 가톨릭의 교리와 어긋나는 바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교리가 아니라 남 프랑스 일대는 유독 가톨릭 사제들의 사치와 타락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알비 십자군 전쟁을 통해 농부와 그 가족들을 포함해서 무려 20만에서 100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 당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가톨릭 교회는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마치 전투적인 요새와도 같은 성당를 세움으로서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지역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눌렀다. 오늘날엔 그런 아픈 역사가 있었는지조차 망각했는지 강물만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다. 나 호호당이 알비란 마을을 기억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정으로 애호하는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파리 몽마르트르의 유명한 카바레인 물랭루즈의 춤추는 무희들을 포스터로 그린 그 양반의 고향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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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더워지고 있다. 서늘한 바다가 그리워진다. 물색을 차가운 감이 드는 세룰린 블루로 칠했다. 서해 바다일 것이다. 일몰 시간이라면 그래야 한다. 세 명의 친구가 낚시대를 매고 물가에 서성대고 있다. 낚시를 마친 것인지 아니면 이제 시작하려는 것인지.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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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투자가 개방된 것은 1992년이었다. 그 5년 전인 1987년 무렵 우리 경제 급성장과 증시 상승에 따라 외국자본의 국내 시장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우리 시장이 완전 개방되자 2002년을 기점으로 대량 투자가 이루어졌다. 


2012년부터 우리 경제는 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진입했고 이에 1992년으로부터 30년이 경과한 2022년이면 외국인 투자가 빠져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얼마 전에 글로 썼었는데 다시 한 번 영상으로 만들어보았다. 




유튜브에서 만났던 프랑스 고성의 풍경이다. 펜으로 그리고 검정 물감을 올렸다. 그레이 톤의 모습이 마치 흑백 사진 같아서 나름 이채롭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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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半(야반)의 風雨(풍우)에 해당화 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

 

 

천 년 전 중국에 글재주가 대단히 뛰어난 才女(재녀)가 있었다. 우리로 치면 황진이 격이라 보시면 되겠다.

 

그녀에게 어느 날 이런 詩想(시상)이 떠올랐다.

 

가까운 사람과 간밤에 술자리를 펼치고 정담을 나누었지, 창밖엔 밤새 비바람이 쳤지, 비는 적었으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었지, 바깥은 을씨년스럽고 술자리는 따뜻했으니 분위기는 더욱 좋았지. 얘기 나누던 중에 잠시 걱정이 스쳐갔지, 바람이 세차니 뜰에 핀 초여름 해당화 붉은 꽃이 저러다 다 지고 말 것 같다고. 새벽녘 친구는 돌아가고 깊은 잠에 들었는데 문득 밝은 빛이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시중드는 아이가 창에 드리운 햇빛 가리개를 걷고 있더군, 몸을 일으키니 아이쿠, 아직 술기운이 남았구나, 아이에게 물었지, 애야, 해당화 꽃이 어때? 아이는 바깥을 내다보곤 말하길 멀쩡한 것 같은데요, 왜요? 절로 나오는 혼잣말,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보나마나 풀빛은 무성해지고 붉은 꽃빛은 줄었을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이에 그녀는 시를 지었다.

 

昨夜雨疏风骤(작야우소풍취),浓睡不消殘酒(농수불소잔주),

试问卷簾人(시문권렴인),  却道海棠依舊(각도해당의구)

知否(지부)? 知否(지부)?  应是绿肥红瘦(응시녹비홍수)。

 

우리말로 옮겨본다.

 

간밤에 비는 성기었으나 바람은 세찼었지,

단잠을 잤음에도 술기운이 남았구나,

발 걷는 이에게 물어보았더니

해당화는 아직 그대로라고,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으레 녹색은 살이 오르고 붉은 빛은 야위었을 터인데.

 

 

이청조,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여류시인

 

 

이 시를 지은 이는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여류시인인 李淸照(이청조). 탁월한 감성이 우미한 문체에 실려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시는 그냥 시가 아니라 곡에 실어서 부르는 노랫말인데 이런 시를 詞(사)라고 한다. 중국 송나라 시절에 유행했다 해서 宋詞(송사)라 한다. 당나라 시절의 唐詩(당시)와 함께 중국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詞(사)를 잘 만드는 이는 대중들에게 인기도 엄청 많았다고 한다. 노래는 역시 가사가 중요한 법이니.

