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본 프랑스 욘 강의 마을 풍경이다. 저녁 놀을 받아 밝게 빛나는 경치가 마음에 들어서 화면을 정지해놓고 그렸다. 욘 강은  센 강의 지류라 한다. 최근에 올린 오세르의 경치에서 오세르(auxerre) 역시 욘 강변에 있다. 색을 강하게 칠해서 놀의 느낌을 살려보았다.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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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부 잔 다르크가 활약했던 오를레앙 근처의 도시 블루아에 있는 쌍 니콜라 교회이다. 유럽 근대 건축은 확실히 교회 건축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됨을 느낀다. 햇빛이 오른 쪽에 있다, 교회가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각은 아침 무렵임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첨탑, 스파이어는 유난히 날씬하고 뾰족하다. 펜싱의 검날같은 느낌이다. 그 인상에 끌려 그려보았다. 즐겨주시길...

처음 있는 일

 

 

상담오신 분 중에 자신의 운세 바닥이 언제였는지를 사실상 정확하게 맞히신 분이 있었다. 그간의 많은 상담 중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분의 말씀인 즉 그간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과 최근의 동영상 강좌를 보다 보니 ‘통밥’으로 얼추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대단하시다고 선뜻 인정을 해주었다.

 

운세의 최저점이자 바닥, 반대로 말하면 새로운 60년 순환의 시작점은 立春(입춘)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느끼기로 가장 힘든 시점은 그로부터 7.5년이 흐른 춘분의 시점이 된다. 그 분은 자신의 춘분 시점을 정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에 나는 입춘 바닥은 사실 그로부터 7.5년 전이라고 나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춘분, 각성의 때

 

 

이처럼 가장 암울하고 힘들다고 느끼는 시점은 60년 순환에 있어 그 시작점인 입춘이 아니라 그로부터 7년 반이 흐른 春分(춘분)이 된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면서 그 이후부턴 낮이 더 길어지는 시점이다. 바로 이때가 고통스런 覺醒(각성)의 때가 된다. 각성이 무엇인가? 어떤 잘못이나 사실 등을 깨달아서 알게 됨을 말한다. 잘못한 것을 깨달아서 알게 될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아,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내가 너무 놀고 있었구나, 그간 내가 너무 세상을 몰랐구나! 등등 뒤늦은 한탄, 즉 晩時之歎(만시지탄)을 한다.

 

각성 또한 하나의 빛으로부터 온다. 어느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줄기 빛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통찰을 유발케 하고 그것은 마침내 각성으로 이어진다. 그게 바로 춘분의 빛이다. 춘분이 지나면 밤 시간보다 낮 시간이 길어지기에 그런 것이다.

 

60년에 걸친 순환에 있어 춘분의 때를 지내보지 않았거나 또는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사람은 그 고통과 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나 호호당이 겪었던 춘분의 기억

 

 

이에 나 호호당 개인의 경험을 예로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나 호호당은 1955년생인데 1997년이 입춘 바닥이었고 이에 2004년, 내 나이 마흔아홉에 춘분의 때를 보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당시의 고통과 각성을 기억한다, 몸에 새겼던 것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한심하고 못났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유복한 환경에 태어나 명문의 고등학교와 명문 대학을 나왔고 군 복무 후엔 급여도 좋고 근무환경도 어렵지 않은 은행에서 일했다. 어쩌다 보니 부잣집 사위가 된 바람에 내가 장만한 아파트 한 채, 아내가 받아온 아파트 2채, 그 바람에 1990년 무렵엔 강남 서초에 아파트만 3채, 거기에 상당한 주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윤택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늘 인기가 많았고 상도 여러 번 탔다. 직장생활하면서는 모 신문사가 주최하는 사진전에도 응모해서 상도 받았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교양도 풍부했고 한문에 밝아서 중국 원전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며 중국어회화에도 능했다. 아울러 영어 회화도 1980년대 당시로선 일류 축에 속했다. 나름 엘리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 호호당에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사람과 세상을 밑으로 깔고 보는 교만함이 내 속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시건방진 태도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5년 전인 1992년, 小寒(소한)의 때부터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고 이에 12년이 흘러 春分(춘분)의 운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월세 집에 틀어 박혀 보내는 신세, 망해도 너무 심하게 망한 零落(영락)의 신세가 되어 있었다.