 

이청조는 넉넉한 학자 문인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많은 책과 글을 접했고 또 문장 연습을 했다. 18세에 명문 부호의 귀공자에게 출가를 했다. 워낙 윤택한 형편이라 남편은 벼슬에 뜻이 없고 그저 애호하는 학문을 연구했고 이에 이청조 또한 남편을 도와 함께 연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부부는 한 세월 정말 호사롭게 잘 보냈다. 吟風弄月(음풍농월)의 호사로운 삶.

 

 

세상일은 늘 어긋나는 법이어서

 

 

최상류층의 삶을 남편과 함께 누리다보니 특별히 욕심낼 것도 없었고 이에 이청조는 자신의 호를 易安居士(이안거사) 또는 漱玉(수옥)이라 지었다.

 

易(이)는 쉽다는 뜻이고 安(안)은 편안하다는 뜻이다. 거기에 居士(거사)라고 했으니 세상에 나가 출세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지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또 漱玉(수옥)에서 漱(수)는 물에 씻는다는 뜻이고 玉(옥)은 구슬 옥이니 물에 말끔하게 씻어낸 옥구슬이란 의미이다. 세상의 험한 때나 먼지 같은 따윈 묻히고 않고 살겠다는 뜻이다.

 

상류층 지식인의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지만 한편으로 교만하다. 따라서 不吉(불길)한 이름이다. 그냥 이대로 순탄하게 잘 살겠다는 것이니 얼핏 좋은 말 같다, 씻어낸 옥구슬이니 먹고 살기 위해 아귀다툼 같은 건 아예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 또한 일견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나 호호당이 말하는 운명 순환의 60년을 살아가다보면 늘 편하고 쉬울 순 없는 노릇이고 늘 고고하고 맑게 자존심 지켜가면서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란 얘기이다.

 

그러니 易安居士(이안거사)나 漱玉(수옥)이란 이름을 썼다는 것은 장래의 불행과 고난을 약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나중에 이청조는 정말이지 갖은 風箱(풍상)과 苦楚(고초)를 겪게 된다. 인생 후반은 易安(이안)하지 않고 險難(험난)했으며 씻어낸 옥구슬이 아니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굴욕을 맛봐야 했다.

 

 

사주팔자로 알아본 이청조의 삶과 운명

 

 

위키에 그녀의 생년월일이 나와 있고 구글에 들어가 검색해보니 맞는 것 같아서 이쯤에서 그녀의 운명 순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양력으로 1084년 3월 13일생이니 甲子(갑자)년 丁卯(정묘)월 戊辰(무진)일이 된다.

 

官印(관인)이 相生(상생)하는 사주이니 귀티가 절로 풍겨난다. 생시를 모르긴 해도 연월일만으로도 강직하고 총명하며 자부심이 강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살면서 한 번 크게 바닥을 치고 굴욕을 당해야만 타고난 그릇을 마침내 완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시는 모르지만 이력을 보면 1098 戊寅(무인)년이 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고 태어나기 16년 전인 1068년과 1128년 戊申(무신)년이 입춘 바닥이 된다.

 

1094년에 태어났으니 운세는 立夏(입하)를 막 지난 무렵, 따라서 성품도 발랄했을 것이다. 18세에 시집갔는데 1101년 辛巳(신사)년이었다. 입추를 지나 벼꽃이 피는 處暑(처서)의 운이었다. 그러니 좋은 혼처를 만났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없기에 세월이 흘러 1126년 丙午(병오)년 북쪽의 여진족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했고 태상황과 황제 모두 여진족의 포로로 끌려가는 큰 일이 발생했다. 이를 중국 역사가들은 “정강의 변” 靖康之變이라 한다. 당시 年號(연호)가 정강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해서 송나라는 망했고 황제의 동생이 양자강 남쪽으로 피신하여 다시 조정을 세웠는데 이를 역사에선 南宋(남송)이란 부른다.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을 보면 정강의 변에 대해 자주 언급이 된다. 아울러 중국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충신 장군 岳飛(악비)의 이야기도 당시의 일이다.

 

아무튼 이청조 부부는 양자강 북쪽에 근거가 있었는데 엄청난 전답과 재산을 다 포기하고 양자강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리고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1128년 戊申(무신)년,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이 급기야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 나이 44세의 일이었는데 이는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임을 말해준다.

 

그 이후 생활고 등등으로 재혼을 했지만 한마디로 사기결혼이었기에 금방 이혼하고 만다. 정말이지 이청조의 자존심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 것은 당연한 얘기.

 

그 뒤로도 이청조는 죽을 때까지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렇다. 사망한 해도 1151년, 1155년, 1156년 등등 여러 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망각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처절하고 비참한 심사를 노래에 담았으니

 

 

그녀가 외롭게 홀몸이 되어 갖은 풍상을 겪는 가운데 남긴 聲聲慢(성성만)이란 詞(사)를 풀어서 옮겨본다.

 

찾아보고 또 찾아보지만

차디찬 늦가을 바람에

처량하고 비참한 슬픔만 밀려오네,

잠시 따듯하다가 금방 차가워지는 무정한 계절에

마음 둘 곳 없어 두세 잔 싱거운 술을 들이켜 보지만

어찌 이겨낼 수 있으리!

저녁이 되어 급한 바람 부는 하늘을 날아가는 저 기러기

정말 가슴이 아프구나,

한 땐 반가운 소식도 전해주었는데.

 

그녀의 처량한 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풍요를 누리는 가운데 초여름 밤비에 뜰의 해당화 질 것을 걱정하던 섬세한 시인이 저토록 처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청조는 참으로 좋은 집안에 태어나 명문가에 시집을 갔고 좋은 사람 만나서 한 세월 잘 누렸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또 긴 법, 때가 되자 갖은 고초를 겪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 인생 살다가는 일, 쉽게 볼 일도 그렇다고 어렵다고만 볼 일이 아님을 이청조의 고사가 잘 전해주고 있다.

 

이청조의 인생은 고달팠지만 그녀가 남긴 시와 사들은 천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면서 동아시아 문학의 거대한 바탕을 만들어놓았다.

 

 

글을 쓰게 된 사연

 

 

최근 케이블 방송에서 ‘녹비홍수’란 제목의 중국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이는 글머리에 소개한 시의 마지막 네 글자 绿肥红瘦(녹비홍수)에서 따온 제목이다. 최근 와이프가 밤 10시만 되면 텔레비전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리모컨을 움켜쥔 채 앉아서 지켜보게 만들고 있는 드라마이다.

 

이청조의 녹비홍수, 저 시를 읽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浮生六記(부생육기)라고 하는 중국 고전수필에 관한 것이다. 중국 청나라 시절 수필문학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에 보면 신혼살림을 차린 주인공이 아내가 지은 사랑스런 시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옮겨본다

 

가을기운 스며드니 사람 모습은 야위는데

서리에 물든 노란 국화는 더욱 살이 오르네.

 

秋侵人影瘦(추침인영수),霜染菊花肥(상염국화비)

 

이청조의 绿肥红瘦(녹비홍수)에서 肥(비)와 瘦(수)를 차례를 거꾸로 해서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향력은 오늘날 중국과 우리 일본 등의 대중가요에 있어 여전히 진하게 풍겨온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의 오른 쪽에 위치한 요새 모습이다. 칠하는 테크닉을 약간 달리해본 실험적인 그림이다. 디테일을 줄이고 선보다는 면을 강조해본 그림이다. 보시기에 어떨지 모르겠으나 평소의 내 그림 기법과는 많이 다른 그림이다. 약간 더 표현적인 그림이라고 할까. 빠르게 칠했고 마지막 손질도 최대한 생략했다. 즐겨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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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는 없다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어떤 젊은이가 어떻게 하면 특별한 자본 없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요? 하고 내게 질문을 해왔다. 


농담조로 대답했다, 워렌 버핏에게서 돈벌이에 관한 힌트 하나 얻으려고 점심식사 자리에 무려 42억씩이나 지불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자네는 내게 공짜로 물어보겠다고 하니 그게 좀. 