 

서른일곱부터 풍상의 세월 12년을 겪다보니 어언 마흔아홉, 머리가 허옇게 세어가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이 어느새 홍안이 백발 되고 상전이 벽해로 변해있었다. 내 딴엔 똑똑한 줄 알았더니 천만의 말씀, 정말로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는 한스러움만 가슴 가득 밀려왔다.

 

건강도 엉망이었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댄 탓에 호흡곤란의 천식으로 고생을 해야 했고 체중 또한 숨쉬기가 거북할 정도로 불어 있었다.

 

특히 괴로웠던 것은 그 세월 사이에 잘 될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많았건만 그 모두를 시시하다 여겨서 외면하고 어쩌면 그렇게 망하는 길만 찾아서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悔恨(회한)이었다.

 

이에 스스로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해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쯤에서 세상에서 퇴장하고픈 마음이었지만 그 또한 쉬운 일도 아니고 게다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살아갈 날 또한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내 운세 흐름 상 춘분인 2004년 여름부터 다음 해 가을까지 줄곧 스스로를 自責(자책)하면서 보냈다.

 

 

각성한 결과 얻게 된 새로운 마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 작정을 했다, 앞날을 살아가면서 세상 그 누구라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나의 선생님으로 삼을 것이며 작은 기회라도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붙잡아 보겠다. 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으면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각오였다.

 

이게 나 호호당이 운명의 춘분을 보내면서 가지게 된 새로운 마음 자세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바로 그 무렵부터 나 호호당이 발견해낸 운명의 법칙인 자연순환운명학의 연구가 크게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론의 모델링이 되지 않아 포기해야 하는가 싶은 좌절감이 여러 차례 나를 괴롭혀왔지만 그럴 때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돌차구가 열리고 또 열리곤 했다. 이에 나는 2014년 어느 날에 ‘자연순환운명학’이란 초유의 학문이 세상에 등장했다는 글까지 썼다. 그 또한 10년의 노력이었다.

 

이렇게 나 호호당은 60년 순환에 있어 춘분의 때를 보냈다. 처절할 정도로 각성을 하고 반성을 했더니 얼마 가지 않아 큰 報償(보상)이 주어졌다.

 

 

각성이 가져다 준 報償

 

 

2007년 바닥으로부터 10년이 흐른 淸明(청명)의 때가 되자 가진 것은 없어도 그저 밥 먹고 숨 쉬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게 되었다. 매일 변하는 날씨와 하늘만 바라봐도 행복감을 느꼈다.

 

물론 늘 돈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살아있음 그 자체만으로 좋았다. 마치 몸속에서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큰 병 앓고 나서 내 몸 마음대로 쓰고 다니는 것만 해도 즐거운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세상에 살아있는 그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내 스스로 지은 호를 生命(생명))을 애호하고 세상의 모든 모습 즉 色(색)을 애호한다는 의미에서 호생하고 호색한 사람, 줄여서 好好堂(호호당)이라 지었다.

 

나 호호당의 얘기는 이 정도까지만 하겠다. 운명의 순환 속에서 춘분의 때, 입춘 바닥으로부터 7.5년이 경과했을 때 겪는 이런 상황은 사람에 따라, 즉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처지, 나이에 따라 무수히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려운 가운데 각성을 하게 된다.

 

 

되돌아본 우리 대한민국의 춘분

 

 

우리 대한민국 역시 1964년이 국운의 입춘이었기에 1972년 무렵이 춘분이었다. 사람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곤궁했고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일상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모든 것을 다 걸었고 유신독재를 단행한 상태였다.

 

당시 유행하던 말은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 안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으니 우리 스스로 自己卑下(자기비하)가 극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우리의 지식인들은 낙담했고 또 통분했다. 이에 김지하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란 시를 씀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표출했던 것은 1975년이었다.

 

하지만 훗날에 보니 박정희도 옳았고 김지하도 옳았다. 한 사람은 세계 최빈국의 대한민국을 강철과 같은 의지로서 경제발전의 기틀을 놓았고 또 한 사람은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당시 나 호호당은 대학생이랍시고 박정희를 매우 증오했었지만 말이다.