젊은이는 내 농담에 약간 당황했는지 우물쭈물했다. 


이에 금방 우스갯소리라고 무마했지만 사실 그 농담은 젊은이의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었다. 공짜는 세상에 없다는 얘기. 


그러고 나서 나는 “이제 두 번째 답을 말씀드리지” 했더니 젊은이는 의아해하면서 “두 번째요?”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다시 웃으면서 “조금 전에 얘기했지 않은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이야. 


젊은이는 얼굴을 붉혔다. 아, 네!



가진 것 없이 돈을 벌려면 자기착취가 정답이다.



이어서 얘기했다. 두 번째 답은 특별한 자기자본이 없이 남보다 더 돈을 벌려 하면 결국 ‘자기착취’밖에 없다네. 


자기착취요? 그게 무슨?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는 것은 기업가들과 자본주들이 결국 타인을 착취함으로써 초과이윤을 남기는 점에 관한 것이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뭔가 더 남기려면 어딘가에서 더 얻어내야 한다는 점은 나 호호당도 동의한다. 


하지만 힘없고 특별한 자본도 없는 자가 더 벌고자 할 때 가장 선량하고 쉬운 방법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더 착취하고 갈취하는 방법이 아니겠냐고 풀어서 얘기를 해주었다. 


달리 말하면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거나 같은 시간이라면 더 많은 노력을 하는 방법이 자기착취라고 얘기해주었다. 그 밖에 달리 무슨 신통한 방법이 있겠냐고 말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젊은이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생활의 질이... 하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질은 양이 된 다음에 따질 일



석연치 않은 기색이 보여서 一針(일침)을 놓았다. 질은 양이 된 다음에 따질 문제라고. 


특별한 자본이 없다면 특별한 재주라도 있어야 할 것이고, 그게 없다면 특별한 백그라운드라도 있든가 그도 아니면 결국 스스로의 노동력과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우선 그것을 다소 무리하게 쓰는 방법,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갈취하고 착취하는 것이 방법이 된다고, 따라서 생활의 질은 나중 문제라고 얘기해주었다. 


실망한 표정이었다, 젊은이는. 


그래서 한 번 더 침을 놓았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자네가 태어나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갈취하고 착취할 지라도 돈이 되기만 한다면 어디든 달려갔고 무엇이든 하고자 안달이었다네. 


그야말로 사실이고 이른바 팩트이다. 



예전의 대한민국을 떠올려보다



말을 하다 보니 문득 스쳐가는 옛일이 있다. 1980년대 초반, 정확하게 1982년의 일이다. 


나 호호당은 그 해 은행에 입사해서 영업점에 배치되었고 그곳 외환업무 팀에서 수출환어음 매입, 즉 네고(Nego)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한 섬유봉제업체의 공장 현장에 실사를 나가는 일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 5시였다. 상사의 지시인 즉 정말로 24시간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졸지에 새벽 3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엄청 투덜거리면서 생전 처음 가보지 않은 컴컴한 길에 나서야 했다. 


그 해 초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1982년 초까지 이른바 통행금지란 것이 있어서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진 통행이 금지되었다는 사실. 길을 가다 경찰에게 잡히면 새벽 통금 해제 때까지 파출소 유치장 신세였다. 


공장 안에 들어갔더니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엄청나게 요란했고 수백명의 여공들이 뿜어낸 체온과 땀으로 인해 공장 내부는 늦가을인데도 희부연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순간 감동을 받았다, 이 새벽에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들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구나, 정말이지 그건 감동이었다. 


한 여공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더니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시간이 아니라 뽑아낸 수량으로 돈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야근수당을 챙길 수 있으니 밤 시간 근무가 더 즐겁다는 그 분의 대답이었다. 놀면 뭐 해유, 돈 벌어야지 하던 그 힘찬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3교대가 아니었다. 12 시간씩 2교대였다.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일하고 교대하는 방식인데 야간 근무엔 수당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일하는 도중에 1시간 식사시간이 있지만 더 벌기 위해 몸만 괜찮으면 간식으로 때운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는 당시엔 와이셔츠, 최근엔 드레스셔츠라고 하는 의류제품을 만들어서 해외로 수출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의 수출신용장과 환어음 매입이 바로 내 담당이었기에 있었던 일이다. 