 

 

기적을 만들어낸 우리 대한민국

 

 

며칠 전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우리 영화의 빛나는 금자탑을 세웠다. 1992년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개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우려했었으나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 그로부터 우리 영화는 크게 발전해왔고 마침내 저런 큰 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 우리는 개방을 통해 성공을 거듭해왔기에 개방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그 말이 새삼 기억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FTA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지지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하지만 그 분 역시 크게 옳았다.

 

돌이켜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40대 세대만 해도 그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겪지 않았기에 그렇다.

 

 

새로운 국운의 순환을 앞에 두고

 

 

이제 앞으로 5년 후가 되면 또 한 번 국운의 입춘 바닥이다. 그렇기에 올 해부터 많은 것이 어려워지고 새로운 엄중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32년이 되면 시름 깊은 가운데 또 한 번의 큰 覺醒(각성)을 하게 될 것이다.

 

2032년은 앞으로 13년, 따라서 나 호호당은 아마도 그 무렵까진 살아있을 공산이 크다. 그러니 그 무렵에 가서 우리가 또 어떤 깨우침을 얻게 될 것인지 지켜볼 수 있겠다. 각성의 알맹이를 보면 그 속에 향후의 미래가 또 보일 것이니 말이다.

어제 올린 프랑스 오세르의 생 제르만 수도원의 풍경 왼쪽에 있는 생 에티엔 대성당의 위풍이다. 언덕 위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저 건물은 그냥 건물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겐 그 자체로서 천국의 모습, 저 곳으로 가서 들어가기만 하면 하늘나라였을 것 같다. 사실 나는 그런 종교적 몰입감을 깊게 이해하진 못한다. 하지만 대충은 알 것도 같다. 토요일 새벽에 그렸는데 조금은 더운, 아니 화창한 초여름의 느낌을 그림에 넣었다. 계절 감각인 것이다. 즐겨주시길...오늘 밤에 글을 써야지 싶다. 좌골신경통이 며칠 사이에 많이 좋아지고 있어 기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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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 변환이란 것이 있다. 빛이나 소리, 진동과 관련한 분야에선 절대적인 수학지식으로서 오늘날 기술 중에 쓰이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조제프 푸리에”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의 위대한 업적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오세르(Auxerre)라고 하는 작은 도시가 있다. 수십 개의 성당이 있어 종교적 도시로도 알려진 곳이다. 조제프 푸리에는 바로 이곳 오세르에서 태어났다. 위키를 검색하다가 그의 고향이 오세르란 것을 알게 되고 그러다보니 오세르 풍경을 살펴보게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강변 도시임을 알았다.

그림 속의 성당은 생 제르망 수도원이다. 펜을 가볍게 쥐고 빠르게 그리고 경쾌하게 칠을 했다. 즐겨주시길...




프랑스 북부 블ㅡ타뉴 지방의 중세 성벽도시, 영국 해협의 맞은 편에 위치해있다. 한 때 독립공화국임을 선언한 적도 있으며 해적들의 본거지였다. 해적공화국이었던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영국이 바다를 장악해나갈 때 프랑스 정부는 이곳의 해적들에게 정식으로 해적질 면허를 주어 영국의 해상활동을 방해했다. 국왕의 면허가 있는 해적선을 사략선, 즉 코르세어라 했다.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의 풍경은 상당히 이국적이다. 역광의 성벽과 건물들을 그려보았다. 즐겨주시길...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말

 

 

“가난이 문을 두드리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 이런 재치 넘치는 말,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우연한 계기에 나는 이 말이 아일랜드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처음 쓴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아니었다. 영국 속담이란 말도 있고 독일의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아프리카의 오래된 속담이란 주장도 있다. 어쩐지 아프리카 쪽이 오리지널이 아닐는지 싶다.

 

가난이 문을 두드리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 영어 표현으론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버전이 있다.

 

When poverty comes in at the door, love flies out of the window.

When Poverty Knocks at the Door, Love flies out of the Window.

 

100퍼센트 맞는 말이라 하긴 그렇지만 거의 그런 것 같다.

 

 

시대 차이, 세대 차이

 

 

집안에 가난이 찾아들면 유교적 관념을 지녔던 예전 어머니들은 애정은 없어도 자식들 보며 참고 살았지만 최근의 부부들은 곤궁해지면 이혼할 확률이 무척 높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난해지면 애정은 사라진다, 다만 예전과 지금의 차이는 그냥 참고 견디며 한 세상 사느냐 아니면 이혼하느냐 정도라 하겠다.

 

 

물 건너 세상의 풍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 건너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엔 이혼을 하게 되면 결국 돈 문제가 되니 아예 결혼식이나 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동거하는 커플이 거의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낳더라도 결혼신고는 하지 않는다 한다. 우리로 치면 사생아가 되는 셈인데 그쪽에선 별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또 서구의 부자들은 결혼할 당시부터 변호사를 통해 이혼할 경우의 재산 문제에 대해 사전에 합의해둔다고 한다. 이혼이 금기가 아닌 탓에 일종의 사전 출구전략인 셈이다.

 

최근 뉴질랜드에서 온 제자가 전해준 새로운 얘기인 즉, 뉴질랜드에선 남녀가 만나서 사귀더라도 이름을 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아니면 가명이나 애칭을 사용한다고 한다. 언제든 결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를 낳아도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동거할지언정 결혼을 하지 않는 풍토는 주로 북유럽 그리고 미국의 경우 남부의 감리교 지역을 제외한 개신교 지역에서 그렇다. 로마 가톨릭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선 여전히 결혼을 하는 모양이다.

 

 

이혼 문제로 국민투표까지 했던 이탈리아

 

 

놀랍게도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이탈리아는 1974년에 이혼을 합법화할 것인가를 놓고 거국적 행사인 ‘국민투표’까지 단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투표는 거의 전 유권자가 참여할 정도로 대단한 이슈였으며 투표 결과 이혼 합법화에 찬성하는 이가 59.26%, 합법화 반대가 40.74%가 나와서 결국 이혼이 합법화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투표 문항이 적절했느냐를 놓고서 나중에도 엄청난 사회적 물의가 있었으며 가톨릭 종교 지도자들은 말세라고 하면서 개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출처: wikipedia, "1974 Italian divorce referendum")

 

우리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부터 그러니까 121년 전에 이미 근대적 형태의 이혼제도가 도입된 것에 비하면 가톨릭 전통의 이탈리아는 정말 대단하다.

 

 

흔들리는 있는 결혼 제도

 

 

우리의 경우 먹고 살기가 팍팍해진 최근에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른바 非婚(비혼)이 이슈가 되고 있지만 멀지 않아 우리도 어쩌면 서구의 풍조를 따라갈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결혼이란 법적 제도가 맹렬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 호호당 생각하기로 우리도 동거를 통해 낳은 아이가 사생아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그나마 출산율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이혼소송은 결국 돈 싸움

 

 

나 호호당은 법대를 나온 까닭에 대학 동기 중엔 법조인이나 변호사를 했거나 하고 있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꽤 오래 전 변호사 사무실을 하는 한 친구로부터 “이혼소송이란 결국 돈 싸움이야 딴 거 없어” 하는 말을 듣고 약간 놀랐던 적이 있다. 지금에서야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인데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이혼소송은 결국 돈 싸움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남편의 외도 때문에 이혼 소송을 고려하는 여성들이 많다. 그런데 소송의 동기인 즉 억울하고 원통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나는 “민사 소송은 결국 돈 싸움입니다, 법이 부인의 억울 원통함을 풀어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금전적인 보상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라고 말해준다.

 

이처럼 상담하다 보면 부부의 이혼 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혼의 이유를 보면 물론 불륜도 많지만 불륜 자체가 최종적인 동기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애정이 식었다 해도 돈 문제만 없으면 그냥저냥 지내다가도 결국 돈 문제, 형편이 어려워지면 이혼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부부가 갈라설 무렵이 되면 부부가 잘 살고 있던 예전보다 금전적으로 어려워진 경우가 많아서 더 치열한 소송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남편의 수입이 너무 없어서 아예 위자료를 포기하고 합의 이혼하는 딱한 여성들도 많다.