12시간 노동만 해도 중노동이다, 뿐만 아니라 뽑아낸 수량으로 돈을 버는 ‘성과시스템’이었기에 참으로 극심한 노동이었다. 하지만 그 여공들은 돈 버는 재미에 스스로를 사정없이 착취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중노동 정도는 아주 흔한 일, 일종의 풍토였다. 


나 호호당 역시 근무시간이 과다하긴 마찬가지였다. 은행 영업점 외환계에서 일하다보니 퇴근시간은 주로 밤 11시였다. 아침 9시 반부터 시작해서 밤 11시까지였으니 그 또한 거의 12시간 근무였다. 물론 야근수당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저녁식사는 근처 한식당에 가서 냉면이나 육개장 정도는 사인만 하면 먹을 수 있었다. 


사실 나 호호당이 은행에 들어간 이유는 오후 4시 반이면 셔터 내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히게 좋은 직장, 이른바 워라벨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정작 들어가서 보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이거 힘들어서 안 되겠네, 좀 더 편한 직장으로 옮겨야 하겠네 하고 생각했지만 월급 타는 재미, 또 동료 직원들과의 끈끈한 정이 생긴 탓에 그냥 지내기로 했다. 한편으로 직장 옮기는 것이 성가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풍토를 말하면 사무직 직원, 이른바 화이트칼라는 장차 출세를 할 몸이니 야근수당 따윈 당연히 받지 않아야 하고 미래가 없는 생산직 종사자, 소위 블루칼라는 야근수당을 받는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가소롭다. 


게다가 야근수당은 없어도 상대하는 업체로부터 명절을 비롯해서 때때로 돈 봉투를 받거나 고급 술집에서 접대를 받곤 했기에 충분히 야근수당을 대체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였기에 그렇게 받는 돈 봉투는 정말 짭짤했다. 그 돈으로 젊은 수컷답게 안마시술소도 가고 퇴폐이발소도 가고 동료들과 술도 먹고 때론 책도 살 수 있었으니 나름 충분히 즐거운 시절이었다. 


옛일에 대한 회고는 이 정도 하기로 한다. 



대한민국은 자기착취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



하고자 하는 말은 대한민국 자체가 자기착취를 통해 자본을 형성하고 기술을 발전시켜온 대표적인 나라였다는 얘기이다. 그 덕분에 오늘에 이르러 세계 유수의 산업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문제는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나라 자체는 그런 식으로 독하게 발전하고 성장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빈부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졌고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와는 또 다른 오늘날의 문제



최근 젊은이들을 보면 돈을 모아서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돈은 없어도 ‘소확행’을 즐긴다. 하지만 대우가 괜찮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일자리는 하늘에 별 따기 식이 되고 있어 괴로워한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평균적인 삶의 기대치 역시 덩달아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그런 기대치를 어느 정도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졌다. 이게 바로 최근 젊은이들의 비극이다. 이에 반해 예전에는 기대 자체가 없었다, 그저 어느 정도의 생활만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쩔 수 없어서 창업하는 사람들



에서 얘기한 그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젊은이 역시 어쩌다보니 어쩔 수 없이 창업을 하게 된 경우였다. 이를 두고 나는 창업을 당했다고 표현한다. 


창업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괜찮은 직장을 얻지 못한 젊은 층이고 또 하나는 중년에 퇴직을 한 경우이다. 직장에서 밀려나다 보니 놀 순 없고 창업을 한 것이다. 


어쩌다가 창업을 한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장차 사업의 성공은 둘째 치고 서바이벌 자체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든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물론 나 호호당 역시 돈벌이에 성공한 사람은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하긴 좀 좀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직장 생활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해왔기에 얻은 경험, 여기에 더해서 그간 상담해오는 과정에서 취부에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무수히 들어왔기에 그런 점도 있다. 


글이 길어졌으니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오늘 글의 핵심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 가진 것 없이 돈을 벌려면 자기착취가 우선이란 얘기를 했다. 다음 글에서 계속해서 돈 버는 방법에 관한 나머지 얘기들을 들려드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