 

상담을 통한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대부분의 경우 이혼하는 시점은 부부 모두 운세가 한창 내리막길을 걷고 있거나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바닥을 전후한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이 입춘 바닥을 보내고 이제 운명의 여름, 즉 입춘 바닥에서 15년이 흐른 이후에 이혼을 하는 경우 이혼한 다음에 더 나은 삶을 사는 경우도 꽤나 된다는 점이다.

 

 

노년의 이혼은 참으로 문제, 특히 남성에게

 

 

그간의 상담경험과 연구에 의하면 이혼이 최악이 되는 경우는 중년의 이혼보다도 60대 이후의 이혼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혼은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운세 순환이 내리막일 때 하게 된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 운이 내리막이라면 장차 수입이나 직업 사정도 어려워질 것이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돈 문제에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특히 그 당사자가 남성인 경우 상당히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돈만 충분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새롭게 결혼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나이든 여성의 경우 이혼을 해도 예컨대 저임금이긴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가 남자들보다 나은 것 같고, 게다가 자녀의 집안일을 돌보면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정말 어려워진다.

 

 

돈과 행복의 관계

 

 

돈 얘기가 나와서 얘기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이 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다. 하지만 행복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타고난 자질 즉 건강이나 재주, 취미나 관심 등과 더불어 타고난 품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란 것은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난 문제이다.

 

(가령 나 호호당의 경우 호기심이 많아서 늘 연구하고 궁리하는 것이 있어 전혀 심심하지가 않다. 게다가 그림 재주가 있어서 늘 그리면서 즐긴다. 그런 까닭에 나 호호당은 스스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은 이처럼 돈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하지만 불행은 돈이 없으면 바로 닥친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의 취미나 관심, 또는 숨겨진 재능 같은 것을 시험해볼 시간이나 기회가 돈벌이 때문에 원천 봉쇄된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하다.

 

그렇기에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불행을 피하는 방파제 또는 방화벽 역할은 분명히 해준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돈이 사라지면 즉 가난이 닥치면 그런 까닭에 사랑은 창문을 통해 날아간다. 가난이 닥치면 사랑만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건강도 행복도 나아가서 삶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다시 얘기지만 돈이 반드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진 않겠지만 우리의 삶을 받쳐주는 필수 요건이고 바탕인 것이다.

 

 

돈, 젊음, 그리고 미모

 

 

돈 얘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다. 젊음과 美貌(미모)이다.

 

사실 젊음과 미모 이 두 가지는 남녀 불문하고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대단한 財貨(재화)라 하겠다. 특히 여성에게 미모는 절대적인 무기이다. 모두가 미모를 가진 것은 아니기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하지만 젊음은 한 때 누구나 가지는 것, 그런 점에서 적어도 한 가지만은 평등하다. 물론 최근엔 돈만 있으면 성형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미모도 소유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긴 하다. 미모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젊음이나 미모는 세월과 함께 감가상각이 이루어지는 재화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면 돈만 남는다. 심지어 돈은 이자가 붙으니 감가상각과는 거리가 있다. 불편한 진실이다. (물론 돈이 행복을 살 순 없다는 점 또한 다시 한 번 강조해둔다.)

 

최근 이상하게도 이혼이나 결별과 관련된 상담이 잦다. 그런 탓에 이 글을 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이란 게 결국 변하더라고요. 몇 년 전에 상담하러 오신 분이 했던 말이다. 여운이 많이 남았고 그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오랜 사색 끝에 미처 정답을 얻진 못했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과 욕망, 특히 에로틱한 욕망은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짧다는 생각. 사랑은 좀처럼 변하지 않지만 욕망은 그렇지가 않다는 생각.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내리사랑, 즉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간해서 변하지 않지만 커플 간의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도 판별하기 어렵다는 생각, 또 순수한 사랑이라 해도 가난이 닥쳐오면 시험을 받게 된다는 생각 등이 그것이다. 더 생각해볼 것이 많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일을 할때에 이것이 성공할지 아닐지 누구나 궁금해한다. 그리고 나 호호당은 이것에 대해 매우 간결하고도 정확한 판별법을 알고 있다.


오늘은 어떤 일에 대해 단기적인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강의해 보았다.

同病相憐(동병상련)



며칠 꽤나 날이 덥더니 오늘은 비가 온다. 새벽녘에 제법 굵게 내리더니 오후 들어 부슬비로 내리고 있다. 덕분에 날이 식어서 좋다. 지난주에도 글을 거의 올리지 못했다. 좌골신경통 때문이다. 서 있거나 누워있으면 괜찮은데 앉았으면 통증이 온다. 그 바람에 글을 쓰기가 어려워서 지난 주 내내 쓰다 말고 쓰다 말고를 반복해야 했다. 답답한 노릇이다.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면 디스크 시술에 관한 광고성 프로그램이 저렇게나 많았던가 싶다. 온통 어깨 통증, 허리와 다리 통증에 관한 것이다. 역시 남의 일은 내 알 바가 아닌 것이어서 종전까진 잽싸게 채널을 돌렸던 것이 정작 내 일이 되다 보니 새삼 눈에 들어온다. 


작업실은 방이 두 개, 수묵화를 그리던 건너 방의 책상을 치우고 매트리스를 깔았다. 앉았다가 통증이 시작되면 일어나서 서성대거나 아니면 건너 방으로 가서 누워서 책을 본다. 



좌골신경통 때문에 시작된 또 하나의 여행



러다 보니 어쩌다가 또 하나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가 남긴 무려 14권짜리 대작 “역사의 연구”를 읽는 일이다. 1970년대에 번역 출간된 책인데, 책 한 권당 면수만 해도 6백 페이지, 그러니 대략 8천 페이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40대 초반 처음 접했는데 너무 방대한 내용이라 미처 다 읽진 못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읽어보니 무협소설 만큼이나 흥미진진, 재미가 있다. 40대 중반에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남긴 “서양의 몰락”이란 책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역사의 연구”에 푹 빠졌다. 풍덩. 


인류 역사의 수많은 케이스들을 다루고 있어 미처 잘 모르는 분야도 여전히 있지만 이젠 그런대로 다른 책이나 위키를 뒤지지 않고서도 술술 읽혀지니 그간 역사에 대한 내 시야가 많이 넓어진 까닭이 아닌가 싶다. 현재 제4권을 읽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토인비의 저 방대한 연구가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 흔히 “도전과 응전”이란 말로 축약된 저 주제는 사실 나 호호당이 연구해 온 주제, 운명의 순환과 그 법칙에 관한 것과 그 본질에 있어 전적으로 동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번 독서 대장정이 더 흥미롭다. 


오늘의 글은 바로 그 주제에 관한 것이다. 



편하게 살면 나약해지는 것일까?



편하게 살다보면 나약해진다.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얘기를 시작해보자. 


상식적으로 대충 맞는 말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따져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무려 14권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를 통해 다루고 있는 주제 역시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하겠다. 


토인비는 자신의 저서 제2부 ‘문명의 발생’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인류 역사의 방대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살펴가며 집요하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또 검증하고 있다. 


토인비의 연구에 따르면 문명의 발생 자체가 인류 투쟁의 산물이다. 문명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우호적인 환경에서 탄생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고 척박하고 거친 환경 속에서 더 잘 생겨나고 성공적이더라 하는 얘기이다. 


편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힘든 逆境(역경)에서 발전이 있다는 이 주장은 인류사의 거대한 흐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그러니 편하게 살다 보면 나약해진다는 말은 맞는 말이라 해도 무방하다. 



樂園(낙원)에서의 삶은 없다



당연히 우리 모두 누구 할 것 없이 안락하고 편하게 살고자 한다. 고생하고픈 이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안일하게 살다보면 나약해지고 퇴보한다. 그 결과 이른바 망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편히 살고픈 우리의 바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긴 하겠으나 편히 살다보면 나약해진다는 점에서 꽤나 矛盾(모순)된 욕망이라 하겠다. 


앞의 얘기를 다시 해보면 우리는 누구나 에덴동산이나 파라다이스 또는 극락정토와 같은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은 실낙원 즉 Paradise Lost 이고 지저분한 穢土(예토)의 세상이다. 


토인비의 말을 빌려 얘기하면 인류의 문명 자체가 환경과 주어진 여건에 대한 부단한 즉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 말을 조금 바꿔서 얘기하면 애초부터 환경이 풍족하고 살기에 좋았다면 아예 문명이란 것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은 마치 자연 속에서 식물처럼 존재하고 있을 거란 얘기이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고단한 것이어서



따라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어쨌거나 길고 긴 투쟁과 고생으로 점철되지 않을 수 없다. 다. 자연 환경과의 투쟁만이 아니라 인간 집단 간의 투쟁, 아울러 개개인간의 치열한 상호 경쟁 혹은 투쟁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고생일 수밖에 없다. 다만 운명의 순환이란 것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좀 더 힘들고 반대로 조금은 더 수월한 때가 갈마드는 것일 뿐이다. 


바람이 있고 욕망이 있어서 우리는 어떤 목표를 세운다. 그런데 그 목표란 건 현재의 상태보다 더 높은 단계이기에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이 들 수밖에. 


상담하다 보면 흔히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정말이지 제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전혀 상상도 하지 못 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을 겪지 않는 인생은 없다. 아직 겪지 않았을 뿐이지 누구나 한 번은 그런 어려운 처지를 겪게 된다. 평생을 두고 無事安逸(무사안일)하고 乘勝長驅(승승장구)하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반대로 평생을 두고 막히기만 하는 답답한 삶도 없다. 한 때 그럴 뿐이다.)



정말로 잘 살다간 어느 할머니



며칠 전 우리 젊은 세대들이 잘 모르는 ‘도리스 데이’란 이름의 미국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전성기를 보낸 미국의 유명 여가수였다. 우리로 치면 동백아가씨의 이미자 선생님과 같은 분이다. 


1922년 4월 3일에 태어나 며칠 전에 돌아가셨으니 무려 97년 하고도 한 달을 살다간 셈이다. 


이 분의 사주를 검토해보면 최고의 운에 세상을 떠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태어날 때 받은 생명의 힘을 남김없이 알뜰하게 소진하고 세상을 떠난 분이란 생각이 든다. 


도리스 데이 할머니 역시 유명 가수로서 많은 영광을 누렸지만 그에 못하지 않게 숱한 좌절과 굴욕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냥 쭉 편하게 好衣好食(호의호식)한 삶은 절대 아니었다. 인생 한 번 살다 가려면 무수한 고비를 만나기 마련이고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잘 살려면 물건을 아끼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말은 듣게 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한 번 살다가는 인생, 스스로를 아끼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 번 채어날 때 받은 자신의 삶을 알뜰하게 잘 쓰다가 가야한다는 얘기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羽化登仙(우화등선)한 할머니



그런 면에서 도리스 데이 할머니의 삶이야말로 모범이고 典型(전형)이 아닌가 한다. 그간 구글이나 위키를 통해 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애를 연구 검토해 보았지만 이 분처럼 잘 살다가 떠난 사람은 보지 못했다.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이 분의 경우 그 어떤 통증이나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단정을 한다. 그냥 노화로 인해 숨쉬기가 거북해져서 돌아가셨을 것으로 본다. 


살다보면 실망도 하고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게도 된다. 이에 화를 내기도 하고 역정을 부리기도 하겠지만 그게 다 손해란 사실, 그래본 들 그게 모두 아까운 내 생명력을 낭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양반 역시 한 때 그런 세월도 겪었지만 끝내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다루었기에 저렇게 살다 갔을 것으로 여긴다. 


완전연소의 삶을 살다간 셈이니 죽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신선이 되어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돌아간 羽化登仙(우화등선)의 삶을 살다간 것이 아닐까 싶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엔 영원히 살 것 같아서 돈과 명예를 얻고자 세월을 보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결국 내 삶이란 얘기였다. 


오늘의 글 역시 오후 3시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 시각이 새벽 3시 40분이다. 계속해서 의자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텔레비전에선 류현진이가 안타를 매회 맞아가면서도 실점하지 않고 용케 잘 던져가고 있다.





인생에서 찾아오는 기회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있다. 혹자는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고, 혹자는 위기가 곧 기회라고도 한다.


운명을 오랫동안 연구한 나, 호호당은 인생에 2가지의 기회가 한번씩 온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시작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기회이며, 또 하나는 반드시 실패하는 기회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며 연구해본 결과 틀림이 없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하여 강의해 보았다.